병조 참의 윤면동이 구언에 응답하는 상소문
병조 참의 윤면동(尹冕東)이 전지(傳旨)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대저 융정(戎政)의 근본은 인재를 기용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연전(年前)에 금군(禁軍)의 기사(騎士)를 취재(取才)하는 법을 새로 설치하였는데, 갑옷을 입은 무사(武士)들이 거개 모두 좋아서 날뛰면서 한번 이 추천(推薦)에 들기만 하면 순서에 따라 승천(升遷)하여 초사(初仕)를 앉아서 점유할 수 있다고 여겨 흐뭇해 하면서 실가(室家)에서 서로 경하(慶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구(裝具)를 준비하고 칼을 사서 다투어 선의(鮮衣)를 입고 노마(駑馬)에 채찍을 가하면서 〈무예를 연마하느라고〉 가업(家業)이 탕잔(蕩殘)되는 것도 헤아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도 못되어 법이 처음만 같지 못해짐에 따라 힘이 있는 사람은 겨를 까불어내듯이 선발되어 앞에 나가고 후원이 적은 사람은 나뭇단이 밑에 눌리듯이 아래에 있게 되어, 하나는 혈심(血心)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고 하나는 눈물을 머금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의장(衣裝)이 남루해도 다시 지을 가망이 없고 기계(器械)가 낡아도 보수(補修)할 방도가 없게 되며, 머무르려 해도 무익하고 물러가려 해도 할 수가 없는 것이 처자(妻子)는 울부짖고 이웃 사람들이 비웃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이미 조가(朝家)에서 순서대로 승천(升遷)시키겠다고 허락해놓고서 이제는 도리어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실신(失信)하는 데로 귀결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개탄스런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에는 성(城) 안팎의 산곽(山郭)이나 교허(郊墟) 가운데 조금 넓은 곳이 있으면 모두가 사장(射場) 아닌 곳이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리로 가는 것을 삼가 피하였었는데, 몇 년 사이에 이런 풍조가 없어져버려 정곡(正鵠)521) 을 걸어놓거나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활을 쏘는〉 사람을 보기가 드물어졌으며, 활과 화살 만드는 것을 업(業)으로 하고 있는 사람은 이를 만들어 쌓아만 놓고 팔 길이 없으니, 이는 좋은 소식이 아니라 바로 〈국력이〉 점점 약해져가는 징조인 것입니다. 참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습니다.
한결같이 선후(先後)의 순서에만 따르려 한다면, 돌아보건대, 그 가운데 또한 어찌 지처(地處)와 재망(才望)이 권장하여 기용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격례(格例)에 구애되어 멀리 여러 사람들의 뒤로 기약하게 된다면, 이는 실로 국가에서 인재의 기용을 급급히 하는 정사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재지(才地)를 가려서 취하려 하면 또 참으로 쓸 만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지 기필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격례(格例)가 한번 동요되면 앞 사람은 끌어당기고 뒤에서는 뛰어넘게 되어, 궁한 사람은 더욱 궁해지고 배제당하는 사람은 더욱 배제되게 되어 공평성을 잃게 되는 것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게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권(銓權)을 잡고 있는 사람이 마음을 공평하게 하고 안목을 밝혀 한번의 정사(政事)에서는 재지(才地)가 있는 사람을 기용하고 한번의 정사에서는 선후의 순서대로 기용하여 서로 교대로 배의(排擬)하는 것을 마치 호대(互對)하는 것처럼 하게 하고 이어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게 한다면, 승진도 일방적인 승진이 없게 되고 침체도 오래 침체되는 것이 없게 되어 피차 교대로 나오게 됨에 따라 어긋나지 않고 아울러 행해지게 될 것이니, 거의 인심을 위열(慰悅)시키고 인재를 작흥(作興)시키는 한 가지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서(關西) 일로(一路)는 곧 우리 나라의 문호(門戶)로 요계(遼葪)에 근접되어 있어 적로(賊路)의 인후(咽喉)에 해당이 되는데, 그곳 사람들은 무용(武勇)이 뛰어나 침착하고 굳세고 기사(騎射)를 잘하고 화식(華飾)을 즐겨하여 연·조(燕趙)의 자제(子弟)들에게 견줄 수 있습니다. 잘만 기용한다면 은연중 일면(一面)의 장성(長城)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옛날부터 조정에서 배양하여 위로하고 의지하여 왔습니다. 그리하여 항오(行伍)의 천졸(賤卒)에서부터 발탁되어 열곤(列閫)에까지 이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격려하는 방법과 흥기시키는 효험이 자못 볼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근래 이래는 모두 변하여 오건(烏巾)에 청금(靑衿)을 입는 부류가 되어버려서 활을 당기는 사람을 향리(鄕里)에서 천하게 여기고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을 족당(族黨)들이 비웃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부형(父兄)들이 못하게 꾸짖고 처자(妻子)가 울면서 만류하기까지 합니다. 평양(平壤)에서 의주[灣上]에 이르기까지 하루 종일 길을 가도 화살을 가지고 있는 것과 표적을 향하여 쏘는 것을 볼 수 없고 글읽는 소리만 귀에 가득히 들린다고 하니,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풍증(馮拯)522) 의 부시(賦詩)로도 오히려 오랑캐를 물리치지 못하였는데, 이 무리들이 글을 읽어 장차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그 근본을 세밀히 논하여 본다면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이 또한 조정에서 야박하게 대우하고 기용을 치우치게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렵게 고생끝에 과거(科擧)에 올라서 온갖 신고(辛苦)를 감수하면서 벼슬자리를 구하여 요행히 얻었다 할지라도 수십 년 동안 근로(勤勞)하는 업적을 쌓아 봐야 안으로는 혹 첨판(僉判) 등에 오를 수 있더라도 밖으로는 끝내 하나의 현감(縣監)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맙니다. 더구나 영장(營將)과 곤수(閫帥)이겠습니까? 결국은 작산(作散)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면 옛날에 가지고 있던 가원(家園)은 이미 다른 사람의 물건이 되어 있고 대대로 전해 오던 장획(臧獲)523) 은 모두 여객(旅客)의 비용으로 들어가 버려, 흰머리도 곤궁에 허덕이게 됩니다. 많은 비용을 들여 경영(經營)해서 판득(辦得)한 것이라고는 패가 망신뿐인데, 이런 경우가 열이면 아홉은 되니, 괴이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인정(人情)이 일변되고 거속(擧俗)도 따라서 변천된 것이니, 이 또한 큰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선천(宣薦)에 이르러서는 예로부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밖에 달리 변통시킬 길이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예컨대, 따로 한두 개의 허통(許通)하는 과위(窠位)를 만들어 그들 가운데 등급을 뛰어넘을 정도로 우뚝하여 참으로 쓸 만한 인재가 있을 경우에는 한두 개의 곤월(閫鉞) 자리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하나를 기용하여 백을 용동(聳動)시키는 정사(政事)로 삼아야 합니다. 백낙천(白樂天)524) 의 시(詩)에 이른바 ‘우로 같은 한 점 은혜가 어떻게 많은 가호에 두루 미칠 수 있겠는가?[雨露由來一點恩那能遍却及千門]’ 한 것이 비록 사리에 닿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한(漢)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하유한 ‘내가 어찌 4천 호(四千戶)를 아껴서 조인(趙人)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525) ?’ 한 말이 또한 절로 고무시키고 진작시키는 오묘함이 있습니다.
이상의 두 조항도 또 관방(官方)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신이 감히 시행할 것을 우러러 청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묘당(廟堂)에 하순(下詢)하여 조처하소서. 관방(關防)에 관한 이야기를 신이 무술년526) 상소 가운데에서 그 개요(槪要)를 대략 진달하였습니다. 듣건대, 그뒤 강화도[沁都]에 증치(增置)한 제도가 신이 논한 것과 자못 근사하였다고 합니다만, 설시(設施)하는 방법은 신의 본의(本意)와 현격한 차이가 날 정도뿐만이 아니어서 사심(私心)에 답답함을 느껴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삼도 통어사(三都統禦使)라고 명명하고 팔좌(八座) 중신(重臣)의 자리를 맡겼으니, 직임이 높지 않은 것이 아니고 권한을 오로지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전선(戰船)도 있고 수졸(水卒)도 있어 우뚝하게 서남(西南)의 큰 관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겉모양만 꾸민 것이고 보기에만 아름다울 뿐 승패(勝敗)의 실상에는 관계가 없는데, 대개 그 요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저 성(城)을 아무리 높이 쌓고 도랑을 아무리 깊이 파더라도 지키는 방법을 모르면 성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키는 방도도 또 적을 맞이하여 가까이 들어오게 하여 외로운 성에 앉아서 시달림을 받으면서 터진 데를 꿰매고 새는 데를 막는 것처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섬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먼저 해양(海洋)에서 지키고 다음은 해안(海岸)에서 지키고 다음은 원내(垣內)에서 지켜야 하는데, 여기에서 지키지 못하게 된 연후에야 이에 물러가서 본성(本城)을 지킨다면 비록 갑자기 쳐들어오는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즈음에 상당한 시일이 걸리게 되어 안으로는 수비에 대한 조처를 할 수가 있고 밖으로는 원군(援軍)을 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당초 번리(藩籬)가 없이 곧바로 문정(門庭)에서 막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능히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신으로서는 들어보지 못한 말입니다. 무엇을 해양에서 지키는 것이라고 이르겠습니까? 지키는 것이 아니고 싸우는 것입니다. 무엇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싸우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싸워서 적을 물리침이 이도 또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말에도 잘 싸운 연후에야 잘 지킬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 요점은 주사(舟師)에 있는데, 주사를 설치하는 것이 원래 본도(本島)의 구제(舊制)입니다만, 불행히도 중도에 폐지되어 식견이 있는 이들은 그윽이 탄식하였었으나 이는 이제 복구시켰습니다. 12진보(鎭堡)가 서로 연결되어 얽혀서 포구(浦口)에서 서로 바라다보이니, 만일 전선(戰船)이 있다면 모두가 쓸 수 있는 군졸이어서 곳에 따라 서로 구제할 수 있게 됩니다. 적을 해양(海洋)에서 막는다 해도 진실로 전선이 없으면 연변(沿邊)에서 경보(警報)만 알리는 군졸이 되는 것에 불과할 뿐으로 어떻게 급박한 상황을 당하여 힘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제치(制置)하는 방도를 일시에 아울러 완비시킬 수는 없습니다만, 해마다 1진(鎭)씩 하여 1기(一紀)527) 를 기한으로 한다면 또한 3년 묵은 쑥을 구한 것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배를 만드는 기구는 통영(統營)과 제도(諸道)의 수영(水營)에서 해를 나누어 체당(遞當)하게 하고, 노(櫓)·사(射)·포(砲)에 능한 사람에게 급대(給代)하는 데 드는 수요에 대해서는 본도의 연변과 크고 작은 섬들에 살고 있는 포한(鮑漢)·해부(海夫)들 가운데 건장하고 용력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다른 신역(身役)은 견감시킨 다음 주사에 이정(移定)시키고 나서 봄·가을의 조련(操鍊)에만 나가게 한다면, 이런 등등의 부류들에게는 비록 급대하지 않더라도 수성(水性)에 익숙하여 배를 부리는 것을 말[馬]처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당황하여 탄식하는 사이에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물론, 연해(沿海) 각처에 있는 약간의 수진(水鎭)은 오히려 폐기해도 됩니다. 중점을 이 섬의 열진(列鎭)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데, 가령 별반(別般)으로 이혁(釐革)하더라도 반드시 12보(堡)의 주사는 설치해야 하니, 혹시라도 범연히 듣지 마소서.
이른바 해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장원(長垣)이 이것입니다. 무엇을 장원이라고 하겠습니까? 대저 본도는 옛날에는 사면이 진흙이어서 배를 정박시킬 수 없고 사람이 통행할 수 없었으며, 사이에 또 큰물이 마구 흐르고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빙 둘러섰으므로, 갑진(甲津)의 한 통로 이외에는 다른 지름길이 없기 때문에 고려[勝國] 때 몽고병(蒙古兵) 수만 명이 1년이 넘도록 기호(畿湖) 사이를 마음대로 누비고 다녔어도 감히 해안에는 한 발자국도 가까이 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 나라의 보배로서 제일의 보장(保障)인 것입니다. 지금은 예전의 진흙이 모두 마른 땅이 되어 사람이 다니지 않은 데가 없고 배가 정박하지 않은 곳이 없어서 적이 해안에 상륙하여 성(城)을 공격함에 있어 평탄하기가 강장(康莊)과 같으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성을 쌓으려 해도 수백 리에 가까운 텅 빈 땅을 누가 능히 축조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축조한다 하더라도 누가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만둘 수 없다면 그것은 오직 장원(長垣)뿐입니다. 대저 장원은 높이가 사람의 눈을 넘으면 되고 지형(地形)에 따라 죽 뻗어나가게 만들면 되는데, 밖에서 온 적이 원내(垣內)의 허실(虛實)을 엿볼 수가 없어 절로 주저하며 의심하는 것이 없을 수 없어서 경솔히 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이를 뛰어넘어 훼철(毁撤)하려 해도 또다시 기력(氣力)을 허비해야 하고 한꺼번에 뭉쳐서 돌격해 오는 형세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또한 조금쯤 저지되게 되니, 우리쪽에서 변에 대응하여 기계(奇計)를 내는 데 있어 오히려 여지(餘地)가 있게 됩니다. 이는 한(漢)나라의 변새(邊塞)에서 흉노(凶奴)를 방수(防守)하던 방법으로 양마성(羊馬城)이라고 호칭하는 것입니다. 부곽(郛郭)528) 의 견고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쓰임새가 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대저 이른바 부곽은 지킴에 있어서는 매우 견고하고 공격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힘을 써야 하는데, 힘을 다하여 공격하면 견고한 성도 또한 함락되기 마련인 데 견주어 장원은 애당초 굳게 지키려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한계만을 설정하여 두자는 것이며, 공격하는 쪽에서 공격하여 빼앗더라도 공이 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또한 전력을 기울여 공격하지 않게 됩니다. 대저 이렇기 때문에 단지 적이 달려오는 기세만을 주춤하게 하고 그 예봉(銳鋒)을 동요시키게만 하면, 그것으로 이미 우리쪽에 도움을 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역대(歷代)로 둔수(屯守)하는 방책에 있어 모두 이를 중하게 여겨 왔는데, 우리 동방에서도 전대(前代)에서는 압록강 북쪽에 또한 이런 장원을 설치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크게 힘쓰지 않고도 거의 일푼이나마 번폐(藩蔽)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을 원내(垣內)의 수비라고 하는가 하면, 건호(乾湖)가 이것이고 나무를 심어 목책[柵]을 만드는 것이 이것이고 품갱(品坑)·지망(地網)이 이것입니다. 대저 무엇을 건호·목책[樹柵]과 품갱·지망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것입니다. 대저 장원(長垣) 안에 물이 있는 곳이 있으면 그 물을 이용하여 호(湖)를 만들되 매우 깊고 험하게 하기를 힘쓰며, 물이 없는 곳은 벽을 뚫어서 호를 만들되 매우 기구(崎嶇)하게 하여 끊기지 않고 빙빙 감아돌게 합니다. 호(湖)의 안에는 또 악목(惡木)·지극(枳棘)·유류(楡柳) 등을 심어서 그 너비를 5, 60보(步)쯤 되게 하며, 간간이 단절되어 있는 곳과 나무를 심은 안쪽에는 ‘품(品)’ 자(字) 모양으로 된 대갱(大坑)과 지망(地網) 모양으로 된 소갱(小坑)을 별처럼 바둑알처럼 뒤섞어 배포하여 놓되, 넓게도 하고 깊게도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엎어져 빠지기 쉽고 나오기는 어렵게 합니다. 그리고 목책 사이에 혹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기도 하며 혹 깃발을 누이고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의병(疑兵)을 만들기도 합니다. 또 가끔 돈대(墩臺)를 높이 축조하여 망을 보면서 서로 알리기도 하고 급한 경보가 있을 때에는 서로 구원하기도 한다면, 적이 비록 날아서 넘어온다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장원에서 지치고 또 호(湖)에서 지치고 또 가시덩굴에서 지치고 또 갱(坑)에서 지치게 되어 군중(軍中)의 사기가 삼고(三鼓)에서도 오히려 고갈되는 것인데, 더구나 이렇게 누차 시달린 끝이겠습니까? 이런 연후에 내성(內城)에 이르게 되는데, 내성에서 지키는 것도 또한 방술이 있습니다. 무릇 세상에서 이른바 성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 모두들 쉽다고 말을 합니다만, 지키는 것이 실로 어렵습니다. 신은 청컨대 그 요점을 하나하나 거론하여 보겠습니다.
1. 속이 빈 적대(敵臺)를 만드는 것입니다. 성(城)의 몸채 밖에 딱붙여 의지해서 돌이나 석회(石灰)·잡토(雜土)로 쌓되 그 높이는 성보다 3, 4척(尺) 높게 하고 그 속을 텅비게 한 다음 사다리를 만들어 성안으로 사람이 통행하게 하며, 대(臺)의 꼭대기는 넓고 우묵하게 만들기를 힘써서 화기(火器)와 시석(矢石)을 벌려 배치시키고 삼면(三面)을 돌아보면서, 적이 성에 붙거나 성으로 공격하여 오는 것을 막는다면, 적이 감히 성에 접근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백 보(步)마다 이 대(臺)를 하나씩 설치하면 수백 보 사이를 비워두고 장벽만 벌려 설치하여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노대(弩臺)·전붕(戰棚)·현안(懸眼)·양마성(羊馬城)·옹성(甕城)의 제도를 합쳐 하나로 만든 것으로 지극히 간략하고도 지극히 요령이 있어, 긴고(緊固)한 것이 많은 치첩(雉堞)을 설치한 것과 같고 온 성이 험한 요새를 이루어 천 길이나 되는 둥근 돌과 같게 됩니다. 옛사람의 말에도 성이 있고 대가 없으면 성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1. 건호(乾湖)로 성(城)을 둘러싸는 것입니다. 호(湖)를 파서 물을 가득히 저장해 놓은 것은 참으로 좋겠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못하겠으면 마른 땅에라도 반드시 빙 둘러 넓게 파는 것을 계학(溪壑)과 천맥(阡陌)의 모양처럼 만든다면, 한때의 급한 형세를 막을 수 있습니다.
1. 내탁(內托)입니다. 군졸을 성으로 올려다가 배립(排立)시킨 뒤에 내탁이 없게 되면 사사로이 서로 오르내리느라 대오(隊伍)가 빠지고 장벽이 비는 폐단과 잡인(雜人)이 간계(奸計)를 품고 잠입할 것도 또한 우려가 되니, 안에다 목책(木柵)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무로 봉쇄(封鎖)를 만들어 식사하고 반열을 바꿀 때에만 법대로 여닫게 해야 합니다.
1. 군창(軍廠)을 설치해야 합니다. 성으로 올라간 군졸은 번(番)을 나누어 쉬지 않을 수 없는데, 한데 서 있게 되는 것이 안타까우니, 그 반드시 창(廠)을 설치하여 그 안에서 쉬게 해야 합니다. 이를 띠풀로 덮으면 불이 나기 쉽고 기와로 덮는 것은 판출하기가 어려우니, 또한 반드시 석회와 흙을 섞어서 덮도록 해야 합니다. 또 1, 2칸[間]을 넓혀 화기(火器)·병기(兵器)를 안배하여 꽂아놓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1. 혈문(穴門)을 뚫는 것입니다. 성문(城門)의 문짝은 회토(灰土)를 두껍게 발라서 화공(火攻)을 방지해야 하고 또 문짝에다 수십 개의 구멍을 뚫어 그 구멍으로 화살을 쏘고 탄환을 쏘게 하면, 적이 또한 감히 문앞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됩니다.
1. 성문 안에 중성(重城)을 만드는 것입니다. 각 성문 안에 따로 중성을 설치하고 그 사이의 빈 땅에 건호(乾湖)를 넓게 파서 바닥에는 질려(蒺藜)를 안배(安排)하고 위에는 기교(機橋)를 펴놓아서 사람이 다니기 편하게 합니다. 적이 혹 문을 부수고 들어오게 되면, 기계(機械)를 사용하여 다리가 뒤집어지게 하는 것도 하나의 기계(奇計)입니다.
이상은 모두 성을 지키는 제도입니다.
1. 발을 다는 것인데, 베로 발을 만들어 털과 솝을 그 속에 채워넣는 것입니다. 급할 경우에는 민간의 솜이불을 많이 가져다가 아울러 물에 적셔 두 개의 장대에 매어 성밖으로 내어 건 다음, 허공에다 아래로 늘어뜨리게 합니다. 이것으로 각 장벽을 빙 둘러싸게 하면 발이 이미 허공에 달려 있고 또 물에 젖어 있으므로 화살이 뚫지 못하고 돌을 던져도 손상이 되지 않으며, 포환(砲丸)도 뚫을 수가 없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사람이 피신(避身)할 수가 있습니다. 적이 멀리 있으면 탄환을 쏘지도 않고 화살을 쏘지도 않으며 가까이 발 밖에까지 접근한 연후에는 수십 보(步) 안에서 올려다보고 공격하는 것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어, 바야흐로 그 공효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몇 리(里)쯤 떨어져서 지키는 것이 몇 장(丈)쯤 떨어져 지키는 것만 못하다.’고 했는데, 이는 멀면 맞히기가 어렵고 또 힘을 허비하게 되며 거기다가 무기도 손상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멀리 나가는 무기를 짧게 사용하는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 목여장(木女墻)을 만드는 것입니다. 적의 대포(大砲)와 거석(巨石)에 성첩(城堞)이 파괴되기 쉬우니, 목여장을 많이 만들어서 성안에 포열하여 두었다가 무너지는 데에 따라서 보수하게 해야 합니다.
1. 비석(飛石)입니다. 성으로 기어오르는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닌데, 허다한 민인(民人)들에게 일체 모두 무기를 줄 수는 없습니다. 각기 돌을 사용하게 하면 가져오기가 매우 쉽고 써도 바닥이 나지 않는데 이를 비석이라고 하며, 적이 매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단 손으로 돌을 던지기 때문에 기세가 약하여 맹렬하지 못하니, 또 장대로 날려서 공격하는 것이 소리도 크고 파괴력도 큰 것만 못합니다. 오직 가르치고 익히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김해(金海) 사람들은 가락국(駕洛國)의 옛 풍습이 있어 이를 잘하는데, 임진 왜란 때에 또한 힘을 얻었었다고 하니, 이것이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1. 송명(松明)과 철광(鐵筐)입니다. 성밖에 주둔하고 있는 적은 주야로 틈을 노리고 있는데, 가장 두려운 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깊은 밤에 몰래 성으로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기어오르는 것입니다. 이런 때문에 유촉(油燭)을 많이 저축하여 밤새도록 불을 밝히는데, 이는 진실로 계속 잇대기 어려운 방법인 것입니다. 만일 철광을 만들어 송명을 가득 저장하여 불을 붙인 다음 이를 위에서 철삭(鐵索)에 매달아 성벽의 중간 이하로 늘어뜨려 적은 밝은 불빛 아래 있게 하고 우리는 어두운 곳에 있게 하면, 적의 동정(動靜)을 모두 알 수 있게 됩니다. 근래 각처에서 밤에 조련할 적에 치첩 위에 횃불을 벌려 세우는 것을 본받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밝은 데에 있게 되고 적은 어두운 데에 있게 되어 적은 우리의 동정을 살필 수 있지만 우리는 적이 있는 곳을 알 수 없게 되니, 되겠습니까?
1. 가마솥을 맡는 부인(婦人)들이 있어야 합니다. 마을의 여인들 가운데 노성(老成)한 사람을 뽑아내어 10명씩으로 한 대오(隊伍)를 만들고 또 부통(釜桶) 같은 물건을 준비하여 물이 펄펄 끓는 여러 가마솥에서 자루가 긴 목표(木瓢)로 운반해 쓰게 하는데, 적이 성벽으로 기어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들어부으면 좋습니다.
이상은 모두 수성(守城)하는 데 쓰는 것으로 쓰는 것이 이것뿐만이 아닙니다만, 번거롭게 죄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화기(火器)에 관한 한 가지 일이 더욱 중하고도 긴요한 것입니다. 이른바 조화포(造化砲)라는 것이 있는데, 계란만한 큰 탄환이 하나, 상수리만한 작은 탄환이 30개가 들어가며, 힘은 4백 보(步)나 멀리가고 흩어져 퍼지는 너비가 5, 6칸의 땅에까지 미칠 수 있습니다. 또 이른바 일와봉(一窩蜂)이라는 것이 있는데, 크기가 납환(鑞丸)만한 것이 1백 개가 들어가고 멀리 가고 널리 퍼지는 것도 또한 조화포의 버금이 됩니다. 장치하여 발사하기 쉬운 것도 또한 행용(行用)하는 화총(火銃)과 다른 것이 없어서 한 사람이 백 사람을 쓰는 효용을 발휘하게 되며, 맹렬하고 신비스러운 위력도 또 화총의 만 배나 됩니다. 이는 오로지 수성(守城)을 위한 장기(長技)인 것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지난 임진년529) ·계사년530) 에 고(故) 장신(將臣) 구선행(具善行)이 처음 만들어 사용하기를 건의해 청하여, 총영(摠營)으로 하여금 장주(裝鑄)하게 하여 연융대(鍊戎臺)에서 시험 발사를 하였는데, 폭발하는 소리가 진동하여 놀라게 하고 명중이 잘되는 것이 과연 듣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때 선대왕(先大王)께서 크게 칭상(稱賞)하고 나서 각 군문(軍門)에 그 제도를 반하하여 또한 각각 스스로 만들게 하였는데, 모두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하니, 하순(下詢)하시어 시험해 보시면 쓸 수 있는가의 여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쓸 수 있다면 여러 군문(軍門)과 심영(沁營)으로 하여금 많이 주조하게 하여 익혀서 사용하게 하고, 써보아서 과연 성능이 좋으면 외읍(外邑)의 성을 지키는 곳에도 통틀어 주조해 두도록 명하여 변란에 대응하는 방도로 삼게 하소서.
그 나머지 신기(神機)·화전(火箭)과 만인적(萬人敵)·만지포(萬枝砲) 등속은 모두 성을 지키는 사용에 있어 더할 수 없이 긴요한 것인데, 지금 여항(閭巷) 사이와 군오(軍伍) 가운데에는 또한 그 방법을 알아서 화기(火器)를 제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않으니, 조령(朝令)이 한번 내리면 성취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대저 성을 지키는 방법에는 화기가 제일인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임진 왜란 때에 있었던 일 가운데 전록(傳錄)에 나와 있는 것을 조사하여 본 적이 있었는데, 도산(島山)에서 천병(天兵)이 거의 승리를 취할 수 있게 되었었던 것은 그 곳의 지형이 험고(險固)할 뿐만이 아니라, 푸른 옷을 입은 하나의 왜소년(倭少年)이 흰 깃발을 가지고 혼자 서서 지휘하는 데 따라 포환(砲丸)이 비오듯이 쏟아지므로 여러 날을 서로 버티게 되었고 경략(經略)의 군대는 진격하여 한걸음도 성으로 접근하지 못한 채 물러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순천(順天)의 전역(戰役)에서 유 도독(劉都督)531) 이 소서행장(小西行長)에게 당하였던 불리함도 또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미루어 본다면 그 효해(效害)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에 이 섬의 천연(天然)의 요새지로써 반드시 지켜낼 계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런 등등의 더할 수 없는 이기(利器)를 버리고 쓰지 않는다면 어찌 너무도 허술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대저 우리 나라는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데는 능하지 못하고 남의 공격을 받기가 일쑤이기 때문에 스스로 잘 지키는 것을 공고하게 하는 나라입니다. 학소(郝昭)532) 가 진창(陳倉)에서 제갈양(諸葛亮)과의 대치한 것과 장순(張巡)533) 이 수양(睢陽)에서 〈안녹산(安祿山)의 반군(叛軍)에 포위되었을 때〉 신기(神機)와 묘략(妙略)이 번갈아 발하여도 오래 지속되었던 것은, 이야말로 본디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고 또한 그런 때가 있는 것이어서 미리 헤아려 미리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러한 성을 지키는 즈음에 절목(節目)을 만들어 응당 행해야 할 일을 또한 모두 전혀 한만히 여긴 채 살필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편안한 때에도 위태로움에 대해 잊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 사람은 위태로운데도 또한 그 위태로움을 잊고 있으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심도(沁都) 이외에는 또 남한 산성(南漢山城)이 있는데, 가장 긴급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일에는 선후가 있는 것이어서 말이 지리한 데에 관계되겠기에 신이 감히 다시 상세히 말하는 것을 일삼지 않겠습니다.
아! 이제 나라 안이 평안히 다스려져 치화(治化)가 환히 밝으니, 기국(杞國)의 걱정을 하는 것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신은 유독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천상(天象)은 유원(幽遠)한 것이어서 재려(災沴)의 발생을 진실로 헤아려 알기가 어렵고, 그에 대한 반응도 또 오늘 경계를 보인다고 하여 내일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필할 수는 없습니다. 가까운 것으로 말하면 혹 10년 뒤에 있기도 하여 수년(數年)이 된 것 외에 인심이 오래 된 것을 잊고 평안한 데 습관이 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는데, 북을 치매 메아리 치듯이 반응되는 것은 끝내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오직 날마다 조심하는 마음을 지니시어 곧바로 지난번 우르르 쿵쾅하고 천둥치는 이변 때문에 걱정하고 있습니다만, 신은 이밖에 또 큰 것이 있다고 여깁니다. 구징(咎徵)을 가지고 말한다면, 8월에 있었던 영남(嶺南)의 풍수(風水)로 인한 재변은 곧 천백 년 동안 사적(史籍)에 기록된 것 가운데 그 유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해우(廨宇)가 진동하여 무너지고 여염(閭閻)이 깨끗이 쓸려 나갔으며, 행인(行人)이 날라가서 떨어져 죽고 소와 말이 돌개바람에 휘말려 죽었습니다. 옛날 하(夏)나라에서 성의 문짝이 15보(步) 날라간 것을 전(傳)에서 대재(大災)라고 하였습니다만, 여기에 견주어 보면 몇 배나 더한 것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전하는 말에 ‘큰물과 폭풍은 모두 병상(兵象)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또 남해(南海)의 변방에서 있었으니 도리(島夷)의 경보(警報)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인사(人事)로 말하면, 홍국영(洪國榮)이 잠시 물러났을 때에 송덕상(宋德相)이 소장을 진달하여 머물게 할 것을 청원하여서, 혹 홍국영을 위하여 함께 떠나가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혹 홍국영이 없으면 스스로 보전할 수 없을 듯이 하는 사람도 있어 분분하게 창화(唱和)하였으니, 참으로 하나의 변괴였습니다. 이제 송덕상이 패퇴되고나서는 또 호수(湖囚)들이 당여를 맺고 도당을 불러모아 목숨을 버리고 달려가 구원하며 국법에 항거하면서 멋대로 의논하여 4도(道)가 일제히 궐기하고 열읍(列邑)이 다투어 분기하니, 그 두세(頭勢)를 살펴보면 매우 두렵고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인심(人心)과 세도(世道)의 함닉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돌아보건대, 무슨 짓인들 하지 않겠습니까? 억울함을 일컫기를 마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를 원수로 여기기에 이르는 것이고 통문(通文)을 돌리기를 마지 않으면 장차 도당을 불러모으는 데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지(內地)의 분쟁은 또한 우려스러운 것입니다. 무신년534) 전에 누가 무신년의 변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무신년의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출정(出征)한 뒤 계속 원장(援將)을 보내라고 명을 내리자 여러 추재(樞宰)들이 모두 대궐에서 숙직하면서 아침에 들어와서는 이 일을 가지고 말하고 저녁에 들어와서도 이 일을 가지고 말하여 수일이 경과된 뒤에야 비로소 결단을 내렸습니다만, 이는 바로 의논을 결정하는 시간에 오랑캐는 이미 강(江)을 건넜다고 하는 격인 것입니다. 명이 내린 뒤에 당연히 가야 할 사람이 말[馬]이 없고 갑옷이 없다는 핑계로 또 날짜를 연기한 것이 이러하였으니, 어떻게 역적을 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신령함을 힘입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만, 국사(國事)와 병사(兵事)를 가지고 논한다면 위망(危亡)에 이르지 않은 것이 요행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인재가 그때에 견주어 어떠합니까? 융정(戎政)과 기율(紀律)이 그때에 견주어 또 어떠합니까? 이것이 신이 목전의 걱정처럼 급급하게 여기면서 직려(直廬)에서 촛불을 밝히고 마음을 졸이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 자신의 몸에 돌이켜 살펴서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에 응답하는 도리는 오직 전하와 묘당(廟堂)·삼사(三司)의 신하가 강구하고 면려하여 대유(大猷)를 넓혀 죽여야 될 사람은 죽이고 결단을 내려야 할 사람은 결단을 내려 재변을 없애는 방도를 극진히 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재변에 대해 대비하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또한 신의 말을 굽어 채택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폐기하지 마시고 융정(戎政)을 맡은 신하에게 분명히 조고(詔告)하여 각각 주략(籌略)을 올리게 하되 장황(張皇)하게 잘 따져 물어서 일에 임하여 뉘우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행하게도 말이 사실과 증험이 되지 않을 경우에 신은 망령된 사람이 될지언정 국가에 있어는 또한 손해가 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 왕년에 호속(湖俗)의 완악함을 조심하고 해도(海島)의 흉언을 살피라는 일로 누누이 진달했었습니다만, 끝내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도 안되어 불행하게도 근사한 일이 발생하였으니, 또 오늘날 한 이야기가 뒷날 증험되어 보이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중언 부언 더듬거리면서 그칠 줄 모르는 이유인 것입니다.
신이 직장(職掌)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한 가지 부진(附陳)할 일이 있습니다. 궐내(闕內) 각처에 고립(雇立)되어 있는 군졸은 모두 동서에서 까마귀처럼 모인 무리들로 경향(京鄕)의 군오(軍伍)가 입직(入直)하는 것과는 같지 않아서 난잡스럽기가 견줄 데 없으니, 세미한 것이라고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이 과연 일일이 심찰(審察)하여 그 근파(根派)와 천주(薦主)·거주(居住)를 조사한 다음 이를 기록하여 하나의 문안(文案)으로 만들어 두고 불시에 적간(摘奸)하는 자료로 삼고 있습니다. 차비문(差備門) 근처에 이르러서는 더욱 긴중한 것이어서 감히 일례(一例)로 고험(考驗)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모두 중관(中官)·액례(掖隷)에 소속된 부류들이어서 진실로 외군(外軍)보다는 착실히 할 줄 알고 있습니다만, 그에 대해서도 할말이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선조(先朝) 때 어느날의 조연(朝筵)에서 하교하기를, ‘어젯밤 와합문(臥閤門)이 열렸기에 돌아다 보았더니 타경졸(打更卒)이 문밖에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 매우 송연(悚然)함을 느꼈다.’고 하시고나서 이어 수검(搜檢)하라고 명하였는데, 제색 고군(諸色雇軍)과 액례(掖隷)들 가운데 죄를 받은 사람이 많이 있었고 위장(衛將)도 또한 잡아다가 곤장(棍杖)을 치기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이 이미 직접 하교를 받들었고 또 금년 여름의 하교 가운데 ‘해근(海根)은 승선(承宣)이 데리고 있는 하례(下隷)가 아닌가?’라고 운운한 일이 있었는데, 신은 여기에서 더욱 그지없는 두려움과 놀라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삼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궐내에서 고립(雇立)하고 있는 부류들을 궐내에서 수검하는 법이 있습니까? 하정(下情)에 답답한 생각이 듭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한 칙교(飭敎)를 내려 본조(本曹)의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5일을 간격으로 몸소 차비문 밖 근처로 가서 고립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만나 그들의 안모(顔貌)를 익히고 명자(名字)·연세(年歲)와 거주(居住)·천주(薦主)를 알게 하는 것도 이 또한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一體)가 되게 하는 도리에 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래에서 걱정하는 마음이 풀릴 수 있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금군(禁軍)과 기사(騎士)가 적체(積滯)되고 있다는 일은 그대의 말이 매우 옳다. 불법을 저지르는 죄는 특별히 전가(銓家)에서 기용하는 법을 잘 하지 못한 데서 온 소치인 것으로, 법만으로는 스스로 잘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나도 매양 이 폐단에 대해 깊이 진념(軫念)하여 누차 연석(筵席)에서 이 일에 관해 언급하여 논쟁을 마지 않았으며 몸소 교장(郊場)에 나아가 그들을 불러서 순문(詢問)하였었으니, 나의 뜻도 또한 진실로 진지하였다. 대저 구근인(久勤人)을 순서대로 천전(遷轉)시킴에 있어 순용(純用)과 호용(互用)을 논할 것이 없이 모든 초사(初仕)의 의망(擬望)에 있어 진실로 마음을 다하여 사심(私心)을 버리고 성심을 다하여 공도(公道)를 넓혔다면, 어찌 오늘날 그대의 상소가 있었겠는가? 가만히 전후 본병(本兵)의 신하에 대해 개탄스럽고 애석하게 여겨 바야흐로 전교(傳敎)를 내려 선부(選部)에 신칙시키려 하였다. 관서(關西)의 무비(武備)에 대한 일은 이 또한 내가 마음속으로 개탄스럽게 여겨 안타까운 생각이 간절한 것이었다. 내가 그런 때문에 말하기를, ‘변방 지역에 문풍(文風)이 갈수록 더욱 불어나는데도 조가(朝家)에서는 이를 바로잡을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관서 일로(一路)는 나의 소유가 아닌 땅이 될 것이다.’ 했던 것인데, 널리 순문하고 의논해서 너무 극심한 것은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부진(附陳)한 관방에 관한 여러 조항들은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장신(將臣)에게 명하여 익히 소상하게 논의하여 각기 의견을 갖추어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끝에 진달한 차비문의 고군(雇軍)에 관한 일은 궁중과 부중을 일체로 하는 의의에 있어 진실로 행해야 되는 것이다. 고사(故事)에 병방 승지(兵房承旨)가 병조 낭관(兵曹郞官)과 함께 3일마다 수검(搜檢)했다고 하였는데, 이 법이 중간에 폐기되었다. 지금에 와서 구제(舊制)를 죄다 회복시키기는 어렵지만 또한 옛것을 모방하여 지금에 통행시키는 정사가 없을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본조(本曹)의 판서에게 뒷날 등대(登對)할 적에 좋은 쪽을 따라 사리를 논하여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274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기(軍器)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법(兵法) / 구휼(救恤) / 사법-행형(行刑)
- [註 521]정곡(正鵠) : 과녁의 한 가운데에 있는 점.
- [註 522]
풍증(馮拯) : 송나라 인종(仁宗) 때 사람.- [註 523]
장획(臧獲) : 노비.- [註 524]
백낙천(白樂天) :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낙천은 그의 자(字)임.- [註 525]
내가 어찌 4천 호(四千戶)를 아껴서 조인(趙人)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한(漢)나라 고조(高祖) 때 진희(陳豨)가 조(趙) 땅을 근거지로 배반하자 고조가 친정(親征)하려고 천하의 병졸을 모았지만 오지 않자, 조나라 장사 중 장수로 삼을 만한 네 사람을 선발, 각기 1천 호씩을 내리고 조나라 장정을 모집하여 평정하였는데, 당초에 좌우에서 공도 없는데 봉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간하니, 고조가 "너희들이 알 리 없다. 진희가 배반하여 조(趙)·대(代)의 땅이 모두 진희의 것이 되었다. 내 지금 화급히 천하의 군사를 모으고 있으나 아직 아무도 다다른 자가 없으니, 지금의 계략으로서는 오직 한단(邯鄲)의 군사만을 쓸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어찌 4천 호를 아깝다 하여 조나라 자제들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여, 모두 승복하였다는 고사(故事).- [註 526]
무술년 : 1778 정조 2년.- [註 527]
1기(一紀) : 12년.- [註 528]
부곽(郛郭) : 성의 외곽.- [註 529]
임진년 : 1772 영조 48년.- [註 530]
계사년 : 1773 영조 49년.- [註 531]
유 도독(劉都督) : 명(明)나라 장수 유정(劉綎).- [註 532]
○丁酉/兵曹參議尹冕東, 應旨上疏曰:
夫戎政之本, 在乎用人。 年前取才禁軍騎士之新設也。 靺鞈之類, 擧皆距躍, 以爲一入此薦, 次第遷升, 則初仕可以坐占, 欣欣然室家相慶。 辦裝買劍, 爭欲着鮮衣、策駑馬, 不計其家業之蕩殘。 未滿數年, 法不如初, 有力者簸糠在前, 寡援者積薪在下, 血心前去, 含淚還歸。 衣裝繿縷, 無改製之望, 器械剝落, 無修補之方。 欲留無益, 欲退不得。 妻孥啼呼, 隣里笑侮。 初旣朝家許之以序遷, 今反不然, 未免爲失信之歸, 可勝歎哉! 故在前城內外山郭郊墟稍廣之處, 無非射場, 人皆謹避其行, 而數年之中, 此風索然, 罕見懸鵠立芻之, 人業弓矢者積居, 而無市賣之路。 此非好箇消息, 乃寢弱之徵也, 誠莫知何以則可也。 欲一循先後, 則顧其中, 亦豈無地處才望, 可合奬用者? 而拘於格例, 遠期於衆人之後, 則實非國家急才之政也。 欲揀取才地, 則又未必得眞箇可用, 而格例一撓, 攙前躐後, 窮者愈窮, 擠者愈擠, 其所失平, 如上之說。 臣意則秉銓者, 公其心、明其眼, 一政則用才地, 一政則用先後, 相間排擬, 有若互對者然, 仍爲定式。 則陞無偏陞, 滯無久滯。 彼此交進, 竝行不悖, 庶幾爲慰悅作興之一道矣。 關西一路, 卽我國之門戶, 近接遼薊, 爲賊路咽喉, 而其人率多武勇沈勁, 善騎射、喜華飾, 可比燕趙子弟。 善用之, 則隱然爲一面長城, 故自昔朝廷培養而慰藉之。 有自行伍之賤, 而擢以至於列閫者, 故激勵之方, 興起之效, 頗有可觀。 挽近以來, 擧變爲烏巾靑衿之流, 彎弓者鄕里賤之, 躍馬者族黨笑之。 甚者, 父兄呵止, 妻子泣挽。 自平壤至灣上, 終日行, 不見挾矢與發的者, 讀書之聲, 滿耳可聽云, 不亦異哉? 馮拯賦詩, 尙不可退虜, 此曹讀書, 將焉用哉? 細論其本則無他也。 亦朝廷待之薄而用之偏。 故艱難決科, 辛苦求仕, 倖而得之, 積勤勞數十年, 內則雖或至僉判之屬, 外則終不得一縣監之名。 況營將乎, 況閫帥乎? 畢竟作散而歸, 則舊有家園, 已作他人之物, 世傳臧獲, 盡歸旅客之費, 白首困窮, 積費經營, 所辦得者破家亡身而已。 如是者十常九矣, 無怪乎其人情之一變, 擧俗之隨遷, 此亦豈非大可憂者耶? 臣意, 則至若宣薦, 從古不許, 而此外有他變通之路, 則別設一二許通之窠, 以待其人之超等拔萃者, 眞有可用之才, 則無惜一二閫銊, 以爲擧一聳百之政。 則白樂天詩所云: ‘雨露由來一點恩, 那能遍却及千門者?’ 雖是理到之言。 漢 高皇帝所諭: ‘吾何愛四千戶, 不以慰趙人者?’ 亦自有皷動振作之妙矣。 以上二條, 且係官方, 臣不敢仰請施行。 伏乞下詢廟堂, 而處之焉。 關防之說, 臣於戊戌疏中, 略陳其槪, 而第聞其後沁都增置之制, 頗近於臣之所論, 而設施之方, 與臣本意, 不趐逕庭, 私心抑鬱, 不勝其慨歎矣。 名之以三都統禦, 畀之以八座重臣, 任非不隆, 權非不專, 有戰船矣, 有水卒矣, 屹然爲西南巨防, 而此皆貌飾而已, 觀美而已, 非有關於勝敗之實, 蓋不得其要也。 夫城雖高峻, 溝雖深濬, 不知其守之之方, 則與無城何異哉? 守之之方, 又不在於迎賊入近, 坐困孤城, 如補綻塞漏之爲也。 以是島而言之, 先守於海洋, 次守於海岸, 次守於垣內。 守之不得, 然後乃退守於本城。 則雖有倉卒之寇, 如是之際, 動費時日, 內備可措也, 外援可集也。 不此之爲, 初無藩籬, 而直以門庭禦之曰: ‘余能守者。’ 非臣攸聞也。 何謂海洋之守, 非守而戰也。 何謂非守而戰, 戰以退賊, 則是亦守也, 故語云能戰然後能守, 其要在舟師。 舟師之設, 原是本島之舊制也, 不幸中廢, 有識竊歎, 此則今已復矣, 而十二鎭堡, 聯絡相望於浦口, 若有戰船, 則皆是有用之卒, 可以隨處相救。 禦賊洋中, 而苟無其船, 則不過爲沿邊報警之卒, 將何以臨急効力乎? 制置之方, 不可一時幷完, 而逐年一鎭, 限以一紀, 則亦足爲三年之艾矣。 造船之具, 自統營及諸道水營, 分年遞當能櫓、射、砲給代之需, 則本島沿邊及大小諸島鮑漢、海夫等, 選其壯勇, 益其他役, 移定舟師, 只令赴操於春秋, 則此等之類, 雖不結代, 慣習水性, 使船如馬。 脫有緩急, 可以得力於咄嗟之間矣。 沿海各處若干水鎭, 猶可廢也。 不可不歸重於此島列鎭, 假使別般釐革, 必置十二保舟師, 而毋或泛聽焉。 所謂海岸之守, 長垣是也。 何謂長垣? 大抵本島, 古則四面淤泥, 舟不得泊, 人不能通, 間又有大水橫流, 削壁環立, 甲津一路之外, 無他蹊逕, 故勝國時, 蒙兵數萬, 經歲縱橫於畿湖, 而不敢近海岸一步。 此眞我國之寶, 而第一保障也。 今則昔之淤泥, 盡爲乾陸, 無人不通, 無船不泊, 敵之登岸薄城, 坦若康莊, 爲是之憂。 雖欲築城, 而近數百里空蕩之地, 誰能築之? 假使築之, 誰能守也? 無已則其惟長垣乎。 夫長垣者, 高過人目, 袤亘地形, 外來之寇, 未窺垣內, 虛實自不無, 趦趄疑難, 未易輕犯。 且欲超越毁撤, 而又復煞費氣力。 一擁奔突之勢, 到此亦少攔阻, 則吾之所以應變出奇, 猶有餘地。 此漢塞之所以防守凶奴, 而稱號爲羊馬城者, 雖不及郛郭之固, 而其爲用, 不可少也。 何者? 夫所謂郛郭者, 守之甚固, 攻之必力。 力攻之, 則堅城亦陷, 長垣者, 初不固守, 但設其限, 攻之者攻而得之, 不足以爲功, 故亦不以全力乘之。
夫女是, 故只逆其來勢, 只撓其銳鋒, 斯已足爲吾之助也。 歷世屯守之策, 皆以此爲重, 而我東前代鴨江之北, 亦有此垣。 如此則不至大勞, 而庶可爲一分之藩蔽也。 何謂垣內之守, 乾濠是也。 種樹爲柵是矣。 品坑、地網是也。 何謂乾濠, 樹柵與品坑、地網, 夫長垣之內有水之處, 則因水爲濠, 務極深險, 無水之處, 則穿壁爲濠, 務極崎嶇, 周匝不絶。 濠之內, 又種惡木、枳棘、楡柳之屬, 使之廣可五六十步, 間間斷絶之處及種樹之內, 爲品字大坑, 地網小坑, 星錯碁布, 或闊或深, 使人易跌而難出。 樹柵之間, 或植旗鳴皷, 或偃旗設伏, 以爲疑兵。 往往高築墩臺, 瞭望相報, 警急相救, 則敵雖飛騰超趠, 初困於垣, 又困於濠, 又困於棘, 又困於坑, 軍中之氣, 三穀猶竭, 況此屢困之餘乎? 然後至於內城, 而內城之守, 亦有其術。 凡世之所謂, 守城者皆曰易守, 而守之實難。 臣請枚數其要。 其一曰, 空心敵臺。 緊靠城身之外, 或以石、或以石灰, 雜土築之。 高於城三四尺, 空其中爲梯, 使城內通人。 臺之頂, 務爲廣凹, 列置火器、矢石, 三面顧視, 以禦賊之附城薄城, 則賊不敢近城矣。 每數百步一置此臺, 則數百步之間, 雖空置列垜, 無足憂矣, 而如弩臺、戰棚、懸眼、羊馬城、甕城之制, 合而爲一。 至簡至要, 緊固如萬雉。 全城險斷, 同千仞圓石。 古人曰: ‘有城無臺, 不如無城矣。’ 其一曰乾濠繞城。 鑿濠滿儲水, 潦則固好, 而不然則雖乾陸, 必周回廣鑿, 如溪壑、阡陌之狀, 可防一時之急勢矣。 其一曰內托軍卒。 上城排立之後, 如無內托, 則私相上下, 闕伍空垜之弊及雜人之懷奸攙入, 亦所可慮。 不可不內竪木柵, 而作木封鎖, 放飯換班之時, 如法開閉矣。 其一曰軍廠。 上城之卒, 不可不番休, 而暴露可悶, 其必也設廠而庇之。 覆茅易火, 覆瓦難辦, 亦必以灰土相雜覆蓋。 又拓一二間, 作爲火器、兵器安揷之所矣。 其一曰穴門。 城門之扇, 厚塗灰土, 以防火攻, 而又鑿門扇數十孔穴, 從穴中放矢、放丸, 則敵亦不敢來逼於門前矣。 其一曰門內重城。 各門內別設重城, 其間空地, 廣鑿乾濠, 下安蒺藜, 上鋪機橋, 以便行人。 賊或斫門而入, 用機翻橋, 亦一奇也, 以上皆守城之制也。 其一曰懸簾。 以布爲簾, 實以氈絮。 急則多取民間絮衾, 幷以水濕, 以兩竿出揭於城外, 虛空而下。 垂以周各垜, 則簾旣虛懸, 又藉水濕, 矢所不貫, 石所不損, 砲丸亦所不能鑽透, 守城之人, 可以避身。 敵遠則不放不射, 近在簾外, 然後俯視仰擊於數十步之內, 方可見功。 古人云: ‘守里不如守丈。’ 蓋遠則難中, 而又費力, 又損器故也。 是之謂長兵短用之法也。 其一曰木女墻。 敵之大砲, 巨石易以破壞, 城堞多造木女墻, 列置城內, 隨其空缺而補之。 其一曰飛石。 城上之技非一, 而許多民人, 不可一皆授器。 莫如各用石子, 取之甚易, 用之不窮, 號爲飛石, 敵所甚畏。 但以手投石, 勢弱而不猛, 又莫如以竿飄擊, 聲雄力大。 惟在敎之習之之如何。 金海人以駕洛舊俗, 善此, 壬辰之亂, 亦嘗得力云。 此可鑑矣。 其一曰松明、鐵筐。 城外屯賊, 晝夜伺隙, 而最怕黑夜深更, 潛攀而蟻附。 是以多貯油燭, 徹夜明火, 而此固難繼之道。 若作鐵筐, 滿貯松明, 而爇之上懸, 鐵索墜於城腰以下, 使賊居明, 而我居暗, 則敵之動靜, 皆莫能逃矣。 不當效近來各處夜操時, 列炬於堞上。 我居明、敵居暗, 敵察我動靜, 而我不知賊在之處, 其可乎? 其一曰司釜婦。 抽出閭里中老成女人, 以十名爲一隊, 又備釜桶之物, 湯沸諸釜, 以長柄木瓢運用, 以待賊之攀上, 而灌下則好矣。 以上皆守城之用。 用固不止於此, 而煩不盡列, 惟有火器一事, 尤重且緊。 有所謂造化砲者, 大丸如鷄子者一, 小丸如橡實者三十, 力可及四百步之遠, 散而布之, 廣可及五六間之地。 又有所謂一窩蜂者, 大如鑞丸者一百枚, 遠之所及, 廣之所布, 亦亞之。 其裝發之易, 亦無殊於行用火銃, 以一人而當百人之用, 其雄猛威神, 又相萬焉。 此專爲守城長技, 而無出此右者也。 向在壬辰、癸巳間, 故將臣具善行, 建請創用, 令摠營裝鑄, 試放於鍊戎臺, 其爆烈震驚, 命中之良, 果如所聞。 伊時, 先大王, 大加稱賞, 命頒於各軍門, 亦各自製, 皆至今俱存云。 下詢而試之, 可知其可用與否。 苟可用也, 令諸軍門及沁營。 多鑄而習用之。 用之果良, 則外邑城守之地, 通命造置, 以爲應變之地焉。 其餘神機、火箭及萬人敵、萬枝砲等屬, 俱莫緊於守城之用, 而卽今閭巷之間, 軍伍之中, 亦不無解其法而製其器者, 朝令一下, 則不難成就矣。 凡城守之方, 火器爲最。 臣曾按壬辰遺事之出於傳錄者, 島山之天兵, 幾乎取勝, 不但地形險固, 見有一綠衣少年之倭, 持白旗獨立指揮, 而砲丸如雨交下, 累日相持, 經略之軍, 進不得一步近城而退。 又於順天之役, 劉都督之矢, 利於行長者, 亦以此也。 以此推之, 其效害可知。
今乃以此島天塹之地, 作爲必守之計, 而此等無上之利器, 棄而不用, 豈非踈虞之甚乎? 夫我國, 非能攻人國, 受人之攻, 而自守爲固之國也。 郝昭之陳倉, 張巡之睢陽, 神機、妙略, 迭發而無窮者, 此自有其人, 亦自有其時, 非可預度而預備。 惟此城守之際, 節目應行之事, 亦皆漫不知省。 昔人則安不忘危, 而今人則危亦忘危, 良足寒心。 沁都之外, 又有南漢最急, 而事有先後, 語涉枝蔓, 臣不敢更事覶縷矣。 噫! 今方內乂安, 治化昭明, 杞國之憂, 似若非時, 而臣獨以爲不然矣。 天象幽遠, 災沴之生, 固難測知, 而其爲應, 又不必今日示警而明日有事也。 近以言之, 或在十年之後, 數年之外, 人心忘遠而狃安, 自古爲然, 而影響桴皷, 終不可誣矣。 顧我殿下, 惟日憧憧, 直以頃日轟轟之異爲憂, 而臣則以爲此外, 又有大者焉。 以咎徵而言之, 則八月嶺南風水之變, 卽是千百年載籍之所未有者。 廨宇震塌, 閭閻掃蕩, 行人飛落而死, 牛馬颺去而斃。 古之夏城門扇飛去十五步, 傳以爲大災, 而此而比之, 則不知其幾倍。 語曰: ‘大水暴風, 皆爲兵象,’ 而又在於南海之徼, 得無有島夷之警乎? 以人事言之, 則國榮乍退之時, 德相陳章願留, 或有爲國榮願與同去者, 或有無國榮, 若不自保者, 唱和紛紜, 誠一變怪。 今德相旣敗, 又有湖囚之結黨聚徒, 捨性命而奔救, 抗國法而橫議, 四道齊起, 列邑爭奮, 觀其頭勢, 甚可危怕。 人心、世道, 陷溺至此, 顧何所不爲耶? 稱怨不已, 必至於仇國。 通文不已, 將及於嘯聚。 然則內地之訌, 亦可慮矣。 戊申之前, 孰知有戊申乎? 臣嘗考戊申《政院日記》, 出征之後, 命遣繼援將, 而諸樞宰, 竝直闕中, 朝以入以此事言, 夕以入以此事言, 延過數日, 而後始決之。 此正議論定時, 虜已渡江者。 命下之後, 當往之人, 稱以無馬、無甲, 又爲延日。 如是而何能討賊? 賴天之靈, 得至今日, 而以國事、兵事而論, 則其不至於危亡, 倖耳。 況今日人才, 比其時何如也? 戎政、紀律, 比其時又何如也? 此臣所以汲汲如目前之憂, 而直廬明燭, 耿耿無寐者也。 噫! 反躬自省, 應天以實之道, 惟在殿下與廟堂、三司之臣, 講究圖勵, 以弘大猷, 當殛者殛之, 當斷者斷之。 以盡消災之方, 而至於備災之說, 則亦不俯採臣言, 毋以匪其人而廢之, 明詔掌戎之臣, 各獻籌略, 克詰張皇, 俾無臨事之悔焉。 幸而不驗, 則臣爲妄人, 而在國家, 亦無所損矣。 臣於往年, 以湖俗之頑毖誥與海島之孽詗察事, 縷縷爲言, 竟未之行矣。 曾未幾年, 不幸近似, 又安知今日所言, 不見徵於他日耶? 此臣所以重言複言, 吃吃而不知已也。 臣於職掌之內, 有一事附陳者, 闕內各處雇立之軍, 皆是東西烏合之輩, 非若京鄕軍伍之入直者, 雜亂無比, 不可以細微而忽之。 故臣果一一審察, 考其根派, 薦主居住, 錄成一案。 以爲不時摘奸之資, 而至於差備近處, 尤有緊重, 而不敢一例考驗。 此皆中官掖隷所屬之類, 固知着實於外軍, 而其亦有說焉。 臣曾於先朝一日朝筵, 有敎曰: ‘昨夜臥閤門, 開顧而視之, 則打更之卒, 坐於戶外, 不知爲何人, 甚可悚然云。’ 仍命搜撿, 諸色雇軍、掖隷, 多有被罪, 衛將亦至拿棍。 臣旣親承下敎, 而又於今夏下敎中有曰: ‘海根, 獨非承宣帶隷’云云, 則臣於是, 尤覺瞿然驚恐之至。 伏未知在內雇立之類, 自內有搜撿之法乎? 下情泄鬱。 伏願特下飭敎, 使本曹郞官, 間五日, 躬詣差備門外近處, 招見雇立各人, 習其顔貌, 知其名字、年歲與居住、薦主, 此亦不害於宮府一體之道, 而在下憂菀之心, 可以紓矣。
批曰: "禁軍、騎士積滯事, 爾言甚是矣。 非法之罪也, 特銓家不善用法之致, 所謂徒法不能自行者此也。 予每深軫此弊, 屢於筵席, 說及此事, 斷斷不已, 以至躬臨郊場, 召詢渠輩, 予意良亦摰矣。 大抵久勤序遷, 無論純用與互用, 兄於初仕之擬, 苟能悉心祛私, 殫誠恢公, 夫安有今日爾疏也? 竊爲前後本兵之臣慨惜, 方欲另下傳敎, 申飭選部矣。 關西武備事, 此亦予嘗所竊歎而切悶者。 予故曰: ‘邊陲文風, 去益日滋, 而朝家不念矯捄之策, 關西一路, 非我有之地’云爾。 廣詢博議, 不可不祛其太甚矣。 附陳關防諸條, 命時、原任大臣、將臣, 爛加消詳, 各具意見稟處。 尾陳差備雇軍事, 在宮府一體之意, 固所當行。 故事兵房承旨與兵曹郞官, 每三日搜撿云云, 此法中廢到, 今雖難盡復舊制, 亦不無倣古通今之政。 此則令本曹判書, 後日登對時, 從長論理稟處。"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274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기(軍器)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법(兵法) / 구휼(救恤) / 사법-행형(行刑)
- [註 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