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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12권, 정조 5년 9월 24일 계해 4번째기사 1781년 청 건륭(乾隆) 46년

부사과 서용보를 팔강 선유 순막 어사로 삼다. 서용보의 별단

부사과(副司果) 서용보(徐龍輔)를 팔강 선유 순막 어사(八江宣諭詢瘼御史)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국가의 허다한 큰 경비(經費)는 오로지 삼남(三南)의 부세(賦稅)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차례로 조창(漕倉)을 설치한 것이 일곱 군데이다. 그리하여 차원(差員)을 두어 다스리고 관선(官船)으로 수송함에 있어 세워 놓은 과조(科條)가 찬연(燦然)하여 패선(敗船)되거나 상하여 냄새가 나고 못쓰게 되는 일이 드물었으니, 바둑알처럼 포치(布置)되고 별처럼 벌여져 있어 계교가 만전(萬全)한 데서 나오게 된 것이 당연하다. 생각건대, 팔강(八江)의 민인(民人)들은 배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데, 실어서 운송해야 할 세곡(稅穀)이 없게 되면 생활할 수 있는 이 끗이 완전히 끊기게 되므로, 조선(漕船)을 떼어 내고서 다소(多少)의 주현(州縣)에 붙여 주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강민(江民)에게 대해 도리(道里)의 원근(遠近)에 따라 임가(賃價)를 헤아려 정한 다음 운납(運納)하는 과정에서 흠축(欠縮)이 나는 것을 생각해서 잡비(雜費)로 계급(計給)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물건을 죄다 가져다 쓰는 것을 경계하는 뜻이 있고 남은 곡식 이삭을 가난한 사람이 주워가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연로(沿路)의 호송(護送)에서는 가벼운 배로 지도(指導)하게 하는 것이 조선(漕船)과 그리 심하게 다를 것이 없으니, 조가(朝家)에서 강민(江民)을 위함에 있어 극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만하다. 근래에는 인심이 예스럽지 못하여 간사한 짓을 부리는 구멍이 층층으로 발생하여, 사선(私船)을 가지고 공곡(公穀)을 실어나르는 자들이 전혀 법을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서 훔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멋대로 물을 타는가 하면 물을 타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사정(私情)을 써서 고의로 패선시키고 있는데, 금년 호남(湖南)의 일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강민(江民)들의 말에 반드시 ‘관리(官吏)들의 주구(誅求)에 시달려 부득이 죄과를 범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관리들에게는 참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거니와, 강민은 과연 간사한 짓을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의 이 말은 팔강 민인(民人)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똑같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본디 한두 명의 더욱 불량한 백성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호남(湖南)의 도백(道伯)이 이런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바람에 쓰러진 소나무를 구득하여 조운선(漕運船)을 더 설치할 것을 청한 것인데, 정신(廷臣)에게 순문(詢問)하니 모두들 행해야 된다고 하였다. 오직 내가 조용히 생각하여 보니, 강민(江民)들이 몇 백 년 동안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해 온 생업(生業)을 하루아침에 빼앗아 없애버리는 것은 백성의 부모(父母)로서 차마 할 수 없는 것이다. 호해(湖海)의 어염(魚鹽)이 갈수록 더욱 넉넉하지를 못하여, 배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이(利)를 잃은 지 오랬다. 이미 저것을 잃고나서 또 이것을 잃는다면 계속 잃게 되는 것이니, 장차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옛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이를 수치로 여겼는데, 더구나 수천 수백 사람의 명맥(命脈)인데이겠는가? 근일 송산(松山)이 곳곳이 모두 민둥산이 되어 있어서, 새로 만든 조선(漕船)을 5년 만에 개삭(改槊)467) 하고 10년 만에 개조(改造)하는 것은 참으로 계속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다. 이것은 오히려 제2건(第二件)의 일이다. 강민들이 어떻게 살아갈 방도가 없는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다. 따라서 도백(道伯)의 청은 우선 정지시키라."하고, 이에 수의(繡衣)에게 명하여 팔강(八江)에 거주(居住)하는 백성들에게 크게 고(誥)하게 하기를,

"아! 그대 백성들은 떠들지 말고 모두 귀담아 들으라. 그대들의 구습(舊習)을 버리고 나의 새로운 명령을 따라 그대들의 주즙(舟楫)468) 을 수리하고 그대들의 초공(梢工)469) 을 선발하여, 저 공곡(公穀)을 운송한 다음 거기에서 남는 이익을 취하여다가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부양하면서 생업을 즐기며 편안히 살라. 이렇게 했는데도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지 않고 모람되이 방헌(邦憲)을 범하는 것을 전처럼 계속한다면, 이는 난민(亂民)인 것이다. 난민에 대해서 다시 무슨 용서할 것이 있겠는가? 관리(官吏)들의 주구(誅求)에 대해서는 내가 바야흐로 엄한 법으로 통렬하게 단죄(斷罪)하고 있으니, 아울러 상세히 들어 알고 있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어사(御史)에게 이 전교(傳敎)를 가지고 강촌(江村)으로 달려가서 부로(父老)와 민인(民人)들을 불러모아 놓고 진서(眞書)를 언서(諺書)로 번역하여 되풀이해서 효유(曉諭)하여 일부 일부(一夫一婦)로 하여금 혹 알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 전교는 그들을 편안히 거접(居接)하게 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제부터 이 뒤로는 방헌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오직 민인들에게 달려 있다고 하라. 그들이 비록 아는 것이 없더라도 어찌 감격(感激)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아울러 이런 뜻으로 거듭거듭 포고(布告)하라. 어사가 이어 또 팔강(八江)의 상하를 순행하면서 민간(民間)의 질고(疾苦)를 채방(採訪)한 다음,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 논열(論列)하여 별단(別單)으로 아뢰라."

하였다. 서용보가 복명(復命)하고 나서 별단을 올렸는데, 그 별단에 이르기를,

"1. 병술년470) 의 전례에 의거하여 경선(京船)을 모집하여 하는 작대법(作隊法)을 만들어 경사(京司)에서 점선(點船)하여 내려보내는 것이 실로 폐단을 구제하는 좋은 방책입니다.

1. 연강(沿江)의 백성들이 소금을 무역(貿易)하려 하면 염전(鹽廛)에서 매매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곧 도고(都賈)471) 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선민(船民)들이 이(利)를 잃는 큰 단서가 되고 있으니, 엄금해야 합니다.

1. 해서(海西)의 사수 별장(斜水別將)은 영교(營校)의 사인(私人)으로 차송(差送)하지 말고 부근에 있는 변장(邊將)에게 예속시켜 상전세(上箭稅)를 걷게 함으로써 침학(侵虐)하는 폐단을 제거하게 하소서.

1. 법부(法府)의 이예(吏隷)가 강촌(江村)에서 폐단을 부리는 것을 엄히 조사하여 통렬히 징계시키게 하소서.

1. 궁방(宮房)의 하속(下屬)들이 배를 나포하는 폐단을 엄히 금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266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교통-수운(水運)

  • [註 467]
    개삭(改槊) : 배를 수리하는 일.
  • [註 468]
    주즙(舟楫) : 배와 노.
  • [註 469]
    초공(梢工) : 뱃사공.
  • [註 470]
    병술년 : 1766 영조 42년.
  • [註 471]
    도고(都賈) : 매점(買占) 또는 판매 독점 행위.

○以副司果徐龍輔爲八江宣諭詢瘼御史。 敎曰: "國家許大經費, 專靠於三南賦稅。 次第設漕倉者七。 差員而莅之, 官船而輸之, 科條燦然, 鮮或臭載, 宜乎碁置星羅, 計出萬全。 竊惟八江民人, 以船爲業, 而無稅穀之可載, 則生移頓絶。 割出漕船, 以多小州縣, 付之江民, 隨道里之遠近, 量定賃價, 軫運納之欠縮, 計給雜費, 戒存盡物之取, 事同遺秉之利, 而若其沿路之護送, 輕舟之指導, 又與漕船, 無甚異同, 則朝家之爲江民, 可謂靡不用極。 邇來人心不古, 奸竅層生, 持私船載公穀者, 暋不畏法, 偸竊之不足, 恣意和水, 和水之不足, 用情故敗。 以至于今年湖南而極矣。 江民之言, 必曰: ‘困於官吏之誅求, 不獲已犯科。’ 官吏誠有罪難赦, 江民其果不作奸乎? 然予此言, 非謂八江民人同心幷貫也。 就其中自有一二尤無良之民故耳。 以故湖南伯, 爲革是弊, 求得風落之松, 請設加漕之船, 詢于廷臣, 僉曰可行。 惟予靜言思之, 江民幾百年傳子傳孫之業, 一朝奪而祛之, 爲民父母, 有所不忍。 湖海魚鹽, 轉益不贍, 業船者之失利久矣。 旣失於彼, 又失於此, 失之不已, 將何聊生? 古人以一夫不獲爲恥, 況千百人之命脈乎? 近日松山, 在在童濯, 新漕船之五年改槊, 十年改造, 誠有難繼之憂, 此猶屬第二件事。 念江民契活之無津涯, 不覺丙枕靡安, 道伯之請姑令停止。" 爰命繡衣, 誕誥江居民人: "嗟! 爾民人, 咸聽無譁。 棄乃舊習, 從予新令, 理爾舟楫, 選爾梢工, 載彼公穀, 取其嬴利, 仰事俯育, 樂業安堵。 夫如是矣, 而不體至意, 冒犯邦憲, 如疇昔之爲, 此亂民也。 於亂民, 復何饒貸? 曰若官吏誅求, 予方嚴法痛斷, 幷宜聽悉。" 又敎曰: "御史持此傳敎, 馳往江村, 召集父老民人, 眞諺翻謄, 反復曉諭, 使一夫一婦, 無或不知不聞。 惟玆之敎, 出於欲奠厥居之意, 從今以往, 無底邦憲, 惟在民人等。 渠輩雖無知, 寧無感激之心? 竝以此意, 申申布告。 御史仍又循江上下, 採訪民間疾苦, 還朝後論列, 別單以聞。" 龍輔復命, 進別單。

一, 請依丙戌已例, 聚募京船, 爲作隊之法, 自京司點船下送, 實爲救瘼之良方也。 一, 沿江民人之貿鹽, 鹽㕓不許賣買, 便成都賈, 大爲船民失利之端, 在所嚴禁。 一, 海西斜水別將, 勿以營校私人差送, 屬之附近邊將, 收上箭稅, 以除其侵虐之弊。 一, 法府吏隷, 作弊江村者, 嚴査痛懲。 一, 宮房下屬捉船之弊, 不可不嚴禁。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266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교통-수운(水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