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서명선이 패선의 처리와 격쟁을 한 군졸의 처리를 여쭈다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과강(課講)을 친시(親試)하였다. 이어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아뢰기를,
"지사(知事) 구선복(具善復)의 상소에 본국(本局)의 강화(江華) 대변선(待變船)에 대해 세곡(稅穀)을 실어 나르는 것을 허락하고 연읍(沿邑)에서 착류(捉留)하는 것을 금단하게 할 일로 앙청(仰請)하였습니다. 이제 훈국(訓局)의 선운(船運)에 관한 일로 호조·선혜청 당상이 상의하였는데, 모두 이 배를 파기하지 않으면 폐단이 자심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국곡(國穀)이 패선(敗船)되거나 상하여 못쓰게 된 것이 7척(隻)이나 되는 많은 수에 이르렀으니, 경용(經用)을 생각하면 진념(軫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훈국에서는 파기하지 말게 할 것을 청하고 호조·선혜청에서는 반드시 파기해야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신의 의견에는 3월 이후에는 다시 운송할 수 없게 할 것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남재(濫載)와 만재(晩載)를 막론하고 기일을 어기는 것은 똑같다. 나는 선왕조(先王朝)의 수교(受敎)에 의거 하나를 징계하여 백 명을 면려시키는 뜻으로 한두 선인(船人)에게 즉시 일률(一律)을 시행한 연후에야 뒷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사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패선되거나 상하여 못쓰게 되는 일이 있었어도 우선 법을 적용하지 않았었으나, 이 뒤로 계속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법대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그 고법(古法)을 따져본다면 율(律)을 범한 자는 전가 사변(全家徙邊)393) 시켜야 하는데, 숙묘(肅廟) 때 파선(破船)한 선주(船主)와 사격(沙格)에게 효시(梟示)를 시행할 일로 일찍이 수교(受敎)가 있고나서 이어 전가 사변의 율이 없어진 것이다. 그 뒤 갑자년394) 사이에 서울에 거주하는 선주(船主)에게 특별히 효시(梟示)를 시행하라는 수교가 있었으니, 이는 그 일을 중히 여기는 뜻이었다. 이제 본국(本局)의 절목(節目)의 유무가 패선의 여부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렇게 재결할 것을 청하는 것인가? 지난번 판부(判付)에서도 하교한 것이 있었다. 패선(敗船)된 것 때문에 수령이 파출(罷黜)되는 경우가 많고 연해의 백성들도 곤고(困苦)스러움을 받는가 하면, 물에 빠진 곡식을 건져낼 즈음 연해의 곤궁한 백성들이 큰 파도 속을 왕래하면서 누차 위태로운 지경을 당하게 되는데, 그 정상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딱하고 측은한 마음이 든다. 나는 백성을 위하여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는 방도에 있어 속히 중률(重律)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는데, 이 또한 백성을 살릴 방도에 의거 사람을 죽인다는 뜻인 것이다. 이 일은 끝내 경솔히 조처하기 어려우니, 호조·선혜청 당상과 유사 당상(有司堂上) 및 훈장(訓將)이 익히 상의한 뒤에 다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성내(城內)의 거둥에는 본래 격쟁(擊錚)395) 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근래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런 법의(法意)를 모르고 위외(衛外)에서 격쟁한 사람이 6인이나 되는 많은 수에 이르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신의 의견은 4건(件) 이외의 격쟁한 사람에게는 속히 별반(別般)의 감률(勘律)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이미 하교하려 했었으나, 아직 하지 못하였다. 4건(件)의 일 이외에 관계된 것은 그 율이 어떤 율에 해당이 되는가?"
하였다. 형조 판서 김노진(金魯鎭)이 아뢰기를,
"충군율(充軍律)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충군법(充軍法)은 한번 충군되면 끝내 사전(赦典)에 들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형벌을 신중히 하는 도리이겠는가? 옛날에는 혼금(閽禁)이 엄하지 않아서 격쟁하는 사람들이 연영문(延英門) 밖에서 마음대로 격쟁하였는데, 그럴 경우 중금(中禁)이 그 쟁(錚)을 빼앗고 그 사람은 해조(該曹)에 출부(出付)시켰었다. 선조(先朝) 때 진선문(進善門)에 북을 처음 설치하고서부터 격쟁법이 드디어 폐기되었다. 근래에는 혼금이 조금 엄하여져 들어와서 격고(擊鼓)할 수가 없기 때문에 위외(衛外)에서 격쟁하는 사람을 금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실로 하정(下情)을 통달시키게 하는 방도인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외람되고 난잡스러움을 야기시키고 있으니,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 기강이 해이해져 백성들의 풍습이 완악한 탓으로 가전(駕前)에서 격쟁(擊錚)하는 것을 예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영(御營) 상번군(上番軍)의 복색(服色)으로 바꾸어 입고 천청(天聽)을 경동(驚動)시키는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준례에 따라 조율(照律)해서는 안됩니다. 해영(該營)으로 하여금 곤장(棍杖)을 치게 하여 회시(回示)하기를 기다린 뒤에 각별히 엄히 다스리소서. 군문(軍門)에서는 오로지 기율(紀律)을 제일로 삼는데 부하(部下) 군졸이 이런 죄를 범하였으니, 해당 대장(大將) 이창운(李昌運)은 파직시키고 해당 초관(哨官)은 먼저 사태(沙汰)시키고 나서 곤장을 치게 하소서."
하니, 대장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54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왕실-의식(儀式) / 교통-수운(水運) / 사법-치안(治安) / 군사-군정(軍政)
- [註 393]전가 사변(全家徙邊) : 죄인(罪人)을 그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하던 형벌. 조선조 세종 때부터 북변(北邊) 개척을 위한 정책의 하나로 실시되었음.
- [註 394]
갑자년 : 1684 숙종 10년.- [註 395]
격쟁(擊錚) : 원정(冤情)을 임금에게 직소(直訴)하기 위하여 출가(出駕)의 도상(途上)에서 꽹과리를 치고 하문(下問)하기를 기다리던 일.○丙辰/親試抄啓文臣課講, 仍行次對。 領議政徐命善啓言: "知事具善復上疏, 以本局江華待變船, 許載稅穀, 禁斷沿邑之捉留事, 有所仰請矣。 今以訓局船運事, 俄與戶、惠堂相議, 則皆云不罷此船, 則爲弊滋甚云。 見今國穀之臭載, 以至七隻之多, 言念經用, 不可不軫念。 訓局則以勿罷爲請, 戶惠則以必罷爲言, 臣意三月後, 不得再運事爲定, 似好矣。" 上曰: "無論濫載與晩載, 愆朞則一也。 予則依先王朝受敎, 以懲一勵百之意, 一二船人, 卽施一律, 然後可杜後弊矣, 予不欲傷人, 故雖有臭載之事, 而姑不用法, 嗣後則不可不如法以繩矣。 原其古法, 則犯律者爲全家徙邊, 而至肅廟時, 破船船主與沙格, 施以梟示事, 曾有受敎, 仍無全家徙邊之律矣。 其後甲子年間, 有京居船主, 特施梟示之受敎, 此是重其事之意也。 今此本局之節目有無, 何關於敗船與否, 而如是請裁乎? 頃於判付, 亦有下敎矣。 以其稅船之致敗, 守令多致罷黜, 沿民亦困苦, 其於鉤拯之際, 沿海窮民, 往來鯨波, 屢阽危境, 言念其狀, 不覺矜惻。 予則以爲在爲民除害之道, 不可不亟施重律, 此亦生道殺人之意也。 此事卒難輕處, 戶、惠堂與有司堂上及訓將, 爛商後更爲稟處。" 又啓言: "城內擧動, 本無擊錚之事矣。 近來, 愚民不知法意, 至於衛外擊錚者, 多至六人, 事甚驚駭。 臣意則四件外擊錚人, 亟施別般勘律宜矣。" 上曰: "此事, 業欲下敎而未果。 係是四件事外, 則其律當照何律乎?" 刑曹判書金魯鎭言: "用充軍律矣。" 敎曰: "充軍之法, 一次充軍, 則終不入於赦典, 是豈欽恤之道乎? 昔則閽禁不嚴, 擊錚者任自擊錚於延英門外, 則中禁奪其錚, 而出付其人於該曹矣。 始自先朝, 置鼓於進善門, 而擊錚之法遂廢矣。 近因閽禁之稍嚴, 不得入來擊鼓, 故不禁衛外擊錚者, 實爲通下情之道, 而反致猥雜亦可悶矣。" 又啓言: "近來紀綱解弛, 民習愚頑, 駕前擊錚, 視若尋常。 至有御營上番軍, 換着迪色, 驚動天聽之擧, 此不可循例照律。 令該營待用棍回示後, 各別嚴治。 軍門專用紀律, 而部下軍卒, 有此所犯, 請該大將李昌運罷職, 當該哨官, 先汰後棍。" 命大將從重推考。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54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왕실-의식(儀式) / 교통-수운(水運) / 사법-치안(治安) / 군사-군정(軍政)
- [註 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