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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4월 5일 무신 3번째기사 1781년 청 건륭(乾隆) 46년

홍국영의 졸기

홍국영(洪國榮)이 죽었다. 경자년228) 봄부터 정신(廷臣)들이 일제히 홍국영의 하늘까지 닿은 큰 죄에 대해 성토하였는데도, 임금이 끝내 주벌(誅罰)을 가하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횡성현(橫城縣)으로 방축시켰다가 다음에는 강릉부(江陵府)로 방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참으로 사려(思慮)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權柄)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威福)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極罪)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는 나의 허물이었으므로 이제 와서는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9월 이전의 죄는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9월 이후의 죄에 대해서는 더욱 할 말이 없다. 내가 만약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중신(重臣)의 한 차자(箚子)에 그의 죄가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공의(公議)는 숨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니, 예조 판서 김익(金熤)이 말하기를,

"권간(權奸)의 신하가 예로부터 한정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만, 홍국영처럼 손으로 나라의 명운을 움켜쥐고 권세가 임금을 넘어뜨릴 정도에 이른 자는 전적(典籍)이 있은 이래 없던 바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홍국영에 대해 작위(爵位)를 높여 주고 은수(恩數)로 총애하여 주신 것 또한 전적이 있은 이래 없던 것이었습니다. 권병(權柄)이 한번 옮겨지자 국세(國勢)가 거의 위태할 뻔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하여 보면 써늘하여 가슴이 떨립니다. 이는 실로 전하의 과실인 것인데, 신이 전석(前席)에서 자신을 책망하는 하교를 우러러 받드니, 삼가 우충(愚衷)에 스스로 격동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예판의 말이 옳다. 한마디로 포괄하여 말한다면, 이는 곧 나의 과실인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31면
  • 【분류】
    인물(人物)

洪國榮死。 自庚子春, 廷臣齊聲討國榮滔天之罪, 而上竟不加誅。 初放橫城縣, 後放江陵府, 至是死。 國人莫不憤鬱。 上曰: "此人之陷此罪, 誠意慮之所未到。 其樹立何如, 倚毗何如? 初以與同休戚, 不重則不威, 故假之權, 渠則不思權太重、位太隆, 謹畏自戢之道, 惟寵是恃, 威福自用, 竟抵極罪。 反以思之, 此予之過, 到今自反之不暇, 尙何說哉? 九月以前之罪, 姑勿論。 九月以後之罪, 尤無可言。 予若不言, 人豈知之乎? 重臣一箚, 厥罪彰著無餘, 可見公議之難掩也。" 禮曹判書金熤曰: "權奸之臣, 從古何限, 而如國榮之手執國命, 勢傾人主者, 載籍以來所未有也。 殿下於國榮, 爵位以崇長之, 恩數以寵眷之, 亦載籍以來所未有也。 權柄一移, 國勢幾危, 至今追思, 澟然寒心。 此實殿下之過失也, 臣於前席, 仰承責躬之敎, 竊不勝愚衷自激矣。" 上曰: "禮判之言, 好矣。 一言而蔽之曰, 卽予之過矣。"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31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