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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11권, 정조 5년 3월 18일 신묘 2번째기사 1781년 청 건륭(乾隆) 46년

이문원에서 《근사록》을 강하고 이어 홍문관에서 《심경》을 강하다

이문원(摛文院)에 행차하여 내각(內閣)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근사록(近思錄)》을 강하게 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서 인정전(仁政殿)으로부터 본원(本院)에 나아가 어좌(御座)에 오르니, 의장(儀仗)이 동·서로 나누어 섰다. 향로에 연기가 피어오르니 음악을 연주하였다. 인의(引儀)가 각신(閣臣)을 인도하여 입시(入侍)하였는데, 제학 김종수(金鍾秀)·유언호(兪彦鎬), 직제학 정민시(鄭民始)·심염조(沈念祖), 직각 서정수(徐鼎修), 대교 정동준(鄭東浚)이 왼쪽을 경유하여 뜰 동쪽의 배위(拜位)로 나아가고, 원임 제학 이휘지(李徽之)·황경원(黃景源)·이복원(李福源)·서명응(徐命膺), 직제학 서호수(徐浩修), 직각 정지검(鄭志儉)·김희(金憙)·김우진(金宇鎭), 대교 서용보(徐龍輔)는 오른쪽을 경유하여 뜰 서쪽의 배위(拜位)로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배례가 끝나자 시임은 동쪽 계단으로 올라오고, 원임은 서쪽 계단으로 올라와서는 반열을 합쳐 한 줄로 만들어 전(殿)으로 올라 강위(講位)로 나아갔다. 영첨(領籤)이 안책(案冊)을 내어오니 승지가 전봉(傳捧)하여 꿇어앉아 올렸다. 검서관(檢書官)이 각신(閣臣)에게 책(冊)을 주고, 청강(聽講)을 명하였으며, 여러 신하들이 전으로 올라왔다. 영경연사(領經筵事)는 서명선(徐命善), 지경연사(知經筵事)는 정상순(鄭尙淳)·김익(金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는 이명식(李命植)·정창성(鄭昌聖), 시강관(侍講官)은 박천형(朴天衡), 시독관(侍讀官)은 이시수(李時秀)·이정운(李鼎運)·이겸빈(李謙彬)·유맹양(柳孟養), 검토관(檢討官)은 조정진(趙鼎鎭)·박천행(朴天行)·권이강(權以綱)·홍문영(洪文泳)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사록》은 곧 학문의 요지(要旨)인데, 태극도설(太極圖說)이 책을 펴면 가장 중요한 뜻이 되니 먼저 이 장(章)을 읽으라."

하니, 심염조(沈念祖)가 독주(讀奏)하고 문의(文義)를 진달하였다. 이것이 끝나자 하교하기를,

"오늘의 모임은 성대하다. 새로 본원(本院)을 옮기고 특별히 이 연석(筵席)에 임어하여 경들과 일당(一堂)에서 자순(諮詢)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어찌 곧 글을 이야기하고 경(經)을 설명하고서 끝내려는 것뿐이겠는가? 문의 이외에 오늘날의 일에 관해서 할말이 많을 것이다. 위로는 과궁(寡躬)의 허물과 시정(時政)의 득실에서부터 백성들의 고락(苦樂)과 전왕(前王)의 치란(治亂)에 이르기까지, 일은 말하지 못할 것이 없고 말은 끝까지 못할 것이 없게 함으로써 상하(上下)가 서로 이익됨이 있게 하자는 것이, 곧 내가 오늘 본원에 임어한 뜻이다. 만약 책을 가지고 연석에 나오게 하여 준례에 따라 문의만 대답하게 한다면, 이는 한마당 한가한 설화(說話)에 불과한 것이니, 군덕(君德)과 치모(治謨)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대개 강설(講說)은 곧 말로 인하여 의문을 일으키고 의문으로 인하여 의문을 풀게 하여 결국은 사람의 선심(善心)을 감격하여 발현하는 데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자(朱子)155)상산(象山)156) 이 의리가 같지 않아서 문로(門路)가 각각 달라지게 된 것이다. 〈주자가〉 백록 서원(白鹿書院)에서 강론할 때에 강을 듣는 문인(門人) 중에 왕왕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던 것은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와 같아서였다. 이제 성인(聖人)의 말을 외면서 성인의 도(道)를 강설하여 조금이나마 개발(開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를 바란다면, 오로지 강설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 오늘 마땅히 경들과 함께 하루종일 끝까지 담론하고 밤을 지새워 아침까지 계속 하려하니, 경들은 다 말하여 숨김이 없어야 할 것이며, 나도 마땅히 겸허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서 절하고 수명(受命)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책의 책명은 곧 《근사록(近思錄)》인데, 선유(先儒)들이 이 책을 가지고 사자(四子)157) 의 계제(階梯)로 삼았다. 이는 대개 학자가 학문을 함에 있어 먼저 가까운 데에서부터 공부하여 간절히 묻고, 비근한 데서부터 생각함으로써 가까운 데에서 먼 데로 이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미 ‘근사’로 이름하였으니, 편수(篇首)에 먼저 성리(性理)의 은미하고 깊은 내용을 말한 것이어서 초학(初學)이 깨우칠 만한 것이 아는 듯 싶으며 근사(近思)의 뜻에 맞지 않는 점이 있는 듯 싶다. 무릇 학자는 비록 도(道)를 터득한 것이 깊고도 돈독한 뒤일지라도 의리(義理)의 중요 부분과 성명(性命)의 본원(本原)에 대해 갑자기 뛰어넘어 의논(議論)한 적이 없었다. 자공(子貢)이 총명하고 민첩한 식견으로 성문(聖門)에서 친자(親炙)되어 이미 승당(升堂)158) 의 반열에 올랐는데도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서는 오히려 듣지 못하였었다. 이에 의거하여 궁구하여 보건대, 이 책에서 첫머리에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기재한 것은 참으로 신장(神章)에 가까운 것으로 중화(中和)에 대해 말한 것은 거의 없으니, 학설이 너무 높고 말이 너무 깊은 결과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설자(說者)가 혹 주자(朱子)《소학(小學)》을 엮으면서 첫머리에 ‘원형 이정(元亨利貞)’과 ‘인의 예지(仁義禮智)’를 말하였고, 또 이 책을 엮으면서 첫머리에 ‘무극 태극(無極太極)’과 ‘미발 이발(未發已發)’을 말한 것은 특별히 초학자(初學者)들로 하여금 그 명의(名義)를 알아서 향하여 나갈 데가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근사하다. 그러나 공자(孔子)가 성명에 관해서는 드물게 말한 뜻으로 견주어 보면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지 않다. 평일 이에 대해 무슨 강구(講究)한 뜻이 있는가?"

하니, 이복원(李福源)이 대답하기를,

"공문(孔門)에서 사람을 가르친 것은 효제(孝悌)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만, 맹자(孟子)에 이르러 처음으로 성명(性命)에 관해 말을 하였고, 정자(程子)에 이르러서는 학문(學問)을 논하고 도(道)를 논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은미하고 심오한 뜻으로 다른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時義)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 도체(道體)에 대해 먼저 말하였다는 것은 여동래(呂東萊)159) 의 서문(序文)에서 이미 언급하였으며 《중용(中庸)》에서 먼저 천명(天命)이 성(性)이라고 말한 것도 또한 이런 뜻인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체(大體)는 그러하다. 그렇다면 공자(孔子)가 사람을 가르치는 차서(次序)와 주자(朱子)가 사람을 훈도하는 계급(階級)이 각각 다른 점이 있게 되는데, 그 같거나 다른 뜻의 이유에 대해 분석(分析)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종수(金鍾秀)가 대답하기를,

"학자(學者)는 모름지기 먼저 대강(大綱)을 안 연후에야 바야흐로 준적(準的)이 서게 되고 손을 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자가 반드시 이 태극도설을 가지고 편수(篇首)에 게재한 것은, 세급(世級)이 더욱 내려갈수록 설명을 더욱 상세히 하기 위한 것에 연유한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좋다. 대개 맹자의 세대에는 이단(異端)이 점차로 일어나고, 정도(正道)가 점점 회색(晦塞)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맹자가 할수없이 성(性)을 말하게 된 것이다. 염계(濂溪)160) 때에는 성인의 말씀이 이미 없어져 버려 사설(邪說)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으므로 염계가 할수없이 무극(無極)에 대해 말을 한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지 않은 것을 맹자가 말한 것이며, 맹자가 말하지 않을 것을 염계가 처음으로 말을 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하니, 유언호(兪彦鎬)는 대답하기를,

"성현(聖賢)이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상략(祥略)이 같지 않은 것은 그 사세가 참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더구나 학문(學問)하는 도리는 아는 것을 먼저하고 행하는 것을 뒤에 하는 것이니, 진실로 성도(性道)의 본원(本原)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손을 대어 공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책을 엮는 법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주자가 말한 수신(修身)의 대법(大法)은 《소학》에 기재되어 있고, 의리(義理)의 정미(精微)에 대해서는 《근사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선유(先儒)들이 또 이 두 책을 진실로 도(道)를 바라 보는 계제(階梯)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장(祠章)에 치중하면서부터 이 두 책을 눈에 붙여 읽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비록 도에 들어가려 해도 어려웠다. 지금의 세상을 돌아보건대, 온 세상 사람들이 단정한 자세로 도를 향하여 달려갈 마음이 없어 분발 면려하고 연마하려는 노력이 없는 탓으로 이 책을 무용지물처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한갓 자회(字會)·자의(字義)·구탐(句探)·구지(句旨)뿐만이 아니라 큰 규모(規模)와 상세한 절목(節目)에 이르기까지도 애당초 연구하지 않고 있으며 체용(體用)의 본말(本末)과 대소(大小)의 상세함과 소략함에 대해서도 또한 강마(講劘)하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옛 학자들의 병폐는 비근(卑近)한 것에 염증을 내고 현원(玄遠)한 것을 힘쓰며 순서를 건너뛰기를 좋아하며 허무(虛無)를 좇는 것이었으므로 사장(詞章)이나 이단(異端)으로 귀결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학자들의 병폐는 사장과 이단까지도 마음을 다하여 힘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 모든 문자에 속한 일을 한쪽에다 팽개쳐 놓고 울타리 가의 물건처럼 여기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세상에서 우리 나라를 문명국(文明國)으로 여겨 예의(禮義)가 풍속을 이루었고 치교(治敎)가 융성하여 유현(儒賢)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일컫고 있다. 이런 때문에 말학(末學) 후생(後生)으로서 비록 실제의 공부를 힘써 행하지 못하여 어려서부터 익혀 늙도록 해도 갈피를 못잡고, 나가서는 종[奴]이고, 들어와서는 주인(主人) 행세하는 자일지라도, 그래도 성리(性理)의 찌꺼기와 성현(聖賢)의 말씀이나마 지니고 있게 되었다. 따라서 비록 가정[家]마다 공(孔)·맹(孟)에 대해 이야기하고, 호(戶)마다 정(程)·주(朱)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빈말이 아닌 것이다. 후세에 이르러서도 선비의 옷을 입고 관을 쓴 사람으로서 근거없는 이야기를 하고 변폭(邊幅)만 꾸미는 자에게서도 또한 유풍(遺風)과 여속(餘俗)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일(近日) 이래에는 이런 일마저도 또한 폐기되었단 말인가? 옛날에는 칠성(七聖)161) 이 모두 미혹되었다는 탄식이 있었거니와 지금은 온 세상이 모두 미혹되었다고 할 만하다. 경연(經筵)에서는 도움을 의뢰할 가망이 없고 횡사(黌舍)에서는 현송(絃誦)하는 소리가 끊어졌으니, 이는 모두 교화가 밝혀지지 않은 데서 온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내가 바야흐로 내 자신을 돌이켜 스스로 반성하기에도 겨를이 없으나, 그 까닭을 공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상하 사이에 반드시 초래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들은 모두 경악(經幄)162) 의 근신(近臣)이기 때문에 이에 나의 속 마음을 펴서 보여 창언(昌言)163) 을 듣고자 하는 것이니 이러한 날에 무엇을 꺼려서 아뢰지 않는가? 가언(嘉言)과 선모(善謨)로 위로는 나의 마음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아래로는 지금 세상의 습속(習俗)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각(內閣)을 옮겨 설치한 처음을 맞아 특별히 경연(經筵)을 열고 일대(一代)의 신진(新進)인 사람들을 선발하여 비로소 강제(講製)를 만들었으니, 이는 곧 나의 고심(苦心)과 지극한 뜻으로 혹 조금이나마 보익(補益)되는 점이 있기를 바라서였다. 그런데도 만약 단지 헛된 이름만 널리 퍼지고 끝내 실효가 없게 된다면, 용관(冗官)을 창립한 잘못을 내가 진실로 사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여러 근신에게 기대하는 것이겠는가?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숨김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경들은 모두 단정하고 방정한 선비로서 이미 지척(咫尺)의 연석(筵席)에 올라서 만약 한마디 말도 없이 물러간다면, 비단 스스로의 마음에 부끄러울 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후세에 전하여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오늘날 문풍(文風)을 진기시키고 치도(治道)를 만회할 수 있는 요체에 대해 들을 수 있겠는가?"

하니, 서명선(徐命善)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이래 무릇 문사(文士)들을 장려하고 권면하는 방도에 대해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풍이 진기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아무런 이유가 없겠습니까? 대개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기다리지 않고 흥기한 사람은 모두가 호걸(豪傑)스런 선비인 것입니다. 그런데 쇠세(衰世)에 호걸스런 선비를 어찌 얻기가 쉽겠습니까? 권선 징악(勸善懲惡)하는 정사를 행하지 않고서 능히 스스로 도제(導齊)164) 의 근본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예로부터 얻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지금 그런 폐단을 바로 잡는 근본은 전적으로 ‘격양(激揚)’이라는 두 글자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진실로 탁류(濁流)를 치고 청류(淸流)를 드날리어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글을 모르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며 글을 잘하는 것이 귀한 것임을 알게 한다면, 인재가 울연(蔚然)히 흥기하고 치도(治道)가 성취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는 전하께서 한번 전이(轉移)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돌아보건대, 지금은 세급(世級)이 이미 낮아졌고 다스리는 도리도 점점 비하되고 있으니 주나라 문왕을 기다리지 않고 흥기하는 것을 어찌 지금의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권선 징악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그 대체(大體)가 좋다. 그른 것을 고치고 습속을 바로잡을 방도에 대해 여러 신하들은 끝까지 다 말하여 줄 수 있겠는가?"

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오늘 강회(講會)에 친림하신 것은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성상(聖上)께서 과연 계옥(啓沃)하고 보도(輔導)하는 유익함을 받아들이시어 끝내는 문풍을 크게 진기시키는 효험이 있게 된다면 오늘의 강화가 진실로 불행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혹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미문(彌文)165) 을 만드는 데서 그치는 것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본각(本閣)의 규도(規度)를 오랫동안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성의(聖意)가 애를 쓰고 여러 신하들이 마음을 기울인 결과로 끝내는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신은 이에 대해 삼가 기뻐하면서도 또한 걱정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후 치법(治法)과 정령(政令)이 모두 처음에는 힘을 쓰다가도 나중에는 해이해지는 조짐이 없지 않았는데, 각사(閣事)의 성취된 것이 이와 같이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니, 이로부터 온갖 일을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면 끝에 가서 해이해지는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본말(本末)이 전도될 것이니 이것이 신이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렇다. 선유(先儒)의 말에 ‘정전(井田)은 반드시 한 고을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먼저 한 고을에다 시행하여 보고, 천하에 미루어 나가게 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임금된 자가 나라를 경영하고 학자(學者)가 덕을 증진하는 것은 반드시 모두 먼저 들어가는 첫머리 부분에서부터 손을 댄 연후에야 순서대로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각(內閣)을 설치한 것도 또한 이러한 뜻인 것이다. 문풍을 진기 면려하고 일세(一世)를 고동(鼓動)시키는 효과를 장차 하나의 내각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 지가 이제 이미 6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비로소 대략 규도(規度)를 정하였고 의절(儀節)도 점차 확립되었으니, 거의 명분에 따라 실효를 요구할 가망이 있게 되었다. 내가 정성스럽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어찌 부질없는 것이었겠는가? 과거 세조조[光廟朝] 때 처음으로 내각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는데, 그 요점은 송(宋)나라와 명(明)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중고(中古) 이후에 폐기되고 수거(修擧)하지 않았으며, 선조(先朝) 때에 이르러 비로소 편차인(編次人)을 두고서 사륜(絲綸)을 윤색(潤色)하는 임무를 맡겼었다. 다만, 그 직(職)에 정하여진 호칭이 없고, 그 관(官)에 정하여진 법규가 없어 비록 내각을 수거하려는 뜻을 갖고는 있었지만 내각의 제도를 아직 회복하지 못하였다. 지금 이 내각을 설치한 것은 내가 창립한 것이 아니라, 곧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대략 가감(加減)한 것이다. 이제 다행히 의문(儀文)이 비로소 갖추어졌으나, 만약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본받지 않고 한갓 허함(虛啣)만 벌려놓게 한다면, 오로지 내가 문풍을 진기하려는 본의(本意)가 그저 그 부문(浮文)을 보태는 것에 족하게 될 뿐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수거(修擧)하는 정사(政事)가 단지 일각(一閣)에만 행하여졌을 뿐이요, 이밖의 온갖 법도에 대해서는 실로 처음의 계획대로 계속해 가지 못한다는 탄식이 있다. 그리하여 위미(委靡)하고 총잡(叢雜)스러워 수습할 수가 없으니, 오히려 어찌 치화(治化)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지금의 국사를 돌아보건대, 어렵고 걱정스러운 일이 눈에 가득하고, 조상(朝象)이 흐트러져 아직도 안정이 되지 않고 있으며, 백성들의 수심과 고통이 아직도 구제되지 못하고 있다. 사기(士氣)가 더욱 퇴폐되어 가고 있으니 장차 이를 어떻게 진작(振作)시킬 것이며, 인재(人才)가 점점 비하되고 있으니 장차 이를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 군정(軍政)이 날로 문란해지는데도 그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이 없고, 경비(經費)가 날로 부족한데도 용도를 넉넉하게 할 방도가 없다. 이밖에 갖가지 병폐에 대해서는 이루 거론할 수 없이 많으니 진실로 그 이유를 따져보면, 그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 것이겠는가? 오늘날 진실한 말이 없는 것이 곧 오늘날의 큰 병폐의 근원인 것이다. 잘은 모르겠으나, 내가 간언(諫言)을 나오게 하는 실상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경들에게 간언을 올리려는 정성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이에 참으로 좌우를 돌아보면서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깨달을 수가 없다. 아! 명(明)나라의 과도(科道)에 대한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에 설관(說官)한 것은 대개 언로(言路)를 널리 열기 위한 것이었는데 결국에는 붕당(朋黨)으로 나누어져 점차 서로 참소하고 이간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사람을 기용하면 문득 탄핵하고 논박하는 소장이 올라오고, 한마디 말을 하면 뒤따라 결적(抉摘)을 가하여 새외(塞外)의 장수가 서로 잇따라 주참(誅斬)을 당하고, 임하(林下)의 선비들도 또한 모두 화(禍)를 당하게 되었다. 명(明)나라 2백 년의 원기(元氣)가 이에서 다시는 진작되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의 풍기(風氣)와 습상(習尙)으로 만약 공거문(公車文)166) 을 날로 쌓이게 한다면 혹 이런 폐단이 있을까 걱정스럽지만, 언로는 나라의 혈맥(血脈)이니 존망(存亡)이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일에 앞서 미리 걱정하여 언로를 열 방도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목이 메인 것 때문에 밥먹는 것을 폐기하는 데로 귀결되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이러한 도움을 구하는 하교는 진실로 속마음을 펴서 보이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연석(筵席)에 오른 여러 신하들이 끝내 한마디 말도 우러러 부응함이 없으니, 이는 실로 나의 평일의 정성이 능히 사람들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한 탓이다. 이에 진실로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나 또한 능히 한탄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김종수(金鍾秀)가 대답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선한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모름지기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이 자기 입으로 말한 것보다 더 깊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아랫사람을 감동시켜 미덥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상(聖上)께서 비록 부지런히 구언(求言)하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만, 신하 가운데 끝내 응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마음속으로 임금의 마음이 창언(昌言)을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 혹 사교(辭敎)와 다를 수도 있다고 여겨서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오로지 전하께서 더욱 자신에게 반성하는 방도에 진념(軫念)하시어 간언이 나오게 하는 여지를 만드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정민시(鄭民始)는 대답하기를,

"천하의 모든 일은 먼저 규모(規模)를 세운 연후에야 그 실효를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근래 세도(世道)가 더욱 비화되고 문풍(文風)이 더욱 무너져 내린 것은 오로지 규모가 확립되지 않은 때문이며, 규모가 확립되지 않은 것은, 또 정치가 요도를 얻지 못한 것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러하다. 어떻게 하면 과연 요도(要道)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심염조(沈念祖)가 대답하기를,

"근래의 습속이 《소학(小學)》을 드물게 공부하기 때문에 어려서는 몽양(蒙養)의 기회를 잃게 되고 자라서는 예절을 행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결국은 행검(行檢)이 방만하게 전도되기에 이르고 어지러이 명리(名利)에 골몰하게 됩니다. 이제 근본을 추구하는 뜻으로 저재(儲才)의 방도를 극진히 하고자 한다면, 옛날 《소학》의 가르침이 바로 급선무인 것입니다. 이런 때문에 예로부터 사학에 모두 교관(敎官)을 두었고, 간간이 또 분교관(分敎官)을 많이 두어 도하(都下)의 동몽(童蒙)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지금은 교관의 제도를 비록 복고(復古)시키기는 어렵더라도 먼저 양몽관(養蒙官)을 계칙하여 훈도(訓導)하는 방법을 극진히 하게 하고, 또 사학(四學)의 교수(敎授)들에게 명하여 성심으로 과업(課業)을 권면하게 한다면, 거의 인재를 육성하는 방도에 보탬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말은 좋으나, 이제 사학(四學)의 교관을 두고 국내(國內)의 어린아이들을 가르쳐 성효(成效)를 요구하고자 한다면, 그 또한 어려운 일이다. 윤 화정(尹和靖)167)이천(伊川)168) 에게 나아가 반 년을 배운 뒤에야 바야흐로 《대학(大學)》《서명(西銘)》을 볼 수 있었으니, 대개 이는 먼저 그의 기질(氣質)을 배양하여 학문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의도인 것이다. 사상채(謝上蔡)169)명도(明道)170) 에게 배움을 청하였을 때에 명도가 정좌(靜坐)하는 것으로 가르쳤으며, 횡거(橫渠)171) 가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예(禮)를 우선으로 하였다. 대저 정좌하게 되면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 본심(本心)을 보존할 수 있고, 예를 배우게 되면 몸을 검속(檢束)하여 행동을 계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초학자(初學者)가 학업을 연마하여 증진하는 방도는 이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훌륭하구나. 두 선생이 사람을 가르친 교훈이여! 이는 옛 성왕(聖王)이 사람들에게 《소학》을 가르친 뜻과 더불어 그 법이 한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정좌(靜坐)’라는 두 글자는 더욱 지금 사람들의 증세에 맞는 약제(藥劑)인 것이다. 이 ‘정(靜)’ 자는 바로 주정(主靜)의 정을 말하는 것이요, 불교(佛敎)의 허정(虛靜)의 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 가운데에는 주재(主宰)하는 것이 들어 있으니, 《예기(禮記)》에서 이른바, ‘엄연(儼然)히 생각하는 것과 같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선유(先儒)의 말에 이르기를, ‘고요한 가운데 물(物)이 있다.’라고 한 것도 또한 이때문인 것이다. 이는 진실로 학자(學者)의 위로는 천리(天理)에 통하고 아래로는 인사(人事)에 통하는 그런 공부인 것이다. 초학자로서 습속(習俗)에 얽매어 투타(偸惰)하고 방사(放肆)한 자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그 이미 방만해진 마음을 거두어들여 점차 증진되는 공부를 하고자 한다면, 이 ‘정좌(靜坐)’라는 두 글자를 버리고서는 아마도 손을 댈 곳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몽양(蒙養)하는 방도가 진실로 급선무이기는 하지만, 이는 우선 놔두고 먼저 과궁(寡躬)에서부터 직제학 이하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정좌하는 공부를 힘쓰고 나서야 《소학》의 성공(成功)과 《대학》의 문로(門路)를 다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더구나 저 남행(南行)172) 에 앉아 있는 신하들은 더욱 묘년(妙年)의 신진(新進)들이어서 모두가 가르칠 만한 양사(良士)들이니, 어찌하여 더욱 여기에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이 연석에 나온 신하들의 제일 절실한 공부는 오직 ‘정좌’란 두 글자에 달려 있다. 하루 이틀 참되게 쌓아 오래도록 힘을 쓴다면 저절로 승척(繩尺)의 과구(科臼)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도 마땅히 스스로 힘쓸 것이니, 그대들도 또한 이것으로 각기 스스로 힘쓰라. 이것이 곧 내가 그대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하였다. 심염조가 대답하기를,

"신들이 비록 매우 우미(遇迷)하지만 감히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천(伊川)이, 매번 사람이 정좌(靜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곧 잘 배우고 있다고 칭찬하였으니, 정좌는 실로 초학자의 요도(要道)인 것이다. 그러나 또한 밀착하여 살펴보지 않고 그저 정좌만 하고 있을 뿐이라면, 참선(參禪)하여 입정(入定)하는 것과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연평(延平)173) 의 학문은 그 조예가 깊고도 돈독하였지만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정중(靜中)에서 대본(大本)의 미발시(未發時) 기상(氣象)을 체인(體認)하게 하였으니, 이는 바로 귀산(龜山)174) 의 문하(門下)에서 서로 전하여 온 지결(旨訣)인 것이다. 주자(朱子)도 또한 초년(初年)에 자못 그 말을 믿었으나 뒤에는 매우 그렇지 않다고 여겼는데, 자사(子思)가 단지 희로 애락(喜怒哀樂)의 미발(未發)을 중(中)이라고 했을 뿐이고 일찍이 사람들에게 정좌하여 체인하는 것을 가르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좌하여 체인한다는 말은 불교(佛敎)의 육조(六祖)175) 에서 제기한 것으로 이른바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으면, 본래의 면목(面目)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 학자들이 만약 오유(吾儒)와 이단(異端)176) 에 대해 털끝만한 차이가 끝에 가서는 천리나 벌어지게 된다는 것을 환히 분변하지 않으면, 왕왕 다른 길로 빠지기 일쑤이기 때문에 이천(伊川)이 이 폐단을 간파하고서 미발(未發)에 앞서 함양(涵養)하는 것은 옳지만 미발에 앞서 중(中)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두 단락의 말은 가장 적당한 것으로 천고에 바꿀 수 없는 의논인 것이다. 주자(朱子)가 또 만년에 오랜 친구에게 말하기를, ‘이 선생(李先生)177) 의 말은 끝내는 병통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학자는 단지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외모를 방정하게 해야 할 것이요, 오로지 정중(靜中)을 향하여 추구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만약 특별한 곳에서 정좌하여 일건(一件)의 공부를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곧 선(禪)이 되는 것이다. 단지 반드시 하나의 경(敬) 자에 착심(着心)하여 정동(靜動)을 통관(通貫)해야 한다.’ 하였는데, 이 말이 더욱 진절(眞切)하고도 명백한 것이다. 전에 이른바 사람들에게 정좌할 것을 가르쳤다고 운운(云云)한 것은 대개 검섭(檢攝)하여 방심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어도 마음이 오히려 해이해지는데 더구나 정(靜)으로 동(動)을 제어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마음이 어찌 가슴속에 있게 되겠는가? 정좌는 주경(主敬)하는 공부이고, 주경은 성인(聖人)을 본받는 근본이 된다. 정(靜)한 가운데서 본심을 존양(存養)하는 것은 정시(靜時)의 경(敬)이고, 동(動)한 가운데 성찰(省察)하는 것은 동시(動時)의 경인 것이니, 어느 때 어느 일이든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 없은 연후에야 절로 증진되고 유익하게 되는 오묘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조금 전에 ‘정좌(靜坐)’의 두 글자를 가지고 그대들을 위하여 말하였지만, 혹 자세히 듣지 못하였을 것을 우려하여 또 이렇게 운운(云云)하는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절하고 수명(受命)하였다. 하교하기를,

"《근사록(近思錄)》 1편(篇)은 네 군자(君子)의 격언(格言)을 취하여 모은 것으로서 정수(精粹)한 부분만을 찾아서 엮어놓았으므로 문로(門路)가 환히 드러나 있으니, 공자(孔子)의 도(道)를 주염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주자(朱子)가 계승시킨 것이다. 대개 공자는 군성(群聖)이 완성시킨 것을 집대성(集大成)하였고, 주자는 또 제현(諸賢)이 완성시킨 것을 집대성하였으니, 학자가 공자가 집대성한 자취를 궁구하려 한다면, 주염계·장횡거·정명도정이천의 말에서 찾아보면 그 심오한 뜻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며, 주자가 집대성한 공부를 궁구하려 한다면 이 책을 살펴보면 또 그 의의(意義)를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이 책에는 단서를 찾고 힘을 쓰는 방법과 처신(處身)과 치인(治人)에 대한 요점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대학(大學)》의 차서(次序)와 더불어 표리(表裏)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단서를 찾는다[求端].’라고 한 것은 《대학》의 격물(格物)·치지(致知)와 같은 것이고, ‘힘을 쓴다[用力]’라고 한 것은 《대학》의 성의(誠意)·정심(正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처신’이라고 한 것은 《대학》의 수신(修身)과 같은 것이며, ‘치인’이라고 한 것은 《대학》의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와 같은 것이다. 지금 이제 삼왕(二帝三王)178) 의 학문을 공부하고, 이제 삼왕의 정치에 힘을 쓰고자 한다면, 이 책을 버려두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이 책 보기를 묵은 이야기를 보듯이 하여 일찍이 마음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 폐단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니, 이휘지(李徽之)가 대답하기를,

"사람이 글을 읽지 않으면, 선비들이 모두 경서(經書)에 어둡게 되어 선성(先聖)의 격언(格言)을 바자[芭籬]의 언저리 물건인 것처럼 여겨 애당초 매우 긴요하게 공부할 마음이 없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에 진유(眞儒)가 사라진 지 오래인 이유인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학문을 하는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모두 수기(修己)·치인(治人)이라는 네 글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인데, 이밖에 또 소절목(小節目)을 만들어 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반드시 지의(指意)가 있을 것이니, 상세히 말하여 줄 수 있겠는가?"

하니, 김종수(金鍾秀)가 대답하기를,

"용력(用力)은 마땅히 지행(知行)을 겸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편(篇)에서는 ‘도체(道體)’를 논하였는데, 대개 ‘도(道)’라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당연히 행해야 할 법칙인 것이다. 선유(先儒)의 주석(註釋)이 명백할 뿐만이 아니지만 여기에서 ‘도체’라고 했으니, ‘도(道)’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이르는 것이며, ‘체(體)’라고 말한 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도’라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체’라고 했는가? 이미 ‘체’가 있다고 한다면, 도는 바로 형체가 있는 물건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 ‘도’ 자는 ‘본성대로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한다[率性之謂道].’는 ‘도’ 자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먼저 ‘도’ 자와 ‘체’ 자의 뜻을 해석하고 이어 《중용(中庸)》 수장(首章)의 ‘도’ 자의 뜻을 해석하는 것 이 좋겠다."

하니, 이복원이 대답하기를,

"이 ‘도(道)’ 자는 본성대로 따른다는 ‘도’ 자와는 뜻이 같지 않고 형이상(形而 上)의 ‘도’와 대략 서로 비슷합니다."

하고, 서명응(徐命膺)은 아뢰기를,

"‘도(道)’는 하나일 뿐인데, 어떻게 같고 다른 것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체(體)’ 자는 곧 도의 전체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도(道)’라고 하는 것은 볼 수 있는 형체가 없고 찾을 수 있는 자취가 없는 것이니, 곧 하나의 당연한 법칙인 것이다. ‘체(體)’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 있어서는 백체(百體)가 일체(一體)가 되는 것이고, 사물에 있어서는 본체(本體)가 정체(定體)가 되는 것이니, 이는 바로 형상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체’ 자를 ‘도’ 자의 아래에다 붙여 쓰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반드시 글자를 붙여 쓰게 된 본의(本意)가 있을 것인데 들려줄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 즉시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교하기를,

"‘도체(道體)’에 대해 선유(先儒)가 해석하기를, ‘도(道)의 체통(體統)이 또 성(性)의 본원(本原)이 된다고 여겨서 그대로 학문의 강령(綱領)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먼저 ‘도체’에 대해 운운(云云)한 것이다. 학자(學者)가 이 ‘도’의 ‘체’를 밝혀 ‘도’의 ‘용(用)’에까지 미치려고 한다면, 오로지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 그 조목과 바탕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반드시 가까운 데에서부터 먼 데로, 거친 데에서부터 정밀한 데로 이르는 공부가 있은 연후에야 그 ‘도체’의 만분의 일이나마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서문(序文)에 이른바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풍부함179) 을 거의 다 체득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은 혹 이를 말한 것인가?"

하니, 김희(金憙)가 대답하기를,

"‘체(體)’ 자의 뜻은 세 가지가 있으니, 체단(體段)·전체(全體)·체용(體用)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 체용(體用)의 ‘체’에 대해서 말한다면 동정(動靜)이라는 것은 태극(太極)의 체용인 것이니, 어찌 ‘체’만 말하고 ‘용’은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체라고 말한 데 대해서는 비록 체용의 ‘체’와 다른 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만약 대용(大用)이라는 두 글자와 대언(對言)한다면, 또한 체용의 ‘체’가 되는 것이니, 오직 체단의 ‘체’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만약 체단의 ‘체’라고 한다면, 체단의 ‘체’ 자와 체통의 ‘체’ 자는 그것이 ‘체’ 자가 되는 것은 같지만, 단(段) 자와 통(統) 자는 각각 그 자의(字義)가 있는 것이다. 체단과 체통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분별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희(金憙)가 대답하기를,

"체통의 ‘체’ 자와 체단의 ‘체’ 자는 가리키는 뜻에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태극(太極)이라는 두 글자는 어떤 책에 처음으로 보이는가? ‘극(極)’ 자의 뜻이 황극(皇極)·옥극(屋極)·북극(北極)·인극(人極)의 뜻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여기에서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라고 했는데, 대개 무극은 단지 그 형상이 없는 것을 말한 것이고, 태극은 이치[理]인 것으로 태(太)자는 커서 더이상 보탤 수 없다는 뜻이니, 조화(造化)의 추유(樞紐)이고 만휘(萬彙)의 근저(根柢)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뜻을 해석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옳게 되겠는가?"

하니, 김희(金憙)가 대답하기를,

"태극은 공자(孔子)가 이미 말하였으며, 무극에 대해서는 주자(周子)180) 이전에 비록 노자(老子)의 말이 있기는 하였지만 단지 기(氣)의 한쪽을 가리켜 말했을 뿐이므로, 이(理)로써 말한 것은 주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자(朱子)가 무극이면서 태극이라는 뜻을 해석하면서 단지 형체는 없고 이(理)만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이(理)의 형체가 없음으로써 말한 것이 무극(無極)이 되고, 무형(無形)의 이(理)로써 말한 것이 태극(太極)이 될 뿐, 태극 이외에 다시 어떤 하나의 물체가 있어 무극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극(極)’ 자의 뜻에 대해서는 북극·옥극의 ‘극’ 자와 더불어 또한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의 구별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무극(無極)을 무형(無形)이라고 해석한 것은 그럴 듯하다. 그런데 극(極)은 곧 이(理)이고, 형(形)은 곧 기(氣)이니, 무형과 유형을 막론하고 만약 ‘형(形)’ 자로써 이 ‘극(極)’ 자를 해석한다면, 이 ‘극’ 자가 도리어 ‘기’ 자를 분별하는 데로 귀착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여기서 무형으로 무극을 해석한 것은 어찌 의심을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이 아니겠는가?"

하니, 정지검(鄭志儉)이 대답하기를,

"선유(先儒) 황간(黃幹)이 이를 해석하기를, ‘극(極)’ 자는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비유한 것이지만 비유한 것이 말 밖에 뜻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조사(措辭)하는 법에 오히려, ‘형체가 없으면서 형체가 있는 데로 이른다’고 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극(極)이 없는 것을 태극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형(形)에 속한 것과 이(理)에 속한 것은 모두 말 밖에 뜻이 있는 것이며, 두 개의 ‘극’ 자는 똑같이 비유하기 위해 취한 글자이니, 무극의 ‘극’ 자를 곧바로 형(形) 자로 만들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아마도 이렇게 해야 기(氣) 쪽으로 귀착되는 혐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김종수(金鍾秀)는 대답하기를,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라는 것을 해석하면서, 어떤 이는 그 극(極)이 없는데도 크게 극(極)이 있는 것이라 해석하기도 하고, 혹은 극(極)에 이름이 없는 것[無底極]으로서 크게 극(極)에 이르는 것이 된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극(極)에 이름이 없다.’라고 한 것을 갑자기 들으면 비록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그 뜻은 대개 형체가 없는 극(極)에 이름을 말하는 것이니, 또한 절로 말은 된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김희(金憙)는 말하기를,

"이 설명은 아마 틀린 듯합니다. 이와 같다면, 다만 무극과 태극의 극(極) 자가 똑같이 무형(無形)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이른바 무(無)라는 것은 장차 이단(異端)에서 말하는 허무(虛無)의 무(無)가 될 것입니다."

하니, 김종수(金鍾秀)는 말하기를,

"무극(無極)의 무(無) 자와 태극(太極)의 태(太) 자는 비교하여 보건대, 두 ‘극(極)’ 자보다 중한 것입니다."

하고, 김희(金憙)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무극의 ‘극(極)’ 자가 없다면 ‘무(無)’ 자가 어디에 낙착(落着)될 수 있을 것이며, 태극의 ‘극’ 자가 없다면 ‘태(太)’ 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의의(意義)를 살펴보건대, ‘극’ 자가 주(主)가 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동백(東伯)181) 의 말이 옳다. 상천(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 말이 무극이라는 두 글자를 해석한 것이고, 조화의 추유(樞紐)요 품휘(品彙)의 근저(根柢)라고 한 것이 태극이라는 두 글자를 해석한 것이다. 이는 비록 이 편(篇)의 주석(註釋)에 기재되어 있지는 않지만, 옛사람이 분명히 말한 것이 있으니, 이 설명이 혹 본지(本旨)에 해가 되지는 않겠는가?"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 것이 무극을 해석한 것이고, 추유와 근저란 것이 태극을 해석한 것이라면, 무극이 무형(無形)이 되고 태극이 유리(有理)가 된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김종수김희에게 질문하기를,

"오행(五行)이 생성(生成)함에 있어 각기 하나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 성(性) 자는 본연(本然)의 성(性)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질(氣質)의 성(性)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김희가 말하기를,

"본연의 성(性)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김종수가 말하기를,

"이미 각(各) 자를 놓았으니, 이는 곧 구별하는 뜻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질의 성(性)인 것 같습니다."

하니, 김희가 말하기를,

"본주(本註)에는 혼연(渾然)한 태극이 각각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기질의 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동백(東伯)의 말이 옳다. 오행(五行)을 가지고 말하여 보건대, 이것이 각기 하나의 성(性)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천명(天命)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 곧 다같이 하나의 이치를 받은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천명(天命)이 흘러다니다가 기질(氣質) 속으로 떨어져서 각기 스스로의 성(性)이 되는 것이다. 대개 천명은 곧 본연(本然)의 이(理)인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 하나의 태극(太極)을 갖추었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의 의견으로는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추었다[各具一太極].’라고 한 다섯 글자에서 그것이 본연의 성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조금 전에 이 말 때문에 단서가 발론되었으나, 아직 그 설을 궁구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대저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태극을 말하지 않았는데 공자(孔子)는 태극을 말하였고, 공자는 무극을 말하지 않았는데 주자(周子)는 무극을 말하였다. 만약 문왕으로 하여금 공자의 시대에 《주역(周易)》을 연역(演繹)하게 하였다면 문왕이 당연히 태극을 말하였을 것이고, 공자로 하여금 주자(周子)의 시대에 《주역》을 찬(纂)하게 하였다면 공자가 당연히 무극을 말하였겠는가? 두 성인(聖人)과 한 현인(賢人)이 그 처지가 바뀌었다면, 장차 어떻게 설명하였겠는가?"

하니, 정지검(鄭志儉)이 대답하기를,

"문왕공자의 시대에 있었다면 반드시 태극을 말하였을 것이고, 공자주자(周子)의 시대에 있었다면 반드시 무극을 말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만, 말을 이와 같이 예측(豫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저 처지가 바뀌었다면 모두 그러했을 것입니다. 말은 반드시 똑같지 않았을지라도 이 도(道)를 발명(發明)하는 것은 같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진북계(陳北溪)182) 의 말에 ‘이(而) 자는 단지 가볍게 접과(接過)해야 되는 것이요, 이를 가지고 중간을 두 구절로 끊어서 보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대개 학자들이 무극과 태극을 두 건(件)의 일로 만들어 보는 것을 우려해서 한 말이다. 그런데 주자(周子)《태극도설》을 저술할 때에 하나의 이(而) 자를 두 개의 극(極) 자 사이에 끼워 놓은 것은 혹 그 글자를 끼워 놓은 본의(本意)가 있을 것 같은데, 상세히 말하여 볼 수 있겠는가?"

하니, 김희(金憙)가 대답하기를,

"이(而) 자는 곧 승접(承接)하여 알선(斡旋)하는 말인 것으로, 하나의 이(而) 자를 자세히 살펴본 연후에야 무극과 태극이 바야흐로 일극(一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주자(周子)가 하나의 《도설(圖說)》에다가 지극히 정미한 이치를 천명(闡明)하여 천성(千聖)이 전해 주지 않은 오묘한 이치를 발명하였다. 주자(周子)가 아니면 능히 이 《태극도설》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고, 정(程)·주(朱)가 아니면 이 도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때문에 송(宋)나라의 사씨(史氏)주자(周子)의 설을 기록하면서 ‘무극에서부터 태극이 된다[自無極而爲太極].’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고치기를 청하는 의논을 내기에 이르렀었다. 만약 본문(本文)의 명절(明切)함과 주설(朱設)183) 의 발휘가 없었다면, 거의 주자(周子)에 누를 끼치고 후학(後學)을 그르칠 뻔하였다. 대저 속유(俗儒)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거개는 이와 같은 것이 많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모두들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찍이 주자(朱子)의 설을 보건대, ‘노자(老子)는 유무(有無)를 말함에 있어 유무를 둘로 하였으나, 주자(周子)는 유무를 말함에 있어 유무를 하나로 하였다.’라고 말하였는데, 선정(先正)이 이 설을 인용하여 이 글귀를 발휘(發揮)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유무가 하나라는 설을 선유(先儒)들이 혹 주자(朱子)의 초년(初年)의 설로 돌리고 있기도 한데, 선정이 이 글귀를 해석함에 있어 반드시 이 말을 인용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노자가 유무를 둘로 삼은 것은 이것이 이단(異端)이 된 이유인 것입니다. 이에 무극이면서 태극이라고 말한 것은, 곧 형체는 없지만 이치는 있다고 말한 것이니, 무극과 태극은 원래 이물(二物)이 아닌 것으로 유무(有無)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육상산(陸象山)이 말하기를, ‘대전(大傳)184) 에는 분명히 역(易)에는 태극(太極)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제 무극(無極)이라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였으니, 육상산이 무(無) 자를 본 그 뜻이 어디에 있어서 그런 것인가? 주자(朱子)가 말을 하여 물리친 것이 오히려 통쾌하지 않고 단지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만 말하고 말았을 뿐이니, 아마도 그의 소견이 정밀하지 못한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 설을 깊이 변석(卞釋)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육상산의 의논은 전적으로 두찬(杜撰)이어서 변석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자(朱子)가 극단적으로 말하여 통렬히 공척(攻斥)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태극이 동(動)하면 양(陽)이 생기고, 동이 극도에 이르면 정(靜)하게 되며, 정하면 음(陰)이 생기고 정이 극도에 이르면 다시 동한다고 한 것은, 양이 동하는 것이 극도에 이르면 음이 비로소 생기고, 음이 정한 것이 극도에 이르면 양이 비로소 다시 동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동정(動靜)은 음양의 경계를 나누는 것입니다. 동이 극도에 이른 연후에야 바야흐로 정이라고 할 수 있고, 정이 극도에 이른 후에야 바야흐로 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렇다면 선유(先儒)가, ‘오늘이 여름이고, 내일이 입추(立秋)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말이 십분의 지두(地頭)인 것으로 동(動)이 극도에 이르면 정(靜)이 되고, 정이 극도에 이르면 동이 된다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겨우 동하게 되자 곧 양에 속하게 되고, 겨우 정하게 되자 문득 음에 속하게 된다.’라고 한 것은 이 말이 양 가운데 음이 있고, 음 가운데 양이 있어 상호 관속(關屬)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저 동정은 서로 인연하는 것이고, 음양은 서로 부리가 되는 것이어서 봄에는 만물을 살리되 가을에는 만물을 죽이는 이치가 있으며, 날은 되 밤은 어두운 이치가 있는 것이다. 음은 10월에 성(盛)한데도 이를 ‘양월(陽月)’이라고 부르고, 양은 정오(正午)에 성한 데도 음신(陰辰)에 속한다. 이로써 미루어 살펴본다면, 음양의 나눔은 한계를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니, 십분의 지두에서 동(動)이 시작되고 정(靜)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동극(動極)·정극(靜極)이라고 한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한 것인가? 그리고 동극(動極)·정극(靜極)이란 극(極) 자는 태극(太極)의 극(極) 자와 똑같은 극자인데, 자의(字義)의 동이(同異)를 또한 상세히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심염조(沈念祖)가 대답하기를,

"‘오늘은 여름이고 내일은 입추(立秋)이다.’라고 한 것은, 이것이 음양의 충만한 극도의 계분(界分)인 지두(地頭)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또 그 가운데서 분계에 대해서 말한다면, 오시(午時)가 양(陽)에 속하고 미시(未時)가 음에 속하는 것이 비록 오늘은 여름이고 내일은 가을이라는 것의 큰 분계(分界)와 같기는 하지만, 오정(午正) 이후는 미시(未時) 초의 음(陰)이 이미 그 속에서 동(動)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음양이 서로 부리가 되고 동정(動靜)이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말은 아무래도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말대로라면 오전은 양(陽)이 되고 오후는 음(陰)이 되는 것이니, 이는 오늘은 여름이고 내일은 곧 입추(立秋)라는 말과 같다는 것인가?"

하니, 심염조가 대답하기를,

"오전은 양이고, 오후는 음이라고 한 것은 동정이 서로 부리가 된다는 것으로 말한 것이며, 오늘은 여름이고 내일은 가을이라고 한 것은 음·양이 크게 나뉘는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동정이 서로 그 부리가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이(理)의 일치(一致)를 말한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음양으로 나눈 것은 기(氣)의 대대(對待)를 말한 것으로 서로 끝이 엇물려 끝없이 순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두 분(分) 자(字)를 말한 것은 구별하는 뜻이 현저하니, 하나가 되거나 둘이 되는 나뉨[分]에 대해 명백히 말하여 보라."

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유행(流行)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음·양은 다 같은 기(氣)이지만, 대대(對待)로 말한다면 가볍고 맑은 것이 하늘이 되고 무겁고 흐린 것이 땅이 되는 것이니, 양의(兩儀)185) 가 여기에서 판별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른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말대로라면, 한번 동(動)하고 한번 정(靜)하는 것은 곧 기(氣)인 것이다. 그렇다면 동하게 되는 이유와 정하게 되는 이유는 곧 이(理)란 말인가?"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양의(兩儀)의 호칭에 대해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의(儀)라는 것은 짝[匹] 이라는 뜻으로 세속에서 이른바 일쌍(一雙)·일대(一對)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의(儀)’ 자를 ‘필(匹)’ 자로 해석한 것이 과연 어느 책에 보이는가?"

하니, 서명응이 대답하기를,

"본주에도 ‘의(儀)라는 것은 필(匹)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양은 변하고, 음은 합친다[陽變陰合].’라고 했는데, 양에 대해서는 변한다고 하고 음에 대해서는 합친다고만 하였는데, 음이 변한다고 말하지 않고 양이 합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만약 음이 변하고 양이 합친다는 것으로 본다면 과연 본뜻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하니, 정지검이 대답하기를,

"양이 변한다는 것은 기(氣)가 발동한다는 것을 말하고 음이 합친다는 것은 기(氣)가 응집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 뜻이 계속해서 발현되는 것은 선(善)이요, 완성되어 갖추어지는 것은 성(性)이라고 한 것과 자못 서로 비슷합니다. 만일 음이 변한다고 할 경우 음은 발동하는 기(氣)가 아닌 것이고, 만일 양이 합친다고 할 경우 양은 응집되는 기(氣)가 아닌 것이니, 이것이 양에 대해서는 반드시 변한다고 하고 음에 대해서는 반드시 합친다고 한 이유인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가 생길 때에 양이 음에서 오고 음이 양과 합쳐 이 오행(五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인물(人物)이 생식(生息)하는 그런 것과 같은가? 아니면, 양의(兩儀)가 각기 나뉘어 양은 양대로 음은 음대로 있으면서도 오행을 만들 수 있는 것인가? 만일 합치된 연후에야 생겨난다고 한다면, 합치되는 이유와 합쳐야 하는 법칙이 이(理)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에 대해서도 또한 상세히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정지검이 대답하기를,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기(氣)가 합치고 변하는 과정에서 오행이 생겨나는 것이니, 거기에는 본디 오행의 법칙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합치고 변하는 법칙은 이(理)에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김종수정지검에게 말하기를,

"계속 발현시키는 것은 선(善)이고, 완성시켜 갖추게 하는 것은 성(性)이라고 한 것은 이(理)를 말한 것이고 음과 양이 변하고 합친다는 것은 기(氣)를 말한 것이니,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이오."

하니, 정지검이 말하기를,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을 도(道)라고 하는데, 계속되는 것은 양의 발현이고 완성시키는 것은 음의 응집이라고 하였으니, 애당초 어찌 기(氣)를 분리시켜 말한 것이겠습니까? 그렇지만 변하게 되는 이유와 합치게 되는 이유는 곧 이(理)인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대답이 모두 명확하지 못하다. 아마도 내 말을 주의하여 똑똑히 듣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대개 일음·일양의 동정(動靜)이 끝이 없이 서로 엇물려 있는 것은 유행하는 면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가 확립되는 것은 대대하는 면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오행이 생기는 것은 유행(流行)하는 것이 변하고 합쳐서 생기는 것인가? 대대하는 것은 왕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인가? 양 가운데 또한 절로 음이 있고, 음 가운데 또한 절로 양이 있으니, 유행하는 가운데에도 또한 대대(對待)하면서 서로 혼합되지 않는 점이 있고, 대대하는 가운데에도 또한 유행하면서 서로 분리되지 않는 점이 있는 것이다. 음·양이 동정(動靜)하는 사이에 한번 변하고 한번 합치는 것은 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니, 모름지기 대대하는 것이 왕래하면서 서로 엇물려서야 비로소 오행이 생겨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만약 대대하는 것이 서로 엇물려서야 비로소 오행이 생겨난다고 한다면, 그렇게 되는 이유와 그렇게 되는 법칙에 대해서 상세히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질문한 뜻인 것이다. 대저 독음(獨陰)과 독양(獨陽)으로는 반드시 만물(萬物)을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이치가 없는 것이다. 이미 양이라고 하였으면 음은 곧 그 짝[耦]이 되는 것이고, 이미 음이라고 하였으면 양은 곧 그 대(對)가 되는 것이니, 대대(對待)·상교(相交)에 관한 설명이 진실로 그럴 듯하기는 하다. 그러나 서로 엇물려서[相交] 합치고 합친 뒤에 생겨나는 이유는, 대개 천지에 가득찬 것은 단지 만물을 만들어 내려는 마음뿐이지만 음양이 서로 합쳐지지 않으면 만물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이 합치게 되는 이치가 아니겠는가? 음양이 서로 합치고서야 만물이 비로소 생겨난다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것이 어찌 당연히 합쳐야 되는 법칙이 아니겠는가? 나의 견해는 이와 같은데 여러 신하들이 요점을 미쳐 분명히 듣지 못한 것 같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이와 같은 성교(聖敎)를 듣고서야 신들이 황연(怳然)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太極)인 것이다. 대저 기(氣)로 형체를 만들고 이(理)로 또한 부여하여 준다는 것을 주자(朱子)《중용(中庸)》의 장구(章句)에 기재하였는데, 이 설명을 장구의 내용과 비교하여 살펴보면 같은가, 다른가? 만약 같다고 한다면 장구의 뜻과 차이가 나는 곳이 없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즉시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교하기를,

"‘기(氣)로 형체를 만들고 이(理)로 또한 부여한다[氣以成形 理亦賦焉].’고 했는데, 이는 기가 형체를 만들 때에 이가 부여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가지고 기가 먼저이고 이가 나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실로 기의 주체인 것으로 형체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형체가 이루어지게 되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두고 이가 먼저이고 기가 나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이가 있으면 기가 있게 된다[有是理而有是氣].’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기(氣)는 이의 곁에 의지하여 행해지는 것이다[氣是依傍這理行].’ 하고, 여기에서는 ‘이도 또한[亦] 부여한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이라는 글자의 뜻을 궁구하여 본다면 이와 기의 선후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남행(南行)의 여러 신하들도 소견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서정수가 대답하기를,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서 애당초 선후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는 형체가 없고 기는 자취가 있기 때문에 기의 쪽을 통해서만이 본연의 이를 증험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렇다. 여기에서는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다.’라고 하였고, 《어류(語類)》에서는 ‘태극(太極)과 오행(五行)은 원형 이정(元亨利貞)으로 만들어서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정(利貞)은 음이고 원형(元亨)은 양이다.’라고 하였다. 이정이 음이 되고 원형이 양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행 위에다 원형 이정을 붙여서 말한다면 수·화·목·금·토를 장차 어떻게 나누어 속하게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목(木)은 원(元)에 예속되고 화(火)는 형(亨)에 예속되며 이(利)는 금(金)에 예속되고 정(貞)은 수(水)에 예속되는데, 토는 기속(奇屬)될 데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신(信)이 사덕(四德)에 기왕(奇旺)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이 설명이 옳은 것 같기는 하지만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뜻이 있다. ‘신(信)’을 말하면 오상(五常)이 되고, ‘토(土)’를 말하면 오행(五行)이 되는데, 유독 원형 이정에서만 단지 네 개의 글자를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정지검이 대답하기를,

"천지(天地)의 도(道)는 성(誠)일 뿐이니, 원형 이정은 하나하나가 모두 성이 아님이 없습니다. 사시(四時)의 순서에서 ‘토(土)’는 주장하는 것이 없고 본성을 논하는 설명에서 신(信)은 혹 거론하지 않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이 흠결(欠缺)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성(誠)에 대해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성은 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太極本無極].’라고 했는데, 상문(上文)에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라고 한 말의 ‘이(而)’ 자를 모름지기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긴다면 반드시 그다지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귀 가운데 ‘본(本)’ 자는 ‘이(而)’ 자와 그 뜻이 조금 다르다. 이미 ‘본래’라고 하였으니 태극이 무극에 근본한 것이라는 혐의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두 개의 극(極)으로 보게 될 폐단이 없을 수 있겠는가? 본(本) 자의 뜻에 대해 상세히 말하여 보라."

하니, 심염조가 대답하기를,

"위에서 이미 먼저 무극(無極)을 말하여 태극(太極)의 뜻을 밝혔기 때문에 여기에 ‘이(而)’ 자를 놓아서 두 개의 극(極)으로 보게 될 폐단을 없앴으며, 아래에서는 먼저 태극을 말하고서 이것이 원래 무극이라는 뜻을 미루어 말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본(本)’ 자를 놓아서 본디 같은 극(極)이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놓은 글자는 비록 다르지만 쓰인 곳은 각각 합당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는 ‘무극(無極)의 진(眞)이라.’ 하고 ‘태극(太極)의 진(眞)이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무극이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이오(二五)186) 의 정(精)이라.’고 하고 ‘양의(兩儀)’라고 하지 않았으며 또 오행이라고 하지 않고 이를 겸하여 이오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두 개의 글귀는 이미 서로 대(對)가 되는 것인데 무극과 태극은 아울러 설명하지 않고 양의와 오행만 유독 겸하여 거론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어쩌면 그것은 혹 두 개의 것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양의와 오행은 어찌 같은 기(氣)가 아니란 말인가? 이 뜻을 상세히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서명응이 대답하기를,

"‘진(眞)’ 자는 곧 태극(太極)의 뜻이기 때문에 다시 태극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김종수는 아뢰기를,

"비록 ‘태극의 진(眞)’이라고 해도 불가(不可)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심염조가 말하기를,

"태극은 이것이 이미 이(理)인데 어떻게 ‘태극의 진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김종수는 말하기를,

"‘진(眞)’ 자는 단지 무극에만 예속되었어야 하고 태극에는 예속시킬 수가 없으니 이는 무극과 태극을 분명히 두 개의 것으로 나눈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일 제학(一提學)의 말은 실로 이것이 말의 결점인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무극의 진(眞)은 이미 태극이 그 가운데 들어 있다는 것을 포괄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진(眞)’ 자는 곧 태극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극의 진’은 곧 무극이면서 태극이라는 뜻인 것이다. 윗글에 이미 ‘무극이면서 태극’이라고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무극의 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만약 ‘태극의 진’이라고 한다면 이는 태극의 태극이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경의 말대로라면 이는 천지의 이(理)가 천지의 도(道)라고 하는 것과 같아서 뜻이 중첩될 뿐만이 아니라 말도 중복이 되니, 이것이 과연 무슨 설명이 되겠는가?"

하였다.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태극의 아래에다 ‘진(眞)’ 자를 놓을 수 없다면 무극과 태극은 당연히 나누어 두개의 극(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니, 김희가 말하기를,

"진(眞)은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理)자로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자, 김종수가 말하기를,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동백(東伯)의 말도 또한 잘못이다. 단지 이 ‘진’ 자는 태극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남행(南行)의 여러 신하들도 의견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정지검이 대답하기를,

"‘무극의 진은 무형(無形)의 이(理)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만약 ‘태극의 진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말이 중첩되는 결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김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무극은 어찌하여 이가 아니란 말입니까?"

하니, 정지검이 말하기를,

"다만 무극이라는 두 글자만을 말한다면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희가 말하기를,

"‘진(眞)’ 자를 곧바로 ‘이(理)’ 자로 볼 수 있습니까?"

하니, 정지검이 말하기를,

"이로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김희가 말하기를,

"‘진’ 자를 곧바로 ‘이’ 자로 보는 것은 부당합니다. 대개 이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곧 이른바 진인 것입니다. 이제 만약 진을 이로 본다면 또한 이오(二五)의 ‘정(精)’ 자를 곧바로 ‘기(氣)’ 자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태극은 본래 무극이라고 하였으니, 비록 ‘태극의 진이라고 말하더라도 또한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또 무극을 무형이라고 보면서 갑자기 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잘은 모르겠으나 무형이라는 것이 이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이 이가 된다는 말입니까? 형체가 없는 것은 이이고 이는 형체가 없는 것인데 어떻게 형체가 없는 것을 가지고 단지 무형이라고만 하고 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하니, 정지검이 말하기를,

"이오(二五)는 곧 음양과 오행입니다. 따라서 ‘이오의 정(精)’이라고 한 것을 이를테면 ‘음양·오행의 기(氣)’라고 한다 해서 무슨 불가(不可)할 것이 있겠습니까? 무극이란 두 글자는 태극이 무형이라는 것을 밝힌 것으로 태극은 곧 이인 것입니다. 이는 본디 형체가 없는 것이니 단지 이(理)라고 말해도 무형을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만, 단지 무형이라고만 말한다면 어떻게 이를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까? 만약 무극을 이로 본다면 ‘무극이면서 태극’이라는 것을 장차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만약 ‘태극의 진(眞)’이라는 것을 말의 결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염락(濂洛)187) 의 군자들로부터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두각을 나타낸 분들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어찌하여 태극의 진(眞)이라는 네 글자에 대해 발명되지 않은 점을 발명하여 후학(後學)들에게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진(眞)’ 자는 곧 이(理)이고 태극도 또한 이(理)이다. 그렇다면 이제 ‘태극의 이(理)’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진(眞)’ 자는 곧 이 이(理)의 진실을 말한 것으로 바로 덕을 형상(形狀) 한 글자요, 이(理) 자에 붙여진 설명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가령 이것이 이(理) 자에 붙여진 설명이라 하더라도 혹 ‘무극의 이(理)’라 하고 혹 ‘태극의 이(理)’라고도 하는 것이 ‘무극 속의 이(理)’이고 ‘태극 속의 이(理)’라고 하는 것과 같아서 모두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만약 ‘무극의 진(眞)’을 곧 ‘태극의 진’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또한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이 생긴다.[太極動而生陽]’는 한 글귀에 대해 태극이라고 하지 않고 ‘무극이 동하여 양이 생겨난다’고 해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하니, 김종수가 말하기를,

"윗글에서 이미 첫머리에 ‘태극이면서 무극’이라고 하였으니 그 아랫 글의 문세(文勢)는 ‘태극이 동하여 양이 생긴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상은 설사 ‘무(無)’ 자로 ‘태(太)’ 자를 대신한다고 해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어떻게 무극이 동(動)하여 양(陽)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묘(妙)하게 합하여 응집된다[妙合而凝].’고 한 ‘묘(妙)’ 자의 뜻을 분명히 해석할 수 있겠는가? ‘합(合)한다’는 데에는 ‘응집(凝集)된다’는 뜻이 들어 있고 ‘응집된다’는 데에는 ‘합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데 먼저 ‘합한다’고 설명하고 계속해서 ‘응집된다’고 설명하였다. 합하는 이유와 응집되는 이유에 대한 뜻이 실로 이 편(篇)의 제일(第一)의 뜻이니, 또한 여기에 대해서 하나하나 지적하여 진달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합한다’고 말한 것은 윗글에서 ‘음(陰)이 합한다[陰合].’라고 한 ‘합(合)’ 자와 다른 구별이 있는가? 그리고 ‘합한다’고 말한 것은 무극(無極)과 이오(二五)가 서로 합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理)와 기(氣)가 서로 합치는 즈음에도 또한 선후(先後)의 나뉨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신들은 잘 이해할 수 없어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건도(乾道)는 남자가 되고, 곤도(坤道)는 여자가 된다[乾道成男 坤道成女]라고 했는데, 이는 윗글의 ‘무극의 진(眞)’이라고 한 그 이하 열두 글자를 이어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아랫 글귀에 ‘이기(二氣)가 교감하여 만물을 화생한다[二氣交感 化生萬物].’라고 했는데, 만물이 생겨난다는 데에서 문득 ‘이(理)’ 자를 버리고 단지 ‘기(氣)’ 자만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정지검이 대답하기를,

"‘이기(二氣)가 교감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한다’는 것은 본디 기(氣)에 의거하여 한 말이지만 교감하여 화생하게 하는 이유는 곧 이(理)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氣)쪽만을 말한 데 대한 혐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난 기(氣)를 얻어서 가장 신령스러운데, 형체가 생기고 나면 정신의 지각이 발동된다[惟人也 得其秀而最靈 形旣生矣 神發知矣].’라고 하였다. ‘그 빼어난 기를 얻어서 가장 신령스럽다’고 한 것은 오상(五常)을 갖추고 있어 만물과는 절로 다른 것은 물론 편·정(偏正)의 구별과 영·매(靈昧)의 나뉨이 없으니, 참으로 동등한 위치에 놓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새만도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성인(聖人)의 탄식이 있었으니, 사람 가운데에도 간혹 호랑(虎狼)의 인(仁)과 봉의(蜂蟻)의 의(義)와 시달(豺獺)의 예(禮)와 홍안(鴻鱇)의 신(信)만도 못한 경우가 있다. 대개 이는 기(氣)에 구애가 되어 본성(本性)이 결손(缺損)된 탓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람의 기(氣)는 천지의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센 정기(正氣)를 받았으니, 가령 때로 혼암(昏闇)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어떻게 갑자기 치우친 것을 타고난 금수(禽獸)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하니, 심염조가 대답하기를,

"사람이 가장 신령스러운 것이기는 합니다만, 자포 자기(自暴自棄)하는 사람으로 말한다면 감응되는 것이 대부분 물욕으로 인하여 마음이 옮겨가기 때문에 그 고유(固有)한 본성을 온전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물은 비록 편색(偏塞)스러움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그 통달된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전일(專一)하고도 정밀하여 외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고 물욕으로 인하여 마음이 옮겨가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혹 사람보다 나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허령(虛靈)하면서도 지각(知覺)이 있다는 것은 기(氣)의 오묘함인데 오직 성인(聖人)만이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로서 안정시킨다고 했으니, 이는 의리(義理)를 지각의 주안점으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학자(學者)가 의리에 밝지 못하면, 허령한 본체(本體)를 온전히 보존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학문(學問)·사변(思辨)·궁행(躬行)·실천(實踐), 함양(涵養)·성찰(省察)·확충(擴充)·극치(克治)를 요구하게 하게 되는 것이다. 무릇 이러한 공부는 모두가 실지(實地)로 답착(踏着)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그 마음으로 하여금 집착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학(異學)의 별론(別論)이 제기되면서 마음을 밝혀 본성(本性)을 보고, 묘용(妙用)을 신통(神通)하고, 정지(淨智)와 묘원(妙圓), 광명(光明)과 적조(寂照)라고 하는 것이 모두 허령(虛靈)함만을 떠나지 않고 있는가 하면 육상산(陸象山)188) 의 정신을 수습(收拾)하는 것, 양자호(楊慈湖)189) 의 거울속의 만상(萬象)이라는 것, 진백사(陳白沙)190) 의 한 점 허운(虛雲) 속에 만상이 들어 있다는 것, 왕양명(王陽明)191) 의 양지(良知)를 이룬다는 것은 모두 지각(知覺)으로 말한 것으로 마음의 허령함을 지키기 위해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므로 그 해독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다. 대개 의리에 의거하여 만사(萬事)에 대응하면 움직임이 항상 법규에 어긋나지 않아서 마음의 발동이 모두 절도에 맞게 되지만 의리를 버리고 허령만을 숭상하게 되면 공적(空寂)이 되고 허무(虛無)가 되어버리는 것이니, 유·불(儒佛)이 나뉘어지는 이유가 실상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하는 선비가 깊이 살피고 분명히 변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들은 학문이 없어 우러러 진달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성인이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로 안정시킨다[聖人定之 以中正仁義].’라고 하였는데 ‘정(定)’ 자의 뜻은 무엇이며, 아래에 ‘정성(定性)’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 ‘정성’이라고 한 데에서의 ‘정(定)’ 자와는 그 뜻이 같은가, 다른가?"

하니, 정지검이 대답하기를,

"두 개의 ‘정(定)’자는 본디 다를 것이 없습니다만, 성현(聖賢)의 용공(用工)에는 절로 경중(輕重)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성인이 ‘인극(人極)을 세웠다[立人極焉].’라고 했는데 이 뜻이 《대학(大學)》 서문 가운데 ‘하늘을 이어 극(極)을 세운다[繼天立極].’고 한 ‘극’자와 서로 참고하여 볼 수 있겠는가? 아니면 천·심(淺深)과 정·조(精粗)의 구별이 있는 것인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즉시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편(篇)에서 지도(地道)에 대해 말하지 않다가 이제 비로소 ‘땅의 도(道)’를 말하면서 강유(剛柔)라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늘의 도를 세우는 것은 음과 양이고, 땅의 도를 세우는 것은 유와 강이고, 사람의 도를 세우는 것은 인과 의[立天之道 曰陰與陽, 立地之道 曰柔與剛, 立人之道 曰仁與義].’라고 했는데 양이 당연히 앞에 있어야 하는데도 먼저 음을 말했고, 강이 당연히 앞에 있어야 하는데도 먼저 유를 말했으며, 단지 사람에 대해서만 인과 의라고 순리대로 말하였을 뿐이다. 이렇게 뒤바꾸어 말하고 번갈아 말한 나뉨에 대해 혹시 어떤 의의(意義)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인가?"

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이런 등등의 부분은 비록 말은 통할 수 있지만 끝내는 견강 부회하여 천착하는 병통이 있게 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송(宋)나라의 유학자 원추(袁樞)는 학술이 매우 정밀하여 주자(朱子)도 또한 일찍이 허여(許與)하였는데, 원추가 이어 인(仁)을 억지로 음(陰)과 유(柔)에 예속시켜 윗 글귀의 음양(陰陽)·강유(剛柔)의 문세(文勢)와 터무니없이 합치시켜 극력 쟁론하여 마지않자 주자가 공척하기를, ‘인(仁)의 정체(定體)가 무엇인지 모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자의 이 훈계는 만세(萬世)에 바뀔 수 없는 의논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등등의 부분에 대해서는 억지로 해석하여 견강 부회할 필요 없이 단지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고 미더운 것은 미더운 대로 전하더라도 불가(不可)할 것이 없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음양과 강유에 대해 선유(先儒)들이 어떤 이는 태극의 성상(成象)으로 귀결시키기도 하고, 어떤 이는 태극의 성질(成質)로 귀결시키기도 하며 어떤 이는 태극의 성덕(成德)으로 귀결시키기도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하나의 태극이라고 하기도 한다. 만약 세 단락으로 나누어 예속시킨다면 상(象)은 어디에 속하고, 질(質)은 어디에 속하며, 덕(德)은 어디에 속하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이에 대해서는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섭미도(葉味道)192) 의 주(註)에 음양(陰陽)·유강(柔剛)·인의(仁義)를 태극의 체(體)로 삼고 사생(死生)을 태극의 용(用)으로 삼았는데, 선정(先正)이 이를 그르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각각 그 가운데 태극의 체와 용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정의 이 말이 합당한 것 같은데, 알 수 없으니 경 등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선정의 논의가 한번 나오자 섭미도(葉味道)의 주(註)의 잘못이 더욱 확연히 드러났는데, 신들에게 무슨 별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군자는 연마하고 소인은 이것을 거스른다고 했는데, 연마한다고 한 것과 거스른다고 한 것이 도(道)인가, 이(理)인가? 만약 도라고 한다면 이것을 연마하는 방법이 어떠한 것이며, 이것을 거스르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理)라고 한다면, 경서(經書)에는 ‘이(理)를 연마한다[修理].’라는 말이 없으니, 반드시 연마하려 할 경우 착수하는 공부(工夫)에 있어 그 조목이 어떤 것인가?"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도(道)라는 것은 이(理)의 총체적인 명칭이고, 이(理)라고 하는 것은 도(道)의 조목이므로 도(道)와 이(理)는 나누어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크도다. 변역(變易)함이여[大哉 易也]’라고 한 귀절의 말은 이것이 바로 일편(一篇)의 관쇄(關鎖)에 해당되는 긴요한 말인데도 단지 ‘역(易)’ 자만을 말하고 태극(太極)은 말하지 않았다. 역이 태극이고 태극이 역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선유(先儒)들이 이 점에 대해 의심하였는데, 상세히 말하여 줄 수 있겠는가?"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태극(太極)을 말하면 역(易)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고, 역을 말하면 태극이 또한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첫머리에 태극을 말하고 역으로 끝맺음한 것에서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서로 질문하도록 하라."

하니, 서정수가 말하기를,

"‘연마한다[修]’는 것은 진수(進修)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군자가 덕을 이룬 것에 대한 명칭입니다. 그런데 이미 덕을 이룬 뒤에도 또한 진수하는 공부가 있는 것입니까?"

하니, 유언호가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스스로 학문을 하는 순서에 대해 말한 것에 의거해 살펴보면, 그가 스스로 성인이라 하여 우근(憂勤)한 생각을 소홀히 여긴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연마하기 때문에 길(吉)하다는 군자(君子)는 반드시 성인(聖人) 이하의 사람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군자(君子)를 성인(聖人)으로 보더라도 혹 무방할 수 있겠다. 부자(夫子)193) 가 학문에 뜻을 두고서부터 행동이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조로(條路)가 매우 분명하고 계급(階級)이 점점 높아갈수록 찬연히 볼만한 것이 있게 되었으니, 성인이 자신을 수양하여 덕을 증진시키는 데 대한 부지런함은 학자(學者)가 미칠 수 없는 점이 있다. 공자 같은 성인으로서도 도(道)를 연마하는 공부를 이처럼 부지런히 하였으니, 비록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어찌 진수(進修)하는 방도를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혹(不惑)’이라 하거나, ‘지천명(知天命)’이라 하거나, ‘이순(耳順)’이라고 한 것은 대개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으로 혼자서만 진보된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인만이 스스로 도를 연마하는 공부를 극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장(章)에 대해서는 강론을 끝마치려 한다. 여러 신하들은 우선 물러가서 식사를 하라. 나는 밤을 새우려 한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드디어 물러나갔다.

조금 있다가 임금이 어좌(御座)에 올라 여러 신하들을 다시 들어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성기신장(誠幾神章)에는 성정(性情)을 포괄하고 동정(動靜)을 관통하여 미루어 성신(聖神)의 극공(極工)에까지 이르렀으니, 곧 하나의 태극도(太極圖)에 대한 주해(註解)인 것이다. 계속해서 이 장(章)을 강론하도록 하라."

하니, 정지검이 독주(讀奏)하였으며, 각기 글의 뜻을 진달하도록 명하였다. 이것이 끝나자 하교하기를,

"이 장은 태극도(太極圖)와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 태극도는 의리(義理)가 극히 은미하고 형상(形象)이 매우 정묘하여 말학(末學)·후생(後生)으로서는 무언 중에 깊이 이해하여 마음으로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 장(章)으로써 계속하여 상천(上天)의 이오(二五)에 대한 설(說)을 이어받고, 오인(吾人)의 사칠(四七)194) 에 대한 기미를 천명하여 후세의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환히 드러난 데로부터 은미한 데로 미치고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로 미루어가게 하였으니, 옛 성인의 뜻을 계승하여 후학(後學)에게 은혜를 베푼 공이 이제야 지극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미 도설(圖說)을 강론하였으니, 마땅히 이 장에 의거하여 도설의 뜻을 미루어 밝혀야 한다. ‘성은 무위이다[誠無爲].’라고 한 세 글자는 주염계(周濂溪)가 미발(未發)의 체(體)를 가리켜 사람들로 하여금 본연(本然)의 지선(至善)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대개 성(誠)은 진실한 것이고, 무위(無爲)는 조용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나는 이를 바로 태극(太極)이라고 여긴다. 윗장의 태극도설에 관한 골자(骨子)가 이 귀절에 모두 기재되어 있다. 《대학(大學)》에서는 성의(誠意)의 공부에 대해 말하였고, 《중용(中庸)》에서는 성신(誠身)의 방법에 대해 말하였으며, 《통서(通書)》에서는 ‘성(誠)’ 자의 뜻에 대해 말하였는데, 모두 동일한 뜻이다. 주자(周子)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고 조예가 깊고도 원대하여 나의 관견(管見)으로는 매번 주자가 성인의 지위에 도달한 것이 이미 8∼9푼은 되기 때문에 뒷사람으로서는 능히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여겼다. 이 장의 글 뜻을 가지고 말하건대, 성(誠)을 말하고 나서 또 기미[幾]에 대해 말하였다. 대저 성(誠)이란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성의(誠意)에 대한 공부가 곧 《대학》이라는 한 책의 큰 조목이 되고, 성신(誠身)에 대한 방법은 또한 《중용》 일부(一部)의 중요한 방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긴요한 가운데 더욱 긴요한 공(功)은 ‘신독(愼獨)’이라는 두 글자에 있는 것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신독의 공부가 되는가?"

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경(敬)이 신독(愼獨)의 요체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경(敬)’ 자가 본디 좋기는 하다만, 이는 진부한 말이 되어 버려서 뒷사람이 보기에 신기하지 않아 그 공부를 시작하는 방법을 모를 것이다."

하니, 정지검이 대답하기를,

"항상 성찰(省察)하여 일에 따라 본심을 보존함으로써 한 순간도 방과(放過)하지 않는다면 경(敬)에 도달하여 항상 조심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기(幾)’라는 이 한 글자에 무한히 음미할 만한 점이 있다. 대개 기미[幾]에는 선과 악이 있는데, 선이라는 것은 천리(天理)이고 악이라는 것은 사욕(私欲)이니, 학자가 공부를 함에 있어 사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온갖 일들이 이미 드러난 뒤에 잘 다스리는 것보다는 기미가 싹트려 하는 처음에 심찰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비유하건대, 사람이 길을 갈 때에 길이 갈리는 곳에서 발을 떼어놓는 처음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이로부터 걸어가더라도 바른 길을 잃지 않게 되거니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긋나는 것이 비록 처음에는 털끝만큼이라고 할지라도 끝에 가서는 천리나 벌어지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이 점을 잘 성찰하여 발단(發端)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이른바 《대학》의 삼강령(三綱領)·팔조목(八條目)과 《중용》의 삼달덕(三達德)·오달도(五達道)가 모두 자신의 소유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심찰(審察)하고 조존(操存)하는 공부는 오직 ‘신독(愼獨)’이라는 두 글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대개 ‘신독’이라는 두 글자는 달리 특별하게 힘을 써야 하는 일은 아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곳에서의 미세한 일일지라도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기미는 이미 싹튼 것이어서 남들은 모르지만 자신은 혼자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 때에 절실히 반성하고 부지런히 힘써서 선단(善端)이 일어나는 것을 혹시라도 은밀히 녹여 없애버리거나 악념(惡念)이 발동하는 것을 혹시라도 은밀히 자라나게 하는 일이 없게 함으로써 항상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보존하여 도(道)에서 떠나지 않게 한다면, 이는 실로 기미를 살리는 공부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주자(朱子)《대학》에서 ‘신독’을 해석하는 것을 보건대, ‘기미를 살피는 것[審其幾]’이라고 하고, 《중용》에서는 ‘신독’을 해석하기를 ‘기미가 이미 발동한 것[幾則己動]’이라고 한 것을 보았는데, 학자들이 여기에서 공부를 시작한다면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하나의 ‘기(幾)’ 자가 사람을 만드는 아주 긴요한 부분이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경들의 견해에는 어떻다고 여기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미처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외(敬畏)에 관한 설명은 참으로 진실하고 간절한 훈계인 것이다. 고요할 때에 보존하고 발현되는 부분에서 살펴서 동정(動靜)을 관통하고 종시(終始)를 총괄하게 하는 것은 오직 ‘외(畏)’ 자가 거기에 가까운데 ‘외’ 자는 항상 조심성을 지녀 감히 방과(放過)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선과 악의 기미는 지극히 은미한 데에서 나뉘어지지만 심찰(審察)하는 공부는 이 ‘외’ 자에 근본하는 것이다. 대개 정(靜)에서 기미에 이르게 되고, 기미에서 밖으로 발현하게 된다. 한번 밖으로 발현됨에 있어 혹시라도 잘못되는 것이 없이 본연(本然)의 마음을 보존하게 된다면, 의(義)를 집적하고 기(氣)를 배양하는 공부가 오로지 여기에 있게 되어 지대 지강(至大至剛)한 용(用)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마음이 바르면 기(氣)가 순하고,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또한 순하게 된다.’라고 한 것이다. 천만 명이 앞에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고 한 말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전체(全體)를 볼 수 있는데, 저 맹시사(孟施舍)북궁 유(北宮黝)195) 의 무리가 어떻게 기(氣)를 배양하는 공부를 하여 도(道)와 합치되어 돕는다는 뜻을 알 수 있겠는가? 맹자(孟子)는 단지 꺾이지 않고 두려움이 없는 뜻만을 취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헤아려 참작하여 이 마음을 조존(操存)해서 효도해야 할 때를 당해서는 효도하고 충성해야 할 때를 당해서는 충성함으로써 꽉차서 부족함이 없고 확고하여 어김이 없으며 지대 지강(至大至剛)한 기를 잘 배양하고 능히 광명 정대한 마음을 온전히 하는 것은 돌아 보건대 그 근본은 오직 ‘외(畏)’ 자만이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증자(曾子)수약(守約)196) 의 용(勇)은 실로 평소 공부에서 연유한 것으로 ‘외(畏)’ 자가 기(氣)를 배양하는 근본이 된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으니, ‘외’ 자의 시의(時義)가 크다 하겠다."

하니, 이휘지가 대답하기를,

"‘외(畏)’ 자는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하는 뜻으로 가장 ‘경(敬)’에 가깝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기(幾)’라는 한 글자는 천성(千聖)이 서로 전하여 온 도통(道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약하니 마음을 정밀하고 전일하게 해서 중도(中道)를 꼭 잡아 지키라고 한 것은 곧 순(舜)우(禹)가 주고받은 심법(心法)인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정밀히 살피는 공부에 의거하여 위태롭고 미약한 기미를 분변함으로써 위태로운 것을 편안하게 하고 미약한 것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 주공(周公)공자(孔子)가 옛 성인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후학(後學)을 계도한 공도 또한 모두 이 말에 근본한 것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이후로는 성인의 세대에서 멀어져 감에 따라 말도 인멸되고 말았다. 주염계(周濂溪)가 처음으로 이 하나의 ‘기(幾)’자를 논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주자(周子)’가 ‘기’자에 대해 있는 힘을 다하여 설명한 것은 진실로 사람들을 경계하여 깨우친 점이 있다. 가깝게는 공사(公私)·사정(邪正)과 멀게는 흥폐(興廢)·존망(存亡)에 대해 단지 이 점을 간파(看破)하면, 곧 위태한 사세(事勢)를 만회(挽回)시킬 수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살펴보건대, 더욱 주염계주공공자의 도통(道統)을 직접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염계 이후 여러 현인들이 서로 전하여 온 도통도 또한 이 ‘기(幾)’ 자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공부하는 요점에 대해서는 주자는 ‘사(思)’ 자로 설명하였고 ‘장자(張子)’는 ‘예(豫)’ 자로 설명하였으며, 주자(朱子)는 또 ‘심(審)’ 자를 보태었다. 이 사·예·심의 세 글자에 의거하여 주자가 말한 선·악의 기미라고 한 것에 힘을 써서 추구(推究)한다면, 이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정일(精一)한 공부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인 호원(胡瑗)이 말하기를, ‘한 치의 싹을 꺾어버리면 백길이나 되는 나무가 될 수 없고, 개미 구멍을 소홀히 여기면 천길 되는 제방도 견고할 수 없다.’라고 하였고, 사마광(司馬光)은 말하기를, ‘물이 얼마 없을 때에는 한 줌 흙으로도 막을 수 있지만 그것이 넘쳐날 경우에는 목석(木石)을 떠내려 보내고 구릉(丘陵)을 집어 삼킨다.’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설명은 모두 기미를 살피는 공부에 대해 말한 것으로 일찍이 음미할 만한 말로 여기었다. 이를 이 장(章)의 뜻과 참작하여 볼 수 있겠는가?"

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유독 한 마음의 기미 뿐만이 아니라 커다란 모든 일을 추진함에 있어 미미한 것을 소홀히 여기면, 점점 크게 되어 구제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맹자(孟子)가 사단(四端)에 대해 말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를 해설하면서 ‘시(始)’ 자로써 ‘단(端)’ 자를 새기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으로 발단(發端)·개단(開端)·이단(履端)의 뜻과 같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단’ 자와 ‘기(幾)’ 자의 뜻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즉시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교하기를,

"주자(周子)《통서(通書)》에 또 말하기를, ‘동(動)하였으나 아직 형적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유무(有無) 사이의 기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살펴보건대, 기미라는 것은 유무(有無)와 형적이 드러나지 않은 것[未形]의 사이에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장(章)에서는 곧바로 ‘선·악의 기미[幾善惡]’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통서》 가운데 있는 설명과 이 장을 비교하여 본다면, 과연 서로 어긋나는 뜻이 없는가?"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이미 선·악의 기미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선·악이 마음에 처음으로 싹텄으나, 아직 사위(事爲)에는 드러나지 않은 때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기(幾)’ 자만이 그 유무지간(有無之間)을 형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기(幾)’라는 한 글자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경서(經書) 가운데에서 ‘기’ 자가 가장 많은 것은 《주역(周易)》보다 더한 것이 없다. 《주역》에 말하기를, ‘기미를 아는 것이 신(神)이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기미를 보고 행동하라.’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기미를 궁구한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일을 완성시키는 것은 기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기(幾)’ 자들은 ‘선·악의 기미’라는 ‘기’와 혹 심천(深淺)·정조(精粗)의 구분이 있는가? 《서경》에는 기미를 살피고 평안한 것을 생각하며, ‘항상 경계하면서 기미를 살피라.’라는 문구가 있으며, 또 ‘하루 이틀에 만기(萬幾)가 발생한다.’라거나, ‘그대는 원자(元子)인 교(釗)에게 불선(不善)한 기미를 진달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시경》에서는 ‘서기(庶幾)·여기(如幾)’라고 읊었는데, 이들 ‘기(幾)’ 자가 과연 모두 같은 뜻인가?"

하니, 심염조가 대답하기를,

"‘서기(庶幾)’의 ‘기’ 자는 기다린다[佇待]는 뜻에 고 ‘여기(如幾)’의 ‘기’ 자는 기대한다[期待]는 뜻에 가까운 것이므로, 여기의 ‘기’ 자와는 뜻이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말하기를, 덕(德) 가운데에서 사랑하는 것을 또한 인(仁)이라고 하였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仁) 중의 한가지 일이기 때문에 사랑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효도도 또한 인(仁) 중의 한가지 일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다만 사랑한다는 것만을 말했는 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다면 창려(昌黎)197) 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이 인(仁)이다.’라고 한 말에 대해 선유(先儒)들이 공척(攻斥)하여 말하기를, ‘인이 무엇인지 모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정지검이 대답하기를,

"애(愛)는 정(情)이고 인(仁)은 성(性)인데, 한유(韓愈)가 곧바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이 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정(情)으로 성(性)을 삼은 것이어서 잘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고 한다[愛日仁].’라고 한 것은 발동되어 애정(愛情)이 된 것으로 곧 성(性)의 인(仁)이라고 한 것과 그 뜻이 같은 것입니다. 이는 바로 맹자(孟子)가 측은(惻隱)하게 여기는 마음의 단서를 인(仁)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한유의 설명과는 같은 듯하면서도 실상은 다른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렇다. 오직 ‘애(愛)’ 자만이 가장 인(仁)의 본체(本體)에 합당한데,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애는 본래 정(情)이고, 인은 본래 성(性)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로지 ‘애’ 자만으로 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측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하는 것인데, 맹자는 이를 인의 단서(端緖)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단서라고 하였으면 이를 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들의 의견에는 어떻다고 여기는가"?

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곧바로 애를 인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합니다만, 또한 애를 통해서만 인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성(性)’이다, ‘복(復)’이다, ‘발미(發微)’다 하는 말들은 성(性)을 주안점으로 하여 한 말인가? ‘안(安)’이다, ‘집(執)’이다, ‘충주(充周)’다 하는 말들은 정(情)을 주안점으로 하여 한 말인가?"

하니, 정지검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김희는 말하기를,

"‘본성(本性)에 편안한 것[性焉安焉]’이라고 한 것은 윗글의 ‘성(誠)’은 무위이다[誠無爲].’라는 말과 상응되는 것이고, ‘본성을 회복하여 잡아서 지키는 것[復焉執焉]이라고 한 것은 윗글의 ‘선악의 기미[幾善惡]’라는 말과 상응되는 것이며, ‘미미하게 나타나서 볼 수 없고 두루 꽉 차서 다함이 없다[發微充周].’말은 윗글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德)’이라는 말과 상응되는 것이어서 매 구절마다 성(性)과 정(情)을 나눌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정지검이 말하기를,

"이 장(章)에서는 비록 성(誠)·기(幾)·덕(德)을 나누어서 말하였습니다만, 실상은 성(性)과 정(情)뿐인 것입니다. ‘성언(性焉)’이라고 한 것은 자신의 본성을 본성대로 유지하는 것을 말하고, ‘복언(復焉)’이라고 한 것은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말하며, ‘발미(發微)’라고 한 것은 그 본체(本體)를 통하여 발현된 것은 미미하고 오묘해서 쉽게 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어찌 성(性)을 주안점으로 하여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안언(安焉)’·‘집언(執焉)’이라고 하였으니, 편안하게 하고 잡아서 지킨다는 것은 진실로 정(情)인 것이고, ‘두루 꽉 채워도 다함이 없다.’라고 한 것은 그 또한 용(用)쪽에 속하는 것이니, 어찌 정(情)을 주안점으로 하여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곧바로 성(性)이라거나 정(情)이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름지기 성과 정을 주안점으로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과연 섭미도(葉味道) 주(註)의 내용대로라면, 성인(聖人)은 본성을 배양하는 데 온전하여 기(氣)를 살피는 공부가 없어도 되며 현인(賢人)은 기를 살피는 데 치우쳐 본성을 배양하는 공부가 없다는 것인가? 모름지기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어찌 선악에 대한 기미가 없는가?"

하니, 서명응이 대답하기를,

"이 한 단락에 대한 석의(釋疑)에서도 또한 큰 비척(非斥)을 가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성(聖)’이라고 하고, ‘현(賢)’이라고 하고, ‘신(神)’이라고 했는데, 신이라고 말한 것이 성 이외에 어찌 별도의 지위(地位)가 있어서였겠는가? 성이라는 면에서 말한다면, 비록 성 이외에 따로 하나의 신이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예컨대 오직 성스럽고 오직 신스럽다고 할 즈음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으로써는 헤아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장(章)의 강론은 이미 끝이 났다. 생지위성장(生之謂性章)은 곧 명도(明道)198) 선생이 이·기(理氣)를 합하여 성(性)을 논한 설명으로 전성(前聖)이 발명(發明)하지 않은 것을 발명한 것이다. 계속해서 이 장을 강론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김희에게 독주(讀奏)하게 한 다음 각각 글의 뜻에 대해 진달하라고 명하였다. 그것이 끝나자 하교하기를,

"이 생지위성(生之謂性)의 한 장(章)은, 맹자가 본성(本性)은 선(善)한다고 말한 뒤 한결같이 순선(純善)으로만 본성을 논하였을 뿐, 일찍이 기질(氣質)의 성(性)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장(章)에 이르러 정자(程子)가 비로소 그것을 발론(發論)하였으니, 정자가 아니었으면 누가 감히 기질의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있었겠는가? 명도(明道) 선생은 거의 성인의 지위에 이르렀고, 염계(濂溪) 선생의 도통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태어난 것을 성(性)이라고 한다[生之謂性].’라고 한 것은 이(理)와 기(氣)를 겸하여 말한 것이니, 맹자가 본성은 선하다고 한 뜻과 함께 표리(表裏)로 하여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자(告子)199) 가 타고난 육체의 본능인 지각(知覺)과 운동(運動)이 성(性)이라고 한 것과는 같지 않다. 대개 본성은 하나로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늘이 명령한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성(性)은 선하다고 한 것은, 곧 본연의 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요, 여기에서 ‘태어난 것이 성(性)이다.’라고 한 것은 단지 품수(稟受)한 것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미 염계명도의 정론(正論)이 있다. 대저 기품(氣稟)에 관한 설은 장자(張子)·정자(程子)에게서 제기된 것으로 주자(朱子)가 칭송하기를, ‘성문(聖門)에 공(功)이 있고, 후학(後學)에게 도움을 주었다.’라고 하였다. 맹자가 성선(性善)을 말한 것과 정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은 갑자기 보면 다른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만약 정자의 이 말이 없었다면, 고자(告子)의 말을 변박(辨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맹자는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데 급급하여 단지 본성이 선하다는 것만을 말하였으므로 후학(後學)들이 다시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정자의 이 말이 있고 나서부터 비로소 본연의 선(善)을 환히 알게 되었으며 또 단지 성(性)만을 말하더라도 곧바로 기(氣)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맹자(孟子)가 칭도하지 못했던 말을 천발(闡發)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사문(斯文)에 큰 공이 있어 그 공적이 우왕(禹王)만 못하지 않다고 할 수 있으니, 정자가 여기에 해당이 된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과연 합당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말하기를 ‘본성 속에 원래 이 두 가지가 들어 있어 상대(相對)하여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성(性)’자는 본연의 성을 가리켜 말한 것 같기는 한데 과연 어떠한지를 잘 모르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과연 본연의 성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여기에서 ‘선은 진실로 본성이지만 악도 또한 본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위의 ‘성(性)’ 자와 아래의 ‘성(性)’ 자가 다같은 ‘성(性)’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선이라고 하고 하나는 악이라고 했으니 이는 곧 성(性)을 논하고 기(氣)는 논하지 않은 것이어서 완비되지 못한 내용이다. 주자(朱子)가 이 글귀를 해석하기를, ‘근원이 되는 것은 모두 선인 것이다. 기(氣)로 인하여 본성이 치우치게 되는데 곧 치우쳐졌어도 성은 본디 선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 악하게 되는 것은 성이 악에 빠진 것이 마치 물이 진흙에 섞여진 것과 같아서 물이 없으면 진흙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전성(前聖)이 발명하지 못한 말을 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단지 이(理)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고, 기질지성(氣質之性)은 기(氣)를 겸하여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성이 선하다고 말하고 나서 또 성이 악하다고 말한 이유인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이(理)에는 선악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理)는 본래 순선(純善)한 것인데 어찌하여 이(理)에는 선악이 있다고 하였는가?"

하니, 서명응이 대답하기를,

"이 ‘이(理)’ 자에 대해서는 석의(釋疑)에서도 또한 이세(理勢)의 이(理)이지 성리(性理)의 이(理)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말이 옳다. 맹자가 말하기를, ‘재질[才]의 탓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재질이라는 것은 곧 정(情)인 것이다. 정도 이미 탓이 되지 않는데 더구나 성(性)이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성에 어찌 선악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식욕이나 색욕은 순제(舜帝)도척(盜蹠)이나 다같이 타고난 것이지만, 단지 절도에 맞게 하고 절도에 맞지 않게 하고 하는 사이에 선과 악이 나뉘어지게 되는 것이다. 발현된 것이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을 가지고 성(性)이 악하다고 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닌가?"

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막 발용(發用)될 때는 곧 기질(氣質)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로 흘러들어가면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따져보면, 실상은 성(性)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악도 또한 성(性)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렇다."

하니, 이휘지가 대답하기를,

"‘기질지성(氣質之性)’은 비록 악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본연의 선(善)이 있기 때문에 ‘회복[復]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회복한다는 것은 그 처음을 회복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록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할지라도 애당초 어찌 악이 있었는가? 대저 사람은 맑고 순일한 기(氣)를 받아서 그것이 바탕[質]을 이루었기 때문에 비록 혼탁하고 뒤섞여 잡스러운 속에서라고 할지라도 또한 절로 한 단(段)의 청통(淸通)한 기(氣)가 있으므로 금수(禽獸)처럼 완전히 막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氣)에 구애가 되어 혹 옆으로 흘러서 악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뿐이니, 순선(純善)하여 잡된 것이 없는 ‘본연지성(本然之性)’에 견주어 뒤섞어서 분별이 없게 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다. 그런데 또한 어떻게 악이라는 한 글자를 저 성(性) 속에 놓고서 ‘기질지성’에는 본래 악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휘지가 대답하기를,

"성교(聖敎)가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저 사람들이 성에 대해 설명함에 있어 단지 계속 발현되는 것을 선(善)이라고 한다[以人說性 只是說之者善也].’라거나 ‘물이 흘러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猶水流而就下也].’라고 하였는데, 섭미도(葉味道)의 주(註)에서는 이들 아래위의 두 글귀를 통틀어 보아 가지고 계속 발현된다고 한 것은 물이 흘러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고까지 하면서 전혀 별개의 단락으로 보지 않았으니, 이런 등등의 부분에 대해서는 주(註)의 설명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계속해서 발현되는 것이 선(善)이라고 한 것은 형체가 이루어지기 전의 일이니, 갑자기 계속해서 발현되는 것이 성(性)이 된다고 하기에는 부당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를 말하여 성선(性善)의 뜻을 밝힌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계속해서 발현된다.’는 것이 당연히 발처(發處)에 속하는 것인가, 미발처(未發處)에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발(已發)과 미발(未發)을 겸한 것인가?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본연(本然)의 선(善)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인가?"

하니, 정지검이 대답하기를,

"계속해서 발현되는 것이 선(善)이라는 것은 성(性)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하늘이 명령한 순선(純善)을 가리킨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훈석(訓釋)에 혹 이를 성(性)의 발처(發處)로 만들어 해석한 경우가 있는데, 대개 이는 초년(初年)의 확정되지 않은 논설인 것입니다. 물이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 본연의 선을 비유한 것인데, 아랫글에 ‘흐린 것이라도 물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不可以濁者 不爲水也].’라고 한 것은, 곧 윗글의 ‘악한 것도 또한 성(性)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惡亦不可不謂之性也].’라는 말과 상응되는 것으로 섭미도의 주(註)가 옳은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기질(氣質)에 참으로 혼탁하고 뒤섞여 잡스러운 것이 있다면, 끝내 맑게 할 수 있는 이치가 없단 말인가? 성인이 이른바 ‘하우(下愚)는 변이(變移)시킬 수 없다’라고 한 것은 이것이 과연 참으로 혼탁하고 뒤섞여 잡스러워서 맑게 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니, 유언호가 대답하기를,

"기질에는 비록 청탁(淸濁)이 있습니다만 형질(形質)의 국면(局面)이 정해져서 변이 시킬 수 없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진실로 힘을 써서 잘 다스려 간다면 흐린 것을 변하여 맑게 하고 우매한 것을 변하여 현명하게 할 수 있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정동준이 묻기를,

"여기에서 말하기를, 어려서부터 악한 사람이 있다[有幼而惡幼].’라고 하였는데, 어리다는 것은 갓난아기가 처음 태어나 지각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그 악은 태어나면서 함께 생긴 것으로 천부(天賦)의 기질(氣質)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 되니, 이것이 어찌 성(性) 속의 악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니, 김희가 말하기를,

"갓난아기는 단지 양지(良知)가 있을 뿐이고 두서너 살이 된 뒤에야 악이 비로소 생기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는 바로 기질(氣質)의 탓이지 성(性)의 탓은 아닌 것이다. 갓나서 우는 아기가 진실로 무엇을 알겠는가? 단지 그 아기의 상모(狀貌)를 살펴보거나 그 아기의 목소리를 듣고서 장차 악한 사람이 될 것인지를 예측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갓난아기의 마음에 처음부터 악이 있겠는가?"

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태중(胎中)에 있을 때부터 이미 선악의 구분이 있는 것입니다. 신의 의견은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기질지성(氣質之性)’은 곧 태어난 이후의 일인 것이다. 태어나기 전에 어떻게 선악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만약 악이 태중에서부터 생겨난다고 한다면 갓난아기의 마음이 의당 어느 쪽에서 드러나겠는가? 이른바 갓난아기의 마음은 요(堯)·순(舜)걸(桀)·주(紂)도 똑같이 타고난 마음인 것으로, 지각이 점점 생겨난 뒤에 이르러서야 ··가 비로소 나뉘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경의 말대로라면 태중의 아기가 선악을 품부 받는 것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니, 갓난아기의 양심(良心)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실로 그것이 옳은 말인 지 모르겠다."

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뱃속에서 이미 청·탁(淸濁)이 나뉘어지는데, 탁한 것은 악의 부리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이제 저 마디가 많아 쓸모없는 나무와 둔탁한 거친 돌은 수기(受氣)가 혼탁하고 잡스러움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악하다고 말하지 않으니,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그것이 지각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갓난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적에는 그 마음에 아무런 지각이 없는 것이 나무나 돌과 같은 것이다. 대저 선이라고 하고 악이라고 하는 것은 지각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태어난 처음에 형체는 비록 갖추어져 있을 지라도 지각은 생겨나지 않았으니, 악한 마음이 어디에 발붙일 수 있겠으며, 악한 자취를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이 장(章)에서 ‘어려서부터[自幼]’라고 한 ‘유(幼)’ 자는 또한 지각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가 아닌 것이다. 지각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에 당하여 기(氣)의 청탁을 논하는 것이야 괜찮다 하겠으나, 마음의 선악을 논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다. 만약 기(氣)가 탁하다는 것으로써 곧바로 마음이 악하다고 한다면, 또한 장차 나무의 마음이 악하고 돌의 마음이 악하다고 하겠는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도 아직 그 악을 논할 수가 없는 것인데, 더구나 뱃속에 들어 있는 때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의 말은 어맥(語脈)의 병통이 크다."

하니, 정지검이 대답하기를,

"성교(聖敎)는 갓난아기의 마음을 가지고 ‘본성이 선하다.’는 뜻을 발명(發明)하셨는데, 이는 곧 맹자의 생각인 것이니 신은 실로 흠탄(欽歎)하여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 장(章)은 기질(氣質)을 겸하여 성(性)을 말한 것이니, 김종수가 이른바 ‘탁한 것이 악의 부리가 된다.’라고 한 것도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이(理)는 하늘이 명령한 것이고 이를 순종하여 따르는 것은 도(道)이다. 이를 따라 연마하여 각각 자신의 분한(分限)을 취득하는 것이 교(敎)이다. 하늘이 명령한다는데서부터 교에 이르기까지 내가 아무 것도 보태거나 감손(減損)한 것이 없다. 이것이 순제(舜帝)가 천하를 소유하고서도 간여하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此理天命也 順而循之 則道也 循比而修之 各得其分 則敎也 自天命以至於敎 我無加損焉 此舜有天下而不與 焉者也].’라고 하였는데, 이 47자는 성문(聖門)의 부계(符契)요, 진덕(進德)의 긴요한 방도라고 할 수 있다. 정자(程子)가 아니었더라면 누가 능히 이렇게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후학(後學)들이 간혹 ‘솔성(率性)’의 ‘솔(率)’ 자를 ‘공부’로 보기도 하였으니, 정자의 이 설명은 후학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크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장(章)의 은미한 말과 깊은 뜻을 진실로 하루 사이에 강구(講究)하기는 어렵지만, 장구(章句) 사이의 한두 가지 의심스러운 점은 이제 남김없이 논란하였다. 안자 호학론(顔子好學論) 일장(一章)은 곧 이천(伊川) 선생이 학문에 뜻을 둔 처음에 학문에 대해 논한 글이다. 이천 선생의 큰 문자(文字)들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원초(原初)의 입지(立志)는 성인이 되기를 바란 것으로 그 중요한 핵심은 이 호학론(好學論) 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계속해서 강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우진이 독주(讀奏)하였다. 각기 글의 뜻을 진달하라고 명하였으며 그것이 끝나자, 하교하기를,

"이천 선생은 나이 18세에 상사(上舍)200) 에 유학(遊學)하였는데, 호안정(胡安定)201)안자(顔子)가 좋아한 것은 무슨 학문인가라는 것으로 논제(論題)를 내자 선생은 이 논설을 지어 대답했다고 한다. 이 글을 살펴보면 지보(地步)202) 가 원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선생이 학문을 함에 있어 주염계(周濂溪)에게서 힘을 얻은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이 글은 한 글자도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참으로 그러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말하기를, ‘시(詩)·서(書)와 육예(六藝)’라고 하였는데, 육예 가운데에는 악(樂)이 있고 서(書)가 있어서 시(詩)·서(書)라고 한 ‘서(書)’ 자와 육예 가운데의 ‘서(書)’ 자는 진실로 다른 구별이 있는 것이다. 다만 시(詩)라는 것은 악(樂)인 것이다. 옛사람의 시가(詩歌)는 위로 교묘(郊廟)의 아송(雅頌)에서부터 아래로 민간의 구가(謳歌)에 이르기까지 관현(管絃)의 곡조에 올리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시(詩)의 학(學)이 어찌 악(樂)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육예 이외에 다시 시서(詩書)에 대해 말한 것은 뜻이 중첩되는 혐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시(詩)는 곧 《시경(詩經)》이고 육예 가운데 악(樂)은 단지 성음(聲音) 과 절주(節奏)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에는 또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관현의 곡조에 올린다고 한다면 악은 시를 기다려서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후세에 그 글은 전하나 그 악은 전하지 않는데도 나란히 같게 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시(詩)와 악(樂)은 진실로 나누어 둘로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만, 삼백 편(三百篇)의 시(詩)가 있기 전에도 이미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의 제도가 있었으니, 또한 같게 해서 하나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편(篇)은 곧 호안정(胡安定)이천(伊川) 선생에게 안자(顔子)가 좋아한 것이 무슨 학문이라고 물은 데 대한 답인 것이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의심이 나는 점이 있다. 주염계《논어(論語)》단표 누항장(簞瓢陋巷章)에서 정자(程子)로 하여금 스스로 안자(顔子)가 즐긴 것이 무슨 일인지 찾아보게 한 것이 바로 이 뜻과 마찬가지인 것인데, 배우기를 좋아한 것이 무슨 학문인가에 대한 대답에서는 정자가 성인(聖人)의 학문을 좋아한다고 대답하였지만, 즐긴 것이 무슨 일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니, 즐긴 것이 과연 어떤 부분인가?"

하니, 이휘지가 대답하기를,

"‘도를 즐긴다[樂道].’는 말을 정자가 비록 공척하기는 했습니다만, 대체(大體)는 ‘낙도(樂道)’·‘낙(樂)’ 자의 뜻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만일 안자(顔子)가 즐긴 것이 성인(聖人)의 도(道)를 즐긴 것이 된다면, 도와 내[道與我]가 둘이 되는 병통이 있게 된다. 안자는 아성(亞聖)이니, 도가 안자이고 안자가 도인 것인데 ‘도를 즐겼다[樂道].’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또 ‘명교(名敎) 가운데 절로 즐거운 것이 별로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더욱 불가한 것이다. 이는 바로 천고(千古)에 확정되지 않은 안건(案件)인 것이다. 해설하는 사람들은 또 ‘안자가 즐겼다고 한 낙(樂)에 대해서는 경전(經傳)에서 참조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낙(樂)’ 자는 장차 어떻게 지적하여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복원이 대답하기를,

"정자(程子)의 말에 ‘만약 도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안자가 아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만, 이제 만약 도 이외에 따로 즐기는 곳을 찾으려 한다면 또한 폐단이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의리가 가슴속에 충만해 있으면 자연히 만족하여 기뻐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안자의 ‘낙(樂)’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렇다. 대저 안자(顔子)는 대성(大聖)에 대하여 단지 한 칸을 미달(未達)하였을 뿐이다. 대개 글로 나의 식견을 넓혀 주고 예(禮)로 나의 행동을 검속(檢束)하게 하여 주었다고 한 것은 안자의 학문이요, 우러를수록 높고 뚫을수록 단단하여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은 안자의 용공(用工)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자가 즐겼다는 것이 되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천지에 정기가 저장되어 있다[天地儲精].’라고 하였는데 이 ‘정(精)’ 자는 곧 윗글 태극도설 가운데 ‘이오(二五)’의 ‘정(精)’이라고 한 그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유독 ‘이오(二五)의 정’이라고만 하고 ‘무극(無極)의 진(眞)’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퇴계(退溪)의 말에, ‘정(精)을 말하였으면 무극의 진은 그 속에 들어 있다.’라고 했는데, 이 뜻이 본지(本旨)에 구애되는 점이 없겠는가? 주자는 말하기를, ‘이천(伊川) 선생이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기 전에 이 논설을 저술했기 때문에 간혹 진선(盡善)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라고 했으니, 바로 이런 등등의 부분을 말하는 것인가? 경들의 의견으로는 어떻게 여기는지 모르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즉시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그 본체가〉 순진하고, 정하다[眞而靜].’라고 했는데, 진(眞)은 본체(本體)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정(靜)은 사물(事物)에 감응되지 않았을 때를 가리킨 것이다. 진과 정의 두 글자 사이에 하나의 ‘이(而)’ 자를 써 놓은 것이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라고 한 ‘이(而)’ 자와 다른가, 같은가? 그리고 진은 본체이고, 정은 미발(未發)인데 이 두 글자의 뜻이 과연 같지 않은 것인가?"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여기의 ‘이(而)’ 자는 곧 ‘차(且)’ 자와 같은 것이므로 ‘무극이면서 태극’이라는 데의 ‘이(而)’ 자와는 같지 않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진(眞)’이고 ‘정(靜)’이라고 했으며, 또 그 ‘미발(未發)일 때에는 오성(五性)을 갖추고 있다[其本發也 五性具焉].’라고 했는데, 오성(五性)이 진(眞)이 발동되지 않은 것으로, 곧 이것이 정(靜)인 것이다. 이는 주자가 이미 확정한 의론이니, 윗 글귀에 이미 ‘진이고 정하다.’고 말하고 나서 아래 글귀에 또 ‘미발’과 ‘오성’에 대해서 말한 것은 뜻이 중첩되는 병통이 없지 않다. 이것이 혹 조검(照檢)하지 않은 부분이 아닌가? 이는 억측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선유(先儒)들의 의논이 있어 온 것이다. 경들의 의견으로는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진(眞)은 인위(人僞)가 섞이지 않은 때이므로 모두 사물에 감응되지 않았을 때인 것입니다. ‘미발(未發)일 때에는 오성(五性)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한 한 글귀에 이르러서는 다시 정처(靜處)에 대하여 진(眞)의 명목(名目)을 설파(說破)한 것이므로 비록 중복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또한 층절(層節)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이 일곱 가지는 곧 칠정(七情)이고, 측은·수오·시비·사양(惻隱羞惡是非辭讓)의 이 네 가지는 곧 사단(四端)인 것이다. 칠정은 정(情)이고 사단도 또한 정(情)이다. 따라서 단지 칠정만 말하면 되는 것인데, 맹자(孟子)는 또 무엇 때문에 사단을 말하였는가? 단지, 사단만 말하면 되는데 자사(子思)는 또 무엇 때문에 칠정을 말하였는가? 혹시 사단 이외에 다시 칠정이 있다는 것인가? 또 혹시 자사(子思)맹자가 말한 것이 각기 가리키는 것에 차이가 있어서 이렇게 사단이니 칠정이니 하고 다르게 말한 것인가? 우리 나라의 선비인 퇴계(退溪)율곡(栗谷)에 이르러서도 이 때문에 사칠변(四七辨)203) 이 있기에 이르렀는데, 퇴계는, ‘사단은 이(理)가 발하였는데 기(氣)가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였는데 이가 이에 타는[乘] 것이다.’라고 하고, 율곡은 ‘이(理)와 기(氣)는 혼륭(混瀜)된 것이므로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정(情)이고 발동되게 하는 것은 기(氣)이다. 그러므로 발동되는 것은 이(理)이지만 기가 아니면 발동되게 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발동되는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찌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다름이 있게 된 것인가? 당시 지구(知舊) 사이에도 서로가 논란이 많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논설이 서고(書庫)에 가득 찰 정도이니, 장차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를 모르겠다."

하니, 김희가 대답하기를,

"칠정(七情)은 선·악을 겸하여 말한 것이고 사단(四端)은 단지 선 한쪽만을 따라서 말한 것입니다. 때문에 부연하면 칠정이 되고 요약하면 사단이 되는 것이므로 사단·칠정은 본래 두 가지의 정(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 두 선정(先正)들의 말이 각기 같지 않아서 지금까지 그에 관한 논설이 분분합니다만, 신은 삼가 뒤의 선정(先生)204) 의 말을 정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불선(不善)인줄 알고서 다시는 행하지 않는 것과 선(善)인줄 알고 즉시 행하는 것이 어느 쪽이 어려운가?"

하니, 이복원이 대답하기를,

"이는 음양(陰陽)의 분수(分數)와 같은 것이어서 음이 소멸되면 양이 자라고 양이 소멸되면 음이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선(善)인줄 알고서 행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곧 불선(不善)인 것이니, 아마도 어렵고 쉬운 것을 나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장(章)은 이미 강을 끝마쳤다. 정성장(定性章)은 비록 장자(張子)가 저술한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한번 크게 변하여 도(道)에 이르게 된 것은 실로 두 분 정자(程子)205) 를 만난 뒤에 있었다. 그가 두 분 정자와 문답(問答)한 큰 의논(議論)은 이 글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장자의 견해를 공척한다고 하더라도 장자장자가 된 이유가 또한 여기에 들어 있는 것이니, 계속해서 이 장을 강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서용보·정동준이 독주(讀奏)하였으며, 글의 뜻을 진달하라고 명하여 진달이 끝난 다음, 하교하기를,

"횡거(橫渠)가 ‘성(性)’을 안정시켜 절도에 맞게 함에 있어서는 동(動)하지 않을 수 없다[宗性未能不動].’라는 것으로 의심하여 명도(明道) 선생에게 물으니 명도 선생이 글을 지어 답하였는데, 그 글의 내용은 대개 ‘동(動)’할 때에도 안정하고 정(靜)할 때에도 안정시켜야 한다[動亦定靜亦定].’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곧 주자(周子)가 이른바 ‘정(靜)해도 안정[定]이 없고, 동(動)해도 동(動)이 없다.’는 이치인 것이다. 명도 선생주염계 선생의 통서를 이었다는 이유가 실상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대저 천하에 안정되지 않은 이(理)가 없고, 안정되지 않은 성(性)이 없는 것이어서 안정되기를 요구하게 되면 이는 곧 성(性)이 아닌 것인다. 그러므로 이 글을 살펴보면 명도 선생의 조예를 알 수가 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만물에게 널리 베풀고 만사를 순리대로 한다.’라고 한 것은 곧 사물을 단절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또 ‘집착하는 정이 없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라는 것은 곧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절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공부에 대해 이 편(篇)의 내용 가운데 어떤 말이 핵심이 되는 것인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신들은 미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차 옥서(玉署)에 나아가려고 하니, 대신(大臣) 이외의 경연(經筵) 제신(諸臣)들은 물러가 본서(本署)에서 기다리라. 내가 선온(宣醞)하려 한다."

하니, 이에 지사(知事) 이하의 관원들이 차례대로 먼저 물러나갔다. 하교하기를,

"홍문관에서 강론할 책자는 관관(館官)이 영사(領事)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초기(草記)로 품의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선온을 명하였다. 술을 한 순배 돌리고 난 다음 강(講)을 거둘 것을 명하였다. 통례(通禮)가 예(禮)가 끝났음을 아뢰니, 각신(閣臣)이 다시 배위(拜位)로 내려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인의(引儀)가 시임(時任)·원임(原任) 각신들을 인도하여 좌우로 나누어 물러나갔다. 임금이 드디어 수레를 타고 홍문관으로 나아가니, 각신들이 합문(閤門) 밖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이어 홍문관으로 거둔 경연 제신들을 불러서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본관(本館)에서 《심경》을 진강(進講)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경연 제신들에게 전상(殿上)으로 올라올 것을 명하였다. 영사(領事) 이하의 관원들이 서계(西階)로 올라가서 강위(講位)로 나아갔다. 영사 서명선(徐命善)·이휘지(李徽之), 지사(知事) 정상순(鄭尙淳)·김익(金熤), 동지사 이명식(李命植)·정창성(鄭昌聖), 참찬관 이갑(李𡊠)·서유방(徐有防)·신응현(申應顯)·조시위(趙時偉)·김우진(金宇鎭)·정지검(鄭志儉), 시강관 박천형(朴天衡), 시독관 이시수(李時秀)·이정운(李鼎運)·이겸빈(李謙彬)·유맹양(柳孟養), 검토관 조정진(趙鼎鎭)·박천행(朴天行)·권이강(權以綱)·홍문영(洪文泳)이 차례대로 강위(講位)로 나아갔다. 각신 가운데 원임은 물러가고 시임은 청강(聽講)하도록 명하니, 제학 김종수(金鍾秀)·유언호(兪彦鎬), 직제학 정민시(鄭民始)·심염조(沈念祖), 직각 서정수(徐鼎修), 대교 정동준(鄭東浚)이 차례대로 강위로 나아가 부복하였다. 박천형이 독주(讀奏)하여 제 4장(第四章)에 이르자 각각 글의 뜻을 진달하도록 명하였는데, 진달이 끝나자,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면려(勉勵)한 것은 절실(切實)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다만 날이 이미 저물어가고 여러 신하들이 경연에 참석한 지도 또한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제 길게 말할 수 없다. 대저 이 편(篇)은 마음[心]에 대해 말한 글들을 모아서 하나의 책을 만든 것으로 천고에 마음을 다스리는 요법(要法)인 것이다. 진서산(眞西山)206) 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과 뒷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공이 진실로 크다. 그런데 책의 이름을 《심경》이라고 한 것은 《시경》이니 《서경》이니 한 것과는 같지 않으나, 설명이 하나의 ‘심(心)’ 자에서 나왔으므로 드디어 ‘경(經)’이라고 한 것이다. 이를 《근사록(近思錄)》의 이름을 붙인 뜻과 비교하여 보면 차등이 없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끝내 타당치 못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이 편(篇)은 선정(先正)이 여저(旅邸)에서 구득(求得)한 것이어서 조각난 쪽지와 떨어진 책장이 마구 뒤섞여 두서가 없는 탓으로 하나의 통일성 있는 책을 이루지 못하였다. 때문에 선정이 이를 수집하여 정리하고 고증하는 것을 만년(晩年)의 공부로 삼았다. 그런데 부주(附注)와 상고한 말들이 각기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황돈(程篁墩)207) 의 경우는 학문이 정로(正路)를 잃어서 말에 오해된 것이 많았으니, 지난날 선정(先正)의 명쾌한 변석(辨釋)이 아니었다면 어찌 후학(後學)을 그르치는 탄식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경전(經傳)의 큰 가르침과 성현(聖賢)의 중요한 공부가 모두 이 한 편의 글에 들어 있음을 뚜렷이 고증할 수 있으니, 말세(末世)의 어둠을 밝혀주고 말학(末學)의 본보기가 되는 전칙(典則)임은 물론 위로 황왕(皇王)에서부터 아래로 필서(匹庶)208) 에 이르기까지 그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에 대한 공부를 함에 있어 이 책을 버리고 무엇을 택하겠는가? 선정이 이른바, 《근사록》에 못지 않다고 한 것은 참으로 절실한 말인 것이다. 내가 매번 이 책을 높이고 믿으면서도 평소 공부가 없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이제 경들과 함께 한두 가지를 강론해도 되겠는가?"

하니, 김익이 대답하기를,

"오늘의 이 모임은 실로 천고에 드문 성대한 일입니다. 뭇 신하들이 부주(敷奏)한 것이 아둔하고 사리에 어긋나서 계옥(啓沃)이 되지 못하지마는 말초(末梢)의 전어(轉語)들은 대부분이 임금의 덕을 면려하기 위한 말들이었으니, 전하께서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이 천단(淺短)하다는 것으로 준례에 따라 응답하지 마시고 단지 말초에 우러러 면려한 말들만을 진실한 마음으로 수용(收用)하소서."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말이 과연 좋다. 여러 신하들이 심(心)에 대해서 말하고 성(性)에 대해서 말하면서 서로가 교대로 진달하여 아뢴 것은 말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뜻은 같은 것으로 그 요점은 모두 임금의 덕에 대해서 우러러 면려한 것이다. 비유하건대 이 방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혹은 동쪽에서 들어오기로 하고 혹은 서쪽에서 들어오기도 하여, 각기 자신이 들어갈 곳을 따라서 들어왔으나 결국 이 방에 들어오기는 한 가지인 것과 같은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각자 경계하여 힘쓰는 것도 또한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밤새도록 내가 경연에 나아가서 여러 신하들이 진달하는 좋은 말[言]을 많이 듣고 나니, 충만하여 마음에 얻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이제 대내(大內)로 돌아가면 실천하는 방도에 대해 굳게 반성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중(中)’이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극진한 공부요, 이 편의 준칙(準則)인 것이다. 그런데도 볼 수 있는 형상이 없고 찾을 수 있는 자취가 없어서 허공에 두고 설명하고 나면 이미 잡히는 것이 전혀 없고, 사물을 가지고 깨우치려 하면 정해진 위치가 없다. 그리하여 말학(末學)인 진부한 유자(儒者)들은 매번 깊고 넓어서 알기 어렵고 높고 원대하여 행하기 어렵다고 여겼으므로 그들이 도(道)에 대해 담론하고 경(經)을 해설한 것은 모두가 한갓 껍데기의 겉 그림자에 불과하여 끝내 실지로 알아서 체득한 것이 없다. 진실로 이 ‘중(中)’ 자를 형용하여 후학들을 개발(開發)하고 싶지만 그 또한 어려운 일이다. 대저 중(中)이 없는 사물이 없고, 중이 없는 처소가 없는 것이어서 일가(一家)에는 일가의 중이 있고, 일국(一國)에는 일국의 중이 있는 것이요, 방에 들아가면 방의 가운데가 중이 되는 것이고 집에 있으면 집의 가운데가 중이 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이 책자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책을 폈을 때에는 두 쪽이 서로 합쳐지는 부분이 중이 되고 책을 덮었을 때에는 크고 작은 제목(題目) 사이가 중이 되는 것이니, 발걸음이라도 정당함에 어긋나면 중이 아닌 것이요,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나면 중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애당초 붙잡고 기어 올라 갈 수 있는 혜경(蹊逕)이나 등급(等級)이 없는 것이어서 사마광(司馬光)의 독실함으로도 오히려 중을 잃을까 유념하였으니, 중의 어려움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니, 서명선이 대답하기를,

"중을 꼭 잡아 지키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중을 아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중을 알고 나서야 꼭 잡아 지킬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렇다. 중(中)을 아는 것이 과연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중을 아는 요도(要道)인가? 선을 밝히면 중을 알 수 있는가, 이치를 궁구하면 중을 알 수 있는가? 이제 먼저 들어가는 첫머리 부분을 따라서 착수하려 한다면 장차 어떻게 하는 것이 중을 아는 요도(要道)가 되겠는가? 학자가 학문을 하는 것은 의원(醫員)이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데, 이제 의원에게 병의 증세에 따라 약에 대한 처방을 내리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무슨 약재가 보(補)가 되고 무슨 약재가 사(瀉)를 시키고 무슨 약재가 온량(溫凉)이 되고 무슨 약재가 신감(辛甘)이 되는지를 알게 해서 각기 그 성분에 따라 각각 처방에 합당하게 한 뒤에야 약재를 합쳐 조제하고 증세에 따라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학자가 중을 알아서 중을 체득하는 것이 또한 의원이 약재를 알고서 약을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는 것의 요점이 되어 비로소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겠는가?"

하니, 박천형이 대답하기를,

"진심으로 오랫동안 힘써 행하여 인의(仁義)가 정통하고 익숙해진 뒤에야 중(中)을 꼭 잡아 지킬수 있는 것이지, 창졸간에 갑자기 중을 꼭 잡아 지키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창졸간에 중을 꼭 잡아 지킬수 없다고 한다면, 장차 어느 때에 비로소 중을 꼭잡아 지킨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휘지가 대답하기를,

"처사(處事)가 사리에 합당하게 되면 중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정한 계한(界限)을 만들어 창졸간에 꼭 잡아 지킬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극(極)’ 자에 대해서는 건극(建極)이니 입극(立極)이니 하였으면서 ‘중(中)’ 자에 대해서는 단지 하나의 중자만을 들어서 말하였을 뿐 ‘중’ 자의 위 아래에 다시 한 글자도 놓지를 않았다. 만약 ‘집중(執中)’이라고 하면 자막(子莫)209) 의 중으로 귀결되기 쉽고, 만약 시중(時中)이라고 한다면 ‘시(時)’ 자는 단지 순리에 따라 말하는 뜻인 것으로 또한 이 ‘중’ 자의 뜻을 분별하여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장차 어떠한 글자를 놓아야만이 좋겠는가? ‘건중(建中)’이란 말이 있고, 또 ‘수중(受中)’이란 말이 있으며, 또한 ‘강충(降衷)’이란 말이 있는데, 충(衷)이라는 것은 곧 중인 것이다. 건(建)·수(受)·강(降)의 세 글자 가운데 어느 것이 좋겠는가? ‘중화(中和)’의 ‘중’ 자가 ‘건중(建中)’의 ‘중’ 자와 ‘집중(執中)’의 ‘중’ 자와 같은가, 다른가?"

하니, 서명선이 대답하기를,

"중화(中和)의 중 자는 건중(建中)·집중(執中)의 중 자와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고, 이 명식은 대답하기를,

"강충(降衷)의 충(衷)은 천명(天命)의 성(性)이고, 수중(受中)의 중(中)은 곧 사람이 얻어서 성(性)으로 삼은 것이며, 건중(建中)·건극(健極)은 표준이 되는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뜻은 다름이 없으나, 쓰이는 곳은 각기 차이가 있으니, 어떤 글자를 집착(執着)하여 하나로 확정하여 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정창성은 대답하기를,

"만약 인의(仁義)가 정통하고 익숙하여 의리의 근원을 환히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중(中)을 꼭 잡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정일(精一)하여 마땅히 그 중(中)을 잡아 지키라.[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것이니 이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 정일한 사람이라야만 비로소 중을 꼭 잡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저 ‘중’이라고 하는 것은 일에 따라 잘 처리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중’인 것이다. 일상 생활의 모든 일에는 각각 절로 그 가운데 중이 들어 있는 것이어서 별반 매우 고원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한 가지 일의 중을 알았으면 한 가지 일의 중을 행하고, 두 가지 일의 중을 알았으면 두 가지 일의 중을 행하여, 결국은 중이 아닌 처리가 없고 중이 아닌 일이 없게 하여 매번 천만 가지 백만 가지의 일을 당하더라도 각기 중에 맞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도(道)인 것이다. 만약 이 ‘중(中)’ 자를 다른 곳에 걸어 두고서 곧장 인의(仁義)가 정통하고 익숙하게 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꼭 잡아 지키려고 한다면 이는 끝내 꼭 잡아 지킬 수 있는 날이 없게 될 것이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처음으로 ‘경(敬)’ 자를 말하여 학자들이 ‘거경(居敬)’의 공부를 알았고,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성(性)’ 자를 설명하여 학자들이 성리(性理)의 학문을 알았으며, 요제(堯帝)순제(舜帝)가 서로 전수(傳受)할 즈음에도 또한 하나의 ‘중(中)’ 자를 집어내자 천하 후세에서 이내 ‘대중(大中)’의 의리를 알게 되었는데, 그 뜻은 한가지이다. 옛날의 성왕(聖王)들이 어찌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에 대해 공부한 뒤에야 중도에 맞게 했겠는가? 이런 등등의 부분에 대해서는 뜻을 살려서 보는 것이 좋겠다. 삼대(三代) 이후로 사람을 가르치는 학설이 오래될수록 더욱 많아져 천 갈래의 온갖 유파들이 각기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하였으므로 속된 학문의 어리석은 선비들은 실로 갈 바를 모른다는 탄식이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세(近世) 이후로는 학자들이 문득 경전(經傳)을 궁구하는 공부를 특별한 기예(技藝)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고, 경학(經學)과 과목(科目)을 나누어 두 갈래의 문로(門路)로 만들었다. 이 이후로 과거를 보기위한 공부에 힘쓰는 사람들은 경적(經籍)을 변모(弁髦)처럼 여겨 경전을 읽는 사람이 없어졌고 따라서 선비들이 모두 경전에 대해 깜깜한 상태가 되었으므로 온 세상이 담장에 얼굴을 대하고 있다는 탄식이 있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말세의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내가 매번 이 점에 대해 깊이 우려하여 크게 탄식하였으나, 끝내 바로잡을 방도를 얻지 못하였다."

하니, 서명선이 대답하기를,

"경학(經學)은, 곧 일상 생활에서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인데도 일단 과거에 합격하고 난 뒤로는 문득 이를 특별한 공부로 여기고 있으니, 말세라고 하신 성교(聖敎)가 참으로 합당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교화(敎化)가 밝혀지지 않고 세급(世級)이 점점 낮아진 때문에 과목과 경전이 나뉘어 두 개의 문로로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과거 제도를 복고(復古)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서명선이 대답하기를,

"우리 왕조(王朝)의 융성했을 때로 말하건대,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가 모두 과목에 의거하여 입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고(中古) 이후에는 문득 두 개의 건사(件事)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날이 이미 저물어가니, 강을 거두도록 하라."

하니, 통례(通禮)가 예(禮)가 끝났음을 아뢰었다. 영사 이하의 관원들이 물러나가니 드디어 가마를 타고 대궐로 돌아왔다. 각신(閣臣)과 관신(館臣)이 관문(館門) 밖에서 공경히 전송하였는데, 합문(閤門) 안에서는 벌써 촛불을 밝히고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21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註 155]
    주자(朱子) : 주희(朱熹).
  • [註 156]
    상산(象山) : 육구연(陸九淵).
  • [註 157]
    사자(四子) : 사서(四書).
  • [註 158]
    승당(升堂) : 도(道)를 터득한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방이 핵심이라면 마루까지는 왔다는 뜻임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에 "자로(子路)는 마루에까지는 올라왔으나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한 상태이다." 한 데서 온 말임.
  • [註 159]
    여동래(呂東萊) : 여조겸(呂祖謙)의 호.
  • [註 160]
    염계(濂溪) : 주돈이(周敦頤).
  • [註 161]
    칠성(七聖) : 황제(黃帝)·방명(方明)·창우(昌寓)·장약(張若)·습붕(謵朋)·곤혼(昆閽)·골계(滑稽)를 이름.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편에 보임.
  • [註 162]
    경악(經幄) : 경연(經筵).
  • [註 163]
    창언(昌言) : 옳은 말.
  • [註 164]
    도제(導齊) :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덕(德)으로 인도하고 예(禮)로 가지런하게 하면 백성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자발적으로 선(善)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자발적으로 선을 찾아간다는 뜻으로 썼음.
  • [註 165]
    미문(彌文) : 미봉(彌逢)하는 조문(條文)이란 말.
  • [註 166]
    공거문(公車文) : 소장(疏章)의 글.
  • [註 167]
    윤 화정(尹和靖) : 송(宋)나라 윤순(尹焞)의 호.
  • [註 168]
    이천(伊川) : 송나라 정이(程頤)의 호.
  • [註 169]
    사상채(謝上蔡) : 송나라 사양좌(謝良佐)의 호.
  • [註 170]
    명도(明道) : 송나라 정호(程顥)의 존칭.
  • [註 171]
    횡거(橫渠) : 송나라 장재(張載)의 호.
  • [註 172]
    남행(南行) : 음직(蔭職).
  • [註 173]
    연평(延平) : 송(宋)나라 이통(李侗)의 호.
  • [註 174]
    귀산(龜山) : 양시(楊時)의 호.
  • [註 175]
    육조(六祖) : 선종(禪宗) 제 6대 조사(祖師) 혜능(慧能).
  • [註 176]
    이단(異端) : 불교.
  • [註 177]
    이 선생(李先生) : 이연평(李延平).
  • [註 178]
    이제 삼왕(二帝三王) : 이제(二帝)는 요제(堯帝)·순제(舜帝)를 이름이고, 삼왕(三王)은 하(夏)나라 우왕(禹王)·은(殷)나라 탕왕(湯王)·주(周)나라 문왕(文王) 무왕(武王)을 이름.
  • [註 179]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풍부함 : 《논어(論語)》 자장편(子張篇)에 "부자(夫子)의 담장은 한없이 높아서 그 문으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그 안에 갖추어져 있는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풍부함을 볼 수가 없다." 한 데서 온 말로, 도(道)가 완비(完備)된 것을 말함.
  • [註 180]
    주자(周子) : 주염계(周濂溪).
  • [註 181]
    동백(東伯) : 김희.
  • [註 182]
    진북계(陳北溪) : 송(宋)나라 진순(陳淳)의 호.
  • [註 183]
    주설(朱設) : 주자의 설명.
  • [註 184]
    대전(大傳) : 《역경(易經)》의 계사전(繫辭傳).
  • [註 185]
    양의(兩儀) : 하늘과 땅 또는 음과 양.
  • [註 186]
    이오(二五) : 음양과 오행.
  • [註 187]
    염락(濂洛) : 송(宋)나라 때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程頤)를 대표하여 이르는 것으로, 학자가 많은 곳을 지칭함.
  • [註 188]
    육상산(陸象山) : 송나라 육구연(陸九淵)의 호.
  • [註 189]
    양자호(楊慈湖) : 송나라 양간(楊簡)의 호.
  • [註 190]
    진백사(陳白沙) : 명나라 진헌장(陳獻章)의 호.
  • [註 191]
    왕양명(王陽明) : 명나라 왕수인(王守仁)의 호.
  • [註 192]
    섭미도(葉味道) : 송나라 때의 학자.
  • [註 193]
    부자(夫子) : 공자(孔子).
  • [註 194]
    사칠(四七) :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 [註 195]
    맹시사(孟施舍)와 북궁 유(北宮黝) : 중국 고대의 용자(勇者),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상(上).
  • [註 196]
    수약(守約) : 지킨 것이 그 요점을 얻은 것을 말함.
  • [註 197]
    창려(昌黎) : 한유(韓愈).
  • [註 198]
    명도(明道) : 정호(程顥).
  • [註 199]
    고자(告子) : 고불해(告不害).
  • [註 200]
    상사(上舍) : 송(宋)나라 때 태학(太學)에 삼사(三舍)를 두었는데, 처음 태학에 입학하면 외사(外舍)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다시 내사(內舍)로 올라가고, 또 상사로 올라가는 것으로 생도(生徒)의 고선법(考選法)임.
  • [註 201]
    호안정(胡安定) : 호원(胡瑗).
  • [註 202]
    지보(地步) : 바탕으로 삼은 것.
  • [註 203]
    사칠변(四七辨) : 사단(四端) 칠정(七情)에 대한 논변(論辨).
  • [註 204]
    선정(先生) : 율곡.
  • [註 205]
    정자(程子) : 정호와 정이.
  • [註 206]
    진서산(眞西山) : 송(宋)나라 때의 진덕수(眞德秀)의 존칭.
  • [註 207]
    정황돈(程篁墩) : 명(明)나라 때의 정민정(程敏政)을 말함.
  • [註 208]
    필서(匹庶) : 서민(庶民).
  • [註 209]
    자막(子莫) : 노(魯)나라 사람으로 중도(中道)를 행하기는 행하는데, 일에 따라 대처하는 중도가 아닌 하나만을 고집하는 융통성 없는 중도이기 때문에 오히려 일을 그르쳤다고 함.

○幸摛文院, 召內閣諸臣, 講《近思錄》。 上具翼善冠、袞龍袍, 乘輿, 自仁政殿, 詣本院升座。 儀仗分東西立。 爐烟升樂作。 引儀引閣臣入侍。 提學金鍾秀兪彦鎬、直提學鄭民始沈念祖、直閣徐鼎修、待敎鄭東浚, 由左就庭東拜位。 原任提學李徽之黃景源李福源徐命膺、直提學徐浩修、直閣鄭志儉金憙金宇鎭、待敎徐龍輔, 由右就庭西拜位, 行四拜禮訖。 時任自東階陞。 原任自西階陞, 合班爲一行上殿, 就講位。 領籤進案冊, 承旨傳捧跪進。 檢書官授閣臣冊, 命聽講, 諸臣上殿。 領經筵事徐命善, 知經筵事鄭尙淳金熤、同知經筵事李命植鄭昌聖、侍講官朴天衡, 侍讀官李時秀李鼎運李謙彬柳孟養, 檢討官趙鼎鎭朴天行權以綱洪文泳。 上曰: "《近思錄》, 卽學問要旨, 而《太極圖說》, 爲開卷第一義。 先讀此章。" 念祖讀奏, 陳文義訖。 敎曰: "今日之會盛矣。 新移本院, 特臨此筵, 要與卿等, 一堂詢諮者, 豈直爲談書說經而止哉? 文義之外, 顧今日可言者多矣。 上自寡躬闕遺、時政得失, 以及乎生民之苦樂、前辟之治亂, 無事不言, 無言不到, 俾有所上下相益者, 卽今日臨院之意也。 若使登筵挾冊, 隨例應文, 則是不過一場閑說話, 何補於君德、治謨哉? 蓋講說, 卽因言而起疑, 因疑而釋疑, 終至於感發人善心者也。 是以朱子象山, 義理不同, 門路各異。 而白鹿之講, 門人聽講者, 往往有泣下者, 言之感人也如是矣。 今欲誦聖言而說聖道, 以至于一分開發, 則惟講說是已。 今日當與卿等, 盡日劇談, 夜以繼晷。 卿等盡言無諱, 予當虛襟而受之也。" 諸臣皆起拜受命。 敎曰: "此書書名, 卽《近思》也。 先儒以是書爲四子之階梯。 蓋學者爲學, 先從近裏處下工, 切問近思, 自近及遠故也。 旣名《近思》, 則篇首先言性理之微蘊, 恐非初學之所可曉, 而有非近思之意也。 大凡學者, 雖於造道深篤之後, 義理頭腦, 性命本原, 未嘗驟議而躐論焉。 以子貢明悟之識, 親炙聖門, 已在升堂之列, 而性與天道, 則猶不得聞焉。 以是究之, 此書之首載《太極》, 誠幾神章, 中和說者, 無幾近於說太高、語太邃之歸乎? 說者, 或以爲朱夫子《小學》, 而弁言元亨利貞、仁義禮智; 又編是書, 而首言無極太極、未發已發, 特欲使初學者, 知其名義, 有所嚮往而已。 此說近似, 而視孔夫子罕言性命之義, 不無疑晦之端。 平日有何講究之義耶?" 福源對曰: "門敎人, 不出於孝弟, 而至孟子始言性命。 至程子, 則論學論道之言。 無非微奧之旨, 非有異同也, 時義然也。 此書之先言道體, 呂東萊序文已及之, 而《中庸》, 先說天命之性, 亦此義也。" 敎曰: "大體然矣。 然則孔子敎人之次序、朱子訓人之階級, 各有所異。 其所以同異之義, 可以分析而言之歟?" 鍾秀對曰: "學者, 須先識大綱, 然後方有準的, 可以下手, 故朱子必以此圖, 揭之篇首, 此由於世級愈下, 說得愈詳矣。" 敎曰: "所陳好矣。 蓋孟子之世, 異端寢起, 正道漸晦, 孟子不得已而言性。 濂溪之時, 聖言旣湮, 邪說益肆, 濂溪不得已而言無極。 此所以孔子不言, 而孟子言之。 孟子不言, 而濂溪始言者矣。" 彦鎬對曰: "聖賢敎人, 詳略不同, 其勢固然, 而況學問之道, 先知後行。 苟不領會於性道之本原, 則將何以下手用工乎? 編書之法, 不得不然也。" 敎曰: "朱夫子之言, 脩身大法, 《小學》書備矣。 義理精微, 《近思錄》詳之。 先儒又以爲二書, 固望道之階梯, 而自夫人騖詞章, 此二書或罕寓目, 雖欲入道, 難矣。 顧今之世, 擧世之人, 無端厥趨向之心, 無淬礪濯磨之效, 莫不弁髦是書。 不徒不能字會、字義、句探、句旨, 以至規模之大、節目之詳, 初不硏究, 體用本末、大小精粗, 亦不講劘, 固已可歎。 而古之學者爲弊也, 厭卑近, 而務玄遠, 好凌躐, 而遁虛無, 不歸於詞章, 則歸於異端。 今之學者爲弊也, 竝與詞章異端, 而不曾致意而用力, 凡屬文字之事, 擔却一邊, 視如笆籬邊物焉。 惜乎! 此何故也? 世稱我東文明立國, 禮義成俗, 治敎郅隆, 儒賢輩出。 是以末學後生, 雖未力行於實地工夫, 而童習白紛, 出奴入主者, 猶在於性理之糟粕、聖賢之言語, 雖謂之家談, 戶說, 誠非虛語也。 至于後世, 而衣儒冠儒, 懸空說去, 修飾邊幅者, 亦可見遣風餘俗之尙有存焉。 奈之何近日以來, 此事亦廢? 古有七聖皆迷之歎, 而今則可謂擧世皆迷矣。 經筵乏資益之望, 黌舍絶絃誦之聲, 莫非敎化不明之致。 予方反躬自省之不暇, 而夷考其故, 則上下之間, 必有所以致之之由矣。 卿等, 皆經幄近臣也。 玆於敷示心腹, 欲聞昌言之日, 何所憚而不奏? 以嘉言善謨, 上以格予心之非; 下以矯今世之俗耶? 當內閣移設之初, 特開經筵, 選一代新進之輩, 始創講製, 卽予之苦心至意, 或冀有一分補益者也。 若使只(博)〔傳〕 虛名, 終無實效, 則創冗官之失, 予固不辭, 而是豈所期待於諸近臣者哉? 君臣之間, 貴在無隱, 卿等皆以端方之士, 旣登咫尺之筵, 若無一言而退, 則不但自愧乎心, 豈可傳示於後也? 今日所以振文風、回治道之要, 可得聞歟?" 命善對曰: "殿下臨御以來, 凡所以奬勸文士之方, 靡不用極, 而至于今文風之不振, 豈無所由? 蓋不待文王而興者, 皆是豪傑之士也。 衰世中豪傑之士, 豈易得哉? 不行勸懲之政, 而能使自趨於導齊之科, 自古未易。 臣謂在今矯弊之本, 全在於激揚二字。 苟能激濁揚淸, 使擧世之人, 咸知不文爲恥, 能文爲貴, 則人才可以蔚興, 治道可以成就。 此在殿下一轉移間矣。" 敎曰: "顧今世級已降, 治道漸下, 不待文王而興, 何可責之於今人耶? 然而勸懲之言, 大體好矣。 格非矯俗之道, 諸臣盡言之可乎?" 鍾秀對曰: "今日親臨講會, 誠盛事也。 聖上果受啓沃輔導之益, 而終有文風丕振之效, 則今日之會, 固非不幸, 而倘或不然, 則不過作一彌文而止矣。 本閣規度, 久未有定, 而今番聖意懃懇。 諸臣殫心, 終得成就。 臣於此, 竊以爲喜, 亦以爲憂。 聖上臨御以後, 治法政令, 皆不無始銳終弛之漸, 而閣事之成就如此, 其克有終始, 從此百事皆如此事, 則可無終弛之慮。 此臣之所喜也。 萬一不然, 則本末倒矣。 此臣之所憂也。" 敎曰: "然矣。 先儒有言曰: ‘井田必自一邑始。’ 蓋先之一邑, 推之天下之意也。 王者經邦, 學者進德, 必皆先從入頭處下手, 然後乃可以取次做去。 今予內閣之設置, 亦此意也。 振勵文風, 皷動一世之效, 將欲自一閣始者, 今已六年于玆矣。 近始略定規度, 稍立儀節, 庶或有循名責實之望。 予之所以眷眷不置者, 豈徒然哉? 粤在光廟朝, 始有內閣之名。 要倣之制。 中古以後, 廢而不修, 逮于先朝, 始置編次人, 畀以潤色絲綸之任。 但職無定號, 官無定規, 雖有內閣之意, 內閣之制, 尙未復焉。 今置此閣, 非予創立, 卽因國朝故事, 略可損益者也。 今幸儀文始備, 而若使諸臣, 不體予心, 徒侈虛銜, 則惟予右文之本意, 適足爲益其浮文而已。 此豈不大可憂也? 然而修擧之政, 只行於一閣, 而此外百度, 則實有不承權輿之歎。 委靡叢雜, 莫可收拾, 尙何望治化之成也? 顧今國事, 艱虞溢目, 朝象渙散, 而尙不得底定矣, 生民愁苦, 而尙不得拯濟矣。 士氣益頹, 將何以振作; 人才漸下, 將何以作成? 軍政日紊, 則矯弊沒策; 經費日匱, 則裕用無計。 以至種種病敗, 不勝其多, 則苟究其由, 誰執其咎? 今日之無實言, 卽今日之大病源也。 未知予無來諫之實而然耶。 卿等無納諫之誠而然耶? 是誠左右顧, 而莫省所以也。 噫! 皇朝科道之弊, 可勝言哉? 當時設官, 蓋所以廣開言路, 而畢竟分朋, 漸至於交構讒間。 用一人, 則輒登彈駁; 出一言, 則隨加抉摘。 以至塞外之將, 相繼就誅; 林下之士, 亦皆罹禍。 皇朝二百年元氣, 於是而不復振矣。 以今之風氣、習尙, 若使公車日積, 則恐或有似此之弊, 而言路, 國之血脈, 存亡係焉。 豈可先事而豫憂, 不思所以開言路之道, 自歸於因噎而廢食乎? 今此求助之敎, 亶出敷心之意, 而登筵諸臣, 終無一言之仰副, 實予平日之誠, 不能孚人。 固所自愧, 而亦不能不慨慨也。" 鍾秀對曰: "《書》云: ‘其心好之, 不啻若自其口出。’ 須是心之所好, 甚於口之所言, 然後方可孚感于下。 聖上, 雖勤求言之敎, 而臣下終無應之者。 其意, 以爲上心之樂聞昌言, 或與辭敎有異而然也。 此專在殿下益軫反躬之道, 以爲來言之地而已矣。" 民始對曰: "天下事, 先立規模, 然後可責實效。 近來世道益下, 文風益壞者, 職是規模不立之故, 而規模之不立, 又由於治不得要道也。" 敎曰: "然矣。 何以則果得要道耶?" 念祖對曰: "近俗鮮有《小學》之工, 故幼失蒙養, 長致扞格, 終至於放倒行檢, 紛汨名利。 今欲以推本之意, 盡儲才之方, 則古者《小學》之敎, 正爲急務也。 是以自古四學, 皆有敎官, 間又多置分敎官, 以敎都下之童蒙。 今則敎官之制, 雖難復古, 先飭養蒙之官, 俾盡訓迪之方, 又命四學敎授, 誠心勸課, 則庶有補於作成之道矣。" 敎曰: "言則好矣, 今置四敎官, 養國內群蒙, 欲責成效, 其亦難矣。 尹和靖伊川學半年後, 方得《大學》《西銘》看, 蓋欲先養他氣質, 則以學問之意也。 謝上蔡請學於明道, 明道敎以靜坐。 橫渠敎人以禮爲先。 大抵靜坐則可以居敬而存心矣; 學禮, 則可以檢身而飭行矣。 初學進修之道, 莫要於此。 旨哉! 兩先生敎人之訓也。 此與古聖王敎人《小學》之意, 其揆一也, 而靜坐二字, 尤爲今人對症之劑。 這靜字, 是主靜之靜也, 非釋氏虛靜之靜也。 靜之中, 有主宰者在, 《禮》所云: ‘儼若思無不敬者’是也。 先儒之言曰: ‘靜中有物’ 亦以是耳。 此固學者徹上徹下之工。 至若初學之纏繞俗習, 偸惰放肆者, 苟欲收其已放之心, 做得漸進之工, 則捨靜坐二字, 恐無下手處矣。 今日養蒙之道, 固是急務, 而此姑置之, 先自寡躬, 至于直提學以下, 必勉於靜坐之工, 而後可以爲《小學》之成功, 《大學》之門路矣。 況彼南行坐, 諸臣尤是妙年之新進。 無非可敎之良士, 盍益自勉於是乎? 今此登筵諸臣, 第一切實之工, 惟在靜坐二字。 一日二日, 眞積力久, 則自可入於繩尺科臼中矣。 予當自力, 諸臣亦以此, 各自勉焉。 卽予之竊有望於諸臣者也。" 念祖對曰: "臣等, 雖甚愚迷, 敢不銘佩。" 敎曰: "伊川每見人靜坐, 便歎其善學。 靜坐, 實爲初學之要道, 而亦不可泥看, 若靜坐而已, 則與參禪入定, 有何區別? 故延平之學, 造詣深篤, 而猶令人於靜中, 體認大本, 未發時氣象, 此乃龜山門下相傳旨訣。 朱夫子亦於初年, 頗信其說, 後來大以爲不然。 以子思只說喜怒哀樂未發, 謂之中, 未嘗敎人靜坐體認也。 靜坐體認之說, 起於佛氏六祖, 所謂不思善、不思惡, 認本來面目是也。 學者若不洞辨吾儒與異端差毫謬千之殊, 往往多流於他岐, 故伊川識破此弊, 以爲涵養於未發之前則可, 求中於未發之前則不可。 此二段語, 最爲的當, 千古不易之論也。 朱子又於晩歲, 謂知舊曰: ‘李先生說, 終覺有病。 學者, 只是敬以直內, 義以方外, 不可專向靜中求。’ 又云: ‘若特地 將靜坐, 做一件工夫, 便是禪。 只須着一敬字, 通貫動靜。’ 此言尤眞切明白。 向所謂敎人靜坐云云, 蓋欲其檢攝而不放也。 箕踞心猶慢, 況不以靜制動, 則此心豈在腔子中耶? 靜坐爲主敬之工, 主敬爲學聖之本。 靜而存養, 則靜時敬也。 動而省察, 則動時敬也。 無時無事不用工, 然後自有進益之妙。 俄以靜坐二字, 爲諸臣言之, 而或慮其未及諦聽, 又此云云。" 諸臣拜受命。 敎曰: "《近思》一篇, 掇取四君子之格言, 而編輯之, 搜英羅精, 門路煥然。 孔子之道, 繼之。 蓋孔子集群聖之成, 而朱夫子又集諸賢之成。 學者欲求孔夫子集成之跡, 則求諸兩程之言, 可以造其蘊奧, 欲求朱夫子集成之工, 則觀於是書, 又可以探其意義。 大槪是書, 求端用力之方、處已治人之要, 莫不備載。 與《大學》次序, 可作表裏。 看此曰求端者, 似乎《大學》之格致也。 此曰用力者, 似乎《大學》之誠正也。 此曰處己者, 似乎《大學》之修身也。 此曰治人者, 似乎《大學》之齊治平也。 今欲用工於二帝三王之學, 用力於二帝三王之治, 則捨是書奚以哉? 然世之人, 視此書如視陳談, 不曾致意者其弊安在?" 徽之對曰: "人不讀書, 士皆矇經, 以至先聖之格言, 視若笆籬邊物, 初無喫緊下工之意。 此所以世無眞儒久矣。"

敎曰: "爲學之全體、大用, 盡載於修己治人四字中, 而此外, 又生小節目者, 何也? 必有指意, 可得詳言歟?" 鍾秀對曰: "用力, 當兼知行矣。" 敎曰: "此篇論道體, 蓋道者, 日用當行之則也。 先儒註釋, 不啻明白, 而此曰道體, 道之爲言, 何謂也? 體之爲言, 又何謂也? 道者無形, 何以謂之體也? 旣曰有體, 則道是有形之物耶? 且此道字, 與率性之謂道之道, 同耶異耶? 先釋道字、體字之義, 仍釋《中庸》首章道字之義可也。" 福源對曰: "此道字, 與率性之道不同, 而與形而上之道, 略相似矣。" 命膺曰: "道一而已, 豈有同異之可分耶? 體字, 卽指道之全體而言也。" 敎曰: "道者, 無形可見, 無跡可尋, 卽一當然之則也。 體者, 在人爲百體一體, 在物爲本體定體。 是乃有形之謂也。 今以體字, 着在道字之下, 何也? 必有下字之本意, 可得聞歟?" 諸臣未卽仰對。 敎曰: "道體, 先儒釋之曰: ‘道之體統, 又以爲性之本原, 仍以爲學問之綱領。’ 故此書先言道體云云。 學者欲明此道之體, 以及乎道之用, 則惟其下工之方, 其目維何? 必有由近及遠, 由粗及精之工, 然後可以窺其道體之萬一。 序文所謂: ‘宗廟之美, 百官之富, 庶有以盡得之者。’ 或此之謂歟?" 對曰: "體字之義有三。 曰體段, 曰全體, 曰體用, 而若謂是體用之體, 則動靜者, 太極之體用也, 豈可只言體而不言用乎? 至於全體云者, 雖異於體用之體, 而若與大用二字對言, 則亦爲體用之體, 惟以體段之體, 看之似當矣。" 敎曰: "若謂之體段之體, 則體段之體字, 體統之體字, 其爲體字則同, 而段字統字, 各有字義。 體段、體統同異之說, 可得分言歟?" 對曰: "體統之體字, 與體段之體字所指之意, 似有間矣。"

敎曰: "太極二字, 始見於何書耶? 極字之意, 與皇極、屋極、北極、人極之義, 同歟, 異歟? 此曰無極而太極。 蓋無極, 只言其無形。 太極, 理也。 太字大而無復加之義也, 可謂造化之樞紐, 萬彙之根柢。 今欲釋是義, 則何以爲說爲可也?" 對曰: "太極, 則孔子已言之, 無極則周子以前, 雖有老子之說, 而但指氣一邊而言, 以理言之, 則自周子始矣。 朱子釋無極而太極之義曰: ‘只是說無形而有理。’ 以此觀之, 則以理之無形而言者, 爲無極, 以無形之理而言者, 爲大極, 而太極之外, 非復有一物, 而爲無極也。 至於極字之義, 則與北極、屋極之極, 亦不無有形無形之別矣。" 敎曰: "無極, 當解以無形云者, 似然矣。 而極卽理也。 形卽氣也。 無論無形有形, 若以形字, 解這極字, 則是極字, 反歸着於氣分上耶? 此以無形, 鮮無極者, 豈非起疑處乎?" 志儉對曰: "先儒黃幹釋此曰: ‘極字, 以有喩無, 而所喩在於言外。’ 其措辭之法, 猶曰: ‘無形而至形。’ 欲使人知其非有是極, 而謂之太極。 然則其屬於形, 屬於理者, 皆在言外, 而兩極字, 同是取喩之字, 不可以無極之極字, 直作形字看。 恐無歸於氣邊之嫌矣。" 鍾秀對曰: "釋無極而太極者, 或以 ‘無其極, 而太有極’ 釋之, 或以 ‘無底極, 乃是太底極’ 釋之。 無底極云者, 驟聞雖差異, 而其意蓋謂無形底極也。 亦自成說矣。" 曰: "此說恐謬。 如此則不但上下極字, 同爲無形。 其所謂無者, 將爲異端虛無之無乎。" 鍾秀曰: "無極之無字、太極之太字, 較重於兩極字矣。" 曰: "不然。 若無上極字, 則無字有何着落; 若無下極字, 則太字有甚意味? 觀其意義, 極字爲主矣。" 敎曰: "東伯言, 然矣。 上天之載, 無聲無臭, 解無極二字。 造化樞紐, 品彙根柢, 解太極二字。 此則雖不載此篇註解, 古人有明言之者, 此說或無害於本旨耶?" 對曰: "無聲、無臭, 解無極。 樞紐、根柢, 解太極。 則無極之爲無形, 太極之爲有理, 斯可見矣。" 鍾秀問於曰: "五行之生, 各一其性。 此性字本然耶? 氣質耶?" 曰: "本然之性也。" 鍾秀曰: "旣下各字, 則卽區別之意也。 似是氣質之性矣。" 曰: "本註云, 渾然太極, 無不各具, 豈可謂氣質之性乎?" 敎曰: "東伯言, 是矣。 就五行上言之, 雖是各具一性, 就天命上觀之, 卽是同受一理。 朱子曰: ‘天命流行, 墮在氣質中, 而各自爲性。 蓋天命, 卽本然之理也。 故曰各具一太極。’ 予意則以各具一太極五字, 可知其爲本然之性也。" 又敎曰: "俄以此言發端, 而未及究其說矣。 大抵文王不言太極, 而孔子言太極。 孔子不言無極, 而周子言無極。 若使文王, 演《易》孔子之時, 則文王當曰太極。 孔子《易》周子之時, 則孔子當曰無極耶? 二聖一賢, 易地則其將何以爲說耶?" 志儉對曰: "文王孔子之時, 必言太極; 孔子周子之時, 必言無極云爾, 則言不可若是其幾也。 大抵易地則皆然。 言不必同, 而發明此道, 則無不同矣。" 敎曰: "陳北溪之言曰: ‘而字, 只可輕接過了, 不可就此中間作兩截看。’ 此言蓋慮學者, 以無極、太極, 看作兩件物事也。 然周子著說, 加一而字於兩極字之間者, 似或有下字之本意, 可以詳言歟?" 對曰: "而字, 卽承接斡旋之語。 看一而字, 然後無極、太極, 方可爲一極也。" 敎曰: "周子闡一圖至精之理, 發千聖不傳之妙。 非周子不能爲此圖, 非不能會此說矣。 是以 史氏周子說曰: ‘自無極而爲太極。’ 朱子至發請改之議。 若無本文之明切、說之發揮, 幾乎累周子而誤後學矣。 大抵俗儒錯解處, 類多如是, 可不懼乎?" 僉曰: "然矣。" 敎曰: "嘗見朱子之說曰: ‘老子之言有無, 以有無爲二。 周子之言有無, 以有無爲一。 先正, 有引是說, 發揮此句者。 然有無爲一之說, 先儒或歸朱子初年之說, 先正之釋是句, 必引此言, 何也?" 對曰: "老子之以有無爲二, 此所以爲異端。 而若乃無極而太極云者, 卽無形而有理, 則無極、太極, 元無二物, 而可見有無之爲一矣。" 敎曰: "陸象山以爲: ‘《大傳》明言易有太極。’ 今乃言無, 何也? 象山之看無字, 其意何在而然也? 朱子之辭而闢之, 猶不洞快, 但言其不然而已, 豈或不屑其所見之不精, 不欲深卞其說而然耶?" 對曰: "陸氏之論, 全是杜撰, 不足多卞。 朱子之不極言, 而痛斥之者, 恐以此矣。" 敎曰: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云者, 陽動之極, 則陰始生, 陰靜之極, 則陽始復, 動之謂耶?" 對曰: "動靜, 爲陰陽之界分。 動極然後方可謂靜, 靜極然後方可謂動矣。" 敎曰: "然則, 先儒曰: ‘今日是夏, 明日是立秋。’ 此言十分地頭, 極動而靜, 極靜而動者也。 又曰: ‘才動便屬陽, 才靜便屬陰。’ 此言陽中有陰, 陰中有陽。 互相關屬者也。 大抵動靜相因, 陰陽相根。 春生而有秋殺之理, 晝明而有夜晦之理。 陰盛於十月, 而曰陽月; 陽盛於午正, 而屬陰辰。 以此推觀, 則陰陽之分, 不可區別界限。 謂之十分地頭, 始動始靜矣。 然則此曰動極、靜極云者, 果何謂也? 且動極、靜極之極字, 與太極之極字, 同是極也。 字義之同異, 亦可以詳言歟?" 念祖對曰: "今日是夏, 明日是立秋云者, 是就陰陽十分極界分地頭言者也。 又就其中分界而言, 則午時之屬陽, 未時之屬陰。 雖如今日夏、明日秋之大分界, 而午正以後, 則未初之陰, 已動於其中。 所謂陰陽互根, 動靜無端者也。" 敎曰: "此言, 猶不明切矣。 若如此言, 則午前是陽, 午後是陰。 與今日夏、明日立秋同歟?" 念祖對曰: "午前陽、午後陰, 則以動靜之互根言也。 今日夏、明日秋, 以陰陽之大分言也。" 敎曰: "旣曰動靜, 互爲其根, 此言理之一致。" 又曰: "分陰分陽, 此言氣之對待, 交相爲端, 循環無窮, 則繼言兩分字, 顯有區別之意, 其爲一爲二之分, 明言之。" 鍾秀對曰: "以流行言, 則陰陽只是一氣。 以對待言, 則輕淸爲天, 重濁爲地, 而兩儀判焉。 眞所謂一而二, 二而一也。 敎曰: "然則, 一動一靜, 卽氣也。 所以動、所以靜, 卽理耶?" 對曰: "然矣。" 敎曰: "兩儀之稱, 先儒曰: ‘儀者匹也。 如俗所謂一雙一對’ 云, 而儀字之釋以匹字, 果見於何書耶?" 命膺對曰: "本註亦曰: ‘儀者匹也。’" 敎曰: "陽變陰合, 陽謂之變, 陰謂之合。 陰之不言變, 陽之不言合, 何也? 今若以陰變陽合看之, 則果不悖於本旨歟?" 志儉對曰: "陽變者, 是氣發動之謂也。 陰合者, 是氣凝聚之謂也。 其意與繼之者, 善成之者, 性頗相類矣。 若曰陰變, 則陰非發動之氣。 若曰陽合, 則陽非疑聚之氣。 此所以陽必言變, 陰必言合也。" 敎曰: "生水火木金土, 陽來於陰, 陰合於陽, 生此五行, 如人物之生息然乎? 抑兩儀各分, 陽自陽、陰自陰, 亦可以生五行乎? 若曰: ‘合然後生’ 云爾, 則所以合之之故, 所當合之之則, 莫不本於理。 此亦可以詳言歟?" 志儉對曰: "有物必有則。 是氣合變而爲五行, 則自有五行之則, 而合變之, 則在於是矣。" 鍾秀志儉曰: "繼善成性, 理也, 陰陽變合, 氣也, 不可謂之同也。" 志儉曰: "一陰、一陽之謂道, 而繼之者, 陽之發也。 成之者, 陰之凝也。 初豈離氣而言? 而其所以變、所以合者, 卽理也。" 敎曰: "諸臣所對, 皆欠明的。 似未諦聽予言而然矣。 蓋一陰、一陽, 動靜無端, 以其流行而言也; 分陰、分陽, 兩儀立焉, 以其對待而言也。 五行之生也, 流行者, 變合而生之乎? 對待者, 往來而生之乎? 陽之中, 亦自有陰, 陰之中, 亦自有陽。 則流行之中, 亦有對待, 而不相混者。 對待之中, 亦有流行, 而不相離者。 陰陽動靜之間, 一變一合, 自在其中, 則不須曰對待者, 來往相交, 而始生五行乎? 若曰: ‘對待者相交, 而五行始生。’ 則其所以然、所當然者, 可以詳言乎? 此予發問之意也。 大抵獨陰、獨陽, 必無生物之理。 旣曰陽, 則陰便爲其耦; 旣曰陰, 則陽便爲其對。 對待相交之說, 固似然矣, 而其所以相交而合, 合而後生者, 蓋以盈天地者。 只是生物之心, 而非陰陽之相合, 則無以生物故也。 此其爲所以合之理耶? 陰陽相合, 而萬物始生者, 當然之理也。 此豈非所當合之則耶? 予見如是, 而諸臣似未及諦聽矣。" 僉曰: "聖敎如此, 臣等始怳然覺得矣。" 敎曰: "五行, 一陰陽也; 陰陽, 一太極也。 大抵氣以成形, 理亦賦焉, 朱子載之《中庸》章句。 以此說較看此句, 同耶異耶? 若曰同爾, 則與章句之意, 無差殊處乎?" 諸臣未卽仰對。 敎曰: "氣以成形, 理亦賦焉。 是謂氣成形之時, 理乃賦焉者也。 然則是將曰氣先而理後耶? 理實氣之主也。 成形之前, 已有所以成形之理。 然則其將曰理先而氣後耶? 朱子曰: ‘有是理而有是氣。’ 又曰: ‘氣是依傍這理行此。’ 云。 理亦賦焉, 究此亦字之義, 則理氣先後, 可以明言歟! 南行諸臣, 亦陳所見可也。" 鼎修對曰: "理氣, 元不相離, 則初無先後之可言, 而第理無形、氣有跡, 就氣分上而後, 可驗本然之理也。" 敎曰: "然矣。 此曰: ‘五行一陰陽。’ 《語類》以爲: ‘太極、五行, 只作元亨利貞看。’ 又以爲: ‘利貞是陰, 元亨是陽。’ 利貞之所以爲陰, 元亨之所以爲陽, 何意? 而就五行上, 貼說元亨利貞, 則水火木金土, 將何以分屬耶? 或者曰: ‘木屬於元, 火屬於亨, 利屬於金, 而貞屬於水, 則土無所寄屬, 而此則如信之寄旺於四德。’ 此說近是, 亦有難解之意。 言信而爲五常, 言土而爲五行, 獨於元亨利貞, 只說四箇字, 何也?" 志儉對曰: "天地之道誠而已。 元亨利貞, 無非這箇誠也。 四時之序, 土無所主, 論性之說, 信或不擧, 而亦不可謂欠缺, 則此雖不言誠, 而誠自在於其中矣。" 敎曰: "此曰: ‘太極, 本無極。’ 上文 ‘無極而太極’ 之而字, 必須輕輕着過, 則不至甚疑, 而此句中, 本字與而字差殊。 旣言本, 則似有太極, 本乎無極之嫌。 然則能無看作二極之弊耶? 本字之義, 第可詳言之也。" 念祖對曰: "上旣先言無極, 以明太極之義。 故下此而字, 俾無看作兩極之弊, 下則先言太極, 而推言其元來無極之意, 故下此本字, 以明本自一極之意。 下字雖異, 而用處各當矣。" 敎曰: ‘此曰無極之眞。’ 不曰太極之眞, 而曰無極者, 何也? 又曰二五之精, 不曰兩儀, 又不曰五行, 而兼言二五者, 何也? 此兩句, 旣爲互對, 則無極、太極之不幷說兩儀, 五行之獨兼擧, 是何義也? 豈其或涉於二物而然歟? 然則兩儀、五行, 獨非一氣乎? 此義可詳陳之。" 命應對曰: "眞字, 便是太極之義, 故不復言太極也。" 鍾秀曰: "雖曰: "太極之眞, 未爲不可也。" 念祖曰: "太極, 旣是理, 則豈可曰太極之眞也?" 鍾秀曰: "眞字, 只當屬於無極, 而不可屬於太極, 則是無極與太極, 分明作兩物矣。" 敎曰: "一提學之言, 實是語病矣。 朱子曰: ‘無極之眞, 已該得太極在其中。’ 眞字, 便是太極。 然則無極之眞, 卽無極而太極之意也。 上文旣曰: ‘無極而太極’云, 故此曰無極之眞。 今若曰: ‘太極之眞’ 則此何異於太極之太極也? 當如卿言, 是猶曰: ‘天地之理, 天地之道也。’ 不特意疊而語複, 果成甚說話乎?" 鍾秀對曰: "太極之? 胬 不得下眞字, 則無極、太極, 當分爲兩極看也。" 曰: "眞者, 無妄之謂也。 恐不可看作理字矣。" 鍾秀曰: "此言, 誠然矣。" 敎曰: "東伯言, 亦失矣。 只將此眞字, 看作太極宜矣。 南行諸臣, 亦陳意見可也。" 志儉對曰: "無極之眞, 猶言無形之理。 若曰太極之眞, 則誠有語疊之病矣。" 曰: "如此則無極, 獨非理乎?" 志儉曰: "單言無極二字, 不可謂之理矣。" 曰: "眞字, 直作理字看乎?" 志儉曰: "理也。" 曰: "眞字, 不當直以理字看之。 蓋理之無妄, 卽所謂眞也。 今若以眞爲理, 則亦當以二五之精字, 直作氣字看耶? 蓋太極, 本無極, 則雖謂之太極之眞, 亦何妨也? 且以無極, 看作無形, 而不可遽謂之理也云, 則未知無形者, 不爲理, 而何者爲理也? 無形則有理, 有理則無形, 何可以無形者? 只謂之無形, 而不可謂之理乎?" 志儉曰: "二五, 卽陰陽五行也。 二五之精云者, 若曰陰陽五行之氣, 惡乎不可無極二字? 所以明太極之無形, 而太極卽理也。 理固無形, 則只言理, 而可包得無形矣, 只言無形, 則何以包得理乎? 若以無極爲理, 則無極而太極, 將如何解耶?"

敎曰: "若使太極之眞, 不爲語病, 則自濂洛君子, 至于我東, 而中間作者, 不爲不多矣。 何不以太極之眞四字, 發未發而示後學乎? 眞字, 卽理也。 太極, 亦理也。 今非可曰太極之理耶? 鍾秀對曰: "眞字, 卽以此理之眞實而言也。 乃是狀德底字也, 非體貼理字說者也。 假令是體貼理字說。 或曰無極之理, 或曰太極之理, 猶曰無極底理, 太極底理, 俱無不可矣。" 龍輔曰: "若以無極之眞, 便爲太極之眞, 無所不可, 則又於太極, 動而生陽, 一句上, 不曰太極, 而曰無極動而生陽, 亦無不可乎?" 鍾秀曰: "上文旣首揭無極而太極, 則其下文勢, 不得不曰太極動而生陽。 其實則設令以無字, 代太字, 亦無不可也。" 敎曰: "是何謂也? 豈可曰無極動而生陽乎?" 又敎曰: "妙合而凝, 妙字之義, 可以明釋歟? 合有凝意, 凝有合意, 則先說合, 繼說凝。 所以合、所以凝之義, 實是此篇第一義, 亦可一一指陳歟? 此曰合云者, 與上文陰合之合字, 有異同之別乎? 且合云者, 無極與二五之相合耶, 然則理氣交合之際, 亦可言先後之分耶?" 僉曰: "臣等未能理會, 無可達者矣。" 敎曰: "乾道成男, 坤道成女。 此則承上文無極之眞以下十二字, 而看之可也。 下句言: ‘二氣交感, 化生萬物。’ 萬物之生, 却舍理字, 單說氣字, 何也?" 志儉對曰: "二氣交感, 化生萬物, 固以氣言, 而其所以交感化生者, 卽理也。 似無單說氣邊之嫌矣。" 敎曰: "惟人也, 得其秀而最靈。 形旣生矣, 神發知矣。 得其秀而最靈云者, 具此五常, 與物自異。 無偏正之別、靈昧之分, 誠有不可同日而語者。 然人不如鳥, 聖人發歎。 人或不及虎狼之仁、蜂蟻之義、豺獺之禮、鴻雁之信焉, 蓋由於氣拘而性鑿而然。 吾人之氣, 受天地至大至剛之正氣, 則藉令有時而昏, 何遽不若禽獸之偏得歟? 願聞其說。" 念祖對曰: "人雖最靈, 而以暴棄者言, 則所感者多因物有遷, 不能全其固有之性。 物雖偏塞, 而其所通之處, 則旣專且精, 不失於外誘, 不遷於因物, 故反或有勝焉者矣。" 敎曰: "虛靈知覺, 氣之妙也。 惟聖人定之以中正、仁義。 是以義理爲知覺之主。 學者不明於義理, 則或不能全其虛靈之體, 所以必要學問、思辨、躬行、實踐、涵養、省察、擴充、克治。 凡此工夫, 無非踏着實地, 不使此心, 沒把捉, 而自異學別論起, 曰明心見性, 曰神通妙用, 曰淨智妙圓, 曰光明寂照, 總不離虛靈, 而陸象山之收拾精神、楊慈湖之鑑中萬象、陳白沙之一點虛靈萬象存、王陽明之致良知, 此皆以知覺言。 心欲守此虛靈, 以任其所爲, 流害至今不已。 蓋以義理應萬事, 則動不踰矩, 發皆中節, 捨義理、尙虛靈, 則爲空寂爲虛無。 儒釋之所以分, 實在於此。 學問之士, 可不深察, 而明辨之歟?" 僉曰: "聖敎至此, 臣等蔑學, 無容仰達矣。" 敎曰: "聖人, 定之以中正、仁義。 定字之義, 何也? 下有定性, 《書》與定性之定字, 同歟異歟?" 志儉對曰: "二定字, 固無同異, 而聖賢用工, 自有輕重之差矣。" 敎曰: "聖人立人極焉。 此義與《大學》序中‘繼天立極’之極字, 可以參互看耶? 抑有淺深、精粗之別耶?" 諸臣未卽仰對。 敎曰: "此篇, 不言地道, 而今始言地之道曰剛柔者, 何歟? 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 立人之道曰仁與義。 陽當居先, 而先說陰。 剛當居先, 而先說柔。 但於人順言仁義, 其倒言互言之分, 或有意義乎?" 鍾秀對曰: "此等處, 雖說得通, 終患有牽强穿鑿之病矣。" 敎曰: "昔袁樞, 學術甚精, 朱子亦嘗許可, 而乃以仁强屬陰, 與柔捏合, 上句陰陽剛柔之文勢, 力爭不已, 朱子斥之曰: ‘不知仁之定體。’ 朱子此訓, 萬世不易之論也。 此等處, 不必强解而牽會, 只當疑傳疑信傳信, 未有不可也。" 僉曰: "然矣。" 敎曰: "陰陽、柔剛, 先儒或歸之太極之成象, 或歸之太極之成質, 或歸之太極之成德。 或謂之一太極, 若分屬三段, 則象屬於何? 質屬於何? 德屬於何歟?" 僉曰: "此則未及理會, 不知所對矣。" 敎曰: "註, 陰陽、柔剛、仁義, 爲太極之體, 死生爲太極之用。 先正非之曰: ‘各於其中, 有太極之體用。’ 先正之言似得當矣。 未知卿等之見如何。" 僉曰: "先正之論一出, 而註之失益著。 臣等有何別意見也?" 敎曰: "君子修之, 小人悖之。 所以修、所以悖者, 道歟, 理歟? 若曰道云爾, 則修之之方何如? 悖之之由可言歟? 若曰理云爾, 則經無修理之言, 必欲修之, 其所着手之工, 其目維何?" 對曰: "道者, 理之總名; 理者, 道之條目。 道與理, 不可分而言之矣。" 敎曰: "大哉! 易也一句語, 此乃一篇關鎖之緊語, 而只說易字, 不言太極。 易是太極, 太極是易而然耶? 先儒疑之, 其詳可以言歟?" 對曰: "言太極而易在其中, 言易而太極在其中。 首言太極, 終之以易者, 其旨可見矣。" 敎曰: "諸臣互爲發問可也。" 鼎修曰: "修者, 進修之謂也, 君子成德之稱也。 旣至成德之後, 亦有進修之工耶?" 彦鎬曰: "以孔子自言爲學之序觀之, 則可見其未嘗自聖罔忽憂勤之念也。 然則修吉之君子, 不必以聖人以下人看之也。" 敎曰: "君子, 把作聖人看, 亦或無妨矣。 夫子自志于學, 至不踰矩, 條路甚明, 階級漸高, 燦然有可觀者。 聖人修己進德之勤, 有非學者所及焉。 聖如夫子, 而其修道之工, 若是其孜孜, 則雖聖人, 豈不用進修之方耶? 曰不感, 曰知天命, 曰耳順云者, 蓋人所不知, 而獨覺其進者也。 故惟聖人, 乃能自盡其修道之工也。" 僉曰: "誠然矣。" 敎曰: "此章, 則講將訖矣。 諸臣姑退食。 予將竟夕而止。" 諸臣遂退出。 少頃, 陞座, 命諸臣復入。

敎曰: "《誠幾神》章, 該性情, 貫動靜, 推以至於聖神之極工, 使一《太極圖》註解也。 繼講此章可也。" 志儉讀奏, 命各陳文義訖。 敎曰: "此章, 與《太極圖》相表裏《太極圖》, 義理極微, 形象甚妙, 有非末學、後生, 所可默識心通者, 故繼之以此章, 承上天二五之說, 闡吾人四七之幾, 使後之學者, 由顯而及微, 自近而推遠, 其繼往惠後之功, 於是乎至矣。 旣講圖說, 則當以此章, 推明圖說之義矣。 誠無爲三字, 此濂溪指未發之體, 欲使人知本然之至善也。 蓋誠者, 實也。 無爲者, 寂然不動之謂也。 予則曰此乃太極也。 上章《太極圖說》骨子, 該載此句矣。 《大學》言誠意之工; 《中庸》言誠身之道; 《通書》言誠字之義, 同一意致。 周子, 天資甚高, 造詣深遠, 惟予之管見, 每以爲周子到得聖人地位, 已八九分, 非後人之所能測度也。 以此章文義言之, 旣言誠, 又說幾。 大抵誠者, 眞實無妄之謂也, 故誠意之工, 乃《大學》一書之大目, 而誠身之道, 亦《中庸》一部之要方。 然其緊一緊之功, 在於愼獨二字, 何以則爲愼獨之工耶?" 鍾秀對曰: "敬爲愼獨之要矣。" 敎曰: "敬字, 固好矣, 然而便成陳談, 後人看不新奇, 不知其下工之道矣。" 志儉對曰: "常常省察, 隨事存心, 無一息之放過, 則可以致敬而居敬矣。" 敎曰: "幾之一字, 有無限滋味。 蓋幾有善惡焉。 善者, 天理也, 惡者, 私欲也。 學者用工, 無過於遏欲存理, 而與其克治於事爲已著之後, 莫若審察於幾微欲萌之初也。 譬如人之行路於其分岐之處, 擧足不差, 則自此而行, 不失其正路, 否則差雖毫釐, 謬於千里。 人能省察於是, 而發端不差, 則所謂《大學》之三綱領、八條目, 《中庸》之三達德、五達道, 皆將爲己有矣。 所以審察、操存之工, 惟在於愼獨二字。 蓋愼獨二字, 無他別件用力之事也。 幽暗之中, 微細之事, 跡則未形, 而幾則已萌, 人所不知, 而己所獨知。 若能猛省而刻勵, 使善端之起, 無或潛銷暗鑠; 惡念之發, 無或潛滋暗長, 常存敬畏, 不離乎道, 此實爲審微之工。 予嘗觀朱子之釋《大學》愼獨曰審其幾。 釋《中庸》愼獨曰幾則已動。 學者於此着工, 則先儒所謂一幾字, 是喫緊爲人處也者, 此之謂也。 卿等之見, 以爲如何?" 諸臣未及仰對。 敎曰: "敬畏之說, 誠眞切之訓也。 存之於靜時, 察之於發處, 通動靜、兼終始者, 惟畏字近之。 畏者一心憧憧, 不敢放過之謂也。 善惡之幾, 分於至微, 而審察之工, 本乎是畏。 蓋自靜而至乎幾, 自幾而發乎外。 一於外, 而無或失焉, 以存本然之心, 則集義養氣之工, 亶在於是, 而可達其剛大之用矣。 故朱子曰: ‘心正則氣順, 氣順則天地之氣亦順矣。’ 千萬人吾往之說, 可見其浩然之全體, 而孟施舍北宮黝之輩, 則彼豈有養氣之工、配道之義也? 孟子只取其不挫無懼之意而言之矣。 然至若裁酌這裏, 操存此心, 當孝而孝, 當忠而忠, 充然有得, 確乎不失, 善養剛大之氣, 能全光明之藏者。 顧其本, 則惟畏字能之。 曾子守約之勇, 實由於平日臨履之工, 畏字爲養氣之本, 可見於此。 畏之時義, 大矣哉。" 徽之對曰: "畏字, 有戒愼、恐懼、底意, 最近於敬矣。" 敎曰: "幾之一字, 可謂千聖相傳之統。 人心惟危, 道心惟微, 精一而執中, 卽之心法也。 必須以精察之工, 辨之於危微之幾, 使危者安, 微者著焉。 周公孔子之所以繼往開來之功, 亦皆本之於此言。 自是以後, 聖遠而言湮矣。 周濂溪, 始論此一幾字。 朱子以爲: ‘周子, 極力說箇幾字, 儘有警發人處。 近則公私邪正, 遠則興廢存亡。 但於此處看破, 便斡轉了。’ 以此觀之, 益見濂溪直接周公孔子之統矣。 自濂溪後, 諸賢相傳之統, 亦不外這幾字。 若其用工之要, 則周子說思字, 張子說豫字, 朱子又加以審字。 以此三字, 推究用力於周子所云善惡之幾, 則此無異乎人心、道心之用, 精一工夫也。 胡子曰: ‘折句萌, 則百尋之木, 不能成矣; 忽蟻穴, 則千丈之隄, 不能固矣。’ 司馬公曰: ‘水之微也, 抔土可塞。 及其盛也, 漂木石、沒丘陵。’ 此二說, 皆言審幾之工, 嘗所滋味之者也。 可參看此章之義耶?’ 鍾秀對曰: "誠然矣。 不獨一心之幾也, 大凡事爲之土。 忽其微, 則漸至於大, 莫可捄矣。" 敎曰: "孟子言四端, 而朱子說以始字, 訓端字尤切, 如發端開端履端之意云云。 然則端字與幾字之義同歟? 異歟?" 諸臣未卽仰對。 敎曰: "周子 《通書》又曰: ‘動而未形, 有無之間幾也。’ 以此觀之, 幾者在於有無、未形之間。 而此章則直曰幾善惡者, 何也? 以《通書》中他說及此章較看, 則果無參差之義耶?" 對曰: "旣曰幾善惡, 則卽是善惡, 初萌於心, 而未著於事爲上時節也。 惟幾字, 可以形容其有無之間也。" 敎曰: "幾之一字, 爲難說。 而經書中言幾字最多者, 莫過於《周易》《易》言: ‘知幾其神。’ 又言: ‘見幾而作。’ 又曰: ‘聖人硏幾’ 又曰: ‘成務之幾’。 此幾字, 與幾善惡之幾字, 或有深淺精粗之分耶? 《書》有 ‘惟幾惟康, 惟時惟幾’ 之文。 又有一日二日萬幾之語。 又有爾無以釗貢于非幾’ 之語。 《詩》詠庶幾、如幾。 與此幾字, 果皆一義歟?’ 念祖對曰: "庶幾之幾、近於佇待厎意; 如幾之幾, 近於期待厎意。 與此似不同矣。" 敎曰: "此曰德愛, 又曰仁愛者, 仁中之一事, 故愛莫大於愛親, 而孝亦爲仁中之一事。 況單說愛者乎? 然則昌黎曰: ‘博愛之謂仁。’ 而先儒斥之曰: ‘不知仁者。’ 何也?" 志儉對曰: "愛情也, 仁性也, 而韓子直曰: ‘博愛之謂仁’ 是以情爲性也, 所以爲失, 而此云: ‘愛曰仁者’, 其意若曰發而爲愛情者, 卽性之仁也。 正如孟子以惻隱之端, 言仁也。 與說似同而實異矣。" 敎曰: "然矣。 惟愛字, 最當於仁體, 而程子曰: ‘愛自是情, 仁自是性。’ 然則豈可專以愛字, 爲仁乎? 惻隱者, 愛也。 孟子則謂以仁之端也。 旣曰端, 則不可便謂之仁矣。 卿等之見, 以爲如何?" 鍾秀對曰: "直以愛爲仁, 則固不可, 而亦可卽愛而見仁矣。" 敎曰: "性也、復也、發微也, 主性而言耶? 安也、執也、充周也, 主情而言耶?" 志儉對曰: "然也。" 曰: "性焉安焉, 應上文誠無爲; 復焉執焉, 應上文幾善惡; 發微充周, 應上文仁義禮智之德。 不可就每節分性情也。" 志儉曰: "此章, 雖分言誠、幾、德, 而其實性情而已。 性焉者, 性其性也, 復焉者, 復其性也, 發微者, 其由體而發者, 微妙而不可見也, 豈非主性而言乎? 曰安、曰執, 則安之執之者, 固情也、而充周不可窮者, 亦屬於用邊, 豈非主情而言乎? 然不可直曰性曰情, 故必曰主乎性情而言也。" 敎曰: "果如註, 則聖人全於養性, 而無察氣之工, 賢人偏於察氣, 而無養性之工耶? 雖聖人豈無善惡之幾耶?" 命膺對曰: "此一段釋疑, 亦大加非斥矣。" 敎曰; 曰聖、曰賢、曰神, 神云者, 聖之外, 豈別有箇地位耶? 是就性分上說, 則雖非聖外, 別有一箇神, 而若其惟聖惟神之際, 非他人所測度處矣。" 僉曰: "然矣。"

敎曰: "此章講已訖矣。 《生之謂性章》, 卽明道合理氣論性之說, 發前聖所未發者也。 繼講此章好矣。" 使讀奏, 命各陳文義訖。 敎曰: "《生之謂性》一章, 孟子道性善之後, 一以純善論性, 而未嘗言及於氣質之性矣。 至此章, 而程子始發之, 非程子, 則孰敢說到於氣質上乎? 可見明道幾至於聖人地位, 而直接濂溪之統矣。" 僉曰: "誠然矣。" 敎曰: "生之謂性云者, 兼理氣而言也。 與孟子性善之旨, 可爲表裏看。 非如告子生之謂性之謂也, 蓋性不可以一槪言。 曰天命之謂性, 曰性善, 卽指本然而言也。 此云生之謂性, 只訓所稟受也。 此則已有正論矣。 大抵氣稟之說, 起於, 而朱子稱之曰: ‘有功聖門, 有補後學。’ 孟子之道性善, 程子之生之謂性, 驟看則似異, 而實則不異。 若無程子此言, 無以辨告子之言矣。 且孟子急於闢異端, 但說性善, 後學不復知有氣質之性矣。 自有程子此說, 始乃曉然知本然之善。 又能知才說性, 則已帶氣之義焉。 此可謂闡發孟夫子所未道之言, 可謂大有功於斯文, 功不在下者, 程子之謂也。" 僉曰: "聖敎, 果得當矣。" 敎曰: "此曰: ‘不是性中, 元有此兩物, 相對而生也。’ 此性字, 似指本然之謂也, 未知如何?" 僉曰: "果是指本然而言也。" 敎曰: "若然則此曰: ‘善固性也, 惡亦不可不謂之性也’ 上性字、下性字, 同是性字, 而一曰善, 一曰惡。 此卽論性不論氣, 不備之意也。 朱子釋此句曰: ‘他源頭處, 都是善。 因氣偏這性, 便偏了, 性本善。 而今乃惡, 此性爲惡所汨, 如水爲泥沙所混, 不成不喚做水。’ 可謂發前聖所未發之言也。" 對曰: "本然之性, 單指理而言也; 氣質之性, 兼指氣而言也。 此所以, 旣言性善, 又言性惡者也。" 敎曰: "此曰: ‘理有善惡。’ 理本純善, 則何以謂理有善惡也?" 命應對曰: "此理字, 釋疑亦以爲理勢之理, 而非性理之理矣。" 敎曰: "是則然矣。 孟子曰: ‘非才之罪也。’ 才卽情也。 情旣非罪, 何況性乎? 然則, 性豈有善惡耶? 食色之欲, 同得, 而但中節、不中節之間, 善惡乃分焉。 以發之不中節, 而謂以性惡者, 無乃不可乎?" 鍾秀對曰: "纔發用時, 便已涉於氣質, 故流而爲惡, 而寬其本, 則實從性中出來, 故謂之惡亦性也。" 敎曰: "然矣。" 徽之對曰: "氣質之性, 雖有惡, 而以其有本然之善, 故曰復。 復者, 復其初之謂也。" 敎曰: "雖氣質之性, 初豈嘗有惡也? 大抵人受淸粹之氣爲質, 故雖於濁駁之中, 亦自有一段淸通底氣焉, 非如禽獸之全塞者矣。 特以爲氣之所拘, 或不免流而爲惡, 比之本然之性, 純善無雜者, 不可混而無別, 而亦豈可以惡之一字, 下於這性之中, 謂之以氣質之性, 本自有惡耶?" 徽之對曰: "聖敎誠然矣。" 敎曰: "凡人說性, 只是說繼之者善也, 猶水流而就下也。 註以上下句, 通同看過, 至謂繼之云者, 猶水流而就下, 不曾別段看。 此等處, 不可偏信註說也。" 對曰: "繼善在成形之前, 恐不當遽以繼之者爲性, 而特言此以明性善之義也。" 敎曰: "繼之者, 當屬發處耶? 當屬未發耶? 抑兼已發未發耶? 水之就下, 喩本然之善耶?" 志儉對曰: "繼善, 指成性以前天命之純善, 而朱子訓釋, 或有以此作性之發處, 解者, 蓋初年未定之論也。 水之就下, 喩本然之善, 而下文不可以濁者, 不爲水云者, 卽所以應上文, 惡亦不可不謂之性也。 註恐是。" 敎曰: "氣質眞箇濁駁, 則終無可淸之理乎? 聖人所謂下愚不移者, 此果眞箇濁駁, 而不可淸者耶?" 彦鎬對曰: "氣質, 雖有淸濁, 而非如形質之局定不移。 苟能用力克治, 有濁變爲淸, 昏變爲明之理矣。" 東浚問曰: "此曰: ‘有幼而惡’幼者, 赤子之初生, 知覺未生之時。 則這惡與生俱生, 具於天賦之質矣。 是豈非性中之惡耶?" 曰: "赤子則只是良知, 而孩提以後, 惡始生矣。" 敎曰: "此乃氣質之罪也, 非性之罪也。 赤子呱呱, 彼固何知? 只是觀其狀貌, 或聽其聲音, 預知其將爲惡而已。 赤子之心, 初豈有惡也?" 鍾秀對曰: "自在胎中, 已有善惡之分矣。 臣意則如此矣。" 敎曰: "氣質之性, 卽墮地以後事也。 未降生之前, 豈有善惡之可言歟? 今若謂惡自胎中生云爾, 則赤子心, 當著於何邊耶? 所謂赤子之心, 所同得之心也。 及其知覺稍生而後, 始乃分焉。 若如卿言, 則胎中之兒, 已有善惡之殊稟, 赤子良心, 於何處而可見得耶? 實未知其可也。" 鍾秀對曰: "腹中已分淸濁。 濁者, 惡之根也。" 敎曰: "此又不然矣。 今夫癰腫之木, 頑陀之石, 受氣之濁駁, 無過於此, 而猶不可謂之惡者。 無他, 以其無知覺也。 赤子之初生, 其心之無知無覺, 與木石等耳。 大抵曰善曰惡, 生於知覺, 則墮地之初, 形殼雖具, 知覺未生, 惡之心, 着在何處, 惡之跡, 見於何處? 此章, 自幼之幼字, 亦非知覺未生之時, 當其知覺之未生, 論其氣之淸濁可也。 論其心之善惡, 則不可。 若以其氣之濁, 而直謂之心惡, 則亦將曰木心惡、石心惡耶? 始生之時, 尙不可論其惡也, 況其在腹之時耶? 卿言, 大是語病也。" 志儉對曰: "聖敎, 以赤子心, 發明性善之義。 此卽孟子之意也。 臣實欽歎, 而但此章, 兼氣質言性, 則鍾秀所謂濁者, 惡之根云者, 恐無不可矣。" 敎曰: "此曰: ‘此理, 天命也。 順而循之, 則道也。 循此而修之, 各得其分, 則敎也。 自天命以至於敎, 我無加損焉。 此有天下而不與焉者也。 此四十七字, 可謂聖門之符契, 進德之要方。 非程子則孰能說此? 後學, 或以率性之率字, 看作工夫。 程子此說, 嘉惠大矣。" 僉曰: "然矣。" 敎曰: "此章之微辭、奧旨, 固難一日講究, 而至於章句間一二可疑者, 今則說難無餘矣。 顔子好學論一章, 卽伊川志學之初, 論學之書也。 伊川大文字, 未爲不多, 而其原初立志, 希聖大頭腦, 莫若此論。 繼講好矣。 宇鎭讀奏。 命各陳文義訖。 敎曰: "伊川, 年十八, 遊上舍。 胡安定顔子所好何學, 出論題。 先生述此論對之。 觀於此文, 其地步之遠大, 可以知之。 況先生爲學, 多得力於周濂溪, 故此文無一字不本於《太極圖說》矣。" 僉曰: "誠然矣" 敎曰: "此曰: ‘《詩》《書》、六藝。’ 六藝之中, 有樂、有書。 《詩》《書》之書字、六藝中書字, 固有異同之別, 而但詩者, 樂也。 古人詩歌, 上自郊廟雅頌, 下至閭巷謳謠, 莫不被之管絃, 則《詩》之學, 獨非樂耶? 然則六藝之外, 更說《詩書》者, 得無意疊之嫌乎? 或者以爲: ‘《詩》《詩經》也。 六藝中樂, 但指聲音、節奏而言也。’ 云, 而此, 又有不然者。 被之管絃, 則樂可待詩而成矣。 豈可以後世, 傳其文, 不傳其樂, 比而同之耶?" 對曰: "《詩》與樂, 固不可分而爲二, 而三百篇未生之前, 已有五音、六律之制, 亦不可同而一之矣。" 敎曰: "此篇, 卽胡安定伊川顔子所好何學也。 因此而有起疑者。 周濂溪《簞瓢陋巷章》, 令程子, 自尋顔子所樂何事, 與此義卽一般也。 好學之對, 則程子以好聖人之學爲對, 而至於所樂何事, 未知樂在何處耶?" 徽之對曰: "樂道之言, 程子雖斥之, 而大體則似是樂道之樂也。" 敎曰: "如以顔子所樂, 爲樂聖人之道, 則有道與我, 爲二之病。 顔子, 亞聖也。 道是顔子, 顔子是道, 不可謂之樂道矣。 或又以爲: ‘名敎中, 自有樂地, 看之爲可。’ 云, 此則尤不可矣。 此乃千古未定之案也。 說者又以爲: ‘顔子所樂之樂字, 別無經傳可以參照者。’ 然則, 這樂字, 將何以指的說得耶?" 福源對曰: "程子之言以爲若謂: ‘有道可樂, 便不是顔子。’ 而今若於道外, 別求樂處, 則亦恐有弊矣。 義理充滿於中, 則自然有慊足怡悅之意。 此似是顔子之樂矣。" 敎曰: "然矣大抵顔子之於大聖, 只是未達一間耳。 蓋其博我以文, 約我以禮, 顔子之爲學也。 仰高鑽堅, 欲罷不能, 顔子之用工也。 此乃爲顔子之所樂者耶?" 又敎曰: "此曰: ‘天地儲精之精字, 卽上文太極圖說中二五之精也。 然則, 此獨言二五之精, 不言無極之眞, 何耶?" 退溪之言曰: ‘言精而無極之, 眞在其中’云。 此義得無掣礙於本旨, 耶? 朱子以爲: ‘伊川未弱冠, 著此論, 故或多未盡善處。‘ 此等處之謂耶? 未知卿等之見, 以爲如何。" 諸臣未卽仰對。 敎曰: "此曰: ‘眞而靜。’ 眞指本體而言, 靜指未感物時節也。 眞與靜二字之間, 下一而字, 與無極而太極之而字異耶? 同耶? 且眞是本體, 靜是未發, 此二字之義, 果爲不同耶?" 對曰: "此而字, 便同且字, 與無極而太極之而字, 不同矣。" 敎曰: "此曰: ‘眞而靜, 其未發也, 又曰五性具焉。’ 五性便是眞未發, 便是靜。 卽朱子已定之論, 則上句旣言, 眞而靜, 下句又言未發與五性者, 不無意疊之病。 此或未照檢處耶? 此非臆說, 亦自有先儒之論。 卿等之見以爲如何?" 對曰: "眞是不雜人僞時也, 都是未感物時也。 ‘至若未發也, 五性具焉’一句, 此再就靜處說破, 眞之名目也, 雖似重複, 而亦有層節矣。" 敎曰: "喜、怒、哀、樂、愛、惡、欲此七者, 卽七情也。 惻隱、羞惡、是非、辭讓此四者, 卽四端也。 七情, 情也, 四端, 亦情也。 但言七情可也, 孟子又何言四端耶? 但言四端可也, 子思又何言七情耶? 抑四端之外, 更有七情耶? 又或所言, 各有所指之不同, 有此曰四曰七之不同耶? 至於東儒退, 因此有四七之辨。 退則曰: ‘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 氣發而理乘之。’ 則曰: ‘理氣混瀜, 元不相離。 心動者, 情也。 發之者, 氣也。 所以發者理也, 非氣則不能發, 非理則無所發。 安有理發氣發之殊乎?’ 當時, 知舊之際, 互相復難。 至于今, 論說, 溢宇充棟, 未知將何適從耶?" 對曰: "七情, 兼善惡言之; 四端, 只從善一邊言之。 故衍之爲七情, 約之爲四端, 而四端七情, 本非二情也。 然前後兩先正之言, 各自不同, 至今論說紛紜, 而臣則竊以(後)〔爲〕 先正之言, 爲定論矣。" 敎曰: "知不善未嘗復行, 與知善便卽行之, 何者爲難歟?" 福源對曰: "此如陰陽分數, 陰消則陽長, 陽消則陰長。 知善而不爲, 便是不善。 恐無難易之可分矣。" 敎曰: "此章, 已講訖。 《定性章》雖非張子所著, 張子之一變至道, 實在於見二程之後, 而其於二程問答底大議論, 無過於此書。 然則雖斥張子之見, 而張子之所以爲張子者, 亦在是矣。 繼講此章好矣。" 龍輔東浚讀奏。 命陳文義訖。 敎曰: "橫渠以定性未能不動, 爲疑, 問于明道明道爲書答之。 惟其一書, 蓋其動亦定靜亦定云者。 卽周子所謂: ‘靜而無定, 動而無動’之理也。 明道之接濂溪統者, 實在於此。 大抵天下, 無不定之理, 亦無不定之性。 才求定, 便已不是性也。 觀於是書, 可以知明道造詣也。" 僉曰: "誠然矣。" 敎曰: "此曰: ‘普萬物、順萬事。’ 便是不絶乎物。 ‘? 獐吏帳㾬’ 便是不累乎物也。 不絶不累之工, 此篇中何語爲肯綮乎?" 僉曰: "臣等未及理會矣。"

敎曰: "將臨玉署, 大臣外經筵諸臣, 退待本署。 予將宣醞。" 於是, 知事以下, 以次先退。 敎曰: "玉署所講冊子, 館官就議領事, 以草記稟定。" 仍命宣醞。 酒一行, 命撤講。 通禮啓禮畢, 閣臣降復拜位, 行四拜禮。 引儀引時原任閣臣, 分左右退出。 遂乘輿, 詣弘文館。 閣臣祗迎于閤門外。 仍幸弘文館, 召經筵諸臣, 講《心經》。 本館啓請以《心經》進講, 命經筵諸臣上殿。 領事以下, 陞自西階, 就講位。 領事徐命善李徽之、知事鄭尙淳金熤、同知事李命植鄭昌聖、參贊官李𡊠徐有防申應顯趙時偉金宇鎭鄭志儉、侍講官朴天衡、侍讀官李時秀李鼎運李謙彬柳孟養、檢討官趙鼎鎭朴天行權以綱洪文泳, 以次就位。 命閣臣原任退去, 時任聽講。 提學金鍾秀兪彦鎬、直提學鄭民始沈念祖、直閣徐鼎修、待敎鄭東浚, 以次就位進伏。 天衡讀奏, 至第四章, 命各陳文義訖。 敎曰: "諸臣所勉, 無不切實。 但日已迫暮, 諸臣之登筵, 亦已久矣。 今不得長語, 而大抵此篇, 裒輯說心之書, 而編成一篇, 以爲千古治心之要法。 眞西山愛君之誠、惠後之功, 固大矣。 然而名篇, 以《心經》云者, 與《詩》 《經》《書經》不同, 而說出一心字, 遂謂之經。 比諸《近思錄》名篇之義, 不無差等, 此豈非終有所未妥者耶? 蓋此篇, 先正得之於旅邸, 而斷簡殘篇, 錯雜無緖, 不成一統之書, 故先正蒐釐考證, 以爲晩年之工, 而附奏與按說, 不但各自不同, 程篁墩, 則學失正路, 言多誤解。 向非先正之明辨, 則安知無誤後學之歎也? 然而經傳之大訓、聖賢之要工, 盡在一篇, 歷歷可攷, 則燭昏於末世, 柯則於末學, 上自皇王, 下及匹庶, 其全體大用之工, 舍此書何以哉? 先正所謂不在《近思錄》下者, 眞切實語也。 予每尊信此書, 而愧無平日之工。 今與卿等, 講其一二可乎?" 對曰: "今日之會, 實千古之盛擧也。 群下之所敷奏者, 藉曰鹵莾舛錯, 無足以啓沃, 而末梢一轉語, 擧皆勉君德之語也。 殿下勿以諸臣之淺短, 而隨例應之, 只以其末梢仰勉之語, 實心收用焉。" 敎曰: "此言果好矣。 諸臣之謂心謂性, 互陳迭奏者, 言雖多, 而意則同, 要皆君德上仰勉。 譬如入此室者, 或從東而入, 或自西而入, 各從其入處而入, 然其畢竟入此室則一也。 諸臣之各自規勉, 亦何異於是哉? 竟夕臨筵, 飽聞諸臣之昌言, 充然如有得於心, 而今將還內, 可不以實踐之道, 猛省而深思也?" 又敎曰: "中者, 卽聖人之極工, 此篇之準則。 然而無象可見, 無迹可尋, 懸空而說去, 則旣沒把捉。 卽物而爲喩, 則居無定位。 末學謏儒, 每以爲滉瀁難知, 高遠難行, 其所以談道說經者, 徒是皮膜外影子, 終無實地上見得。 苟欲形容此中字, 開發後學, 則其亦難矣。 大抵無物不中, 無處不中。 一家而有一家之中; 一國而有一國之中; 入室則室之中爲中; 在堂則堂之中爲中。 雖以此冊子言之, 開卷時, 則兩邊交合處爲中。 掩卷時, 則大小題目之間爲中。 跬步失當, 則非中也, 毫釐有差, 則非中也。 初無蹊逕、等級之可攀可躋處, 雖以司馬光之, 篤實尙有念中之失。 中之難, 有如是矣。" 命善對曰: "執中非難, 知中爲難。 知之而後, 可以執之也。" 敎曰: "然矣。 知中果爲難。 何以爲知中之要道耶? 明善則知中耶? 窮理則知中耶? 今欲先從入頭處下手, 則將如何而知中之要道乎? 學者之爲學, 如醫者之醫病。 今使醫者, 對症而下藥, 則必先知甚材爲補, 甚材爲瀉, 甚材爲溫涼, 甚材爲辛甘, 各循其性, 各當其方, 而後乃可合而爲劑, 隨症而收功。 今學者之知中而得中者, 亦何異於醫者之知藥而用藥耶? 何以則可爲知之之要, 而始得以下工耶?" 天衡對曰: "眞積力久, 義精仁熟, 而後乃可以執中, 倉卒之間, 猝難得執矣。" 敎曰: "倉卒之間, 不可執之云。 將於何時, 始可謂執中耶?" 徽之對曰: "處事得當, 則中在這裏。 豈可作一定界限, 謂之倉卒不可執耶?" 敎曰: "極字, 則建極立、極云, 而中字, 則單擧一中字而言之, 中之上下, 更不下一字。 若曰執中, 則易歸於子莫之中, 若云時中, 則時字, 只是順說去之意, 亦非區處, 此中字之義也。 將下得何樣字而後好耶? 有曰建中, 又曰受中, 亦曰降衷。 衷者, 卽中也。 建、受、降三字之中, 何者爲好耶? 中和之中字, 與建中執中之中字, 同歟? 異歟?" 命善對曰: "中和之中, 與建中執中之中, 似不同也。" 命植對曰: "降衷之衷, 則天命之性也, 受中之中, 則卽人得之而爲性者也。 建中、建極, 則有所標準之謂也。 義無不同, 而用處各異, 似不可執着某字, 而爲一定之用矣。" 昌聖對曰: "若非義精仁熟, 洞見義理之原者, 不可得而執矣。 故曰: ‘惟精惟一, 允執厥中。’ 以是觀之, 精一者始執中矣。" 敎曰: "大抵中者, 隨事善處, 無過不及, 則卽是中也。 日用事爲, 各自有這中, 本非別般甚高底事。 知到一事之中, 則行一事之中; 知到二事之中, 則行二事之中, 終至於無處不中, 無事不中, 每當千百萬事, 各得其中, 則是乃爲大中至正之道。 若以這中字, 掛撘在別處, 直待義精仁熟, 而後始欲執之, 則是終無可執之日矣。 文王始道敬字, 而學者知居敬之工; 說得性字, 而學者知性理之學, 授之際, 又拈來一中字, 而天下後世, 乃知大中之義焉。 其義, 則一也。 古昔聖王, 何嘗用工於名物、度數, 而後乃中耶? 此等處, 活看好矣。 三代以後, 敎人之說, 愈久愈多, 千岐百派, 各主其見, 俗學蒙儒, 實有迷所適之歎。 降自近世, 學者便以窮經之工, 看作別般技藝, 經學與科目, 分爲兩條門路。 自是以後, 科目從事者, 視經籍爲弁髦, 人無讀書, 士皆矇經, 擧世有面墻之歎。 此豈非衰世之事也? 予每以是, 爲深憂浩歎, 終不得矯捄之道矣。" 命善對曰: "經學, 卽日用當行之事, 一自科擧出後, 便作別般工夫, 衰世之敎, 誠得當矣。" 敎曰: "敎化不明, 世級漸降, 故科目與經術, 分而爲兩路矣。 何以則科制可以復古乎?" 命善對曰: "雖以我朝盛際言之, 先正臣趙光祖李滉李珥, 皆科目上立身。 中古以後, 便成兩件事矣。" 敎曰: "日已迫曛, 撤講可也。" 通禮啓禮畢, 領事以下退出。 遂乘輿還內。 閣臣、館臣, 祗送館門外, 閤內已擧燭矣。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21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