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에서 고사 절목을 올리다
규장각에서 고사절목(故事節目)을 써서 올렸다.【절목의 내용은 이렇다. 본각(本閣)의 제조(提調) 이하 대교(待敎)에 이르기까지 숙배(肅拜)는 송(宋)나라의 용도각(龍圖閣) 학사(學土)가 편전(便殿)에서 사전(謝箋)을 올리는 예(例)에 의거하여 합문(閤門) 밖에서 숙배한다. 천관랑(天官郞)이 관교(官敎)를 주면 홍려(鴻臚)가 찬배(贊拜)하게 한다. 1. 본각(本閣)의 기거(起居)도 역시 용도각 학사가 내전(內殿)으로 나아가 기거할 예(例)에 의거하되 무릇 기거가 있을 때에는 밖에서 입참(入參)한다. 1. 만일 약원(藥院)일 경우에는 반열이 협양문(協陽門) 안에 있게 하고 동가(動駕)할 때의 수가(隧駕)하는 반열은 정원의 뒤에 있게 한다. 1. 이문원(摛文院)과 홍문관(弘文館)은 곧 송(宋)나라의 한림원(翰林院)과 숭문원(崇文院)인데도 본원(本院)에서는 아직껏 표직(豹直)085) 한 예가 없으니 진실로 궐전(闕典)이다. 지금부터는 직각·대교가 돌아가면서 입직(入直)하되 주도(做度)는 홍문관의 예(例)에 의하고 하번(下番)은 예로 직각은 20일, 대교는 30일로 할 것을 정식(定式)으로 한다. 1. 직각과 대교가 유고(有故)할 경우에는 이조(吏曹) 가랑청(假郞廳)의 예에 의거하여 검서관(檢書官) 4원(員)이 돌아가면서 대신 입직 한다. 1. 일 제학(一提學)이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되고 대교가 장무관(掌務官)이 되며, 일제학이 유고(有故)할 경우에는 이 제학(二提學) 이하의 관원이 차례대로 교대하여 행하고 대교가 유고할 경우에는 직각이 교대하여 행한다. 그리고 규장 학사(奎章學土)의 인(印)은 유사 당상이 거두어 쓰고 이문원의 인(印)은 장무관이 거두어 쓴다. 1. 매 10일마다 각료(閣僚)가 모두 모여 예수(禮數)를 행한 뒤에 고공(考功)의 계목(啓目)을 정리하여 아뢰되, 제학의 사진(全進) 여부는 단자(單子)로 정리하여 아뢰고, 직가과 대교의 사진 여부는 계목(啓目)으로 정리하여 아뢴다. 사진(士進)한 날이 5일 미만인 경우에는 정리하여 아뢸 때에 추고(推考)를 청한다. 검사관(檢書官)·사권(司卷)·영첨(領籤)에 대해서도 또한 각각 제목으로 정리하여 아뢰며, 궐직(闕直)한 사람은 죄를 논한다. 제학, 직제학으로서 사진한 날이 3일 미만인 경우에는 정원에서 찰추(察推)한다. 1. 본원(本院)의 일기(日記)는 춘방(春坊)의 예(例)에 의거하여 대교가 관장하며 사례(事例)에 관한 책자(冊子)는 장리(掌吏)가 관장한다. 1. 직제학·직각·대교의 전도(前導)는 옥당의 인배(引陪)를 모방하여 하되, 송조(宋朝) 때의 학사원(學士院)과 본조(本朝)의 호당(湖堂)의 예(例)를 참고하여 한다. 옷은 주의(朱衣)를 쓰고 패(牌)는 금패(金牌)를 쓴다. 1. 각료(閣僚)들이 본원(本院)을 출입할 때에는 주의리(朱衣里) 1인이 원문(院門)에서 앞서서 인도한다. 1. 직각·대교가 본원에 입직할 때에는 옥당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연복(燕服)에다 관(冠)을 쓴다. 1. 각료들이 상견(相見)할 때에는 직각·대교가 제학·직제학에 대해 경외관(京外官)이 상견할 때처럼 격등(隔等)한 의식(儀式)을 따른다. 직각·대교가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면 제학·직제학은 손을 들어 읍(揖)하는 것으로 답한다. 직각과 대교는 옥당의 동벽(東壁)과 남상(南床)의 예(例)에의거하여 대교가 앞으로 나아가 몸을 굽히고 읍하면 직각도 몸을 굽혀 읍으로 답한다. 제학이 직제학에 대해서는 육조(六曹)의 장아(長亞) 당상(堂上)의 예(例)에 의거하여 제학이 주벽(主壁)이 되는데 직제학이 앞으로 나아가 몸을 굽혀 읍하면 제학도 또한 몸을 굽혀 읍으로 답한다. 제학이 일 제학(一提學)에 대해서 이 직제학(二直提學)이 일 직제학(一直提學)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모두 읍을 행한다. 검사관·사권·영첨이 제학과 직제학에 대해 앞으로 나아가 절을 나아가 절을 하면 제학과 직제학은 읍으로 답하지 않으며 직가·대교에게도 또한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는데 직각·대교는 손을 들어 읍으로 답한다. 1. 포폄(褒貶) 때에는 두 제학이 주벽(主壁)의 교의(校椅)의 앞에 늘어서고, 두 직제학은 동벽(東壁)의 교의 앞에 늘어선다. 두 제학이 몸을 굽혀 서로 읍(揖)한 뒤에 직제학이 제학의 앞으로 나아가 재배(再拜)하면 제학도 재배로 답하고 나서 각각 교의로 나아가 않는다. 직각·대교가 제학 앞으로 나아가 재배하면 제학은 손을 들어 읍으로 답하며, 또 직제학 앞으로 나아가 재배하면 직제학이 손을 들어 읍으로 답한다. 검서관(檢書官)·사권(司卷)·영첨(領籤)이 제학·직제학에게 참알(參謁)하면 읍(揖)으로 답을 하지 않는다. 1. 무릇 공회(公曾) 때에는 대교가 제일 먼저 도착하며 직각이 그 다음이고, 직제학이 또 그 다음이고, 제학이 맨 나중에 도착한다. 제학이 본원(本院)에 들어올 때 직제학이 계상(階上)에서 공경히 맞이하면 제학이 회반(回班)하여 서로 읍한다. 직각·대교가 계하(階下)에서 공경히 맞이하면 제학·직제학이 손을 들어 읍으로 답한다. 대교가 직각에 대해서도 또한 직제학이 제학에게 하는 것처럼 한다. 검서관·사권·영첨은 제학·직제학에 대해서 문내(門內)에서 공경히 맞이하고 제학·직제학은 읍으로 답을 하지 않으며 직각·대교에 대해서는 계하(階下)에서 공경히 맞이하고 직각 대교는 손을 들어 읍으로 답한다. 1. 검서관이 제학·직제학에게 명함을 들이고 배알(拜謁)하는 등의 의절(儀節)은 한결같이 각사(各司)의 당량(堂郞)의 예(例)를 따른다. 직각·대교에 대해서는 각사의 여러 낭관(郞官)이 정(正)·부정(副正)에게 하는 예(例)에 의거하여 역시 명함을 들이고 배알한다. 1. 검서관은 이미 내각(內閣)에 예속 되었으니 사권(司卷)·영첨(領籤)과 함께 다같이 같은 각(閣)의 녹관(祿官)이 된 것이다. 따라서 상견(相見)할 때에는 서로 읍(揖)하는 항례(抗禮)가 있어야 한다. 무릇 공회(公曾)가 있을 때에도 또한 동반(同班)으로 서의 예(禮)를 행해야 한다. 1. 각신(閣臣) 가운데 새로 제수된 관원이 있을 경우에는 사권(司券) 이하 각원(閣院)의 요속(僚屬)들이 모두 각중(閣中)으로 나아가 배알한다. 1. 6월과 12월에는 초하루 전날 저녁에 사권 1원(員)이 공복(公服)을 갖추고 4제학(四提學)의 집으로 나아가 포폄(褒貶)의 날짜에 대해 품정(稟定)한다. 1. 각료(閣僚)에게 길을 양보하고 말[馬]을 피하는 예(例)에 관한 것은 송나라 건덕(乾德)086) 연간에 만든 《백관상견의(百官相見儀)》를 참작하여서 한다. 직각과 대교가 제학이나 직제학을 만났을 경우에는 몸을 숨기고 말을 피하며, 직제학이 제학을 만났을 경우에는 말고삐를 거두어 쥐고 옆으로 비켜 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대교가 직각을 만났을 경우에는 직제학이 제학에게 하는 예(例)처럼 한다. 1. 중서(中書), 한원(韓苑)에서 모두 선생(先生)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아름다운 풍조이다. 이 이원(二院)의 예(例)를 참작하여 원(院)에 있을 때에는 본직(本職)의 선생이 대신(大臣)에게 대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절을 하며, 보국(輔國) 이하의 관원에게는 격등(隔等), 차등(差等), 동등(同等)과 품계가 낮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 동반(同班)에서 서로 읍(揖)한다. 길에서 만났을 경우에는 격등이면 몸을 숨기고 말을 피하며, 차등이면 말고 뼈를 거두어 쥐고 비켜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동등의 선생(先生)으로 품계가 낮은 자이면 길을 양보하며, 궐내(闕內)에서 서로 만났을 경우에도 또한 길을 양보한다. 1. 일찍이 제학을 역임한 사람이 제학 선생(提學先生)이 되는 것으로 직제학의 선생이 될 수는 없으며, 일찍이 직각을 역임한 사람은 대교의 선생이 될 수 없다. 단지 본직(本職)을 역임한 것에 의거 선생으로 삼는다. 1. 일찍이 본각(本閣)의 우위(右位)를 역임하였으면 비록 본직의 선생이 아닐지라도 원중(院中)이나 공회(公會)나 노상(路上)에서 서로 만났을 때에는 한결같이 본직의 선생과 같이 대우한다. 1. 시임(時任)·원임(原任)의 좌차(座次)는 연중(筵中)이나 원중(院中)을 막론하고 혹 각사(閣事)로 하여 소명(召命)이 있거나 혹 각사로 하여 공회(公會)가 있을 경우에는 현직(現職)의 자급(資級)의 높고 낮음에 구애될 것이 없이 다만 일찍이 각직(閣職)을 역임한 선우에 따라 차례를 삼는다. 그러나 대신(大臣)만은 체모가 중한 것이니 이 예(例)를 적용하지 않는다. 1. 시임·원임인 제학·직제학·직각·대교가 원중에서 공회(公會)할 때의 예수(禮數)는 대신을 제외하고는 자급의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않는다. 직제학이 제학에 대해 앞으로 나아가 몸을 굽혀 읍(揖)하면 제학도 또한 몸을 굽혀 읍으로 답해야 하며, 직각·직제학에 대해 앞으로 나아가 절하면 제학·직제학도 또한 절하여 답한다. 대교가 직각에 대해 앞으로 나아가 절하면 제학·직제학도 또한 절하여 답한다. 대교가 직각에 대해 앞으로 나아가 몸을 굽히고 읍하면 직각 또한 몸을 굽혀 읍으로 답한다. 1. 공회(公會)와 사회(私會)를 막론하고 만약 다른 곳에서 시임 장료(時任長僚)나 우위(右位)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더라도 반드시 먼저 통알(通謁)하여 들어오라고 허락한 연후에야 들어가서 만나본다. 1. 직제학·직각·대교가 길에서 선생(先生)을 만났을 경우에는 주의(朱衣)·금패(金牌) 같은 고풍(古風)의 법식을 한결같이 중서당(中書堂)의 예(例)에 의거해야 하나, 선생이 만일 공복(公服)이 아닐 경우에는 고풍대로 하지 않는다. 수가(隧駕)하여 반열을 이룬 때이나 패(牌)를 받들고 대궐로 달려갈 즈음에도 또한 고풍대로 하지 않는다. 1. 본각(本閣)의 선생이 사은(謝恩)·하직(下直)·복명(復命) 등의 일로 궐내에 들어왔을 경우에는 당후 선생(堂后先生)의 예(例)에 의거하여 서리(書吏)를 보내어 문안(問安)한다. 1. 어필(御筆)로 된 원액(院額)을 봉게(奉揭)한 곳이 정청(正廳)일 경우에는 선생이 아니라 비록 대신(大臣)·문형(院額)일지라도 출입할 수가 없으며,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않는다. 손님과 함께 있으면서 공복(公服)을 벗을 수 없는 것도 은대(銀臺)의 예에 따라서 한다. 1. 직제학 이하가 공복으로 출입할 때에 금패(金牌)로 전도(前導)할 경우에는 중서 사인(中書舍人) 및 옥당(玉堂)의 예(例)에 의거하여 문신(文臣)은 동품(同品)이면 길을 양보하며 차등(差等)이면 몸을 숨기고 말을 피한다. 당량(堂郞)을 막론하고 각각 그 품계에 따라 시행한다. 1. 본각은 체모(體貌)가 자별(自別)하니 당(唐)·송(宋)의 한원(翰苑) 고사(故事)에 의하여 비록 대신(大臣)의 아문(衙門)이라도 또한 모두 관문(關文)을 보낼 수 있다. 1. 유하정(流霞亭)이 이미 본각(本閣)에 소속되었으니, 독서당(讀書堂)의 망호정(望湖亭)의 예에 의거하여 비단철에 따라 나아가 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료(閣僚)로서 실직(實職)이 없는 자도 또한 가서 머물면서 글을 읽을 수 있게 하며 동민(洞民)에게 신역(身役)을 면제해서 수직(守直) 하게 하고 사환(使喚)으로 부리는 등의 일은 또한 망호정의 예를 따라서 한다. 1. 국초(國初)에 상신(相臣) 유관(柳寬)이 송 태조(宋太祖)가 포연(酺宴)을 내린 고사를 인용하여 3월 3일, 9월 9일을 영절(令節)로 삼아서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승지(鰧地)를 가려서 유락(遊樂)하게 함으로써 태평한 기상을 형용(形容)하게 할 것을 청하였었다. 이제 내각(內閣)을 새로 창건한 때를 당하였으니 의당 고사를 수거(修擧)하여야 한다. 해마다 3월과 9월에는 반드시 한가한 날을 선택하여 봄·가을로 유락하되, 기일에 앞서 초기(草記)를 올려 취품(取稟)하여 유지(有旨)를 얻은 연후에 유하정(流霞亭)으로 나아간다. 모든 영악(伶樂)과 공대(恭待)는 호당(湖堂)의 고풍에 의거하여 한다. 만약 이 두 달 안에 유고(有故)하게 되면 물려서 행할 수 없게 함으로써 계엄(戒嚴)의 뜻을 두게 한다. 1. 호당(湖堂)에서 출패(出牌)하던 고풍을 이제 와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옛날 대제학이었던 이식(李植)이 기록해 놓은 것을 살펴보건대, 출패하여 수색(需索)함에 있어 내외관(內外官)이 감히 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서 사인(中書舍人)도 감히 앞을 다투지 못했다고 하니, 호당의 고풍이 한결같이 지금의 사인사(舍人司)와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부터 본원(本院)에서 만약 경하(慶賀)할 일을 만나 기쁨을 기억하게 하는 일이 있거나 강정(江亭)에 사유(賜遊)하는 때가 있을 경우 출패(出牌)하여 수색(需索)함에 있어 중서의 고사를 적용하라. 그리고 이밖에는 출패를 허락하지 않는다. 각사(各司) 관원의 진래(進來)는 금중(禁中)과 외사(外司)가 차이가 있으니, 행할 필요가 없다. 1. 이제부터 절목(節目)을 확정한 뒤에는 모든 각료들이 의당 한결같이 성헌(成憲)을 준행하여야 한다. 비록 세세한 절목이라도 혹여 방과(永過)하여 규레를 괴손(壞損)시키게 되면 우위(右位)에 있는 사람에게 칙려(飭勵)를 시행하여 경책(警策)하고 칙려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 원(院)에서는 사무를 맡고 있는 하리(下吏)를 책벌(責罰)하고 밖에서는 데리고 있는 하례(下隷)를 책벌하는 것을 한결같이 은대(銀臺)의 예(例)에 따라서 한다.】 하교하기를,
"내각은 일세(一世)의 수선(首善)이 되는 자리이니, 문(文)과 예(禮)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朱衣)·금패(金牌)가 문(文)의 실(實)은 아니고, 베궤(拜跪)하고 절선(折旋)하는 것이 또한 예(禮)의 실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고 성근데서 조밀한 데로 들어감에 있어 오직 그 문과 예를 책실(責實)하는 방도는 돌아보건대, 여기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이 상정(詳定)한 사목(事目)을 살펴보건대, 미비한 예수(禮數)를 이제 살펴서 행할수 있게 되었고, 완성되지 않은 격례(格例)를 이제 취하여 법식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또 그 유(類)대로 모아서 서차(序次)한 것이 한번 책을 열면 일목 요연하니, 이에 의거하여준행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내가 크게 두려워 하는 것은 따로 살피는 바가 있어서이다. 한갓 법만으로는 잘 준행될 수 없는 것이어서 사람이 어떻게 수거(修擧)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제 비록 법제를 정한 것이 이와 같이 두루 미치고 상세하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시임·원임의 각료(閣僚)들이 이를 변모(弁髦)처럼 여겨 법은 법대로 나는 나대로 마음내키는대로 곧바로 행하면서 이를 방검(防檢)이나 유한(維閑)으로 삼지 않는다면, 가령 이보다 더 나은 금과 옥조(金科玉條)가 있다고 한들 장차 어찌 쓰거나 하겠는가?
지금의 이 하교는 또한 아무런 까닭도 없이 내리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지금의 효험이 없는 일을 경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정원은 근밀(近密)한 지위에 처하여 있으면서 통솔을 맡고 있는 관사인데도 고사(故事)라든가 고풍(古風)에 관한 것을 한결같이 그대로 방기한 채 버려두고 있으므로 내가 매우 안타깝게 여겨 수거하게 한 것이 수 차례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 승선(承宣)087) 들은 나의 말을 하찮게 듣고 나를 흐리멍덩하게 여겨 무릇 보고 듣는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하고 체모(體貌)를 무너뜨리는 일들을 몸소 범하고 답습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를 속일 수 있고 내가 모르리 라고 여기고 있는데,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바로잡아 고칠 기약이 없게 되었다. 저 후원(喉院)088) 을 출입하는 자들의 반수 이상이 바로 내각(內閣)을 출입하는 사람들이니, 그들이 후원에서 멋대로 규범을 훼손시키던 습성을 유독 내각에다 옮겨서 시행하지 않을리가 있겠는가? 참으로 그렇다고 한다면 이 사목(事目)을 버려두어도 또한 마땅할 것이다. 아! 경들은 임금에게 신임을 얻은 것이 그와 같고 지위가 여기에 이르렀으며, 내가 말한 것도 또한 행하기 어려워 능히 할 수 없는 일이 아닌데도 무엇을 꺼려서 행하지 않으며 무엇이 수고로워서 노력하지 않는 것인가? 경들이 만일 통렬히 스스로 면개(勉改)하여 마음을 다해 봉행하기가 어렵다면 이 사목은 도로 들여다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일 시임·원임의 재경(在京) 각신(閣臣)은 실제 병이 난 경우를 제외하고 본각(本閣)에 일제히 모여서 이 비답을 두루 간독(看讀)하게 하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충분히 하나로 귀착되려면 모름지기 오랜 뒤에야 가은하겠지만 반드시 준행하고자 한다면 각자가 의견을 거두어 다시 초기(草記)를 올리라.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계하(啓下)하여 한갓 실속이 없다는 탄식만 초래해서는 안될 것이니, 경들은 이를 살피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11면
-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註 085]표직(豹直) : 여러 관원이 모두 나가고, 혼자 남아 숙직(宿直)하는 것.
- [註 086]
○奎章閣書進《故事節目》。 【節目曰: "本閣提調以下至待敎, 肅拜, 依宋之龍圖閣學士, 進謝箋便殿之例, 肅拜於閣門外。 天官郞授官敎, 鴻臚贊拜。 一, 本閣起居, 亦依龍圖閣學士赴內殿起居之例, 凡有起居, 自外入參, 一, 如藥院, 而班在協陽門內, 動駕時隨駕班, 則在政院之後。 一, 摛文院、弘文館, 卽宋之翰林院、養文院, 本院尙無豹直之例, 儘是闕典。 自今直閣、待敎輪回入直, 而做度則依弘文館例。 下番例, 直二十日, 待敎三十日定式。 一, 直閣、待敎有故, 則依吏曹假郞廳例, 檢書官四員, 輪回代直。 一, 一提學爲有司堂上。 待敎爲掌務官。 一提學有故, 則二提學以下, 以次替行。 待敎有故, 則直閣替行, 而奎章學士之印, 有司堂上取用。 摛文院之印, 掌務官取用。 一, 每十日閣僚齊會行禮數後, 修啓考功啓目, 而提學進不進, 以單子修啓。 直閣、待敎進不進, 以啓目修啓。 仕進未滿五日, 則修啓時請推。 檢書官、司卷、領籤, 亦各以啓目修啓, 闕直者論罪。 提學、直提學仕進未滿三日, 則自政院察推。 一, 本院日記, 依春坊例, 待敎掌之。 事例冊子, 掌吏掌之。 一, 直提學、直閣、待敎前導, 依玉堂引陪, 而參互於宋朝學士院及本朝湖堂之例。 衣用朱衣, 牌用金牌。 一, 閣僚出入本院時, 朱衣吏一人, 前引于院門。 一, 直閣、待敎入直本院時, 依玉堂故事, 燕服着冠。 一, 閣僚相見時, 直閣、待敎之於提學、直提學, 依京外官相見隔等之儀。 直閣、待敎進前拜, 則提學、直提學擧手答揖。 直閣、待敎, 依玉堂東壁南床, 待敎前鞠躬揖, 直閣鞠躬答揖。 提學之於直提學, 依六曹長亞堂之例, 提學主壁, 直提學進前鞠躬揖, 提學亦鞠躬答揖之。 提學之於一提學, 二直提學之於一直提學, 一行竝揖。 檢書官、司卷、領籤之於提學、直提學進前拜, 則提學、直提學不答揖, 於直閣、待敎, 亦爲進前拜, 而直閣、待敎擧手答揖。 一褒貶時, 兩提學列立主壁交椅前, 兩直提學列立東壁交椅前。 兩提學鞠躬相揖後, 兩直提學, 進提學前再拜, 提學答再拜, 各就交椅坐。 直閣、待敎, 提學前再拜, 提學擧手答揖, 又就直提學前再拜, 直提學擧手答揖。 檢書官、司卷、領籤參謁提學、直提學, 不答揖。 一, 凡公會時, 待敎先到, 直閣次之, 直提學又次之, 提學後至, 而提學入院時, 直提學階上祗迎, 則提學回班相揖。 直閣、待敎階下祗迎, 則提學、直提學擧手答揖。 待敎之於直閣, 亦如直提學之於提學。 檢書官、司卷、領籤之於提學、直提學, 則門內祗迎, 提學、直提學不答揖, 於直閣、待敎則階下祗迎, 直閣、待敎擧手答揖。 一, 檢書官之於提學、直提學投刺拜謁等節, 一依各司堂郞例。 於直閣、待敎, 則用各司諸郞官之於正、副正之例, 亦爲投刺拜謁。 一, 檢書官旣爲內閣, 則與司卷、領籤同是一閣祿官, 相見時互揖抗禮, 而凡公會時, 亦爲同班行禮。 一, 閣臣中, 有新除之員, 則司卷以下閣院諸屬, 皆就謁於闕中。 一, 六月、十二月朔前夕, 司卷一員具公服, 進詣四提學家, 褒貶日字稟定。 一, 閣僚讓路避馬之例, 參酌宋朝乾德百官相見儀。 直閣、待敎遇提學、直提學, 則隱身避馬, 直提學遇提學, 則斂馬側立須其過。 待敎遇直閣, 則如直提學之於提學例。 一, 中書、翰苑皆尊先生, 乃是美風。 參酌二例, 在院則本職先生, 於大臣則進前拜。 輔國以下, 則勿論隔等、差等、同等及秩卑者, 竝同班相揖。 道遇則隔等隱避, 差等斂馬側立須其過。 同等先生之秩卑者讓路, 闕內相遇亦爲讓路。 一, 曾經提學者爲提學先生, 而毋得爲直提學之先生, 曾經直閣者, 毋得爲待敎之先生。 祗以所經本職爲先生。 一, 曾經本閣右位, 雖非本職先生, 院中公會、路上相逢, 待之一如本職先生。 一, 時、原任座次, 勿論筵中與院中, 或以閣事有召命, 或以閣事有公會, 則不拘見職資級之高下, 只以曾經閣職先後, 爲次第, 而惟大臣體重, 不可用此例。 一, 時ㆍ原任提學、直提學、直閣、待敎, 院中公會時禮數。 大臣外, 勿論資級高下。 直提學之於提學進前鞫躬揖, 則提學亦鞫躬答揖, 直閣待敎於提學、直提學進前拜, 則提學、直提學亦答拜。 待敎於直閣, 進前鞫躬揖, 則直閣亦鞫躬答揖。 一, 勿論公私會, 若遇時任長僚與右位於他處, 則其相見禮數雖, 未能一如院中, 必先通謁許入, 然後始爲入見。 一, 直提學、直閣、待敎路逢先生, 則朱衣、金牌古風之式, 一依中書堂例, 而先生如非公服, 則毋得古風。 隨駕成班之時, 承牌赴闕之際, 亦毋得古風。 一, 本閣先生以謝恩下直復命等事, 入闕內, 則依堂后先生例, 遣書吏問安。 一, 御筆院額所奉正廳, 則非先生, 雖大臣、文衡, 毋得出入, 而客來不起。 與客不得脫公服, 亦依銀臺之例。 一, 直提學以下公服出入時, 金牌前導, 則依中書舍人及玉堂例, 文臣同品讓路, 差等隱避。 而勿論堂郞, 各隨其品施行。 一, 本閣體貎自別, 依唐、宋翰院故事, 雖大臣衙門, 亦皆通關。 一, 流霞亭, 旣屬本閣, 則依讀書堂望湖亭例, 不但隨節出遊而已, 閣僚之無實職者, 亦許往留讀書, 而除役洞民守直, 使喚等事, 亦遵望湖亭例。 一, 國初相臣柳寬引宋 太宗賜酺故事, 請以三三、九九爲令節, 使臣僚選勝遊樂, 以形容太平。 今當內閣之新創, 宜有故事之修擧。 每歲必選暇日於三月、九月, 以爲春秋之遊, 前期草記, 取稟得旨, 然後出往流霞亭。 凡伶樂、供待, 湖堂古風。 若於兩月內有故, 則毋得退行, 以存戒康之意。 一, 湖堂之出牌古風, 今無可考, 而以古大提學李植所記觀之, 則出牌需索, 內外官無敢闕應, 中書舍人不敢爭先, 湖堂古風之, 一如今舍人司可知。 自今本院, 若値慶賀志喜之事, 江亭賜遊之時, 出牌需索, 用中書故事, 而此外則勿許用牌。 至於各司官員進來, 則禁中與外司有異, 不必行之。 一, 自今節目一定之後, 凡在閣僚, 固宜一遵成憲。 雖於細節、踈目, 如或放過, 而壞損規例, 則爲右位者, 不可無施警飭勵之道。 在院則責罰該掌之吏, 在外則責罰所帶之隷, 一如銀臺之例。"】 敎曰: "內閣爲一世首善之地, 則可謂文在玆乎, 禮在玆乎。 朱衣、金牌, 非文之實也; 拜跪折旋, 亦非禮之實也。 然由淺入深, 自踈至密, 惟其文與禮責實之道, 顧不在玆乎? 觀此詳定事目, 未備之禮數, 今可按而行之, 未成之格例, 今可取而式焉。 又其彙類序次者, 一開卷瞭然, 非不欲使之依此遵行, 而予之所大懼者, 別有在焉。 徒法不能自行, 在人之修擧之如何耳。 今雖定制, 如是其該詳, 所謂時、原任閣僚, 視若弁髦, 法自法、我自我, 徑情直行, 不以是爲防撿, 不以是爲維閑, 藉令有勝於此之金科玉條, 將安用爲? 今玆之敎, 亦非無以而發也。 第言目下蔑效之事, 使卿等知之可乎? 政院處密邇之地, 爲統率之司, 而故事也、古風也, 一任其抛置, 予切悶之。 使之修擧者, 不啻屢次, 而彼承宣諸人, 聽我藐藐, 視我夢夢, 諸凡駭觀聽、壞體貌之事, 無不躬犯而身蹈。 謂予可欺, 謂予不知, 一日二日, 矯革無期。 彼出入喉院者, 强半是出入內閣之人也, 其所脫羈毁範于喉院之習, 獨不移施於內閣乎? 信爾則此事目, 置亦爲可。 噫! 卿等得君如彼, 致位至此, 而予所言, 亦非難可行、不能爲之事, 則何憚而不行, 何勞而不爲乎? 卿等如難, 痛自勉改, 悉心奉行, 則此事目還入可也。 明日時、原任在京閣臣, 除非情病外, 齊會本閣, 遍看此批答。 諸議十分歸一, 雖於久遠之後, 必欲遵行, 則各收意見, 更爲草記。 否則決不可啓下, 徒致無實之歎, 卿等照此。"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11면
-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註 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