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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0권, 정조 4년 12월 27일 신미 1번째기사 1780년 청 건륭(乾隆) 45년

영의정 김상철이 올바른 정사와 학문에 힘쓰기를 청하는 차자를 올리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차자를 올리기를,

"예로부터 어떤 성왕(聖王)이 뜻을 세우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선(善)을 선택하여 굳게 지키지 않을 경우 사물에 흔들려 뜻을 빼앗기지 않은 자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뜻을 반드시 세우고자 한다면 오직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이는 진실로 정치를 하는 계획과 국운(國運)을 영원하게 하는 계책이 모두 학문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상께서는 동궁에 계실 때부터 경전(經傳)을 두루 보시고 자사(子史)407) 를 두루 연구하면서 세세한 것도 분석하고 심오한 것을 꿰뚫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단지 경연의 강관(講官)이 고문(顧問)에 대비하거나 성상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상의 마음이 점차 해이해져서 강연을 열었다가 중지하곤 하였습니다. 삼강(三講)408) ·양대(兩對)409) 는 열성조의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성상의 학문이 이미 고명해졌다고 생각하시거나 법강(法講)이 겉치레나 하는 것으로 여기지 마시고 경전을 강론하여 공사(公私)와 의리(義利)의 구분을 살피며 자사(子史)를 강론하여 치란과 득실의 근본을 구명하여 학문을 하는 것과 정사를 하는 것이 서로 표리(表裏)가 되게 하소서. 그러면 성상의 뜻이 서지 못하고 성상의 치화가 융성하지 못할까 걱정할 게 뭐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인(仁)·명(明)·무(武) 세 글자로 전하를 위해 말씀드렸습니다. 삼가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규모를 보건대 이 마음으로 이 도를 행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거나 죽이는 것은 임금의 큰 권한인데, 비록 사나운 역적을 국문하고 재심의 죄수를 논죄할 때에도 반드시 죽어야 할 사람을 살릴 길을 찾아서 매양 ‘무고(無辜)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실형(失刑)의 책임을 진다.’는 의리를 간직하고 있으니, 이는 인의 극치입니다. 하루에 온갖 정무를 봐야 하므로 나라의 일이 매우 번거로우니, 반드시 먼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관찰하고 고요한 곳에서 움직이는 것을 관찰해야만 만물의 정상이 모두 앞에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대소 관원들이 두려워 복종하여 감히 기만하거나 엄폐할 꾀를 부리지 못하니, 이는 밝음의 극치입니다. 매우 통한 운(運)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당하고 지극히 편안한 지위로 매우 위험한 시대를 거치면서도 목소리나 낯빛을 까딱하지 않고서 차분하게 대처하고 담소(談笑)하면서 화란(禍亂)을 안정하였으니, 이는 무(武)의 극치입니다. 아무리 그러나 만일 혹시라도 보령(寶齡)이 점차 높아져 뜻이 기(氣)를 통솔하지 못할 경우 인(仁)이 지나쳐서 점차 감싸 주는 고식적인 것에 가까워지고, 명(明)이 지나쳐서 점차 번거롭고 세세한 것이나 살피는 데에 가까워지고, 무(武)가 지나쳐서 점차 노여움과 다급함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어찌 끝을 처음과 같이 신중히 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신은 감히 ‘홍의치원 관유불박(弘毅致遠寬裕不迫)’이란 여덟 글자로 전하의 잠언(箴言)으로 대체하오니, 성상께서는 더욱 유의하소서.

현재 가장 민망스러운 것은 위아래가 서로 믿지 못하고 조정의 풍습이 바르지 않은 점입니다. 세상의 변고가 많은데 형적(形迹)만 꼬집으므로 한 사람을 탄핵하였을 경우 반드시 공평한 호오(好惡)에서 나오지 않고, 한 가지 일을 논의하였을 경우 반드시 진정한 시비(是非)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허위가 습관이 되어 기약없이 모아들고 있습니다. 시들어진 기풍을 어떻게 분발시키며, 없어진 염치를 어떻게 격려하고 해이된 기강을 어떻게 부식시키고 꽉 막힌 언로를 어떻게 개도하느냐는 임금이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성실과 허위의 사이에서 호오(好惡)를 살피고, 의심쩍은 가운데서 시비를 분변하여 상하의 사이에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고 조정에서 풍습이 저절로 바르게 되어야 하니, 그러면 위에 진달한 여러 조항들은 변화시키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변할 것입니다.

아! 삼사에서 합동으로 계사를 올렸는데도 지금까지 서로 버티면서 한결같이 윤허하시지 않아 결말이 날 기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방비가 엄하지 못하여 의리가 쉽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을 위한 방도는 마땅히 윤허해야 할 것을 윤허하고, 마땅히 논죄해야 할 것을 논죄하여 공론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대간의 계사가 모두 마무리짓게 해야 하니, 이게 어찌 국가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옛날의 나쁜 습관을 개혁하여 새롭게 하자는 하교에 있어서는 훌륭하신 말씀이십니다. 일찍이 듣건대, 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의 옥사 때 만약 명백히 드러나 사면하기 어려운 죄가 없을 경우 비록 일가붙이나 인척들 그리고 평소 절친했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연루시킨 단서가 없었으니, 그것은 ‘협종(脅從)한 사람에게는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는 의리로 귀화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성상께서 생각하신 것이고 성상께서 하교하신 바이니, 완급(緩急)과 서참(舒慘)에 반드시 더욱 유의하여 인심을 안정시키고 세도를 진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아! 우리 조정에서 선비를 뽑는 법 중에 식년(式年)의 과거를 가장 중요시합니다. 대개 그 선발의 취지는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을 겸비한 인재를 뽑는 의미를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 제술하는 선비는 칠서(七書)를 다 외우려고 할 경우 비록 일생을 다 바치더라도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울의 자제 중에 응시하는 자가 매우 젊은 사람으로 33인의 과방에서 실용적인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조 조의 고상(故相) 조익(趙翼)이 배강(背講)을 임강(臨講)으로 바꾸고 오로지 글뜻만 물어보자고 요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숙종 조의 고상 남구만(南九萬)은 사서(四書) 중 하나만 강을 시킬 것을 요청하였고, 민정중(閔鼎重)도 강경은 대문을 위주로 하고 제술은 생획(生劃)410) 을 뽑자는 의논을 올렸습니다. 지금 만약 원래 정원 중 몇 자리만 별도로 삼경(三經)의 회시(會試)로 만들어 삼경에 통달한 사람을 많이 얻는다면, 비록 오늘 과거에 합격하여 내일 경서를 강론하는 반열에 두더라도 손색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조정의 의논을 널리 문의하여 절목을 강론하여 만드소서.

아! 나라에는 군대가 없어서는 안되고 군대는 식량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만일 필요없는 군대가 쓸데없이 식량을 축내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바탕만 될 경우 어찌 한결같이 게을리한 채 고칠 방도를 생각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국가에서 양성하는 삼영(三營)의 군대가 한 해에 7만여 명이 되는데, 만일 국력이 여유가 있고 군량이 어려움이 없다면 많을 수록 더 판비(辦備)하지 못할까 뭐 걱정하겠습니까만, 녹봉을 잇대어 줄 수 없고 경용(經用)을 수습할 수 없으니, 어찌 매우 우려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의논하는 자들이 ‘훈련 도감의 군인 정원은 감소시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종 조의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심지어 결원이 있더라도 보충하지 말라고 요청하여 반드시 사정(査正)하려고 하였습니다. 숙종 조의 고 상신 이단하(李端夏)·민정중은 모두 훈련 도감의 군인은 본래 3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논열(論列)하면서 인하여 쓸데없이 나라의 곡식을 축내는 부류를 제거시키자고 요청하였습니다. 지금 훈련 도감의 군인 5천 명 가운데서, 혹은 1천 명이나 혹은 5백 명을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두 군영에 떼어 주어 한나라의 남·북군(南北軍)의 제도와 같이하고 두 군영 향군(鄕軍)에 있어서는 봄·가을로 본도의 조련을 반드시 해마다 시행한다면 5년에 한 차례 왕래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실효가 판이할 것입니다. 만일 ‘두 군영의 군사를 번(番)세우는 것이 이미 당나라의 부병(府兵)의 의의를 갖고 있으므로 지금 폐지할 수 없다.’고 할 경우 혹은 1초나 혹은 2초를 한결같이 훈련 도감의 승호군(陞戶軍)411) 과 같이 하다면 또한 존양(存羊)의 의의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훈련 도감에서 나누어 소속시킨 뒤에 종래의 급료는 그대로 있을 것이고 두 군영의 보미(保米)는 마땅히 남게 될 것이므로, 삼군문(三軍門)에서 조치하는 방도에 여유가 없을까 걱정하지 않게 되고 균역청의 쌀을 무역하는 폐단도 자연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바라건대 널리 조정의 의논을 물으시어 깊이 재량해 하소서. 가령 수어영(守禦營)과 총융청(摠戎廳)을 나누느냐 합하느냐 하는 논의와 남한성(南漢城)으로 진을 옮기는 의논은 지난번에 성상이 질문하시자 여러 신하들이 이미 말하였습니다. 이 일을 모른 체하고 그대로 놔둘 경우 해가 있을 것이고 과단성 있게 시행할 경우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한번 처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머리와 말미의 수천백 마디의 말은 학문하는 요령과 정치하는 방도가 아님이 없으니, 경의 평일의 혈성을 다 말하였다. 펼쳐서 여러 차례 읽으면서 정사에 시행하려고 생각하였다. 덧붙여 진달한 두 가지도 급선무에 속하니, 경이 묘당의 신하들과 충분히 논의하여 하나의 제도를 만들어주기 바란다. 글로 다 말하지 않으니, 만나서 속에 있는 말은 다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59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0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병법(兵法)

  • [註 407]
    자사(子史) : 제자(諸子)의 책과 사기(史記).
  • [註 408]
    삼강(三講) :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
  • [註 409]
    양대(兩對) : 소대(召對)·야대(夜對).
  • [註 410]
    생획(生劃) : 합격자가 정원수에 미달할 경우에 대비하여 합격 후보자를 정하고 그 득점수를 살려 두던 것.
  • [註 411]
    승호군(陞戶軍) : 해마다 서울 및 각 지방에서 뽑혀 훈련 도감의 정군(正軍)이 되는 병졸.

○辛未/領議政金尙喆上箚曰:

從古聖王, 孰不欲立志? 而苟不擇善, 而固執, 則不爲事物之撓奪者, 蓋無幾矣。 如欲志之必立, 惟在學之不倦。 誠以出治之圖、祈永之謨, 莫不由學故耳。 惟我聖上, 自在春宮, 出入經傳, 上下子史, 罔不分析縷毫, 貫穿微粤。 只緣經筵挾冊之官, 無以備顧問當聖心, 故於是聖心漸懈, 開講間斷。 而三講ㆍ兩對, 列朝之盛事。 勿以聖學之已高, 勿謂法講之應文, 講經傳而察公私、義利之分, 講子史而究治亂得失之本, 爲學爲政, 相爲表裏。 則何患聖志之不立, 聖治之不隆乎? 臣嘗以仁、明ㆍ武三字, 爲殿下獻焉。 竊覵殿下治局껍模, 罔不以是心行是道。 生殺, 人主之大柄, 而雖當惡逆訊鞫, 覆囚勘斷之時, 求生必死, 每存寧失不經之義, 仁之至也。 一日萬幾, 國事至繁, 而必先處晦觀明, 處靜觀動, 萬物情狀, 畢露於前, 故大小畏服, 不敢售欺蔽之計, 明之至也。 以極泰之運, 當極艱之會, 以至安之位, 經至危之時, 而不動聲色, 處之雍容, 談笑之間, 底定禍亂, 武之至也。 雖然, 如或寶齡漸高, 志不帥氣, 仁之過而漸近於煦濡姑息, 明之過而漸近於煩苛聰察, 武之過而漸近於威怒嚴急, 則是豈愼終如始之道哉? 臣敢以, 弘毅致遠寬裕不迫八字, 庸替丹扆之箴, 惟願益留聖意。 目今最可悶者, 上下之誠信不孚也, 朝廷之風習不正也。 世故多端, 形迹是拘, 劾一人, 而未必出於公好惡, 論一事而未必出於眞是非。 虛僞成習, 湊泊無期。 風節之委靡, 何以抖擻;廉恥之牿亡, 何以激勵;紀綱之頹弛, 何以扶植;言路之雍閉, 何以開導, 此在君上之導率如何。 必須審好惡於誠僞之間, 卞是非於疑似之際, 上下之間, 情志相孚, 朝廷之上, 風習自正。 則上所陳諸條, 不期變而自變矣。 噫! 三司合辭之至今相持, 一例靳許, 出場無期。 以致隄防不嚴, 義理易晦, 寧不澟然? 爲今之道, 不可不允其當允, 勘其當勘, 使公議夬伸, 臺啓盡了, 豈非國家之急務乎? 至若舊染維新之敎, 大哉言乎。 嘗聞自點器遠之獄, 苟無顯露難赦之罪, 雖族姻素親之人, 未嘗有連累之端, 以其罔治之義, 開其歸化之路。 此固聖念所在, 聖敎所及者。 緩急、舒慘, 必益留神, 以定人心, 以鎭世道。 噫! 我朝取士之法, 最重式年之科。 聚爲其選, 取講製全才之意。 而惟彼製述之士, 盡誦七書, 則雖盡一生, 而成功未易, 故京華子弟, 應擧絶少, 三十三人之榜, 幾盡無實用之人也。 仁廟朝故相趙翼, 至請變背講爲臨講, 專取文義。 肅廟朝故相南九萬, 請行四書一經之講。 閔鼎重亦獻講主正文, 製取生畫之議。 今若取原額中幾窠, 別爲三經會試, 多得貫通三經之人, 則雖今日釋褐, 明日置之橫經之列, 其無愧可知。 惟願, 博詢廷議, 講成節目。 噫! 國不可無兵, 兵不可無食, 而若冗兵、冗食, 徒爲蠧國病民之資, 則豈可一向恬嬉, 不思所以矯革之道乎? 卽今國家之養三營兵者, 歲計爲七萬餘, 若使國力有裕, 兵食無艱, 則何患不多多益辦, 而廩料莫可支繼, 經用無以收拾, 寧不大可憂悶? 自古論者曰: ‘都監軍額, 可減也。’ 顯廟朝先正臣宋時烈, 至請有缺勿補, 必欲査正。 肅廟朝故相臣李端夏閔鼎重, 皆論列訓局兵, 本不過三千, 仍請汰減冗食。 今都監五千之中, 或以各一千, 或以各五百, 劃屬禁ㆍ御兩營, 如漢南北軍之制, 至於兩營鄕軍, 春秋本道之操鍊, 必將年年行之, 比之五年一次之往來, 實效較然。 若以爲兩營兵番上, 旣寓家府兵之義, 今不可廢閣。 云爾則或以一哨, 或以二哨, 一如訓局陞戶, 則亦不失存羊之義, 而自都監分屢之後, 自來元料, 其將自如, 兩營保米, 當爲剩餘。 三軍門措置之道, 不患不有餘。 均廳貿米之弊, 自可永祛。 惟願博詢廷議, 深入睿裁焉。 如守ㆍ摠分合之論, 南漢出鎭之議, 向來聖詢之下, 諸臣已言之矣。 此事, 恝然置之則有害, 斷然行之則有益。 一番處分, 斷不可已也。

批曰: "首尾屢千百言, 無非進學之要、做治之方道。 盡卿平日血忱。 披復屢回思欲措之爲政。 附陳二叚, 亦屬急務, 冀卿之與廟堂諸臣, 雜議爛商, 以成畫一之制。 書不盡言, 面可罄懷。"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59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0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병법(兵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