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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10권, 정조 4년 11월 4일 무인 2번째기사 1780년 청 건륭(乾隆) 45년

서장관 조정진이 열하의 실정을 보고하다

중국에서 돌아온 서장관 조정진(趙鼎鎭)이 보고 들은 일을 적어 올렸는데,

"1. 열하(熱河)는 역주(易州) 승덕부(承德府)에 있습니다. 연경에서 북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가 남천문(南天門)에 이르면 높은 고개가 가로막았는데, 그 위 조금 터진 곳에다 성을 쌓아 막았으니, 이 역시 북변에 하나의 큰 관문입니다. 그리고 남천문에서 나가 1리쯤 가면 고북하(古北河)가 있으며, 고북하를 건너 10여 리를 가면 첩첩이 쌓인 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르고 동북쪽으로 치달려 성첩(城堞)이 석각(石角)에 구불구불 연이어 있는데, 여기가 바로 만리 장성의 고북구(古北口)입니다. 성밖에는 또 중성(重城)이 있는데, 그 주위가 7, 8리쯤 되었고, 중성의 밖 산허리로 길이 구불구불 나 있는데, 두 수레가 나란히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열하까지는 2백여 리인데, 양쪽의 산이 길을 끼고 있어서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가 열하에 이르러 지형이 조금 넓어졌습니다. 대체로 열하에서 동쪽 산해관(山海關) 밖 대릉하(大凌河)까지는 5백여 리인데, 북쪽으로 몽고(蒙古) 땅과 백여 리를 연접하였습니다. 행궁(行宮)에는 단청(丹靑)은 칠하지 않고 ‘피서 산장(避暑山庄)’이란 편액을 붙였는데, 다만 짧은 담장만 있고 성은 없었습니다.

1. 북경성 안에 불포자(佛鋪子)가 있는데, 물건을 서로 사고 팔았습니다. 조정 신하들이 이 것을 이용하여 물건을 바쳤고 황제도 이것을 사용하여 귀한 신하들에게 상을 하사하였습니다. 천추절(千秋節) 새벽에 진공(進貢)이 있었습니다. 가자(架子)에 누런 수건을 덮고 거기에다 금불상 하나를 담았는데, 그 길이가 몇 자쯤 되었습니다. 이를 마주 들고서 대궐 안으로 들어갔는데, 호부 상서 화신(和珅)이 올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서번(西蕃)의 승려 액이덕니(額爾德呢)는 42세(世)의 전신(轉身)이라 자칭하였습니다. 황제가 육황자(六皇子) 및 내각 학사(內閣學士) 영귀(永貴)를 파견하여 후한 폐백으로 맞아다가 금옥(金屋)에다 두고 어상(御床)에 같이 앉았습니다. 내무부(內務府)에서 그에게 제공하는 음식이 한결같이 황제와 같았으며, 귀신(貴臣) 각로(閣老) 이하가 모두 달려가서 섬겼습니다. 서번 승려의 나이는 43세로 석명(釋名)은 도행(道行)이었는데, 경계를 지키지도 않은 채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습니다. 그의 제자로 북경에 온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1. 몽고 48부락(部落)이 가장 강성하여 몽고의 왕이 새로 즉위하면 공주를 시집보냈습니다. 몽고 사람은 청인(淸人)·한인(漢人)과 같이 벼슬을 하였는데, 부마(駙馬)가 된 자도 여러 사람이었습니다. 몽고의 왕이 조회하러 들어올 때마다 은밀히 영기(令旗) 밑에서 그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였는데, 대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풍속이 더욱 서번의 승려를 공경하여 신명(神明)처럼 두려워하였습니다. 황제가 서번의 승려를 존중하는 것에 대하여 사민(士民)들 중에 약간 지식이 있는 자는 너나없이 거리에 모여 ‘황제가 이 승려로 하여금 몽고를 진압하려고 이처럼 비상한 예우를 한다.’고 비방하였습니다.

1. 황제가 거둥할 때 타는 황색 비단 덮개의 사인교(四人轎)는 조정 신하들이 타는 것과 차이가 없고 다만 황색과 흑색의 구별만 있었습니다. 궁시(弓矢)와 칼을 차고 말을 타고서 앞에서 인도하는 자는 십쌍(十雙)이 채 되지 않았고 수행 관원도 5, 60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맨 뒤에는 후궁이 타는 태평거(太平車) 두 대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짐바리는 거의 수천 대나 되었고 낙타는 그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도로를 닦을 때는 띠를 엮어 흙을 치고 맷돌을 굴려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수백 리 안의 장정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역사에 나가는 것이 가장 큰 민폐였습니다. 황제가 경유하는 각 고을은 조세를 감면해 주기는 하였으나 일묘(一畝)당 수십문(數十文)에 불과하므로 혜택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1. 열하의 희대(戱臺)는 행궁의 안에 있는데, 층각(層閣)이 크고 사방으로 통하였습니다. 좌우에 나무로 새긴 모형의 산이 있었는데 그 높이가 층각과 같았으며, 선과(仙果)와 주수(珠樹)는 오색 비단을 잘라서 만들었습니다. 놀이의 대본은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 대본은 모두 열여섯 기예가 있었습니다. 이를 묘시(卯時)에 시작하여 미시(未時)에 파하는데, 무릇 5일 만에 끝이 났습니다. 대체로 축수하는 말이 많았는데 거개가 난잡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우정(虞庭) 팔일(八佾)의 춤과 같은 경우는 다만 무무(武舞)만 있는데, 무사 64명이 모두 쇠로 만든 투구와 비단 갑옷을 착용하고 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에는 창을 들은 뒤 앉았다가 일어나며 공격하여 찌르는 형상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요(堯)·순(舜)을 두고서 놀이를 하였는데, 황옥(黃屋)에 태우고 면복(冕服)을 착용시켜 화봉(華封)창오산(蒼梧山)에 순행하는 형상을 하였습니다. 질나팔[壎]과 북[鼓] 등의 악기는 없고 그 소리가 슬프고 낮아 너그럽고 화평한 의미가 없었습니다.

1. 병부 상서 복융안(福隆安), 호부 상서 화신(和珅)이 황제의 총애를 받아 용사(用事)하였고 각로 아계(阿桂)의 무리는 자리나 채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화신만주 사람으로 난의위(鑾儀衛)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파격적으로 발탁되어 총애가 비할 데 없었습니다. 사람됨이 교활하여 비위를 잘 맞추었습니다. 나이 31세에 호부 상서(戶部尙書) 구문 제독(九門提督)이 되었는데,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섯 살난 딸을 그의 아들과 정혼(定婚)하였습니다. 성격이 또 앙큼하고 표독하여 조금만 혐의나 틈이 있으면 반드시 중상 모략을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흘겨 보았습니다. 원임 각로 이시요(李侍堯)이여백(李如栢)의 후손(後孫)인데, 황제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아 평소 화신을 아이처럼 대우하자, 화신은 앙심을 품었습니다. 연전에 이시요가 운귀 총독(雲貴總督)이 되었는데, 귀주 안찰사(貴州按察使) 해명(海明)이 심양 봉천 부윤(瀋陽奉天府尹)이 되어 북경에 들어와 사은(謝恩)하고 나서 두루 화신까지 찾아가 인사를 하였습니다. 화신이 사사로이 이시요의 동태를 묻자, 해명이 말하기를, ‘이시요가 끝없이 탐욕이 많으므로 그에게 견책을 당할까 두려워서 일찍이 황금(黃金) 2백 냥을 뇌물로 바쳐 생일에 축수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화신이 틈을 타서 이를 황제에게 아뢰고 이어서 조사하겠다고 청하여 장물(贓物) 수만 냥을 가지고 있다며 목을 베자고 극력 요청하니, 황제가 이시요를 형부에 가두고 그의 가산(家産)을 몰수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의 집에 황금불(黃金佛) 세 개와 진주 포도(眞珠葡萄) 1가(架)와 산호수(珊瑚樹) 넉 자짜리 3주(株)가 있었는데, 이것은 이시요가 바쳤던 물건을 도로 되돌려 준 것들이었습니다. 대체로 번진(藩鎭)에서 바치는 것은 9종의 물건이 있는데, 그때마다 3종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대체로 이시요가 탐욕부린 물건 중 5분의 3은 바친 데 들어갔기 때문에 황제가 내심으로는 용서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화신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서 각성(各省)의 총독 및 주현(州縣)의 관원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처벌하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의논하‘도록 하였으며, 해명은 금을 뇌물로 바쳤기 때문에 그도 흑룡강(黑龍江)의 군대에 충원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시요의 탐오는 비록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하나 화신의 아뢴 것도 또한 그가 사사로운 혐의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조사할 때에 이르러 각박하게 하려고 힘썼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정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그의 세력이 두려워서 감히 살려 주자는 의논을 펴지 못하였습니다.

1. 각로 우민중(于敏中)은 본래 청렴 정직하다고 소문이 나서 황제가 신임하였습니다. 내각(內閣)에 들어가 수십 년 동안 있으면서 비록 말할 만한 사업은 없었으나 백성의 칭찬 또한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첩 장씨(張氏)가 집안의 재산을 사사로이 분배하여 우민중의 조카 우사격(于士格)에게 몰래 주고 그 손자에게 준 것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손자가 복융안(福隆安)에게 하소연하니, 복융안이 황제에게 아뢰었습니다. 황제가 화신으로 하여금 그의 가산을 조사하게 하였더니, 주택, 전원 및 비녀, 팔찌, 의복 등속과 우사격이 갖고 있는 금·은 모두 합하여 따지면 2백만 냥이나 되었습니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짐이 수십년 동안 우민중에게 일을 맡겨 그가 청렴하고 정직한 줄로 알았는데, 어찌 그렇게 많은 재산이 있단 말인가?’하고, 그의 가산을 적몰하라 명하였으며, 장씨의 삼품 부인(三品夫人) 고명(誥命)을 빼앗고 곡부(曲阜) 공자묘(孔子廟)의 노비로 삼아 그로 하여금 보고 느끼게끔 하였다고 합니다.

1. 신이 연경에서 출발하기 며칠 전에 어떤 죄인이 순직문(順直門) 밖에서 살을 깎아내는 형을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임역(任譯)으로 하여금 알아보도록 하였더니, 산서성(山西省)에 사는 사인(士人)이 행재(行在)에 글을 올려 7조(條)를 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두 다 바로 황제의 잘못을 진달한 것이었는데, 그 중 세 조항은 ‘바로 토목 공사를 그치지 않는 것, 절도가 없이 순시하는 것, 서번 승려에게 예우를 지나치게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황제가 매우 노하여 즉시 서울에 있는 형부에 회부하여 산 채로 살을 깎아냈으며, 서본(書本)은 숨기어 선포하지 않고 그의 성명도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93면
  • 【분류】
    외교-야(野)

    ○回還書狀官趙鼎鎭, 進聞見事件。 一, 熱河在於易州 承德府。 自燕京北行二百餘里, 到南天門, 峻嶺橫塞, 上有小缺, 築城障之, 亦塞北之一大關阨, 而出南天門一里許, 有古北河。 渡河十餘里, 疊嶂揷天, 奔馳東北, 城堞逶迤於石角, 卽萬里長城之古北口也。 城外又有重城, 周廻可七八里。 重城之外, 路轉山腰, 車不方軌。 從此至熱河二百餘里。 兩山挾路, 或闊或狹, 至熱河, 地形稍廣。 蓋自熱河東抵山海關大凌河, 爲五百餘里。 北接蒙古地百餘里。 行宮, 不施丹艧, 扁以避暑山庄, 只有短墻而無城。 一, 京城內, 有佛舖子, 互相賣買。 朝臣用此作爲貢獻, 皇帝亦以賞賜貴臣。 千秋節晨朝, 有進貢。 覆黃帕架子, 盛以金佛一座, 長可數尺許。 舁入闕中, 聞是戶部尙書和珅所獻。 西蕃額爾德呢, 自稱四十二世轉身。 皇帝遺六皇子及內閣學士永貴, 厚幣邀致, 置之金屋, 同坐御床。 內務府供饋, 一與皇帝等。 貴臣閣老以下, 莫不趨走服事。 蕃僧, 年方四十三, 釋名道行, 亦不持戒飮酒食肉, 其徒到京者, 千餘人。 一, 蒙古四十八部落, 最爲强盛。 王新立, 則以公主嫁之。 蒙人通同仕宦, 而爲駙馬者, 亦數人。 每王入朝, 則陰令旗下, 伺察其動靜, 蓋畏之也。 其俗尤敬僧, 畏之如神明。 皇帝之尊重僧, 士民之稍有知識者, 莫不巷議, 以爲: ‘皇上欲令此僧, 鎭壓蒙古, 故有此非常之禮’。 一, 皇帝行幸時, 所乘黃屋四人轎, 與朝臣所乘無異, 只有黃黑之別。 帶弓矢、佩劎, 騎而前遵者, 未滿十雙, 從官不過五六十人。 最後, 後宮所乘太平車二輛而已。 輜重幾至數千輛。 橐駝不知其數。 治道則編茅飾土, 轉磑磨堅。 數百里內, 丁夫裹糧赴役, 最爲民弊。 所經各縣, 蠲其租稅, 而不過一畝數十文, 不足爲惠。 一, 熱河戲臺, 在行宮之內, 層閣宏敞, 左右木刻假山, 高與閣齊。 仙果、珠樹, 剪綵爲之。 戲本有五, 一本共有十六技。 卯而始, 未而罷, 凡五日而止。 大抵多祝壽之辭, 而率皆雜亂。 如庭八佾, 只有武舞。 武士六十四人, 皆着金盔錦甲, 右手持劎, 左手執戈, 爲坐作擊刺之狀。 甚至以爲戲, 乘之黃屋, 着以冕服, 爲華封蒼梧巡幸之狀。 樂無土革之器, 其聲噍殺, 無寬緩和平之意。 一, 兵部尙書福隆安、戶部尙書和珅, 貴幸用事, 閣老阿桂之屬, 充位而已。 和珅, 滿洲人, 屬鑾儀衛, 不次陞擢, 寵幸無比。 爲人狡黠, 善於逢迎, 年方三十一, 爲戶部尙書九門提督, 而以最所鍾愛之六歲皇女, 定婚於其子。 性又陰毒, 少有嫌隙, 必致中傷, 人皆側目。 原任閣老李侍堯李如栢之後孫, 而爲皇帝所信任。 年老位高, 平日兒畜和珅, 銜之。 年前侍堯爲雲貴總督, 而貴州按察使海明, 爲瀋陽 奉天府尹, 入京謝恩, 歷辭和珅, 私問侍堯動靜, 海明言; ‘侍堯貪濁無厭, 畏其誚責, 嘗賂黃金二百兩, 爲壽於生日。’ 乘間奏之。 仍請按驗執贓累萬, 力請斬之。 皇帝命囚刑部, 籍其家貲。 有黃金佛三座、眞珠葡萄一架、珊瑚樹四尺者三株。 此是侍堯進貢物件, 而還給者也。 蓋藩鎭貢獻, 有九種物, 則每以三種還給。 大抵侍堯貪贓中, 五之三, 入於進貢, 故皇帝心欲宥之, 而重違意, 詔諭各省摠督及州縣官, 議其置法當否, 以海明之賂金, 亦令充軍於黑龍江侍堯之貪, 雖合置法, 和珅之奏, 亦出私嫌。 及其按査, 務從深刻, 故人皆不直之, 畏其勢不敢爲傅生之論。 一, 閣老于敏中, 素以廉直聞, 皇帝信任之。 入閣數十年, 事業雖無可言, 民譽亦頗不衰。 身故之後, 其妾張氏, 私分家財, 潛給敏中之從子士格, 而其孫則所分甚少。 其孫訴之福隆安隆安以聞皇帝, 使和珅, 査其家貲, 幷計第宅、田園及釵、釧、衣服之屬, 與士格之所藏金銀, 合爲二百萬。 皇帝大怒曰: ‘朕任敏中數十年, 知其爲廉直, 安得有許多貲?’ 命籍沒其家産, 奪張氏三品夫人誥命, 爲婢於曲阜 夫子廟, 使之觀感云。 一, 臣於燕京離發前數日, 聞有罪人之剮臠於順直門外者, 使譯探問, 則山西省士人, 上書行在論七條, 皆是直陳闕失, 而其中三條, 卽土木之不息也, 巡遊之無節也, 番僧之過禮也。 皇帝震怒, 卽付在京刑部, 生而臠割之。 書本, 秘不宣布, 姓名亦無傳說。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93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