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에서 강릉 맞은편의 백성 무덤을 이장토록 청하였으나 허락치 않다
예조에서 강릉의 안산에 보이는 백성의 무덤을 파서 옮길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사체는 진실로 매우 중대하지만 능(陵) 경내의 가까운 지역과는 차이가 있다. 땅을 평평하게 하는 것과 파서 옮기는 것을 막론하고 모두 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효종조무술년375) 의 수교(受敎)는 어찌 오늘날 마땅히 준수해야 할 바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석물(石物)은 숙종조의 선례에 따라 다만 능에서 보이는 곳만 철거하고 땅을 평평하게 하거나 파서 옮기는 것에 있어서는 논할 것이 없을 듯하니, 대신에게 문의하고 나서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신에게 문의해 보았습니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능침 경계 밖의 무덤은 파서 옮기지 말라고 한 효종조의 수교가 있었습니다. 의릉(懿陵)에서 바라다 보이는 앞산에도 고총(古塚)이 있는데, 이는 능침을 모시기 전에 장사지냈고 또 선왕조에서 파내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능에서 바라다 보이는 석물(石物)은 철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또한 숙종조의 고례(古例)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범장(犯葬)한 곳은 이미 본릉의 화소(火巢)376) 밖이고 보면 땅을 평평하게 하는 것과 파서 옮기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고 성상께서 하교하셨으니, 그 누가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석물에 있어서는 비록 능의 경내와는 다르기는 하나 앞산 뻔히 바라다보이는 곳은 결코 그냥 둘 수 없습니다. 해조(該曹)의 신하를 파견하여 지방관과 같이 가서 철거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서명선(徐命善)은 말하기를, ‘각 능의 봉표(封標) 밖은 비록 앉고 설 때 보이는 곳이라 하더라도 거론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곧바로 능을 봉하기 전에 있는 고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 강릉의 앞산은 비록 봉표의 밖이라고는 하지만 촘촘한 여러 무덤이 이미 서로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있고 보면 마주 보이는 막중한 앞산에 백성들의 투장(偸葬)을 금지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미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오늘날 한꺼번에 여러 무덤을 평평하게 만들거나 파서 옮긴다는 것은 과연 성상의 하교처럼 곤란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만 석물을 철거하고, 이 뒤로 만일 새로 장례지내는 자가 있을 경우 능관(陵官)이 이를 적발하여 예조에 보고하면 장사지낸 곳을 즉시 파서 옮기고 범한 자는 법에 따라 죄를 부과하며 또 혹시 즉시 발각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해당 능관을 발각되는 대로 엄중하게 처벌하는 일을 거듭 밝혀 규식으로 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고, 우의정 이휘지(李徽之)는 말하기를, ‘능침에서 서로 보이는 곳에 무덤의 촘촘한 모양이 완연(宛然)히 드러나는데, 비려두고 묻지 않는 것은 사리에 온당하지 않습니다. 능침을 쓰기 이전에 매장(埋葬)한 것은 비록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설치된 석물이 앉거나 누운 데서 서로 바라다 보이는 새로 생긴 무덤은 모두 평평하게 만들되, 만일 자손이 이장하고자 할 경우에는 원하는 바에 따라 허락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영돈녕부사 이은(李溵)은 말하기를, ‘능침은 사체가 지극히 경건하고 지극히 중대하니, 앉거나 선 데서 보이는 것은 막론하고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장사지낸 자도 일체 파내는 것이 법에 있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번 강릉 앞산의 촘촘한 무덤들은 혹 세월이 오래된 것도 있고 주인이 없는 것도 있으니, 모조리 파서 옮기거나 평평하게 만든다는 것은 정말 성상의 하교처럼 곤란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석물을 지금까지 철거하지 않은 것에 있어서는 나라의 사체에 관계되니, 바라다 보이는 곳만 철거하라는 하교는 훌륭한 말씀이므로 신은 진실로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정홍순(鄭弘淳)은 말하기를, ‘비록 봉표의 밖이라 하더라도 만일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이라면 마땅히 금지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강릉은 화소(火巢) 밖 바라다 보이는 곳에 백성의 무덤 숫자가 매우 많으므로 석물이 있는 것은 철거하고 그밖에 여러 무덤은 일률적으로 평평하게 만들거나 파서 옮기는 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처럼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건대, 능침을 모시기 전에 이미 매장한 자는 비록 불문에 부치더라도 괜찮겠으나 만일 능침이 들어선 이후에 매장한 자까지 한결같이 놔두고 거론하지 않을 경우 이왕의 범죄는 우선 놔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후일의 매장을 금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오래 된 무덤과 얼마 안된 무덤을 조사 구분하여 마땅히 평평하게 만들어야 할 것은 지나치게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대신의 의론이 이와 같으니, 전하께서 재량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단지 능에서 앉거나 섰는 데에서 보이는 곳에 대해서만 석물을 철거하고 파서 옮기는 것과 평평하게 만드는 것은 거론할 것도 없거니와, 이 뒤로는 과조(科條)를 엄중하게 제정하되, 영을 반포한 뒤에 발각된 자는 엄중하게 다스리게끔 정하고 나서 이를 여러 능관에게 엄중하게 신칙하라. 대체로 금지 조항을 어기고 매장한 여러 무덤은 진실로 법을 두려워하지 않은 소치이기는 하나, 나의 생각에는 더러 법을 알지 못하여 그런 경우도 많으리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능을 관리하는 무리가 이 구절을 빙자하여 이미 매장한 사람들의 무덤을 조종하여 혹시 보고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아울러 능관까지 처벌하도록 하라. 이미 매장할 때에 사정에 따라 금하지 않았다가 또 금할 때에 사정에 따라 농간을 부린다 면 어찌 너무나도 심하게 무상(無狀)한 것이 아니겠는가? 똑같이 중히 신칙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90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풍속-예속(禮俗)
○禮曹啓請康陵案山所見民塚掘移。 敎曰: "事體固甚至重, 而與垓內近地有異。 無論平土與掘移, 俱是不容已之重, 況有孝廟朝戊戌受敎, 豈非今日之所宜遵守乎? 然則, 石物依肅廟朝已例, 但於陵上望見處撤去, 至於平土掘移, 恐無可論。 問議大臣稟處。" 禮曹啓言: "問議于大臣, 則領議政金尙喆以爲: ‘陵寢垓子外墳塚, 勿爲掘移, 旣有孝廟朝受敎。 懿陵案山相望處, 亦有古塚, 以其陵寢前入葬, 又有先朝勿掘之敎。 陵上望見處石物之不得不撤去, 亦有肅廟朝古例, 而今此犯葬, 旣是本陵火巢之外, 則平土掘移之有所持難, 聖敎之下, 孰不欽仰? 而至於石物, 雖與垓內有異, 案對望見處, 決不可仍置者。 發遣該曹之臣, 眼同地方官, 撤去爲宜。’ 左議政徐命善以爲: ‘各陵封標之外, 則雖坐立相見處, 曾無擧論者, 乃是封陵前古塚之謂也。 今此康陵案山, 雖曰封標之外, 纍纍衆塚, 旣在相望之地, 則莫重對案, 民葬之不爲禁斷, 誠極寒心。 而旣已年久之後, 到今一時衆塚之平土掘移, 果涉重難, 誠如聖敎。 只於相望處, 撤去石物, 此後如有新葬者, 陵官摘奸報禮曹, 葬處登時掘移, 犯者照律科罪, 又或未卽發覺? 當該陵官, 隨現重繩事, 申明定式, 恐不可已。’ 右議政李徽之以爲: ‘陵寢相見處, 纍纍之形, 宛然呈露, 置而不問, 事理未安。 國陵前入埋者, 雖不擧論, 而象設坐臥相見處所在新塚, 竝令平土, 若有子孫之欲爲移葬者, 依願許之, 恐合事理。’ 領敦寧府事李溵以爲: ‘陵寢事體, 至敬至重。 勿論坐立, 凡於望見處入葬者, 一切掘去, 在法當然。 而今此康陵案山之衆塚纍纍, 或有年久者, 或有無主者, 盡行掘移, 與平土之重難, 誠如聖敎。 至於石物之迄今未撤, 有關國體。 但於望見處撤去之敎, 大哉王言, 臣誠欽仰。’ 領中樞府事鄭弘淳以爲: ‘雖是封標之外, 若相見處。 則在所當禁。 康陵火巢外望見處民塚其數甚多, 有石物者撤去外, 衆塚一切用平土掘移之律, 有難擧論, 誠如聖敎。 第念陵寢以前已葬者, 雖屬不問之科, 猶或可也。 若竝與陵寢以後入葬者, 而一例置而不論, 則已往罪犯, 姑舍勿論, 日後犯葬, 無以禁防。 就其中査別久近, 合爲平土者, 不必過用矜恤之典。’ 大臣之議如此。 上裁何如?" 敎曰: "只於陵上坐立俱見處, 撤去石物, 掘移平土, 無可論。 此後嚴立科條, 定以令前之限現發者, 重繩, 以此嚴飭諸陵官處。 大抵衆塚之冒禁葬埋, 固是不畏法之致。 而予則, 以爲或多不知法而然。 到今, 陵屬輩, 藉此句叚, 操縱於已葬人塚, 或有入聞之事, 竝與陵官而勘斷。 旣於葬時用情不禁, 又於禁時用情作奸, 則尤豈非無狀之甚也? 一體嚴飭。"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90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