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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0권, 정조 4년 10월 10일 을묘 1번째기사 1780년 청 건륭(乾隆) 45년

규장각에서 《송사전》을 완성하여 올리다

규장각에서 어정한 《송사전(宋史筌)》을 올렸다.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 전적(典籍)을 국조(國朝)의 치법(治法)과 정모(政謨)를 가지고 역대를 상고해 보니 송(宋)나라가 가장 비근하였다. 그런데 탈탈(脫脫)344) 이 편찬한 《송사(宋史)》 이후로 좋은 본(本)을 보기가 드물었으므로, 옛날 사서(史書)를 밤낮으로 연구해 보면서 손수 수정을 가하여 점차 편질(編帙)을 갖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번거로운 것을 삭제하고, 잡된 부분을 제거하여 생략하면 하였지 첨가하지 않는 것으로 서례(書例)를 삼아 놓고 이어서 쓸 것을 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여 몇 차례나 원고를 바꾸었다. 즉위한 뒤에 일찍이 빈료(賓僚)를 맡았던 여러 신하들을 명하여 나누어 맡겨 편수하게 하였다. 이어서 다시 사실을 주워 모아 의의를 부여하고 의리에 근거하여 사례를 정하니, 규모가 차츰 넓어졌고 재작(裁酌)이 점차로 많아져서 영원히 전할 수 있는 책이 편찬되었다. 신해년345) 에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서 필사하고 교감 대조하게 한 뒤 비부(秘府)에 보관하였다. 대개 성상의 뜻은 사서를 저술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여겨 유보하고 즉시 간행하지 않았던 것이다.【봉조하 서명응(徐命膺) 등이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규성(奎星)이 시운에 응하여 찬란한 문장의 큰 계획이 열리었고, 옥당에서 공을 거두자 수정된 옛날의 사서(史書)가 편찬되었습니다. 기록이 매우 잘 갖추어졌고 문헌의 고증이 충분하였습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사서를 편찬하는 방도가 세 가지가 있고 기록하는 법규도 하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전기(傳紀)와 표지(表志)에 19대의 사실을 뽑은 것은 동일하지만, 취하고 버리며 놔두고 삭제하는 것은 23가(家)가 설정한 범례가 다른 점도 있습니다. 무릇 그 편찬의 잘잘못은 학식의천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에게도 오히려 비난함에 있어 순수함과 결함이 서로 나타났는데, 더구나 한(漢)·위(魏) 이후의 작자는 체제가 많이 어긋났음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정관(貞觀) 때 당 태종(唐太宗)이 직접 《진서(晉書)》를 편찬하면서 과거 사서의 잘못된 점을 두루 지적하였고, 가우(嘉祐) 때 송 인종(宋仁宗)이 《당기(唐紀)》를 개편하라고 명하면서 상당히 구문(舊文)을 줄였습니다. 지난 시대에 기술과 저작의 공정이 있었습니다만 어찌 이 《송사전》처럼 의례가 올바른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타고난 예지로 학문의 조예가 날로 새로워지셨습니다. 대본(大本)이 세워져 달도(達道)가 시행되니 심법(心法)이 한결같고, 화순(和順)이 쌓여서 영화(英華)가 발로되니 문장이 찬란하였습니다. 학문은 구경(九經)346) 을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었고 정치는 여러 사서를 관통하였습니다.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을 훤히 보아 은미한 말뜻에 관해 시원히 깨달았고, 제왕과 패자(覇者)를 두루 상고하여 지난 사적들을 모두 통촉하셨습니다. 사리를 종합하여 파악하니 시비와 선악이 엄폐되지 않고,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처리하느라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을 연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성상께서 《송사(宋史)》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정사의 규모가 우리 동방과 비슷하였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세상에 교화가 밝아지자 상벌이 충후(忠厚)의 지극함을 본받았고, 가정의 법도가 근엄하여 수신(修身)·제가(齊家)가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염(濂)·낙(洛)·관(關)·민(閩)347) 의 성리학 연원은 다행히 우리 나라 선현들이 천명하였고 한(韓)·범(范)·마(馬)·여(呂)348) 의 공엄과 명절(名節)은 우리 나라 사대부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음과 양이 번갈아 사그라들고 자라나는 기미에 관해 오늘날 마땅히 경계해야겠습니다만, 우주에 존양 양이(尊王攘夷)의 의리로 버티는 그 일은 또 불행히도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교화와 정치만 대략 비슷하겠습니까? 아니 풍속도 서로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동떨어진 세상의 감회가 다른 조정에 비할 수 없으시어 오래 마음을 쏟은 공부는 세자로 계실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사학가가 출현하지 않아 여전히 구본에 헛점이 많은 것을 한스러워하셨습니다. 말을 너무나도 세세히 기록한 것은 이미 사서의 체통을 상실하였고 사건을 너무나도 간략하게 서술한 것은 공문의 글을 베낀 것 같았습니다. 원편(原編)은 이미 원(元)나라 때 완성된 것이므로 애당초 믿을 수 있는 기록이 아니었습니다만, 홍무(洪武)349) 시대에 미처 다시 편찬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완비된 책이 없었습니다. 속기(牘紀)와 속감(續鑑)이 병행되어 체제가 저절로 다르고, 사보(史補)와 사질(史質)이 잇따라 저작되었는데 자세함과 간략함이 타당성을 잃었습니다. 이에 성상께서 천지를 다스리는 문장으로 《춘추(春秋)》 포폄의 법을 특별히 부여하셨습니다. 놔두어야 할 것과 삭제해야 할 것을 저울로 달듯이 따졌으므로 밝은 해·달과 합치되었고, 포폄을 곤월(袞鉞)로 자세히 살펴서 하였으므로 조화는 묘리를 같이 하였습니다. 제가(諸家)의 글을 수집하여 빠진 사건을 간간이 보충하였고, 뭇 사서를 모아 놓고 좋은 규례를 널리 취하였습니다. 혹은 불을 켜 놓고 문안드릴 때와 수라드실 때의 여가에도 피로를 잊었고, 혹은 책상을 대하여 조연(朝筵)과 야강(夜講)의 끝에 수라드는 것을 잊으셨습니다. 이렇게 10년 동안 공력을 들인 끝에 일부의 서례(序例)를 결정하셨습니다. 이제(二帝)350) 를 존중하고 삼노(三虜)351) 를 억제함으로써 만세의 큰 법을 세웠으며, 뭇 보필의 신하를 끌어올리고 다섯 명의 현인을 표출해냄으로써 과거의 사서에서 빠뜨린 전장을 구비하였습니다. 본기(本紀)에 후비를 짜지어 놓은 의의는 건곤(乾坤)에서 취하였고, 세가(世家)에다 종실을 배열한 것은 황족(皇族)의 계파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민(遺民)들이 자신의 도리를 다하여 나라에 보답한 의리를 천명하자 지사(志士)의 옷깃에 눈물이 젖었고, 간사한 것들이 파당을 지은 것에 대한 평가를 엄히 내리자 역적들이 두려워할 줄을 알았습니다. 귀화(歸化)한 자들을 편입하면서 구씨(九氏)의 순으로 하였고, 불복(不服)한 사람들을 표출해내어 삼충(三忠)의 순서별로 하셨습니다. 오행(五行)의 재상과 상서를 분변하여 예측에 대비하였고, 칠요(七曜)352) 의 능멸과 침범을 분간하여 추수(推數)를 대략 거론하셨습니다. 예는 절문(節文)을 보충하자 각의(閣儀)가 찬란하게 정연하였고, 음악의 조리를 정하니 구율(舊律)의 화음만 취하셨습니다. 지형을 소상히 기록하여 드디어 양경(兩京)353) 의 궁전까지 적었는가 하면, 수리(水利)를 두루 서술하면서 구하(九河)의 관개와 조운에 관해 가장 자세히 하셨습니다. 경적(經籍)을 숭상하고자 예문지(藝文志)의 명칭을 개정하였고, 이단(異端)을 통일하고자 방기(方技)의 명목을 바꾸었습니다. 인재의 선거(選擧)에 전주(銓注)를 기록하면서 당연히 참고해 보았지만, 관직의 품계를 늘여 놓으면서도 대부분 옛날 것을 그대로 썼습니다. 의위(儀衛)와 여복(輿服)의 크고 작은 것을 망라하여 빠뜨리지 않았고, 식화(食貨)와 병형(兵刑)의 번잡한 것은 애써 제거하셨습니다. 이를 일러 바다처럼 포함하고 땅처럼 실었다고 한 것이니, 어찌 대강(大綱)을 들면 세복(細目)이 분간되는 것뿐이겠습니까? 체제가 정대하고 엄격하여 해·별처럼 뚜렷한 수십 종의 의리요, 사리가 갖추어지고 말이 간결하니 문자를 삭감한 것이 6, 7분이었습니다. 비로소 한 시대의 완전한 책이 있게 되어 마치 노(魯)나라에 주례(周禮)가 모두 있는 것과 같아, 반드시 후세의 왕들이 법으로 삼을 테니 어찌 하대(夏代)가 은대(殷代)와의 멀지 않는 것뿐이겠습니까? 편찬할 때 고심을 많이 한 것에서 사실 위대한 성인의 제작을 우러러보게 되었고, 혹시라도 교정이 잘못되었을까 염려하여 다시 옛날의 궁료들이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다행히 삼주(三晝)354) 의 토론에 따라서 역대의 치란을 엿보았습니다. 세상의 일을 논하여 정사를 알아보는 데에 상고할 만한 과거의 사서가 없지 않으나, 시기에 따라 일을 알맞게 처리하는 데에는 이 책보다 더 긴요한 것은 없습니다. 성상께서도 귀감을 보이기 위해 과거의 자취들을 지적하셨습니다. 변경(汴京)은 백여 년 사이에 몇 번이나 파란의 운이 지나갔겠습니까? 강좌(江左)의 7, 8대 사이에 존망의 원인을 궁구할 수 있었습니다. 한 잔의 술을 돌리고 나서 여러 장수들의 권한을 박탈하여 오계(五季) 시대 절도사의 폐단을 제거하였고, 눈바람 속에 태원(太原)의 계책을 자문하여 한자리에서 코를 골며 자게끔 걱정을 풀었습니다. 후세의 문치를 열기 위해 태학에 공자·안자(顔子)를 찬송하는 글을 계시하였고, 근세의 법을 조금 느슨히 함으로써 우전(虞典)355)요(堯)·순(舜)의 마음을 체득하였습니다. 이미 제도가 정해지고 치화(治化)가 이룩되었으므로 근원이 길어 줄기가 멀리까지 퍼졌습니다. 금궤(金匱)에 서명한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오랑캐에 복장으로 바꾸어입어 비난이 있었고, 옥청(王淸)의 상서로움을 자주 맞아들였으나 하늘을 속여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아! 경력(慶曆)356) 의 찬란한 교화는 성군이 거듭나 누차 덕화에 젖은 시기였습니다. 한데에 앉아 향불을 피우자 응험이 금방 나타났고, 천장각(天章閣)에 서찰을 내리자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여 효양(燒羊)을 제공하지 않게 하자 어질다는 소문이 넘쳐 흘렀고, 백성의 질고를 생각하여 사물의 통찰을 아끼지 않은 것은 순수한 성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요화(瑤華)에 한번 흠이 생겨 영원히 금지(金枝)의 수결(數闋)에 전파되었단 말입니까? 견여(肩輿)를 타고 대궐에 나가니 쓸슬하게 몇 상자의 도서(圖書)만 남았고, 난사(鸞司)에 주렴을 거두니 훌륭히도 양궁(兩宮)을 돌보았습니다. 큰일을 할 수 있는 유릉(裕陵)357) 같은 임금이 일을 모르는 왕안석(王安石) 같은 사람에게 저지당하였음을 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개연히 성대한 하(夏)·상(商)·주(周) 3대의 시대처럼 만회하고자 하였으니, 뜻하였던 사업이 어찌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러나 결국 일체 공명과 재리에 빠지고 말았으니, 아! 임금이나 정승이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저버렸습니다. 지붕을 쳐다보고 탄식했으나 부필(富弼)의 상소도 소용이 없었고,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진출하니 등관(鄧綰) 같은 자는 웃거나 욕하거나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어진 사람과 사특한 사람의 세력이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하여 원기가 시들어졌는데, 비유하자면 속병이 점차로 고질화되다가 몹쓸 중상이 겹쳐 나타나는 것과 흡사하였습니다. 동조(東朝)에 교화가 펼쳐져 비록 여러 군자들의 시원스런 논리가 있었지만, 참소가 깊숙이 파고 들어간 통에 시새워 한쪽 사람들이 관가(官家)를 농락하는데 어찌한단 말입니까? 보복하려는 계획이 비로소 시행되자 안팎에다 간당(奸黨)들을 배치하였고, 풍예(豐豫)358) 의 의논이 뒤따라 제기되어 동남(東南)에다 작은 조정을 개설하였습니다. 흑해(黑海)에 배가 통행하는데 그 누가 북쪽을 협공(夾攻)하는 계책을 짰단 말입니까? 청성(靑城)에서 오랑캐의 복장으로 바꾸어 입었으나 군사가 물을 반 정도 건넜을 적에 공격하려는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건너간 진(晉)의 군대가 결국 중흥하려는 하(夏)나라의 군사를 막았습니다. 이는 거의 하늘의 뜻이었으므로 대원수(大元帥)가 외부에 있고 맹태후(孟太后)가 가운데 있었던 것이며, 일이 날로 잘못되어 황잠선(黃潛善)이 좌(左)가 되고 왕백언(汪伯彦)이 우(右)가 되었던 것입니다. 동창(東窓)의 옥사에 세 글자를 가지고 다그쳤던 일은 사람치고 차마 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직각(直閣)의 상소로 만 명의 군대를 물리친 것은 조금 마음에 들었습니다. 비록 당부하였던 것은 유감이 없었지만, 광복의 기회는 이미 잃었습니다. 철장(鐵杖)과 목마(木馬)359) 는 중원을 회복하려는 뜻이었으니 나라의 원수를 어찌 잊을 수 있겠으며, 포삼(布衫)과 소대(素帶)의 누추함이 천고에 씻어졌으니 사당의 호칭이 걸맞았습니다. 장 위공(張魏公)360) 을 장성(長城)처럼 의지하였던 것은 그의 명성이 멀리 났기 때문인데, 주 회옹(朱晦翁)361) 의 상소를 세 번 읽고서 임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을 애석히 여겼습니다. 때마침 걱정과 의심스러운 일을 당하였는데, 자리에서 도피한 승상을 왜 썼단 말입니까? 사직에 공이 있었던 것은 다행히 변화의 대처를 잘하는 종신(宗臣)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하여 큰 간악한 사람이 임금과 사이가 소원했는데도 선류(善類)가 일망 타진이 되었단 말입니까? 전쟁의 빌미가 갑자기 발생하자 첫 번째 진(秦)에서 무너지고 두 번째 한(韓)에서 잘못되었으며, 임금의 위상이 점차로 낮아지자 삼흉(三凶)이 권좌를 차치하고 사목(四木)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주자(朱子)정자(程子)를 배향한 것은 유도(儒道)를 천명한 공로로 쳐줄 수 있었는데, 동시에 진덕수(眞德秀)위요옹(魏了翁)을 잃었으므로 정대한 학문을 숭상하는 뜻을 끝마치지 못하였습니다. 남을 의지해 채(蔡)를 멸망한 업적을 이루었으니 무엇을 일컬을 것이 있겠습니까? 조약을 망가뜨려 우(虞)에 군대가 쳐들어가게 재촉하였으니 갈수록 심하게 실계(失計)하였습니다. 생가(笙歌)가 전마(戰馬)의 비용을 제공하니 안위(安危)의 형세가 판가름이 났고, 옥첩(玉牒)이 유연(幽燕)의 들에 묻치니 땅이 깨끗할 때가 없었습니다. 아! 두 임금이 당한 애해(崖海)의 사변은 후대의 충의로운 사람의 슬픔을 격동시켰습니다. 화란(畵蘭)의 단심은 늠름하여 살아 있는 기가 있는 것 같았고, 동방의 붉은 해엔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이 존재해 있습니다. 시험삼아 국가의 운명이 영구히 이어진 것을 살펴보건대 인후(仁厚)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고, 만약 국가의 명맥이 끊어진 것을 논하자면 폐단이 무기력한 데서 생겼습니다. 은택이 이미 깊이 젖어들었기 때문에 게간(揭竿)의 병사가 없었고, 묵인하고 형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국권을 장악한 흉물이 많았던 것입니다. 왕안석(王安石)·장돈(章惇)·채경(蔡京) 등은 똑같은 맥락이었는데도 한스럽게 엄히 예방하지 못하였고, 삭당(朔黨)·낙당(洛黨)·촉당(蜀黨) 세 당으로 나뉠 때에 어찌 조정하는 방법이 없었단 말입니까? 시기를 북돋기는 하였으나 들뜬 의논이 갈수록 성행하였고, 문치가 아름답기는 하였으나 무력이 뒤따라 약해졌습니다. 원호(元昊)의 하찮은 것들이 날뛰자 도리어 관작을 주어 당장의 평온을 도모하였고, 거란(契丹)의 일개 사신이 공갈을 치자 서둘러 폐백을 더 주어 미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변방의 불씨가 암암리에 열려 커지다가 결국 중화가 망하였는데, 만약 그때 임금이 안으로 정사를 닦고 밖으로 오랑캐들을 물리쳤더라면 장구한 국운을 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모두 지나간 자취이므로 볼수가 있으니, 정말 일에 따라 반성하시길 바랍니다. 과거를 거울삼아 뒷일을 조심하려면 비태(否泰)362) 의 기미를 보아야 합니다만, 고금을 참작해 보면 손익(損益)의 의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헌장(憲章)과 문물(文物)이 찬란히 갖추어진 것으로 통해 창업하여 후세에 남긴 어려움을 생각하고, 재물과 요역을 알맞게 처리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어둡고 용렬한 임금이 국가를 전복한 것을 개탄합니다. 요점은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근본에 힘써야 하는데, 그런 다음에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가 거행되는 것입니다. 농사의 어려움이 생각나면 보기전(寶岐殿)에서 보리를 보았던 일을 늘 생각하고, 혹시 정사가 폐기되었는지 염려되면 무일편(無逸篇)363) 을 몸받아야 합니다. 병풍에 게시하여 탐욕을 징계할 땐 귀한 측근의 신하도 엄중히 하여 용서하지 않았고, 옥사를 신중히 다루어 사형수도 재차 심리하여 자세히 살피었습니다. 십과(十科)로 분리하여 인재를 모으면서 한 가지 재능을 가진 사람도 반드시 채용하였고, 육찰(六察)364) 이 건의하도록 허용하여 듣는 길을 넓혀야 합니다. 역사의 법을 강구하여 조금 도우니 이해를 헤아릴 수 있고, 군사의 제도를 상고하여 의기와 용기를 심어 주되 마땅한지의 여부를 반드시 살펴야 합니다. 조정 관원의 명예를 면려하되 환관과 궁녀들이 모르는 사람을 찾아서 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라는 경계를 받아들여 수재·한재와 도적이 발생했다고 날마다 보고되는 상황을 생각해야 합니다. 노염부(老閻浮)에 뇌물이 이르지 않더라도 요행의 길이 혹시라도 트일까 경계해야 되고, 금세에 한유(韓愈)가 어디에서 왔기에 때마침 문체(文體)가 크게 변하였습니다. 주선(朱仙) 숙주(宿州)에서도 옛날에 이처럼 민첩하지 않았으니 밥을 먹을 때마다 잊지 않고, 한 방면에 알맞은 풍체가 있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오직 인재만 등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세(一世)를 교화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 유도를 뚜렷이 드러내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녹원(鹿院)호상(湖庠)은 어찌 사도(師道)가 아래에 쳐져 있었습니까? 용도(龍圖)보각(寶閣)은 또한 조훈(祖訓)이 전보다 빛났습니다. 사서(四書)는 육경(六經)으로 들어가는 발판이니 선현을 계승하여 후학을 이끄는 책임이 있고, 일심(一心)은 온갖 조화의 근본이므로 다스림과 어지러움의 기미입니다. 북송(北宋)의 잦은 경장을 경계하고 남송(南宋)의 치우친 안일을 징계해야 하니, 이게 큰 것입니다. 인종(仁宗)의 진정(鎭靜)에다 신종(神宗)의 분발을 겸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신들은 한쪽도 엿보지 못한 데다 삼장(三長)365) 도 전부 모자랍니다. 그런데 경연에 시강(侍講)으로 참여하여 거의 실마리를 이어받았습니다만, 석실(石室)의 추서(抽書)와 달라서 편차만 하였습니다.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한 것으로 인해 성상의 학문이 더욱 빛남을 우러러 보았고, 사실은 사실대로 전하고 의심쩍은 일은 의심쩍은 대로 전하는데 얕은 지식이 보탬이 없어 개탄하였습니다. 사서에 빛이 더 나는데 공력이 어찌 널리 상고하는 데에 그쳤겠습니까? 사서의 일을 끝마치니 정말 치화를 협찬하는 데에 절실합니다. 판본에 새길 때를 맞아 작은 정성이나마 바칩니다. 이에 교정한 《어정 송사전》본기 4권, 지(志) 34권, 세가(世家) 4권, 열전(列傳) 56권, 의례(義例) 1권, 목록(目錄) 1권 등 도합 1백권을 40책으로 만들고 나서 삼가 전문과 같이 받들어 올리면서 아룁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교감(校勘)한 여러 신하, 원임 빈객 봉조하 서명응(徐命膺), 우참찬 황경원(黃景源), 원임 계방 승지 심염조(沈念祖)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한 필을 면급(面給)하고, 원임 춘방 감사 이진형(李鎭衡), 참판 서유린(徐有隣)·서호수(徐浩修), 의주 부윤 이재학(李在學), 대사간 유의양(柳義養), 원임 계방 참의 정지검(鄭志儉)에게는 대내에서 내린 옷감 한 벌씩을 각각 하사하고, 원임 춘방 참판 정민시(鄭民始)·이숭호(李崇祜)에게는 각각 중간의 녹비(鹿皮) 한 장을 하사하고, 행 부사직 이병모(李秉模)에게는 아마(兒馬) 한 필을 하사하라."

하였다. 12년 뒤 신해년에 임금이 내각에 하유하기를,

"국가의 치교(治敎)와 정법(政法)이 충후(忠厚)하고 관인(寬仁)하였다. 열성(列聖)께서 이를 서로 계승하여 치화(治化)가 융성하고 안정된 계책을 후세에 전하였는데, 진선 진미한데다 거듭 빛나고 누차 젖어서 끝없이 유구하여 옛날에도 능히 견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나라의 바른 법도와 융성한 문물 그리고 성리(性理)를 포괄한 유술(儒術)과 이름과 지조를 중시하는 사습(士習)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에서 특히 더 숭상하였다. 숭상하려면 고증을 시급히 해야 하고 고증하려고 하면 사서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다만 《송사》 중 원(元)나라의 신하 아로도(阿魯圖)366)탈탈(脫脫)에 의해서 편찬된 것은 거칠어서 근거가 없으며, 체제가 어긋나고 편집과 서술이 잗달았다. 본기(本紀)·지(志)·표(表)·열전(列傳)·세가(世家)가 도합 4백 6권인데, 여러 사서 가운데서 가장 양이 많은 반면 가장 신빙성이 없었다. 홍무(洪武) 무렵에 한림 학사(翰林學士) 송염(宋濂) 등에게 다시 편찬하라고 명하였으나 중지되어 이룩하지 못하였으며, 그 뒤에 주공서(周公敍)가 다시 편찬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또한 성취하지 못하였다. 또 왕유검(王惟儉)《송사기(宋史記)》가유기(柯維騏)《송사신편(宋史新偏)》은 비록 다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대부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신한 뜻을 따져 본다면 진실로 또한 신빙성이 없다고 싫어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송사》를 숭상하고 있는데 신빙성이 없는 대로 놔두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동궁에서 날마다 강론한 끝에 곧 이미 정리하여 편찬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서 원사(原史)를 두서너 번 연구하고 보면서 수정하여 대략 편질(編帙)을 갖춘 뒤 《송사전(宋史筌)》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전(筌)의 뜻은 물은 걸러내고 고기만 잡는다는 것이다. 이어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해 가며 10여 차례나 초고를 바꾸었는데, 삭제하지 않은 것은 겨우 10에 2, 3할 밖에 안되었으니, 진실로 고기는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이래로 온갖 정사를 살피다보니 친히 수집 편찬할 수 없었다. 이에 옛날 빈료(賓僚)를 맡았던 여러 신하들을 명하여 나누어 맡아 편마(編摩)하게 하고, 다시 사실을 주워 모아 의의를 부여하고 의의에 따라 범례를 부연하여 비로소 감정(勘定)하여 책을 완성하였다. 그 뒤 4년 경자년367) 에 필사본을 올리기에 판본에 새겨 반포해서 숙원하였던 업을 끝마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참작하여 제정한 것이 혹시라도 틀린 것이 있을까 염려되므로 마땅히 상세하게 고증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비부(秘府)에 보관해 두었는데, 지금 또 12년이 지났다. 대개 역사를 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기존의 역사를 삭제하는 것도 또한 쉽지 않다. 《사전(史筌)》은 삭제한 것도 있고 새로 쓴 것도 있다. 삭제의 부실은 옛날의 하자에 속하지만 새로 쓴 것이 합당성을 잃는다면 새로 오류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또 사서는 네 가지 체가 있는데,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안된다. 사(事)는 사실대로 쓰는 것이니 거짓이 없어야 귀중하고, 사(詞)는 화려하게 하는 것이니 고루하지 않아야 귀중하고, 의(義)는 통하게 하는 것이니 중도에 맞아야 귀중하고, 법은 검속하는 것이니 근엄해야 귀중하다. 구사(舊史)는 물론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새로 편찬한 것도 이따금 잘못을 바로잡은 것이 너무 지나치고 새로 만든 규례가 상당히 번잡하다. 요사이 다시 펴놓고 소급해 상고하고 토론해 보면서 그 유래(由來)를 분석해 보니, 다시 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제(二帝)의 연호를 게시한 것은 정통을 높인 것이고, 3로(三虜)가 참람하게 천자라고 일컬은 것을 전한 것은 이적(夷狄)을 폄출(貶黜)한 것이다. 후비를 본기에 배열한 것은 명위(名位)를 통일시킨 것이고, 종실(宗室)을 세가(世家)의 다음에다 넣은 것은 친족을 돈독히 하는 것을 중요시한 것이며, 유민(遺民)을 열전(列傳)에 보충한 것은 곧은 지조를 허여한 것이고, 세 충신을 원사(原史)에서 제외한 것은 굴복하지 않은 것을 표출한 것이다. 그리고 학술을 숭상한 것은 유림(儒林)의 차서를 올린 것이고, 이단(異端)을 통괄한 것은 방기(方技)의 조목을 변경한 것이다. 율(律)과 역(曆)을 싸잡아 서술하지 않고 예문(藝文)은 단지 송조(宋朝)만 기술하며, 여복지(輿服志)에 보유편(補遺編)을 넣고 고려전(高麗傳)을 다시 편찬하였다. 대체로 이러한 유들은 정연하게 근거가 있어서 의리가 정연하고 법도가 가지런하며, 사(事)와 사(詞)가 모두 합당하여 구사(舊史)의 잘못된 것이 모조리 제거되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반드시 다시 정해야 할 것은 지나친 것만 적당하게 하고 번잡한 것만 간략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절충하고 참정(叅定)하여 일체 개정해야 할 것들은 아래에 조목별로 나열한다. 예전에 올린 의례(義例) 및 보충한 80여 건 중 지금 그대로 취한 것이 6, 7할이나 되니, 아울러 그대로 책 머리에 기재할 수 있다.

대체로 이 책은 수십 년이 걸리고 수십 명의 신하를 거쳐서 재삼 범례를 확정하여 비로소 완성되었으니,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하겠다. 어렵게 이루어진 것은 생각을 깊이 하기 마련이고 깊이 생각한 것은 오래 미루기 마련이다. 우리 나라가 송나라 것 중에 숭상할 만한 것은 오래되어도 마지않고 숭상하고, 숭상할 수 없는 것은 또한 오래되어도 마지않고 경계한다면 이제 기뻐할 만한 것이니, 어찌 다만 《송사》만 비로소 고증할 수 있게 될 뿐이겠는가? 의례에 두 태후(杜太后) 본기를 만들지 않고 태조의 본기에다 사실을 옮겨 편집한 것은 비록 선조(宣祖)의 본기를 만들지 않은 것에 근거하기는 하였으나, 공주전(公主傳)구사(舊史) 그대로 따라 진국(秦國)장공주(長公主)를 첫머리에 기록하였다. 공주는 태조의 누이동생이다. 이미 황제의 누이동생은 전(傳)을 만들어 놓고 모후(母后)를 본기에 넣지 않는다는 것은 자못 큰 차이가 나므로 지금 태조 본기에 기재된 두 태후의 사적을 삭제하고 후본기(后本紀)의 첫 머리에다 편찬한다. 【본기(本紀) 1칙(一則)이다.】 의례예문지를 고쳐서 경적지(經籍志)로 정하였다. 예문지반고(班固)한서(漢書)에서 비롯되었고 경적지수서(隋書)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이름의 의의가 그리 심하게 다르지 않고 보면 예전대로 따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지금 바로잡았다. 【지(志) 일칙(一則)이다.】 의례에 북송(北宋)의 조보(趙普)·조빈(曹彬)·이항(李沆)·한기(韓琦)·사마광(司馬光)남송(南宋)장준(張浚)·이강(李綱)·한세충(韓世忠)·악비(岳飛)·문천상(文天祥) 등 10명을 재보 세가(宰輔世家)로 삼았는데, 대개 남송북송의 명신(名臣)과 석보(碩輔)들은 같은 지위와 같은 덕망으로 줄줄이 잇따라 있어 실로 취사 선택하기가 어렵다. 각각 다섯 명씩 세가에 올린 것은 억지로 정한 것에 가까우므로 이제 모두 다시 열전에 편차한다. 의례주자(周子)·장자(張子) 이정자(二程子)·주자(朱子) 다섯 현인을 세가에 올렸는데, 이는 대개 사마천이 지은 《사기》공자 세가(孔子世家)의 사례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다섯 현인의 도덕과 공업은 해와 달처럼 게시되어 우주에 뻗쳤으므로 세가로 한다고 해서 비로소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열전으로 한다고 해서 손상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따로 오현 열전(五賢列傳)을 지어 특별히 여러 신하들의 맨 위에다 편차하여 표장(表章)하는 서법(書法)을 표현하였다. 【세가(世家) 2칙(二則)이다.】 의례에, 공주전(公主傳)을 낮추어 외척의 위에 배치함으로써 부인으로서 조정 신하들의 위에 있는 것을 피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공주는 비록 부인이기는 하나 또한 의친(懿親)에 관계되니, 마땅히 종실의 아래에 편차하여 그대로 열전의 머리로 삼아야 하므로 이제 다시 위로 올렸다.

의례에는 목수(穆脩)유림전(儒林傳)으로 옮겨 편찬하였는데, 그가 역학(易學)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단(陳摶)이 송나라 초기에 역학의 우두머리였는데도 은일(隱逸)에 배치하였으니, 목수를 유림으로 삼은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목수유개(柳開)와 건국 초기에 고문(古文)의 기풍을 일으켜 사림(詞林)의 창시자가 되었으므로 이제 다시 문원전(文苑傳) 유개의 아래에 편차한다. 의례에는 섭적(葉適)문원전으로 옮겨 편차하였는데, 그가 고문(古文)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진 이를 천거하고 도(道)를 호위한 공로가 있으니, 일개 문인(文人)으로만 덮어 둘 수 없으므로 이제 구사(舊史)에 따라 유림전에 다시 넣는다. 의례에는 또 증공(曾鞏)홍매(洪邁)문원전으로 옮겨 편차하였는데, 증공은 문장을 잘하였기 때문이고 홍매는 박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지위가 재상(宰相)의 반열에 올라 성대한 명성이 있었으므로 이제 또한 다시 여러 신하들의 열전에 편차한다. 의례에는 탁행전(卓行傳)을 삭제하고 유정식(劉廷式)·소곡(巢谷)·서적(徐積)·증숙경(曾叔卿)·유영일(劉永一) 등을 효의전(孝義傳)의 끝에 편차하였는데, 서적유영일은 진실로 효의전에 합당하지만, 그 나머지 세 사람은 억지로 덧붙일 것이 없다. 구사(舊史)에 별도로 탁행전을 만든 것은 비록 매우 말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옮겨서 덧붙여 서로 거북스럽게 한 것보다는 차라리 예전대로 하여 근거한 바가 있게 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이제 그대로 놔둔 것이다. 의례에는 정위(丁謂)·하송(夏竦)·왕흠약(王欽若)·탕사퇴(湯思退)·사미원(史彌遠)·사숭지(史嵩之)간신전(姦臣傳)으로 옮겨 편차하고 또 임특(林特) 등 30여 명을 일일이 분류하여 덧붙였다. 이는 비록 사서 편수의 단례(斷例)를 엄정히 한 것이기는 하나 의심쩍은 것은 억지로 논의할 필요가 없으며 잗단 것은 깊이 책망할 것도 없으니, 원래 간신전에 나열되지 않은 것은 모두 다 옛 편차대로 되돌려 놓는다. 의례에 반역전(叛逆傳)《당서(唐書)》반신전(叛臣傳)역신전(逆臣傳)을 합하여 명명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배반한 신하라고 한다면 진실로 이미 반역한 신하이니, 구차스럽게 합칠 필요가 없으므로 성급히 구사를 따르고 고치지 않았다. 의례에는 구씨(九氏)를 외국(外國)의 위에 나열하였는데, 이는 대개 사로잡혀 항복하였다고 하여 배척한 것이다. 그러나 구씨는 중국의 사람으로서 이미 송나라 건국 초기보다 먼저 난리를 틈타 웅거하였고 보면 뒤에 비록 송나라에게 차례로 병합되기는 하였으나 본디 외국과 나란히 나열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제 옮겨 주(周)나라 세 신하의 위에 편차하였는데, 조금 인정해 준 것이다. 역대의 연호를 자주 바꾼 것은 송나라보다 더한 경우는 없다.

한 연호의 사이에 햇수의 다소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본기 이외에 햇수가 많은 것은 몇 년이라 칭하고 햇수가 작은 것은 초(初)·중(中)·말(末)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큰 사건은 초·중·말을 구애하지 않고 바로 몇년으로 썼다. 열전의 여러 사람 중 자(字)만 있고 본관(本貫)이 없는 자나, 혹은 자는 없고 본관만 있는 자나, 자와 본관이 모두 없는 자는 단지 구사에 따라서 쓰고 굳이 다른 서적을 조사하여 보완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대개 옛것을 보존하려고 노력한 것으로서 삭제한다든가 옮긴 것은 부득이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논평하는 글은 매양 구사에서 글 전편을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글자나 구절은 고치고 삭제하기도 하고, 또는 더러 별도로 논술하기도 하였는데, 평이하고 공정한 것을 따르기에 힘썼다. 그리고 참혹하고 각박한 점이 있는 논평은 일체 고쳐서 바로잡음으로써 자잘한 결점을 트집잡는 관습을 빨리 제거하고 하자를 포용해 감싸주는 기풍을 넓히기에 애썼다. 어정서(御定書)는 별도로 표기(標記)를 세울 필요가 없으나 이 책은 내가 동궁에 있을 때부터 처음으로 집필하였으니, 비록 오늘날 준공하였지만 원래 시작한 것은 마땅히 기록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사정전(思政殿)강목의훈(綱目義訓)숭정전(崇政殿)비고교정(備考校正)을 의거하여 고사권(故事卷) 아래에 낱낱이 존현각편(尊賢閣編)이라고 써서 영구히 전하여 보이도록 【열전(列傳)11칙이다.】 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86면
  • 【분류】
    출판-서책(書冊) / 역사-편사(編史) /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어문학-문학(文學)

  • [註 344]
    탈탈(脫脫) : 원(元)나라 순제(順帝) 때 사람으로 자(字)는 대용(大用)인데, 칙명(勅命)으로 요(遼)·금(金)·송(宋)의 3사(史)를 편수하는 도총제관(都總制官)이 되었음.
  • [註 345]
    신해년 : 1791 정조 15년.
  • [註 346]
    구경(九經) : 아홉 가지 경서(經書). 곧 《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좌전(左傳)》·《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역경(易經)》·《서경(書經)》을 말함.
  • [註 347]
    염(濂)·낙(洛)·관(關)·민(閩) : 송대(宋代) 성리학의 주요 학파로서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가리킴.
  • [註 348]
    한(韓)·범(范)·마(馬)·여(呂) : 송대의 학자이자 정치가고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사마광(司馬光)·여조겸(呂祖謙)을 가리킴.
  • [註 349]
    홍무(洪武) : 명태조의 연호.
  • [註 350]
    이제(二帝) : 휘종과 흠종.
  • [註 351]
    삼노(三虜) : 거란·여진·서하.
  • [註 352]
    칠요(七曜) : 해·달·금·목·수·화·토.
  • [註 353]
    양경(兩京) : 개봉부와 하남부.
  • [註 354]
    삼주(三晝) : 《주역(周易)》 진괘(晉卦) 주일 삼접(晝日三接)에서 나온 말로 하루 사이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세 번씩 접견함을 뜻함.
  • [註 355]
    우전(虞典) : 《서경》의 편명.
  • [註 356]
    경력(慶曆) : 송 인종의 연호.
  • [註 357]
    유릉(裕陵) : 송 신종.
  • [註 358]
    풍예(豐豫) : 모든 육십 사괘(六十四卦) 중의 이름. 풍(豐)은 성대(盛大)한 모양을 뜻하고 예(豫)는 화락(和樂)한 모양을 뜻하는 것으로, 곧 천하가 태평하여 백성들의 향략이 극도에 이름을 말함.
  • [註 359]
    철장(鐵杖)과 목마(木馬) : 쇠로 만든 지팡이와 나무로 만든 말. 송(宋)나라 효종(孝宗)이 전정(殿庭)에 목마를 세워 기사(騎射)를 익히고 철장으로 힘을 단련하면서 나라를 부흥하는 데 뜻을 두었다는 곳사.
  • [註 360]
    장 위공(張魏公) : 장준(張浚).
  • [註 361]
    주 회옹(朱晦翁) : 주희(朱熹).
  • [註 362]
    비태(否泰) : 《주역》의 비괘와 태괘.
  • [註 363]
    무일편(無逸篇) : 《서경》의 편명.
  • [註 364]
    육찰(六察) : 《송사(宋史)》 보면 감찰 어사(監察御史) 6명이 육조와 백관의 일을 분담 규찰하여 그의 잘못을 바로잡음.
  • [註 365]
    삼장(三長)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사학자 유지기(劉知幾)가 사기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삼장(三長)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즉 재능·학문·지식이었음.
  • [註 366]
    아로도(阿魯圖) : 원(元)나라 박이출(博爾朮)의 4세손, 지원(至元) 중에 광평왕(廣平王)에 연이어 봉(封)해지고 중서 우승상(中書右承相)이 됨. 정치는 대체(大體)를 알았으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음.
  • [註 367]
    경자년 : 1780 정조 4년.

○乙卯/奎章閣進御定《宋史筌》。 上在春邸日, 御典籍, 以國朝治法政謨, 稽之歷代, 有㝡近之, 而自脫脫 《宋史》以後, 罕見善本, 就舊史昕夕繹覽, 手加句乙, 漸具編帙。 猶以芟繁汰冗, 有省無添, 爲書例, 踵加筆削, 凡易幾藁。 及御極, 命曾任賓僚諸臣, 分管編摩。 仍復摭事, 授義緣義, 起例規撫, 浸廣裁酌轉多, 奄成不刊之編。 辛亥, 分授館學諸生, 鐥寫校對, 藏之秘府。 蓋聖意, 以作史之難鄭重, 不卽印行。 【奉朝賀徐命膺等進箋文。 箋曰:伏以, 奎躔應運, 闡黼黻之洪猷。 玉局收功, 繕朱墨之舊史。 記載大備, 文獻足徵。 竊稽史途有三, 書法不一。 傳紀、表志, 十九代摭實則同, 取舍存刪, 廾三家立例或異。 凡厥纂輯得失, 亶係學識淺深。 自班、馬猶有譏焉, 醇疪互見。 矧漢魏以後, 作者體裁多乖。 貞觀之親撰《晉書》, 歷詆前謬。 嘉祐之命改《唐紀》, 頗省舊文。 非無前代述作之工, 曷若斯編義例之正? 恭惟主上殿下睿智天縱, 緝熙日新, 大本立而達道行, 一哉心法, 和順積而英華發, 煥乎文章。 典學則終始九經, 資治則淹貫諸史。 洞見天人性命, 已氷釋於微言。 歷稽帝伯皇王, 悉燭照於往跡, 綜括事理, 是非善惡之莫能逃。 斟酌時宜, 禮樂刑政之無不究。 顧聖心獨契有宋, 蓋治規爲近我東。 世敎休明, 刑賞則忠厚之至。 家法嚴謹, 修齊爲治平之原。 濂、洛、關、閩之性理淵源, 幸我諸先正闡發。 韓、范、馬、呂之事功名節, 爲我士大夫模楷。 陰陽迭消長之幾, 在今日所當戒者, 宇宙撑尊攘之義, 又此事不幸近之。 奚但化理之略同? 抑亦習俗之相似。 是以曠世之感, 非比他朝久矣。 潛心之工, 自在貳極, 第緣良史之不作, 尙恨舊本之多疪, 記言之傷氄龐, 已失國乘之體。 敍事之病, 潦率第謄公移之文, 原編旣成於胡元, 初非信筆。 改撰未遑於洪武, 迄無完書。 續紀續鑑之幷行, 而體叚自異。 史補史質之繼作, 而詳略失當。 肆以天地經緯之文, 特寓春秋與奪之法, 較權衡於存削。 日月合明, 審袞銊於貶褒。 造化同妙, 蒐諸家而間補。 逸事集衆史而廣取, 良規或秉燭而忘疲。 問寢侍膳之暇, 或對床而忘飯。 朝筵夜講之餘, 庸費十載工夫, 爰定一部序例。 尊二帝而抑三虜, 立萬世之大經。 躋群輔而表五賢, 備前史之闕典。 配后妃於本紀, 義取乾坤。 列宗英於世家, 系分潢派。 闡遺民靖獻之義, 志士霑襟。 嚴奸侫黨與之誅, 亂賊知懼。 編歸化而次倂九氏, 摽不臣而序別三忠。 辨五行之祲祥, 備厥占候。 分七曜之凌犯, 略其步推。 禮補節文, 粲閣儀之咸秩。 樂定條理, 取舊律之克諧。 該載地形, 遂及兩京之宮殿。 歷敍水利, 最詳九河之漑漕。 尊經籍則改藝文之名, 統異端則變方技之目。 錄銓注於選擧, 在所參看。 序爵階於職官, 且多仍舊儀。 衛與服, 總巨細而不遺, 食貨兵刑, 務繁冗之是祛。 是謂海涵而地負, 奚獨綱擧而目張? 體正例嚴, 炳若日星, 數十義理。 該辭簡, 減却文字六七分。 始有一代全書, 殆若周禮之盡在魯, 必爲後王取法, 奚但夏世之不遠殷? 編摩之積費斟量, 實仰大聖人制作。 校讎之或慮疎謬, 更許舊宮僚與聞。 幸從三晝之討論, 獲窺列朝之治。 忽論世知政, 非無往牒之可稽。 因時制宜, 莫如是書之最切。 惟聖念亦出鑑戒, 伊往躅嘗試, 指陳汴都百餘年幾回平陂之運, 江左七八世, 可究存亡之原。 盃酒釋諸將之權, 去五季節鎭之弊。 風雪訪太原之策, 紓一榻鼾睡之憂。 啓後來之人文, 太學揭孔、顔贊。 弛近世之法綱, 《虞典》得堯、舜心。 旣制定而治成, 所源長而流遠? 金匱之署墨未沫, 易元有譏。 玉淸之祥符頻迎, 欺天何益? 猗慶曆昌明之化, 際重熙累洽之期。 露坐拈香, 應捷桴鼓。 天章給札, 頌騰茅茹。 軫後弊則燒羊不供, 藹乎仁聞。 念民疾則焚犀不惜, 純是實心。 奈何瑤華一瑕, 永播金枝數闋? 肩輿就闕, 蕭然數廚之圖書。 鸞司撤簾, 偉哉兩宮之調護。 竊恨裕陵大有爲之主, 見誤安石不曉事之人。 慨欲挽三代雍熙, 顧志業豈不誠美? 未免墮一切功利, 嗟君相均負初心。 仰屋發嘆, 富弼之手疏無賴。 進途忘恥, 鄧綰之笑罵從他。 自此賢邪之勢互乘, 而元氣暗削。 譬諸心腹之疾轉痼, 而敗兆疊形。 化敷東朝, 縱有諸君子快活條貫。讒入左腹, 爭奈一番人調戲官家。 報復之計始行, 中外布奸黨籍。 豊豫之論繼起, 東南開小朝廷。 黑海通舟, 誰畫夾北攻之策。 靑城易服, 虛抛擊半渡之謀。 遂令南渡之晋轅, 竟遏中興之夏旅。 此殆天意, 大元帥在外, 孟太后在中。 事乃日非, 黃潜善作左, 汪伯彦作右。 東窻之獄練三字, 是可忍乎。 直閣之疏却萬師, 差强意耳。 雖付托之無憾, 己匡恢之失機。 鐵杖木馬之志在中原, 國讐寧忘, 布衫素帶之陋, 洗千古廟號。 是宜張魏公之倚若長城, 賴風聲之遠曁。 朱晦翁之讀至三奏, 惜天語之不聞。 時値憂疑, 安用逃位之丞相。 功在社稷, 幸有達變之宗臣。 何巨慝駕馭之疎, 而善類網打而盡。 兵端遽啓, 一壞于秦, 再誤於韓。 君綱漸頹, 三凶居路, 四木當道。 尊朱、程於兩廡, 尙推闡斯道之功。 失眞魏於同時, 未究崇正學之意。 因人成滅蔡之績, 何處可稱? 敗盟促及虞之師, 失計轉甚。 笙歌供汗馬之費, 勢判安危。 玉牒埋幽燕之庭, 地無乾淨。 嗟二后崖海之變, 激異代忠義之悲。 畫蘭丹心, 澟乎如生之氣。 扶桑赤日, 猶有不亡者存。 試看邦籙之永綿, 基在仁厚。 若論國步之終蹶, 弊由委靡。 澤已深於涵濡, 所以無揭竿之戌卒。 刑或失於容忍, 所以多秉軸之權凶。 王、章、蔡, 一條共貫, 恨隄防之未嚴。 明朔、洛、蜀三黨, 各分渠調停之無術? 士氣之非不培, 而浮議轉盛。 文治之非不美, 而武力隨衰。 元昊小竪子之跳踉, 反錫誥而姑息。 契丹一泛使之恐喝, 亟增幣而彌縫。 故邊釁暗啓而潛滋, 終致猾夏。 倘時君內修而外攘, 猶可祈天。 斯皆已跡之可觀, 誠願隨事而反省。 懲前毖後須看否泰之幾, 酌古參今, 可知損益之義。 憲章文物之餐然備具, 念創垂之艱難。 財幣征徭之失其權宜, 慨昏庸之覆墜。 要在天德, 王道之務其本, 然後良法美制之擧, 而行軫三農之惟艱, 每思寶岐殿觀麥。 慮萬幾之或曠, 宜體《無逸篇》。 揭屛懲貪尙嚴, 在貴近而罔赦。 折獄惟恤, 覆大辟而致詳。 分十科而蒐才, 一善必錄。 許六察之言事, 四聰宜張。 講役法而差助之, 利害可商。 放軍制而義勇之, 當否須審。 勵朝紳之名檢, 求宦官宮妾之不知。 納宵衣之箴規, 想水旱盜賊之日奏。 老閻浮關節不到, 戒倖門之或開。 今韓愈何處得來, 屬文體之丕變。 朱仙宿州之古無此捷, 每飯不忘方面風采之各有其人, 惟材是用。 至者一世之陶鑄, 尤係斯文之表章。 鹿院、湖庠寧敎師道之在下。 龍國寶閣, 亦有祖訓之光前。 四子作六經之階, 繼開有責。 一心爲萬化之本, 理亂所幾, 戒北宋之紛更, 懲南宋之偏安。 此其大者, 以仁宗之鎭靜, 兼神宗之奮勵, 豈不休哉? 伏念臣等一班未窺, 三長俱乏。 忝离筵之侍講, 幾承緖餘。 異石室之抽書, 徒效編次。 筆則筆, 削則削, 仰聖學之彌章。 信傳信疑傳疑, 愧謏見之無補。 光增竹素, 工豈止於博稽事竣汗靑, 誠更切於贊治。 玆當繡梓, 竊附獻芹。 臣等謹將所校御定《宋史荃》 《本紀》四卷, 《志》三十四卷世家四卷, 《列傳》五十六卷, 《義例》一卷, 《目錄》一卷合一百卷, 裝成四十冊, 謹奉箋隨進以聞。】

敎曰: "校勘諸臣, 原任賓客奉朝賀徐命膺、右參贊黃景源、原任桂坊承旨沈念祖, 各熟馬一匹面給。 原任春坊監司李鎭衡、參判徐有隣徐浩修義州府尹李在學、大司諫柳義養、原任桂坊參議鄭志儉, 內下表裏各一襲賜給。 原任春坊參判鄭民始李崇祜, 各中鹿皮一令賜給。 行副司直李秉模兒馬一匹賜給。" 後十二年辛亥, 上諭內閣曰: "國家治敎、政法, 忠厚寬仁。 列聖相承, 化理郅隆, 綏猷垂謨, 至善盡美, 重熙累洽, 悠久無疆, 有非歷古之所能克媲。 若有矩矱之正、文物之盛, 與夫儒術之該性理、士習之重名節, 卽我朝之所尤尙者。 有其尙也, 則宜急所徵, 苟欲徵也, 則莫良於史。 獨《宋史》之纂於阿魯圖脫脫者, 潦率無據, 體裁則乖謬, 輯敍則氄雜。 計本紀、志、表、列傳、世家四百六卷。 最羡於諸史, 而爲最無可徵。 洪武中, 命翰林學士宋濂等改修, 中撤未果。 其後周公叙建請改篹, 亦未就。 又如王惟儉《宋史記》柯維騏《宋史新編》, 雖皆佚傳。 原其率多齗齗於改之爲貴者, 良亦惡其無可徵也。 矧伊我朝之尙之也, 而任其無徵, 豈可乎哉? 惟是予於春宮日講之餘, 卽已究心釐篹, 仍卽原史, 再四繹覽, 手自句乙, 略具編表, 命曰《宋史筌》。 筌所以漉水取魚也。 踵加筆削, 凡易十藁, 而其不刊者纔二三, 誠如魚不得漏, 而水不得留也。 曁乎御極以來, 祗愼萬機, 有未可親自輯次。 是命曾任賓僚諸臣, 分管編摩, 因復摭事, 授義緣義, 傅例始克, 勘定成書。 越於四年庚子, 繕寫進呈, 嗣欲刊梓頒行, 以竟夙業, 猶慮裁酌或差, 當須詳証, 旋藏秘府, 閱今又十有二年矣。 蓋作史至難, 刪史亦不易。 《史筌》有刪有作。 刪之未允, 尙屬舊疪, 作而失當, 秪彰新謬。 且史有四體, 闕一不可。 事所以寔之也, 貴乎不誣; 詞所以華之也, 貴乎不陋; 義所以通之也, 貴乎衷適; 法所以檢之也, 貴乎謹嚴。 舊史, 固未達此, 而新篹間亦矯枉太過, 起例頗縟。 近復披覽, 溯考討論, 乃晣由來, 有不得不重定者。 若其揭二帝之年號, 尊正統也; 傳三虜之僭僞, 黜夷狄也。 配后妃於本紀, 壹名位也; 次宗室於世家, 重敦親也。 補遺民於列傳, 與貞節也; 外三忠於原史, 標不臣也。 他如右學術, 則陞儒林之序。 統異端, 則變方技之目。 律、曆之不爲合敍, 藝文之只述本朝, 輿服志之補遺, 《高麗傳》之改撰。 凡如此類, 井然有據, 義整法齊。 事、詞俱得爲能, 一祛舊史之非, 則今之所必可以重定者, 特其過者適之而已, 縟者簡之而已。 其折衷參定, 一應釐改, 條貫臚序于左。 其舊進義例及補八十餘叚, 今所仍取者, 尙居六七, 可竝仍載卷首。 大率是書, 積數十年, 經數十臣, 再三確例而始成, 可謂難矣。 成之難者, 念之深; 念之深者, 推之久。 以我朝之尙於者, 而久而靡已, 其不可尙者, 則戒之亦久而靡已, 則斯其可喜者, 豈但《宋史》之始足可徵而已哉? 義例不立, 杜太后本紀, 移編事實于太祖本紀, 雖以宣祖之不立紀爲據。 然《公主傳》則仍《舊史》, 首載秦國 長公。 公主, 太祖之妹也。 旣傳帝妹, 不紀母后, 殊爲逕庭, 今刪杜后事實之載於《太祖本紀》者, 編于《后本紀》之首。 【《本紀》一則。】 《義例》《藝文志》《經籍志》《藝文》昉於《班史》, 《經籍》創於《隋書》, 而其名義不甚異也, 則不如仍舊之爲愈, 故今正之。 【《志》一則。】 《義例》, 以北宋趙普曹彬李沆韓琦司馬光, 南宋張浚李綱韓世忠岳飛文天祥凡十人, 爲《宰輔世家》, 蓋北宋名臣、碩輔, 地醜德齊, 磊落相望, 實難取捨。 各陞五人, 近于硬定, 今竝還次《列傳》《義例》, 陞, 五賢于世家, 蓋從遷史《孔子世家》之例。 然五賢之之德之功, 揭日月而亘宇宙, 則不以《世家》而始尊, 不以《列傳》而或損。 故今另立《五賢列傳》, 特次于諸臣之首, 以寓表章之書法。 【《世家》二則。】 義例, 《公主傳》, 降置外戚之上, 以避婦人, 而居廷臣之右。 此則不然。 公主雖曰婦人, 亦係懿親, 宜次宗室之下, 仍作列傳之首, 今復陞之。 義例, 移編穆脩《儒林傳》, 以其傳易學也。 然陳摶初易學之首, 而置之《隱逸》, 則之爲《儒林》, 無乃不可乎? 且柳開, 倡國初之古文, 爲詞林之權輿, 今還次于《文苑傳》 柳開之下。 義例, 葉適移編《文苑傳》, 以其古文名世也。 然有薦賢衛道之功, 不可以一文人蔽之, 今仍舊史, 還于《儒林傳》。 義例, 又以曾鞏洪邁, 移編《文苑傳》, 以文詞, 邁以博洽也。 然二人俱位躋宰列, 蔚然有望, 今亦還次諸臣之傳。 義例, 刪《卓行傳》, 以劉廷式巢谷徐積曾叔卿劉永一等, 編于《孝義傳》之末。 永一, 允合孝義, 其餘三人, 不足强附。 舊史之別立《卓行》, 雖甚無謂, 然與其移附之胥爲未安, 無寧仍舊之猶有所據, 故今因之。 義例, 以丁謂夏竦王欽若湯思退史彌遠史嵩之移次于《姦臣傳》。 又以林特等三十餘人, 一一類附。 雖嚴修史之斷例, 然然疑者不必强論, 庸瑣者不足深誅, 其不原列《姦臣》者, 竝皆還之舊次。 義例, 《叛逆傳》《唐書》 《叛臣》《逆臣傳》而名之。 然若曰叛臣云爾, 則固已爲逆也, 不必苟然捏合, 亟遵舊史而不改。 義例, 九氏列干外國之上, 蓋以俘降擯之也。 然九氏, 以中國之人, 乘亂割據, 已先於有開國之初, 則後雖以次爲所竝, 固不可比列於外國。 今移次于三臣之上, 稍與之也。 歷代年號之頻頻更改, 莫朝若也。 一號之間, 年數之久近不齊, 故本紀以外, 年數之久者, 稱幾年;年數之近者, 稱初、中、末。 若大事則不拘初、中、末, 輒書幾年。 列傳諸人, 或有有字而無貫者, 或有無字而有貫者, 或有字貫俱無者, 只從舊史書之, 不必强究他書而塡補。 蓋以存舊爲務, 而其減其移, 出於不得已也。 論斷之文, 每就舊史, 或用全篇, 或刪改字句, 亦或別撰, 而務從平易公正。 若涉慘覈苛刻之論, 一切革正, 亟祛吹覓毛疪之習, 勉恢含藏垢瑕之風。 御定書, 不必別立標記, 而此書創述, 爰自潛德春宮之日, 竣功雖在今時, 原始聿宜題識。 且倣思政殿 《綱目義訓》崇政殿 《備考校正》, 故事卷下, 一一書尊賢閣編, 垂示永久。 【《列傳》十一則。】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86면
  • 【분류】
    출판-서책(書冊) / 역사-편사(編史) /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