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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0권, 정조 4년 8월 9일 을묘 1번째기사 1780년 청 건륭(乾隆) 45년

삼정승이 격포에 첨사를 두는 일은 그만두라고 명하다

조강(朝講)하고 겸하여 차대를 행하였다. 영의정 김상철이 아뢰기를,

"전에 부사직 윤면동(尹冕東)의 상소로 인하여 격포(格浦)를 첨사(僉使)로 승격시키는 일을, 도신으로 하여금 편리의 여부를 상세히 살펴서 장문하게 하자는 뜻으로 복계(覆啓)하여 통지하였었는데, 곧바로 전라도 관찰사 서유린(徐有隣)의 장계를 보니, ‘격포는 실로 해문(海門)의 목구멍과 같은 구실을 하고 강화도의 방어 구실을 합니다. 지금 만일 첨사로 승격시키고 방어사와 동등한 품계로 제수하여 오진(五鎭)을 통솔하고 수비와 조련하는 등의 일을 한결같이 전일에 하던 것처럼 하려고 한다면 전함과 방군을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양정(良丁)을 모집하기 극도로 곤란한 때를 당하여 방군을 충정하는 것은 거론할 수 없으니, 고금도(古今島) 등 사진(四鎭)의 준례에 따라 전함을 일반 배로 개조해야겠습니다. 저치미 회감선(儲置米會減船)의 모든 물건과 병방 사후선(兵防伺候船)에 새로 갖추고 창[槊]을 바꾸는 물력(物力)은 본도에서 해마다 강도(江都)에 들여보내는 첨향전(添餉錢) 1천 냥을 격포에 지급하여 보조하게 하고, 첨사의 월급과 교졸(校卒)의 입대(立代)와 조련할 때 소요되는 비용은 부근 고을의 상진미(常賑米)에서 6천 석 한도 내에 빌려 주되, 본진으로 하여금 관장하여 식리(殖利)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1년의 이자 6백 석 안에서 3백 석은 각종 지출의 밑천으로 삼고, 3백 석은 해마다 회록(會錄)하여 20년을 기한으로 만 6천 석이 된 뒤에 그대로 본진에 넘겨 주어 영원히 군수(軍需)로 삼고, 대여해 준 원곡(元穀)은 다시 본청에 갚게 할 것을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격포를 그냥 버려둘 수 없다는 것은 과거의 사람들이 많이 논하였으니, 이번 도백의 요청한 바가 상고할 데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별장(別將)을 첨사로 승진시키더라도 반드시 관방(關防)에 더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설치할 때에 불편한 폐단만 끼치고 만다면 오늘날 승진시키는 것이 어찌 또 종전에 그냥 놔두는 것만 못할 줄 알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우선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문의하였다. 좌의정 서명선(徐命善)이 말하기를,

"마련하기 어려운 재력을 허비하고 쓸데없는 관방을 설치하는 것을 바로 ‘급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는 것이니, 신도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정홍순(鄭弘淳)은 말하기를,

"지금 관방의 가부를 논하는 곳은 곧 이전 사람들이 내버리고 논하지 않았던 곳입니다. 이전 사람들의 견해가 어찌 뒤의 사람들보다 못하여 그러하였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이휘지(李徽之)는 말하기를,

"격포의 지형은 신이 비록 집접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으나, 만일 전하는 자의 말대로라면, 바다 입구의 한 모퉁이로서 원래 급변이 발생했을 때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고 한갓 재력만 허비할 뿐이니, 아무래도 긴급한 일이 아닐 듯합니다."

하니, 드디어 취소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7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乙卯/朝講, 兼行次對。 領議政金尙喆啓言: "前因副司直尹冕東上疏, 格浦陞僉使事, 令道臣, 詳察便否狀聞之意, 覆啓行會。 卽見全羅道觀察使徐有隣狀啓, 以爲: ‘格浦, 實爲海門之咽喉, 沁都之捍衛。 今若陞爲僉使, 秩視防禦, 統率五鎭, 操鍊守備等節, 一如前日之爲, 則戰船防軍, 不可不具, 而當此良丁極難之時, 防軍充定, 非所可論, 依古今島等四鎭例, 戰船改造以船。 儲置米會減, 船上什物及兵防伺候船新備改槊物力, 以本道, 每年入送江都添餉錢一千兩, 移給格浦, 使之補助。 僉使月廩、校卒立代、操鍊時責應之需, 以附近邑常賑米, 限六千石貸下, 使本鎭句管取耗。 一年耗六百石內, 三百石, 以爲各樣支放之資。 三百石, 年年會錄, 限二十年, 滿六千石後, 仍付本鎭, 永作軍需。 貸下元穀, 還報本廳事, 請令廟堂稟處矣。’ 格浦之不可等棄, 多有前人之論。 今此道臣所請, 非曰無稽, 而別將之陞爲僉使, 未必能增重於關防。 若其設施之際, 徒貽難便之弊, 今之陞降, 安知又不如前之銷刻乎? 臣意以爲: 姑不可輕議。" 上以詢諸大臣。 左議政徐命善曰: "耗費難辦之財力, 設置無用之關防, 是謂不急之務。 臣亦以爲: 置之宜矣。" 領中樞府事鄭弘淳曰: "卽今關防可否之地, 卽前人棄而不論之處也。 前人之見, 豈曾不及於後之人而然哉?" 右議政李徽之曰: "格浦地形, 臣雖未目擊, 若如傳者之言, 海口一隅, 元非緩急得力處, 而徒費財力, 恐非緊急。" 遂寢之。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7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