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들이 일경강을 실시하는 문제를 의논하여 다시 실행하기로 하다
시임(時任)·원임 대신(原任大臣)과 관각(館閣)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일경강(一經講)278) 을 다시 설행(設行)하는 것이 편리한지를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헌의하기를,
"당초에 설법(設法)한 것은 인재를 만들고 국가를 위하여 실용(實用)할 선비를 모아 들이려 한 것이니 어찌 좋은 법이고 아름다운 뜻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사습(士習)이 예전만 못하고 인교(人巧)가 여러 가지이니, 실효(實效)를 보지 못하면 도리어 응문(應文)하는 과시(科試)가 되고, 유폐(流弊)를 바로잡을 수 없으면 도리어 이것이 없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 정시(庭試)의 강경(講經) 규례를 이미 정파(停罷)하였으므로, 복강(復講)하려면 절일제(節日製) 등의 과시뿐인데, 혹 실효가 없는 것이 전과 같고 폐단을 일으키는 것이 예전대로라면 명실(名實)을 맞출 수 없어서 결국 폐지해야 할 처지가 되는 것보다 설법하는 처음에 어렵게 여기고 삼가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이휘지(李徽之)가 말하기를,
"당초에는 초시(初試)를 설행함에 있어 처음에 강경(講經)을 취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혹 실용할 데가 없는 것이라 하여 번거롭게 여겼으나, 전연 읽지 않는 것에 비하면 또한 낫지 않겠습니까? 예전에는 전경(專經)을 취하는 법이 있었으니, 지금의 선비가 예전만 못하더라도 다시 글을 읽을 줄 알아서 강경(講經)에 응하는 선비가 된다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장옥(場屋)에 출입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강경 규례를 정파하게 되어서는 비록 쓸데없는 것을 외기만 하였다지만, 일경(一經)에 능한 자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으니, 전에 시강(試講)한 것이 실효가 없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초시를 회복한 뒤에 강규를 의논할 수 있고 초시의 폐단도 여러 가지이므로 이제 갑자기 논하지 말아야 한다면, 강규는 행할 수 있을 때가 없을 것이며, 원점과(圓點科)279) 에서만 시강하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불편한 것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과규(科規)에 일체 같은 법을 쓴다면 선비가 그 나아갈 바를 알고 도타이 힘써서 공부하겠으나, 이처럼 들쭉날쭉하면 효과를 구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국조(國朝)의 과제(科制)는 아닌게아니라 본디 엄하여 강서(講書)·제술(製述)을 아울러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삼년 대비(三年大比)280) 이외에 과시가 있으면 반드시 별시(別試)를 설행하였는데, 중고(中古) 이후에는 무릇 경과(慶科)가 있으면 제술은 있으나 강서는 없고, 별시를 설행하더라도 혹 다시 강서를 제외하므로 드디어 고제(古制)가 점점 폐기되고 말폐(末弊)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제 바로잡을 방책을 논한다면 반드시 다른 방도를 따로 찾을 것 없겠고 오직 구전(舊典)을 수명(修明)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바라건대, 일경강은 이미 선조(先朝)에서 시험한 규례가 있고 또 바로 지금 처음 행하는 일이 아니니, 그 사례(事例)를 본받아 영구히 시행하소서. 그러면 과폐(科弊)를 바로잡고 선헌(先憲)을 준수하는 도리로서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하고, 규장각 제학 김종수(金鍾秀)가 말하기를,
"칠서(七書)에 익숙한 경생(經生)도 매독 환주(買櫝還珠)281) 라는 비웃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일경강도 어찌 부질없이 읽기만 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마는, 요컨대 제술·강경의 두 가지로 나뉜 뒤에는 제술을 공부하고 경서 공부를 소홀히 하는 자가 십중 팔구이니, 제술생(製述生)이 한 경서에도 아울러 익숙하게 하면 읽기만 하더라도 읽지 않는 것보다 낫고 혹 보람이 없더라도 틀림없이 폐해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규장각 직제학 서호수(徐浩修)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임어하신 처음에 윤음(綸音)을 내어 네 가지를 통변(通變)의 근본으로 삼으셨는데, 그 하나는 주자(朱子)의 공거(貢擧)에 대한 의논으로 경사 분년(經史分年)의 규례282) 입니다. 《역경(易經)》·《시경(詩經)》·《서경(書經)》과 《춘추(春秋)》의 삼전(三傳) 및 《의례(儀禮)》·《주례(周禮)》·《대기(戴記)》를 과시에 따라 분배하여 해마다 번갈아 행하되 임강(臨講)283) 때에 주(註)를 없애 어 오로지 문의(文義)를 취한다면, 통경(通經)할 수 없는 첩괄(帖括)284) 보다 조금 나아서 십수 년 안에 선비가 구경(九經)에 통할 수 있을 것인데, 이 법이 아직도 시행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성조(聖朝)의 궐전(闕典)입니다. 이제 대신(臺臣)이 청하고 비국(備局)에서 아뢴 것은 오랜 폐단을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을 깊이 염려하여 먼저 이미 시행하고 행하기 쉬운 것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제(舊制)의 원점과에서 먼저 강서한 뒤에 제술하고 도기과(到記科)에서 먼저 제술한 뒤에 강서하고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의 복시(覆試)에서 강서하는 것은 다 삼경(三經) 가운데에서 자원(自願)하여 배강(背講)하되 분배하여 번갈아 하는 규례가 없으므로, 이미 한 경서를 외면 다시 다른 경서에 미치지 않습니다. 거자(擧子)는 구두(句讀)에 힘을 다하고 문의에 뜻을 두지 않으며 고관(考官)은 또한 문의를 거자에게 요구하지 않고 한갓 구두가 틀리지 않는 것을 숭상하므로, 공소(空疎)한 자가 도리어 나은 생(栍)285) 을 차지하고 노실(老實)한 자는 혹 출락(黜落)하는 일이 많아서 몇 해를 행하여도 도움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제 반드시 잠시 시행하였다가 곧 철폐한 구제를 다시 찾을 것 없으니, 윤음 가운데에 있는 경사 분년의 하교에 따라 주자 공거의 제도를 대략 본떠야 하겠습니다. 차례를 따라 응시(應試)하고 여러 경서를 두루 익히면 세상에 옛일을 널리 아는 선비가 많고 조정에 글을 읽을 재상(宰相)이 있어서 실용(實用)에 쓰고 숙폐(宿弊)를 크게 변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규장각 직제학 정민시(鄭民始)가 말하기를,
"일경강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논하는 자는 혹 이미 정시 초시(庭試初試)를 폐지하였으면 다만 절일제(節日製)를 위하여 강규를 다시 둘 수 없을 것이니, 강규는 회복하려면 먼저 정시 초시를 회복해야 한다고 합니다마는,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듯합니다. 당초 설강(設講)할 때에는 초시가 있으면 강경이 있고 초시가 없으면 강경이 없었으므로 증광 초시(增廣初試)는 그 전례강(典禮講)을 폐지하고 또한 일경강을 행하였으나, 절일제의 원점 때에는 먼저 강경한 뒤에 제술하고 방외(方外)를 통할 때에는 먼저 제술한 뒤에 강경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행한 전례이니, 이제 반드시 정시 초시를 다시 회복할 것 없고 절일제는 구규에 따라 행하여도 안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겸 호조 판서(兼戶曹判書)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신은 성상께서 어극(御極)하신 처음에 과제를 반드시 경장(更張)할 것 없다는 것을 이미 아뢰었으니, 이제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오직 널리 물어서 처치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공조 판서 이복원(李福源)이 말하기를,
"강서와 제술은 본디 두 가지가 아닙니다.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일정한 것이 중요하며, 폐단은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것이지 법이 잘못되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듭 되풀이하여 설명하며 청하는 것은 그런대로 모두 의견이 있습니다마는, 한갓 입으로 읽는 것을 숭상하는 것에 있어서는 거자에게 오로지하도록 권장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입락(立落)의 기준이 지의(旨義)에 있고 음토(音吐)에 있지 않게 한다면, 선비가 먼저 할 바를 알 수 있어서 법이 오래도록 폐단이 없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행 부사직(行副司直) 홍낙명(洪樂命)이 말하기를,
"강과(講科)의 입락이 문의(文義)에서 나오고 음토에서 나오지 않게 하여 오래 행하면 절로 보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김익(金熤)이 말하기를,
"배송(背誦)하는 강독은 임문하는 강독과 달라서 지의(旨意)를 깊이 탐구할 겨를이 없고 구두를 외는 것을 일삼을 뿐이니, 신심(身心)에 실득(實得)하는 공효(功效)와 사한(詞翰)을 성취하는 공효를 여기에서 요구한다면 안되겠습니다. 그러나 과유(科儒)의 강독은 경생(經生)의 첩괄과 조금 달라서 한때 외는 것도 제술 공부에 조금 도움이 있을 수 있으니, 한갓 읽기만 하여 보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지나칩니다. 이제 강규를 다시 두어 손익(損益)하는 뜻을 붙이어, 배강을 바꾸고 임강을 두어 구두를 숭상하지 말고 문의를 취하되 이 법으로 정시 및 도기·절제에서 시험한다면, 별시에서 사서(四書)를 강독하고 증광시에서 전례를 강독하는 것은, 옛 관례를 그대로 두어 강규를 바꾸지 말고 완전히 갖추더라도 실효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예조 참판 정창순(鄭昌順)이 말하기를,
"이제 강서·제술을 아울러 시험하려는 뜻은 본디 국조의 선비를 뽑는 규례입니다마는, 바로 지금 여러 폐단 중에서 과폐가 가장 심하여 사습(士習)이 날로 변하고 교위(巧僞)가 갖가지로 일어나니, 설과(設科)하려면 바로잡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대저 법을 경장하는 것을 삼가는 것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 예전대로 두는 것만 못할세라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제로 말하면 변통하여 진선(盡善)하지 못하더라도 처음부터 변통하지 않고 폐단이 날로 심해지는 것을 좌시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우리 성명(聖明)께서 사복(嗣服)하신 처음에 먼저 이 폐단을 통촉하여 먼저 윤음을 내리고 특별히 뭇 신하의 의논을 받아들이셨으므로 전국의 많은 선비들이 모두 머리를 들고 눈을 씻고서 기대하였습니다마는, 점점 세월이 오래 지나도 아직 바로잡고 고치는 일이 없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실망함에 있어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또한 엄중한 왕언(王言)에 믿을 것이 없어지니, 이것은 더욱이 변통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가 혹 강경(講經)은 입으로 읽는 것을 도울 뿐이고 실용을 돕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마는,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고 이전에는 선정(先正)·명석(名碩)이 다 강경으로 말미암았고보면, 지금의 강경도 옛 강경과 같은데, 오로지 입으로 읽는 것을 취하는 것은 주사(主司)의 잘못일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보건대, 먼 시골의 경서에 밝은 무리가 《대학(大學)》·《논어(論語)》에서 시작하여 경서를 먼저 가르치는데 외는 것만을 취하므로 훈의(訓義)에 아주 어두웠습니다. 그러므로 방책(方策)에 대답하라면 시해(豕亥)286) 를 구별하지 못하나 경훈(經訓)을 외면 구두를 틀리지 않으니, 이것으로 선비를 뽑은들 글로서는 무슨 안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강서로 시험하고 제술로 취하되, 증광시·별시·정시·알성시(謁聖試)와 여러 가지 절일제(節日製)를 물론하고 과시(科試)가 있으면 강서를 두어 먼저 제술한 뒤에 강서하되, 한 식년(式年)287) 마다 강독하는 경서를 갑자기 바꾸어 경서를 분배하여 번갈아 시강(試講)한다면 두어 식년을 지나지 않아서 각 경서를 외어 익힐 수 있을 것이고, 언석(諺釋)에 얽매 이지 말고 오로지 문의(文義)를 취하여 오래 시행하면 선비들이 다 경서에 통달하게 되어 본디 제술의 재주가 있는 데에 강독의 공부를 더하였으므로 벽을 향하여 외기만 하는 먼 시골의 경생(經生)과 같지 않을 것이니, 전에 사화(辭華)만을 숭상하던 것보다 또한 낫지 않겠습니까? 대비(大比)·명경과(明經科)에서도 반은 강서로 하고 반은 제술로 하여 늘 점수가 그 반을 차지하게 한다면 종전의 입으로만 읽는 버릇이 또한 조금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강(考講)하려면 반드시 초시(初試)를 먼저 해야 하는데, 과장(科場)이 난잡한 것은 초시가 심하여 글을 짓는 자는 하나지만 시권(試券)을 바치는 자는 열이고, 부거(赴擧)하는 자는 반인데 수종(隨從)하는 자는 곱절이므로 고교(考校)하기가 번거롭고 감별(鑑別)하기가 어려운 것이 참으로 여기에서 말미암으니, 또한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우고 특별히 사목(事目)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오직 널리 물어서 처치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교리 강침(姜忱)·이경일(李敬一), 수찬 윤상동(尹尙東), 부수찬 김이희(金履禧)·유맹양(柳孟養) 등이 말하기를,
"과거에 강서를 두는 것은 본디 조종조(祖宗朝)의 구제(舊制)인데, 선조(先朝) 기묘년288) 에 강규(講規)를 창설하여 대과(大科)에서는 한 경서를 배강(背講)하고 감시(監試)에서는 《소학(小學)》을 배강하였습니다. 한 경서를 외지 못하면 감히 부거할 생각을 할 수 없으므로 거의 전문(專門)의 학문과 같아서 점점 글을 읽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한 번 이 규례가 중간에서 폐기되고부터 가숙(家塾)에는 강독하는 학업이 없어지고 과장에는 요행을 바라고 법을 무릅쓰는 폐단이 있게 되니, 유식한 자가 한탄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과규(科規)를 거듭 밝혀 엄하게 하는 때에 구전(舊典)을 수명(修明)하면 참으로 계술(繼述)하시는 덕(德)에 빛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대과(大科)·소과(小科)를 물론하고 모두 강서를 두고서야 고르지 않고 차이 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정시에는 초시를 두어 액수(額數)를 넓혀 뽑아 입격(入格)한 사람이 삼경(三經) 가운데에서 자원(自願)해 배강하게 하여 통(通) 이상을 뽑아 급제(及第)를 내리고, 증광시에서는 전례강(典禮講)289) 을 없애고 한결같이 정시의 강규에 따르며, 감시의 소학강(小學講)과 별시의 일경강(一經講)에서도 생(栍)을 뽑아 배강하되 그 격례(格例)를 엄하게 하고 입격한 뒤에 회시(會試)에 나아가는 것을 허가하는 규례는 선조 기묘년의 정격(定格)을 한결같이 준수하여 시행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170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278]일경강(一經講) : 어느 특정의 한 경서(經書) 만을 골라 강경(講經)으로 시험 보이는 과거. 강경과(講經科)는 정조(正祖)가 어전(御殿)에서 수험생들로 하여금 경전(經典) 중 몇 가지를 선택하여 강송(講誦)시키는 과거를 실시한 것이 처음인데, 이것은 제술(製述)만으로 시취할 때의 여러 가지 폐단을 없애고 경서에 정통한 인재를 선발함과 동시에 평소에도 유생들로 하여금 깊이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도록 사습(士習)을 쇄신시키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
- [註 279]
원점과(圓點科) : 원점(圓點)이란 조선조 때 성균관 유생(儒生)의 출석·결석을 점검(點檢)하기 위하여 식당(食堂)에 들어갈 때에 도기(到記)에 찍던 점을 말하는데, 아침·저녁의 두 끼를 1도(到)로 하여 50도에 이른 유생들에게 치르는 과거.- [註 280]
삼년 대비(三年大比) : 선조(宣祖) 이후 3년에 한 번씩 실시된 과거. 일종의 식년시(式年試)로 전시(殿試)와 같은 것이었음.- [註 281]
매독 환주(買櫝還珠) : 실제(實際)에 어두워서 취사 선택(取捨選擇)이 적실(適實)하지 못함을 뜻하는 말로, 초(楚)나라 사람이 구슬[珠]을 팔려고 구슬을 담은 궤를 아주 화려하게 잘 장식하였는데 정(鄭)나라 사람이 그 화려하게 꾸민 궤 만을 사고 정작 사야할 구슬은 초인에게 도로 돌려주더라는 고사에서 유래함.- [註 282]
경사 분년(經史分年)의 규례 : 주자(朱子)는 공거의(貢擧議)라는 글에서 경(經)·사(史)·자(子)를 매 3년마다 돌려가며 시험에 출제하는 방식의 과거 제도를 주장한 바 있는데, 경사 분년(經史分年)이란 이와 같이 과거 시험의 과목을 해[年]에 따라 배분하여 지정한다는 뜻으로, 분경 배년(分經配年)이라 말하기도 함. 이는 과거 응시자(應試者)로 하여금 미리 시험 과목을 알게 함으로서 매우 안정되게 공부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분야별로 깊이 있는 학자를 양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장되었음.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 실시되었던 식년 문과(式年文科)는 주자가 주장한 경사 분년의 과거 제도를 어느 정도 반영한 것임.- [註 283]
임강(臨講) : 임문(臨文)과 강서(講書).- [註 284]
첩괄(帖括) :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의 과거 시험에서 경서(經書) 중의 어떤 글자, 즉 보통 3자씩을 따서 쓴 종이 쪽지의 문제에 대하여, 그 경서의 글을 총괄하여 답안을 만드는 일종의 암기 시험. 한편 이런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경서의 난해구(難解句)를 기억하기 좋게 뽑아 모아 노래처럼 만든 것을 말하기도 함.- [註 285]
생(栍) : 생은 길이가 1촌(寸) 반의 둥근 나무에 통(通)·약(略)·조(粗)·불(不)을 각각 1자씩 쓴 것으로, 강(講)의 성적이 우등인 자에게는 통자생(通字栍), 그 다음은 약자생(略字栍), 그 다음은 조자생(粗字栍), 아주 성적이 좋지 못한 자에게는 불자생(不字栍)을 내어 우열(優劣)을 구별함.- [註 286]
시해(豕亥) : 한자의 ‘시(豕)’와 ‘해(亥)’ 자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비슷한 글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일. 어떤 사람이 역사책을 읽다가 ‘진사기해섭하(晉師己亥涉河)’란 대목을 ‘진사삼시섭하(晉師三豕涉河)’라고 읽은 것을 보고 자하(子夏)가 바로 잡아 주었다는 고사임.- [註 287]
식년(式年) : 태세(太歲)에 자(子)·오(午)·묘(卯)·유(酉)가 드는 해.- [註 288]
기묘년 : 1759 영조 35년.- [註 289]
전례강(典禮講) : 경국대전 및 가례(家禮)의 강독 시험.○命時、原任大臣館閣諸臣, 議一經講復設便否。 領議政金尙喆議曰: "當初設法, 庶幾作成人材, 爲國家蒐羅實用之士, 豈不是良法美意, 而其奈士習不古, 人巧多端, 未見實效, 反歸應文之科, 流弊之莫可矯捄, 反不如無是之爲愈。 況今庭試講規旣停罷, 其欲復講, 只是節製等科。 如或無效之如前, 而生弊之依舊, 與其名實難副, 銷刻不已, 無寧難愼於設法之初。" 右議政李徽之曰: "當初設初試, 初取講經也, 人或以無實用爲病, 而若比之全然不讀者, 不亦多乎? 古有取專經之法, 今之士, 雖不如古, 猶復知讀書, 而爲應經之儒, 則可不愧於出入場屋? 及至停罷講規也, 雖徒誦無用而能乎, 一經者欲見, 而不可得, 則前之試講, 其不爲無效可見也。 然先復初試, 後講規可議, 而初試之弊, 其亦多端。 今不宜遽論, 則講規無可行之時矣。 至於圓點科之獨爲試講, 亦不無難便。 大抵科規, 用一切之法, 則士能知其所向, 篤力做工, 而如是參差, 恐不能責效也。" 領中樞府事鄭弘淳曰: "國朝科制, 本未嘗不嚴, 而講、製竝行。 故三年大比之外, 有科則必設別試。 中古以後, 凡有慶科, 有製無講。 雖設別試, 或復除講。 遂致古制漸廢, 末弊滋甚。 今若論矯捄之策, 則不必別求他道。 惟在修明舊典。 伏乞一經講, 旣有先朝已試之規, 且非目下創行之事, 法其事例, 永久施行, 則其於釐科弊、遵先憲之道, 恐合事宜。" 奎章閣提學金鍾秀曰: "七書淹熟之經生, 亦不免買櫝還珠之譏, 則一經之講, 亦豈不爲徒讀之歸, 而要之製講, 分爲二岐之後, 工於製述, 踈於經工者, 十居八九。 則使製述生, 兼熟一經, 假令徒讀, 猶勝不讀。 雖或無效, 保必無害。" 奎章閣直提學徐浩修曰: "殿下臨御之初, 渙發綸音, 以四條爲通變之本。 其一則, 朱子貢擧之議, 而經史分年之規也。 若用《易》、《詩》、《書》、《春秋》三傳及《儀禮》、《周禮》、《戴記》, 隨科分排, 逐年輪回, 而臨講沒註, 專取文義, 則差勝於帖括之不能通經, 而十數年之內, 士可通九經。 此法之尙未施行, 實爲聖朝之闕典。 今玆臺臣之請, 備局之啓, 深虞積弊之莫可捄正, 先就其已施易行者而言之。 然舊制圓點之先講後製, 到記之先製後講, 增廣、別試之覆試講, 皆三經中自願背誦, 而無分排輪回之規, 故旣誦一經, 不復及他。 擧子則致力於句讀, 而無意於文義。 考官, 則亦不以文義責擧子, 而徒尙句讀之不錯。 空踈者反占優栍。 老實者或多黜落, 行之幾年, 未見裨益。 今不必更尋乍施旋撤之舊制, 宜就綸音中經史分年之敎, 略倣朱子貢擧之制。 循次應試, 遍習諸經, 則世多博古之士, 朝有讀書之宰, 庶可以措諸實用, 丕變宿弊。" 奎章閣直提學鄭民始曰: "一經講之當復議者, 或以爲旣罷庭試初試, 則不可只爲節日製, 而復設講規。 欲復講規, 則當先復庭試初試云, 此則似有不然者。 當初設講時, 有初試則有講, 無初試則無講, 故增廣初試, 罷其典禮講, 而亦行一經講, 至於節日製圓點時, 則先講後製, 通方外時, 則先製後講。 此乃已例, 今不必更復庭試初試。 而節日製, 依舊規行之, 似無不可。" 兼戶曹判書蔡濟恭曰: "臣於聖上御極之初, 以和制之不必更張, 已有陳達。 今豈有別見? 惟在博詢處之。" 工曹判書李福源曰: "講與製, 本非二致。 行與否貴在一定。 弊生於人, 非法之過, 申明之請, 儘有意見。 至於徒尙口讀, 不可專責擧子。 誠使立落之權, 在於旨義, 而不在於音吐, 則士可以知所先, 法可以久無弊矣。" 行副司直洪樂命曰: "令講科立落, 出於文義, 而不出於音吐, 則久而行之, 自可有效。" 禮曹判書金熤曰: "背誦之講, 異於臨文之讀, 未暇旨意之探賾, 只事句讀之記誦。 若以身心實得之功, 詞翰成就之效, 責之於此則未也, 而科儒講讀, 稍異於經生之帖括, 一時記誦, 亦可以少有助於製述之功, 則謂之以徒讀無效, 亦過矣。 今若復設講規, 而略寓損益之義, 變其背講, 設爲臨講, 勿尙其句讀, 專取以文義。 以此法試之於庭試及到記、節製, 則別試四書之講, 增廣典禮之講, 雖仍舊貫, 勿變講規, 圓備而實效可得。" 禮曹參判鄭昌順曰: "今此講、製兼試之意, 本是國朝取士之規, 而目今諸弊, 科弊爲最, 士習日渝, 巧僞百端, 如欲設科, 則不可無矯捄之道。 大抵法之愼於更張者, 爲慮創新, 不如仍舊之爲愈, 而至於科制, 雖使變通, 而未能盡善, 猶勝於初不變通, 坐視其弊蠹之日滋也。 惟我聖明嗣服之初, 先燭此弊, 首下綸音, 特採群議, 一國多士, 莫不矯首拭目, 而寢至歲月之久, 迄無矯革之擧, 非但多士之解體, 有足歎惜, 抑亦王言之嚴重, 無所取信。 此尤不可不變通者也。 今之議者, 或曰: ‘講經徒資口讀, 無益實用。’ 此則不然。 中古以前, 先正、名碩, 皆由講經, 則今之講經, 猶古之講經。 專取口讀者, 主司之失也。 臣嘗見, 遐鄕明經之類, 始自學語, 先敎經書, 只取瞽誦, 專昧訓義。 故對方策而豕亥莫卞, 誦經訓而句讀不錯, 以此取士, 文於何有? 今若試之以講, 取之以製。 勿論增、別、庭、謁、諸般節製, 有科則講, 先製後講, 而每一式年, 輒改講書, 分排經書, 輪回試講, 則不出數式之內, 可以誦習各經, 而勿拘諺釋, 專取文義, 行之已久, 士皆通經。 本以製述之才, 加以講讀之工, 非如遐鄕經生, 向壁瞽誦者類, 比前之徒尙辭華, 不亦多乎? 雖於大比、明經之科, 一半以講, 一半以製, 常使生畫居其半焉, 則從前口讀之習, 亦可以少變矣。 然旣欲考講, 則必先初試, 而科場之雜亂, 初試爲甚, 作文者一而呈券者十。 赴擧者半而隨從者倍, 考校之煩, 鑑別之難, 實由於此。 亦宜嚴立科條, 別爲事目。 惟在博詢而處之。" 校理姜忱ㆍ李敬一、修撰尹尙東、副修撰金履禧ㆍ柳孟養等曰: "科擧設講, 自是祖宗朝舊制, 而粤在先朝己卯, 創設講規, 大科則背講一經, 監試則背講《小學》。 不誦一經, 則不敢爲赴擧之計, 故殆同專門之學, 漸有讀書之效。 一自此規之中廢, 家塾無講讀之業, 科場有倖冒之弊, 有識之竊歎久矣。 今當科規申嚴之日, 修明舊典, 則誠有光於繼述之德, 而無論大、小科, 一竝設講, 然後可無斑駁逕庭之弊。 庭試則設初試, 廣取額數, 使入格人, 三經中自願背講, 取通以上賜第, 增廣則除典禮講, 而一依庭試講規。 至於監試之小學講、別試之一經講, 亦令抽栍背講, 嚴其格例, 入格後許赴會試之規, 一遵先朝己卯定式施行, 恐合事宜。"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170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