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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8권, 정조 3년 11월 27일 정미 1번째기사 1779년 청 건륭(乾隆) 44년

좌부승지 김하재가 정사에 대해 일곱 가지 대책을 아뢴 상소문

좌부승지(左副承旨) 김하재(金夏材)가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춘궁(春宮)에서 덕을 기르신 거의 20년 동안에 기호(嗜好)는 한가히 쉬시는 때에도 들리지 않고 인효(仁孝)는 삼조(三朝)에서 일찍이 나타났으며, 경전(經傳)을 좋아하시는 것이 고기가 입을 즐겁게 하듯 할 뿐이 아니었습니다. 임어(臨御)하신 뒤로는 엄격하고 공경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겨 정신을 돋우어 잘 다스리려고 꾀하시며, 고로(故老)를 불러 등용하여 문풍(文風)을 크게 떨치고 간흉(奸兇)을 제거하여 조정을 숙청하시며, 무릇 정사(政事)를 해치고 백성을 해롭히는 것들을 차례로 없애시니, 윤음(綸音)이 내려질 때마다 사람들이 다 태평한 정치가 곧 이르리라고 흠송(欽誦)한 지 이제 4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설계하고 조치하는 것은 아직 우리 백성의 희망을 크게 위로할 수 없어서 천심(天心)이 기쁘지 않아 재이(災異)가 여러 번 보여도 대소 인원이 직무를 게을리하여 꾀하는 바가 없습니다. 천하의 일은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가는 것이니, 날마다 잘 다스려지는 데로 나아가는 것을 보이지 못하면 마침내 반드시 날마다 어지러워지는 데로 나아가고 말 것입니다. 아! 송(宋)나라의 신하 진덕수(眞德秀)가 말하기를, ‘삼강 오상(三綱五常)은 우주를 버티는 들보이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주석(柱石)이니, 나라에 이것이 없으면 중하(中夏)427) 도 이적(夷狄)과 같을 것이고 백성이 이것이 없으면 진신(搢紳)도 금수와 같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접때의 여러 역적의 변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온갖 계책으로 터무니없이 속여서 성궁(聖躬)을 위태롭게 하고 핍박하고, 중간에는 흉소(凶疏)를 올렸는데 번복하려는 데에 뜻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홍상범(洪相範)·홍계능(洪啓能)·홍양해(洪量海)·심혁(沈𨩌)의 변에 이르러 극진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종묘(宗廟)를 도와 거괴(巨魁)와 흉얼(凶孼)이 차례로 주멸(誅滅)되었습니다마는, 저 정처(鄭妻)·김귀주(金龜柱)는 아직도 편히 삽니다. 정처는 임금의 측근에서 역적들을 안에서 돕고 저군(儲君)를 원수로 여겨 청정(聽政)의 대책(大策)을 원망하며 국가의 법령을 입에 머금고 임금이 내리는 벼슬을 손에 쥐어 흉도(凶徒)를 양성하는 근저(根柢)가 된 것이 짧은 시일이 아닙니다. 죄는 천지에 쌓이고 분노는 신인(神人)에게서 극진하였으니 상법(常法)을 명백히 시행해야 워낙 마땅할 것인데, 다만 의친(懿親)이기 때문에 가볍게 벌주어 근도(近島)에 안치(安置)하였습니다. 김귀주는 자신이 임금의 인척이면서 세력을 다투느라 밖으로는 당여(黨與)를 맺고 안으로는 궁금(宮禁)과 통하였습니다. 아! 세 가지 큰 죄가 분명히 선포된 뒤에 사람들이 누구인들 이를 갈고 마음에 놀라워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간하고 협제(脅制)한 계책으로 말하면 그 잔인하게 윤리를 어지럽히고 화심(禍心)을 품은 것이 또한 두 가지 죄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홍양해 등의 흉악한 꾀는 오로지 나라를 원수로 여기고 붕당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니, 역적 홍양해가 처형된 뒤에 먼저 처형되어야 할 것인데, 또한 척신(戚臣)이기 때문에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되었습니다.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모두 빨리 두 흉적(凶賊)의 죄를 바루려 하나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윤허하지 않으시니, 밝아 가던 의리가 점점 다시 어두워지고 스스로 분발하던 인심이 점점 다시 함몰하니, 어찌 크게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명철한 임금이 의리로 은혜를 끊는 것을 생각하고 천토(天討)를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시어 빨리 대론(臺論)을 따라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소서.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을 어떤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충신이 조정을 떠나고 숙덕(宿德)이 산림(山林)으로 돌아가서 임사(臨事)에는 공(公)을 다하고 사(私)를 잊는 사람이 없고 강학(講學)에는 덕을 아뢰고 바른 말을 아뢸 선비가 없습니다. 조정의 기상이 산만하여 진정될 수 없으므로 남의 뜻을 맞추고 말하지 않는 것을 임기 응변을 잘하는 것으로 여기고 의견을 세워 아뢰는 것을 일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기며, 백사(百司)는 편안하고 게으른 데에 길들고 외신(外臣)은 재물을 거두어 들이는 데에 버릇되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사대부는 앞다투어 서로 이익을 쫓고 명예와 절개를 마치 바자울타리 가의 물건처럼 여겨, 이로운 것이 동쪽에 있으면 동쪽에 붙고 이로운 것이 서쪽에 있으면 서쪽에 붙어 파당을 나누니 조짐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같은 기상은 접때 권간(權奸)이 나라를 병들이던 때와 그리 다르지 않으니,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까닭입니다. 또 어진 사람을 머무르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역적을 토죄하는 것은 큰 논의입니다. 그런데 접때 어진 신하가 잇달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을 때에는 머물기를 청하는 말이 외형만을 갖춘 듯하고 정성이 보이지 않았고, 몇 해 동안 역적의 와주(窩主)에 대하여 징토(懲討)가 끝나지 못하였는데 합계(合啓)하는 일이 행해졌다가 곧 그만두어 성실한 것이 부족하니, 오늘날의 삼사(三司)는 어찌 그리도 치의(緇衣)428) ·항백(巷伯)429) 과 서로 닮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신은 전하께서 착한 자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시는 것이 혹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아서 덕화(德化)를 보는 자에게 엄정(嚴正)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아! 전하께서 예성(睿聖)하신 자질로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자리에 계시므로 온 동토(東土) 수천 리의 모든 혈기(血氣)가 있는 자는 비상한 사공(事功)을 바라는데 바로 이 때문에 이완(弛緩)되니, 어찌 두렵게 여기고 고쳐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키기 어려운 것은 본심(本心)이고 잃기 쉬운 것은 시기(時機)입니다. 이제까지도 아직 유위(有爲)할 수 있으나 조금 늦으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소견을 다하여 일곱 가지 조목을 감히 성명(聖明)께 바치겠습니다.

첫째는 성학(聖學)에 늘 힘써 덕업(德業)을 넓히는 것입니다. 예전에 학문을 논한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주자(朱子)의 말이 지극히 정하고 자세한데, 그가 그때의 임금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임금은 작은 한 몸으로 깊은 궁중에 있으므로 그 마음의 사정(邪正)은 엿보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인 듯하나 그 부험(符驗)이 밖에 나타나는 것은 여러 사람의 눈이 보고 여러 사람의 손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이미 바르면 보는 것이 밝고 듣는 것이 밝으며 주선(周旋)하는 것이 예(禮)에 맞아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이 중도를 지킬 수 있습니다. 비록 천하가 크더라도 나의 인(仁)으로 돌아가지 않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대저 인(仁)하면 영화롭고 불인(不仁)하면 욕된 것은 필서(匹庶)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안위(安危)가 걸려 있고 재상(災祥)이 크게 응하는 중대한 국가와 번다한 서정(庶政)이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의 법은 사보(師保)의 직임을 두고 간쟁(諫諍)하는 벼슬을 벌여 두고 출입(出入)하는 데에는 육잠(六箴)의 경계가 있고 자문(咨問)하는 데에는 사린(四隣)의 보좌가 있었으니, 그 혼자 있을 때의 방자해짐과 한가할 때의 안일해짐을 방지한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오직 아름다운 문장을 외고 격물 치지(格物致知)를 주로 하지 않으면 비록 영걸(英傑)의 자질과 공검(恭儉)의 덕이 있더라도 마침내 도(道)에 들어갈 수 없고 치란(治亂)에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문을 넓히고 예(禮)로 요약하며 거경(居敬)을 중대하게 여기고 궁리(窮理)를 귀중하게 여겨서 마음이 명백하고 순수하여 흠집이나 흐린 데가 조금도 없게 하면 그 이외의 것이 없어도 크고 유구(悠久)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의 명이 아! 아름답다. 행하여 마지않는다.’ 하고 또 이르기를, ‘아! 환하지 않은가? 문왕(文王)의 덕이 순수함이여.’ 하였고, 《중용(中庸)》에는 이것을 인용하여 문왕의 빛나는 공부가 능히 하늘에 짝할만 함을 밝혔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학이 고명(高明)하여 고금(古今)을 꿰십니다마는, 요즈음 보면 경연(經筵)을 오래 그만두어 유신(儒臣)을 드물게 만나시고 옥당(玉堂)의 고사(故事)는 살펴보는 데에 도움이 될 뿐이고 일용(日用)의 공부에 간절하지 않으시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聖意)에 깊이 두시어 숙덕(宿德)을 불러 성현이 끼친 경적(經籍)을 토론하되 전일에 이미 온 자는 다시 공경하는 예를 더하여 반드시 오도록 힘쓰고 아직 오지 않은 자와 등용하지 않은 자도 더 널리 찾아서 가까이 두고 아침저녁으로 고문(顧問)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학문에 급급하시며, 홍문관(弘文館)의 입직(入直)한 신하를 자주 불러 조용히 강문(講問)하되 육경(六經)을 살펴서 회통(會通)430) 을 보고 역대(歷代)를 살펴서 치란(治亂)을 밝히시어, 체용(體用)이 일치하고 현미(顯微)에 차이가 없게 하여 하늘이 어진 임금을 명한 은혜에 보답하고 당세(當世)의 끝없는 변화에 대응하소서. 그러면 종사(宗社)가 다행할 것입니다.

둘째는 절검(節儉)을 숭상하여 사치한 풍습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치가 해로운 것은 천재(天災)보다 심하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전부터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천한 임금은 모두 사치를 억제하고 절검을 숭상하며 감히 태만하거나 안일하지 않고 여기에 종사하여 몸소 실천하여 이끌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영종 대왕(英宗大王) 50년 동안은 태평하였으므로 무엇이나 모두 성덕(盛德)의 대업(大業)이었습니다마는, 절검을 나타낸 덕은 더욱이 백왕 중에서 으뜸이셨습니다. 계시는 전(殿)은 단청이 다 바래고 타시는 여(輿)는 금옥(金玉)으로 꾸미지 않고 의복과 음식을 바치는 것까지 아주 간약(簡約)하였고, 사복(嗣服)하신 처음부터 토목의 일을 일으키지 않으셨으니, 우(禹)임금의 변변치 못한 음식과 문왕(文王)의 허름한 옷이 유독 예전에만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능히 이를 생각하시어 원년에 맨 먼저 명색 없는 공물(貢物)을 폐지하여 낭비를 부리캐고 불필요한 부과를 줄이는 일이 궁위(宮闈)에서 비롯하여 먼 지방에 미쳤으니, 모든 보고 듣는 자가 누구인들 흠앙(欽仰)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사치한 풍습은 전보다 더욱 심하여 위로는 조정부터 아래로는 여염까지 공교를 다하고 사치를 다하는 것이 날로 새로워지고 달로 성해지며 혼취(婚娶)에 쓰는 것과 상장(喪葬)에 드는 것으로 말하면 걸핏하면 만(萬)으로 셈하게 되어 다시는 한절(限節)이 없고 오로지 외관을 힘쓰고 등위(等威)를 가리지 않아서, 조금 집의 형세에 맞추어 절약하려는 자가 있으면 뭇사람이 비웃고 욕하며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지목하므로 밭을 팔고 문서를 잡히더라도 반드시 풍족하여 부족이 없게 하고야 맙니다. 아! 하늘이 재물을 내는 것에는 한정된 수가 있는데 이제 이처럼 사납게 써 없애니, 재물이 어찌 다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백성이 어찌 궁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맹자(孟子)가 이른바 임금의 부엌에는 기름진 고기가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백성의 주검이 있다고 한 것과 불행히도 비슷합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유사(有司)의 경비가 늘 한 해를 버틸만 하지 못하므로 관가에서는 끌어다가 보태 쓰는 버릇에 길들어서 저축이 바닥을 드러낼 조짐이 있다 하니,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전하의 성명(聖明)으로 또한 반드시 그러한 까닭을 구명하셨겠으나 아직 행하지 못하신 것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불필요한 자리를 없애고 낭비를 없애는 것은 모두 두루 지극히 하셨으나 자신에게 공급하는 것을 검약(儉約)하는 데에는 혹 선조(先朝)께서 총애하여 물건을 내리고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모두 어려워하고 삼가신 것처럼 다하지 못하여 재물을 쓰시는 절도가 마침내 고도(古道)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한(漢)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성안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에서는 높이가 한 자가 된다.’ 하였고, 남조(南朝)의 주낭(周朗)이 말하기를, ‘상방(尙方)에서 오늘 그릇을 하나 만들면 소민(小民)이 내일 이미 엿보고 궁성(宮省)에서 아침에 옷을 하나 만들면 서민(庶民)이 저녁에 이미 마름질을 배운다.’ 하였는데, 모두 본성에 따른 말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살피시어 자율(自律)로 검약하여 절도를 맞추고 미루어 백성에게 비쳐서 사치한 풍습을 매우 고치시어 백성이 같이 보고 느껴서 떨쳐 일으킬 바를 알게 하소서, 체계(髢髻)를 금지해야 한다는 말로 말하면 유신(儒臣)이 아뢴 바에 이미 남김없이 다하였거니와, 예(禮)에 부인(婦人)은 머리싸개와 비녀로 머리털을 싼다는 글이 있으나 체계하는 일은 없고, 의례(儀禮)에 이른바 편차(編次)라는 것이 혹 서로 비슷하여도 반드시 지금의 풍속처럼 허리에 찬 패옥(佩玉)과 같이 길고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풍습이 지나치게 사치하여 다투어 높은 것을 숭상하여 한 체계에 드는 것이 5, 60백 금(金)까지 되므로 재력(財力)을 헛되이 쓰고 법제(法制)를 크게 어기니,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빨리 명지(明旨)를 내려 모두 엄금하소서. 그러면 예를 좋아하는 집에서는 절로 옛 제도를 따라서 행하게 될 것이며 여염의 미천한 백성은 비록 죄다 옛 제도대로 하지는 못하더라도 풍조를 따라 본떠서 비용을 줄이고 간략한 것을 따를 것입니다.

셋째는 산업(産業)을 다스려서 민생(民生)을 넉넉하게 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에서 비롯하니, 경계가 이미 바르게 되면 밭을 나누고 녹(祿)을 제정하는 것을 앉아서 정할 수 있다.’ 하였는데, 참으로 만세에 변하지 않는 정론(正論)입니다. 그러나 정전법(井田法)은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고 우리 나라는 산천(山川)이 좁고 들이 평탄하지 않으므로 의논하는 자가 다 이 법은 행하기 어렵다 하고, 접때 유신이 아뢰고 전하께서 널리 물으신 것도 죄다 취하여 전제(田制)를 어지러이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대개 옛 제도를 참작하고 지금의 제도를 변통하여 평이(平易)하게 행할 수 있는 방도를 찾으려 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옆에서 듣건대, 한 해가 넘어도 이해(利害)와 당부(當否)를 아뢰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하니,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아! 민생이 곤궁하고 지친 것이 지극하고 나라의 계책이 애통한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옛 백성은 네 가지이었는데 있고 없는 것을 바꾸는 것에 힘쓰고 서로 방해하고 빼앗지 않았으나, 지금 백성은 예닐곱 가지일 뿐만 아니라 놀고 먹는 자가 나라 안에서 반이나 됩니다. 예전에 나라의 일을 꾀한 자는 오직 요부(徭賦)를 가볍게 하려고 힘썼으나, 지금 재물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과 다투어 이익을 독차지합니다. 밖에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이, 안에서는 맡은 것이 있는 신하가 점점 서로 직무를 게을리하고 잘못된 것을 이어받으며, 그 가운데에서 조금 깨끗하고 삼가며 종합하여 살펴 밝힌다는 자만이 법을 지키고 고사(故事)를 살펴서 규례를 어기지는 않을 수 있을 뿐입니다. 호구(戶口)의 증감과 명목(名目)의 이동(異同)은 태반이 부서(簿書)431) 가 분명하지 않고 간리(奸吏)가 농간을 부려서 한 임기 동안에 다시는 감히 거동(擧動)할 수 없으니, 오히려 어찌 덕의(德意)를 선양(宣揚)하여 뚫리고 떨어진 것을 고치고 태우기를 바라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이 기회에 먼저 어사(御史)를 보내어 각도의 간전(墾田)과 호구를 살피게 하여 세안(稅案)과 곡부(穀簿)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정공(正供) 밖에는 여러 가지 거두어 들이는 것을 모두 폐지하고서야 균전법(均田法)을 의논하여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이 법은 〈주(周)나라의〉 철제(徹制)432) 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폐단을 바로잡는 선책(先策)이 될 만한데, 다만 부호(富豪)의 집에서 즐거워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공경(公卿)·대부(大夫)는 등급을 나누어 채전(采田)을 두고 사서(士庶)는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받는 전토(田土)에 각각 정한(定限)을 두어 구분전(口分田)이 세업(世業)이 되는 것처럼 하면 이미 주(周)나라 때에 녹을 나누어 준 유의(遺意)에 어그러지지 않고 또 국법의 절수(折受)하는 조례(條例)에도 맞으며 부호(富戶)가 겸병(兼幷)할 걱정이 없고 소민(小民)은 동포(同胞)의 은택을 입을 것입니다. 능히 단행하여 오래 지속한다면 재인(梓人)·장인(匠人)·윤인(輪人)·여인(輿人)과 시정(市井)의 백성도 반드시 그 공(功)을 서로 통용하고 그 일을 교환하여 재용(財用)이 넉넉할 것입니다. 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쫓으며 하는 일이 없이 입고 먹는 무리도 어찌 살 곳을 받아서 백성이 되기를 원하여 이것이 성하고 저것이 쇠퇴할 리가 없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의논을 묘당(廟堂)에 내려 상세히 강구하고 살펴서 선택하게 하소서. 그러면 민사(民事)가 다행할 것입니다.

넷째는 선임(選任)을 정(精)하게 하여 인재(人材)를 죄다 쓰는 것입니다. 예전에 나라를 잘 다스린 자는 모두 현명한 자를 등용하고 재능 있는 자에게 벼슬을 주어 위임하고 성적을 요구하는 것을 급히 힘쓸 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선택이 정하지 않으면 현명한 자와 간사한 자가 섞여서 정사가 반드시 어지러워질 것이고 맡기는 것이 완전하지 않으면 잘잘못이 나타나지 않아서 공이 이룩되지 않을 것인데, 이것은 반드시 그러할 이치입니다. 국가의 관제(官制)가 가장 옛 제도와 비슷하여 육관(六官)을 분설(分設)한 것은 주(周)나라에서 근본하였고 삼고(三考)하여 출척(黜陟)하는 것은 우(虞)나라에서 본받았고 각도에서 인재를 천거하는 것도 거의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향거 이선(鄕擧里選)433) 의 법을 본떴습니다. 대저 조종(祖宗) 때의 규모는 이처럼 원대한데,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전형(銓衡)하는 법이 혼란하고 벼슬하는 길이 좁아졌습니까? 조정(朝廷)에서 사람에게 벼슬을 줄 때에는 일정한 연한에 의한 자격에 따라 직임을 주고 선부(選部)434) 에서 주의(注擬)할 때에는 노고를 셈하여 관리를 제수(除授)하며 서전(西銓)435) 에서 무사(武士)를 쓸 때로 말하면 다만 이력을 중시하고 말과 외모를 취할 뿐이고 그 나머지는 묻지 않습니다. 아! 위(魏)나라의 연한에 의한 자격에 따라 벼슬을 주는 법과 당나라의 글씨와 문장을 보고 벼슬을 주는 법도 오히려 식자의 비판을 받았는데, 더구나 사의(私意)가 혹 낀다면 법이 때때로 행해지지 않을 것이고 벼슬자라가 줄면 노고가 있는 자가 때때로 서용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위나라와 당나라에서 상격(常格)을 삼가 지킨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폐단은 대개 접때 간흉(奸凶)이 어지럽힌 이래 날로 더하고 달로 심하였는데, 우리 성상께서 깊이 살펴서 매우 징계하시고 사위(嗣位)하신 처음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명백히 보이셨으므로, 뭇 신하가 두려워하여 분주하며 직무에 종사하고 관방(官方)이 조금 맑아져서 풍채가 갑자기 변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앞으로는 선왕(先王)의 좋은 법이 회복될 수 있고 천공(天工)436) 이 폐기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바랐는데, 이제까지 수년 동안에 법의(法意)는 침체되고 해이해져 모든 성적이 넓혀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거의 일을 맡은 신하가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임금의 명을 받아 선양하지 못한 것입니다마는, 전하께서도 어찌 격려하여 고칠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대저 임금의 명을 받아 보필하는 지위에 있는 자가 취사(取捨)에 공정하다면 외방의 신하가 반드시 감히 그 사의를 따라 마땅하지 않은 사람을 그릇 천거할 수 없을 것이고, 전형할 즈음에 격양(激揚)을 명백히 한다면 벼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감히 조급하게 지위를 다투는 데에 버릇되어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함부로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명색을 가리고 유품(流品)을 비평하는 일은 더욱이 지금의 고질적인 폐해가 되니, 이러고서도 널리 천거하여 막혀 있는 자를 뽑아 쓰기를 바라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먼 지방의 문관(文官)·사족(士族)의 서얼(庶孽)로 말하면 그 수가 매우 많지는 않은데 정사의 규례에 막히고 공론에 막혀서 재주를 가지고도 펴지 못하고 집에서 늙어 죽는 자가 또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듣건대, 연전에 이들을 소통(疏通)시키라는 조정의 명령이 있었으나 아직도 실정(實政)이 아래까지 미친 것이 없다 하니, 유사에 엄히 고하여 널리 뽑아서 빨리 행하게 하고 일을 맡은 서사(庶士)까지도 모두 그 직임에 오래 있게 하여 그 성효(成效)를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널리 퍼지고 두루 미친 덕의(德意)를 입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는 학교(學校)를 일으켜서 사추(士趨)를 바루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家)437) 에 숙(塾)이 있고 당(黨)438) 에 상(庠)이 있고 주(州)에 서(序)가 있고 국(國)에 학(學)이 있었는데, 다 선비들을 기르고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경중(京中)에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이 있고 외방에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이 있어 모두 선비를 기르니, 열성조(列聖朝)에서 원기(元氣)를 배양하고 고도(古道)를 숭상한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근래 이 법이 점점 쇠퇴하여 현사(賢士)가 거치는 바이며 교화(敎化)의 근본이 되는 곳에서 제사할 때에 읍양(揖讓)하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바치는 것이 체(體)는 있으나 용(用)이 없고 이름은 있으나 실속이 없으며 오직 과거(科擧)가 급한 것으로 여겨서 사기(士氣)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지 못합니다. 군현(郡縣)으로 말하면 학교의 정사(政事)가 퇴폐한 지 오래 되었거니와, 사자(士子)인 자가 다들 이록(利祿)으로 서로 꾀고 현송(絃誦)439) ·준조(樽俎)440) 가 어떤 일인지를 모르므로, 혹 재사(齋舍)에 출입하고 뜻이 사문(師門)에 있는 자가 있으면 향당(鄕黨)에서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유벌(儒罰)이 어지럽습니다. 이 때문에 모두 그 사이에서 떨쳐나와 탄관(彈冠)441) ·고협(鼓篋)442) 하려 하지 않으니, 무릇 성묘(聖廟)를 지키고 현원(賢院)에 있는 자는 시골의 비천한 자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아! 이 어찌 법을 만든 본의이겠으며 유(儒)를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가르침에 어찌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겠습니까? 신이 고요히 그 까닭을 생각하니, 대개 과거(科擧)의 폐단이 반을 넘는데 학정(學政)을 맡은 자가 그 중에서 첫째를 차지합니다. 어찌하여 과거의 폐단을 말하느냐 하면 이러합니다. 대저 과거는 대비(大比)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대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주례(周禮)》의 3년에 한번 크게 성적을 견주어 임금에게 어진 선비를 바친다는 유법(遺法)이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이른바 삼물(三物)443) ·빈흥(賓興)444) 이라는 것은 갑자기 행하기 어렵더라도 지금의 여러 신하들도 성현의 글을 읽고 국빈(國賓)의 반열(班列)을 채운 자인데, 어찌하여 과업(科業)과 학문을 갈라서 두 가지 일로 만들고 과업 중에서 강서(講書)와 제술(製述)을 또 서로 나눕니까? 신이 듣건대 국초(國初)에는 명경(明經)을 중히 여기고 제술을 그 다음으로 여겼다 하는데, 지금은 이와 반대입니다. 명경이라는 것은 입으로는 공(孔)·맹(孟)의 가르침을 외우나 이치에는 〈땅을〉 쓴 듯이 어둡고 제술이라는 것은 책상자에는 경병(競病)445) 의 편(篇)이 가득하나 학문에는 장면(檣面)446) 의 비루함이 있으므로, 길은 다르나 궤적(軌跡)은 같아서 오직 득실(得失)을 경쟁하는 마당일 뿐이니, 이러고서도 순박(淳朴)을 돌이키고 염양(廉讓)을 숭상하려 한들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학정이 첫째를 차지한다고 하느냐 하면 이러합니다. 오늘날의 주사(主司)는 옛날의 거자(擧子)인데, 듣고 본 것이 이미 익숙하여 상투(常套)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므로, 강서를 시험하면 잘 외는 것을 취할 뿐이고 지취(旨趣)를 묻지 않으며 제술을 고교(考校)하면 오로지 부화(浮華)한 것을 뽑고 실지에 미치지 않습니다. 더구나 시일(時日)로 한정하고 공사(公私)로 다투니, 함령(含靈)447) 의 재주와 상경(尙絅)448) 의 자질이 있더라도 어찌 살필 수 있겠습니까? 국조에서 과목(科目)으로 사람을 뽑은 지 오래 되었거니와 변경하는 일은 감히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나, 접때 유신(儒臣)이 아뢴 향공(鄕貢)449) 에 관한 의논은 세절(細節)은 강구하지 못하였어도 대의(大意)는 절로 좋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식년(式年)을 당할 때마다 경서(經書)에 밝고 아는 것이 정(精)한 선비를 그 고을 사람이 몇 사람을 보거(保擧)하고 수령(守令)이 살펴서 사실을 안 뒤 방백(方伯)에게 신보(申報)하고 차례로 춘관(春官)에 올리게 하고 제술의 대과(大科)·소과(小科)의 초시(初試)에 입격(入格)시키는 액수에 있어서도 위의 예(例)를 쓰고 주시(主試)하는 신하는 동당(東堂)450) 에서는 문의(文義)를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보다 중하게 보고 문과(文科)에서는 정식(程式)에 얽매이지 말고 본보기가 되는 고사(故事)를 보는 데에 힘쓰고 경중에서는 성균관의 관원이, 외방에서는 수령이 다 유생(儒生)을 친히 고과(考課)하여 학규(學規)를 회복하게 하고 또 송(宋)나라의 신하 정이(程頤)·호원(胡瑗)이 학제(學制)를 살펴 상세히 정한 방도를 취하여 손익(損益)해서 준행(遵行)하게 하소서. 그러면 날로 깎고 달로 다듬는 사이에 사습(士習)이 점점 변하여 녹명(鹿鳴)451) ·청아(菁莪)452) 의 아름다운 풍속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는 군정(軍政)을 닦아서 국위(國威)를 씩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주공(周公)성왕(成王)에게 고하기를, ‘그 융병(戎兵)을 잘 다스려서 우(禹)의 옛 자취를 따락 사방으로 천하를 다녀 바닷가까지 귀순하지 않는 자가 없게 하여 문왕(文王)의 빛나는 덕을 나타내고 무왕(武王)의 큰 업적을 드날리소서.’ 하였습니다. 그때에 주(周)나라는 이미 편안하였고 사왕(嗣王)이 선왕의 법을 지켰으니 주공의 이 말은 급히 힘쓸 일이 아닌 듯하나, 태평한 세상에서는 흔히 안일에 빠지므로 융비(戎備)를 엄하게 하고 무열(武烈)을 떨치지 않으면 구습을 따라 피폐하고 해이하여 안일만을 꾀할 염려가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가가 열조(列祖)께서 잇달아서 인덕(仁德)으로 다스리신 끝에 사방이 편안하고 조용한 성세(盛世)를 이루었으므로 봉화(烽火)가 경보하지 않고 해파(海波)가 일지 않아서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융병을 말하지 않은 것이 거의 1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풍속은 문사(文事)에는 넉넉함이 있으나 무비(武備)는 다투지 않으므로, 예전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군사를 기를 방도를 극진히 이뢰었으나 조정의 신하들이 지나친 생각이라 여겼는데, 임진년453) 에 이르러 큰 구적(寇賊)이 날뛰어 고을들이 휩쓸려 와해되고서야 조정에서는 비로소 그 말을 생각하였으나 이미 미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중국 군사의 구원에 힘입어 8년 동안 힘껏 정벌하여 겨우 박멸할 수 있었습니다. 병자년454) ·정축년455) 의 난리로 말하면 더욱이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 오랑캐의 군사가 멀리 달려 들어와 서울에 닥쳤으나 변신(邊臣)은 싸움의 전조(前兆)를 몰라 외로운 성은 적은 원병(援兵)도 끊어지고 묘당(廟堂)의 모책(謨策)은 화의(和議)를 주장할 뿐이어서 마침내 천지가 뒤집혀서 성하(城下)의 수치가 있었으니, 비록 시운(時運)이 기울고 비색하였기 때문이기는 하나, 또한 어찌 사람의 모책이 성실하지 못하였던 명백한 증험이 아니겠습니까? 난리를 겪은 처음에는 인심이 징계되어 삼가서 혹 성곽(城郭)을 수선하고 저축을 갖추었더라도, 세월이 조금 오래 되고 봉강(封疆)이 조금 편안하면 문을 거듭 설치하여 경계하는 것이 느슨해지고 거(莒)에 있었던 뜻456) 이 잊혀지거니와, 밖으로 번곤(藩閫)에서는 창을 든 군사가 대오(隊伍)를 잃어도 살피지 않고 안으로 영위(營衛)에서는 강무(講武)하는 법이 폐기되어도 다시 수거(修擧)하지 않으니, 천하에 변란이 없다면 종사할 것이 없어서 순탄하고 편안하겠으나, 만일 뜻밖의 근심이 있다면 물고기가 썩고 하천이 터지는 듯한 형세가 전보다 심하지 않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통곡하고 눈물을 흘려도 모자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성상께서는 용지(勇智)를 타고나셨고 자질이 문무(文武)를 겸하셨으므로 가깝게는 무용(武勇)으로 재앙을 막는 위사(衛士)의 반열(班列)과 멀리는 번병(藩屛)을 방어하는 방책과 크게는 기율(紀律)·법도(法度)의 시행과 작게는 거마(車馬)·궁시(弓矢)의 수리에 대하여 염려가 두루 미치지 않은 것이 없고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 군기(軍器)·군향(軍餉) 등을 잇대기 어려워서 무력(武力)이 정제(整齊)되지 못하였으므로 군향을 나르는 노고는 허비하는 것을 앉아서 보고 궁마(弓馬)의 재주는 거의 다 천박합니다. 더구나 지금 난역(亂逆)을 겨우 제거하였는데 숙위(宿衛)를 문득 철폐하였으니, 이것은 다 견고한 형세는 없고 놀라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성(干城)을 임용하는 것은 본디 제왕(帝王)의 성절(盛節)이거니와 시무(時務)를 규제하는 것도 국가의 상도(常道)이니, 어찌 이것을 미리 염려하여 바로잡을 방도를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무과(武科)의 규제를 엄하게 하면 재력(材力)이 있는 자를 등용할 수 있을 것이고 포보(布保)의 길을 넓히면 정장(丁壯)인 자가 쓰이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무과의 외람한 폐단을 전하께서 이미 통렬하게 고치고 그 법을 신칙(申飭)하셨으나, 일이 위열(慰悅)에 관계되면 혹 요행의 문을 열거니와 해마다 입격의 액수를 늘리는 것은 또한 점점 외람해질 걱정이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재예(才藝)를 널리 시험하고 병서(兵書)에 정통(精通)하고서야 비로소 부거(赴擧)를 허가하고 그렇지 못하면 보거(保擧)한 사람을 죄주고 전조(銓曹)와 각영(各營)에서 뽑는 규례는 오로지 무재(武才)를 취하고 자격에 얽매이지 말고 명백히 시험하여 상벌(賞罰)하면, 명실(名實)이 어지럽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군적(軍籍)으로 말하면 백성이 다 싫어하여 물·불처럼 피하여 메워서 채울 때마다 속이는 일이 갖가지로 나오므로 황구(黃口)457) 가 장정으로 등록되고 백골(白骨)에게 군포(軍布)를 거둡니다. 조정의 호령이 더욱 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닌데도 한 고을을 살펴서 찾아 내면 거의 다 반이 넘으니, 이것이 다 일을 맡은 신하가 죄를 범하기 좋아하기 때문이겠습니까? 반드시 마지못하는 것이 있어서 관민(官民)이 서로 따를 것입니다. 아! 시골의 가난한 백성은 살아 갈 전택(田宅)이 없고 공급할 의식(衣食)이 없어 분양(糞壤)을 주워 구차하게 조석(朝夕)을 넘기다가 한 번 군액(軍額)에 오르고 나면 종신토록 거지가 되어 면하지 못하는데, 부호(富豪)한 백성은 팔짱을 끼고 곧게 앉아 있어도 찾는 일이 미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의논하는 자가 흔히 호포(戶布)가 편리하다고 말하나 균역법(均役法)이 행해지고서 이 의논이 드디어 그쳤습니다. 이것은 요부(徭賦)를 줄이는 일에 관계되고 또 선조(先朝)의 영(令)에 관계되니 감히 경솔히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마는, 그 절목(節目)이 이루어진 것은 신하들이 억측하여 결정한 데에서 많이 나왔고 선왕의 인정(仁政)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어전(漁箭)·염분(鹽盆)의 세(稅)가 무겁고 고을에 독촉하여 거두어 들이는 폐단이 많아져서 세월이 오래 갈수록 생리(生利)가 점점 박해지고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니, 처음에 영이 편리하다고 말하던 자가 이제는 다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찌 성조(聖祖)께서 백성을 기르고 넉넉히 먹이려 하신 본의이겠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깊이 캐어 보면 호포·균역 두 가지는 백성에 대한 이해(利害)·신축(伸縮)을 반드시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니, 전하께서 신의 이 의논을 내려서 널리 물어 재결하여 채택하시기를 또한 바랍니다.

일곱째는 서옥(庶獄)을 삼가서 상형(象刑)458) 을 밝히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정(政)459) 으로 이끌고 형(刑)으로 다스리면 백성이 벌을 구차하게 면하되 악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 하고, 또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 다스리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고 또 바르게 된다.’ 하였으니, 고금의 정치는 모두 덕교(德敎)를 중하게 여기고 형벌은 이것을 도왔을 뿐입니다. 신이 전대(前代)의 쇠란(衰亂)을 두루 살펴보니, 형벌이 알맞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 많았습니다. 대개 옥사(獄事)는 뭇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는 것이니, 위에서 능히 삼가고 능히 밝혀서 억울한 일이 없게 하면 국맥(國脈)을 길게 하고 민기(民氣)를 펴게 할 수 있겠으나, 혹 이를 거스른다면 형벌이 더욱 많아져도 간사한 자는 더욱 많아져서 마침내 강상을 무너뜨리고 법을 어지럽혀서 바로잡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가장 잘 드러난 것을 논하여 보면, 당(唐)·우(虞) 때에는 의관(衣冠)에 그리고 장복(章服)을 달리하는 것으로 벌주어 부끄럽게 한 것으로도 천하가 다스려졌으나, 진(秦)나라에는 이마에 자자(刺字)하고 겨드랑이 힘줄을 뽑아내는 형벌이 있었어도 백성이 배반하였으니, 그 명백한 증험입니다. 대저 법률에는 한정이 있고 범죄에는 끝이 없으니, 한정이 있는 바탕으로 끝이 없는 변괴를 근심하고 경술(經術)·의리로 제재하지 않는다면 처벌을 아뢰는 것이 비록 고요(皋陶)460) 와 같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 실정에 죄다 맞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반드시 그렇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례(周禮)》오청(五聽)461) 의 규례가 있고, 입정(立政)462) 에〈주(周)나라 무왕(武王) 때부터 성왕(成王) 때에 걸쳐 사구(司寇)를 지낸〉 소공(蘇公)이 삼간 것을 일컬은 것이 다 율령(律令) 밖에서 가감하는 것을 제절(制節)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인후(仁厚)로 입국(立國)하였으므로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받아 형벌을 줄이고 옥사를 돌보셨고,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맨 먼저 압슬(壓膝)과 단근질하는 두 가지 형벌을 없애고 또 난장(亂杖)하는 법을 없애셨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이어 비추시어 구전(舊典)을 더욱 계칙(戒飭)하여 무릇 경외(京外)에서 쓰는 장추(杖箠)463) 의 크기와 두께가 약간도 넘지 못하게 하시고 친히 수도(囚徒)를 살펴 억울한 것을 다 아뢰게 하시어 전후에 삼가고 돌보신 덕이 상세하고 두루 미쳤으니, 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간사한 백성은 오히려 가리고 속이며 완악하고 교활한 서리(胥吏)는 오히려 연줄에 따라 빙자하여, 크게는 살해하고 강탈하며 완강히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작게는 조금(條禁)의 명목을 늦추고 다그쳐서 상규(常規)를 어기며 인정채(人情債)의 주구(誅求)를 버젓이 행하여 싫증내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 관장(官長)인 자가 감독하고 위압해야 할 것인데, 문관(文官)은 아침에 제수(除授)되었다가 저녁에 옮겨 가고 음사(蔭司)는 상규에 어두워서 외읍(外邑)의 중옥(重獄)은 여러 해 동안 판결되지 않고 경조(京曹)의 잡송(雜訟)은 오직 청탁을 따르므로 도도(滔滔)하게 고식(故息)하고 구차한 지경으로 들어가니, 한심할 만합니다. 대개 국속(國俗)의 폐단은 오로지 서리가 주인이 되고 관원이 객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전담하고 오래 있으므로 그 일에 밝고 익숙할 수 있으며 잠시 맡고 직무를 폐기하므로 거의 다 생소하여 일을 맡기 어려운데, 추관(秋官)이 더욱이 심합니다. 한 번 금령(禁令)을 묻고 책임을 가릴 때마다 태반의 이익이 하리(下吏)에게 돌아가므로 이들이 피폐한 백성을 기화(奇貨)로 여기고 관장이 있는 줄 모른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그 침탈을 괴로워하고 억울한 일을 펴지 못하여 문권(文券)을 안고서 머뭇거리며 감히 송사하여 바로잡지 못하고, 법을 어기는 무리에게 의뢰하면 더욱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상께서 형벌을 삼가고 옥사를 살피시는 뜻이 정사에 힘쓰실 때에 간절하시지만 백성은 그 은택을 입지 못하니, 신은 마음 아픕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문왕(文王)이 모든 직무를 아울러 간섭하지 않은 도리를 본받고 주공(周公)의 모든 직무를 아울러 간섭하는 잘못을 하지 말하는 가르침을 본받아 마땅한 사람을 가려서 맡기고 보람을 이룩하도록 요구하시고 문안(文案)의 규례는 쓸데없이 긴 것을 삭제하여 반드시 간단하고 엄격하도록 하시고 옥사의 평결을 아뢰는 일에 있어서도 돈으로 속죄하는 법을 문득 적용하는 것을 허가하지 말아서 뭇 법을 굽히는 길을 막으소서. 그러면 법과 의리가 함께 행해져서 형벌이 간결하고 정사가 맑아질 것입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말이 비록 진부하고 뜻이 중복되기는 하였으나 그 귀착을 요약하면 천리(天理)를 밝히고 사의(私意)를 끊으며 실정(實政)을 힘쓰고 겉치레를 버려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상세히 살펴서 재처(裁處)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직언(直言)을 구한 끝에 상하의 궐실(闕失)은 물론하고 아뢰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그대가 상소한 데에 이른바 일곱 가지 시폐(時弊)는 매우 절실하고 명백하니, 매우 가탄(嘉歎)한다. 바야흐로 살피고 힘쓸 방도를 생각하겠다. 그 밖의 품처(稟處)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에서 곧 복주(覆奏)하도록 허락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38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왕실-경연(經筵) / 윤리(倫理)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재정-국용(國用)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427]
    중하(中夏) : 중화(中華).
  • [註 428]
    치의(緇衣) : 《시경》의 편명(篇名).
  • [註 429]
    항백(巷伯) : 《시경》의 편명(篇名).
  • [註 430]
    회통(會通) : 사물의 회합(會合)과 변통(變通).
  • [註 431]
    부서(簿書) : 전곡(錢穀)의 출납을 적는 장부.
  • [註 432]
    철제(徹制) : 정전법의 하나.
  • [註 433]
    향거 이선(鄕擧里選) : 주제(周制)의 인재 등용법. 향리에서 재덕(才德) 있는 사람을 조정에 추천하면 조정에서 그 기량에 따라 등용하였음.
  • [註 434]
    선부(選部) : 이조(吏曹).
  • [註 435]
    서전(西銓) : 병조(兵曹).
  • [註 436]
    천공(天工) : 사람이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일.
  • [註 437]
    가(家) : 25집의 마을.
  • [註 438]
    당(黨) : 5백 집의 고을.
  • [註 439]
    현송(絃誦) :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음.
  • [註 440]
    준조(樽俎) : 제향 때에 술을 담는 준(樽)과 고기를 담는 조(俎).
  • [註 441]
    탄관(彈冠) : 갓의 먼지를 털고 임금의 소명을 기다림.
  • [註 442]
    고협(鼓篋) : 취학(就學).
  • [註 443]
    삼물(三物) : 백성에게 가르치는 세 가지 일. 즉 육덕(六德)·육행(六行)·육예(六藝)를 말함이니, 육덕은 지(知)·인(仁)·성(聖)·의(義)·충(忠)·화(和)이고, 육행은 효(孝)·우(友)·목(睦)·인(婣)·임(任)·휼(恤)이고, 육에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임.
  • [註 444]
    빈흥(賓興) : 주대(周代)에 사인(士人)을 채용하던 법. 학교에서 생도 중 수재를 향음주(鄕飮洒)의 예(禮)로써 빈객(賓客)으로 추거(推擧)하던 것임.
  • [註 445]
    경병(競病) : 양(梁)나라 경제(景帝)가 이 두 자(字)의 운(韻)으로 시(詩)를 지은 고사(故事)에서 온 말로, 어려운 운(韻)을 달아 시를 짓는 데 쓰는 말임.
  • [註 446]
    장면(檣面) : 담을 대하고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음. 무식한 사람의 비유.
  • [註 447]
    함령(含靈) : 영성(靈性)을 가지고 있는 것.
  • [註 448]
    상경(尙絅) : 비단 옷의 문체(文彩)가 너무 드러남을 꺼리어 겉에 또 홑저고리를 걸친다는 뜻.
  • [註 449]
    향공(鄕貢) : 과거 제도에 있어, 지방 장관이 천거한 사람.
  • [註 450]
    동당(東堂) : 식년과(式年科), 증광시(增廣試)의 딴 이름.
  • [註 451]
    녹명(鹿鳴) :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 녹명 시는 본래 여러 신하와 훌륭한 손님을 잔치할 때 읊는 시라고 하며, 향음주례(鄕飮洒禮)·연례(燕禮) 등에서 모두 이 시를 노래하고 있는데, 당(唐)나라 때에는 주현(州縣)에서 천거하여 경사(京師)에 뽑혀 올라가는 사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서 이 시를 읊어 축복하였음. 여기에서는 사습(士習)의 변화를 바라는 뜻으로 인용한 것임.
  • [註 452]
    청아(菁莪) :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 편의 "다북쑥이 무성하다."는 것으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뜻으로 읊은 시임.
  • [註 453]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 [註 454]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455]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 [註 456]
    거(莒)에 있었던 뜻 : 춘추 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그의 형인 양공(襄公)이 문란하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므로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거(莒) 땅으로 달아나 고초를 겪다가 양공이 죽은 뒤에 제나라로 돌아와 임금이 되었는데, 환공이 관중(管仲)에게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까?" 하고 물으니, 관중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 거(莒)에 있었던 일을 잊지 마소서." 하였음.
  • [註 457]
    황구(黃口) : 어린 아이.
  • [註 458]
    상형(象刑) : 국법.
  • [註 459]
    정(政) : 법제(法制).
  • [註 460]
    고요(皋陶) : 순(舜)임금의 신하. 법리(法理)에 통달(通達)하여 법을 세워 형벌(刑罰)을 제정하고 또 옥(獄)을 만들었음.
  • [註 461]
    오청(五聽) : 송사(訟事)를 듣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그 말을 듣는 사청(辭聽), 그 안색을 살피는 색청(色聽), 그 숨소리를 듣는 기청(氣聽), 그 듣는 바를 살피는 이청(耳聽), 그리고 그 눈을 살피는 목청(目聽)임.
  • [註 462]
    입정(立政)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 [註 463]
    장추(杖箠) : 곤장과 채찍.

○丁未/左副承旨金夏材上疏曰:

恭惟我殿下, 毓德春宮, 垂二十年, 嗜好不聞於宴私;仁孝夙彰於三朝, 悅樂經傳, 不啻芻豢之悅口也。 臨御以後, 嚴恭寅畏, 勵精圖治, 延登故老, 丕振文風, 屛除奸兇, 肅淸朝著。 凡蠢政害民之具, 以次革去, 綸音每下, 人皆欽誦太平之治, 匪朝伊夕, 至今四年。 設施注措, 尙未有以大慰斯民之望, 天心未豫, 災異屢見, 而大小恬嬉, 無所猷爲。 天下之事, 不進則退。 未見日進於治, 則終必日趨於亂而已。 嗚呼! 眞德秀之言曰: ‘三綱五常者, 乃撑拄宇宙之棟樑, 奠安生民之柱石也。 國而無此, 則中夏而夷狄矣;民而無此, 則冠裳而禽犢矣。 向來, 諸逆之變, 尙忍言哉? 始也百計譸張, 危逼聖躬;中焉投進凶疏, 意在飜覆;末乃至𨩌之變而極矣。 何幸天祐宗祊, 巨魁、凶孽, 次第誅滅, 而惟彼妻、龜柱, 尙今偃息。 鄭妻則處城社, 而爲諸賊之奧, 授讎儲君, 而懃聽政之大策, 口含天憲, 手握王爵, 爲凶徒醞釀之根抵, 非一朝一夕也。 罪積天地, 憤極神人, 則固當明施常憲。 而徒以懿親之故, 薄置近島。 龜柱則身居戚里, 以勢相軋, 外結黨與, 內通宮禁。 噫! 三大罪昭布之後, 人孰不切齒驚心。 而至於踈間脅持之計, 則其殘忍亂倫, 包藏禍心, 又非二罪之比。 況量海等凶圖, 專出讎國死黨之心。 則賊就戮之後, 先宜伏法, 而亦以戚臣之故, 止於島棘。 朝野之人, 莫不欲亟正二凶之罪, 而殿下一例靳允。 方明之義理漸復晦塞, 自奮之人心漸復陷溺, 豈不大可憂哉? 伏願殿下, 體明王之以義斷恩, 念天討之不可或稽, 亟從臺論, 以安宗社焉。 嗚呼! 殿下以今日爲何等時耶? 藎臣去朝, 宿德還山, 臨事無盡公忘私之人, 講學無進德納誨之士。 朝象泮渙, 末由底定, 以容默爲達權, 以建白爲生事。 百司狃於偸惰, 外臣習於封殖。 況今士大夫, 競相馳逐, 視名節如笆籬邊物, 利在於東則附於東;利在於西則附於西, 割戶分門, 兆眹不佳。 似此氣像, 與向日權奸病國之時, 未甚相遠。 此臣之所大懼也。 且留賢, 美事也;討逆, 大論也。 而向來, 賢臣相繼告歸, 則請留之語, 有似備數, 而未見質慤, 幾年賊窩 懲討未訖, 則合啓之擧, 乍行旋闕, 而有欠誠實。 今日三司, 何其與《緇衣》《巷伯》, 不相似也? 然臣恐殿下之好善惡惡, 或不自慊, 而未能顒若於觀化者也。 嗚呼! 殿下以睿聖之姿, 居君師之作, 環東土數千里, 凡有血氣者, 莫不以非常之事功望之。 而直爲此泄泄沓沓之歸, 其可不惕然改圖也耶? 難保者, 本心也;易失者, 時機也。 及今尙可有爲, 稍緩則無及矣。 玆竭一得, 其目凡有七, 敢獻于聖明焉。

一曰: ‘典聖學, 以廣德業。’ 古之論學者何限, 而朱子之說, 至精且備, 其告時君之言曰: ‘人主以渺然一身, 居深宮之中, 其心之邪正, 若不可得以窺測者, 其符驗之著於外者, 常若十目所視, 十手所指。 此心旣正, 則視明聽聰, 周旋中禮, 無過不及, 而能執其中。 雖以天下之大, 而無一人不歸吾之仁者。 夫仁則榮, 不仁則辱, 匹庶尙然, 況於國家之重, 庶政之繁, 安危之所繫, 災祥之丕應者乎? 是以先王之法, 置師保之任, 列諫諍之職, 出入有六箴之備, 咨訪有四隣之輔, 其所以防幽獨之肆, 燕閑之逸者, 可謂至矣。 惟記誦華藻, 不主格致, 則雖有英傑之資, 恭儉之德, 終不可以入道, 而無補於治亂, 故博文而約禮, 大居敬而貴窮理, 使方寸之間, 明白純粹, 無少瑕翳, 其大無外, 悠久無彊。 《詩》云: ‘維天之命, 於穆不已。’ 又曰: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中庸》引此, 以明文王緝熙之工, 克配乎天。 伏念聖學高明, 貫穿古今, 而比見經筵久輟, 儒臣罕接, 玉堂故事, 只資考閱, 而不切日用之工, 寧不慨然? 伏願殿下, 深留聖意, 延訪宿德, 討論遺經, 前日所已至者, 更加敬禮, 務在必致, 其所未至與所未揚者, 亦加旁求, 置諸左右, 朝夕顧問, 終始時敏, 頻召弘文豹直之臣, 從容講問, 考六經以觀會通, 監歷代以驗治亂, 體用一致, 顯微無間, 以答皇天命哲之眷, 以應當世無窮之變, 則宗社幸甚。

二曰: ‘崇節儉, 以革侈風’, 古人有言曰: ‘奢侈之害, 甚於天災。’ 是以, 從古迪哲之主, 莫不抑奢崇儉, 不敢荒寧, 從事於斯, 躬行以率之。 臣伏覩, 英宗大王五十年治平, 何莫非盛德大業, 而若其昭儉之德, 尤冠百王。 所御之殿, 丹艧皆渝。 所秉之輿, 金玉不开。 以至衣服飮饍之奉, 極其簡約。 自嗣服之初, 訖于晩年, 未嘗興土木之役。 竊謂: ‘之菲食, 文王之卑服, 不獨專美於古矣。’ 惟我殿下, 克念于斯, 元年首罷無名之貢, 根究浮費, 節省冗科, 始於宮闈, 以及遠方。 凡在瞻聆, 孰不欽仰? 然而侈風之盛, 視前愈甚, 上自朝廷, 下及閭巷, 窮巧極奢, 日新月盛。 至若婚娶之費、喪葬之需, 動以萬計, 而無復限節, 專務觀瞻, 不分等威。 稍欲有稱家節約者, 則群嘲衆罵, 目之鄙吝, 故雖鬻田貸券, 必適足無欠, 而後乃止。 嗚呼! 天之生財, 只有此數, 而今乃暴殄如此, 財安得不竭, 民安得不窮乎? 孟子所謂: ‘庖有肥肉, 野有餓莩者。’ 不幸近之耳。 臣又聞, 有司之經用, 常不足以支一年。 官狃牽補之習, 蓄有露根之漸。 此曷故焉? 以殿下明聖, 亦必有究其所以然, 而姑未之行歟? 以臣愚意, 殿下之汰冗祛浮, 非不周至, 而自奉之儉, 或未盡, 如先朝寵錫匪頒, 非不難愼, 而用財之節, 終不合於古道也。 人有言曰: ‘城中好高䯻, 四方高一尺。’ 周朗之言曰: ‘尙方今造一器, 小民明已䁹睨;宮省朝製一衣, 庶民晩已學裁,’ 皆循未之論也。 伏願殿下, 有監于此, 儉以自律, 制節謹度, 推以及人, 痛革侈風, 使下民, 翕然觀感, 知所興起焉。 至於髢䯻當禁之說, 儒臣所奏, 已盡無餘矣。 《禮》, 婦人有纚筓縚髮之文, 而無髢䯻之事。 儀禮所謂編次, 或相彷彿, 而亦未必如今俗之鞙鞙長大也。 風習侈靡, 競尙高岌, 一䯻所費, 至於五六百金, 虛耗財力, 大失法制, 誠非細故也。 伏乞亟下明旨, 一皆嚴禁。 則好禮之家, 自當遵古, 而行之矣。 閭細民, 雖不能盡如古制, 亦當從風慕效, 省費從簡矣。

三曰: ‘制産業, 以厚民生。’ 孟子曰: ‘仁政必自經界始。 經界旣正, 分田制祿, 可坐而定。’ 誠萬世不易之正論也。 然井田之法, 後世無傳。 我國山川狹窄, 原野不平, 故議者咸以爲此法難行。 頃日, 儒臣之仰陳, 聖上之博訪者, 亦非欲盡取田制紛更之也, 蓋將求酌古通今, 平易可行底道耳。 然仄聽踰年, 未聞有一人陳利害當否者, 臣竊惜之。 嗚呼! 民生之困悴極矣, 國計之哀痛久矣。 古之爲民者四, 而懋遷有無。 不相妨奪;今之爲民者, 不啻六七, 而遊手半國中。 古之謀國者, 惟務輕徭薄賦;今之理財者, 乃與小民榷利。 外而牧民之官, 內而有司之臣, 轉相恬嬉, 承訛襲謬, 其中稍號廉謹綜核者, 只得守文墨按故事, 不至違例而已。 若夫戶口之增刪、名目之異同, 太半爲簿書之所糊塗, 奸叟之所舞弄, 一任之間, 不復敢擧動, 尙何望宣揚德意, 釐補穿弊哉? 臣謂: ‘誠因此會, 先遣御史, 按覈各道墾田、戶口, 釐正稅案、穀簿之差’, 正供之外, 悉罷雜調, 然後議行均田之法。 蓋此法, 雖不及徹制, 而亦足爲矯弊之先策, 但豪富之家, 在所不樂耳。 然公卿大夫, 則分等而置采田;士庶, 則自少至老, 所受田畝, 各有定限, 如口分世業之爲, 則旣不失周家班祿之遺意, 又有合國典折受之條例, 富戶無兼竝之患, 小民被同胞之澤矣。 苟能斷而行之, 持之悠久, 則梓匠輪輿與夫市井之民, 亦必通工易事, 而財用足矣。 彼棄本逐末, 遊衣遊食之徒, 亦豈無願受廛爲氓, 而此盛彼衰之理乎? 伏願殿下, 下臣此議于廟堂, 詳講而審擇焉, 則民事幸甚。

四曰: ‘精選任, 以盡人才。’ 古之善爲國者, 莫不以擧賢授能, 委任責成, 爲急務。 然擇之不精, 則賢邪雜糅, 而政必紊, 任之不專, 則得失未形, 而功莫奏。 此必然之理也。 國家官制, 最爲近古, 六官分設, 宗乎;三考黜陟, 法乎;各道薦才, 亦略倣鄕擧里選之法。 夫祖宗朝規模, 如是宏遠。 而夫何近年以來, 銓法混淆, 仕路狹窄? 朝廷之官人, 則循資而授任;選部之注擬, 則計勞以除吏。至若西銓之用武士, 則只重履歷, 而取言貌, 其餘則不問也。 噫! 之年格、之書判, 猶被識者之譏, 況乎私意或間, 則法有時而不行。 窠座告縮, 則勞有時而不敍。 是不如 之謹守常格故也。 此弊, 蓋自向日奸凶濁亂以來, 日滋月甚, 惟我聖上, 深鑑而痛懲之。 嗣位之初, 明示好惡, 故群臣震懾, 奔走率職, 官方稍淸, 風采頓變。 竊庶幾從玆以往, 先王之良法可復, 天工之無曠可見矣。 至今數年, 法意寢解, 庶績未熙。 是殆任事之臣, 不能精白一心, 對揚休命之過, 而殿下亦豈不思所以振勵矯革之乎? 夫承弼之地, 公於取舍, 則外服之臣, 必不敢循其所私, 誤薦匪人矣。 銓衡之間, 明於激揚, 則簪紳之流, 必不敢狃於躁競, 妄希匪分矣。 且辨名色評流品之擧, 尤爲當今之痼弊。 如此而欲望廣擧甄滯, 不亦難乎? 至於遐方文官ㆍ士族庶孽, 其麗不億, 而格於政例, 阻於公聽, 懷才莫施, 老死牖下者, 亦何限哉? 伏聞, 年前, 有疏通此輩之朝令, 尙未有實政之下究, 謂宜深詔有司, 廣取而亟行之, 以至御事庶士, 皆令久其任, 而責其效, 則德意之廣博周遍, 將無物不被矣。

五曰: ‘興學校, 以端士趨。’ 古者, 家有塾、黨有庠、州有序、國有學, 皆所以育多士, 而明人倫也。 我朝則內有館學, 外有校院, 莫不養士。 列聖朝培元氣, 而崇古道者, 猗其至矣。 挽近以來, 此法寢衰, 賢關首善之地, 揖讓乎俎豆之間, 朝夕乎薤鹽之供者, 有體而無用, 有名而無實, 惟覩科擧之是急, 不聞士氣之可嘉。 至於郡縣, 則學校之政, 頹弊久矣。 爲士子者, 皆以利祿相誘, 不知絃誦、樽俎之爲何事, 一或有出入齋舍, 志在門墻者, 則大被鄕黨之嗤點, 儒罰紛紜。 是故, 擧不欲彈冠、皷篋於其間, 凡守聖廟, 而處賢院者, 不過鄕曲卑賤子支而已。 嗚呼! 此豈設法之本, 而其於崇儒重道之敎, 豈不大相逕庭矣乎? 臣靜思厥由, 蓋科弊過半, 而主學政者居一。 何謂科弊? 夫科莫重於大比, 而大比之得名, 果何意也? 非《周禮》, 三年大比, 獻賢於王之遺法耶? 古所稱, 三物、賓興, 雖難猝行, 而今之諸臣, 亦誦賢聖之書, 充國賓之列者也, 獨奈科業與學問, 判作二事, 而科業之中, 講製又相分? 臣聞國初, 則明經爲重, 製述次之。 今也反是, 明經者, 口誦之訓, 而理昧灑掃之近; 製述者, 篋盈競病之篇, 而學有墻面之陋。 殊塗同軌, 惟競趨於得失之場。 如此而欲反淳朴、崇廉讓, 何可得也? 何謂學政居一? 今日之主司, 卽昔日之擧子也。 聞見旣熟, 窠臼難脫, 試講則只取能誦, 而不問旨趣, 考製則專選浮華, 而未及實地。 況限之以時日, 戰之以公私, 雖有含靈之材、尙絅之質, 孰得以察之? 國朝之科目取人, 厥惟久矣。 變更之擧, 雖不敢輕議, 而頃日儒臣所陳鄕貢之議, 細節未講, 而大意自好。 伏願殿下, 明詔中外, 每當式年, 經明識精之士, 令本邑人保擧幾人, 令長采訪得實, 然後申報方伯, 以次升之春官, 以至製述大小科解額, 亦用右例。 主試之臣, 東堂則專以文義, 歸重於生進;文科則勿拘程式, 務見故實。 內而成均之官, 外而守令之職, 皆令親課儒生, 修復黌規。 且取程頣胡瑗看詳學制之方, 損益而遵行之。 則日刮月磨之間, 士習漸變, 庶見《鹿鳴》《菁莪》之美俗矣。

六曰: ‘修軍政, 以壯國威。’ 昔周公之告成王曰: ‘其克詰其戎兵, 以陟之跡, 方行天下, 至于海隅, 罔有不服, 以覲文王之耿光, 以揚武王之大烈。’ 當是時, 室旣安矣。 嗣王守文矣。 周公此言, 似非急務, 而升平之世, 多溺宴安, 苟不嚴戎備, 而奮武烈, 則因循廢弛, 而偸安之患, 將有不可勝言者矣。 國家承列祖熙洽之餘, 致四方寧謐之休, 烽火無警, 海波不興, 君臣上下, 口不言兵者, 殆百餘年矣。 我國之俗, 文事有餘, 而武備不競。 肆昔先正臣李珥, 極陳養兵之方, 而廷臣以爲過計。 及夫壬辰, 巨寇陸梁, 州郡望瓦解, 朝廷始憶其言, 而已無及矣。 幸賴天兵之拯救, 力征八年, 僅能撲滅。 至於丙、丁之難, 尤有所不忍言者。 噫! 虜騎長驅, 進薄京都, 而邊臣不得知月暈, 孤城援絶蚍蜉, 而廟謨只主和。 畢竟, 天翻地覆, 而有城下之恥。 雖緣時運之傾否, 亦豈非人謀不臧之明驗乎? 經難之初, 人心懲毖, 雖或繕城郭、完積聚, 而歲月稍久, 封彊粗安, 則重門之戒緩矣, 在莒之義忘矣。 外而, 藩閫則持戟之士, 失伍而不之省, 內而營衛, 則講武之法, 束閣而不復修。 天下無變, 則宜無所從事, 而順且安矣。 萬一有不虞之虞, 則其魚爛河決之勢, 不有甚於往者乎? 念及於此, 可謂痛哭流涕, 而不足者也。 惟我聖上, 天鍚勇智, 姿兼文武。近而旅賁、衛士之列;遠而藩屛捍禦之方;大而紀律、法度之施;小而車馬、弓矢之修, 慮無不周, 備無不飭, 而惟其軍實難繼, 武力未齊, 飛輓之勞, 坐見虛耗, 弓馬之才, 率多膚淺。 況今亂逆纔剪, 宿衛遽撤,是皆無不援之勢, 有可駭之危矣。 議者以爲: ‘戎垣無頗牧之才, 則規規於儲胥之間, 亦末耳。’ 此言似矣, 然任用干城, 固帝王盛節, 規制時務, 亦國家常道, 則豈可預憂於此, 而不爲矯救之方乎? 臣愚以爲: 嚴武科之規, 則材力者可登矣;裕布保之路, 則丁壯者樂用矣。 比年以來, 武科猥雜之弊, 殿下旣痛革, 而勑其法矣。 然事係慰悅, 則或開僥倖之門, 歲增解額, 則亦多濫觴之患。 自今爲始, 苟使博試材藝, 精通鞱略, 然後始許赴擧。 否則坐其保人, 銓曹與各營用拔之規, 則專取武才, 而勿拘資格, 明試而賞罰之, 則庶見名實之不紊矣。 至於軍籍, 則民皆厭惡, 如避水火, 每當塡補, 欺詐百出, 故黃口簽丁、白骨徵布。 朝令非不申嚴, 而査括一邑, 則率皆過半。 是皆任事之臣, 樂其犯科哉? 其必有不得已者存, 而官民相徇焉耳。 嗚呼! 下土貧民, 無田宅以居之, 無衣食以養之, 掇拾糞壤, 苟度朝夕, 一籍軍額之後, 則終身轉丐, 而不得免, 富豪之民, 拱手端坐, 帖括不及。 是以議者多謂戶布之便, 而均役之法行, 而此議遂止矣。 是係減徭之擧, 而且關先朝之令, 則似不敢輕議。 惟其節目之成, 多出諸臣之臆決, 不考先王之仁政, 故漁箭、鹽盆之稅重, 而郡縣征督之弊滋, 年深歲久, 生利寢薄, 怨讟朋興, 始言令便者, 今皆言不便矣。 是豈聖祖養民足食之本意哉? 深究乎此, 則戶布、均役兩者, 生民利害舒蹙, 必有可得以言者矣。 亦望殿下, 下臣此議, 博詢而裁擇焉。

七曰: ‘愼庶獄, 以明象刑。’ 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又曰: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終古爲治, 莫不以德敎爲重, 而刑者, 輔此而已。 臣歷觀前代衰亂, 多由刑罰之不中。 蓋獄者, 衆命攸繫。 在上克愼克明, 無有冤枉, 則足以壽國脈, 而舒民氣, 苟或反是, 則刑愈繁, 而奸益滋, 終歸於淪綱而斁法, 而莫之救藥耳。 試論其最著者, 則盡衣冠、異章服, 以爲戮而天下治。 有鑿顚抽脅之刑, 而百姓畔。 此其明驗也。 夫法律有限, 而罪犯無已, 以有限之資, 憂無已之變, 而不裁之以經術ㆍ義理, 則奏當之成, 雖如皐陶, 猶不能盡得其情。 況未必然乎? 故《周禮》有五聽之規, 《立政》蘇公之敬, 皆制出入於律令外也。 惟我朝仁厚立國, 列聖相承, 省刑恤獄。 粤我先大王卽位之初, 首除壓、烙二刑, 又除亂杖之法。 聖明繼照, 申嚴舊典, 凡京外所用杖箠大小、厚薄, 罔越分寸, 親錄囚徒, 幽隱畢達, 前後欽恤之德, 委曲周徧, 猗歟! 休哉。 然奸民細徒, 猶復蒙蔽开詐, 頑胥猾吏, 尙且夤緣憑藉。 大則殺越禦奪, 睯不畏法;小則條禁名色, 緩急失常, 情債誅求, 公行無厭。 是皆爲官長者, 所宜申明而董威也。 而文官則朝除暮遷;蔭司則迷於典常, 外邑之重獄, 積年不決, 京曹之雜訟, 惟徇請托, 滔滔然入於姑息苟且之場, 足爲寒心。 蓋國俗之弊, 專在吏爲主而官爲客, 專且久, 故得以明習其事, 暫且曠, 故率多生踈難任, 而秋官爲尤甚。 每一詰禁辨責之際, 太半之利, 歸於下吏。 故此輩視殘民如奇貨, 不知有官長久矣。 於是民苦其侵漁, 而已枉莫伸, 抱券趦趄, 不敢訟質, 而倚賴不法之類, 益無所忌憚。 是聖上恤刑審獄之意, 徒切於宵旰, 而民不得被其澤矣。 臣竊痛之。 伏願殿下, 法文王罔兼之道, 體周公勿誤之訓, 簡畀其人, 責之成效。 文案之規, 刪其冗長而必主簡嚴, 至於奏讞, 亦不許輒用鍰罰, 而悉閉群枉之門。 則法義兩行, 而刑簡政淸矣。 凡此數事, 言雖陳腐, 意雖重複, 而要其歸, 不過欲明天理, 而絶私意, 務實政, 而去浮文而已。 惟殿下, 詳察而裁處焉。

批曰: "求言之餘, 無論上下闕失, 未聞敷陳之說。 爾疏所謂七條時弊, 深切明白, 極庸嘉歎。 方思省勉之道, 自餘可以稟處者, 許令廟堂, 劃卽覆奏。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38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왕실-경연(經筵) / 윤리(倫理)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재정-국용(國用)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