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8권, 정조 3년 8월 10일 신유 1번째기사
1779년 청 건륭(乾隆) 44년
인명원이 명당자리가 아님을 지적하다
임금이 연병관(鍊兵館)에 나아가 장사(將士)를 호궤(犒饋)하였다. 이날 회란(回鑾)할 때에 인명원(仁明園)에 들렀는데, 우의정(右議政) 서명선(徐命善) 등에게 말하기를,
"감여가(堪輿家)235) 의 말을 내가 비록 알지는 못하나, 산을 보는 법은 반드시 언덕 기슭이 명당(明堂)을 둘러 안아 깊숙한 곳을 취하는데, 이 원(園)의 산세(山勢)는 하나도 명당을 둘러 안은 것이 없고 한길에 가까워서 성국(成局)하였다 할 수 없고 또 한길이 혈(穴) 앞에 너무 가깝기 때문에 이 길을 막으려 한다고 한다. 이 길은 아조(我朝)의 개국(開國) 이래 4백 년 동안 두루 다닌 길이고, 더구나 예전부터 능침(陵寢)에 왕래하는 연로(輦路)이니, 하루아침에 막으려는 것은 아주 놀랍고 두려운 일이다."
하매, 서명선이 황공하여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환궁(還宮)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118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235]감여가(堪輿家) : 풍수지리를 공부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