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행을 만나고, 송시열의 사당 짓기를 청하는 유생 정운기의 청을 윤허하다
임금이 여주 행궁(驪州行宮)에 나아가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좌의정(左議政) 서명선(徐命善)·호조 참판(戶曹參判) 송덕상(宋德相)·행 부사직(行副司直) 김양행(金亮行)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김양행에게 이르기를,
"내가 한번 경을 보려는 마음이 목마를 때에 물 마시기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뿐이 아니고 이에 앞서 돈소(敦召)한 것도 여러 번이었으나, 성의가 천박하여 멀리하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서로 만나니, 내 마음이 기쁘다. 당초에 전조의 직임을 제배(除拜)한 데에는 뜻이 있었는데, 경이 고사(苦辭)하기 때문에 또한 해면을 허락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경의 마음을 편하게 하여 진로(進路)를 열었으나, 불만한 한탄은 깊다."
하매, 김양행이 말하기를,
"신은 본디 젊어서 고아가 되어 배우지 못하여 재주와 지식이 거친데 외람되게 초선(抄選) 줄에 끼었으니, 마음이 부끄러워 용납될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잇달아 돈소(敦召)를 내리시어 사지(辭旨)가 간절하므로, 신이 두렵고 부끄러우며 감격하여 감히 줄곧 어길 수 없어서 감히 병을 조리하고 길을 떠나겠다는 뜻으로 이에 앞서 아뢰었으나, 평소에 앓던 병이 요즈음 또 더쳐서 아직도 움츠려 엎드려 있으니, 황송하여 못 견디겠습니다. 이제 다행히 연로(輦路) 가에서 성대한 우모(羽旄)를 공경히 바라보나 직명(職名)이 해면되지 않아서 진신(進身)할 길이 없어서 여러 번 어기는 일을 범하고 죄받기를 기다릴 뿐이었는데, 곡진히 헤아려 주시는 은혜를 입고 특별히 갈라는 명까지 내리셨으므로, 은우(恩遇)에 감격하고 기어서 등대하여 행궁에서 가까이 모시고 덕음(德音)을 친히 들으니, 이 뒤로는 곧 물러가 구학(溝壑)에 빠져 죽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산림(山林)의 숙덕(宿德)으로서 태산(泰山)·북두(北斗)처럼 인망을 받는데, 은사(隱士)에 대한 빙례(聘禮)를 부지런히 하였을 뿐이고 현사(賢士)를 징빙(徵聘)하는 수레를 돌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다 내 정성과 예우가 천박하여 진심을 알리지 못한 탓이다. 이제 능(陵)에 배알(拜謁)하는 행차가 현사가 사는 마음을[式閭之地] 지나게 되매 이로 말미암아서 서로 만나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나를 멀리하지 않고 번연(幡然)히 등대(登對)하였으니, 바라고 기다리던 끝에 참으로 매우 위로된다. 이제 이미 서로 만났으니 이어서 자주 만날 수 있겠으나, 거가(車駕)가 돌아갈 때에 그대로 함께 가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하매, 김양행이 말하기를,
"신의 병이 오래 끌어서 참으로 스스로 힘쓸 희망이 없으나, 은교(恩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삼가 뒤따라 입성(入城)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행궁에서 잠깐 만나니 조용하지는 못하나, 목마르게 바라던 끝에 다행히 서로 만날 수 있었으니,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매, 김양행이 말하기를,
"기해년198) 이 돌아온 때에 능(陵)에 전배(展拜)하셨으니, 삼가 생가하건대, 성념(聖念)에 슬픈 느낌이 더욱이 절실하실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윤상(倫常)이 땅에 떨어진 것을 통탄하고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지켜 지려(志慮)를 분발하여 장차 천하 만세에 한번 펴려 하셨으나 신민(臣民)이 복이 없어 문득 승하하시며 동토(東土)의 유민(遺民)이 아직도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 하신 하교를 생각하여 우니, 그 지사(志事)를 계술(繼述)할 책임이 어찌 우리 전하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현(儒賢)은 나이가 몇인데 수염과 머리털이 다 희었는가?"
하매, 김양행이 말하기를,
"나이는 이제 예순 다섯인데 머러털은 다 희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앉으라. 내가 낯을 보고 싶다."
하매, 김양행이 말하기를,
"신도 천안(天顔)을 우러러 보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양행이 몸을 펴고 서서 조금 있다가 다시 부복(俯伏)하여 말하기를,
"신이 오늘 천안을 우러러 볼 수 있었으니, 내일 죽더라도 참으로 여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이르기를,
"어제 길가에서 유생(儒生)의 소(疏)를 보았는데, 선정(先正)의 원우(院宇)를 세우고 일을 청하는 것이었다. 이 고을은 효묘(孝廟)의 능침(陵寢)이 있는 곳이고 또 선정이 소요한 곳이니, 제향(祭享)할 곳을 세워서 마찬가지로 제사를 같이하는 뜻을 대략 붙이는 것이 정(情)으로나 예(禮)로나 안될 것이 없을 듯하나, 원우를 거듭 설치하는 것은 이미 선조(先祖)의 금령(禁令)이 있고 내가 사복(嗣服)한 뒤에 모든 원우를 세우려는 청에 대하여 또한 일찍이 윤허한 적이 없다마는, 이 곳으로 말하면 특별히 시행하도록 하고 싶다."
하고, 유생의 소를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경기의 유생 정운기(鄭雲紀) 등이 상소하기를,
"거룩하신 우리 효종 대왕께서 장차 대의를 천하에 펴려고 함께 모책(謨策)을 힘쓰신 사람은 참으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 한 사람이니, 비록 중도에 승하하시어 사공(事功)은 다하지 못하였더라도 풍성(風聲)을 세운 것은 지금에 이릅니다. 천년 뒤에도 영릉(寧陵)의 지(誌)를 읽고서 눈물을 흘리고 훌쩍거리지 않는 자라면 신은 충신(忠臣)·지사(志士)가 아닌 줄 압니다. 더구나 이 황려(黃驪)199) 한 지역을 다행히 능침(陵寢)이 있는 곳이 되었으므로, 선정(先正)이 효묘께서 승하하신 뒤에 이 고을에 왕래하며 상설(象設)을 바라보며 우러러 갱장(羹墻)200) 의 사모하는 뜻을 붙였는데 그때 능강(陵崗)이 바라보이는 가까운 곳에서 한데에 앉아 밤새도록 비오듯이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익히 들었으며, 고로(故老) 가운데에 그 유적을 가리키며 탄식하는 자가 이따금 있습니다. 그때에 또 느낌을 적은 시가 있는데 ‘밤은 깊고 달은 져서 능의 송백 어두우니 어느 곳에 꿇어앉아 말 아뢸지 몰라라’ 하였습니다. 시의(詩意)가 측달(惻怛)하고 강개(慷慨)하여 귀신을 울릴 만하므로 한 지방의 인사가 전하여 외고 이야기하는 것이 갈수록 더하여 쇠퇴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곳에 온 선배들이 다 이곳에는 선정의 제향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나, 돌아보건대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은 조정의 금령이 있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감히 하지 못하다가, 지난 신해년201) 에 문경공(文敬公) 신(臣) 정호(鄭澔)·문충공(文忠公) 신 민진원(閔鎭遠)·문정공(文正公) 신 이재(李縡)·고(故) 대사헌(大司憲) 신 민우수(閔遇洙)가 의논에 앞장선 여러 선비와 함께 두어 칸의 집을 세워서 신(神)이 살게 하는 곳으로 삼고 영당(影堂)이라 이름하였습니다. 대개 만듦새를 간략하게 하여 조정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도 불만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으나 공역(工役)이 겨우 끝나자 신유년202) 훼철(毁徹)할 때에 섞여 들어갔으므로, 이때부터 신들이 변변치 않은 나물과 찬물로 작은 정성을 바치려 하더라도 그럴 길이 없었습니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선정에 대하여 느끼는 것이 깊고 높이는 것이 지극하시어 종묘(宗廟)에 배향(配享)하고 화양 서원(華陽書院)에 제사하는 예(禮)가 고금에 드문 것이어서 예전에 이른바 때를 같이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다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라 합니다. 더구나 이제 신들이 주필(駐驆)하신 때에 아뢰고 성상께서 알릉(謁陵)하신 뒤에 윤허하신다면 일이 우연하지 않을 듯하므로 감히 함께 성상께 호소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유사(有司)에 명하여 신들이 당시에 훼철한 터에 두어 칸을 다시 세워 봄·가을로 선정 문정공(文正公) 송시열을 제사하기를 청한 것을 허락하게 하여 우리 천백 년에 드문 군신(君臣)의 아름다운 자취가 후세에 나타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능침에 지알(祗謁)하니 여회(餘懷)가 간절하다. 너희들의 청을 특별히 시행하도록 윤허한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능행(陵幸)은 비록 정례(情禮)가 그만둘 수 없는 데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백성을 괴롭혀 공역(工役)을 일으킨 것은 참으로 민망하니, 부로(父老)인 백성을 소견(召見)하고 대략 글로 내 지극한 뜻을 하유(下諭)하려 한다."
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 이병모(李秉模)에게 명하여 광주(廣州)·이천(利川)·여주(驪州)의 사민(士民)·부로에게 하유하게 하였는데, 윤음(綸音)에 이르기를,
"나 과인(寡人)이 너희들의 부모로서 덕(德)은 너희 백성을 편안하게 할 만하지 못하고 은혜는 너희 백성을 돌볼 만하지 못하여, 해마다 흥수와 가뭄이 있어 너희들이 굶주리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다. 더구나 경기(京畿)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한데 조세가 많고 부역이 많으니, 너희들이 괴로워하고 근심하는 정상을 생각하면 나 과인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 다행히 이제 천심(天心)이 도와 주어 농사가 풍년을 고하는 때에 원릉(園陵)에 지알(祗謁)하고 원습(原濕)203) 에서 수확을 살피는데 익은 곡식이 들에 두루 찬 것을 보고 백성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기뻐하거니와, 너희들이 기뻐하며 서로 고하는 빛을 보니 나도 기쁘다. 아!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를 따라 이 행차를 하되 무릇 백성의 폐해가 되는 것을 여러 고을에 명하여 모두 면제하게 하였으나, 연로(輦路)가 지나는 곳으로 말하면 특별히 혜택을 베푸는 방도가 없을 수 없으니, 세 고을의 사람을 모아 과시(科試)를 설행(設行)하여 뽑고 소민(小民)은 올해 세 고을의 가을 조세를 특별히 줄여 주게 하고 무릇 세 고을의 사서(士庶) 가운데에서 나이가 일흔 이상인 자는 먹을 것을 내려 주고 나이가 여든 이상이고 행행(行幸)을 두 번 겪은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하여 주고 전에 경재(卿宰)를 지낸 일흔 이상인 자로서 가까운 고을에 있는 자도 먹을 것을 내려 주어 임금과 백성이 서로 기뻐하는 뜻을 나타내라.
아! 나 과인은 비록 궁궐 안에 있을지라도 늘 민간의 고통을 생각하므로 혹 은택을 반포하는 정사(政事)가 있으나, 장리(長吏)가 된 자가 흔히 덕의(德意)를 선포하여 실혜(實惠)가 아래까지 다 미치게 하지 못하니 생각할 때마다 아픔이 나에게 있는 듯하다. 이제 너희들은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지러이 모여들어 앞다투어 맞이하는데,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너희들을 대하니, 내 마음에 참으로 부끄러움이 많다. 너희들은 반드시 조종조의 옛 혜택을 생각하고 또 내가 너희들을 어린아이처럼 여기는 뜻을 생각하여 각각 너희 일을 닦고 각각 너희 삶을 편안하게 하여 나 과인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아! 행가(行駕)는 거의 2백 리이고 주필(駐驆)은 8, 9일이니, 무릇 세고을의 사람을 너그러이 돌보고 위로하는 까닭은 상격(常格)과 특별히 달라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또 척화(斥和)하고 사절(死節)한 사람의 자손 홍병찬(洪秉纘)·김이유(金履裕) 등 9인을 행궁(行宮)에서 소견(召見)하였다. 도로 이천 행궁(利川行宮)에 이르러 경기 감사(京畿監司) 정창성(鄭昌聖)·이천 현감(利川縣監) 이단회(李端會)에게 명하여 백성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오게 하고 승지(承旨) 서유방(徐有防)에게 명하여 하유(下諭)하게 하기를,
"먼 길을 동가(動駕)하여 여러 날 동안 주필하였으므로 여러 고을의 백성이 절로 노역(勞役)한 일이 많을 것이니, 내 마음이 민망한 것을 참으로 잠시도 잊을 수 없다. 이미 저치미(儲置米)로 회감(會減)하고 또 추 대동(秋大同)을 감면하라고 명하여 조금이라도 구제하는 방책으로 삼았으나, 이 밖에 또한 어찌 괴롭고 근심되는 단서가 없겠는가? 나 과인이 너희들의 부모로서 아침부터 밤까지 오로지 생각하는 것은 사랑하여 기르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버려져 여위는 걱정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므로 잊혀지지 않는 불안이 마음속에 있어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 이제 연로가 지나는 곳에서 너희들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데리고서 길가에 모여든 것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가 인자한 어머니를 따르는 것 같으니, 내가 그래서 더욱 못 견디게 마음에 부끄럽다. 이제 특별히 너희들을 불러 앞에 나오게 하여 그 병통을 묻고자 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다 아뢰라."
하고, 이어서 서유방에게 명하여 윤음을 읽어 하유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말하기를,
"신들은 삼가 나라의 은혜를 입어 근년 이래로 때가 고르고 풍년이 들어 삶을 즐기고 생업에 안정하니, 참으로 고생하고 의지할 곳 없을 걱정이 없습니다. 또 이번에 모든 사역(事役)에 관한 것을 모두 다 면제하였으므로 조금도 괴로운 단서가 없으니, 신들은 밤낮으로 감축(感祝)할 뿐입니다. 병통이 있다면 부모 앞에서 어찌 꺼릴 것이 있어서 아뢰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정창성이 말하기를,
"고을의 폐단 가운데에서 가장 심한 것은 속전(續田)204) 이 없는 고을 같지 못합니다. 대개 원전(原田)205) 은 등제(等第)가 한번 정해진 뒤에는 비록 재년(災年)을 당하더라도 본디 면제를 허락하는 규례가 없으므로 백징(白徵)206) 하는 폐단을 면하지 못합니다. 강속(降續)207) 으로 말하면 그 일구거나 묵힌 것의 실득(實得)에 따라 늘리고 줄이는 방도가 있으나, 이천(利川) 등 야읍(野邑)은 다 원전(原田)이어서 본디 강속하지 않으므로, 백징하는 폐단이 다른 고을보다 더욱 많습니다. 묵은 것을 살피게 한다면 원전 가운데에서 오래 폐기된 것은 절로 면제해야 하겠습니다마는, 이제 경용(經用)이 모자라는데 실총(實摠)이 줄어들기 때문에 호조(戶曹)에서 번번이 새로 일군 것으로 수를 채운 뒤에야 바야흐로 영구히 면제하여 주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 것이니, 묵은 것을 살피는 한 가지 일은 비록 조정의 명령이 있더라도 거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각 고을에서 전안(田案)을 상고하여 원전 가운데에서 끝내 일굴 수 없는 땅은 그 수령(守令)을 시켜 친히 살펴 사실에 따라 강속하게 하면 실혜(實惠)의 대정(大政)이 될 듯합니다."
하니,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행궁의 뜰 가에 연정(蓮亭)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애련정(愛蓮亭)이라는 것인가?"
하매, 정창성이 말하기를,
"애련이라는 이름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국초(國初)부터 전해 오고 《여지승람(輿地勝覽)》에도 실려 있으며 지금도 임원준(任元濬)이 지은 기문(記文)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애련의 뜻을 주염계(周濂溪)208) 의 애련설(愛蓮說)에서 딴 것인가? 이 정자를 세운 것은 어느 때에 비롯하였는가?"
하매, 정창성이 말하기를,
"고을 안의 고로(故老)에게 물으니, 고(故) 읍쉬(邑倅) 이세보(李世珤)가 처음 이 정자를 세웠고 고 상신(相臣) 신숙주(申叔舟)가 애련이라 편액(扁額)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풍월정집(風月亭集)》에 ‘파서 새 못 만들고 연도 심으니, 풍류 사랑스럽고 주인 어질다.’라 한 것이 있는데, 이 정자를 이른 것인가?"
하매, 정창성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기에서 양근(楊根)까지의 거리가 몇 리쯤이나 되는가?"
하매, 정창성이 말하기를,
"수십 리에 지나지 않는 곳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연로(輦路)에서 구경하는 백성이 많은 것은 처음 본다 하겠다. 저 많이 모인 자가 다 내 백성인데, 어떻게 하면 한 사람도 안정할 바를 얻지 못하는 한탄이 없게 하겠는가? 한 사람이라도 얻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밀어서 도랑 속에 넣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선조(先朝) 경술년209) 행행(行幸) 때에 고 상신(相臣) 민진원(閔鎭遠)이 여주(驪州)의 청심루(淸心樓)를 숙소로 삼기를 우러러 청하였는데, 대개 하루 안에 두 능(陵)에 전배(展拜)하고 이천(利川)으로 돌아가자면 1백여 리를 왕래하느라 반드시 밤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에는 미처 수리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 신하들이 또한 많았으므로 그렇게 하지 못하였고, 숙묘(肅廟)무진년210) 에도 이천을 숙소로 삼았으므로 계명(鷄鳴)이 지나서야 행궁에 이르렀다. 이번 행차에는 이런 폐단을 염려하여 여주에서 밤을 지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14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註 198]기해년 : 1779 정조 3년.
- [註 199]
황려(黃驪) : 여주의 옛 이름.- [註 200]
갱장(羹墻) : 전왕(前王)을 사모한다는 말임. 옛날에 요제(堯帝)가 별세한 후에 순제(舜帝)가 3년 동안을 앙모(仰慕)했는데, 앉으면 요제를 담[墻] 안에서 보고, 밥을 먹으면 요제를 국[羹] 그릇에서 보았다는 고사(古事)가 있음.- [註 201]
신해년 : 1731 영조 7년.- [註 202]
신유년 : 1741 영조 17년.- [註 203]
원습(原濕) : 높고 건조한 땅과 낮고 축축한 땅.- [註 204]
속전(續田) : 원전(元田) 이외의 전답으로서 토질이 척박(瘠薄)하여 매년 경작하지 못하고 혹은 경작하기도 하고 혹은 묵히기도 하는 전지(田地).- [註 205]
원전(原田) : 양안(量案)을 고칠 때 원장(元帳)에 기록된 전지.- [註 206]
백징(白徵) : 조세(租稅)를 면제할 땅이나 납세 의무가 없는 사람에게 세금을 물리거나, 아무 관계 없는 사람에게 빚을 물리는 일.- [註 207]
강속(降續) : 해가 오래도록 전지가 진폐(陳廢)되어 등급을 낮추어 세(稅)를 감한 뒤에, 경작하기를 원치 아니하면 또 강등해서 속전(續田)으로 하여 그 기전(起田)함에 따라 수세(收稅)하는 것. 곧 강속전(降續田)을 이름.- [註 208]
○丁巳/上御驪州行宮, 命領議政金尙喆、左議政徐命善、戶曹參判宋德相、行副司直金亮行入侍, 謂亮行曰: "予之一欲見卿之心, 不翅如渴思飮, 而前此敦召, 亦云屢矣。 誠意淺薄, 莫回遐心, 今始相見, 予心欣喜。 當初銓任之除拜, 意有所在, 而緣卿苦辭, 亦未免許解, 以便卿心, 以開進路, 而歉歎則深矣。" 亮行曰: "臣本少孤失學, 才識魯莾, 而濫廁抄選之列, 私心愧恧, 若無所容。 殿下御極以後, 連下敦召, 辭旨懇眷。 臣惶恧感激, 不敢一向違傲, 敢以調病登程之意, 前此仰達, 而素患宿痾, 近又添發, 尙此縮伏, 不勝惶悚。 今幸於輦路之傍, 祗瞻羽旄之盛, 而職名未解, 進身無路, 屢犯違傲, 只俟罪何, 伏蒙曲諒之恩, 至下特遞之音, 感激恩遇, 匍匐登對, 昵侍行宮, 親承德音。 自此以後, 雖卽退塡溝壑, 庶無餘憾矣。" 上曰: "卿以山林宿德, 負山斗之望, 而丘園之束帛徒勤, 空谷之蒲輪莫回, 此皆予誠淺禮薄, 不能感孚之致。 今於謁陵之行, 路過式閭之地, 庶冀因此而相逢。 何幸不我遐棄, 幡然登對, 企待之餘, 實不勝慰倒也。 今旣相面, 可以繼此, 頻頻得見, 而駕還之時, 因與偕行, 是予所望也。" 亮行曰: "臣賤疾沈綿, 實無自力之望, 而恩敎至此, 謹當隨後入城矣。" 上曰: "行宮霎見, 雖未從容, 渴望之餘, 幸得相面。 嘉言、盛誨, 可以得聞乎?" 亮行曰: "歲回己亥, 禮展仙陵。 伏想聖念, 尤切愴感。 伏惟孝宗大王痛倫常之墜地, 秉春秋之大義, 奮發志慮, 將欲一伸於天下萬世, 而臣民無祿, 仙馭遽賓。 東土遺民, 尙泣日暮途遠之敎, 其所繼述志事之責, 豈不在於我殿下乎? 上曰: "儒賢年幾何, 而鬚髮盡白乎?" 亮行曰: "年今六十五, 而髮則盡白矣。" 上曰: "坐, 予欲見面也。" 亮行曰: "臣亦願瞻天顔矣。" 上許之。 亮行平立, 有頃, 又俯伏曰: "臣今日得瞻天顔, 雖明日死, 實無恨矣。" 上謂承旨曰: "昨於路傍, 見儒生疏, 以先正院宇建立事, 爲請矣。 此邑, 乃孝廟陵寢之地, 又先正杖屨之所, 則建俎豆之享, 略寓一體祭祀同之義。 於情於禮, 似無不可, 而院宇疊設, 旣有先朝禁令。 予於嗣服後, 凡諸建院之請, 亦未嘗允許。 至於此地, 則予欲拔例許施矣。" 命入儒疏。 京畿儒生鄭雲紀等上疏曰:
以我孝宗大王之聖, 將以伸大義於天下, 而所與密勿謨猷者, 實先正臣宋時烈一人, 則雖其中途賓天, 事功未究, 而風聲所樹, 式至于今。 苟千載之下, 讀寧陵之誌, 而不流涕呑聲者, 臣知非忠臣、志士也。 況玆黃驪一域, 幸而爲陵寢所在。 故習聞先正, 於孝廟弓劍旣藏之後, 往來此鄕, 瞻望象設, 以寓羹墻之慕, 而時於陵崗相望處, 露坐終夜, 泣涕如雨。 故老往往有指其遺躅, 而咨嗟者。 其時又有志感之作。 有曰: ‘夜久月沈陵栢暗, 不知何處跪陳辭。’ 詩意惻怛慷慨, 有足以泣鬼神。 一方人士, 傳誦說道, 愈久而不衰。 是以, 前輩之至是邦者, 皆言此地不可無先正俎豆之享。 顧因建祠有朝禁, 趑趄未敢。 嚮在辛亥年間, 文敬公臣鄭澔、文忠公臣閔鎭遠、文正公臣李縡、故大司憲臣閔遇洙, 相與倡議多士, 營立數間屋子, 以爲棲神之所, 而名以影堂。 蓋欲草略之制, 無違於朝令, 無歉於人心, 而工役纔完, 混入於辛酉毁撤之際。 自此, 臣等雖欲以寒藻冽泉, 一薦其微誠, 而其路末由矣。 臣等伏聞, 聖上之於先正, 感之也深, 尊之也至, 淸廟之配, 華陽之祀, 禮曠今古, 不但古所謂恨不同時而已。 況今臣等陳之於駐蹕之辰, 聖上許之於謁陵之後, 事若不偶, 玆敢相率叫閽。 伏願聖明, 亟令有司, 許臣等所請重建數楹於當日毁撤之址, 春秋以享先正文正公臣宋時烈, 俾我曠千百歲君臣之美蹟, 表揭來後。
批曰: "祗謁陵寢, 餘懷憧憧。 爾等之請, 特爲許施。" 上曰: "今玆陵幸, 雖出於情禮之不容已, 而勞民興役, 實爲矜悶。 父老民人, 欲爲召見, 而略以文字, 諭予至意。" 命右副承旨李秉模, 諭廣州、利川、驪州士民父老綸音。 若曰:
予寡人, 爲爾等父母, 德不足以綏爾黎庶, 恩不足以惠爾黎庶。 頻年水旱, 俾爾等不免飢荒之憂。 矧玆畿甸, 土瘠而民貧, 賦繁而役殷, 念爾等困苦愁惱之狀, 予寡人錦玉靡安。 幸今天心垂佑, 穡事告登, 園陵祗謁, 原隰省歛, 覩黃雲之遍野, 喜蒼生之安堵, 見爾等欣欣相告之色, 予亦爲之嘉悅。 噫! 式遵祖宗朝故事, 爰有此行, 而凡爲下民之弊者, 命諸邑一竝蠲除之。 至若輦路所過之處, 不可無別般施惠之道, 聚三邑之人。 設科而取之, 小民則今年三邑秋賦, 特令減之, 凡三邑士庶年七十以上, 賜食物;年八十以上, 再經幸行者, 各賜一資;曾經卿宰年七十以上在近邑者, 亦賜食物, 以表君民相悅之意。 嗚呼! 予寡人雖居九重, 每念民間疾苦, 或有頒恩布澤之政, 而爲長吏者, 多不能宣布德意, 使實惠下究, 時一思之, 若恫在己。 今見爾等, 扶老擕幼, 紛集爭迎, 而予爲爾等, 不能盡父母之責, 對爾等, 予心實多慙愧。 爾等頒思祖宗朝舊澤, 且念予視爾等, 如赤子之意, 各修爾業, 各安爾生, 母負予寡人至意。 噫! 行駕殆二百里, 駐蹕乃八九日, 凡所以優恤慰勞於三邑之人者, 特異於常格而然也。
上又召見斥和死節人子孫洪秉纉、金履裕等九人于行宮, 還至利川行宮, 命京畿監司鄭昌聖、利川縣監李端會, 率民人進前。 命承旨徐有防諭之曰: "遠路動駕, 多日駐蹕, 列邑民人, 自多勞役之事, 予心矜悶實不能須臾忘也。 旣以儲置米會減, 又命秋大同蠲減, 以爲一分救濟之策, 而此外亦豈無疾苦愁冤之端乎? 予寡人爲爾等父母, 夙宵一念, 常恐不能盡子育之道, 未免有捐瘠之患, 故耿耿在中, 錦玉靡安。 今於輦路之過, 見爾等扶老擕幼, 紛集道傍, 有若赤子之就慈母, 予於是, 益不勝歉愧于心矣。 今者特召爾等, 使進於前, 欲問其弊瘼, 爾等其皆陳達。" 仍命有防讀諭綸音。 民人等曰: "臣等伏蒙國恩, 近歲以來, 時和年豐, 樂生安業, 實無窮厄顚連之患。 且於今番凡干事役, 竝皆除免, 無一困苦之端, 臣等只有晝夜感祝而已。 如有弊瘼, 則父母之前, 豈有所諱而不爲陳達乎?" 昌聖曰: "邑弊之中, 最甚者莫如無續田邑。 蓋原田等第一定之後, 雖逢災年, 元無許免之規。 故不免白徵之弊。 至於降續, 則隨其起陳之實得, 有盈縮之道。 而利川等野邑, 則皆是原田, 而初不降續, 故白徵之弊, 比他邑尤多。 若令査陳, 則原田之久廢者, 自當應免, 而但今經用匱乏, 實摠減縮, 故戶曹每以新起充數, 然後方許永免。 査陳一事, 雖有朝令, 而亦難擧行。 臣意, 各邑詳考田案, 原田中終不可起墾之土。 使該守令, 親執行査, 從實降續, 似爲實惠之大政矣。" 命廟堂稟處。 上曰: "行宮庭邊, 有蓮亭, 此所謂愛蓮亭乎?" 昌聖曰: "愛蓮之稱, 其來已久, 傳自國初, 又載《輿地勝覽》, 至今有任元濬所製之記文矣。" 上曰: "愛蓮之義, 取周濂溪愛蓮說乎? 此亭之建, 始於何時?" 昌聖曰: "問於邑中故老, 則故邑倅李世珤始建此亭, 而故相臣申叔舟, 以愛蓮爲扁云矣。" 上曰: "《風月亭集》中, 有鑿得新塘又種蓮, 風流可愛主人賢者, 謂此亭耶?" 昌聖曰: "然。" 上曰: "此距楊根爲幾許里?" 昌聖曰: "不過數十里之地也。" 上曰: "今番輦路, 觀光民人之多, 可謂初見。 彼林林葱葱者, 皆予赤子也。 何以則使無一夫不獲之歎乎? 一有不獲, 是何異於推而納諸溝中也?" 上又曰: "先朝庚戌行幸時, 故相閔鎭遠, 以驪州 淸心樓, 爲宿所仰請。 蓋以一日之內, 展拜兩陵, 還到利川, 則百餘里往來, 必至侵夜故耳。 其時諸臣, 亦多爲言, 以未及修理不果。 肅廟戊辰, 亦以利川爲宿所, 故鷄鳴後, 始到行宮。 今行則蓋慮此弊, 不得不經夜於驪州矣。"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14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註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