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산성에 행행하여 백성과 군대의 상태를 살피다
임금이 장차 영릉(寧陵)에 전배(展拜)하려고 이날 남한 행궁(南漢行宮)에 머물렀다. 융복(戎服)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나가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이제 먼 능(陵)에 행행(行幸)할 때를 당하여 예(禮)로서는 태묘(太廟)에 전배해야 하겠으나 이미 관원을 보내어 경모궁(景慕宮)에 고유(告由)하라고 명하였으니, 지금 막 또한 몸소 절하여 나갈 때에는 반드시 고한다고 뜻을 붙인다. 또 선조(先朝)에서는 번번이 능알(陵謁)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진전(眞殿)에 전배를 행하셨으니, 나 소자(小子)가 늘 닦아 계술(繼述)할 바이다."
하고, 이어서 만안문(萬安門)을 거쳐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만안문을 거쳐 돌아와 여를 타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정상순(鄭尙淳)·훈련 대장(訓鍊大將) 홍국영(洪國榮)에게 말하기를,
"이번 행행은 길이 매우 머니, 가까운 능에 동가(動駕)하는 데에 견줄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하지 않고 군병이 연습하지 않아서 번번이 행군(行軍) 때를 당하면 비록 1사(舍)176) 인 곳일지라도 조금만 달리면 문득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하는데, 장수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은 예사로 여긴다. 또 더구나 훈장(訓將)은 곧 삼군(三軍)의 사명(司命)이고 원융(元戎)은 국사의 중임(重任)임에랴? 예전 당(唐)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초기에 여산(驪山)에서 강무(講武)하였는데 군법(軍法)의 실의(失儀) 때문에 병부 상서(兵部尙書) 곽원진(郭元振)을 처벌한 것을 사가(史家)가 이제까지도 일컫는다. 오직 이 하교는 군사에서 서계(誓戒)하는 것과 같으니, 훈장은 힘쓰라. 거가(車駕)를 호종(巵從)하는 일과 위내(衛內)를 돌며 경계하는 것으로 말하면 또한 본병(本兵)의 임무이니, 병판(兵判)도 힘쓰라."
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이 신전(信箭)177) 을 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신전은 곧 하사받은 물건이다. 내가 청정(聽政)하던 초기에 선대왕(先大王)께서 이것을 나에게 내리셨는데, 대개 궁중에 전해 오던 물건이다. 예전부터 번번이 사행(師行) 때를 당하면 반드시 이 신전을 가전(駕前)에 세운 것은 오로지 정벌(征伐)의 뜻이다."
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말을 타고 흥인문(興仁門)을 나갔다. 관왕묘(關王廟)178) 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송조(宋朝)에서 군행(軍行)하면 반드시 절한 예(禮)에 따라 아조(我朝)의 숙조(肅祖)·영고(英考)께서도 전배하셨으니, 나 소자가 감히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관왕묘에 나아가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화양정(華陽亭)에 이르렀을 때에 가랑비가 내리다가 광진(廣津)의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렀을 때에 갰는데, 길을 끼고 구경하는 서울 백성을 막지 말라고 명하였다. 선창소(船艙所)에 이르러 병조 판서 정상순이 아뢰고 승선포(陞船砲)를 쏘니, 임금이 용주(龍舟)에 타고 선상(先廂)의 장사(將士)와 용호영(龍虎營)의 장사는 용주의 왼편 예선(曳船) 밖에서, 후상(後廂)의 장사와 경기영(京畿營)의 기고(旗鼓)는 용주의 오른편 예선 밖에서 함께 용주를 끼고 거가를 호종하여 건넜다. 정상순이 아뢰고 행선포(行船砲)를 쏘고 기화(起火)를 올리고 대취타(大吹打)하니 각영(各營)에서 다 응하였는데, 어영진(御營陣)에서 거듭 쏘았으므로 어영 대장 이경무(李敬懋)에게 명하여 기과(記過)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선조(先朝) 무자년179) 거가를 배종(陪從)하여 헌릉(獻陵)에 갈 때에 이 나루를 건넜는데, 그때에는 군기시(軍器寺)의 관원이 협선(挾船)에서 호령을 잘못듣고 제때가 아닌데 포를 쏘았으므로 해당 관원을 삼군에 회시(回示)하라고 명하셨다. 이번에도 잘못 쏜 일이 있는 것은 전후의 일이 서로 같으니, 우연하지 않다 하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무자년 행행 때의 일기도 오늘과 같아서 마장(馬場)에 이르렀을 때에 잠깐 비가 내리다가 주정소에 이르렀을 때에 곧 개었는데, 이제도 그러하였다. 군병이 젖는 걱정을 면하였을 뿐더러 날씨가 맑고 매우 덥지도 않으니, 매우 다행스럽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잠깐 비가 내리다가 곧 개어 어로(御路)에 먼지가 없고 군병이 모두 젖는 것을 면하였으니, 참으로 기쁩니다. 신이 무자년에도 배반(陪班)으로서 여기에 이르렀는데, 일기가 전후에 서로 같은 것이 과연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이 행차는 참으로 선지(先志)를 따른 것인데, 다시 이 강을 건너며 우러러 옛날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느끼고 사모하는 것을 어떻게 스스로 누르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시신(侍臣)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산에 가득히 찬 것은 백성이고 들에 두루 찬 것은 익은 곡식이다. 농사가 다행히 풍년을 얻은 것은 참으로 하늘이 돌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덕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조금이라도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해를 이어 풍년이 들기를 바야흐로 절실히 빌거니와, 백성으로 말하면 담장처럼 늘어서서 억만(億萬)으로 셀만하다.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데리고서 메우고 막아 두루 찼는데, 내가 오늘 이 곳에 와서 이 백성을 대하니, 오가는 마음은 한 사람이라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할 방도를 생각하는 것이다마는, 믿는 것은 또한 경들이 협력하여 보좌하는 공(功)에 달려 있다."
하매,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한 사람이라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실 생각으로 마음에서 염려하매, 참으로 능히 이 마음을 미루어 실정(實政)을 행하여 어선(御船)에서 생각하신 것을 궁중에 계실 때에 조금도 소홀해지지 않게 하신다면 백성의 행복이고 국가의 행복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백성에게 왔으니, 더욱 절실히 조심한다. 대저 사람의 마음이 느끼는 것은 흔히 사물을 만날 때에 있거니와, 옛사람이 이른바 유(類)를 따라서 부연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우리 성조(聖祖)께서 주수도(舟水圖)를 만들고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그 명(銘)을 짓고 그 일에 대하여 서문(序文)을 쓰게 하셨다."
하고, 이어서 배에 있는 신하들에게 음식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옥당(玉堂) 권이강(權以綱)·윤행원(尹行元)·오대익(吳大益)·서유성(徐有成)·조정진(趙鼎鎭)·심낙수(沈樂洙)·윤행수(尹行修)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군중(軍中)의 기율이 얼마나 엄중한 것입니까? 그런데 어영(御營)의 진중(陣中)에서 잘못 방포(放砲)하여 제영(諸營)이 응포(應砲)하게 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죄가 군율(軍律)에 관계되니, 해당 대장(大將)은 삭직(削職)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어영 대장 이경무의 벼슬을 삭탈(削奪)하고 이주국(李柱國)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율목정(栗木亭)에 이르러 갑주(甲胄)로 갈아 입고 말을 탔고,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이 중군(中軍)과 각 영장(營將)과 기고(旗鼓)를 거느리고 영접하였다. 임금이 남문(南門)으로 들어가 행궁에 들어가서 정당(正堂)에 나아가니, 수어사가 참현(參現)하였다. 임금이 갑주를 벗고 융복(戎服)을 입고서 호가(護駕)한 대신(大臣)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와 각무 차사원(各務差使員)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행행이라는 것은 백성이 거가의 행림(行臨)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거가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는 은택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다 이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제 내 거가가 이곳에 왔으니, 저 백성이 어찌 바라는 뜻이 없겠는가? 옛사람이 이른바 행행의 의의를 실천한 뒤에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으니, 경들은 각각 백성을 편리하게 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을 아뢰라."
하매, 영의정 김상철이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여 우러러 아뢰겠다고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이 곳에 왔고 또 이 궁(宮)에 임하였으니, 옛일을 생각하여 느껴지는 마음을 참으로 스스로 누를 수 없다. 일찍이 고사(古事)를 보니, 병자년180) 성조(聖祖)께서 이 궁에 계실 때에 한군(汗軍)이 한봉(汗峰)에 올라 대포(大砲)를 쏘아서 포환(砲丸)이 전주(殿柱)를 쳤으므로 성조께서 후내전(後內殿)으로 이어(移御)하셨다 하였는데, 이 전이 바로 그때 계시던 전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무비(武備)는 요즈음 더욱 허술해져서 백성은 북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군병은 좌작 진퇴(坐作進退)의 절차를 알지 못하는데 하루 이틀 세월만 보내니, 병자란 때의 일을 생각한다면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어찌 이처럼 게으를 수 있겠는가? 날은 저물고 길은 머니, 성조께서 이 때문에 조정에서 탄식하셨고 선정(先正)이 이 때문에 상소에 여러 번 아뢴 것이다. 우리 나라는 작은 접역(鰈域)181) 으로서 예의를 대강 아는 지방이므로 세상에서 중화(中華)라는 일컬음이 있었으나, 이제는 인심은 점점 안일에 길들게 되고 대의(大義)는 점점 더욱 자취를 감추어, 북으로 가는 예물(禮物)을 예사로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다시 볼 수 없고 중국안[神州]의 더러운 〈오랑캐를〉 다시 제거할 수 없는데, 오직 이 북원(北苑)의 작은 단(壇)에 나라를 지키는 정성을 조금 붙여서 대명(大明)의 일월(日月)이 한 구역의 나라를 비출 뿐이니, 후세에 할말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해를 당하여 효묘(孝廟)께서 성취하지시 못한 지사(志事)를 우러러 생각하니, 못견디게 강개하고 격앙된다. 돌이켜보면 이제 민력(民力)이 조잔(凋殘)하고 경비(經費)가 아주 없는 때이니 어찌 반드시 먼 길의 행행을 해야 하랴마는, 이 기해년182) 을 당하여 영릉에 가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열읍(列邑)에서 공억(供億)하는 폐단과 각영(各營)에서 어려움을 겪는 노고를 먹고 숨쉬는 사이에 잠시라도 잊은 적이 있겠는가?"
하매,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오늘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곳은 병자년에 난리를 겪는 곳입니다. 성하지맹(城下之盟)183) 은 옛부터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므로, 이제까지도 이곳을 지나는 인사(人士)는 누구나 다 가리키며 상심하고 팔을 걷어붙이고 흥분하니, 더구나 신충(宸衷)에 흥감(興感)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오직 우리 효종 대왕께서 와신 상담(臥薪嘗膽)184) 의 뜻을 돋우고 복수하여 설욕할 방책을 강구하여 장차 인조(仁祖)께서 성취하시지 못한 지사를 이룸으로써 천하(天下)의 이미 끊어졌던 대의(大義)를 펴려 하다가 불행히 큰 사업을 반을 이루지 못하고 신민을 버리셨으니, 이것이 충신·열사가 마음 아파 피눈물을 흘려 마지않는 까닭입니다. 이제 우리 전하께서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고 계술(繼述)할 계책을 강구하시거니와, 계술하는 방법을 형정(刑政)을 수명(修明)하고 인재를 수습하여 군병을 기르고 재용(財用)을 정리하는 몇가지 일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가서 토벌하는 것은 경솔히 의논할 수 없겠으나, 《춘추(春秋)》의 존양(尊攘)185) 하는 의리는 천하 만세(天下萬世)에 없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수어청(守禦廳)의 오영(五營)의 제도는 어떠한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좌영(左營)·우영(右營)에 각각 별장(別將)이 있는데 곧 경영(京營)의 장관(將官)이며, 전영(前營)은 광주(廣州)이고 후영(後營)은 죽산(竹山)이고 중영(中營)은 양주(楊州)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총(軍摠)은 모두 얼마나 되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1만 5천 7백 14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영(本營)의 군총은 얼마인가?"
하매, 광주 부윤(廣州府尹) 송환억(宋煥億)이 말하기를,
"본주(本州) 소관은 2천 8백 14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영의 조련(操鍊) 때에 좌영은 동장대(東將臺)에 진치고 우영은 서장대(西將臺)에 진치고 전영은 남장대(南將臺)에 진치고 중영은 북장대(北將臺)에 진치고 후영은 동장대에 진쳐서 성을 엄하게 한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서 남북에 다 장대(將臺)가 있는데 중장대(中將臺)라 칭하는 것만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대개 성안의 지형이 가운데가 오목하고 사방이 높아서 그러한가?"
하매, 송환억이 말하기를,
"중장대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지형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본영에서 습조(習操)하는 횟수를 물으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해마다 다섯 영이 각각 한번 윤조(輪操)하고 3년이면 다섯 영이 한 번 합조(合操)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조(私操)·정조(正操)의 방법은 어떠한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가령 오늘 군병을 모았으면 그 이튿날에 사조하고 셋째 날에 정조하고 넷째 날에 주조(晝操)·야조(夜操)하고 다섯째 날에 호궤(犒饋)186) 하고 이어서 사방(射放)187) 을 시험하고 여섯째 날에 각 군병들을 파하여 돌려 보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영의 둔전(屯田)은 얼마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광주(廣州)에 있는 둔전이 여섯 곳이고 과천(果川)에 있는 것이 한 곳이고 용인(龍仁)에 있는 것이 세 곳이고 양지(陽智)·영평(永平)·이천(利川)·지평(砥平)·원주(原州)·홍천(洪川)·평택(平澤)·충주(忠州)·김해(金海)·창원(昌原)·부안(扶安)·장흥(長興)·해주(海州)·정주(定州)·직산(稷山)·진위(振威)·영동(永同)·재령(載寧)·횡성(橫城)에 있는 것이 각각 한 곳이니, 합하여 스물아홉 곳이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병신년188) 즉위한 처음에 명하여 여러 궁방(宮房)에서 절수(折受)189) 하는 것을 폐지하고, 재령의 둔전을 궁방과 서로 다투는 폐단을 깊이 알기 때문에 특별히 명하여 본청(本廳)에 도로 붙이게 하였는데, 참으로 군향(軍餉)은 체례(體例)가 중대하여 궁장(宮庄)과 서로 대등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의 아우인 좌상(左相)이 본청에 있을 때에 특교(特敎)에 따라 이 둔(屯)을 다시 본청에 붙였습니다. 그 뒤에는 잇달아 교련관(敎鍊官)·군관(軍官) 가운데에서 둔감(屯監)을 차출하여 보내어 해마다 쌀로 세(稅)를 거두었는데 거두는 것이 거의 1천 금(金)에 가깝고, 그 밖에 둑을 막고 배를 바다에 뛰우는 비용은 이 가운데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본영에 이 둔이 없었으면 손댈 데가 없었다 할 것인데, 다행히 특별한 은혜를 입어 이처럼 도로 붙이는 일이 있었으니, 본영에 유익한 것이 참으로 적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주(本州)의 호구(戶口)는 얼마인가? 일찍이 들으니, 성안의 민호(民戶)는 겨우 천수(千數)를 넘을 뿐이라 하는데, 그러한가?"
하매, 송환억이 말하기를,
"성안의 민호는 1천여 호인데, 남자는 2천여 구(口)이고 여자는 2천 3백 구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 부(府)를 통틀어 호구가 얼마나 되는가?"
하매, 송환억이 말하기를,
"민호는 1만 6백여 호이고 인구는 4만 8천여 구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구의 잡역(雜役)은 그 단서가 같지 않아서 연호(煙戶)가 있고 계치(鷄雉)·시초(柴草) 등의 명색이 있는데, 이러한 호역(戶役)에 폐단이 없을 수 있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고(故) 부윤(府尹) 서종헌(徐宗憲)이 잡역가미(雜役價米)의 제도를 새로 세워 모든 잡물을 다 관가에서 사서 썼고, 동가(動駕)·능역(陵役) 때의 잡물과 사신이 왕래할 때에 시초를 진배(進排)하는 등의 역(役)으로 말하면 고 부윤 남태온(南泰溫)이 책응고(策應庫)를 세워서 응하고 잡물의 진배는 일체 폐지하였으므로, 이제는 성안 행궁의 사소한 역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주의 창름(倉廩)은 얼마나 되는가?"
하매, 송환억이 말하기를,
"7고(庫) 11창(倉)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저축한 향곡(餉穀)이 가장 많고 경영(京營)의 별비(別備)로 말하면 고 판서(判書) 조관빈(趙觀彬)이 으뜸이었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산성의 군향곡(軍餉穀)을 조치하는 등의 일은 다 김석주가 마련한 것이고 조관빈은 또한 별비한 것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영에 해마다 들어오는 수는 통틀어 얼마이며 한 해에 지출하는 것 밖에도 남는 것이 있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본영의 재물이 남고 모자라는 것은 본디 마땅한 사람을 얻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마는, 근년 이래로는 번번이 모자라는 것을 걱정합니다. 내영(內營)에 해마다 들어오는 것은 잡곡 이외에 쌀이 2천여 석(石)에 지나지 않고 외영(外營)에 해마다 들어오는 것도 그러하여 해마다 쓰는 것 밖에는 남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묘(仁廟)갑자년190) 성을 쌓을 때에 중[僧] 각성(覺性)이라는 자가 팔도 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팔도의 승군(僧軍)을 불러 모아 부역(赴役)하였는데, 이어서 명하여 이 성에 있게 하셨다. 대개 승군의 제도는 이때에 비로소 크게 갖추어졌다 하는데, 경들도 들었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과연 이때에 창설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112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법(兵法) / 군사-병참(兵站)
- [註 176]1사(舍) : 30리.
- [註 177]
신전(信箭) : 임금이 교외(郊外)에 거둥할 때 선전관(宣傳官)을 시켜서 각영(各營)에 군령을 전하는데 쓰던 화살. 수효는 다섯인데 살촉에 ‘영(令)’ 자를 새기었고, 깃 아래에 ‘신(信)’ 자를 쓴 삼각형의 각색 비단 조각의 표를 하나씩 나누어 달았음.- [註 178]
관왕묘(關王廟) : 동대문 밖에 있는 동관왕묘. 곧 동묘(東廟)를 이름.- [註 179]
무자년 : 1768 영조 44년.- [註 180]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181]
접역(鰈域) : 가자미 형국과 같다는 뜻으로 우리 나라의 별칭.- [註 182]
기해년 : 1779 정조 3년.- [註 183]
성하지맹(城下之盟) : 적군이 성밑까지 쳐들어 와서 항복하고 체결(締結)하는 맹약(盟約), 대단히 굴욕적인 강화(講和).- [註 184]
와신 상담(臥薪嘗膽) :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怨讐)를 갚고자 고생을 참고 견디는 일. 춘추 시대에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쳐서 부왕의 원수를 갚고자 매양 섶위에 누워서 신고(辛苦)를 참았고, 또 월왕 구천은 후일 오나라를 쳐서 회계(會稽)의 치욕을 씻고자 쓸개를 핥으며 보복을 잊지 않았다는 고사(故事).- [註 185]
존양(尊攘) : 왕실(王室)을 존중하고 이적(夷狄)을 배척함.- [註 186]
호궤(犒饋) :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 [註 187]
사방(射放) : 활쏘기와 총포 쏘기.- [註 188]
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註 189]
절수(折受) : 임금에게서 봉록으로 토지 또는 어전(魚箭)·염장(鹽場)을 자기 몫으로 떼어 받던 일.- [註 190]
갑자년 : 1624 인조 2년.○甲寅/上將展拜寧陵。 是日, 次南漢行宮具戎服, 乘輿, 出仁和門, 至仁政殿 月臺, 敎曰: "今當遠陵行幸, 禮當展拜太廟, 而旣命遣官告由景慕宮, 則纔亦躬拜, 以寓出必告之意。 且於先朝, 每當陵謁之時, 必行展拜於眞殿, 予小子所常修述也。" 仍由萬安門, 詣璿源殿展拜。 還由萬安門乘輿, 謂兵曹判書鄭尙淳、訓鍊大將洪國榮曰: "今者行幸, 程路甚遠, 非比近陵動駕。 我國文治是尙, 武備不修, 故人不習兵, 兵不習鍊, 每當行軍, 雖於一舍之地, 少或驅馳, 則輒皆喘息靡定, 將不爲怪, 軍兵以爲常。 又況訓將, 卽三軍司命;元戎, 乃國家重任? 昔唐 玄宗 開元之初, 講武驪山, 因軍法失儀, 置兵部尙書郭元振於法, 史至今稱之。 惟玆之敎, 與誓師同, 訓將, 其勉之。 至於扈駕事務、衛內巡綽, 亦是本兵之任, 兵判亦勉旃。" 宣傳官請出信箭。 上曰: "此信箭, 卽受賜之物。 予於聽政之初, 先大王以此錫予, 蓋宮中流傳之物也。 自昔每當師行之時, 必立此箭於駕前, 卽專征伐之意也。" 上至仁政門外乘馬, 出興仁門, 至關王廟, 上曰: "以宋朝軍行必拜之禮, 我朝 肅祖、英考, 亦行展拜。 予小子敢不遵行?" 仍詣廟行再拜禮。 至華陽亭微雨。 至廣津 晝停所晴。 命勿禁都民之挾路觀光者, 至船凔所, 兵曹判書鄭尙淳啓放陞船砲。 上御龍舟, 先廂將士、龍虎營將士, 在龍舟之左曳船之外。 後廂將士、京畿營旗皷, 在龍舟之右曳船之外, 俱挾龍舟扈駕而渡。 尙淳啓放行船砲, 擧起火, 大吹打。 各營皆應之。 御營陣疊放, 命御營大將李敬懋記過。 上曰: "予於先朝戊子, 陪駕詣獻陵, 渡此津, 而伊時, 則軍器寺官, 在挾船, 誤聽號令, 非時放砲, 命回示該官員於三軍。 今番又有誤放之擧, 先後事之相符, 亦可謂不偶矣。" 又敎曰: "戊子年行幸時, 日氣亦如今日。 到馬場乍雨, 到晝停卽晴。 今亦然。 不但軍兵免沾濕之患, 天氣昭朗, 亦不甚熱, 殊可幸也。" 領議政金尙喆曰: "乍雨卽晴。 御路無塵, 軍兵俱免沾濕, 實爲欣幸。 臣於戊子年, 亦以陪班到此。 而日氣之前後相符, 果如聖敎。" 上曰: "今日此行, 寔遵先志, 而復渡此江, 仰惟昔日, 予懷感慕, 何以自抑?" 上顧謂侍臣曰: "漫山赤子, 遍野黃雲。 年事之幸獲登稔, 寔由於皇天之眷顧。 惟予否德, 豈或致此乎? 嗣歲之屢登, 方切祈祝。 至於民人, 如堵如墻, 可以億萬計。 扶老携幼, 塡咽委滿。 予於今日, 臨此地對此民, 憧憧一念, 思所以無一夫不獲之方, 而所恃者, 亦在於卿等協輔之功也。" 尙喆等曰: "殿下以無一夫不獲之念, 耿耿于中, 誠能推是心做實政, 無使御船上之念, 或忽於處宮中之時, 則生民之幸, 國家之幸。" 上曰: "君猶舟也, 民猶水也。 予今御舟臨民, 益切兢惕矣。 大抵人心之感, 多在於遇物之時, 古人所謂觸類而長者也。 昔我聖祖, 作舟水圖, 命詞臣撰其銘、序其事矣。" 因命宣饌船上諸臣。 玉堂權以綱、尹行元、吳大益、徐有成、趙鼎鎭、沈樂洙、尹行修請對, 啓言: "軍中紀律, 何等嚴重? 而御營陣中, 誤爲放砲, 以致諸營之應砲, 事極驚駭。 罪關軍律, 當該大將削職宜矣。" 削御營大將李敬懋職, 以李柱國代之。 至栗木亭, 改御甲冑乘馬。 守禦使徐命膺, 率中軍、各營將, 旗皷迎接。 上入南門, 入行宮御正堂。 守禦使參現。 上釋甲冑, 御戎服, 命護駕大臣、京畿觀察使、各務差使員入侍。 上謂諸臣曰: "行幸云者, 民幸其車駕之行臨也。 車駕所臨, 必有恩澤之及於民者, 故民皆以此爲幸也。 今予駕到此地, 彼小民, 豈無顒望之情乎? 古人所謂行幸之義, 實踐之, 然後無愧於心。 卿等各陳便民捄弊之策。" 領議政金尙喆, 請與諸臣。 相議仰達。 上曰: "今來此地, 又臨此宮。 追感之懷, 實不能自抑。 曾見古事, 粤在丙子, 聖祖御此宮, 汗軍登汗峰, 發大砲, 砲丸擊殿柱。 聖祖移御後內殿云。 此殿, 卽其時所御之殿乎?" 命膺曰: "然。" 上曰: "我國武備, 近益踈虞, 民不聞桴皷之響, 兵不解坐作之節, 一日二日, 玩愒以度。 若念丙子時事, 君臣上下, 烏可若是恬嬉乎? 日暮途遠, 聖祖所以發歎於中朝也; 閉關絶約, 先正所以屢陳於上疏也。 我東以蕞爾鰈域, 粗知禮義之方, 世有中華之稱。 而今則, 人心漸至狃安, 大義轉益湮晦, 北走之皮幣, 看作常事, 不以爲恥。 思之及此, 寧不心寒? 漢官威儀, 不可復覩, 神州腥羶, 不可復掃。 惟此北苑尺壇, 略寓執壤之誠。 大明日月, 只照一區之邦, 庶可以有辭於後世。 矧當此年, 仰惟孝廟未就之志事, 不勝慷慨激昻也。 顧今民力凋殘, 經費匱乏之時, 豈必作遠道行幸, 而逢此己亥之歲, 不有寧陵之行, 則是豈天理、人情之所可出乎? 然列邑供億之弊, 各營撼頓之勞, 何嘗食息暫忘也。" 尙喆等曰: "今日殿下臨御此地, 乃丙子年經亂之地也。 城下之盟, 終古恥之。 至今人士之經過此地者, 莫不指點而傷心, 扼腕而興憤, 則況興感於宸衷, 當如何哉? 惟我孝宗大王, 勵薪膽之志, 講復雪之策, 將以成仁祖未就之志事, 伸天下旣絶之大義, 不幸大業未半, 奄棄臣民。 此忠臣烈士所以痛心泣血, 而不能已者也。 今我殿下, 承丕大之基, 講繼述之謨。 所以繼述之者, 不出於修明刑政、收拾人才, 養軍兵而理財用數件事而已。 興師往討, 縱不可輕議, 而《春秋》尊攘之義, 庶可以不泯於天下萬世矣。" 上曰: "守禦廳五營之制何如?" 命膺曰: "左、右營各有別將, 卽京營將官也。 前營廣州, 後營竹山, 中營楊州也。" 上曰: "軍摠凡爲幾何?" 命膺曰: "一萬五千七百十四人。" 上曰: "本營軍摠幾何?" 廣州府尹宋煥億曰: "本州所管, 爲二千八百十四人。" 上曰: "本營操鍊時, 左營陣于東將臺, 右營陣于西將臺, 前營陣于南將臺, 中營陣于北將臺, 後營陣于東將臺嚴城云, 然否?" 命膺曰: "然。" 上曰: "東西南北, 皆有將臺, 而獨無中將臺之稱, 何也? 城中地形, 中凹四高而然乎?" 煥億曰: "中將臺之不設, 地形之使然。" 上問本營習操次數。 命膺曰: "每年則五營各一次輪操; 三年則五營一番合操矣。" 上曰: "私操、正操之法何如?" 命膺曰: "假如今日會軍, 則其翌日私操, 第三日正操, 第四日晝夜操, 第五日犒饋, 仍試射放, 第六日罷送各兵矣。" 上曰: "本營屯田幾何?" 命膺曰: "屯田之在廣州者, 六處;在果川者, 一處;在龍仁者, 三處;在陽智、永平、利川、砥平、原州、洪川、平澤、忠州、金海、昌原、扶安、長興、海州、定州、稷山、振威、永同、載寧、橫城者, 各一處;合爲二十九處矣。" 上曰: "予於丙申御極之初, 命罷諸宮房折受, 而深知載寧屯田, 與宮房相爭之弊, 故特命還屬本廳, 誠以軍餉體重, 不可與宮庄相等故耳。" 命膺曰: "臣弟, 左相在本廳時, 因特敎, 以此屯復屬本廳。 伊後則連以敎鍊官、軍官中差遣屯監, 每年收稅以米, 而所收殆近千金。 其外防堰開洋之費, 不在此中。 以此觀之, 本營若無此屯, 可謂着手無處, 幸蒙特恩, 有此還屬之擧, 其爲有益於本營, 實不貲矣。" 上曰: "本州戶口幾何? 曾聞, 城內人戶, 纔過千數云, 然否?" 煥億曰: "城內民戶, 爲一千餘戶。 而男則二千餘口;女則二千三百口。" 上曰: "摠一府戶口爲幾何?" 煥億曰: "戶, 一萬六百餘;口, 四萬八千餘。" 上曰: "民口雜役, 不一其端, 有烟戶焉, 有鷄雉ㆍ柴草等名色焉。 此等戶役能無弊端乎?" 命膺曰: "故府尹徐宗憲創立雜役價米之制, 凡諸雜物, 皆自官貿用。 至於動駕、陵役時雜物及使星往來時, 柴草進排等役, 故府尹南泰溫, 立策應庫應之, 而雜物進排, 一切革罷。 今則, 只有城內行宮些少之役矣。" 上曰: "本州倉廩幾何?" 煥億曰: "七庫、十一倉也。" 上曰: "曾聞, 淸城府院君 金錫冑所儲餉穀最多。 至於京營別備, 故判書趙觀彬爲最云, 然否?" 命膺曰: "山城軍餉穀措置等節, 皆是金錫冑所設。 而趙觀彬, 亦多別備矣 上曰: "本營歲入之數摠幾何, 而一年支放外, 亦有贏餘乎?" 命膺曰: "營財之贏縮, 固在得人之如何, 而近年以來, 每患不敷。 內營歲入雜穀外米, 不過二千餘石;外營歲入, 其數亦然, 而歲費之外, 餘者無幾矣。" 上曰: "仁廟甲子築城時以僧覺性爲名者, 爲八道都摠攝, 召募八道僧軍赴役, 仍命居此城。 蓋僧軍之制, 始於此時大備云, 卿等亦聞之乎?" 命膺曰: "果於此時, 創設云矣。"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112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법(兵法) / 군사-병참(兵站)
- [註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