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지 유의양을 소견하고 강릉의 사정을 듣다
승지 유의양(柳義養)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제 막 강릉(江陵)에서 체직되어 왔는데, 강릉에는 무슨 폐단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갖가지 폐단을 감히 번거롭게 진달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전(陳田)에 대해 면세(免稅)시킨 것이 과연 효과가 있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관동(關東)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팔도(八道)에 있지 않았던 것이고 전고에도 드물게 듣던 것이다.’ 하면서 고무되어 경축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그 공효는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구히 뒷걱정이 없겠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미 특별히 견감하였으니 이 뒤로는 거의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표류한 왜인(倭人)이 반드시 강릉과 삼척(三陟)에 정박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영동(嶺東)의 아홉 고을은 모두 바다와 연접되어 있는데 왜선(倭船)이 양양(襄陽)·울산(蔚山) 등지에 정박하지 않고 반드시 강릉·삼척 이 두 곳에 정박하는 것은 아마도 수세(水勢)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척에는 단지 하나의 영장(營將)이 있을 뿐이고, 그밖에 달리 방수하는 것이 없어 매우 허술하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동도(東道)의 관방(關防)에 대해 우견(愚見)이 있었는데, 마침 굽어 하문하시는 성교(聖敎)를 받들었으니, 감히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관방은 남·서·북 삼면에는 모두 방수(防守)가 있는데, 유독 관동에만 하나도 조치한 것이 없기 때문에 식자(識者)들이 걱정해 온 지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설자(說者)들은 혹 이르기를, ‘동해(東海)는 물길이 나빠서 배가 다니는 데 구애가 있기 때문에 깊이 우려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만, 이는 매우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저 표류하는 선박이 강릉·삼척 사이에 와서 정박하는 경우가 한두 번뿐만이 아니었으니, 물길에 구애가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대관령(大關嶺)은 곧 동쪽 바닷가로 가는 육로(陸路)의 첫 길인데, 서울과의 도리(道里)도 또한 그리 멀지 않아서 제일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으니, 방수하는 대책이 있어야 합당합니다. 그 지형(地形)을 논한다면 실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철옹성이니, 참으로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고 있으면 만 명의 군대도 열 수 없는 곳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제 대략 성보(城堡)를 설치하고 하나의 별장을 두어 지키게 한다면, 긴급한 일을 당했을 적에 일조(一助)가 될 수 있습니다. 나무와 돌이 이미 넉넉하고 사방의 길이가 길지 않기 때문에, 공역(工役)의 비용도 많이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보를 완성한 다음에는 본부(本府)의 적곡(糴穀) 3,4천 석을 획급하고 모곡(耗穀)을 가져다 별장(別將)과 교졸(校卒)들에게 지방(支放)하는 밑천으로 삼게 할 것이며, 본부의 경내에 폐기된 제언(堤堰) 몇 구역이 있는데, 토질이 곡식을 생산하기에 매우 합당하지만 지형이 물을 저장하기에 합당하지 않아서 여러 해 동안 폐기되어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제 이를 또한 백성들에게 경작하여 먹도록 허락하고, 산성(山城)의 둔전(屯田)으로 만든다면 새로운 진보(鎭堡)의 재력(財力)이 모양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조정에서 별로 재정(財政)을 허비하지 않고서도 동쪽에 어엿한 하나의 성(城)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본부의 형편을 논하건대, 경내의 영동(嶺東)은 곡식은 적은데, 백성이 많고 영서(嶺西)는 곡식은 많은데 백성이 적으며, 대령(大嶺)이 가운데 끼어 있어서 거리가 멀고도 험한 까닭에 흉년을 당하게 되면 곡식을 옮겨 진대(賑貸)하는 데 진실로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중간에 있는 산성에 곡식을 저장해 놓았다가, 풍년과 흉년을 살펴보아 동·서가 서로 구제하게 한다면 평상시에도 백성을 편하게 하는 긴요한 방도가 될 것이니, 지금 이 산성을 설치하는 의논은 일거 양득의 계획이 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내용이 적당하지 못한 듯하지만, 나는 적당하지 못한 처지에서 재력이 허비되지 않는 힘을 쓴다면, 유익함이 있거나 유익함이 없거나를 막론하고 조정에서 음우(陰雨)를 경계함에 있어서 좋은 계책을 얻는 데 해롭지 않다고 여긴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니, 유의양이 말하기를,
"세속의 견해는 비록 동쪽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만, 어찌 전혀 걱정을 잊을 수 있는 곳이겠습니까? 지난 가을 수재(水災)가 있었을 때 바다 갈매기 수천 마리가 무리를 지어 대령을 넘어 서쪽으로 날아와서 영서(嶺西)의 몇 고을 아헌(衙軒)에 떼 지어 모여 있었고, 양근(楊根)의 지경에까지 왔었으니, 또한 이변이 아니겠습니까? 새는 제일 먼저 기(氣)를 체득하여 아는 것이기 때문에 두견새가 천진교(天津橋) 위에서 한 번 울자 소강절(邵康節)이 먼저 남사(南士)가 뜻을 얻을 것522) 을 알았으니, 이를 미루어 논하여 본다면 걱정스러운 한 가지 단서라고 할 말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옛부터 동쪽의 일에 대해서 소홀히 하여 왔는데, 이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88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84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농업-전제(田制) / 군사-관방(關防) / 외교-왜(倭)
- [註 522]두견새가 천진교(天津橋) 위에서 한 번 울자 소강절(邵康節)이 먼저 남사(南士)가 뜻을 얻을 것 : 《송사(宋史)》에 보면, 소옹(邵雍)이 객(客)과 천진교(天津橋) 위에서 산보하다가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고 근심하여 기뻐하는 빛이 없으므로, 객이 그 까닭을 묻자 소옹이 답하기를, "낙양에는 예로부터 두견새가 없었는데, 이제 처음으로 두견새가 왔다. 천하가 잘 다스려질 경우에는 지기(地氣)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고, 장차 어지러워질 경우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는 것인데, 지금 남방의 지기가 이르렀다. 나는 새 종류는 가장 먼저 기(氣)를 체득하는 것이니, 2년이 안되어 임금께서 남쪽의 선비를 정승에 기용하고 남쪽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여 오로지 변경(變更)하는 데 힘쓸 것인데, 천하가 이로부터 일이 많아질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소옹의 말이 과연 징험되었다고 하였음.
○召見承旨柳義養。 上曰: "爾纔自江陵遞來, 江陵有何弊端乎?" 對曰: "種種弊瘼, 不敢煩達矣。" 上曰: "陳田免稅, 果有效乎?" 對曰: "東邑之民, 咸曰此八道之所未有, 前古之所罕聞者也。 莫不鼓舞攅祝, 其爲效, 推此可知矣。" 上曰: "可以永久無後慮否?" 對曰: "旣已特蠲。 從今以後, 庶無可慮矣。" 上曰: "漂倭之必泊於江陵、三陟者, 何也?" 對曰: "嶺東九郡, 無非沿海。 而倭船之泊, 不於襄、蔚等地, 而必泊於江、陟兩界者, 似是水勢之有所使然而然也。" 上曰: "三陟, 只有一營將。 其外, 則無他防守。 極其踈虞矣。" 對曰: "臣於東道關防事, 有愚見。 而適承聖敎之俯詢, 敢此仰達矣。 我國關防, 南西北三面, 皆有防守。 而獨關東, 無一措置, 有識之憂, 固已久矣。 說者或以爲: ‘東海水惡, 有礙行船, 故不必深慮。’ 云。 而此則, 大有不然者。 夫漂船之來泊于江陵、三陟之間者, 非止一再則水路, 無礙於此, 可知。 大關嶺, 卽是東沿之陸路初程。 而距京道里, 亦不甚遠, 可謂第一要衝。 則合有防守之策也。 論其地形, 則實是天作之金城, 眞所謂一夫當關, 萬夫莫開之地。 今若略設城堡, 置一別將而守之, 則可爲緩急之一助。 木石旣裕, 延袤不長, 工役之費, 亦不必多。 旣成之後, 劃給本府糴穀三四千石。 使之取耗, 以爲別將及校卒支放之資。 且本府境內, 有廢堤堰數區, 土性甚宜於生穀, 地形不合於貯水。 積年廢棄, 民皆惜之。 今亦許民耕食, 而作爲山城之屯田, 則新鎭財力, 可以成樣。 然則, 朝家別無費財, 而東隅之儼然一城堡, 可以成矣。 且以本府形便論之, 境內嶺東, 則穀少民多;嶺西, 則穀多民少。 大嶺間之, 旣遠且險。 雖當歉歲, 移粟賑貸, 實爲大弊。 今若儲穀於居間之山城, 而視歲豐歉, 東西交濟, 則其在平時, 亦爲便民之要道。 今此山城設置之議, 可一擧而兩得也。" 上曰: "所奏, 雖似無當。 予則, 以爲無當之地, 用不費之力, 則無論有益與無益, 在朝家陰雨之戒, 不害爲得計。 令廟堂稟處。" 義養曰: "俗見, 雖曰無東憂, 而豈專然忘憂處也? 昨秋水災時, 海鷗千百爲群, 逾嶺而西, 群聚於嶺西數邑之衙軒, 至及於楊根之境, 亦豈非變異乎? 禽鳥得氣之先者也。 杜鵑一鳴於天津橋上, 康節先卜南士之得志。 推此以論, 可謂可憂之一端矣。" 上曰: "我國人自古忽於東事, 此實可悶。"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88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84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농업-전제(田制) / 군사-관방(關防)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