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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6권, 정조 2년 12월 15일 신미 3번째기사 1778년 청 건륭(乾隆) 43년

《논어》를 강하면서 치평의 학문을 생각하다

주강하여 《논어》를 강하였다. 시독관 심염조(沈念祖)가 말하기를,

"‘공자가 시냇가에 서서’494) 라고 한 장(章)은 도체(道體)가 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이로부터 이하는 모두 사람들에게 학문을 증진시키기 위해 면려한 내용입니다. 각장(章)에서 말한 것이 같지 않으나, 그 요점은 뜻을 확립시켜야 한다는 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본(大本)이 이미 확립되면 학문은 증진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증진되는 것입니다. 여러 장 가운데 오늘날을 위해 가장 가까운 것은 또 ‘학문을 비유하건대 산을 쌓는 것과 같다.’495) 고 한 훈계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중지하거나 전진하는 것은 단지 스스로 힘써서 하거나 스스로 포기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홉 길의 높이가 완성되기 전에 그 공이 비록 많았다고 하더라도 중도에 중지하고 전진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실패하는 데 이를 것입니다. 처음 한 삼태기의 흙을 쌓은 것이 비록 작다 하더라도 전진하여 중지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완성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니, 어떻게 해놓은 일이 많다는 것으로 혹시라도 계속 전진하는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 ‘말해 주어서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 장496) 은 또 경계하여 분발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 있는데, 하나의 선언(善言)을 들으면 잊지 않고 잘 지키면서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다고 한 것은 모두 안자(顔子)가 게으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증자(曾子)가 오도(吾道)는 하나로 관통되었다고 한 공자의 말에 ‘네’라고 대답한 것과 자로(子路)가 가르침을 듣고 미처 행하지 못하였으면 또 다른 가르침을 듣기를 두려워했다는 것이 안자가 마음으로 이해하여 힘써 행함으로써 지식과 행위가 함께 극진한 곳에 이른 것만 못하기 때문에 공자가 특별히 칭찬한 것입니다. 이는 스승과 벗이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연마하는 데 유익할 뿐만 아니라, 군신(君臣)이 계옥(啓沃)하는 도리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고 이래로 오직 대순(大舜) 한 사람만이 남에게 취하여 선을 행하기를 마치 강수(江水)하수(河水)를 터놓은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대순이 된 까닭인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분발하여 칙려(勅勵)하시며 온갖 법도를 정돈하셨으므로,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지치(至治)를 1년 안에 이룩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사위(事爲)와 시조(施措)에 있어서 실효가 백성에게 닿지 않은 점이 없지 않으며, 풍속과 습상(習尙)이 크게 혁신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으니, 행동하는 대로 크게 호응하여 뜻에 따른다는 지치(至治)를 끝내 쉽게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뭇 신하들이 잘 대양(對揚)하여 찬성(贊成)하지 못한 데에서 나왔지만, 혹 전하께서 다스려지기를 도모하는 정성과 이미 확립된 의지가 또다시 이로 인하여 조금 해이해져서 드디어 인순(因循)하여 퇴탁(退托)하는 뜻이 생기기에 이른다면, 한 삼태기를 못채우고 중지한다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엊그제 유신(儒臣)이 입지(立志)를 가지고 우러러 면려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우연히 오늘 강하는 장(章)의 뜻과 서로 부합하였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대략을 진달하는 것입니다. 오늘 강한 장(章)에는 많은 문의(文義)가 들어 있는데, 신처럼 학문이 짧고 소견이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실로 충분히 발휘하여 개진(開陳)할 수 없습니다. 유신이 조정에 나왔고 이제 또 경연에 참여했으니, 이는 참으로 조정에 드문 경사로운 기회입니다. 깊은 사지(辭旨)를 반복하여 논란하게 한 다음 그 가모(嘉謨)와 대유(大猷)를 듣는 대로 즉시 행함으로써 대순(大舜)하수를 터놓은 것처럼 행하는 용단과 아홉 길 되는 산을 만들 적에 마지막 한 삼태기의 공을 이룩하는 것을 오늘날 절실하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고, 검토관 황승원(黃昇源)은 말하기를,

"‘덕을 좋아한다.’497) 고 한 장(章)에서 성인(聖人)이 덕을 좋아하는 것과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것을 상대적으로 말하였습니다. 대저 식욕(食慾)과 색욕(色慾)은 본성이므로 여색을 좋아하는 것은 이것이 사람의 본성이며 백성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것은 바로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것이니 덕을 좋아하는 것 또한 사람의 본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덕을 좋아하는 것이 여색을 좋아하는 것만 못한데, 이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나뉘는 것과 같으므로, 형기(形氣)에서 발출되는 것은 지나치게 되기 쉽고 의리(義理)에서 발출되는 것은 미치지 못하게 되기 쉽기 때문에, 사씨(謝氏)의 주(註)에 하나의 성(誠)자를 가지고 이 장(章)의 뜻을 발휘했는데 그 뜻이 매우 좋습니다. 전하께서 초야의 유신을 초빙하여 친히 경연(經筵)에 나아와 아름다운 모유(謨猷)를 자문하시니, 오늘날 종팽(宗祊)이 태평의 운수를 만회할 수 있는 계기가 이 한 가지 일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경서(經書)를 펴놓고 문난(問難)하는 즈음에 상하가 말을 주고받는 데에서 그칠 뿐 실행하는 효험이 없다면 한갖 보기에만 아름다울 뿐입니다. 진강한 여러 장(章) 가운데 장에 따라 질문하고, 성인의 정밀함을 밝혀서 드러내어 한 가지 선한 말과 한 가지 선한 행동이라도 모두 성궁(聖躬)께서 반드시 실심(實心)으로 몸소 행하는 방도에 힘쓰신 후에야 비로소 성심으로 덕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성심(聖心)이 여기에 대해 더욱 거듭 한층 힘쓰시는 것이 신의 구구한 소망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이 경연에 나왔으니 글뜻을 진달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경연관 송덕상(宋德相)이 말하기를,

"‘나아가서는 공경(公卿)을 섬긴다.’고 한 장498) 의 네 가지 일은 그 일이 지극히 비근(卑近)한 것이지만, 그 이치를 극진히 한다면, 성인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대개 도(道)에는 정조(精粗)와 본말(本末)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인의 겸사(謙辭)는 마음속으로는 스스로 이미 능하다고 여기면서 겉으로 겸손하여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니, 그의 마음에 끝내 흠결이 있어 부족하게 여기는 본뜻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비근한 일을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고원(高遠)한 지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진달한 내용이 매우 좋다. 대저 성인의 마음은 자만하지 않고 항상 부족하게 여기는 탄식이 있기 때문에 비록 일상 생활의 사물(事物)에 대한 지극히 쉽고 지극히 가까운 도리도 만에 하나 방과(放過)하는 일이 없으니, 이는 대개 성스러운 가운데 더욱 성스럽고 힘쓰는 가운데 더욱 힘쓴다는 뜻인데, 또한 실리(實理)가 이러한 것이다. 대저 성인의 도(道)는 아래로 비근한 사물에 관한 것부터 배워서 위로 천리(天理)에까지 통달하는 공부만한 것이 없는데, 아래로 비근한 사물에 관한 것부터 배우는 일이 매우 비근하고 쉽지만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것을 살펴본 후에야 더욱 그것이 고원(高遠)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가장 비근하고 쉬운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효제(孝悌)가 바로 이것인데, 여기에서 거슬러 올라가 공부를 깊이 연구하면 요(堯)·순(舜)의 넓고 높아서 이름하기 어렵다고 한 덕도 그 도(道)가 이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또 이에 의거하여 미루어 넓혀 나간다면,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고 해와 달이 비추어 주고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가운데 혈기(血氣)를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존친(尊親)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니, 넓고 크고 깊고 먼 것이 이와 같다. 이것이 《중용》의 집전(集傳)에서 이른바 널리 육합(六合)에 미친 것을 물려서 긴밀한 곳에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이니, 여기에서 지극한 이치가 더욱 나의 마음에 들어 있어서 다른 데에서 구하기를 기다릴 것이 없음을 더욱 알 수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인(仁)은 멀리 있는 것인가? 내가 인을 행하려 한다면 인은 바로 이르는 것이다.’ 하였으니, 작성하는 방법은 아래로 비근한 사물에 관한 것을 배우는 공부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장(章) 가운데 나아가서는 공경을 섬긴다고 한 몇 구절은 외면으로 보면 매우 용이(容易)하게 여겨지지만, 위로 천리에 통달하는 공효도 또한 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부자(夫子)가 스스로 겸손한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또 취하여 견주어 보는 경우 성인은 마음속으로 매양 스스로 성인이라고 여기지 않지만, 힘쓰지 않는 가운데서도 항상 도(道)를 바라면서 보지 못하는 것같이 하는 뜻을 지니고, 도를 편안하게 여겨 행하고 있는 가운데 또한 혼자서 증진되고 있는 것을 깨닫는 오묘함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70세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공부하는 순서에 찬연(燦然)히 계급이 있어 후학(後學)들이 순서에 따라서 하는 공부와 다름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일부러 말을 만들어 후학을 훈계하는 것이겠는가? 공자 같은 성인으로서도 다른 사람이 모르는 가운데 혼자서만 깨달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몇 년만 더 살게 하여 끝내 《주역(周易)》을 배울 수 있게 되었더라면 큰 허물을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하늘이 낸 나면서부터 아는 성인으로서 또한 다시 배움을 일삼을 것이 있기에 이와 같이 말했겠는가? 여기에서 또한 성인이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니, 송덕상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참으로 옳습니다. 대개 일에는 비근함과 고원함의 분별이 있습니다만 그 이치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근한 일 속에도 실로 지극한 이치가 붙여져 있는 것입니다. 성인도 이에 대해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점에 유의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흘러가는 것은 이와 같다고 한 말은 곧 도체(道體)가 유행(流行)하여 쉬지 않음을 말한 것인데 나는 그 글뜻 이외에 이 서(逝)자로 인하여 감발(感發)하여 찬탄하는 점이 있다. 이른바 간다[逝]고 하는 것은 곧 한 번 가면 되돌아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데, 사람의 일을 가지고 미루어 보건대, 세월이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주자(朱子)도 일찍이 말하기를,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은데, 공부는 간단(間斷)이 있기가 쉽고 의리는 미루어 찾기가 어렵다.’ 하였는데 이미 지난 일은 비록 그만이라 하지만, 내가 이때를 그대로 지나친다면 세월은 물 같아서 황혼에 이르기 쉽고, 지기(志氣)는 점점 나태해져서 장차 의리를 알지 못한 채 끝나버리고 말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는 유현(儒賢)으로 이제 다행히 조정에 나오게 되었으니, 나의 마음이 기뻐서 위로됨이 목이 마를 적에 물을 얻어 마신 것 같을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경의 창백한 얼굴과 흰 머리 또한 이미 점차 노쇠해지고 있는데, 이 세상에 대해 아무 뜻조차 두지 않으려면 그만이겠지만, 만일 뜻한 바가 있다면 품은 뜻을 개진하여 치화(治化)를 도와서 이룩하는 것은 바로 지금에 이르러 부지런히 함으로써 후회 막급이라는 탄식을 면할 수 있어야 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대우(大禹)는 성인이지만 오히려 촌음(寸陰)을 아꼈다.’고 했으니, 보통 사람들은 당연히 분음(分陰)을 아껴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도리인 것이다. 내가 세도(世道)에 대한 책임을 경에게 위임하고, 또 하나의 서(逝)자를 가지고 경에게 되풀이해서 말함으로써 상하가 서로 면려하는 바탕으로 삼았으니, 경은 이 점에 깊이 유념하도록 하라."

하니, 송덕상이 말하기를,

"서(逝)자의 뜻에 대한 성교(聖敎)는 그것이 경문(經文)의 본의(本義)는 아닙니다만 특별한 하나의 뜻이 될 수 있어 반복하는 사이에 흥기(興起)하여 찬탄하게 됩니다. 성인의 말 밖의 뜻을 추연(推演)하여 상하가 서로 면려하는 바탕으로 삼은 데 대해서는 흠앙과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고, 특진관 홍낙순(洪樂純)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흘러가는 것은 이와 같다는 뜻을 점출(拈出)하여 유현(儒賢)이 너무 늙은 것을 애석하게 여기시고, 치화(治化)를 비보(裨補)할 것을 면려하셨는데, 성의(聖意)가 더욱 절실하여 반성하여 스스로 힘쓰시되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셨으니, 신은 이에 대해 찬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춘추(春秋)가 바야흐로 한창이어서 지기(志氣)가 예리하시니, 지금이 바로 놓쳐서는 안될 시기인 것입니다. 모쪼록 이런 때에 이르러 더욱 면려하여 부지런히 쉬지 않고 노력하신다면 삼대(三代) 때의 지치를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정성을 다하여 불러들인 유신이 조정에 나아와 이와 같이 강마(講磨)하여 토론하는 것은 매우 성대한 일이니, 반드시 겸허한 마음으로 채납(採納)하여 몸소 행하신다면, 어찌 치도(治道)에 크게 유익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춘추가 바야흐로 한창이시지만 유신은 이미 늙었으니, 만일 10여 년이 더 지난다면 유신은 더욱 나이를 먹게 되고 전하의 지기도 꺾이지 않을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주자가 임금에게 고하기를, ‘폐하께서는 송(宋)나라의 성주(聖主)이고 오늘날은 폐하의 춘추가 한창인 때입니다.’ 했는데, 신은 전하에 대해서 또한 감히 이렇게 아뢰겠습니다. 지금은 바로 전하께서 시각을 아껴야 할 때이니, 삼가 바라건대, 오늘의 하교를 잊지 말고 더욱 더 면려하소서. 주자효종 황제(孝宗皇帝) 말년에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은 시냇물이 흘러가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신만 창백한 얼굴에 흰 머리가 되어 이미 늙었다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삼가 천안(天顔)을 우러러보건대 또한 전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겠습니다.’ 했는데, 이제 이 시기를 놓친다면, 세월이 덧없이 흐르는 사이에 치효(治效)를 확립시키지 못한 채 성지(聖志)가 이미 나태해져서 장차 탄식을 금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삼가 다시 더욱 면려하소서."

하였다. 내가 덕을 좋아하기를 여색(女色)을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한 장(章)에 이르러 송덕상이 말하기를,

"이는 성심으로 선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여색(女色)을 좋아할 적에 마음에 어찌 가식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좋아하는 데 이르러서는 혹 외면으로는 좋아하면서 내면으로는 실제로 좋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이른바 좋아한다는 것에 표리가 같지 않은 근심이 있으니, 이는 다름 아니라 사욕(私慾)이 끼어 들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자하(子夏)가 이른바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는 마음을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꾸어야 한다고 한 것도 또한 이런 뜻인 것입니다. 제왕(帝王)의 공부에 있어 더욱 깊이 경계하고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덕을 좋아하는 것을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면 과연 훌륭하지만, 만약 참으로 보고서 얻은 것이 없으면, 이른바 좋아한다는 것은 반드시 성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치의(緇衣)499) 처럼 좋아한 후에야 이름과 실상에 서로 부합하고 표리가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으니, 경의 말이 매우 절실하다."

하였다. 홍낙순이 말하기를,

"어진이를 좋아한다는 이름은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으로서 누군들 좋아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만, 기호(嗜好)하는 것이 어진이와 다르기 때문에, 혹 어진이를 좋아한다는 이름을 사모한 경우가 있었지만, 실상은 성심으로 좋아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동한(東漢)의 은사(隱士)가 말하기를, ‘구마(廏馬)가 1만 필(匹)이나 되는데, 이것을 감할 수 있겠는가? 후궁(後宮)이 수천 명이나 되는데 이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 좌우에 있는 권호(權豪)를 제거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세상 임금이 좋아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기 때문에 어진이가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송(宋)나라 신종(神宗)정자(程子)를 기용하지 못했고 효종(孝宗)주자(朱子)를 기용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사(志士)들이 한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신이 무상(無狀)하나 어떻게 감히 전하의 면전에서 아첨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성질(聖質)이 청명(淸明)하고 성학(聖學)이 고매하셔서 물루(物累)의 해가 없으신데, 또 지성으로 산림(山林)을 불러들이셨으니, 이는 진실로 한(漢)나라, 당(唐)나라 이래로 있지 않았던 성대한 일입니다. 옛날 우리 효묘(孝廟)께서 선정을 예우하여 크게 모유(謨猷)를 세워 힘쓰셨는데, 뜻이 부합한 것이 밝고도 뚜렷하여 그 유풍(遺風)과 남은 공렬이 지금까지도 민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현이 또 초빙에 응하여 와서 이 강연에 참여하였으니, 전하께서 어진이를 좋아하는 것이 능히 성조(聖祖)를 추종한 것으로, 신이 오늘날 이를 직접 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어진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시니, 반드시 그의 말을 들어주어 일에 시행하신 후에야 어진이를 좋아한 실상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잃기는 쉬워도 조종하기는 어려운 것이니, 모쪼록 항상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이 마음을 잘 보존하여 잃는 일이 없게 하소서. 법연(法筵)은 체통이 중하여 예(禮)가 엄하고 정(情)은 머니, 삼가 바라건대 수시로 유현을 불러 야대(夜對)하여 심성(心性)의 이치를 토론하고 치도(治道)의 요점을 강마하여 정치를 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자, 송덕상이 말하기를,

"특진관이 진달한 말은 모두 절실한 것이어서 임금이 학문에 힘씀에 있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유념하소서."

하였다. 학문을 견주건대 산을 쌓는 것과 같다고 한 장(章)에 이르러 송덕상이 말하기를,

"여기에 지(止)자는 곧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에 진(進)자는 곧 스스로 힘쓴다는 말입니다. 아홉 길 되는 산을 쌓는 데 있어서 그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혹 그 공력을 중지하면 공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평지에 한 삼태기의 흙을 쌓았을 적에는 그 완성이 아득하지만, 그 공력을 쉬지 않으면 공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니, 끝내 성취하는 것은 오직 스스로 노력하거나 스스로 포기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공효와 낭패를 알기가 어렵지 않은 것이 이와 같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에 대해 반드시 힘껏 반성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매우 좋다. 스스로 힘쓰고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단지 한 번 생각하는 사이에 털끝만한 차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스스로 힘써서 중단하기에 이르지 않는다면, 아홉 길 되는 산을 만드는 공효를 이룰 수 있겠지만, 스스로 포기하여 문득 방과(放過)한다면 그저 한 삼태기를 쌓지 않아서 공을 이루지 못하는 데로 귀착될 것이니, 매우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경의 글뜻으로 인하여 면려하라고 진달한 것은 참으로 절실한 말이니,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말해 주면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 장(章)에 이르러 송덕상이 말하기를,

"이 장(章)에는 별로 깊은 뜻이 없습니다. 단지 안자(顔子)가 마음속으로 이해하여 안다는 것은 곧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뜻이고, 안자가 힘써 행한다는 것은 곧 나의 재능을 끝까지 다한다는 뜻입니다. 진실로 안자의 명석함과 굳건함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여러 제자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성인이 칭찬하는 것입니다. 명건(明健) 두 자에 대해 또한 반드시 더욱 면려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아뢴 내용이 좋다. 지행(知行) 두 글자로 인하여 내가 반복하여 생각한 것이 있다. 학문을 하는 방도는 격물 치지(格物致知)를 먼저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성의(誠意)·정심(正心)은 그 다음인 것이다. 지행을 가지고 말하건대, 궁격(窮格)은 지(知)에 속하는 것이고 성정(誠正)은 행(行)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모든 것을 다 알고 난 뒤에야 비로소 행에 대한 공부를 논의할 수 있겠는가? 오늘 하나의 사물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고 내일 또 하나의 사물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여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행함으로써 지가 1촌(寸)이 증진되면 행도 1촌이 증진되게 하여 아울러 연마하여 나란히 증진되게 해야 하는 것이요, 어느 한쪽도 폐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 궁격만 일삼고 역행(力行)을 지체한다면 이른바 궁격이라는 것이 단지 앵무새가 말을 잘하는 것과 같은 데로 돌아갈 것이며, 단지 역행만 하고 궁격을 포기한다면 이른바 역행이라는 것은 단지 장님이 지팡이를 짚고 무턱대고 가는 것에 속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大學)》삼강령(三綱領)·팔조목(八條目)《중용(中庸)》달도(達道)·달덕(達德)은 성인이 명목(名目)을 만들어 후세의 학자에게 전하여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참으로 후학(後學)으로 하여금 본말과 선후의 분별을 알아서 감히 등급을 뛰어넘고 차례를 무시하면서 많은 것을 탐하고 얻기만을 힘쓰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대저 학문을 하는 요점은 잊지 말고 억지로 돕지 않게 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잊으면 나태해져서 학문을 할 수 없게 되고, 도우면 급박하게 반복하게 되어 도리어 해가 되는 것이니, 이는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또 말하는 사람들이 혹 필서(匹庶)의 학문은 수신 제가(修身齊家)하는 일에 그치는 데 불과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고 여긴다. 필서들의 학문도 제왕의 학문과 다를 것이 없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벼슬을 못하면 자신의 덕을 연마하고, 나아가 벼슬하게 되면 천하 사람과 함께 선을 행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공자·맹자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치평(治平)의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지 않은 적이 없는데, 단지 지위를 얻지 못하여 도(道)를 행하지 못해서 그러한 것이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필서라 할지라도 또한 치평(治平)의 학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지 제왕의 학문은 필서의 학문과 완급(緩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필서에 있어서는 학문이 치평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우선 덕업(德業)을 연마하여 증진시킴으로써 공효를 이루기를 요구할 수 있으니, 이것이 성인이 이른바 어려서 배워서 장성하여 행한다는 것이다. 제왕에 이르러서는 어릴 때 이미 치평의 책임을 맡았는데, 수신 제가의 공부가 깊은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하여 이에 치평의 공부를 버리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 한편으로는 공부에 힘을 쓰고 한편으로는 다스려 가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왕의 학문은 더욱 급하고 더욱 중한데, 필서들의 학문과 매우 다른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인 것이다. 아! 상고(上古) 때에는 진실로 총명한 사람이 원후(元后)가 되었는데, 하(夏)나라·상(商)나라가 천하를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주면서부터 임금이 된 사람이 반드시 모두 총명한 자질을 지니지 않았어도 천위(天位)는 드디어 대대로 지켜 내려오는 물건이 되었으니, 모든 공부에 힘쓰는 방도에 대해 더욱 부지런하여 감히 일을 폐기한 채 안일을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상천(上天)이 임금이 되게 한 뜻을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는 내가 글뜻으로 인하여 가슴속이 격앙된 까닭이다."

하였다. 송덕상이 말하기를,

"지(知)와 행(行)은 어느 한쪽도 폐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과연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知)와 행(行)은 어느 한쪽도 치우치거나 폐기해서는 안되는 것인데, 공부에 힘쓰는 즈음에 매양 지(知)는 혹 여유가 있지만 행(行)은 혹 부족한 것을 걱정하게 되는데, 이른바 여유가 있다는 것이 결단코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참으로 선은 행해야 되고 악은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맛있는 고기는 입에 맞고 오훼(烏喙)500) 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면, 결코 행하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나 행하는 데에는 반드시 용기가 있은 후에야 할 수 있는 것이니, 용기가 없으면 자신의 사심(私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으며, 물루(物累)를 어떻게 억제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공자는 달덕(達德)을 말하면서 용기를 아울러 말한 것이다. 염락(濂洛)의 여러 현인(賢人)들이 공부에 힘쓴 것을 가지고 말해 보건대, 정자·주자는 대현(大賢)이어서 진실로 감히 의논할 수 없으나, 횡거(橫渠)501)횡거답기에 이른 것은 곧 하나의 용(勇)자로 효험을 거두었기 때문인데, 일찍이 손(孫)·오(吳)502) 를 좋아하다가 늦게서야 불(佛)·로(老)503) 에서 도피하였으니, 처음에 미로(迷路)를 헤맬 적에 강력하게 탐색하여 용감하게 고비(皋比)를 걷어 치우고 만년(晩年)에 덕을 이룬 다음 또 사람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매양 마음이 빠져 얽매어 있는 데에서 헤쳐 벗어나야 함을 일찍이 부지런히 자문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나는 학자가 공부에 힘쓰는 것은 횡거 선생이 긴절하게 했던 것을 본받는 것만함이 없다고 여기는데, 경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는데, 송덕상이 말하기를,

"횡거가 독실하게 행한 공부는 쇠를 끊듯이 결단을 내려 용감하게 행하여 곧바로 앞으로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보잘것없는 학문으로는 성학(聖學)의 공부에 대해 아직 만에 하나도 엿볼 수 없는데, 어떻게 어느 겨를에 자만할 수 있겠는가? 설령 강관(講官)들의 이야기가 대부분 천박하여 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 좋은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내가 선을 따르는 의리에 있어서 으레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여 성인(聖人)이 묻기 좋아하고 살피기 좋아하는 뜻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나는 참으로 알고 실제로 체득한 것이 없는 사람인 것이겠는가? 대순(大舜)은 성인이었지만, 농사짓고 질그릇 굽고 물고기 잡을 때부터 제왕이 되기에 이르러서도 남에게서 본받아 취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는 내가 마땅히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경연을 드물게 설행하는 데 이르러서는 매양 기무(機務)가 번다하여 날마다 개강(開講)할 수 없기 때문이지만, 이는 진실로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공부에 간단(間斷)이 없어야 함은 하늘의 운행이 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학문을 하는 데 대해 힘써 부지런히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매양 일정하지 않게 중단하는 걱정이 있으니, 일폭 십한(一曝十寒)을 경계해야 될 뿐만아니라, 또 계속 밝혀나가 일취 월장(日就月將)한다는 뜻에 견주어 보아도 더욱 할 말이 없다. 이로부터 마땅히 자주 개강할 것이니, 개강할 때 경은 반드시 동참하여 평소 강마(講磨)한 격언(格言)과 가모(嘉謨)를 날마다 나에게 진달하도록 하라. 또 생각건대 학문을 강론하는 공정은 송독(誦讀)하는 것만 귀한 것이 아니니, 전적으로 되풀이하여 토론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저절로 무한한 증진과 유익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송덕상이 말하기를,

"오늘날 허구많은 일 가운데 성학의 성취보다 급한 것은 없습니다. 어찌 기무가 번다하다는 것 때문에 자주 개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부터 유의하시겠다는 하교에 대해 신은 장송(莊誦)하고픈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래에서 기대하는 것이 이러하니, 위에서 스스로 면려함에 있어 또한 마땅히 뜻을 더하여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내가 이제 경에게 기대하는 것도 또한 크다. 더구나 경은 곧 선정의 후손인 것이겠는가? 선정이 효묘(孝廟)를 섬긴 것으로 나를 섬긴다면 어찌 빛나는 일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이제 크게 혁신하는 책임을 경에게 위임하겠는데, 1년 안에 성효(成效)를 요구하기는 진실로 어렵겠지만, 경이 국사에 마음을 다한다면 성효(成效)를 또한 발돋움하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세도(世道)에 대한 책임은 오직 경에게 달려 있다."

하였다. 송덕상이 말하기를,

"신은 학식이 변변치 못하여 장차 선신(先臣)의 지사(志事)를 밝힐 수 없고, 또 성상께서 은혜롭게 돌보아 주시는 은혜를 보답할 수도 없는데, 성교(聖敎)가 여기에 이르니,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만 간절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까 지와 행은 어느 한쪽도 폐기해서는 안된다는 데 대해 논설했었다. 염락(濂洛)이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동래(東萊)504) 의 학문은 오로지 학문을 통하여 하는 공부를 숭상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궁격(窮格)에 속하는 것이며, 상산(象山)505) 의 학문은 진실로 덕성(德性)을 높이는 공부에 치우친 것으로 이는 역행(力行)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래의 병통은 사물을 살피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단점이었고, 상산의 폐단은 선학(禪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단점이었으니, 해가 되는 것은 균일하였지만, 깊고 얕은 차이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산의 뜻은 본래의 주자(朱子)의 훈석(訓釋)과 달리 따로 훈석을 내려 하였으니, 만일 주 부자(朱夫子)가 아니었다면 성인의 심오한 사지(辭旨)를 누가 천명할 수 있었겠으며, 후학이 또한 어떻게 성명(聖明)의 깊은 뜻을 엿보고 천인(天人)의 관계를 탐색할 수 있었겠는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왕복(往復)은 부득이한 것으로, 이는 바로 요(堯)임금순(舜)임금에 전수한 것은 그 말이 ‘진실로 그 중정(中正)을 잡아야 한다.[允執厥中]’는 네 글자에 불과했지만, 순임금우(禹)임금에게 전수해 줄 적에는 세 마디506) 를 더 보탠 것과 같은 뜻이다. 또 《논어》에서는 단지 인(仁)자만 썼지만 《중용(中庸)》·《맹자(孟子)》에서는 칠정(七情)과 사단(四端)에 대해 상세히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세상이 갈수록 도(道)가 더욱 회색(晦塞)되어 강론하며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자세히 해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니, 성현(聖賢)이 어찌 말을 많이 하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또 여기에서 옛 성현들이 너와 나라는 간격을 두지 않는 뜻을 또한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상산(象山)의 일파가 고정(考亭)507) 과 등을 돌리고 스스로 문호(門戶)를 세웠지만, 주자상산에 대해 교계(交契)가 본래 얕지 않았으므로, 그의 학문을 변론하고 그의 주장을 물리칠 때를 제외하고는 피차간에 화기(和氣)를 잃지 않았었다. 녹동(鹿洞)508) 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함장(函丈) 사이에서 서로 함께 강론하였는데, 이를 들은 사람으로 두려워하여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상대를 접할 즈음에 성의(誠意)가 서로 투합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못하여 조금이나마 의견을 달리 하면 번번이 서로 공격할 구실을 찾기에 이르니, 이들이 어찌 주자의 죄인이 아니겠는가? 이는 또한 내가 글로 인하여 개탄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송덕상이 말하기를,

"성교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학과 이단(異端)이 도(道)는 비록 다르지만, 공부에는 진실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예로부터 유자(儒者)들이 혹 일찍이 좋아하다가 늦게 깨닫는 사람이 있기도 했던 것이다. 불씨(佛氏)에 이르러서는 우리 유학(儒學)과 그 구분이 털끝만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옳은 것 같으면서도 그르다고 할 수 있으며, 더욱 이치에 근사하지만 진리를 크게 어지럽히는 것이다. 학자(學者)로서 조예가 높지 않고 식견이 돈독하지 못하면 간색(間色)인 자색(紫色)이 정색(正色)인 주색(朱色)을 혼란시키는 탄식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상산의 학문도 또한 이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니, 송덕상이 말하기를,

"과연 성교와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충(忠)·질(質)·문(文)은 이것이 모두 성왕(聖王)이 다스리는 규범(規範)이지만, 말단의 폐단이 생기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에 서로 알맞게 손익(損益)하는 일이 있었는데 학문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러하다. 정문(程門)에서 경(敬)에 대해 설명한 것이 매우 좋고 지극히 합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주자가 경문(經文)을 해석한 것은 또 지난 것을 계승하여 후학에게 길을 열어준 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그런데도 말학(末學)들 가운데 미처 그 지름길을 탐구하여 깨닫지 못한 자들은 혹 입정(入定)하는 데 가까이 하는 경우도 있고 혹 훈고(訓詁)만을 공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하자, 송덕상이 말하기를,

"충·질·문은 과연 말류(末流)의 폐단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저 학자가 공부하는 것은 각기 기질(氣質)이 치우친 곳을 따라 시작하는데, 사욕(私慾)을 극복하는 것은 반드시 성품이 치우쳐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을 따라서 극복해 가야 한다는 것이 선유(先儒)들의 말이다. 대개 기질을 바로잡는 공부는 반드시 사욕을 극복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니, 이 또한 아울러 행하고 함께 다스려야 하는 부분이다. 대저 성품이 유약한 사람은 반드시 먼저 굳세게 하는 것으로 가르쳐야 하고, 성품이 굳센 사람은 반드시 부드럽게 하는 것으로 가르쳐야 한다. 굳센 사람은 매양 제멋대로 하는 데서 잘못되고, 부드러운 사람은 매양 과단성이 없는 것이 걱정이기 때문에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거나 스스로 공부함에 있어서는 각기 그 부족한 점에 따라 개발하고 미루어 넓혀가는 것이다. 정자장사숙(張思叔)을 나무라기를, ‘어찌하여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기욕을 참지 못하는가?’ 하였고, 사상채(謝上蔡)정자에게 고하기를, ‘하나의 긍(矜)자를 제거하기를 또 동래(東萊)《논어》의,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후하게 하고 남을 책망하는 것은 박하게 한다.」는 장(章)을 읽은 것처럼 하고서야 전일에 가사(家事)를 타파(打破)한 병통을 크게 깨달았다.’고 했는데, 이는 모두 본받아야 할 점인 것이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함양(涵養)하고 성찰(省察)하는 공부를 더욱 한쪽을 폐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음이 발동되기 전에 함양하고 발동된 뒤에 성찰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니, 송덕상이 말하기를,

"과연 성교와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의 허물과 후회는 매양 마음이 동요되는 데서 생기므로, 경(敬)을 주로 삼는다는 것은 곧 함양하는 공부인 것이다. 진실로 마음을 다스리는 데 힘을 써서 마음이 동요되는 부분에 대해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면, 더욱 경(敬)을 주로 삼는 공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경(敬)이 시종(始終)을 이루고 동정(動靜)에 관통되기 때문인 것이다."

하니, 송덕상이 말하기를,

"성교가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을 주로 삼는 공부는 동정(動靜)에 관통되는 것이다. 동(動)하는 가운데 정(靜)이 있고 정한 가운데 동이 있는 것은 견주건대, 공허하고 광막하여 아무 조짐이 없는 가운데 만상(萬象)이 죽 늘어서 있는 이치가 있고, 만상이 죽 늘어서 있는 가운데도 또한 광막하여 아무 조짐이 없는 체(體)가 있어서 명경 지수(明鏡止水)가 여러 만물을 다 비추지는 못하더라도 광명(光明)의 체(體)는 밝게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사물을 응접함에 있어 손발에 못이 박히는 지경에 이르러도 나의 마음은 허령(虛靈)하여 어둡지 않고 또한 동요할 때라고 해서 정체(靜體)를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궁구해 보건대, 동도 또한 정이고 정도 또한 동이니, 반드시 경(敬)을 주로 삼는 공부를 힘쓴 후에야 본체(本體)와 작용(作用)은 막힘이 없어져서 동과 정을 아울러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니, 송덕상이 말하기를,

"성교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은 위의(威儀)를 차리는 즈음에 대해서도 진실로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대저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다스리는 공부는 지와 행 가운데 한쪽을 빠뜨릴 수 없는 것과 같으므로, 이르기를, ‘경(敬)은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는 외모를 방정(方正)하게 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외모를 제제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했으니, 이는 경과 의를 아울러 견지하면서 마음과 외모를 함께 다스린다는 것이다. 대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함양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함양하는 데는 경(敬)을 지니는 것보다 긴요한 것이 없는데, 경을 지니는 공부는 반드시 주정(主靜)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진실로 주정에 힘쓰려면 동작(動作)과 위의(威儀)를 차리는 즈음에 더욱 마땅히 삼가야 하는 것이다. 주 부자(朱夫子)경재잠(敬齋箴)을 지으면서 제일 먼저 의관(衣冠)을 바르게 차리고 첨시(瞻視)를 조심스럽게 하라고 말하였으며, 정부자(程夫子)가 주정(主靜)의 뜻을 논하면서 먼저 다리를 뻗고 앉으면 마음이 오만해진다고 하였고, 또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몸가짐을 다스리는 것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정좌(靜坐)하게 했는데, 이는 위의(威儀)를 정칙(整飭)하는 것이 경(敬)을 지니는 주정(主靜)의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위의가 마음을 다스리고 외모를 다스리는 데 크게 관계된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다. 더구나 또 종묘와 조정에서는 본디 갖추어야 하는 용의(容儀)가 있으니, 높은 관과 넓은 띠를 띠고 걸음걸이를 법도에 맞게 하는 것이 치교(治敎)를 보좌하는 일조(一助)가 되는 데 해롭지 않는 것이다. 어찌 이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실공(實工)만 못한 것이니 용지(容止)에 대해 일삼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혹 이로써 외모를 통해 마음을 추구하는 방도가 될 수도 있으니, 이른바 명분에 따라 실상을 책임지운다는 것이 이것이다.

수십 년 이래로 진신(搢紳)들 사이에 자기 몸을 바르게 하여 삼가는 공부를 한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전폐(殿陛) 위에서 혹 관을 비딱하게 쓰는 탄식이 있기도 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사대부들의 행검(行檢)이 땅을 쓴 듯이 없어진 일단을 볼 수 있다. 아! 성음(聲音)과 소모(笑貌)가 진실로 치화(治化)에 도움을 주기에는 부족한 것이지만, 아울러 이것까지 함께 방과(放過)하고 있으니, 이 어찌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를 개혁하려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습속(習俗)이 이미 굳어져서 성대하게 일신하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지 못하니, 연석(筵席)에 임하여 탄식을 발하는 것도 한갓 잗단 언교(言敎)가 되고 말았는데, 마침 연신이 강설(講設)하여 부주(敷奏)한 말로 인하여 이렇게 거듭 언급하는 것이다. 경은 숙덕(宿德)을 지닌 선비로 나의 초빙에 응하여 와서 조정의 긍식(矜式)이 되고 있으니, 모쪼록 이런 일에 유의하여 진려할 바탕을 삼도록 하라. 경에게 매우 기대하고 있으니, 경은 유념하도록 하라."

하니, 송덕상이 말하기를,

"성교에 대해 흠앙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덕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라는 장(章)을 가지고 글뜻을 대략 말하였는데,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것을 모두 실심(實心)으로 한 후에야 실효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대개 실심으로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 선을 선하게 여기면서도 능히 기용하지 못하는 데 귀결되기에 이르지 않고, 실심으로 미워하면 미워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면서도 능히 제거하지 못하는 데 귀결되기에 이르지는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곽공(郭公)509) 이 망한 것과 같은 길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임금이 된 사람은 좋아하고 미워하는 즈음에 신중을 기하여 오직 선한 것만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이 선하다고 기리더라도 믿지 말고 반드시 선한 까닭을 분명히 안 후에 좋아해야 하며, 여러 사람들이 악하다고 비난하더라도 또한 믿지 말고 반드시 악한 까닭을 분명히 안 후에 미워하여 호오(好惡)를 살펴서 훼예(毁譽)를 믿는다면 거의 과실이 적어질 것이다."

하니, 송덕상이 말하기를,

"과연 성교와 같습니다. 이는 임금으로서 더욱 마땅히 삼가고 조심해야 할 점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好)자의 글뜻으로 인하여 또 마음속에 감발(感發)되는 점이 있으니, 대개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한 바가 있다. 이 때문에 세도(世道)의 오융(汚隆)은 그 임금이 좋아하여 숭상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위에서 진실로 의(義)를 좋아하면 아래에서 의에 대해 흥기하게 될 것이고, 위에서 이(利)를 좋아하면 아래에서 이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나 과인(寡人)은 매양 풍속을 면려하여 돈후하게 하는 방도에 대해 유의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참으로 민속(民俗)의 누적된 폐단을 제거하기가 어렵고 인심(人心)이 편안한 데 길들여진 것이 습관이 되었으니, 지금 세상의 투습(套習)과 시상(時象)으로는 쉽사리 크게 혁신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시세(時勢)는 옛날의 시세와 달라서 풍속을 혁신하는 즈음에 다른 사람이 하나를 하면 나는 백을 한다는 공력을 들여도 오히려 성효(成效)를 요구하기 어려우니, 과궁(寡躬)이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탄식하는 까닭인 것이다. 대저 수십 년 이래로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풍속은 오로지 명리(名利)만 숭상하고 행검(行檢)은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염치를 쓸데없는 일로 여기고 지조를 탐탁하지 않게 여겨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온 세상에서 이른바 좋아하고 싫어한다는 것이 모두 상도(常道)에 어긋나는 것이니, 한심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충(忠)과 역(逆)을 분별할 수 없고 현(賢)과 사(邪)를 변별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조정에 선배(先輩)와 장자(長者)로서 긍식(矜式)이 되고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세도(世道)는 날로 비하되고 인심은 날로 어긋나서 지난번의 역변(逆變)을 순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원악(元惡)은 대략 다스렸다고 하지만 오래도록 더러운 풍속에 물든 것을 개혁할 기약이 없으니, 이제 세도에 대한 책임을 어찌 경이 스스로 떠맡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저 배워서 성인(聖人)의 학문에 이르고 정치를 함에 있어 반드시 삼대(三代)의 정치를 회복하게 하는 것은 오직 이 두 가지 이야기에 달려 있으니, 또한 매우 절실하고 합당한 말이다. 그러나 진실로 그 근본을 구명해 보면 과연 이는 위에 있는 사람의 책임이지만, 위에 있는 사람 또한 혼자 운용(運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위에서 정령(政令)을 반포하면 아래에서 반드시 받들어 보좌한 후에야 함께 치도(治道)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세워야 할 방도는 마땅히 명절(名節)을 면려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하는데, 이미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깨우쳐 줄 수가 없으므로, 위로 조정에서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에 이르기까지 습속의 고질적인 폐단을 갑자기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이 마치 사람의 사지(四肢)와 백체(百體)가 병들지 않은 데가 없는 것과 같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만일 긴급한 일이 있으면, 과연 의리를 들어 이에 대항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혹 나의 중도에 지나친 말일 수도 있겠으나, 또한 실리(實理)가 이와 같은 점이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송덕상이 말하기를,

"대순(大舜) 같은 성인도 반드시 고요(皐陶)·직(稷)·설(契)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여 함께 지치(至治)를 이루었다는데, 하루에 번다한 만기(萬機)를 청리(聽理)해야 하는 임금이 어떻게 혼자서 운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현재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경상(卿相)의 지위에 올라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진실로 과감하게 곧바로 앞으로 밀고 나가는 일을 맡기기는 어렵겠지만, 연소한 신진(新進)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힘써 행하는 데에 마음을 둘 경우 한 사람이 행하면 열 사람이 이를 본받아 점차 변혁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 함께 나왔다가 함께 물러가고 행렬만 따라다니고 대오만 쫓아다니면서 관수(官守)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직무를 극진히 수행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언책(言責)이 있는 사람 또한 충심을 다하려 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 단지 작록(爵祿)에만 얼이 빠져 있으니, 이를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찌 매우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지금 이런 강설(講說)은 글뜻에 따라서 하는 말에 가까운 것 같지만, 오늘 이렇게 논설하고 내일 또 이렇게 강마(講磨)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저절로 증진되고 유익해지는 부분이 있게 될 것이며, 스스로 반성하는 즈음에 만족한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효험을 얻은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니, 송덕상이 말하기를,

"임금이 덕이 성취되는 것은 오로지 경연을 열고 토론하는 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고, 홍낙순은 말하기를,

"이제 강연에 들어와서 성교를 듣게 되었는데, 성학이 너무도 고명하시어 학문상의 공부에 이르러서도 격물 치지(格物致知)에서 치평(治平)에 이르기까지 갖추어 구명(究明)하지 않은 것이 없으시니, 경서(經書)를 궁구하여 힘써 행하는 선비라고 할지라도 미칠 만한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따라서 흠앙하고 감탄하여 다시 우러러 도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이미 알고 있다 하여 소홀히 하지 마시고 더욱 확충하고 실천하는 공부에 간단(間斷)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유현(儒賢)을 초빙하여 주야로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던 나머지 이제 강연에 나와서 반복하여 토론하는 가운데 듣지 못했던 말을 많이 들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니, 참찬관(參贊官) 홍국영(洪國榮)이 말하기를,

"이 전당(殿堂)은 곧 효묘조(孝廟朝) 때 선정을 접견하여 치도(治道)를 강구하고 모유(謨猷)를 꾀하는 데 힘쓰던 장소입니다. 이제 또 성상께서 이 전당에 임어하셔서 선정의 후손을 불러들여 글에 임하여 뜻을 강론하면서 조용히 사대(賜對)하시니,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송덕상이 말하기를,

"전일 연석에서 의자(衣資)를 하사하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사양하였습니다만, 굳이 사양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황공스러워 감히 다시 번거롭게 아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또 약두(掠頭)의 장식을 아울러 하사하였는데, 은혜로운 하사품이라서 감히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효묘조 때 선정은 검소를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해야 한다는 내용을 연석에 나아가 진달하였는데, 그 뒤 효묘께서 특별히 초모(貂帽)를 하사하자 선정이 굳게 사양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진소하기에 이르렀었다. 이제 경도 이처럼 굳게 사양하니, 또한 귀하게 여길 만하다."

하였다. 송덕상이 말하기를,

"전에 진달한 두 조항 가운데 대의(大義)에 관한 이야기는 다시 더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오랑캐는 백년이 지나면 쇠망한다는 운세가 이제 이미 지났으니, 조만간 반드시 왕자(王者)가 흥기할 것입니다. 따라서 오랑캐가 쫓겨 동쪽으로 오면, 우리 나라에 징색(徵索)하고 침해하는 것이 반드시 극심할 것이니, 장차 이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때를 당하여 은밀히 엿보아 살피고 변에 대응해서 힘을 합쳐 소탕하는 것이 실로 의리와 사세에 합당합니다만, 돌아보건대 지금 편안함에 길들여진 습성을 이루어 이미 먼 앞날을 염려하는 마음이 없어서 스스로 힘쓸 대책에 대해 전혀 유념하지 않고 있으니, 이를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른바 스스로 힘써야 할 대책이란 것은 또한 양병(養兵)·양민(養民)과 변경을 공고히 지키고 군무(軍務)를 정제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니, 원컨대 성명께서는 깊이 유념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은 매우 앞날을 염려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군량도 풍족하고 군대도 풍족하다면 과연 스스로 힘쓰는 방도를 세울 수 있겠다. 그러나 현재 국사는 분열되었고, 군정(軍政)에 이르러서는 더욱 매우 허술하다. 더구나 수년 이래로 기근이 겹쳐서 민생(民生)이 조잔(凋殘)하니, 변경을 굳게 지키고 군무를 정제하는 방도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진실로 조처할 방책이 없어 매우 민망스러울 뿐이다."

하였다. 송덕상이 말하기를,

"민생이 곤궁에 시달려 지쳐 있고 국계(國計)가 애통한 것이 오늘날과 같은 때가 없었는데, 금년의 흉황은 조금 낫다고 하는 기내(畿內)를 살펴보더라도 이미 말할 수 없는 상황이고 삼남(三南)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심하니, 어사(御史)를 차송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매우 좋다. 내가 일찍이 선정의 문집을 읽은 적이 있는데, 매양 사치를 억제할 것과 어사를 보내라는 뜻으로 누누이 효묘께 진달했었다. 이제 진달한 내용은 진실로 급선무인데, 어사의 임무는 가볍지 않고 중한 것이므로 적임자를 고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 도리어 폐단을 끼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내가 바야흐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경의 말을 들어보니, 마땅히 가까운 시일 안에 차견해야 하겠다."

하였는데, 홍낙순이 말하기를,

"암행 어사를 차견하는 것은 가장 힘써야 마땅한 일입니다. 이는 백성들이 덕의(德義)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수령들이 징렴(徵斂)을 그치고 이호(吏豪)들도 두려워할 줄 알게 될 것이니, 효과와 유익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고, 홍국영은 말하기를,

"삼남의 흉황에 대해서는 진정(賑政)이 바야흐로 한창이니, 민정(民情)의 휴척(休戚)과 수령들의 장부(臧否)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유문(諭文)을 짓고, 이어서 어사에게 부쳐 보내어 덕의를 선포하게 하는 것 또한 좋을 것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겸하여 선유(宣諭)하는 것도 무방할 것 같다."

하였다. 홍국영이 말하기를,

"영종조(英宗朝)을사년510) 에 고 상신 민진원(閔鎭遠)이 청하기를, ‘유신 가운데 정초(旌招)하는 반열에 있는 사람을 전조로 하여금 먼저 경연관의 직임을 맡겨서 성학(聖學)을 보익(輔益)하게 하소서’ 했는데, 이제 다행히 유신이 조정에 나왔으니, 즉시 계하(啓下)하심이 마땅합니다. 외방에 있는 유신에게도 마땅히 똑같이 계하하여 불러들이는 방도를 극진히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홍국영이 말하기를,

"유현의 나이가 70세에 가까운데, 근력이 아직 강건하다 하나 객지에서 거처가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극심하고, 또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의 아들 송환정(宋煥程)이 바야흐로 능관(陵官)을 맡고 있어 왕래하기가 곤란하니, 상당한 자리로 서로 바꾸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혜릉 참봉(惠陵參奉) 송환정을 교관(敎官)과 서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76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7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註 494]
    공자가 시냇가에 서서’ :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공자가 시냇가에 서서 말하기를, ‘지나가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하였다."로 되어 있음.
  • [註 495]
    ‘학문을 비유하건대 산을 쌓는 것과 같다.’ :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학문을 비유컨대, 산을 쌓는 것과 같으니,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는데 그만두었다 해도 내가 그만둔 것이다. 또 비유컨대, 평지에 한 삼태기의 흙을 부었다 하더라도 진전된 것인데, 그것도 내가 나서서 한 것이다.[子曰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吾往也]"로 되어 있음. 곧 전진과 후퇴는 모두 자기의 의식에 따른 행동이므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뜻.
  • [註 496]
    ‘말해 주어서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 장 :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말임. 그 내용은, "공자가 말하기를, ‘말해 주어서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은 안회(顔回:顔淵)뿐이다.’ 하였다.[子曰 語之而不惰者 其回也與]"로 되어 있음. 곧 학문을 좋아하여 독실하게 행하는 안연을 칭찬한 말임.
  • [註 497]
    ‘덕을 좋아한다.’ :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여색(女色)을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하였다.[子曰 吾未見好德 如好色者也]"로 되어 있음.
  • [註 498]
    ‘나아가서는 공경(公卿)을 섬긴다.’고 한 장 :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공자가 말하기를, ‘나가서는 공경을 섬기고 들어와서는 부형을 섬기고, 상사에 대해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고, 술에 취해서 문란해지지 않는다. 이 가운데 어찌 내가 잘하는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子曰 出則事公卿 入則事父兄 喪事不敢不勉 不爲酒困 何有於我哉]"로 되어 있음.
  • [註 499]
    치의(緇衣) : 《시경(詩經)》 정풍(鄭風)의 편명(篇名). 정(鄭)나라 무공(武公)이 현인(賢人)을 좋아하는 것을 칭찬한 시임.
  • [註 500]
    오훼(烏喙) : 독초(毒草).
  • [註 501]
    횡거(橫渠) : 장재(張載).
  • [註 502]
    손(孫)·오(吳) : 손무(孫武)와 오기(吳起). 모두 병법(兵法)의 대가(大家)임.
  • [註 503]
    불(佛)·로(老) : 석가(釋迦)와 노자(老子).
  • [註 504]
    동래(東萊) : 여조겸(呂祖謙).
  • [註 505]
    상산(象山) : 육구연(陸九淵).
  • [註 506]
    세 마디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로, 순임금이 우에게 말하기를, "……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道)를 지키려는 마음이 미약하니, 사욕(私慾)을 떨치고 마음을 전일하게 가져……[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라고 한 세 마디를 가리킴.
  • [註 507]
    고정(考亭) : 주희(朱喜).
  • [註 508]
    녹동(鹿洞) : 주자가 학문을 강한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
  • [註 509]
    곽공(郭公) : 춘추 시대(春秋時代) 선한 사람을 훌륭하게 여겨 기용하지 못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여 물리치지 못한 탓으로 결국 나라를 잃고 조(曹)나라로 귀순한 망국(亡國)의 임금을 가리킴.
  • [註 510]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晝講, 講《論語》。 侍讀官沈念祖曰: "子在川上章, 言道體之不息。 而自此以下, 皆勉人進學之辭。 各章所言不同, 而其要不出立志。 大本旣立, 則學不期進而自進矣。 諸章中, 爲今日最近者, 又莫如譬如爲山之訓。 其止、其進, 只在自家之自强與自棄。 而九仞之前, 功雖多, 止而不進, 終至於虧。 一簣之所積雖少, 進而不止, 終至於成, 豈可以前功之多, 或忽進進之工哉? 其次語之不惰章, 又有可以警發者。 得一善眷眷服膺, 欲罷不能, 皆是顔子不惰處。 曾子之曰唯, 子路之未之行, 猶恐有聞, 猶不若顔子之心解力行, 知行俱到, 故夫子特稱之。 非但師友麗澤之益, 君臣啓沃之道, 亦當如是。 而千古以來, 惟大一人, 獨能取人爲善, 若決江河, 斯所以爲大舜矣。 竊念殿下臨御以來, 奮發勑勵, 整頓百度。 一國臣民, 皆以爲至治可期於朞月矣。 到今事爲施指, 或不無實效之未究。 風俗習尙, 亦未至丕變之可期, 徯志之治, 卒未易見。 此雖出於群下之不能對揚贊成, 而或恐殿下圖治之誠, 旣立之志, 亦復因此而少弛, 遂至有因循退托之意, 則不幾近於一簣之止乎? 臣聞日昨儒臣, 以立志有所仰勉者。 此言偶與今日講章之旨, 若相孚合, 故敢此略陳。 今日講章, 政多文義。 而如臣淺學謏見, 實無足發揮開陳者。 儒臣造朝, 今又登筵。 此誠朝廷曠絶之慶會。 深辭奧旨, 反復發難, 嘉謨大猷, 聞輒卽行, 以大決河之勇, 成九仞一簣之工, 深有望於今日矣。" 檢討官黃昇源曰: "好德章, 聖人以好德與好色對言之。 夫食色, 性也;好色, 是人性也。 民之秉彝, 好是懿德, 好德亦人性也, 而凡人則好德, 不如好色。 此如人心、道心之分, 發於形氣者, 易於過;發於義理者, 易於不及。 故謝氏註, 以一誠字, 發揮此章之旨者。 其義, 甚好。 殿下招延草萊之儒臣, 親御經筵, 諮訪嘉猷。 今日宗祊, 挽廻泰運之機, 在此一擧。 然而橫經問難之際, 止於上下酬酢, 而無實行之效。 則徒美觀瞻而已也。 進講諸章中, 逐章發問。 闡發聖人之精微。 雖一善言、一善行, 皆於聖躬, 必務實心體行之道, 然後始爲誠心好德矣。 聖心於此, 益復加勉, 是臣區區之望。" 上曰: "儒臣登筵, 敷陳文義好矣。" 經筵官宋德相曰: "出則事公卿章四件事, 事雖至近。 盡其理, 則雖聖人, 亦不外此, 蓋無精粗本末故也。 且聖人謙辭, 非心實自謂已能, 而外爲謙抑者也。 其心, 終似有欠缺歉然底意, 故其言如此。 蓋忽於卑近, 則可及於高遠地位耶。" 上曰: "卿之所陳, 甚好。 大抵, 聖人之心, 不自矜, 恒有不足之歎。 雖於日用事物, 至易至近之道, 罔或放過, 蓋是聖益聖、勉益勉之意, 而亦有實理之如此者。 大凡聖人之道, 莫如下學上達之工也。 下學之事, 雖甚近易, 而觀於上達之後, 則尤極高遠。 若言最近易之事, 則孝悌是也。 而溯究極工, 則以蕩嵬難名之德, 其道不越乎此二字。 而又以是推廣之, 使天之所覆、地之所載、日月所照、霜露所墜凡有血氣之倫者, 莫不尊親焉。 其廣大、深遠也, 有如是矣。 此《中庸》集傳, 所謂放彌六合, 退藏於密者也。 於是乎益知其至理之在吾方寸, 而不待他求也。 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作成之方, 莫不在於下學之工。 此章中, 出事公卿數句, 外面見之, 雖甚容易, 而上達之效, 亦不外是。 故夫子之所以自謙者此也。 且有取譬者, 聖人之心, 每不自聖, 不勉之中, 恒存望道未見之意, 安行之中, 亦有獨覺其進之妙。 如十五志學, 至七十從心所欲之語, 工夫次第, 燦然有階級, 無異後學循序之工。 是豈故爲設辭, 以訓後學者也? 雖以孔子之聖, 於人所不知之中, 有所獨覺而然也。 且曰: ‘假我數年, 卒以學《易》’云, 則以天繼生知之聖, 亦安有更事於學, 而如是云云? 亦可見聖人不自滿假之意也。" 德相曰: "聖敎誠然。 蓋事雖有卑近、高遠之別, 而其理則一也。 故雖卑近之事, 實是至理之所寓, 聖人於此, 亦不敢忽, 伏願殿下留神於此焉。" 上曰: "逝者如斯, 卽言其道體之流行不息也。 而予於文義之外, 因此逝字, 有所感發興歎者矣。 所謂逝者, 卽一往不返之謂, 而推之以人事, 有歲不與我之意也。 朱子亦嘗曰: "歲月如流, 工夫易間斷, 義理難推尋。’ 旣往雖已矣。 予過此時, 則歲月易至晼晩, 志氣漸益頹惰。 其將無聞而止矣。 可不懼哉? 卿以儒賢, 今幸造朝, 予心欣慰, 不啻如渴得飮。 而卿之蒼顔白髮, 亦已遲暮, 其欲無意於斯世則已。 如欲有意, 則展布所蘊, 輔成治化, 政宜及今慥慥, 可免難追之歎矣。 古人云: ‘大聖人, 猶惜寸陰。’ 衆人當惜分陰, 政爲今日道也。 予以世道之責, 委之於卿。 且以一逝字, 反復于卿, 以爲上下交勉之資。 卿其體此, 念哉念哉。" 德相曰: "聖敎逝字之義, 雖非經文本義, 可以別爲一義, 反復興歎。 推演聖人言外之意, 以爲上下交勉之資, 不勝欽仰感歎矣。" 特進官洪樂純曰: "殿下拈出逝者如斯之意, 惜儒賢之益老, 勉治化之裨補, 聖意尤切, 反躬自勉, 吾將不及。 臣於此, 不勝欽嘆。 殿下春秋方盛, 志氣方銳。 此, 正不可失之時。 須及此時, 益加勉勵, 勤孜不息, 則三代之治, 可以復見矣。 今者至誠招延, 儒臣造朝, 如是講磨討論, 甚盛擧也。 必須虛心採納, 以身體行, 豈不大有益於治道乎? 殿下春秋, 今方鼎盛。 儒臣則已老矣。 若過十餘年, 儒臣之年紀愈暮。 殿下之志氣, 安知不摧頹乎? 朱子告其君曰: ‘陛下者, 有之聖主。 今日者, 陛下之盛時。’ 臣於殿下, 亦敢云, 然此正殿下可惜之時。 伏願無忘今日之下敎, 益加勉焉。 朱子孝宗末年, 上箚曰: ‘歲月流邁, 如川之不復返, 不惟臣之蒼顔白髮, 已覺遲暮, 竊仰天顔, 亦覺非昔時。’ 今若失此時, 則荏苒之間, 治效不立, 聖志已惰, 將不勝其竊歎, 而爲此之懼。 伏願更架勉勵焉。" 至吾未見好德章, 德相曰: "此好善以誠之義也。 蓋人之好色, 則心豈有虛假, 而好之者乎? 至若好善, 則或外面好之。 而內實不能, 其所謂好之者, 有表裏不同之患。 此則無他。 私慾間之而然也, 故聖人所言如此。 子夏所謂: ‘賢賢易色。’ 亦此意也。 帝王工夫, 尤當深加警省處也。" 上曰: "好德如好色, 則果善矣。 而若無眞箇見得, 則所謂好之者, 未必誠心好之者也。 必須好如《緇衣》, 然後可以名實相符, 表裏無間, 卿言甚切實矣。" 樂純曰: "好賢之名, 美名也。 從古人君, 孰不欲好之, 但其所嗜好者, 與賢者異。 或有慕好賢之名者, 而其實非誠心好之耳。 東漢隱士之言曰: ‘廐馬萬匹, 其可減乎? 後宮數千, 其可去乎? 左右權豪, 其可除乎?’ 世主之所好, 皆如此, 故賢者不至。 神宗不能用程子;孝宗不能用朱子。 此正志士之恨, 臣雖無狀, 豈敢面諛殿下乎? 殿下聖質淸明, 聖學高邁, 無物累之害, 又至誠招延山林, 此固以來, 所未有之盛擧也。 昔我孝廟禮遇先正, 訏謨密勿, 契合昭融。 遺風餘烈, 至今不泯。 今儒賢, 又膺招徠, 登此講筵。 殿下之好賢, 克追聖祖, 臣何幸親見也。 殿下旣有好賢之心, 必須聽其言, 而施之於事, 然後可以著好賢之實矣。 人心毋論貴賤, 易失難操。 須常常鞭辟近裏, 使此心常存毋失。 法筵, 體重、禮嚴、情離。 伏望, 時時召儒賢, 夜對討論心性之理, 講磨治道之要, 以爲出治之本焉。" 上曰: "當體念矣。" 德相曰: "特進官之所達, 言皆切實。 人君勉學, 無過於此。 伏願留神焉。" 至譬如爲山章。 德相曰: "此止字, 卽自棄之謂也。 此進字, 卽自强之謂也。 爲山九仞, 其成無幾, 而或息其工, 則功不成;平地一簣, 其成渺然, 而不息其工, 則功可就。 畢竟成就, 惟在自强與自棄矣。 其效害之不難知如此。 伏望聖上於此, 必猛省焉。" 上曰: "所陳甚好。 自强、自棄, 只在於一念之間、毫釐之差。 自强而不至間斷, 則可成九仞之功;自棄而便欲放過, 則祗歸一簣之虧, 殊可警懼。 今卿因文義陳勉者, 誠爲切實, 當體念矣。"

《語》之不惰章。 德相曰: "此章, 別無深意。 但顔子之心解, 卽聞一知十之意也。 顔子之力行, 卽旣竭吾才之意也。 苟非顔子之明且健, 孰能如此乎? 此非群弟子所可及, 而聖人之所以稱道者也。 明健二字, 亦必加勉焉。" 上曰: "卿之所奏好矣。 因知行二字, 予有所反復者矣。 爲學之道, 貴先格致, 而誠正次之。 以知行言之, 窮格屬知, 誠正屬行, 然豈可盡知而後, 始議做工於行乎? 今日格一物, 明日格一物, 而今日行一事, 明日行一事。 知得一寸, 行得一寸, 交修竝進, 不可偏廢者也。 若徒使窮格, 而擔閣力行, 則所謂窮格者, 祗歸鸚鵡之能言矣。 但能力行, 而抛置窮格, 則所謂力行者, 特屬適埴而冥行也。 是以《大學》《三綱》《八目》《中庸》《達道》《達德》, 聖人作爲名目, 傳示後學者, 誠欲使後學, 知本末先後之別, 而不敢躐等、淩節, 貪多務得也。 大抵, 爲學之要, 無出於勿忘、勿助也。 忘則頹惰, 不足有爲; 助則急迫, 反復爲害, 此又不可不念處也。 且說者, 或以爲匹庶之爲學, 不過止於修齊之事云。 予則以爲此有不然。 匹庶之學, 與帝王無異焉。 傳不云乎, 窮則獨善, 達則兼善。 雖以之事言之, 未嘗不自任於治平之功。 而特以不得其位, 不行其道而然也。 以是觀之, 雖匹庶, 亦豈可不念於治平之學乎? 但帝王之學, 與匹庶, 差有緩急之殊。 在匹庶, 則學未到治平之域, 姑可進德修業, 以責成效。 此乃聖人所謂幼學壯行也。’ 至於帝王, 則沖幼之時, 已任治平之責矣。 其可委之以修齊以上工夫之未造, 而乃以治平之功, 讓而不居乎? 尤當一邊用工, 一邊做治也。 是以帝王之爲學, 爲尤急、尤重, 而與匹庶, 煞有殊焉者, 誠以此也。 噫! 上古之時, 則亶聰明者, 作元后, 而自夫家天下之後, 爲人主者, 未必盡有聰明之資, 而天位遂作世守之物。 則凡所用工之方, 益加俛焉孜孜, 不敢荒逸, 而無負上天作后之意可也。 此予所以因文義, 激仰于中者也。" 德相曰: "知、行之不可偏廢, 果如聖敎矣。" 上曰: "知、行, 雖不可偏此、廢彼, 而用工之際, 每患知或有餘, 而行或不足。 其所謂有餘者, 決非眞知故也。 果能眞知其善之可爲、惡之不可爲, 如芻豢之悅口、烏喙之殺人, 則決無不行之理。 然行固必待於勇, 而後做得。 非勇則己私, 何以克之, 物累, 何以制之? 是以, 言達德, 以勇竝言者此也。 雖以諸賢用工言之, , 大賢也, 固不敢議到。 而至如橫渠之爲橫渠, 直以一勇字收效。 早悅, 晩逃。 初軔之迷塗也, 强探力索, 勇撤皐比, 晩年之成德也, 又其敎人也, 每以纏繞處擺脫, 未嘗不勤咨焉。 予則以爲: ‘學者用工, 莫若取法於橫渠之爲緊切。’ 卿意, 以爲如何?" 德相曰: "橫渠篤行之工, 可謂斬釘截鐵, 勇行直前者也。" 上曰: "以予陸陸之學, 於聖學工夫, 尙不能窺其萬一, 而何暇便自滿假乎? 設令講官之說, 率皆層淺, 而無足以當予心。 然人皆有一得。 在予從善之義, 固當虛心傾聽, 以體聖人好問、好察之意。 況予果無眞知實得者乎? 大舜, 聖人也, 自耕稼陶漁, 以至爲帝, 而無非取諸人者, 則此予所當法者也。 至於經筵之罕設, 每以機務之繁, 不得逐日開講。 是固予歉愧之甚者也。 工夫之無間, 如天行之不息。 予於爲學, 非不欲俛焉孶孶, 而每患作輟無常。 則非但寒曝之爲可戒。 又視緝熙將就之義, 尤無可言矣。 自此當頻頻開講, 而講時, 卿必同參, 以平昔所講磨之格言、嘉謨, 日陳于予也。 且念講學之工, 不獨誦讀爲貴。 全以反復討論爲意, 則自有無限進益也。" 德相曰: "今日, 悠悠萬事, 莫急於聖學成就。 豈可以機務煩劇, 不頻開講乎? 自此留意之敎, 臣不勝莊誦矣。" 上曰: "下之期望如此。 則上之自勉, 亦當加意, 可不體念? 而今予之所望於卿者, 亦大矣。 況卿, 卽先正之孫也? 其以先正之事孝廟者, 事予, 則豈不有光乎? 予今以丕變之責, 委之於卿。 朞月之內, 固難責成, 而卿能盡心於國事, 則成效亦可翹足而待。 顧今世道之責, 惟在於卿矣。" 德相曰: "臣識淺學蔑, 將無以明先臣之志事, 又無以報聖上之恩眷。 而聖敎至此, 益切惶愧矣。" 上曰: "俄以知、行之不可偏廢, 有所論說矣。 雖以敎人之方, 言之, 東萊之學, 可謂專尙道問學之工, 此屬於窮格, 象山之學, 固是偏係尊德性之工, 此屬於力行。 然, 東萊之病, 病止玩物;象山之弊, 弊歸入禪。 蓋均之爲害, 而淺深之別, 則有之。 且象山之意, 本欲各立於朱子之訓釋也。 倘非朱夫子聖人之深辭奧旨, 孰得以闡明, 而後學亦安得窺覘聖明之蘊, 探索天人之際也? 無極、太極之往復, 蓋不得已也。 此正如之授, 其言不過四字。 而之授, 益之以三言者也。 又如《論語》, 只書仁字, 而《思》《孟》詳言七情、四端也。 蓋世愈下而道愈晦, 講之不得不明, 釋之不得不細也。 聖賢豈欲多言也哉? 且於此, 古聖賢物我無間之意, 亦有彷彿想像者。 象山一派, 背馳考亭, 自立門戶。 然而朱子, 於象山交契, 本自不淺, 除非辨彼學闢彼語之時, 則彼此之間, 不知和氣。 雖以鹿洞事言之, 相與講論於函丈之間, 而聽之者, 莫不有竦然動心者。 接物之際, 意之相投, 有如是矣。 至於後世不然, 少有意見之岐異, 輒致戈戟之相尋, 豈非朱子之罪人乎? 此亦予因文, 而慨歎者也。" 德相曰: "聖敎至當矣。" 上曰: "聖學、異端, 道則雖殊, 而工固無間。 是以從古儒者, 或有早悅而晩悟之人。 至於佛氏, 與吾儒之學, 其分在於毫釐之差, 故曰似是而非, 彌近理而大亂眞。 學者之造詣未高, 識解未篤, 則蓋難免紫亂朱之歎矣。 象山之學, 亦以是也。" 德相曰: "果如聖敎。" 上曰: "忠、質、文, 皆是聖王之治規, 而末弊莫不有之, 乃有互相損益之事。 至於學問, 亦然。 門之說敬, 非不極好而至當。 朱子之釋經, 又何等繼往、開來之功? 而末學之未及探得其蹊逕者, 往往有或近於入定者, 或治乎訓詁者。 此其故何哉?" 德相曰: "忠、質、文, 果有末流之弊矣。" 上曰: "大凡學者之用工, 各隨其氣質之偏處而下工。 克己, 須從性偏難克處克將去者, 先儒之言也。 蓋矯氣質之工, 必自於克己焉。 此亦竝行交修處也。 大抵性柔者, 必先剛克;性剛者, 必須柔克。 剛者, 每失於自用;柔者, 每患於退托, 故聖賢之敎人, 自己之用工, 各隨其不足處, 開發之、推擴之。 程子張思叔曰: ‘何不動心忍性?’ 謝上蔡程子曰: ‘去得一矜字, 又如東萊之讀《論語》, 躬自厚而薄責於人之章, 大覺前日打破家事之病。’ 此皆所當法者也。 以此觀之。 涵養省察之工, 尤不可偏廢也。 涵養於未發之時, 省察於旣發之後, 豈不好乎?" 德相曰: "果如聖敎。" 上曰: "人之尤悔, 每在動處, 故主敬, 卽涵養之功也。 固可用力於治內, 而欲於動處不走作, 則尤豈非藉手於主敬之工乎? 此所以敬是成終始, 而通動靜者也。" 德相曰: "聖敎誠至當。" 上曰: "主敬之工, 通貫動靜。 蓋動中有靜, 靜中有動, 譬如沖漠無眹之中, 有萬象森然之理。 萬象森然之中, 亦有沖漠無眹之體。 明鏡止水, 不以衆物之畢照, 而光明之體, 瑩然自在。 則雖接事物, 至於手足腁胝, 吾心之虛靈不昧, 亦不以動時而失其靜體也。 以此究之, 動亦靜, 靜亦動也。 必用主敬工夫, 然後可以體用無間, 動靜交修矣。" 德相曰: "聖敎至當。" 上曰: "人於威儀之際, 固不可忽也。 大抵治心、治身之工, 如知行之不可闕一, 故曰: ‘敬以直內, 義以方外。’ 又曰: ‘制之於外, 以安其內。’ 此是敬義夾持, 內外交修者也。 蓋治心, 莫切於涵養;涵養, 莫要於居敬。 居敬之工, 必自主靜始。 苟欲用力於主靜, 則動作威儀之際, 尤所當愼。 朱夫子《敬齋之箴》, 首言正衣冠、尊瞻視。 程夫子論主靜之義, 先言箕踞, 則心慢。 又敎初學之治身, 必曰且敎人靜坐, 所以整飭威儀, 爲居敬主靜之工也。 以是益知其威儀之大關於治內外也。 況又宗廟、朝廷之上, 自有容儀, 峩冠博帶, 規行矩步,不害爲輔治之一助。 豈可曰此不若近裏之實工, 而無所事於容止也哉? 亦或以此, 而爲由外求內之道。 所謂循名, 而責實者此也。 數十年來, 簪紳之間, 鮮有飭躬之工。 殿陛之上, 或有側弁之歎。 此雖一事, 或可見士大夫行檢掃地之一端。 噫! 聲音、笑貌, 固不足有補於治化, 而竝與此而放過, 則豈非慨然之甚者乎? 非不念及於矯革, 而習俗已成, 未見有蔚然豹變之美。 臨筵發歎, 徒爲屑屑言敎之歸。 適從筵臣, 因講說敷奏之語, 有此申及。 卿以宿德之士, 應子旌招, 矜式於朝廷。 須於此等處留意, 以爲振礪之地。 深有望於卿也。 卿其念哉。" 德相曰: "聖敎, 不勝欽仰。" 上曰: "俄以好德如好色章, 文義略已言之。 而好善、惡惡, 皆以實心爲之, 然後可責實效。 蓋好之以實, 則好不至善善, 而不能用之歸; 惡之以實, 則惡不爲惡惡, 而不能去之歸。 不如是, 則與郭公之所以亡, 同歸一轍矣。 爲人君者, 愼其好惡之際, 惟善是好, 惟惡是惡。 衆譽之曰善, 不信焉, 必明知其所以善之故, 然後好之;衆毁之曰惡, 亦不信焉, 必明知其所以惡之故, 然後惡之。 審其好惡, 而信其毁, 則庶幾寡失之矣。" 德相曰: "果如聖敎。 此是人君尤當審愼處也。" 上曰: "因好字文義, 又有感發于中者, 蓋上有所好, 下必有甚焉。 是以, 世道之汚隆, 在其君好尙之如何耳。 上苟好義, 則下興於義;上又好利, 則下趨於利。 惟予寡人, 每於敦風勵俗之道, 非不留意, 而誠以民俗之積弊難祛。 人心之狃安成習, 以今世套, 以今時象, 恐不可容易丕變也。 且今之時, 則與古之時有異。 其所移風易俗之際, 雖用人一己百之工, 猶難責其成効也。 此予寡躬所以憂歎于中者也。 大抵數十年來, 士大夫一種風俗, 專尙名利, 不顧行檢, 以廉恥爲弁髦之事, 以志操等棄之物。 擧世所謂曰好曰惡者, 皆反其常道, 可勝寒心。 是以, 忠、逆無分, 賢、邪莫辨。 此無他, 朝廷之上, 無先輩、長者之可以爲矜式, 而師表者。 故世道日下, 人心日乖, 以至馴致向來逆變。 元惡雖曰略加鋤治云, 而舊染汚俗, 矯華無期。 今之世道之責, 豈非卿之所可自任者乎? 大抵學以至於聖人之學, 爲治必復三代之治, 惟在於是, 兩說亦甚切當矣, 然苟究其本, 則果是在上者之責, 而在上者, 亦不可獨運也。 上布政令, 下必承佐, 然後可以共成治道。 爲今之道, 當以勵名節爲主。 旣不可以家喩而戶說, 上自朝廷, 下至閭巷, 習俗之痼弊, 猝難變化, 如人之四肢、百體, 無不受病者然。 以今樣子, 脫有緩急, 未知果有抗義之人也。 此或予過中之說, 而亦有實理之如此者。 何以則好耶?" 德相曰: "雖以大之聖, 必與皋陶, 都兪吁咈, 共成治理。 則一日萬幾之繁, 人君其豈可獨運乎?" 上曰: "以目下事言之。 致位卿相, 年齡遲暮者, 固難責之以勇往直前之工, 而至於年少新進之類, 若能存心於砥礪之行, 則一人爲之, 十人效之, 庶幾漸次變革。 而不此之爲, 旋進、旋退, 隨行、逐隊。 有官守者, 不必以盡職爲念;有言責者, 亦不欲以盡忠爲心。 徒事規規於爵祿之間, 此將奈何? 豈非慨歎之甚者乎?" 上又曰: "今者此等講說, 似近應文, 而今日如是論說, 明日又如是講磨。 則不知之中, 自有進益之處。 自省之際, 不無充然之意。 豈可曰無得效者乎?" 德相曰: "君德成就, 專在經筵討論之際矣。" 樂純曰: "今入講筵, 得聞聖敎, 聖學高明, 至於學問上工夫, 自格致至於治平, 而無不該括。 雖窮經力行之士, 鮮有及者。 欽仰感歎, 無所更容仰贊者。 而非知之艱, 行之惟艱。 勿以已知而忽之, 益加擴充踐履之工, 無所間斷焉。" 上曰: "予之旌招儒賢, 日夕虛佇之餘, 今登講筵, 反復討論, 多聞其所不聞, 是可幸也。" 參贊官洪國榮曰: "此堂, 卽孝廟朝晉接先正, 講究治道, 密勿訏謨之所也。 今又聖上, 臨御此堂, 招筵先正之孫, 臨文講義, 從容賜對。 此亦非偶然也。" 德相曰: "前日筵中, 有下衣資之命, 故敢以爲辭。 則有勿爲固辭之敎, 故惶恐不敢更瀆矣。 昨又竝掠頭之飾, 下賜恩賜之物, 不敢不受矣。" 上曰: "孝廟朝, 先正以崇儉抑奢之意, 登筵陳達。 而其後孝廟, 特賜貂帽。 先正固辭之不得, 至於陳疏矣。 今卿又如是固辭, 亦可貴矣。" 德相曰: "前達第二條, 大義之說, 無可更陳者。 而但虜過百年之運, 今已久矣。 早晩必有王者興焉。 虜若見逐而東來, 則徵索侵害於我國者, 有必甚焉。 將何以堪之? 當此時也, 潛同應變, 合力掃蕩, 實合於義理事勢。 而顧今狃安之習, 旣無遠慮; 自强之策, 全不留意。 此將奈何? 所謂自强之策, 亦不過養兵、養民, 固邊圉、修戎務而已。 願聖明, 深留意焉。" 上曰: "卿言可謂深遠慮矣。 若足食、足兵, 則果爲自强之道。 而目今國事泮渙, 至於戎政, 踈虞益甚。 況數年以來, 饑饉荐臻, 民生凋瘵。 固邊圉、修戎務之道, 非不念之, 而實無措置之策, 甚可悶矣。" 德相曰: "民生困瘁, 國計哀痛, 莫今日若。 而今年荒歉, 以稍勝之畿內觀之, 已無可言。 至於三南, 則尤甚, 差送御史, 則好矣。" 上曰: "所陳甚好。 予曾見先正文集, 每以抑奢侈, 及遣繡衣之意, 縷縷陳白於孝廟矣。 今此所陳, 實爲急務。 而御史之任, 不輕而重。 非但難於其人, 且有反爲貽弊之慮, 故予方有意, 而未果矣。 今聞卿言, 當從近差遣矣。" 樂純曰: "差遣暗行, 最爲當務。 此不但民知德意, 守令可以歛戢, 吏豪亦知畏懼。 其有效益必多矣。" 國榮曰: "三南凶荒, 賑政方張。 民情休戚、守令臧否, 不可不廉察。 而撰出諭文, 仍付御史, 宣布德意, 亦似好矣。" 上曰: "兼爲宣諭, 亦似無妨矣。" 國榮曰: "英宗朝乙巳年, 故相臣閔鎭遠, 請以儒臣之在旌招之列者, 令銓曹, 先付經筵官, 以輔益聖學爲奏。 今幸儒臣造朝, 宜卽啓下, 而在外儒臣, 亦宜一體啓下, 克盡招延之道, 似好矣。" 允之。 國榮曰: "儒賢, 年迫七耋。 筋力雖健, 客裏居處, 甚爲齟齬, 且無在側扶將之人。 其子煥程, 方帶陵官, 往來難便。 以相當窠相換, 似好矣。" 命惠陵參奉宋煥程, 敎官相換。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76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7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