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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6권, 정조 2년 11월 27일 계축 1번째기사 1778년 청 건륭(乾隆) 43년

제주 목사 김영수를 소견하고, 길주의 방어영을 성진으로 옮기게 하다

제주 목사 김영수(金永綬)를 소견하였다. 김영수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남병사(南兵使)로 대죄(待罪)한 적이 있으므로, 삼가 소견이 있습니다. 본영의 북쪽에 두 개의 큰 영(嶺)이 있는데 곧 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이 이것이며, 본영의 남쪽에 또 두 개의 영이 있는데 곧 쌍가령(雙加嶺)·함관령(咸關嶺)이 그것입니다. 이 네 개의 큰 영을 가로질러 하나의 대로(大路)가 있는데, 이미 이 길이 있으면 마땅히 다른 길은 없어야 하겠지만 영 밑의 바닷가로 사잇길이 있어 곧바로 안변(安邊)까지 닿게 되어 있어서 저지하는 것이 없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마천령·함관령 두 영 아래에 돌을 쌓아 누보(壘堡)를 만들고 사잇길을 차단함으로써 지름길을 막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남관(南關)과 북관(北關)은 모두 중요한 곳이므로, 성을 지키는 제도는 마땅히 다름이 없어야 합니다. 북관은 절제하는 방도가 있어 수신(帥臣)이 순행하여 조련할 때 속오(束伍)를 낮에 조련시키고 밤에 성에서 조련을 익히게 하는데, 향품(鄕品)과 한산(閑散)이 단속하는 데 익숙하여 명령을 들으면 달려나와서 창을 들고 성으로 올라가니, 자못 실효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관에 이르러서는 애당초 성을 지키는 제도가 없어서 도리어 허술한 폐단이 많습니다. 성을 지키는 방책에 있어서 북쪽은 중하게 하고 남쪽은 소홀히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되니, 신은 남관에서 성을 지키는 것도 북관의 예에 의거하여 또한 제도를 정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북관의 마천령 아래에 성진진(城津鎭)이 있는데, 지세가 영을 등지고 있어 한 길을 저지하는 요해처(要害處)가 되고 있습니다. 길주(吉州)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진진 아래에 있지만,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흥(慶興)과 곧바로 통하는데도 막을 만한 험요한 곳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당초에 성진에다 방어영을 설치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길주로 영(營)을 옮긴 것은 과연 무슨 까닭으로 인해 그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길주에 방어영을 설치한 것은 마침내 성진이 긴요한 것만 못합니다. 신은 길주의 방어영을 예전대로 다시 성진에 설치하여 관방을 중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의 말에 소견이 있다 하여 묘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김영수가 또 아뢰기를,

"신이 경상도 중군으로 대죄하였을 때 살펴본 바에 의하면, 가산 산성(架山山城)대구(大邱)에서 4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밖은 험하지만 안은 평탄하여 진실로 성을 지키기에 합당한 곳이었습니다. 칠곡 부사(漆谷府使)가 이 산성에 거처하는 것은 관방(關防)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조적을 수납(輸納)할 즈음에 또한 민폐가 많습니다. 신의 생각에 칠곡부를 평지로 옮겨 설치하고 감영의 중군(中軍)을 이 성에 설치한 다음 기계(器械)와 향곡(餉穀)을 헤아려 옮겨 저장하면, 한편으로는 관방의 땅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되고 한편으로는 민폐를 제거하는 방도가 되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신이 함종(咸從)에 있는 자모 산성(慈母山城)의 형편을 살펴보니, 산세가 매우 높고도 험하였으며, 밖으로 한 면은 한 가닥 길이 있을 뿐이고 나머지 삼면은 나는 새도 넘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성 안은 평탄하고 또 99개의 샘이 있어 관서(關西)에서는 제일 견고하므로 일찍이 용사(龍蛇)의 변란이 있었을 때 오로지 이 성만 보전되었는데, 지금도 사적(史蹟)을 기록한 비석(碑石)이 있으니, 반드시 지킬 수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관방이 허술하여 성첩(城堞)이 무너지고, 샘은 매몰되고 폐기되어 곧 버려진 땅이 되었는데, 이는 진실로 단지 별장(別將)만 두어 품질이 낮고 진(鎭)이 잔약해졌으나 수거(修擧)하지 못한 소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의 의견은 특별히 이력과(履歷窠)를 설치하여 특별히 이름이 높은 무인(武人) 가운데 합당한 사람을 가려서 무너진 성첩을 수치(修治)하고 폐기된 샘을 다시 파내게 한 다음 평양부(平壤府)에 있는 군수(軍需)를 적당히 헤아려 나누어 저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또 호남을 왕래할 때 운봉(雲峯)의 형지(形止)를 두루 살펴보았더니, 앞은 남원(南原)과 닿아 있고 뒤는 함양(咸陽)과 연접되어 있는데, 단지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어서 진실로 호남과 영남의 요충지가 되니, 겸영장(兼營將)으로 대충 관령(管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의 의견에는 이력과로 증설하여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고 양로(兩路)의 관방을 만드는 것이 실효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64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7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군사-관방(關防)

    ○癸丑/召見濟州牧使金永綬永綬奏曰: "臣嘗待罪南兵使, 竊有所見。 本營之北, 有二大嶺, 卽磨天磨雲; 本營之南, 又有二嶺, 卽雙加咸關也。 橫截四嶺, 而有一大路。 旣有此路, 則宜無他路。 而嶺下沿海之邊, 有間路, 直抵安邊, 無所關隘。 臣謂磨天咸關兩嶺之下, 積石爲壘。 斷其間路, 以防捷徑爲宜。 南北關, 俱是重地。 則守城之制, 宜無異同, 而北關, 則有範制之方。 帥臣巡操時, 晝練束伍, 夜習城操, 鄕品與閑散, 熟於團束, 聞令趨赴, 報戟登城, 頗有實效。 而至於南關, 則初無守城之制, 反多踈虞之慮。 守城之策, 不可重於北, 而忽於南也。 臣謂南關守城, 依北關例, 亦令定制擧行, 爲宜。 北關磨天之下, 有城津鎭, 而地勢背嶺, 爲一路關隘之要害處。 至於吉州, 雖在城津之下, 而處於平地, 直通慶興, 無一防捍之險, 故城津之當初設置防禦營, 實有以也。 中間移營於吉州者, 未知果緣何故, 而吉州之防禦, 終不若城津之緊要。 臣謂吉州防禦營, 依舊復設於城津, 以重關防, 爲宜。" 上以其言有見, 命廟堂稟處。 永綬又曰: "臣待罪慶尙中軍時, 見架山山城, 在於大丘四十里許, 而外險內夷, 實合於守城之地。 而漆谷府使之處於山城, 非徒無益於關防, 糶糴輸納之際, 亦多民弊。 臣意則移設漆谷於平地, 置監營中軍於是城。 而器械、餉穀, 量其移儲。 一, 以爲重關防之地。 一, 以爲除民弊之道, 恐爲合宜。 臣於待罪咸從時, 見慈母山城形便。 則山勢高峻絶險, 外一面, 只有一條路。 而三面, 則雖飛鳥不得踰越。 內則平夷, 且有九十九井, 爲關西之最。 故曾在龍蛇之變, 此城獨全, 至今有紀蹟碑。 可知其必守之地, 而近來關防踈虞, 城堞頹圮, 諸井堙廢, 便成等棄之地。 此實由於只置別將, 秩卑鎭殘, 不能修擧之致。 臣意, 則別設履歷窠, 叨擇名武中可合人, 修治頹城, 疏鑿廢井, 平壤府所在軍需, 量宜分儲爲宜。 又於湖南去來時, 歷見雲峰形止。 則前抵南原, 後接咸陽。 只有一路, 實爲湖、嶺之要衝, 不可以兼營將, 草草管領。 臣意則增其履歷, 設爲防禦。 作兩路之關防, 似有實效。" 上竝命廟堂稟處。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64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7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군사-관방(關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