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왕(영종)의 행록을 쓰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선조(先朝)에 대해 편차(編次)하는 각신(閣臣)들을 소견하고 어제(御製)인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행록(行錄)을 내렸는데, 모두 60여 조항에 달하였다. 하교하기를,
"선대왕의 3년상을 비로소 마쳤는데, 금년도 장차 저물어가고 있으니, 미치지 못하는 슬픔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다. 아! 50년 동안의 성대한 덕업(德業)을 이루어 오는 과정에서 가모(嘉謨)와 선정(善政)이 혹 사륜(絲綸)의 사이에 발현되기도 하고 혹 기주(記注)하는 가운데 기재되기도 하여 일성(日星)처럼 환히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치고 있으니, 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들 가운데 누군들 모르겠는가마는, 드러나지 않은 덕과 남긴 훈칙(訓則)은 실로 외조(外朝)에서는 모르는 것이다. 만일 지금에 이르러 이를 천양하지 않는다면 세월이 점점 멀어져서 묻혀 버리기 쉽다. 나 소자(小子)가 이를 두려워하여 평일에 일찍이 우러러보며 우러러 들은 것을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여 대략 문자로 얽었는데, 감히 만분의 일도 제대로 그려냈다고 할 수 없으나, 열성조(列聖朝)의 행록에 견주어보면 수배나 더 많을 뿐만이 아니다. 대저 행장(行狀)은 이것이 하나의 문자(文字)이지만, 이것은 곧 유사(遺事)와 같은 것이다. 경 등은 모두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며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또 선조를 편차한 사람이니, 이에 경 등을 불러 한 번 보게 하는 것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경 등은 완성된 글이라고 여기지 말고 자구(字句) 사이의 미안한 곳은 단락에 따라 상세히 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에게 명하여 읽게 했는데, 자정전(資政殿)에서 조회할 때에는 반드시 어탑(御榻)을 문지방 밖에 옮겨놓았다고 한 데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경 등 또한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신 등이 여러 번 우러러 목도한 적이 있는 일입니다."
하였다. 읽어내려 가다가 항상 한문공(韓文公)이 동소남(董邵南)이 떠나는 것을 전송한 글을 외었다고 한 데 이르러, 김상철이 말하기를,
"이 또한 신 등이 매양 우러러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읽어내려 가다가 과거에 전(殿) 곁에 하나의 초당(草堂)을 짓고 글을 읽으려 했다 한 데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선대왕께서는 옛날의 뜻을 계술(繼述)하려고 재목(材木)을 모아 초당을 지으려 했었으나, 민력(民力)을 염려하여 드디어 짓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선대왕께서 백성을 사랑하고 검소함을 숭상한 지극한 뜻을 알 수 있다."
하니, 편차했던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신이 내국 제조(內局提調)로 입시했을 적에 이 하교를 받든 것이 여러 번이었는데, 터를 닦을 때에 이르러 나무를 많이 베게 되자 백성을 상해(傷害)할 걱정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역사(役事)를 일으키지 말라고 하교하셨습니다."
하였다. 읽어내려 가다가 균역(均役)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선대왕께서는 매양 균역이란 한 가지 일을 큰 사업으로 삼으셨는데, 만년(晩年)에는 하교하시기를, ‘당초에 설시(設施)한 의도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 것이 아닌가?’ 하셨었다. 을미년460) 사이에는 여러 번 걱정하고 탄식하시면서 폐단을 개혁할 뜻이 없지 않았으니, 또한 백성을 다친 사람 보살피듯 하는 지극한 인애(仁愛)를 볼 수 있다."
하였다. 다 읽자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삼가 직접 지으신 행록(行錄)을 보고 신 등은 더욱 한없는 성효(聖孝)를 우러러 알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편록(編錄)할 적에도 오히려 눈물을 참으며 붓을 들었는데, 다시 독주(讀奏)하는 소리를 들으니 슬픈 느낌이 배나 더하다."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신 등은 늦게 태어났으니 선왕의 초년의 성대한 덕과 아름다운 일에 대해 어떻게 그 만분의 일인들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제 어제(御製)의 내용에 발휘(發揮)되고 형용(形容)된 부분으로 인해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으니, 더욱 감읍(感泣)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양(揄揚)하려는 뜻이 단지 큰 덕에만 있었으므로 잗단 일들은 산삭(刪削)하였다. 돌아보건대 이 한 편은 오로지 백행(百行)의 근원에 주안점을 두었으므로 평일에 있지 않았던 말과 행하지 않았던 일은 감히 한 글자도 보태지 않았다."
하였다. 채제공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 소령원(昭寧園)의 장지(葬地)를 구할 적에 몸소 답사했다는 한 가지 조항은 오히려 성덕(聖德)에 있어서 조그만 일에 속하는 것이니, 헤아려 다시 재정(載定)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역적 정후겸(鄭厚謙)은 벼슬이 아경(亞卿)에 이르렀지만, 한가한 관사(官司)의 한직(閑職)이라 할지라도 위에서 끝내 낙점(落點)하지 않았으니, 척리(戚里)를 억제하는 성의(聖意)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고, 김상철은 말하기를,
"선왕께서 만일 역적 정후겸이 권세를 판 일을 굽어 통촉하셨다면, 반드시 처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대왕께서는 정후겸, 김귀주의 무리에 대해 척리라는 것 때문에 용서하시는 일이 있지 않았다. 정후겸에 대해 처분한 것으로 살펴본다면 어찌 성덕(聖德) 가운데 훨씬 미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지(朝紙)461) 에 나온 것 이외에 심상한 사교(辭敎) 사이라 할지라도 경 등이 우러러 들은 것이 있으면 일일이 거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니,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어제(御製) 이외에 신 등이 다시 한 마디도 더 도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60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70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출판-서책(書冊)
○甲辰/召見時ㆍ原任大臣、先朝編次人諸閣臣, 下《御製英宗大王行錄》。 凡六十餘條。 敎曰: "先大王三年甫畢, 今歲且暮, 靡逮之痛, 愈久愈切。 於戲! 五十年盛德大業, 嘉謨善政, 或發於絲綸之間, 或載於記注之中, 昭如日星, 輝人耳目。 則在廷臣僚, 夫孰不知, 而若稽潛德遺則, 實是外朝之所不知者。 如不及今闡揚, 則歲月寢遠, 易致茫昧。 惟予小子, 爲是之懼, 以平日所嘗仰覩仰聞者, 隨得隨錄, 略搆文字。 非敢曰摸盡其萬一, 而比諸列聖朝行錄, 不啻數倍之多。 大抵行狀, 則是一通文字, 而此則便同遺事矣。 卿等俱是先朝舊臣, 其中數人, 且是先朝編次人。 則玆召卿等, 使之一見, 烏可已乎? 卿等勿謂成書, 字句間未安處, 逐叚詳論也。" 命都承旨洪國榮, 讀至資政殿朝會時, 必移榻閾外。 上曰: "此事, 卿等亦必知之矣。" 領議政金尙喆曰: "此乃臣等屢嘗仰覩之事矣。" 讀至常誦韓文公 董邵南行。 尙喆曰: "此亦臣等每嘗仰聆者矣。" 讀至昔年殿側, 營一草堂讀書。 上曰: "先大王, 以繼述昔年之意, 鳩聚材木, 欲搆草堂, 而爲慮民力, 遂不果焉。 此可見先大王愛民崇儉之至意也。" 編次人蔡濟恭曰: "臣以內局提調入侍時, 承聞此敎, 亦屢矣, 而至以開基之時, 多伐樹木。 則恐有傷生之慮, 仍未興役, 爲敎矣。" 讀至均役, 上曰: "先大王, 每以均役一事爲大事業。 而晩年, 則敎以當初設施之意, 欲利於民, 而今則, 無乃反害於民歟? 乙未年間, 屢加憂歎, 不無革弊之意, 亦可見視民如傷之至仁矣。" 讀畢, 尙喆等曰: "伏覩親製行錄, 臣等益仰不匱之聖孝矣。" 上曰: "編錄之時, 猶且忍淚泚筆, 而更聽讀奏, 一倍愴感矣。" 尙喆曰: "臣等晩生, 先王初年間盛德美事, 豈能知其萬一? 而今因御製中發揮形容處, 益知其所不知, 尤不勝感泣。" 上曰: "以揄揚之意, 只存大德, 輒刪細節。 顧此一編, 專主百行之源, 而至若平日未嘗有之言、未嘗行之事, 則不敢有一字之加矣。" 濟恭曰: "其中昭寧園求山時, 躬踏一條, 猶屬聖德上小節, 合有商量更裁之道矣。" 又曰: "謙賊, 官至亞卿, 而雖於閑司漫職, 自上終靳落點。 抑損戚里之聖意, 推可知也。" 尙喆曰: "先王若俯燭謙賊賣權之事, 則必有處分矣。" 上曰: "先大王於厚謙、龜柱輩, 不以戚里, 有所假借。 若以處厚謙者觀之, 豈非聖德中卓難及處乎?" 僉曰: "然。" 上曰: "朝紙所出者外, 雖尋常辭敎之間, 卿等如有仰聞者, 一一提奏。" 尙喆等曰: "御製之外, 臣等無一辭更贊矣。"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60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70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