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 6권, 정조 2년 10월 28일 갑신 3번째기사 1778년 청 건륭(乾隆) 43년

성문 닫기를 선전 표신으로 신중히 할 것을 하교하다

하교하기를,

"성문을 여닫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그런데 어제 함께 오게 한 사관을 내보낼 때 그대로 유문(留門)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사관이 나간 뒤에도 또한 즉시 문을 닫지 않았다가, 밤이 깊어진 다음에야 단지 하례(下隷)의 말에 의거하여 비로소 도로 닫았다고 한다. 이렇게 한다면 문을 닫게 하는 표신(標信)은 쓸데없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대저 이 일은 지금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유래를 이룬 잘못된 규례이니, 반드시 일정한 예를 만들어 이를 참고하여 행할 수 있게 해야 된다. 이 뒤로 성문을 그대로 유문할 때에는 비록 문을 닫기 전에 그대로 유문하라는 명이 있더라도 만일 표신이 없으면 절대 거행하지 말 것이며, 도로 닫을 때에는 선전관이 표신을 가지고 가서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내보낼 사람은 내보내고 들어올 사람은 들여 보낸 후에 부장(部將)과 함께 입회하여 도로 문을 닫고 나서 복명(復命)하는 것으로 정식을 삼도록 하라. 만일 기청제(祈晴祭)를 지낼 때를 당해서는 근례가 또한 병판의 영전(令箭)에 의거하여 열고 닫고 하는데, 일이 매우 정당한 데 어긋나니, 이 또한 표신을 기다려 여닫는 것으로 정식을 삼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무릇 성문을 여닫을 적에 도성의 사대문(四大門)은 선전관 1인이 선전 표신(宣傳標信)을 가지고 금군(禁軍) 1인은 해당 문의 해당 시간의 부험(符驗)을 가지고, 또 선전관 1인이 개문 표신(開門標信)을 가지고 가서 먼저 개문 표신에 의거하여 궐문(闕門)을 연 뒤에 선전 표신과 부험을 가지고 간 자가 입회하여 성문에 이르러 자물쇠를 열게 하며, 간문(間門)에 이르러서는 단지 개문 표신에 의거하여 여는 것은 고례(古例)가 그러한 것이다. 금년 가을 능행(陵幸) 때 도성에 남아있던 여러 신하들이 이 예를 모르고 신전(信箭)으로 문을 열었었는데, 그 뒤에 이미 지신(知申)450) 이 연석에서 주달하여 정식을 삼은 것이 있으니, 진실로 그에 의거하여 준행함이 마땅하다. 이제 또 대소의 성문을 그대로 유문하게 할 때에도 또한 표신을 써서 거행하라는 뜻으로 정식을 정하였으나, 사대문은 닫았다가 여는 데 다른 점이 있으니, 부험(符驗)을 쓸 필요는 없고 또한 개문 표신도 쓸 필요가 없으니, 선전 표신으로 거행하게 하라. 간문을 그대로 유문할 경우에도 이 예를 적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9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사법-치안(治安)

  • [註 450]
    지신(知申) : 도승지(都承旨).

○敎曰: "城門開閉, 何等重大之事, 則昨日偕來史官出送時, 雖有仍留之命, 而史官出去後, 亦不卽閉。 夜深之後, 只憑下隷之言, 始乃還閉云。 若此, 則閉門標信, 可謂無用之物。 大抵此事, 非今斯今。 已成流來謬例, 須有一定之例, 可以按而行之。 此後凡城門仍留時, 雖於未閉前, 有仍留之命, 如無標信, 切勿擧行。 還閉之時, 宣傳官持標信仍爲留在, 待送出送之人、入當入之人, 然後與部將, 眼同還閉復命事定式。 如値祈晴祭時, 則近例亦以兵判令箭開閉, 事甚乖當。 此亦待標信開閉事, 亦爲定式。" 又敎曰: "凡城門開閉, 四大城門, 則宣傳官一人, 賫宣傳標信;禁軍一人, 賫當門當更符驗;又宣傳官一人, 賫開門標信, 先以開門標信, 開闕門, 然後, 賫宣傳標信及符驗者, 眼同到城門而啓鑰。 至於間門, 則但以開門標信開之, 古例然也。 今秋陵幸時, 留都諸臣, 未諳此例, 以信箭開門矣。 其後旣有知申筵奏定式, 固當依此遵行。 而今又以大小城門, 仍留時亦用標信擧行之意定式。 四大門, 則與閉而開之有異, 不必用符驗。 亦不必用開門標信, 以宣傳標信擧行。 間門仍留, 亦用此例。"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9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사법-치안(治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