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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6권, 정조 2년 9월 3일 기축 1번째기사 1778년 청 건륭(乾隆) 43년

세마대에서 오영의 장수와 군사들에게 음식을 내리다

세마대(洗馬臺)에서 오영의 장수와 군사들에게 호궤(犒饋)하였다. 임금이 융복을 입고 여를 타고 협양문(協陽門) 밖으로 나아가 돈화문(敦化門)을 경유하여 숭례문(崇禮門)으로 나아가 영접하는 곳에 도착하였다. 병조 판서 이휘지(李徽之)가 꿇어앉아 기고(旗鼓)가 앞에 있음을 계품하고 주필(駐蹕)할 것을 청하였다. 대가가 원문(轅門) 밖에 이르자 선전관이 꿇어앉아 취타(吹打)를 중지할 것을 계품하였다. 중영에서 호포(號砲) 한 방을 쏘아 소리를 내고 천아성(天鵝聲)을 부니, 각영의 군병이 깃발을 점검하고 고함을 쳤는데 모두 세 번 하였다. 원문을 활짝 여니 대가가 원문으로 들어갔다. 단 아래에 이르자 징을 울렸고 가에 둘러서 있던 기치(旗幟)를 좌우로 나누어 세웠다. 좌통례(左通禮)가 말에서 내려 여를 탈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말에서 내려 여를 탔다.

단 위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좌차에 올라갔다. 가전군(駕前軍)·가후군(駕後軍)과 금군(禁軍)이 따라서 단 아래에 들어와 좌우로 나뉘어 봉둔진(蜂屯陣)을 쳤다. 후상(後廂)의 각영이 각각 신지(信地)에 늘어서서 주찰(駐札)하였으며, 대장은 또한 문기(門旗) 밖에서 문을 조금 열고 명을 기다렸다. 병조 판서와 중영 대장이 먼저 참현례를 행하고 선전관이 그 다음에 하였다. 어전에는 군뢰(軍牢)와 내취(內吹) 등이 반열을 나누어 머리를 조아리고, 이어서 승단포(陞壇砲)를 쏘고 쇠[金]를 울리고 대취타(大吹打)를 불었다. 쇠를 울리고 취타 불기를 그치자 각영의 대장들이 참현례를 행하고 그대로 단 위에 머물러 있었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징을 울릴 것을 계품하니, 기병(騎兵)들이 말에서 내려 장호적(掌號笛)을 불었다. 관병(官兵)이 단 아래에 도착하니, 징을 울리고 장호적 불기를 중지하였다. 북을 한 번 울리니 각영의 중군 이하가 모두 꿇어앉아 반열을 나누어 머리를 조아렸다. 선전관이 일어나서 나가라고 명하니 일제히 응하여 포를 쏘고 징을 울렸다. 각영의 대장은 단 위에 벌여 앉고 금군 별장(禁軍別將)은 대장이 앉은 뒤에 조금 떨어져 앉았으며, 중군 이하는 신지(信地)에 열을 지어 벌여 앉았다. 쇠와 징을 울리기를 그치자 각영의 군병에게 호궤(犒饋)하는 음식을 각각 한 상씩 가지고 들어오게 하였다. 임금이 직접 살펴보고 각영에 환급(還給)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을 든 뒤에 내취(內吹)와 세악(細樂)은 단 위에 나누어 서고, 각 군문의 세악은 각영의 대장이 각기 하나의 부하(部下)로 거느리고 각진에 가서 위로하고 골고루 먹이게 하라."

하였다. 조금 있다가 선전관이 꿇어앉아 무환악(武桓樂)을 연주할 것을 아뢰니, 단 위와 단 아래 및 각영의 세악이 일시에 음악을 연주하였다. 각영의 대장이 각각 한 상씩을 어전에 올렸다. 종재(宗宰)·장신(將臣)과 시위하는 승지와 사관으로부터 아래로 군병에 이르기까지 각각 1상씩을 하사하였는데 상마다 각각 다섯 그릇씩이었으며, 어상(御床)에서부터 군병에게 먹이는 상에 이르기까지 음식이 똑같았다. 그 다음 징각악(徵角樂)을 연주하였는데 군병들이 배부르게 먹자 음악이 그쳤다. 다음 소무악(昭武樂)을 연주하니, 상을 치웠다. 단 위에서 시위하는 장신, 승지·사관과 아래로 각영의 군병에 이르기까지 일시에 일어났다가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만세를 불렀다. 이를 마치고 각영의 군졸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기우(旗羽)나 창간(槍竿)을 잡고 춤을 추는데 환호하는 소리가 산천을 진동시켰다. 김상철(金尙喆) 등이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신 등이 다행히 시위하는 반열에 참여하여 성대한 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 군졸들이 이미 취하고 또 배불리 먹었고, 애대(愛戴)하는 마음이 절로 환호하는 소리에 넘치고 있으니, 군정(群情)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음악을 그치라고 명하였다. 병조 판서가 꿇어앉아 각영의 군병을 신지(信地)에 돌아가게 할 것을 계품하니, 각영의 대장 이하가 각각 자기의 군병을 거느리고 신지에 돌아가 전처럼 주찰(駐札)하였다. 병조 판서가 꿇어앉아 향사례(餉士禮)가 이루어졌음을 고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수영(守營)과 총영(摠營)은 한 군사도 힘을 써보지 않은 채 돌아갔으니, 두 영으로 하여금 진을 치게 하고 은밀히 금군으로 하여금 충돌하게 하라,"

하였다. 중영 대장이 명을 받들어 호령하니 금군과 수영·총영의 군병들이 오랫동안 힘을 다해 끝까지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병이 혹 상처를 입을까 두려우니 쇠[金]를 울려서 중지시키도록 하라."

하였으나, 금군은 끝내 진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결같이 그치지 않고 싸우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군 별장이 반드시, ‘장수는 군중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도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퇴진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중영 대장이 앞으로 나아와서 아뢰기를,

"조금 전에 듣건대, 금군 별장 김상옥(金相玉)이, ‘적진이 거의 격파되어 가고 있어서 사세가 중지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명을 받들지 않은 죄를 받을지언정 감히 중도에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 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상옥은 장재(將才)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금군이 수어영의 중군을 사로잡아 포박하여 휘하(麾下)에 이르렀으며, 수어영은 무너져 흩어져 버렸다. 금군이 늘어서서 또 앞으로 돌격하여 나아가니 총융영은 멀리 바라보고 있다가 그대로 무너졌는데, 패배하여 달아나는 것을 추격하여 사로잡은 것이 상당히 많았다. 포로를 단 아래에 바치니, 임금이 매우 가상하게 여겨 김상옥에게 숙마(熟馬) 1필(匹)을 면급(面給)하였다. 이어 수어영의 중군 이익(李熤), 총융영의 중군 정여증(鄭與曾)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중군이 된 몸으로 진을 지키지 못하여 이렇게 무너져 달아나기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디에다 쓰겠는가?"

하니, 이익 등이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곧 상하가 즐기는 날이니, 우선 끌어 내도록 하라. 사로잡힌 사람들은 중영으로 보내어 공과 죄를 심사하게 하라."

하고, 이어 어제시(御製詩)를 내렸는데, 이르기를,

"세마대 이름 전해 온 지 오랜데

가을 구름에 벽제(辟除) 소리 맑네.

열성조에서 대열을 행했으니,

오늘 또한 군병을 위로하네.

삼군이 기뻐 일어나 춤추니

만백성 다투어 구경하네.

경 등은 이런 뜻을 알아

불우(不虞)에 대비하여 태평한 때를 경계하라."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해 지어 올리고 명하였다. 조금 있다가 선전관이 꿇어앉아 초취(初吹)·재취(再吹)·삼취(三吹)를 아뢰었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행진(行陣)하도록 호령할 것을 계품하니, 임금이 여를 타고 단 아래에 이르러 가교(駕轎)를 탔다. 숭례문을 거쳐 돈화문으로 들어갔다. 선전관에게 명하여 각영을 위로하게 하고, 이어 해엄(解嚴)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58면
  • 【분류】
    군사-휼병(恤兵) / 군사-병법(兵法) /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어문학-문학(文學)

○己丑/犒饋五營將士于洗馬臺。 上具戎服, 乘輿出協陽門外, 由敦化門, 出崇禮門, 到迎接處。 兵曹判書李徽之跪啓稟旗鼓在前, 請駐蹕。 大駕至轅門外。 宣傳官跪啓稟吹打止。 中營擧號砲一聲, 吹天鵝聲。 各營兵點旗, 吶喊共三次, 大開轅門。 大駕入轅門, 至壇下鳴鑼, 邊旗幟分立左右。 左通禮啓請降馬乘輿, 上降馬乘輿, 至壇上, 降輿陞座。 駕前、駕後及禁軍, 隨入壇下, 分左右作蜂屯陣。 後廂各營, 鱗次札駐於各其信地。 大將亦聽候於門旗外小開門。 兵曹判書、中營大將, 先行參見禮。 宣傳官次之。 御前軍牢、內吹等, 分班叩頭, 仍放陞壇砲。 鳴金大吹打。 鳴金吹打止, 各營大將行參見禮後, 仍留壇上。 宣傳官跪啓稟鳴鑼。 騎兵下馬吹掌號笛。 官兵到壇下, 鳴金號笛止, 鼓一通。 各營中軍以下俱跪, 分班叩頭。 宣傳官命起去, 齊應砲一聲鳴囉。 各營大將列坐於壇上, 禁軍別將稍後於大將之坐, 中軍以下列坐於信地。 鳴金鑼止, 命持人各營軍兵之犒饋各一床, 上親覽訖, 命還給各營。 上曰: "擧床後, 內吹、細樂, 則分立壇上。 各軍門細樂, 則各營大將, 各率一部下, 往各陣勞問均饋。" 少間, 宣傳官跪啓武桓之樂, 壇上、壇下及各營細樂, 一時振作。 各營大將各售一床於御前, 自宗宰、將臣、侍衛、承史, 下至軍兵, 名賜一床, 床各五簋。 自御床至軍兵所饋同。 次奏徵角之樂、軍兵飽, 樂止。 次奏昭武之樂, 撤床。 壇上侍衛、將臣、承史, 下至各營軍兵, 一時起跪, 叩頭山呼訖。 各營軍卒一齊起立, 或執旗羽, 或執槍竿, 蹲蹲而舞, 歡呼之聲, 振動山谷。 尙喆等進前曰: "臣等幸參侍衛之列, 獲覩盛擧, 而惟彼軍卒, 旣醉且飽。 愛戴之情, 自滋於歡呼之聲, 群情大可見矣。" 命止樂。 兵曹判書跪啓稟, 各營兵回信地。 各營大將以下, 名領其軍, 回到信地, 如前札駐。 兵曹判書跪告餉士禮成。 上曰: "昨日, 守摠兩營, 則不勞一師而還。 其令營列陳, 暗令禁軍, 衝突之。" 中營大將承命號令, 禁軍與守禦營鏖戰良久, 勝負不分。 上曰: "軍兵恐或有傷, 鳴金止之。" 禁軍終不回陳, 一向轉戰。 上曰: "禁軍別將, 必以將在軍, 君命有所不受之意, 不爲退陣矣。" 少間。 中營大將進前奏曰: "俄聞禁軍別將金相玉以爲: ‘敵(陳)〔陣〕 垂破, 勢難中止。 寧被不受命之罪, 不敢半塗而退。’" 上曰: "金相玉可謂有將才矣。" 少間, 禁軍擒守禦中軍, 縳致麾下。 守禦營潰散。 禁軍陳又前薄, 摠戎營望風而潰。 追奔逐北, 擒獲頗多。 獻俘於壇下。 上甚嘉之, 面給金相玉熟馬一匹。 仍命拿入守禦中軍李熤、摠戎中軍鄭與曾。 上曰: "爾等身爲中軍, 不能守陳, 致此奔潰, 將焉用哉?" 等不能對。 上曰: "今日, 卽上下歡樂之日, 姑令拿出, 而被獲人, 送之中營, 査功罪。" 仍下御製詩曰: "洗馬臺名古, 秋雲警蹕淸。 列朝行大閱, 今日亦勞兵。 起舞三軍喜, 爭瞻萬姓情。 諸卿知此意, 陰雨戒昇平。" 命諸臣乘進。 少間, 宣傳官跪啓初、再、三吹。 宣傳官跪啓稟行陣號令。 上乘輿至壇下, 乘駕轎, 由崇禮門敦化門, 命宣傳官, 勞問各營。 仍解嚴。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58면
  • 【분류】
    군사-휼병(恤兵) / 군사-병법(兵法) /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