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 6권, 정조 2년 7월 20일 정미 3번째기사 1778년 청 건륭(乾隆) 43년

지방 징수 폐단과 인재 등용, 과거제, 국방 전반에 대한 윤면동의 상소문

사직 윤면동(尹冕東)이 상소하기를,

"전에 권흉(權凶)이 이리 같은 탐욕을 부리자, 온 세상이 모두 이를 본받게 되었습니다. 수십 백만의 돈을 팔로(八路)에 두루 흩어 한 구역이라도 점유할 만한 토지나 세낼 만한 전장(田庄)은 문득 반드시 값을 올려서 사들였기 때문에 값이 수배로 뛰어올라 가세가 미약하고 재산이 적은 사람들은 애당초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다투어 온 나라의 전지를 사들였기 때문에 토지는 가세가 치성한 집에 거의 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혹 흉년이 든 해를 만나게 되면 향곡(鄕曲)의 부호(富豪)의 무리가 시기를 틈타 이익을 챙기기 위해 헐값으로 강제로 사들였기 때문에 민간에 남아 있던 약간의 전지마저 또한 모두 이들이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겸병(兼幷)하여 이익을 독점하려는 폐해인데, 그 해가 평민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이밖의 폐단으로 이보다 더 극심한 것이 있는데, 궁방(宮房)의 납공(納貢), 태복시(太僕寺)의 납공, 약원(藥院)·사포서(司圃署)의 납공, 제시(諸寺)·제부(諸府) 등처의 납공은 없는 고을이 없습니다. 원세(元稅)에 견주어 여러 갑절이 될 뿐만 아니라, 비록 큰 흉년을 당해도 애당초 급재(給災)하는 법규가 없으나, 잔약한 백성들의 뼈에 사무친 원망을 공소(控訴)할 데가 없으니, 어찌 불쌍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연분(年分)361) 에 대해 백성들은 급재를 받지 못하고 그 이익이 탐관(貪官)에게로 돌아가며, 포흠(逋欠)을 견감하는 경우에도 백성은 감면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그 은혜가 교활한 아전에게로 돌아갑니다. 수목이 자라 숲을 이룬 곳과 사토(沙土)가 쌓인 곳이 곳곳에 서로 바라보여도 백지 징세(白地徵稅)362) 하여 동리(洞里)를 침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전(量田)한 지 오래 된 고장과 답험법(踏驗法)363) 이 폐기된 고을에서는 해마다 비총(比摠)364) 하여 호가(豪家)의 부세를 다른 가호(家戶)에 거듭 징수하는데, 경사(京司)에서 관문(關文)을 보내어 발매하게 하면, 영읍(營邑)에서는 남는 것은 가져다가 환색(換色)합니다. 두메에는 무삼 군관(貿蔘軍官)이 있고 연해(沿海)에는 물선 보인(物膳保人)이 있는데, 작은 그물을 가진 조각배, 부서진 어살[魚箭], 무너진 염분(鹽盆) 및 산등성이에 저절로 자란 보잘것없는 초목(草木)도 모두 금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또한 죄다 주인이 있습니다. 기타의 명색으로 법에서 벗어나 거두어 들이는 것을 조정에서 죄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루 다 거론하여 지적할 수가 없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백성들이 받는 폐해가 또한 많고도 참혹스럽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오로지 겸병(兼幷)한 데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만, 오늘날을 위한 계책은 겸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백성으로 하여금 각기 전지를 소유하게 해야 합니다. 이 폐해를 제거하지 않으면 불쌍한 이 백성들이 장차 그 재산을 보전하여 살아갈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즈음에 하늘이 성인(聖人)을 내어 묵묵한 가운데 그 마음을 계도(啓導)하여 혁혁한 노여움을 드날려 지난날 조정에서 제멋대로 위복(威福)을 부리던 원악 대대(元惡大憝)를 모두 죽이거나 형벌을 가하여 모두 깨끗이 쓸어내어 흔적조차 남겨 두지 않았으므로, 도성의 집값이 조금 싸지고 경외의 전지가 상당히 팔렸다고 들은 듯한데, 이는 이미 우리 전하께서 한 번 혁신한 효험인 것입니다. 한결같이 이렇게 하여 해이하지 마시고 더욱 위극(威克)을 가하소서. 모든 조정의 진신(縉紳)들 가운데 겸병(兼幷)하여 법제에 지나친 것에 관계되는 것은 이목관(耳目官)에게 맡겨 드러나는 대로 공척(功斥)함에 따라 감히 숨기지 못하게 하면, 한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여 천하가 두려워하게 한다는 그 기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외읍(外邑)에 있는 부호(富豪)의 족속으로서 협박하여 강제로 곤궁한 백성들의 물건을 사들이는 자들 또한 방백과 어사로 하여금 맹렬히 법으로 다스리게 함으로써 원근의 사람들을 풍려(風勵)시킨다면, 겸병하는 폐해를 영구히 변혁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군문(軍門)·각사(各司)·번곤(藩閫)·목수(牧守)들이 잘못을 이어받아 답습하여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는 것 가운데 부세(賦稅)의 납입은 반드시 정세(正稅)에 의거하게 하고, 연분(年分)은 반드시 사실에 의거하여 등급을 나누게 하고, 포흠을 견감할 때에는 반드시 그 실제의 혜택이 백성들에게 닿게 해야 합니다. 백지 징세나 거듭 징수하는 데 대한 원망이 있으면 반드시 보량(步量)을 고치게 하고, 물선(物膳)의 값과 무삼(貿蔘)하는 명목을 반드시 공척해서 혁파하게 하고, 발매하거나 환색(換色)하는 무리는 반드시 과조(科條)를 어긴 데 대해 주벌(誅罰)을 가하게 하고, 부러진 어살[魚箭]과 무너진 염분 등은 반드시 죄다 면세(免稅)하도록 허락해야 하고, 상려(商旅)의 무리와 공기(工技)의 무리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억울하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따라서 조속히 유사(攸司)의 신하에게 명하고, 도신(道臣)·수신(帥臣)과 해당 고을의 수령들에게 분부하여 위에서 열거한 여러 조항을 익히 상량하여 하나하나 강구하게 하되, 또한 반드시 급박하게 하지 않고 차분하게 하도록 기간을 한정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빠짐없이 수방(搜訪)하고 상세히 하는 가운데 더욱 상세히 하여 지당한 데로 귀결되도록 힘쓰되, 누적된 폐단을 죄다 제거함으로써 이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천지 같은 은덕을 입게 한다면, 번거롭게 다시 법을 만들지 않더라도 저절로 선왕의 정사와 제대로 합치될 것이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기용하는 방법은 법에 정한 제도가 없는데, 이 점에 대해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크게 탄식하는 것은 점진적으로 하는 법이 없이 갑자기 진출시키거나 시험하지도 않고 기용하기 때문에, 기용하는 내용이 청망(淸望)에 의거하기도 하고 혹은 허명(虛名)에 의거하기도 하고, 귀세(貴勢)에 의거하기도 하고 혹은 사사로운 친분에 의거하기도 합니다. 앞에 것의 경우를 가지고 논하여 보면 하안(何晏)·왕연(王衍)의 허탄함과 왕승달(王僧達)·사약(謝瀹)의 오만함이 나오게 된 이유이고, 뒤의 경우를 가지고 논해 보면 허백(許伯)·사고(史高)·김일제(金日磾)·장안세(張安世)의 권신(權臣)과 가(賈)·번(藩)·유(柳)·유(劉)의 친압이 나오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황화(皇華)가 번성해지자 사조(謝藻)를 숭상하게 되었고 당의(黨議)가 일어나자 박격(搏擊)을 앞세우게 되었는데, 아첨하는 자들을 발탁하여 앞줄에 있게 하고, 조급하게 권세를 다투는 자들을 차례로 뛰어넘어 요직(要職)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간혹 이름난 공경(公卿)과 훌륭한 대부(大夫)들이 줄줄이 잇달아 나와서 기용된 경우도 있으나, 이는 일로 인하여 공을 세우거나 좋은 시절을 만나 높은 지위에 오른 것으로서, 우연히 그렇게 된 것뿐이고, 애당초 그의 행실과 재능을 고사하거나 그의 훈로(勳勞)를 점검해 보고 두루 시험하여 기용한 데 연유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세도(世道)가 점점 비하되고 속상(俗尙)이 더욱 그르쳐져서 본래 한미한 문벌로 평범하게 진출한 자, 홀로 붕당(朋黨)이 없는 자, 염근(恬謹)하여 교언(巧言)이 부족한 자, 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 자는 가령 세상을 다스릴 만한 학문이 있고 옛일에 달통한 식견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시골 구석에 묻혀서 가난하게 살다가 고사(枯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불러서 임용하는 규례가 없고 또 천인(薦引)하는 길이 없으므로,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옛날처럼 쓰이지 못한 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마니 어떻게 그의 재능의 이둔(利鈍)을 알 수 있겠으며, 험준한 경우를 당하여 보지 않았으니 누가 어질고 어질지 못한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전관(銓官)이 된 자도 또한 인물에 대해 마음을 쓰고 조식(藻識)에 유의하지 않고 의뢰하여 정사(政事)를 하는 것은 시론(時論)에서 숭상하거나 기세(氣勢)에 눌리거나 정면(情面)이 익숙하다는 것이었으니, 비록 저 사람이 이 사람보다 낫다 하더라도 그 실상은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산림(山林)에서 글을 읽어 도(道)를 지닌 선비를 우선 지성껏 불러다가 보도(輔導)하는 직임을 맡기어 자신을 잊고 봉상(奉上)하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사직신(社稷臣) 또한 특이한 공로를 표창하고 사랑하여 발탁해서 중요한 임무를 맡겨야 하며, 오랫동안 침체되어 전야(田野)에 물러가 있던 사람도 차례로 불러서 현요직(顯要職)에 두어야 하는데, 이것이 급선무이고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지난날의 괴란(壞亂)된 폐단에 징계되어 과장(科場)의 금령을 엄중히 세워 면대하여 고사했던 자가 여러 사람이었고, 한 번의 과방(科榜)을 완전히 삭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시사(試事)가 번거롭고 외람되어 용렬한 무리가 분수에 넘치게 진출한 잘못에 경계되어 과거의 설행을 간결하게 하고 선발하는 액수(額數)를 줄였으므로, 사람을 모집하여 대신 글을 짓게 하고 풍문만 듣고 무릅쓰고 부시(赴試)했던 무리들이 간담이 떨어지고 발이 얼어붙어 무거(武擧)에서 간교하게 속이는 습관도 또한 감히 부리지 못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참으로 성인(聖人)의 작위(作爲)가 탁월하고도 광명 정대한 것입니다. 오로지 이런 마음을 흔들리지 말고 굳게 지녀 영구히 해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그래도 사사롭게 근심하고 지나치게 헤아리게 되는 것은 과거의 설행을 이미 간결하게 하고 선발하는 액수도 적은데, 시권(試券)을 바치는 시한(時限)은 또 말할 수 없이 촉박한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시위(試圍)의 법식(法式)은 진실로 더욱 엄중하게 해야 마땅하겠지만, 시각은 그 한계를 조금 늦추어 줌으로써 거자(擧子)들로 하여금 끝까지 자신의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있게 하여 억울해 하는 마음을 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선발하였으면 반드시 면대하여 시험해서 요행을 바라고 속이는 폐단을 예방하소서. 식년과(式年科)는 완전히 혁개(革改)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명칭은 보존시킨 채 그 법규를 고치지 않을 수 없으니, 대략 별시(別試)의 법규를 본받아 강유(講儒)와 제유(製儒)들에게 공통으로 부시하도록 허락하되, 초시(初試)는 강경(講經)으로 시험해야 합니다. 제유(製儒)는 삼경(三經) 가운데서 자원하게 하고, 사서(四書)는 추생(抽栍)하게 할 것이며, 강유(講儒)는 칠서(七書)를 모두 고강하게 하여 조(粗)365) 이상을 뽑게 하소서. 회시(會試)는 제술로 시험하되, 강유는 논(論)·책(策)으로 하고 제유는 표(表)·책(策)으로 할 것이며, 반드시 시소(試所)를 나누어 각기 강은 강대로 제술은 제술대로 시험하여 스스로 서로 맞수가 되게 하고, 고하(高下)를 헤아려서 33인 가운데 반씩 나누어 뽑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제유(製儒)들이 모두 익숙하게 글을 읽게 될 것이고, 강유(講儒)들도 모두 글에 능하게 될 것입니다. 선비가 된 사람은 공부하기가 어렵겠지만, 국가에서는 양쪽이 능한 충실한 인물을 얻을 수 있고, 재능이 편중되는 탄식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 나머지 과거에도 지금 행하고 있는 간략하게 설행하고 작게 뽑는 법을 준행하여 어기지 않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먼 시골의 인재에 대해서는 또 달리 수습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됩니다. 송(宋)나라 때에는 특별히 다섯 가지 길을 만들어 사진(仕進)하는 문을 열어 놓음으로써 인심으로 하여금 매어 있는 데가 있게 했으니, 이것이 지금의 급선무입니다. 병년(丙年)의 별시는 혁파하고 그 대신 서북(西北)의 예(例)에 의거하여 10년마다 팔로(八路)에 도과(道科)를 설행하게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전시(殿試)를 치르게 하고 나서 급제를 내려 주도록 하소서. 대저 무거(武擧)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본래 익숙하지 못하니 또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대략 문과의 뜻을 본받아 좋은 제도를 의논하여 정해서 행한다면, 먼 외방 사람들이 반드시 분발하여 흥기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차례대로 데려다 기용하되, 데려다 기용하는 법을 또 크게 차이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니, 반드시 두루 시험하여 본 다음에 기용해야 합니다. 뽑은 선비들은 갑방(甲榜)과 차방(次榜)을 물론하고 괴원(槐院)·국자(國子)의 별계(別階)인 6품을 주어 낭서(郞署)를 역임하게 한 뒤에 일체 모두 먼저 작은 고을의 수령에 제수하고, 고준(考準)하기를 기다려 드러난 치적(治績)을 보아 크게 드러나면 큰 고을로 천전(遷轉)시키고, 작게 드러나면 작은 고을에 천전시키소서. 이렇게 해서 부(府)에 천전시키고 주(州)에 천전시키되, 시종 치적에 대한 성예(聲譽)가 우뚝하게 뛰어나면 즉시 방악(方岳)에 주의(注擬)하고, 방악이 되어서도 또 뛰어나면 불가한 데가 없는 것이니, 기국(器局)에 따라 부리면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주군(州郡)에서의 치적을 고사할 적에는 특별히 도신에게 신칙하여 전최(殿最)366) 에 예투(例套)를 따르지 말고, 여덟 글자의 제목(題目)을 간개(刊改)한 다음 반드시 아무 일은 능하고 아무 일은 능치 못하다는 공상(功狀)을 상세히 서술하게 하되, 사실에 의거하여 정직하게 기록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각 상적(上籍)·하적(下籍)을 만들어 두 건의 책자를 가지고 올라오게 하여 하나는 임금에게 올려 자리 곁에 두고 대주첩(對柱帖)367) 에 대신하게 하고, 하나는 선조(選曹)에 내려 수시로 열람하게 함으로써 협대록(夾帒錄)에 대신하게 하여 전후의 치적을 고준(考準)하여 능한 점을 조사하게 해야 합니다. 재능은 전부(田賦)에 대해 능한 이도 있고, 전곡(錢穀)에 대해 능한 이도 있고, 학교(學校)에 대해 능한 이도 있고, 군정(軍政)에 대해 능한 이도 있고, 청송(聽訟)에 대해 능한 이도 있고, 백성을 진휼하는 데 능한 이도 있으며, 성품은 자인(慈仁)이 넉넉한 이도 있고, 강엄(剛嚴)이 넉넉한 이도 있고, 염백(廉白)이 넉넉한 이도 있고, 종핵(綜核)하는 데 넉넉한 사람이 있는 것이니, 각기 그 사람의 장점을 취하여 써야 될 곳에 써야 할 것입니다. 나라 안에 유입(流入)된 전법(銓法)에 이르러서는 또한 송(宋)나라 조정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특별히 박학 굉사과(博學宏詞科)를 설치하여 3품 이하의 주현관(州縣官)은 아울러 직임을 띠고 부시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경술(經術)로 시험하기도 하고, 문사(文辭)로 시험하기도 하고, 시무(時務)·민폐(民弊)로 시험하기도 하고, 직언(直言)과 극간(極諫)으로 시험하기도 하고, 그 결과에 의거하여 대각(臺閣)이나 사관(詞館)이나 묘모(廟謨)를 논의하는 자리에 각기 그 사람의 장점을 보아서 통의(通擬)하기도 하고, 수용(需用)에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경재(卿宰)의 반열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능한 것을 어기지 말게 할 것이요 능하지 못한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반드시 합당한 직임을 가려서 맡겨야 합니다.

무직(武職)의 기용 또한 위의 법과 같은 식으로 한다면, 국가의 조아(爪牙)와 간성(干城)을 주머니 속에서 꺼내어 쓰는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사(蔭仕)에 대한 한 가지 사로(仕路)는 곧 옛날의 임자법(任子法)368) 이어서 폐기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음사(蔭仕)와 생원(生員)·진사(進士) 가운데 합당한 사람이 있으면, 아울러 위의 법에 의거하여 입사(入仕)하게 해야 하며, 추천된 사람 또한 반드시 신중히 간선(簡選)하되, 원액(員額)을 함부로 증가시켜 도리어 문관(文官), 무관(武官)보다 많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 8년(1426)에 오위(五衛)의 제도를 처음 정하시고, 살곶이[箭串]의 들판에서 강무(講武)할 때 친림(親臨)했었는데, 그때 오위의 군병이 모두 6천 6백여 명이었으며, 하나의 큰 방진(方陣)을 베풀었다가, 또 진(陣)을 바꾸고서 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고문(古文)에 의거한 것뿐이요 조획(條劃)은 미진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문묘(文廟) 때에 이르러 광묘(光廟)께서 사저(私邸)에 있었을 적에 전교를 받들어 여러 신하들과 다시 강정(講定)했습니다. 안으로는 총관(摠管)·위장(衛將)과 밖으로는 각로(各路)의 진관(鎭管)에게 군병을 통제하게 하는데, 이를 농사에 붙여 번상(番上)하면서 숙위하게 했습니다. 이는 고려(高麗) 때 가병(家兵)의 폐단에 징계되어 옛날 부병(府兵) 제도를 본받은 것으로 은연중 주(周)나라 때의 부리 출거법(夫里出車法)369)관중(管仲)궤향 솔군법(軌鄕率軍法)370) 에 합치가 되는 것입니다. 임진년371) ·정유년372) 을 겪은 뒤에 이르러서는 훈국(訓局)을 창설하고 사군(四軍)의 법제를 차례로 정리하여 그 뒤로 잇따라 정비해 왔는데, 이를 잘 운용한다면 서울에 숙위(宿衛)의 엄중함이 있어 중요한 곳에 거처하여 그렇게 중하지 않은 곳을 통제하는 도리를 얻게 될 것이며, 각로(各路)에 농사를 부치던 군사들이 있어 외적을 막고 변방을 공고하게 하는 방책도 아울러 시행되어 어긋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유독 행군법(行軍法)은 오로지 《병학지남(兵學指南)》만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 한스러운데, 이는 척계광(戚繼光)이 왜적을 막을 적에 쓰던 진법(陣法)입니다. 왜적은 보전(步戰)만 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호병(胡兵)이 말을 타고 올 경우에는 막을 수가 없으니, 척씨(戚氏)가 선대 총병(宣大摠兵)이 되어 거진(車陣)의 제도를 고쳐서 만든 것을 살펴보면 득실(得失)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방영(方營)으로 겹쳐진 진(陣)으로서, 사위(四衛)가 서로 뒤섞여 각기 전면을 지키는데, 항오(行伍)를 서로 연접(連接)시켜 하나로 통합하므로, 적이 어느 한쪽을 공격해서 오면 온 진영(陣營)이 혼잡스럽게 동요되며, 진세(陣勢)가 단약(單弱)하여 무너져 흩어지기 쉬우니, 이를 주둔하여 싸우는 데 견주어 보면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좌우에서 서로 구제하며 중첩된 가운데에도 각기 분수가 있어 한 진(陣)이 무너지더라도 나머지 진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법제이니,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처럼 구별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택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수백 년이 내려오도록 고치지 않고 있으니, 또한 의혹스럽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병법은 사변(事變)을 잘 제어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므로 진(陣)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척씨의 법은 또한 익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아서 진(陣)을 익히지 않을 수 없다면, 참으로 우리 나라에서 국초(國初)에 만든 법을 회복시키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군제(軍制)는 변개(變改)하지 않고 진법만 변개한다면 행하기가 어렵지 않아서 소요가 계속될 염려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기계(器械)는 또한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 거리에서 쏘는 궁노(弓弩)와 가까운 거리에서 쓰는 검극(劍戟) 이외에 또 크고 작은 화포(火砲)의 기술이 근세에 나왔는데, 이는 진실로 우주 사이의 흉기로서, 아무리 단단해도 뚫지 못하는 것이 없고 아무리 굳세어도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이로운 전구(戰具)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혹 태풍이나 폭우를 만나든가 초목이 우거진 숲, 짙은 안개, 연못이나 늪지대, 찌는 더위가 있는 때를 당하면, 아울러 화전(火箭)·궁노와 함께 모두 쓸 수가 없는데, 단지 검극(劍戟)만 이롭게 여겨 피차 서로 육박전을 하는 즈음에 힘도 같고 기계도 같을 경우 또한 전승(全勝)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이럴 즈음에 승리할 수 있는 일종의 기계가 있는데, 배외갑(背嵬甲)·마찰도(麻札刀)가 그것입니다.

동위(東魏)모용소종(慕容紹宗)이 말하기를, ‘천하에 이기기 어려운 자는 후경(侯景)만한 이가 없다.’ 했는데, 후경모용소종과 싸울 적에 자기의 군사들에게 각기 대부(大斧)를 잡고 곧바로 적에게로 핍박하여 들어가 머리를 숙이고 말의 발을 찍게 했기 때문에, 모용소종처럼 잘 싸우는 사람으로서도 대패를 면치 못했습니다. 이 법이 유전(流傳)되어 송(宋)나라에서 배외갑과 마찰도를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한세충(韓世忠)·유기(劉錡)올출(兀朮)373) 을 격파할 적에 모두 배외군으로 하여금 예리한 도끼를 가지고 위로는 사람의 가슴을 찍게 하고 아래로는 말의 발을 찍게 하였으며, 악비(岳飛)는 5백 명의 군대로 10만의 무리를 깨뜨렸고 8백 명의 군대로 50만의 오랑캐를 무찔렀으니, 이는 모두 배외갑과 마찰도의 힘이었습니다. 배외갑은 곧 거북 등처럼 생긴 철갑(鐵甲)이고 마찰도는 곧 8척이나 되는 긴 도끼인데, 이제 그 형제(形制)에 관한 것이 영가(鈴家)의 책에 모두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는 쓰기가 매우 간편한데다가 바람 불고 비가 오거나 춥거나 덥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으며, 예리한 활촉이나 큰 칼이 격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굽히고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기병(騎兵)과 싸우는 데에는 더욱 유리하여 다시 창이나 칼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이제 만일 여러 군문(軍門)이 각각 5백 인의 외병(外兵)을 둔다면, 5초(哨)마다 각각 1초 씩을 두게 되어 저절로 별부(別部)를 형성하게 됩니다. 전쟁에 나아가서는 기습을 하게 하기도 하고 정면으로 공격하게 하기도 하여 방편에 따라 쓴다면, 이 또한 대적할 수 없는 이기(利器)가 될 것입니다. 가장 한심한 것은 향군(鄕軍)의 마대(馬隊)입니다. 1대(隊) 가운데 볼 수 있는 말이 한두 마리도 없으며, 점열할 때에 임해서는 빌려서 쓰고 조습(操習)할 때에 임해서는 고용(雇用)하는데, 안장에 걸터앉으면 안장이 부서지고 등자를 밟으면 등자가 끊어집니다. 또 말을 다루는 법을 익히지 않아서 말이 날뛰면 사람이 떨어져 엎어져 붙잡아 제지하지도 못하니, 어느 겨를에 손으로 재주를 부릴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배위갑의 제도를 행하려 한다면, 향군의 마대를 일체 아울러 바꾸어 배외대(背嵬隊)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을 위해서는 하나의 큰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되고 군무(軍務)를 위해서는 하나의 굳센 군대를 첨가하게 되니, 또한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그리고 각 고을의 군기에 대한 폐단이 지금 같은 때가 없습니다. 해마다 조습(操習)을 정지한 채 전혀 수개(修改)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이 썩고 손상되어 거의 형체가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별도로 수의(繡衣)374) 를 보내어 통틀어 함께 검열하여 대대적인 이정(釐正)을 가해야 합니다. 이 유래는 이미 오래 된 것으로서, 오늘날의 수령들 죄는 아닌데, 갑작스럽게 시행하면 또한 손상되는 사람이 많아서 각 고을이 놀라 소요하게 될까 두려우니, 이미 지난일을 모두 탕척(蕩滌)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 법식을 정하여 도신과 수신(帥臣)에게 엄중히 신칙하여 각 고을에 행회(行會)해서 기한을 정하여 약속하고 순차적으로 수보(修補)하게 해야 합니다. 통고하고 난 뒤에는 사실대로 적간(摘奸)하여 계문하게 하여 상벌을 시행하되, 혹 어사를 시켜 불시에 추생(抽栍)하여 점검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 뒤에 해마다 신칙을 더하여 전과 같은 폐단이 없게 해야 하며, 이를 전최(殿最)의 한 가지 일로 만들어도 혹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궁시(弓矢)는 실로 걱정스러운 것이 많은 물건이니, 이는 창고에 쌓아두고 항상 사용하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궁각(弓角)과 전우(箭羽)를 봄에 새로 준비하여 놓았다고 하더라도 한 번 장마를 치르고 나면 전혀 완전한 물건이 없게 되어 해마다 개수해도 오히려 넉넉지 못함을 걱정하게 됩니다. 전부터 각(角)이 없는 활과 깃이 없는 화살은 정곡(正鵠)을 다투는 활쏘기에는 합당하지 않지만 적을 향하여 쏘는 데는 같고, 먼 데까지 미치도록 쏘는 데는 합당하지 않지만 가까운 데를 쏘는 데는 같으니, 뒤틀린 활과 부러진 화살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박실(樸實)한 물건을 쓰는 것이 낫습니다. 영갑(令甲)을 반하(頒下)하여 각각 장수(匠手)를 모집하고 반드시 쓸 만한 기계를 만들게 해서 많이 쌓아 놓는다면 또한 하나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수전(水戰)의 제도에 이르러서는 육군(陸軍)으로서 군포(軍布)를 바치는 군사들이 바닷가에 많이 있고 전선(戰船)의 노(櫓)를 잘 젓는 군사들은 도리어 산읍(山邑)에 있는데, 영남(嶺南)이 더욱 심합니다. 만일 뜻밖의 변이 순식간에 박두한다면, 5, 6백 리 밖에 있던 노를 잘 젓는 군사들이 어떻게 제 때에 배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가령 달려왔다 하더라도 일생 동안 본 적이 없는 주즙(舟楫)과 풍랑(風浪)을 대하여 또 어떻게 손발을 쓸 수 있겠습니까? 이에 관해서는 통제사(統制使)·수사(水使)·병사(兵使) 등과 해도(該道)의 도신에게 분부하여 하나씩 고치게 해야 합니다. 노를 잘 젓는 군사는 모두 바닷가로 충차(充差)하고, 군포를 걷는 군대는 산읍으로 이송(移送)해야 하는데, 새로 바꾸는 즈음에 혹 다시 첨정(簽丁)한다면, 또한 소동하여 편안하지 못할 것이 염려됩니다만, 이는 한 번 알려서 도안(都案) 가운데에서 명색(名色)을 바꾸는 것에 불과하고, 달리 구애되거나 저촉되는 단서는 없습니다. 그리고 동래 수영의 전선이 정박해 있는 곳이 외지고 물이 얕은 항만(港灣)에 있으며, 또 수세(水勢)가 변하므로 보름이나 그믐의 큰 조수(潮水)가 있을 때가 아니면, 모래밭이나 자갈 더미 위에 걸려 있게 되어 조금도 옮기기 어려우니, 만일 왜구(倭寇)가 반드시 오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혹시라도 그들이 큰 조수가 없을 때에 나온다면 비록 백만의 대군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차 뱃머리에 서서 바라보다가 왜구의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찍이 일에 대해 잘 아는 군민(軍民)들의 물의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모두 말하기를, ‘수영을 울산(蔚山)이나 기장(機張) 두 고을의 포구(浦口)로 옮기는 것이 제일 나은데, 이는 예로부터 말해온 부분이다.’ 했습니다. 이제 만약 이 가운데 한 곳을 취택하여 수영을 옮겨 설치하고 전선들을 옮겨 정박시킨다면, 물이 없어 출동하기 어려운 걱정이 없을 뿐만이 아닙니다. 또 저 왜선(倭船)들은 대마도(對馬島)에서 출발할 경우 반드시 동남풍을 의지하여 그 풍세(風勢)를 타고 나오는데, 곧바로 부산(釜山)이나 다대포(多大浦)김해(金海)명지도(鳴旨島) 등지에 닿게 되며, 그들이 배를 타고 풍세에 따라 나올 때를 지금의 수영에서 바라보면 실제로 역풍(逆風)이 되므로, 가령 조수가 불어나서 전선이 해로(海路)에 뜰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역풍이 불어서 또한 나아가 배를 부릴 수가 없게 되니, 이것이 바로 반드시 패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울산이나 기장으로 옮겨 설치할 수 있다면, 울산·기장에서 동래부산을 향할 때에도 곧 동남풍의 풍세를 의지하게 되니, 왜구가 순풍이면 곧 우리에게도 순풍이 되므로, 왜구가 순풍을 이용하여 앞으로 향하면 우리도 또한 순풍을 이용하여 그 뒤를 따르게 되니, 이는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밖에 각 영읍(營邑)의 전선이 정박해 있는 곳에 대해 신이 일찍이 보고 듣지 못한 곳이라 할지라도 또한 반드시 이와 같은 걱정이 있을 것이니, 각로(各路)의 수사(水使)와 곤수(閫帥) 및 연해에 분부하여 항구를 파거나 배를 옮겨 정박시키는 등 편의한 대로 재처(載處)하게 함으로써 뜻밖의 걱정이 없게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할 듯합니다.

대마도는 모두 본디 석산(石山)으로 되어 있어 오곡(五穀)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곡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가 없는데, 생치(生齒)는 더욱 번성하여 집 위에 집을 겹쳐서 짓기에 이르렀습니다. 왜관(倭館)에 나와서 살고 있는 자들은 단지 교역(交易)을 이롭게 여기기 때문인데, 수년 사이에 거의 시장(市場)을 폐기하기에 이르렀으니, 본국의 사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진실로 의뢰하고 재화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어찌 여기에 이른 것입니까? 저들 또한 곤궁한 처지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인데, 비록 수길(秀吉)처럼 흉악한 짓과 대마도의 왜노(倭奴) 같은 짓은 하지 않을지라도 다시 연해를 노략질 하는 일이 있을 경우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가령 일단 왜구가 총을 들고 육지로 상륙하게 되면, 지금 동래·부산처럼 허술한 방어로 잘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김해(金海)에서 대죄(待罪)했었기 때문에 금정 산성(金井山城)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동래 평야에 있는 한 길 남짓한 성(城)은 본래 잠시 버틸 계책을 세우기에도 부족한 곳이지만, 금정 산성은 가파르고 높은 산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곧 철옹성(鐵甕城)으로 천연적인 요새지인데, 성 안이 매우 넓어서 동래부 한 고을의 백성을 모두 보전할 수 있습니다. 임진 왜란의 초기에 여기에 들어가 있었더라면, 영가(永嘉)는 격파당했을지라도 반드시 부성(府城)이 따라서 함몰되어 대령(大嶺) 이남이 잇따라 와해되는 환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그곳에 성곽(城郭)이 있고 창름(倉廩)이 있으니, 마땅히 속히 수선하여 이곳에 고을을 옮긴다면, 저 왜구들이 이런 사실을 들을 경우 거꾸로 그들의 흉심(凶心)을 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특별히 수선하여 급박할 때 입보(入保)하는 장소로 삼는다면, 영가(永嘉)에 경보(警報)가 있자마자 금방 20리 사이의 사람들을 거두어 가지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동래의 좌측으로는 기장(機張)·울산(蔚山)·장기(長鬐)·흥해(興海)·영덕(盈德)·영해(寧海)가 모두 연변이 되는데, 왜선이 나올 때는 반드시 풍세를 의지해야 하는 것이니, 역풍이 불 때 나올 리는 없으니, 과연 수영(水營)을 울산으로 옮긴다면 나머지는 우려할 것이 없습니다. 동래로부터 우측에는 개운(開雲)·두모(豆毛)·서평(西平)·다대(多大) 등 여러 진(鎭)이 있습니다만, 모두 그 거리가 수십여 리에 불과하여서 다대를 지나면 김해(金海)·웅천(熊川)·거제(巨濟)를 지나 통영(統營)에 도착하게 됩니다. 통영 이후와 웅천·거제 등 고을에는 모두 여러 개의 진(鎭)들이 바둑알처럼 이어져 있는데, 김해는 하나도 외진(外鎭)이 없으나 유독 해문(海門)의 거방(巨防)이 되고 적로(賊路)의 초입구가 되므로, 그곳의 관장(官長)이 영장(營將)을 겸하고 있습니다.

그 성은 고려 때의 명장인 박위(朴葳)가 축조한 것으로, 지금까지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연전(年前)부터 명지(鳴旨)의 염리(鹽利)를 다른 곳으로 이속(移屬)시켰기 때문에 고을의 모습이 쇠잔(衰殘)해져 고을답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해읍(該邑)에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을 획속(劃屬)시켜 그 물력(物力)을 넉넉하게 하고 전선이 정박할 당지(塘池)를 축조하고 수군과 육군의 군기를 다시 완비하게 하며, 밀양(密陽)삼랑(三浪)에 있는 조창(漕倉)은 물길이 점점 변하여져 조운(漕運)하는 선박이 통행하기 어려우니, 또한 이를 김해의 해창(海倉)에 이속시켜 그 형세를 완전하게 한다면, 마땅히 동래(東萊)와 서로 돕고 의지하는 순치(脣齒)의 관계가 형성되어 직로(直路)에서 변란에 대비함에 있어 조금이나마 걱정을 늦출 수 있을 것입니다.

황산(黃山)임경 산성(臨鏡山城)토천(兎遷)노고 산성(老姑山城)에는 모두 구첩(舊堞)이 있어 수선(修繕)할 수 있습니다. 황산의 길을 막으면 밀양(密陽)·청도(淸道)의 길이 막히고, 토천의 길을 막으면 상주(尙州)·함창(咸昌)·용궁(龍宮)·예천(醴泉)조령(鳥嶺)으로 향하는 길이 막힙니다. 함양(咸陽)·금산(金山)·문경(聞慶)·풍기(豊基)는 또 네 개의 대령(大嶺) 밑에 있는 요충로(要衝路)인데, 한결같이 모두 쇠잔해져 방어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특별한 처분을 내려 가까운 고을을 떼어서 보태주어 그 형세를 배양해서 장대해지게 한다면, 엄연(儼然)히 각처의 관애(關隘)가 될 것이니, 좌병영(左兵營)을 경주(慶州)안동(安東) 등의 고을에 옮겨 대장이 중앙에 있으면서 먼 곳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신은 가산 산성(架山山城)에서 경보(警報)를 기다리게 하되 천생 산성(天生山城) 또한 수선하여 화산 산성(華山山城)·금오 산성(金鰲山城)·독용 산성(禿用山城) 등과 함께 제로(諸路)를 공제(控制)하게 한다면, 영외(營外)의 일은 대략 정비할 수 있습니다.

호남(湖南)에서는 격포(格浦) 한 곳이 가장 요해지가 되는 곳이지만, 해구(海寇)가 북쪽으로 올라오는 길목입니다. 만일 해남(海南)의 수영을 통과하게 되면 공충도(公忠道)보령의 수영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각진(各鎭)이 포열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모두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요해처는 못됩니다. 유독 이 격포가 앞으로 위도(蝟島)와 마주 대하여 있는데, 배들이 왕래할 때 모두 이 두 섬의 사이를 지나야 하니, 이곳을 첨사(僉使)의 자리로 승격시켜 거진(巨鎭)을 만들고, 위도와 좌우에서 날개와 같은 형세를 이루고 고군산(古群山)과 솥의 세 발처럼 서로 협력하게 하여 일로(一路)를 방어하게 한다면, 양호(兩湖)의 추유(樞紐)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육로(陸路)의 경우 병영(兵營)을 강진(康津)에 둔 것은 또한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왜란이 있은 뒤 의논하여 설치할 때 처음에는 장흥(長興)으로 결정했었는데, 장흥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지금의 울산(蔚山) 병영과 같아서 방어하고 지키는 곳이 될 수 있으나, 강진은 이에 평평한 언덕과 황폐한 들에 위치하고 있어 사방에 의지할 만한 험한 곳이 없습니다. 그때의 장흥 백성들이 혹시 본읍(本邑)에 폐단이 있을까 두려워 하여 많은 은포(銀布)를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에게 뇌물로 주었으므로, 신이 대관(臺官) 문여(文勵)와 상서(上書)하여 저지하였고, 신의 방조(傍祖)인 고 영의정 신 윤승훈(尹承勳)이 적발하여 논계(論啓)했습니다만, 문여는 국문(鞫問)받다가 죽었고, 일은 마치지 못한 채 권신(權臣)의 비위에 거슬려 폐기되었으므로, 드디어 성(城)을 장흥에 설치하지 못하고 강진에 설치하게 되었던 것이니, 설자(說者)들이 지금까지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장흥에 옮겨 설치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만, 어떤 이는 또 말하기를, ‘장성(長城)입암(笠巖)순창(淳昌)복흥(福興)이 모두 천연의 요해처이고, 또 한 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좌우로 굽어 살피면서 남북을 공제(控制)할 수 있으니, 여기에 곤영(閫營)을 옮긴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다.’고 합니다. 이 두어 가지 사이에 가장 편의(便宜)한 것을 선택하여 시행한다면, 동쪽에 있는 적상(赤裳)·교룡(蛟龍)·금성(金城), 북쪽에 있는 위봉(威鳳) 등의 산성과 서로 연결되고 관통(關通)되어 또한 공고하게 하는 방도가 될 수 있습니다.

대저 우리 나라의 산천(山川)은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오묘한 구역(區域)이어서 남을 공격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스스로 지키기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는 방도는 성벽을 공고히 하고 청야(淸野)375)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관방을 엄중히 하여 왜구가 오는 길을 끊고, 산성을 축조하여 입보(入保)할 장소를 만들고, 민병(民兵)과 약속을 정하여 보오(堡塢)를 만들고, 관창(官倉)의 것을 옮기고 사저(私儲)를 실어 나름으로써 청야하는 술책을 행한다면, 두어 달이 지나지 않아 10만의 왜구를 금방 굶어 죽게 할 수가 있습니다. 만부(灣府)는 이곳이 어떠한 곳입니까? 성 밖이 곧 압록강이고 강 밖이 곧 오랑캐 땅인데, 만일 얼음이 얼면 건장한 오랑캐들이 곧바로 성으로 침범하여 초확(鍬鑊)을 사용하지 않고도 넘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들은 모두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이들을 불러 오려면 자칫 시일만 허비하고, 성 안에 있는 군병도 대부분 타액(他額)이 많아 이미 명목이 다르므로, 급박할 때 임해서는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단지 성안의 각색(各色) 군사들을 수첩군(守堞軍)으로 이름을 바꾸면, 나라를 위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각기 자기의 부모 처자를 위하여 더욱 굳게 지킬 것이니, 어찌 빈번이 성을 넘어 도망하여 돌아갈 것만을 생각하는 성 밖의 군졸들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성 밖의 군졸은 각색 군대의 대신으로 이정(移定)하면 또한 거두어 모아서 쓸 수 있으니, 군정(軍政)에 있어서 조금도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저 수영(守營)과 총영(摠營)을 합치고 심도(沁都)교동(喬桐)의 영(營)을 합치는 방도는 진실로 쓸모 없는 군사와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자들을 도태시켜 복심(腹心)이 되고 근본(根本)이 되게 하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 심도에 삼도 통어사를 둘 경우 비록 교동서해(西海)의 요충지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수장(守將)을 두고 전대로 설치하면, 또한 손으로 가리키면서 부릴 수 있고 적을 막는 보장(保障)이 되어 통어의 소재를 삼을 수 있습니다. 수영과 총영을 폐기하는 것과 합쳐서 설치하는 것에 대한 의논에 이르러서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만, 결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저 남한 산성은 곧 부도(副都)이므로, 다른 곳의 보장(保障)과는 같지 않을 뿐만이 아닌데, 수영(守營)에서 실지로 관할하고 있으니, 그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하여 특별한 군문이 된 후에야 경도(京都)를 진호(鎭護)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의 부윤이나 수령의 아문보다 높아야 하니, 수어영을 폐기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총영(摠營)은 비록 북한 산성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있다 하나, 북한 산성은 곧 경성과 한가지이니, 만약 삼군문(三軍門) 가운데에서 이속(移屬)시키면 충분합니다. 총영은 따로 설치하지 않아도 또한 관계되는 것이 없으니, 총영은 혁파하여 수영(守營)에 합치는 것을 신의 우견(愚見)에는 결단코 옳다고 여기며, 비록 그렇지만 수영에 합속(合屬)시킨 뒤에 그대로 서울에 있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숙위(宿衛)하는 삼군문이 이미 엄중하고도 잘 갖추어져 있는데, 향군(鄕軍)을 거느리고 한 방면의 수영을 보호하도록 한 후에 또 서울에 있게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반드시 나아가 남한 산성을 진수(鎭守)하면서 기보(畿輔)를 통어하는 것을 또한 심도(沁都)의 제도와 같게 한다면, 바다와 육지의 동쪽과 서쪽에 큰 관방이 서로 마주하고 있게 되어 경성(京城)의 형세가 외롭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또 도성의 제도는 둘레가 40리나 되게 넓고 높이가 수삼 장이나 되도록 높지만, 동쪽은 비어 있고 서쪽은 낮은데다가 참호(塹壕)나 양마성(羊馬城)376) 등을 지킬 만한 제도가 없으며, 성 밖에는 인가(人家)가 조밀하여 적군의 붕루(棚樓) 사용에 도움을 주기에 충분할 뿐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네 모퉁이 수백 보(步)가 되는 곳에 벽루(壁壘)를 설치해야 매우 견고해질 것인데, 벽루 하나마다 각기 1천 인이나 혹은 5, 6백 인이 지키게 하되, 정기(旌旗)를 많이 세우고 징과 북을 많이 비치하여 의병(疑兵)으로 삼고, 밤에는 밧줄을 타고 내려가기도 하고 낮에는 숨어 있기도 하고 적진 앞으로 가서 공격하기도 하고 뒤를 엄습하기도 하면, 적군이 감히 곧바로 대성(大城)을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 성을 지킬 적에 이런 예를 많이 적용했기 때문에 상고하여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도성은 또한 평야(平野)에 세운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이처럼 지키기가 어려우니, 바로 이 방법을 써야 마땅합니다. 기영(畿營)을 홍제원(弘濟院)의 평탄한 곳으로 옮겨 설치하게 하고, 녹번현(綠磻峴)홍제천(弘濟川) 수구(水口)의 바위가 험준한 곳에 작은 성을 견고하게 쌓는다면, 모화현(慕華峴) 한쪽에는 성을 쌓지 않아도 또한 견고하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있게 됩니다. 총영(摠營)을 혁파하고 그 군사들은 기영에 예속시켜 한북문(漢北門)의 길과 안현(鞍峴)등고현(登高峴), 우수현(禹壽峴), 동문(東門) 밖을 방어하게 하고, 왜유현(倭踰峴)·안암동(安巖洞), 봉래산(蓬萊山) 등지에 각각 하나의 작은 성을 축조하면, 모두 합쳐서 5, 6개에 지나지 않아 3리도 못되는 작은 성이지만, 높은 지형을 이용하여 요새를 만들고 백성을 모집하여 들어가서 거처하게 한 다음 각각 창고를 설치하여 칠강(七江)과 부내(部內)의 인민들이 난리를 당하였을 적에 입보(入保)할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도성은 인왕산(仁王山)·북악산(北岳山)·타락산(駝駱山)·목멱산(木覓山) 등 이 네 산의 위에 각각 일대(一隊)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기(旌旗)를 벌여 세워 놓게 하고, 성 안의 각방(各坊)에는 시가전(市街戰)을 할 수 있는 도구를 미리 준비해 놓게 한다면, 사방의 성문을 밤새도록 활짝 열어 놓는다고 하더라도 적군도 또한 매우 위험한 것을 알기 때문에 반드시 북한 산성탕춘영(蕩春營)을 증축해서 강창(江倉)의 미곡(米穀)을 모두 그 안에다 실어다 놓고 온 도성의 사람들이 입보(入保)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도성 밖의 여러 작은 성이 격파되지 않는다면 도성은 범접할 수 없고, 도성이 격파되지 않는다면 탕춘·북한을 또한 감히 갑자기 범접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정전법(井田法) 식으로 성을 지킨다는 말과 서로 똑같은 것입니다. 파주 목사는 고을을 혜음령(惠陰嶺) 위로 옮기고 양주 목사는 고을을 홍복 산성(洪福山城)으로 옮기게 함으로써 북한 산성을 밖에서 가로막도록 하되, 기영(畿營)에서 총괄하여 통제하게 함으로써 서북쪽을 막아야 합니다. 수원(水原)의 병마(兵馬)는 수영(守營)에 예속시켜 동남쪽의 길을 막게 하고, 또 심도(沁都)의 해방(海防)과 더불어 사면을 둘러서 막게 하면서 각성(各城)이 공동으로 지키게 한다면, 인심에 동요하지 않게 되어 서울을 반드시 지켜야 할 곳으로 여기게 되고, 굳게 지키면서 버티어내어 근왕(勤王)의 군사나 의사(義士)의 군대를 기다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좌막(佐幕)의 부류는 팔로(八路)를 통틀어 합치면 2백 50여 과(窠)가 되는데, 그 가운데 1백 50여 과는 전대로 한산(閒散)으로 있는 사람을 데리고 감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결망(缺望)하지 않게 하고, 나머지 1백 과는 금·기(禁騎)에서 각각 50인 씩을 각처에 나누어 보내어 3년을 기한으로 번곤(藩閫)의 임무를 맡긴 다음 각각 기한이 차도록 힘쓰게 하여 공로가 있은 뒤에야 차차로 입사(入仕)시키게 해야 합니다. 간혹 그 가운데 아주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각기 그 주장(主將)으로 하여금 스스로 천주(薦主)가 되어 특별히 초계(抄啓)하게 한 다음 곧바로 승륙(陞六)시키도록 하고 우직(右職)에 서용하기도 하되, 만일 잘못 천거한 경우에는 천주에게 죄가 미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 또 수령으로 내보내어 시험하는 것을 위에서 논한 문관(文官)의 제도와 같게 하고, 변방의 방어나 곤임(閫任)의 망(望)에도 또한 모두 전후 공을 세운 실상을 조사하여 거용한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효험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온 세상에 사치의 풍조가 만연되어 온 나라의 재화(財貨)가 바닥이 없는 골짝을 메우듯 하고 있어서 구제할 방법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택(第宅)을 가지고 말해 보면 조금 달관(達官)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는 집을 새로 개축하며 서로 다투어 하늘에 닿을 듯이 높게 하는 것을 힘쓰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집 한 채의 값이 혹 5, 6천 금(金)으로도 부족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도성 안에는 층층이 지은 집들이 이어져 있고, 강호(江湖)에는 곳곳에 서로 바라보이는데, 합쳐서 수십 구역(區域)이 되는 데가 가끔 있습니다. 장전(庄田)으로 말하면, 이제 방금 영읍(營邑)에서 돌아온 자는 대낮에 돈을 싣고 서로 다투어 기름진 땅을 사들이는 데 힘쓰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심지어 한 사람의 전지의 값이 혹 10만의 대금(大金)으로도 오히려 부족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공인(貢人)의 이름을 겸인(傔人)으로 몰래 기록하고 경저(京邸)377) 의 값을 노(奴)로 대신 받으며, 시리(市利)와 선고(船雇)에 대해서도 간여하지 않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사대부(士大夫)의 부류가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사치한 풍조가 이루어질 것이 없을 것이고, 부서(府胥)와 읍리(邑吏)의 무리들이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사치한 풍조를 배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치 때문에 창고가 텅 비어 헛된 장부(帳簿)만 가지고 있는 재결(灾結)을 헛되이 내어 점점 조세(租稅)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또 이른바 균청(均廳)에서 쌀을 사는 것, 혜청(惠廳)에서 둔전(屯田)을 사는 것, 각 아문에서 외방으로부터 받아들여 유치시켜 놓은 곡식 등 어느 것 하나도 공저(公儲)를 축내어 제 이익만 차지하여 국계(國計)를 은밀히 녹여 없애는 하나의 큰 좀벌레 같은 짓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남한 산성·심도(沁都)·송경(松京)에 저축하여 놓은 은전(銀錢)과 미곡(米穀)은 국가에서 의뢰하는 바가 어떠합니까? 그런데 열쇠의 관리는 비록 완전하다고 하더라도 빈틈으로 많이 흘러나가서 세 성(城)의 보장(保障)을 위한 저축이 이렇게 텅 비게 되었으니, 서울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외영(外營)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외읍(外邑)을 더욱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백관의 녹봉(菉俸)과 군병의 늠료(廩料)는 항상 반년의 수요가 모자라게 되었으므로, 강도(江都)의 쌀과 관서(關西)의 재화를 매양 옮겨다가 대여하는 거조가 많아졌는데, 만약 이렇게 된 까닭을 따져보면 그 허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지나친 사치 때문일 따름입니다.

안으로 궁액(宮掖)으로부터 밖으로 군국(軍國)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일을 행하게 되면 반드시 절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할 수 있으며, 한 가지 명령을 내게 되면 반드시 절약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저 근습(近習)과 종척(宗戚)의 사정(私情)과 달리면서 사냥하고 연회를 베푸는 즐거움에 대해서는 애당초 간언을 올리지 않아도 또한 선행(善行)을 하시는 성인(聖人)이시니 경계해야 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군민(軍民)의 일에 대해서는 태평하여 전투의 노고가 없는데도 경솔하게 상격(賞格)을 베풀게 되면 군졸들이 교만해져서 덕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며, 평온한 해에 주진(賑賑)하는 정사가 없는데도 외람되게 사여(賜予)하는 것이 있게 되면 백성들이 은혜가 되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대저 전하께서는 천승(千乘)의 존엄함과 팔역(八域)의 풍부함을 가지고서도 경비를 이처럼 아끼고 따라서 검약하게 하신다면 대관(大官)으로부터 그 이하로 누군들 덕의(德意)를 우러러 본받아 군공(群工)의 모범이 되지 않겠으며, 따라서 전일의 폐풍(弊風)을 다시 숭상하겠습니까? 고 상신 황희(黃喜)가 통나무집에 남루한 갓과 실띠를 매었던 검소함을 묘당(廟堂)에서부터 시작할 수는 없겠습니까? 대관이 진실로 이렇게 한다면 소관이 어떻게 감히 어길 수 있겠으며, 조정에서 진실로 이렇게 한다면 사서인(士庶人)이 어떻게 감히 어길 수 있겠으며, 서울에서 진실로 이렇게 한다면 외읍(外邑)에서 또한 마땅히 본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균역(均役)을 가지고 논하여 보건대, 예로부터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는 신하는 반드시 그 자신이 먼저 재물을 증식하여 자기의 집을 부유하게 하되, 사치가 외람되어 법도가 없어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해는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음으로써 국가에 흉화(凶禍)를 끼치는 지경에 이르렀었습니다. 한(漢)나라 때의 상홍양(桑弘羊)378) 이 염철세(鹽鐵稅)와 주거세(舟車稅)를 만들었는데, 결국은 개장 공주(蓋長公主)·상관 걸(上官桀)과 모반(謀叛)을 꾀하였다가 멸족(滅族)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홍계희(洪啓禧)가 어염세(魚鹽稅)와 선결세(船結稅)를 만들었는데, 이에 역적을 모의한 아들과 요망한 손자가 있어 멸종(滅種)의 화를 당하였습니다. 또 더구나 선대왕께서 평소 이에 대한 하교가 있으셨으니, 이른바 균역(均役)을 어떻게 하루인들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법이 양포(良布) 1필(疋)의 대가(代價)를 충입(充入)케 한 것인데, 이제 혁파하려 한다면 반드시 따로 하나의 양산박(梁山泊)을 만든 뒤에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마음을 가다듬어 계교를 세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해 요점을 추려서 그 대가를 충당하게 하더라도 또한 한낱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데 그칠 것이고, 또한 하나의 홍계희가 되는 데 그칠 것입니다. 난폭한 자를 다시 난폭한 자로 바꾼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그대로 하자니 불가하고, 혁파하자니 할 수가 없어서 밤새도록 근심하면서 분개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신이 마침 망령되게 생각난 것이 있으니, 그것은 털끝만큼도 백성에게 취하지 않고 하나의 물건도 백성에게 거두어 들이지 않은 채 전지(田地)가 없는 백성은 전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하고, 먹을 것이 없는 백성은 먹을 것을 소유할 수 있게 하고, 백성들은 즐거움을 누리고 국가 또한 부유해질 수 있는 방법은 토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권면하는 것뿐입니다. 이제 기장(記帳) 이외의 기경(起耕)할 만한 한가한 땅을 얻어서 백성들을 모집하여 농사를 짓게 하고, 공전(公田)이라고 이름을 붙여 정식(定式)하여 세금을 받아들이되, 여기에서 들어 오는 것을 헤아려 균역세(均役稅)를 견감해 준다면 1문(文)을 감하더라도 곧 균역세를 견감하는 것이 되어 백성들이 반드시 열복(悅服)할 것이며, 1푼을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곧 홍계희가 만든 법을 고치는 것이어서 백성들이 반드시 뛸듯이 통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신이 삼가 헤아려 보건대, 원장(元帳)에 붙여져 있는 수전(水田)과 한전(旱田)이 모두 1백 41만 9천 9백 90결(結)인데, 그 안에서 현재 기경(起耕)하고 있는 85만 3천 6백 80여 결(結)을 헤아려 제외하면, 남은 것은 여러 가지 면세전(免稅田)·진잡전(陳雜田)이 55만 8천 3백 11결이나 되도록 많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반드시 은루결(隱漏結)379) 로서 숫자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갈아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있을 듯하니, 백성에게 이런 것은 진고(進告)하게 한 다음 진고한 자에게 적당히 헤아려 주도록 허락한다면 진고하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또 혹 제방을 쌓아서 물을 대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나,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또한 관(官)에 고하게 하고, 관에서 방편에 따라 도와서 완성시키게 한다면 원하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또 이제 총영(摠營)을 혁파한다면 소속되었던 둔전(屯田)은 마땅히 하락(下落)해야 할 것이며, 또 다른 군문 이외에 각 아문의 둔전, 각 궁방(弓房)과 각 사찰(寺刹)의 위전(位田)·둔전(屯田)을 전부 감하거나 나누어 감해야 할 것입니다. 근래에 역가(逆家)의 토지도 그 숫자가 또한 많고, 또 각처에 절수(折受)한 산강(山岡)·포수(浦藪)와 폐기된 목장(牧場)·황장산(黃腸山)·봉산(封山)·제언(堤堰)·노초장(蘆草場)과 이생지(泥生地)가 있는데, 모두 거두어 들여 청(廳)을 설치해서 이속(移屬)시킨다면, 백성들이 모두 앞다투어 기꺼이 나아가 힘을 다해 농사를 지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득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명칭은 목장마(牧場馬)이지만 말은 두세 필(匹)에 불과하고 완전한 한 섬과 한 들의 기름진 아까운 땅을 등한하게 여겨 포기한 것이 한두 군데에 그치지 않으며, 명칭은 봉산(封山)이지만 애당초 한 그루의 소나무도 없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포구(浦口)와의 거리가 너무 멀고 길이 험하여 가져다 쓸 수가 없어서 백성들에게 폐단만 끼치는 것이 한두 군데에 그치지 않으며, 명칭은 황장산(黃腸山)이지만 봉산과 똑같은 한두 군데에 그치지 않으며, 노전(蘆田)이나 이생지(泥生地)는 곧 곡식을 생산해 내는 이익을 볼 수 있고 그 숫자 또한 상당히 많지만 백성들의 물건도 되지 않고 공물(公物)도 되지 않은 채 중간에서 아전들의 손으로 떨어져 들어간 것 또한 한두 군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틀어 계산해 보면 국계(國計)의 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으므로, 과연 이를 잘 수습한다면 균역세(均役稅)를 완전히 감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절반이나 3분의 1은 반드시 헤아려 감할 수 있으니, 비록 다 개혁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공이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

경장(更張)하고 인순(因循)하는 데 관한 하교에 대하여 신이 또 우러러 아뢸 것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 경장하여 환란을 부른 경우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심지어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소위(蘇威)는 백성들에게 오교가(五敎歌)를 외게 하고는 사람을 시켜 묻기를, ‘오품(五品)380) 이 잘 시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는 사람이 잘못 말하기를, ‘이 고을에는 오품관(五品官)이 없다.’고 하기에 이르렀는데, 감응(感應)이 깊이 일어나기에 미쳐서는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다시 또 우리에게 오교가를 외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인순(因循)하여 환란을 부른 경우 또한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심지어 금(金)나라 사람들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느릿느릿하는 것을 고아한 품격을 배양하는 것으로 여겨 적군이 침범하여 왔는데도 조당(朝堂)에 모여 읍양(揖讓)하면서 서로 미루다가 파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오늘도 이렇게 하고 내일도 이렇게 하면서 한가지 계책도 조처하지 못하자, 오랑캐들이 비웃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의논을 결정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이미 하수(河水)를 건널 것이다.’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둘다 잘못된 계책이니, 개탄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인순(因循)이라는 명칭에는 쇠약하고 퇴패스러운 풍속이라는 의미가 많이 들어 있으며, 경장(更張)이라는 명칭은 매양 쇄신하고 분발하여 새로움을 도모할 때 나오는 말이니, 쇄신하고 분발하는 것이 진실로 나약하고 퇴패스러운 것보다는 낫습니다.

더구나 신이 일찍이 옛 명신(名臣)의 차자(箚子) 내용을 보건대 우리 해동(海東)의 사대부들의 풍운(風韻)과 기미(氣味)를 금(金)나라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하는 것에 견주었는데, 지금은 또 더구나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은 물이 더욱 아래로 내려가듯 하여 쇠약함이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모두 열 손가락조차 움직이려 하지 않은 채 임금이 주는 음식을 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고 앉아서 처자(妻子)의 즐거움만 누리며 조석(朝夕)의 근심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고 있으니, 옛말에 이른바 나라를 집안일처럼 걱정한다는 사람이 모르겠습니다만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이런 때일수록 더욱 대대적인 쇄신과 대대적인 분발이 없을 수 없습니다. 경장(更張)해서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은 경장하고 경장해서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 것은 경장하지 않아야 하며, 경장해도 소요가 일지 않으면 경장하고 경장해서 일이 많이 생기면 경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보태주어 백성을 즐겁게 하고, 이익을 주어 나아가게 하고, 해로운 것은 고하여 피하게 하고, 위태로운 것은 깨우쳐서 옮겨 가게 하며, 완만하게 하여 핍박하지 않고, 간략하게 하여 어렵지 않게 하고, 익숙하게 하여 새로 시작하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게 하고, 점진적으로 하여 갑작스러운 것에 대해 고통스럽지 않게 하고, 묵묵한 가운데 옮겨져 가서 알지 못하게 하고, 편안히 행하게 하여 그렇게 된 이유를 모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장했는데도 경장하지 않은 것 같고 경장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경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낭묘(廊廟)의 신하들이 강구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사(三司)·양사(兩司)의 논계(論啓) 가운데 죄명이 가장 중하고 남은 기염(氣焰)이 두려워할 만한 자는 전일의 관위(官位)가 어떠했고 처지(處地)가 어떠했는지를 막론하고 벨 만한 자는 즉시 베고, 국문할 만한 자는 즉시 국문하고, 귀양보낼 만한 자는 즉시 귀양보냄으로써 간당(奸黨)들을 꺾어 깨뜨려 그 음모(陰謀)를 무산시켜야 하는 것이요, 역적을 배양하여 환란을 부르고 나쁜 벌레를 길러서 독(毒)을 끼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역종(逆種)과 역얼(逆孼) 가운데 바다나 육지에 귀양가 있는 자들은 특별히 도신과 수령들에게 신칙하여 엄중히 방수(防守)하게 하고, 진섭(津涉)381) 과 관문(關門)·교량(橋梁)을 특별히 기찰하게 하여 비록 가인(家人)이나 노복(奴僕)들의 왕래도 철저히 수색하고 점검하여 본관(本官)에 보고하게 한다면, 간사한 자가 용납될 수 없어 변란이 거의 그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자년382) ·을미년383) 연간에 이렇게 일찍 살피어 미리 예방하는 방도를 강구하였다면 요원의 불길처럼 하늘을 찌를 듯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작년에 기왓장이 날라오고 모래가 부려지는 변이 있었을 적에 그날 밤으로 급히 서둘러 호위하지 않았다면, 천지의 백신(百神)이 또한 반드시 부호(扶護)하는 데 배나 수고로웠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영단(英斷)을 베풀어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일에 대해서 말한 수만(數萬) 마디가 매우 근거있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6면
  • 【분류】
    윤리(倫理) / 왕실-종친(宗親) / 외교-왜(倭) / 정론-정론(政論)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역(軍役)

  • [註 361]
    연분(年分) : 연분 9등(年分九等)에 의하여 농사가 잘되고 못된 것을 상상년(上上年)에서 하하년(下下年)까지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징수하던 것을 말함.
  • [註 362]
    백지 징세(白地徵稅) : 수확이 없는 땅에 조세를 매겨 억지로 세금을 받음.
  • [註 363]
    답험법(踏驗法) : 농사가 잘되고 못된 것을 관원이 실제로 현장에 나가서 조사하여 그 손실에 따라 조세를 매기던 법.
  • [註 364]
    비총(比摠) : 연분을 정하는 방법의 하나로, 매년 가을에 호조에서 그해의 기후와 작황(作況)을 참고하여 상당년과 비교해 상량하여 총수를 결정하고, 급재(給災) 절차를 거쳐 세액을 결정함.
  • [註 365]
    조(粗) : 과거 시험에서 강서(講書)의 성적을 매길 때 등급 가운데 제일 하위인 것을 말함.
  • [註 366]
    전최(殿最) : 조선조 때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상·하로 평정하던 법. 상이면 최(最), 하이면 전(殿)이라 한 데에서 나온 말로, 경관(京官)은 각 관사의 당상관(堂上官)·제조(提調)가, 외관(外官)은 관찰사(觀察使)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등제(等第)를 매겨 계문(啓聞)하였음.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원은 등제가 없었음. 포폄(褒貶).
  • [註 367]
    대주첩(對柱帖) : 수령으로서 십고 십상(十考十上)에 해당되어 포계(褒啓)된 자와 장법(贓法)에 걸린 오리(汚吏)로 죄에 저촉된 자를 구별하여 적어 첩자(帖子)를 만든 것. 이 첩자를 임금이 열람하고 수령의 후보에 장법자를 올리면 전관(銓官)을 문책하였음. 당나라 선종(宣宗)이 경양 현령(涇陽縣令)으로 도둑 몇 명을 잡아 죽인 이행언(李行言)의 이름을 침전(寢殿)의 기둥[柱]에 붙인 고사를 인용하여 숙종 34년(1708)에 그것을 본따서 첩자를 만들어 ‘대주첩’이라 이름하고 포계한 수령을 열록(列錄)하여 고열(考閱)하였음.
  • [註 368]
    임자법(任子法) : 조상의 혜택으로 관직에 임명되는 것.
  • [註 369]
    부리 출거법(夫里出車法) : 부(夫)는 장정을 말하고 이(里)는 호구수(戶口數)를 말하는데, 장정의 숫자와 호구의 숫자에 의거하여 병거(兵車)를 내도록 되어 있는 법을 말함.
  • [註 370]
    궤향 솔군법(軌鄕率軍法) : 궤(軌)는 5가(家)이고 향(鄕)은 1만 2천 5백 가(家)인데, 행정 구역 단위별로 군병을 통솔하게 한 제도임.
  • [註 371]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 [註 372]
    정유년 : 1597 선조 30년.
  • [註 373]
    올출(兀朮) : 금(金)나라 태조(太祖)의 넷째 아들.
  • [註 374]
    수의(繡衣) : 암행 어사.
  • [註 375]
    청야(淸野) : 전쟁 때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전야(田野)의 곡식을 말끔히 거두고 집들을 헐어 버리는 일.
  • [註 376]
    양마성(羊馬城) : 성(城) 밖 사면(四面)의 참호 안에 다시 작은 성을 쌓은 것인데, 대개 두께는 6척(尺)이고 높이는 5척(尺)쯤으로 함.
  • [註 377]
    경저(京邸) : 경저리(京邸吏)가 사무를 보는 곳을 말함. 경저리는 서울에 주재하면서 지방 관청의 서울에 대한 일을 대행하는 향리(鄕吏)로서, 이들은 주로 그 지방의 공물(貢物)·입역(立役) 등의 일을 대행하였음.
  • [註 378]
    상홍양(桑弘羊) : 한나라 무제 때의 시중(侍中). 유명한 염철법(鹽鐵法)과 균수 평준법을 실시하여 국가의 이익을 따지는 데 있어서 백성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하였으므로, 국가의 이익이 매우 컸음. 그러나 후세의 유학자(儒學者)들로부터 한 무제 말기에 군도(群盜)가 일어난 것은 이같은 가혹한 경제적 수탈 때문이었다고 비난을 받았음.
  • [註 379]
    은루결(隱漏結) :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대장에 올리지 않은 전결.
  • [註 380]
    오품(五品) : 오륜(五倫).
  • [註 381]
    진섭(津涉) : 포구(浦口).
  • [註 382]
    무자년 : 1768 영조 44년.
  • [註 383]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司直尹冕東上疏曰:

向者, 權凶狼貪, 一世效尤。 累十百萬之錢, 流遍八路。 一區一域, 可占之土、可僦之庄, 輒必增價以貿, 翔踴數倍, 勢贏貲薄之人, 初不敢下手。 爭買擧一國之畝, 幾盡入於燀爀之家。 而且或値歲飢荒, 鄕曲富豪之流, 乘時射利, 輕價勒買, 民間之若干餘地, 亦皆爲此輩所有。 此固兼幷專利之害。 害及平民, 而外是爲弊, 又有劇於是者。 宮房之納、太僕之納、藥院ㆍ司圃之納、諸寺ㆍ諸府等處之納, 無邑無之。 而比元稅, 不啻倍蓰。 雖當大歉之時, 初無給災之規, 殘民徹骨之冤, 無處控訴, 寧不哀哉? 況乎, 年分則民不蒙災, 而利歸貪官。 蠲逋則民不被減, 而惠及猾吏。 樹木成林之地、沙土委堆之處, 在在相望, 而白地之稅, 侵剝洞里。 舊量年久之鄕、踏驗法廢之邑, 歲歲比摠, 而豪家之贓, 疊徵他戶。 京司行關而發賣, 營邑取剩而換色。 近峽則有貿蔘軍官。 沿海則有物膳保人。 尺網、葉舟、破箭、壞盆, 等閑之山岡自生之草木, 莫不見禁, 亦皆有主。 他餘名色, 種種科外之歛, 非盡朝家之所知, 而指不勝摟。 以此觀之, 生民之害, 亦多矣、酷矣。 不專在於兼幷而已。 爲今之計, 雖不兼幷, 而使各有田。 此害不除, 則哀此下民, 將無以保其産, 而遂其生矣。 乃者, 天生聖人, 默啓其衷, 赫怒方揚。 向日朝廷之上, 元惡大憝之恣胸臆, 而作威福者, 斧吭、鋸足, 廓然掃淸, 蕩然靡遺。 似聞城闉之中, 第宅稍輕。 都鄙之外, 田畝頗售。 此已我殿下一變之效。 一是不懈, 益加威克。 凡係廷紳之兼幷、踰制者, 付之耳目, 隨見隨斥, 毋敢容隱。 則刑一人, 而天下畏者, 其機在此。 其外邑豪富之族, 要脅强、貿窮民之物者, 亦令方伯、御史, 猛加紏繩, 風勵遐邇。 則兼幷之害, 可以永革矣。 軍門、各司、藩閫、牧守, 承訛襲謬, 貽害百姓者, 賦納, 則必依於正稅; 年分, 則必使之實俵; 蠲逋, 則必究以實惠。 白地之稅、疊徵之怨, 必改其步量。 物膳之價害貿蔘之名, 必令其斥罷。 發賣、換色之類, 必誅其違科; 破箭、壞盆之屬, 必許其盡免。 以至商旅之輩、工技之徒, 亦必禁其枉歛, 而亟命攸司之臣, 分付道臣、帥臣、該邑守令之臣, 以上諸條, 爛熟商量, 逐一講究, 而亦必優游不迫, 限以歲月。 無遺搜訪, 詳之又詳, 務歸至當, 盡去積弊, 使斯民咸被天地之德。 則不紛紜改作, 而自然與先王之政, 沕然相合, 惟殿下念哉。 我朝用人之法, 法無定制。 㝡爲有識之歎者, 卽無漸而驟進, 不試而徒用。 故其所用之也, 或以淸望, 或以虛名, 或以貴勢, 或以私比。 由前而論, 則是何晏王衍之誕、王僧達謝瀹之傲也。 由後而論, 則是之權, 之狎也。 皇華之盛, 詞藻是尙。 黨議之作, 搏擊爲先。 諛侫者擢在前列, 躁競者躐登要階。 間雖有名公卿、良大夫, 磊落相望, 出而爲用者, 或因事見功, 或遭時致位, 適然而已。 初非由於考其行能, 閱其勞勩, 歷試而用之。

是故, 世道漸降, 俗尙益訛。 寒素而平進者、孤立而無朋者、恬謹而欠巧者、正直而不阿者, 假使有經世之學、貫古之識, 汨沒埃壒, 枯死蓬蒿。 旣無辟署之規, 又無薦引之路, 幸而得第, 依舊坎坷, 不遇盤錯, 安知其利鈍。 不涉峻阻, 孰別其駑良? 世之爲銓官者, 亦未嘗經心人物, 留意藻識, 其所藉而爲政者, 時論之所尙、氣勢之所壓、情面之所熟, 而雖或有彼善於此者, 其實則不出此三塗也。 顧今讀書懷道山林之儒, 先宜至誠招徠, 任之輔導, 忘身奉上。 社稷之臣, 亦宜旌異寵擢, 托以重寄。 積詘久屛, 田畝之人, 又當次第收召, 置諸顯要。 此則急先之務, 當然之事, 而我殿下深懲向日壞亂之弊, 嚴立科場之禁令, 而面考者數人, 全削者一榜。 且戒夫試事煩猥, 闒茸濫進之失, 簡其設科, 狹其選額, 故募人代述。 聞風冒赴之類, 喪膽屛足。 以至武擧奸僞之習, 亦不敢售。 是誠聖人作爲, 卓越光明。 惟當堅持勿撓, 永久勿懈, 毋容更議。 而臣猶有私憂而過計者, 設科旣闊, 選額又寡, 而納券之限, 且不勝其太迫。 竊以爲: ‘試闈之式, 固當益嚴。’ 而時刻, 則稍展其限, 使之得盡其才, 無懷抑菀之心。 旣選矣, 必命面試, 以防其倖冒之弊焉。 式年之科, 雖難全革, 不可不存其名, 而改其規。 略倣別試之規, 講儒、製儒, 通令許赴, 而初試則試之以講。 製儒則三經中自願。 四書則抽栍。 講儒則七冊皆考講, 取粗以上。 會試則試之以製。 講儒則論、策。 製儒則表、策。 而必爲分所, 各試講與講、製與製, 自相爲敵。 較其高下, 三十三人之中, 分半取之。 如是則製儒皆熟讀, 講儒皆能文。 爲儒者其工雖難, 而在國, 則兩可得實, 才無偏重之歎矣。 餘科則以今所行, 簡設狹選之法, 遵而勿失, 則恐似合宜矣。 然而遐鄕人才, 又不可無別般收拾之道。 之時, 別爲五路, 開仕進之門, 使人心有所係屬。 則是今之先務, 丙年別試, 則革罷。 而其代依西北例, 每十年, 八路通設道科。 上京殿試之後, 賜第, 而大凡, 武擧之事, 臣本未習, 亦命有司, 略倣文科之意, 議定良制而行之。 則遠方之人, 必多奮發而興起者。 然後, 以次入用, 而入用之法, 又不可徑庭。 其必也, 歷試而後已。 所取之士, 勿論甲榜、次榜, 槐院、國子之別階六品, 經郞署之後, 一皆先畀以小縣。 待其準考, 視其著績, 大著則遷之大郡。 小著則遷之小郡, 如是而府, 如是而州。 終始有聲, 卓然優異, 則直擬方岳, 方岳而又卓異, 則無適不可, 惟器所使, 而方其郡考績之時, 另飭道臣, 毋循殿最之例套, 刊改八字之題目, 而必以某事能、某事不能, 稍敍功狀, 據實直書。 各修上、下籍, 齎上兩件冊子。 一備進御, 置諸座右, 用代對栍之帖。 一下選曹, 隨時閱覽, 用代夾帒之錄, 前後相準, 覈其所能。 或善於田賦、或善於錢穀、善於學校、善於軍政、善於聽訟、善於賑民。 其爲性, 或優於慈仁、優於剛嚴、優於廉白、優於綜核, 各取其所長, 而用於當用之處。 至於流入內銓之法, 則亦倣朝故事, 特設博學宏詞之科, 三品以下州縣之官, 幷令帶職許赴。 試以經術, 試以文辭, 試以時務ㆍ民弊, 試以直言ㆍ極諫, 經幄也、臺閣也、詞館也、廟謨也 各視其所長, 而通擬之, 儲需之。 雖至卿宰之列, 毋違其所能, 而毋强其所不能, 必擇其可合之任。 而任之武職之用, 亦以此法槪之。 則爪牙、干城, 且可以取諸囊中, 而用之。 若夫蔭仕一路, 卽古任子之法, 蓋不可廢者也。 有蔭及生、進中, 可合之人, 竝當依前入仕。 薦剡之人, 亦必歸重而簡選, 不令濫增員額, 反勝於文武二者而已。

世宗大王八年, 五衛之制始定。 親臨講武於箭串之郊, 五衛之兵, 合六千六百餘人。 設一大方陣, 又變陣而罷, 然此但據古文, 條畫有所未盡。 故至文廟時, 光廟在邸, 而奉敎與諸臣, 更爲講定。 卽內而摠管、衛將, 外而各路鎭管之制兵, 寓於農, 番上宿衛。 蓋懲勝國家兵之弊, 而倣古府兵, 暗合乎成周之夫里出車、管仲之軌鄕率軍之制也。 至於壬、丁之後, 創置訓局, 次第四軍之制, 相繼而作。 善用之, 則京師有宿衛之嚴, 而得居重、馭輕之道。 各路有寓農之兵, 而得捍外、固圍之策, 幷行而不悖也。 獨恨其行軍之法, 專用《兵學指南》。 此是戚氏之陣也。 只步戰, 故以是禦之, 而胡以騎來, 則莫之能禦。 觀於戚氏之爲宣大摠兵, 而改爲車陣之制, 可知其得失也。 蓋此方營二疊之陣, 四衛相錯, 各守前面, 連行接伍, 合爲一統, 敵衛一方, 混營雜擾, 陣勢單薄, 易毁易潰, 比之於駐戰相間。 左右相救, 重疊之中, 各有分數, 一陣自守之制, 不啻若涇渭之別。 而捨彼取此, 識者皆曰不可, 而數百載, 莫之改者, 不亦惑乎? 或者之言以爲: "兵在制變, 陣不足恃。" 若其然也, 則戚氏之法, 亦不須習也。 若不然也, 而陣不可不習, 則誠莫如復我國初之法也。 軍制不變, 而陣法徒變, 則行之不難, 可無繹騷之慮矣。 今之器械, 亦可謂備矣。 長而弓弩、短而劍戟之外, 又有大小砲火之技, 出於近世, 而實是宇宙間凶器, 靡堅不透, 靡硬不破, 足爲不可敵之利具, 而或値大風、甚雨、草樹、霧露、沮潭、蒸溽之時, 則竝與火箭、弓弩, 皆不能用。 徒以劍戟爲利, 而彼此搏戰之際, 力敵器敵, 亦非全勝之道也。 於此有一種勝器, 背嵬甲、麻札刀, 是耳。 東魏慕容紹宗曰: ‘天下難克者, 莫如侯景。’ 之戰, 紹宗, 令其卒, 各持大斧, 直與敵逼, 低頭斫馬足, 故以紹宗之善戰, 不免於大衂。 此法流傳, 至爲背嵬、麻札。 韓世忠劉錡之破兀朮, 皆令背嵬軍, 持銳斧, 仰揕人胸, 俯擊馬足。 而岳飛以五百軍, 破十萬衆, 以八百軍, 破五十萬衆之虜。 是皆背嵬、麻扎之功。 背嵬, 卽龜背鐵甲。 麻札, 卽八尺長斧。 今其形制, 具載於鈐家之書。 蓋其用極簡極便, 而風雨寒暑, 無是畏, 利鏃大劍不能破。 且以其俛首向前, 故尤利與騎戰, 而非復鎗刀之比也。 今若於諸軍門中, 各置五百人外兵, 則每五哨各置一哨, 自爲別部。 臨戰則或奇或正, 隨方用之, 此亦無敵之利器。 最所寒心者, 鄕軍之馬隊也。 一隊之中, 見馬無一二。 臨點借用, 臨操雇用。 跨鞍而鞍壞, 躡鐙而鐙絶。 又不習御馬之法, 馬驚人蹶, 接住不得, 奚暇容其手技乎? 設欲行背嵬之制, 鄕軍馬隊, 一幷換作背嵬之隊。 爲渠輩除一巨弊, 爲軍務添一勁兵, 亦似不妨矣。 且夫各邑軍器之弊, 莫今時若也。 年年停操, 全不修改。 件件朽傷, 殆無形樣。 宜別遣繡衣, 通共點閱, 大加釐正。 而流來旣久, 非盡今日守令之罪。 行之卒暴, 亦恐所傷者濫, 而以致各邑之驚擾, 已往之事, 竝爲蕩滌。 而新定法式, 嚴飭道、帥之臣, 行會各邑, 約爲期限, 次次修補。 告畢之後, 從實摘奸, 啓聞賞罰。 或命繡衣, 不時抽栍點檢。 如是之後, 逐歲加飭, 俾無如前之弊。 作爲殿最之一事, 則似或爲可。 而其中弓矢一物, 實多可悶, 積在庫中, 非如常用之器。 弓角、箭羽, 春雖新備, 一經潦雨, 全無完物, 年年改修, 而猶患不給。 自前有不角之弓、不羽之箭, 雖不合於爭鵠之射, 而射賊則同; 雖不宜於及遠之射, 而射近則同。 與其用戾弓、敗箭, 毋寧用此樸實之物。 頒下令甲, 各募匠手, 必令爲可用之器, 多數閣庤, 則亦一助也。 至若水戰之制, 陸地收布之軍, 多居海邊。 而戰船能櫓之軍, 反在山邑, 嶺南尤甚。 或有不意之變, 迫在瞬息, 而五六百里外, 能櫓之軍, 何以及期登船? 假使來赴, 一生所未見之舟楫、風浪, 又何以措手足乎? 此則分付統、水、兵間之臣及該道道臣, 逐一釐改。 能櫓之軍, 皆充於海沿。 收布之軍, 移送於山邑。 而相換之際, 或更簽丁, 則亦慮騷動難安。 而此不過一遭知委, 換其名色於都案之中, 他無拘掣之端。 且東萊水營戰船所泊之處, 僻在淺港。 水勢又變, 不値望晦大潮之候, 則掛在沙礫, 尺寸難移。 若曰寇必不來, 則幸耳。 或者其出, 不在於大潮之時, 則雖有百萬之衆, 其將立視船頭, 而爲寇所迫。 嘗聞其解事軍民之物議, 則皆以爲: ‘莫如移營於蔚山機張兩邑浦口。 自古云云之處。’ 今若擇其一處, 移設水營, 移泊戰船, 則非但無無水難動之患。 且彼船之自馬島出者, 必備東南風便, 順其勢而來, 則直抵於釜山多大浦、或金海鳴旨島等處。 方其順風而來也, 自今水營而視之, 實爲逆風。 藉令潮漲船浮, 海路逆風, 亦無以出而使船。 此乃必敗之證也。

苟能移置於, 則之向, 亦借東南之風。 之順風, 卽吾之順風; 若以順風指前, 吾亦以順風躡後。 此其必勝之術也。 此外各營邑戰船船泊之處, 臣所不曾聞見之處, 亦必有如此之患。 分付各路水閫及海沿, 或掘港, 或移泊, 隨便裁處, 使無不虞之慮, 亦似宜矣。 對馬一島, 自是石山, 五穀不生, 人不得粒食之饒。 生齒益繁, 至於屋上疊屋。 出居倭館者, 只以交易爲利。 而數年之中, 殆至廢市。 雖未知本國何如, 而苟有可賴、可貨之道, 寧至是耶? 渠亦到得窮處, 則必不坐而待死。 雖不爲秀吉之凶、 馬島之奴, 或復作沿邊之搶掠, 不是異事。 假使一挾銃登陸。 則以今之踈防, 其能捍否? 臣嘗待罪金海, 審知金井山城之不可抛置也。 東萊平野丈餘之城, 本不足爲晷刻之計。 金井之城處在嶻嵲, 卽是鐵甕天險。 而內則寬廣, 盡府一邑之民, 可以得保。 若使壬辰之初, 以此爲歸, 則永嘉雖破, 必無府城隨陷, 而大嶺以南, 踵而瓦解之患矣。 今其地有城郭矣, 有倉廩矣。 宜亟修繕, 移邑於此。 則使彼聞之, 可以逆折凶心矣。 縱未然者, 另加修繕, 以爲臨急入保之所。 則纔聞永嘉有警, 可以一瞥捲上於二十里之間矣。 自東萊以左, 則機張蔚山長鬐興海盈德寧海, 皆爲沿邊。 而船之至, 必借風勢, 本無逆行之理。 果使, 水營移於蔚山, 則餘非可慮也。 自東萊以右, 雖有開雲豆毛西平多大之列鎭。 都不過數十餘里。 而過多大, 則爲金海熊川巨濟, 至于統營統營以後及等邑, 皆有列鎭之齒連碁絡。 而金海, 則無一外鎭, 獨爲海門巨防, 賊路初程。 故其官, 則兼營將。 其城, 則高麗名將朴葳之所築, 至今屹然。 而一自年前, 鳴旨鹽利之移屬他處, 邑樣蕩殘, 無以爲邑。 今若劃屬其代於該邑, 裕其物力, 移築戰船所泊之塘, 改備水陸軍器, 而密陽三浪漕倉, 水道漸變, 運舶難通。 亦令利屬於金海海倉, 以完其勢, 則當與東萊爲輔門唇齒, 而直路待變之地, 少可紓憂矣。 又若黃山臨鏡山城兎遷老姑山城, 皆有舊堞, 可以修繕。 塞黃山之路, 則密陽淸道之路塞矣。 塞兎遷之路, 則尙州咸昌龍宮醴泉, 向鳥嶺之路塞矣。 咸陽金山聞慶豐基, 則又是四大嶺之底要衝之路, 而一皆疲殘, 無以爲防。 若能別賜處分, 割近邑而添之, 培其勢而壯之, 則儼然爲各處關隘。 左兵營移於慶州安東等邑, 以爲大將居中制外之圖。 道臣則待警於架山山城, 而天生山城, 亦爲修繕, 與華山金鰲禿用等山城, 控制諸路。 則嶺外之事, 庶可略整矣。 若夫湖南格浦一處, 最爲形害, 海寇北上之路。 若過海南水營, 則迄于公忠保寧水營, 非無各鎭之列於其間, 而俱非咽喉險隘之要。 獨此格浦, 前與蝟島相對。 舟艦來往, 皆由兩島之間。 若以此地, 陞爲僉使, 設爲巨鎭, 與蝟島爲左右之翼, 與古羣山爲鼎足之形, 足以防遏一路。 爲兩湖樞紐。 以陸路則兵營之在康津, 亦非計也。 亂後議設之初, 以長興爲定。 蓋長興則四圍山岡, 有如今之蔚山兵營, 可以爲捍守之所。 津則乃在於平坡、荒原, 四無憑阻之地。 其時, 長興之民, 或恐有弊於本邑, 多以銀布賂柄。 臣與臺官文勵上書沮之。 臣之傍祖故領議政臣承勳摘發論啓。 鞫而死之。 事未竟, 而爲柄臣所惎而去。 故城遂不設於長興, 而設於康津。 說者至今惜之。 今若移設於長興, 則似好, 而或者又謂: ‘長城笠巖淳昌福興, 皆是天險, 而且爲一道之中, 左右俯瞰, 南北控制。 如欲移閫, 則計莫善於此’云。 數者之間, 選其最便宜者而施之。 則東有赤裳蛟龍金城; 北有威鳳等山城, 聯絡關通, 亦可爲鞏固之道矣。 大抵我國山川, 眞箇天設奧區。 攻人則不足,自守則有餘。 而自守之方, 莫如堅壁、淸野而已。 苟能嚴關防以絶寇至之路, 設山城以爲入保之所, 約民兵、結堡塢, 移官倉、輸私儲, 以行淸野之術, 則不過數月之間, 十萬之寇, 立可餓殺。 灣府是何地? 城外卽江, 江外卽虜。 若値氷, 壯虜直薄城, 不用鍬鑊, 可越而入, 而守堞之軍, 皆在遠坊, 有所呼召, 動費時日。 城內軍兵, 類多他額, 名目旣殊, 臨急無可得力。 此但以城內各色之軍, 換作守堞之名, 則非徒爲國, 各爲父母妻子, 守之益固。

豈若城外之卒, 輒思踰越, 而逃歸者耶? 城外之卒, 移定各色之代, 則亦可以收聚用之, 在軍政, 小無損害。 惟彼守、摠合營之方, 亶出於汰冗兵、汰冗食, 以爲腹心根本之計。 今若以沁都爲三道統禦之帥, 則雖曰喬桐, 西海之衝, 而置一守將, 依前設置, 亦足以手指爲使, 捍蔽爲障, 以爲統禦之所在。 至於守、摠二營之當廢及合設之議, 其來已久, 莫之能決焉。 夫南漢卽副都。 非特如凡他保障, 而守營實管之。 則其位高,其權重, 特爲軍門而後, 可以鎭護京都, 勝於一府尹, 守令衙門守禦之廢, 固知不可。 以摠營, 則雖曰專管北漢, 北漢卽與京城爲一。 若移屬於三軍門中, 則足矣。 雖不別置摠營, 亦所無關。 罷摠營, 而合於守營, 臣愚則斷以爲可也。 雖然, 合屬守營之後, 仍使在, 則又不可也。 宿衛三軍, 旣嚴且備。 則領率鄕軍, 保障一方之帥, 又爲在京, 未知何義耶? 必也出鎭南漢, 統禦畿輔, 亦如沁都之制, 則水陸東西, 巨防相對, 京城之勢, 可以不孤矣。 又若都城之制, 則周四十里之闊, 竪三數丈之高, 東虛西低, 且無壕塹羊馬城可守之制。 而城外人家稠櫛, 適足爲資賊棚樓之用。 必置壁疊於四隅數百步之地, 極其堅固, 而每一疊, 各守千人、或五六百人, 多樹旌旗, 多置鉦皷, 以爲疑兵。 或夜縋、或晝伏, 或搗前、或襲後, 賊不敢直犯大城。 古者守城之時, 多用此例, 可考而知也。 今我都城, 亦無異於平野之城。 若是其難守, 正宜用此法也。 移設畿營於弘濟院坪。 而綠磻峴弘濟川水口巖阻之間, 堅築小城。 則慕華峴一邊, 雖不設城, 亦有可固之道。 以摠營旣罷之兵, 屬之以防, 漢北門之路、鞍峴登高峴? 鶻禹壽峴、東門之外, 則倭踰峴安巖洞蓬萊山等處, 各置一小城, 則合不過五六箇, 未滿三里之小城, 因高爲險, 募民入處, 各置倉庫, 以爲七江及部內人民臨亂入保之地。 都城, 則仁王北岳駝駱木覔四山之上, 各屯一枝軍, 列樹旌旗, 城中各坊, 預備巷戰之具, 則四城之門, 雖通夜大開, 賊亦知虎口之法, 必無敢犯者矣。 兼又增繕北漢蕩春營, 江倉米穀皆輸其中, 以爲通一都入保之所也。 城外諸小城不破, 則都城未可以犯, 都城不破, 則蕩春北漢亦未敢猝犯。 此乃與井田守城之說, 相爲表裏矣。 坡州牧使, 則移邑於惠陰嶺上; 楊州牧使, 則移邑於洪福山城, 以爲北漢外蔽, 而摠統於畿營, 以捍西北。 水原兵馬, 則屬於守營, 以捍東南之路。 又與沁都之海防, 四面環控, 各城共守, 則人心不撓, 視京師爲必守之地, 足可以堅持挨度, 以待勤王之師、義士之旅矣。 見今佐幕之類, 通八路合爲二百五十餘窠。 其中一百五十餘窠, 則依前以閒散帶去, 毋使此輩缺望。 一百窠, 則以禁騎各五十人, 分送各處, 限以三年, 任以藩閫, 各務準限, 有勞以後次次入仕。 或有其中拔萃出類之才, 各使其主將, 自爲薦主, 別加抄啓, 或直陞六, 或令右調。 如其誤薦, 罪及薦主。 旣如是矣, 又爲出試於守令, 如上所論文官之制, 而邊地防禦閫任之望, 亦皆考其前後功狀, 而擧之, 則庶不無少補之效矣。 擧世之間, 侈汰成風, 使一國之財, 塡無底之壑, 以至於莫可救藥之地。 以言乎第宅, 則稍以達官爲稱者, 未有不新起改搆, 務以穹崇相勝。 甚至於一屋之價, 或爲五六千金, 而猶爲不足。 城闉之內, 纍纍疊建。 江湖之上, 在在相望。 合爲十數區者, 往往有之矣。 以言乎庄田, 則纔從營邑而還者, 未有不白晝駄錢, 務以膏腴相勝。 甚至於一人之田, 或値十大萬金, 而猶爲不足。 貢人之名, 以傔暗錄。 京邸之價, 以奴代受。 市利、船雇, 無一事不相干者, 往往有之矣。 士夫之流不貪, 則無以成其侈。 府胥、邑吏之徒不貪, 則無以學其侈。 以致倉庫朽然, 虛籍徒擁, 災結空失, 租稅漸縮。 又所謂均廳貿米、惠廳買屯、各衙車外方捧留之穀, 何莫非瘠公肥私, 爲國計潛銷暗鑠之一大蠧也。 南漢沁都、松京留儲之銀錢若米穀, 其爲國家所賴, 何如? 而管鑰雖完, 罅孔多漏, 三城保障之儲, 若是其空踈。 則京師可恃乎? 外營可恃乎? 外邑尤可恃乎? 以此之故, 百官之祿、軍兵之料, 常乏半年之需。 江都之米、關西之貨, 每多移貸之擧。 若問致此之由, 其咎安在? 一言而蔽之曰, 汰侈而已。 內自宮掖, 外至軍國, 行一事, 則必曰得無不節乎; 發一令, 則必曰得無不節乎? 若夫近習宗戚之私、馳獨遊謙之娛, 初非可戒於不諫亦入之聖, 而雖在軍民之際, 淸時無戰鬪之勞, 而輕施賞格, 則卒驕而不以爲德; 平歲無賙賑之政, 而濫加賜予, 則民冒而不知爲恩矣。 夫以殿下千乘之尊、八域之富, 惜費如此, 從約如此。 則降自大官以下, 其孰不仰體德意, 表率群工, 而尙復前日之弊風乎? 故相臣黃喜之高桶笠藍絛兒, 獨不可自廟堂始乎? 大官苟能如此, 則小官安敢違也; 朝廷苟能如此, 則士庶安敢違也; 京師苟能如此, 則外邑亦當效之。

試以今均役論之, 自古聚歛之臣, 渠必先自封殖, 以厚其家。 奢濫無度, 末流之害, 至于不奪不厭, 凶國禍家之境。 弘羊創爲監鐵、舟車之稅, 而終與蓋主、上官之謀, 以赤其族。 今之啓禧, 創爲魚鹽ㆍ船結之稅, 而乃有賊子妖孫之逆, 以滅其種。 又況有先大王平昔之敎, 則所謂均役, 何可一日留置? 而第其爲法, 充入於良布一匹之代。 今欲罷之, 其必也別穿一梁山泊而後可也。 縱使心計之人, 極力捃摭, 以充其代, 亦一均役而止。 亦一啓禧而止。 以暴易暴, 何益之有? 欲因則不可。 欲罷則不能。 終宵耿耿, 憂憤不寐。 臣適妄有所思, 一毫不取於民, 一物不歛於民, 而使無田之民, 得以有田。 無食之民, 得以有食。 民樂而國亦有裕者, 其惟闢土而勸農乎! 今若得帳外閒土之可以起耕者, 募民爲農, 名爲公田, 定式捧稅, 量其所入, 而減給均役之稅, 則雖使減得一文, 卽是減均役之稅, 民必悅服。 雖使改得一分, 卽是改啓禧之法, 民必聳快。 臣竊料元帳所付水田、旱田, 合爲一百四十一萬九千九百九十結內計, 除時起八十五萬三千六百八十餘結, 則所餘諸般免稅陳雜, 爲五十五萬八千三百十一結之多。 於其中似必有隱漏未出之數, 耕犂可入之土, 使民進告, 告者量宜許給, 則告者必衆。 又或防堰灌漑可以蒙利, 而私力之所不能者, 亦令告官, 而自官方便助成, 則願者必多。 且今摠營若罷, 則所屬屯田, 宜有下落。 且他軍門外, 各衙門屯田、各宮房ㆍ各寺刹位田屯田, 或全減、或分減。 而近來逆家田土, 其數亦夥。 且各處折受之山岡、浦藪, 與廢牧場、廢黃腸、廢封山、廢堤堰、蘆草之場、泥生之地, 俱收竝蓄, 設廳移屬。 則民皆爭先樂赴, 盡力爲農, 所得必不貲矣。 名以牧場馬, 不過數匹, 而全一島一野膏沃可惜之土, 等閒抛棄者, 非止一二; 名以封山、初無一枝松。 雖或有之, 距浦口隔絶險遠, 無以取用, 而徒貽民弊者, 非止一二; 名以黃腸而與封山一同者, 非止一二; 蘆田也, 泥生也, 卽令蒙利出穀, 數亦過優, 而不爲民物, 不爲公物, 中間落在吏輩之手者, 亦非止一二。 總而計之, 可補國計之一隅。 果能善爲收拾, 則均役之稅, 雖不得全減, 或折半、或三分之一。 必當計減, 雖不盡革, 其爲功不亦大乎? 若夫更張、因循之敎, 臣又有仰復者。 自古治國之道更張, 而致亂者夫何限哉。 而甚至於蘇威之好作事爲, 而令民誦五敎歌, 使人問五品不遜否。 對之者誤曰: ‘此州無五品官。’ 逮夫玄感之起, 民皆曰: ‘更令我誦五敎否?’ 因循而致亂者, 亦何限哉? 而甚至於人之低聲、緩語, 以爲養高。 而寇至, 則會于朝堂, 揖讓相推而罷。 今日如是, 明日如是, 不措一策。 致令虜人笑謂曰: ‘待汝論定, 我已渡河。’ 以此觀之, 兩皆有失, 可勝歎哉? 雖然, 因循之名, 多在於委靡、頹敗之俗。 更張之稱, 每出於振刷、奮發之圖, 振刷、奮發, 固勝於委靡、頹敗。 而況臣曾見古名臣箚語, 以我海東士大夫之風韻、氣味, 比於人之低聲、緩語。 而又況世道人心, 如水益下, 委靡之極。 皆欲十指不動, 衣君之衣, 食君之食, 坐享妻子之樂, 不憂朝夕之慮。 古所云, 憂國如家者, 未知其幾許人哉? 如此之時, 尤不可無大叚振刷、大叚奮發之擧也。 更張而民悅者, 更張也; 更張而民不悅者, 不更張也。 更張而無擾, 則更張也; 更張而多事, 則不更張也。 益而使樂之, 利而使趨之。 告之害而使避之, 曉之危而使遷之。 紆餘而使不迫也, 簡昜而使不難也。 狃而使不驚其創也, 漸而使不苦其驟也。 默移而使不知也, 安行而使不見也。 是之謂更張而不更張, 不更張而自更張也。 豈非今日廊廟之臣, 所可講究者乎? 三司、兩司論啓之中, 罪名最重, 餘焰可畏者, 毋論前日官位之如何, 處地之如何, 可誅者卽誅, 可鞫者卽鞫, 可竄者卽竄, 摧破其奸黨, 渙散其陰謀。 毋使養賊而致患, 養疊而爲毒也。 且逆種逆孽之在海陸者, 另飭道臣、守令, 嚴加防守。 津(步)〔涉〕 、關梁, 別爲譏詗。 雖其家人、奴僕之往來者, 這這搜驗, 言於本官, 則奸無所容, 而亂庶可已。 戌、乙之間, 若爲此早察預防之圖, 則必不至於燎原滔天之域也。 昨年, 翻瓦、撒沙之變, 若不卽其夜, 急擧扈衛, 則天地百神, 亦必倍加用勞於扶護之地矣。 伏願, 亟施英斷, 速降處分焉。

批曰: "累萬言事, 甚有根據。 竝令廟堂稟處。"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6면
  • 【분류】
    윤리(倫理) / 왕실-종친(宗親) / 외교-왜(倭) / 정론-정론(政論)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역(軍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