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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5권, 정조 2년 6월 1일 기축 3번째기사 1778년 청 건륭(乾隆) 43년

진주사 채제공 등이 치계하다

진주사(陳奏使) 채제공(蔡濟恭) 등이 치계(馳啓)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들 일행이 본년(本年) 4월 15일에 북경(北京)에 들어간 그 당일로 즉시 예부(禮部)에 나아가 표문(表文)·자문(咨文)·주문(奏文)을 올렸습니다. 신들이 가지고 간 주문 3본(本)을 물의(物議)를 탐문해 보아 알맞게 입정(入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심양(瀋陽)에 당도한 다음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기에, 임역(任譯)들을 시켜 사행(使行)이 오게 된 연유를 말하게 했었습니다. 그의 말이 ‘사은(謝恩)을 하고 송건(訟愆)을 함은 진실로 사체에 맞게 된 일이고, 앞서의 주문(奏文)을 고쳐서 올린 것은 비록 상례(常例)와 다르게 되기는 하지만 외경(畏敬)하는 도리에 방해로울 것은 없는 것이나, 구례를 답습한다.[循襲舊例]는 등의 어구(語句)에 있어서는 분소(分疏)284) 한 것에 관계되는 듯합니다.

생각하건대, 지금 황상(皇上)께서 정령(政令)이 날로 엄격해져 감히 어기거나 거스릴 수 없는데, 주어(奏御)하는 문자(文字)에서 여러 가지 불화가 생기게 되니, 십분(十分) 잘 살펴서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했었습니다. 황성(皇城)에 당도하고 나서 신들이 다시 상량(商量)해 보건대, ‘주본(奏本)에 삽입(揷入)한 어구가 분소(分疏)한 것에 관계되는 듯하다.’고 한 말이 혹은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단지 미부(尾附)한 주본과 미부를 하지 않은 주본만 받들고 곧장 예부(禮部)에 나아가 미부한 주본을 진정(進呈)하고서 신들이 수자상(受咨床) 앞에 서서 예부 상서(禮部尙書) 사용(謝墉)에게 대면(對面)하여 전어(傳語)하기를, ‘지난번의 주문(奏文)은 이미 격식(格式)에 맞게 되지 아니하여, 황지(皇旨)을 내리는 근로(勤勞)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마는, 이번의 이 주문은 능히 격식에 어그러지는 염려가 없겠습니까?’ 했더니, 사용이 ‘좋게 되었다.’고 하고, 따라서 즉시 영수(領受)했었습니다. 신들이 물러나와 행각(行閣)에 앉아 있는 동안에 임역(任譯)을 잠시 기둥 밖에 머물러 있게 했었는데, 사용이 다시 부정(附呈)한 앞서의 주문(奏文)을 펴 보다가 제독(提督) 및 여러 낭중(郞中)들과 서로 돌아보며 귀엣말을 하였고, 이어 임역에게 하는 말이 ‘귀국(貴國)의 지난번 주문은 이미 청준(聽準)을 받은 것이기에, 지금에 있어 다시 진정(進呈)을 함은 단지 전례가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황람(皇覽)에 있어 구애가 있게 될 듯 싶소. 예부에서 받아서 상철(上徹)하기에도 진실로 미안스러운 일이거니와 귀국의 사사(使事)에 있어서도 또한 반드시 이로움이 없을 것이오.’ 했었습니다. 때문에 신 등이 다시 말을 왕복(往復)하게 하기를, ‘중국 조정의 체식(體式)이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다만 신중하게 하려는 뜻으로 똑같은 내용의 주문 속에서 단지 사진전주(寫進前奏)란 한 단락만 삭제하고 다시 가지고 올 것입니다.’ 하니, 사용이 가져오도록 하여 여러 차례를 자세하게 보고 나서 ‘이는 참으로 좋게 되었다.’고 하고, 처음에 진정한 주본(奏本)은 도로 내주기에, 신 등이 물러나와 관차(館次)로 돌아왔었습니다.

16일 오후에 제독(提督) 소능(蘇楞)원명원(圓明園)에서 나와 임역(任譯)들에게 하는 말이 ‘주문을 올린 뒤에 군기 대신(軍機大臣)이 하는 말을 들어보건대, 「황상(皇上)이 주문을 보고서 매우 기쁘게 여겼다.」고 했었으니, 반드시 따뜻한 분부가 있게 될 것이다.’고 했었습니다. 그날로 곧장 황지(皇旨)가 내렸는데, 이르기를, ‘해국왕(該國王)이 지난번의 주섭(奏摺)의 조사(措詞)가 체식(體式)에 맞지 않는 곳이 있었음을 깊이 스스로 인구(引咎)하며 감격스러워 진정(陳情)한 것은 정성이 간절한 일이어서 아름답게 여겨진다. 짐(朕)이 평소에 언어(言語)와 문자(文字) 때문에 사람들을 죄주지 않았건만, 해국왕이 이처럼 일에 당하여 공경할 줄을 아니 더욱 공순(恭順)함이 스스로 지녀진 것임을 알겠다. 족히 영구히 은권(恩眷)을 받게 될 일이기에 깊이 해국(該國)을 위해 경행(慶幸)스럽게 여긴다.’고 했었는데, 제독 등이 이를 보고서 ‘이는 진실로 황상이 마음속에서 나온 말이라.’고 운운했었습니다. 주문에 대한 회자(回咨)를 우선 등서(謄書)하여 올려 보내 을람(乙覽)에 대비합니다.

방물(方物)은 심양(瀋陽)에서 도착하여 관소(館所)에 부려 놓았고, 23일에는 비로소 주문(奏文)을 비하(批下)했습니다. 사은(謝恩) 및 진주(陳奏) 방물은 모두 내년의 정공(正貢)에 이준(移準)하게 되어, 예부(禮部)에서 지위(知委)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본월(本月) 초4일에 수효를 대조하여 부고(府庫)에 고부했습니다. 황제(皇帝)는 황태후(皇太后)의 상기(喪期)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올 여름에는 열하(熱河)로 가지 않고 계속해서 원명원(圓明園)에 있다가, 지난달 24일에 대궐로 들어왔고 27일에는 방택단(方澤壇)에서 하지 대사(夏至大祀)를 친행(親行)했는데, 예부에서 제주(題奏)하여 단지 조선(朝鮮)의 정·부사(正副使)가 수역(首譯)만 데리고 접가(接駕)하게 했었습니다.

그날 동이 틀 무렵에 신 등이 방택단(方澤壇)으로 나아가 내문(內門) 밖 길 왼쪽에서 꿇어앉아 맞이했는데, 황제가 제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신 등이 지영(祗迎)하고 있는 곳에 이르러 시신(侍臣)에게 묻기를, ‘저들이 조선(朝鮮) 사신(使臣)인가?’ 하자, 그 시신이 지영하고 있는 예부 시랑(禮部侍郞)에게 다가와서 물어보고 도로 돌아가 꿇어앉아 주대(奏對)하니, 황제가 보교(步轎) 속에서 몸을 돌리어 보았고, 10여 보(步)를 갈 때까지 오히려 체시(諦視)285) 하며 화열(和悅)한 안색(顔色)으로 말을 하려는 듯하다가, 보교에 진행이 매우 빨라 이미 문 밖까지 나가게 되었고 곧장 원명원(圓明園)으로 돌아갔었습니다.

신들이 책문(柵門)에 들어간 이후에는 큰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었고 봄부터 가뭄이 매우 혹독하였기에 각 부(府)·주(州)·현(縣)에서 계속하여 기우(祈雨)를 하였고, 5월 보름에는 황제(皇帝)가 천단(天壇)에서 〈비〉를 친히 빌었는데, 비록 간간이 뇌성하며 비가 내렸지만 먼지를 적시고 마는 것에 지나지 않았었습니다. 심양(瀋陽)의 능(陵)에 행행(幸行)이 7월 20일에 길을 떠나기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인출(印出)한 노정기(路程記)를 구득해 보건대 날짜대로 역참(驛站)을 배정해 놓았는데, 8일 14, 5일에 먼저 흥경(興京)영릉(永陵)에 가고 19일과 20일 무렵에는 심양에 당도하여 복릉(福陵)과 소릉(昭陵)에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흥경에서 심양까지의 거리는 2백여 리인데, 심양의 동북쪽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26면
  • 【분류】
    외교-야(野)

  • [註 284]
    분소(分疏) : 변명함.
  • [註 285]
    체시(諦視) : 주의하여 똑똑히 봄.

○陳奏使蔡濟恭等馳啓略曰: "臣等一行, 於本年四月十五日, 入北京。 當日卽詣禮部, 呈表咨奏文。 臣等齎來奏文三本, 不可不探問物議, 停當入呈, 故到瀋陽後, 逢着習知事情者, 使任譯輩, 試言使行所來之由。 則以爲: ‘謝恩訟愆, 誠爲得體, 而前奏改呈, 雖異常規, 不害爲畏敬之道。 至若循襲舊例等語, 似涉分疏。 顧今皇上, 政令日嚴, 無敢違拂, 奏御文字, 種種生梗, 十分審愼爲宜’云。 及到皇城, 臣等更爲商量, 則揷入本之語涉分疏云者, 或不無慮, 故只奉尾附本及不爲尾附本, 直詣禮部, 以尾附本進呈, 而臣等立於受咨床前, 對面傳語於禮部尙書謝墉曰: ‘前奏旣已不合式, 致勤皇旨, 今此奏文, 能無違式之慮耶?’ 謝墉曰: ‘好矣。’ 卽仍領受。 臣等退坐行閣, 任譯姑留楹外矣。 謝墉更閱附呈前奏, 與提督及諸郞中, 相顧耳語, 而仍謂任譯曰: ‘貴國前奏, 業蒙聽準, 到今改進, 不但無例, 恐有礙於皇覽。 禮部之受而上徹, 固爲未安, 在貴國使事, 亦必無益’云。 故臣等更令往復曰: ‘未知中朝體式之如何, 第以愼重之意, 同一奏文之中, 只去寫進前奏一叚, 而又爲齎來云’爾。 則謝墉使之取來, 屢回詳閱, 以爲: ‘此則儘好。’ 還給初呈本, 故臣等退還館次矣。 十六日午後, 提督蘇楞圓明園, 來言於任譯等曰: ‘奏文呈後, 聞軍機大臣之言, 則皇上覽奏, 深以爲喜, 必有溫旨’云矣。 伊日皇旨卽下。 有曰: ‘該國王, 以前摺措詞有不合式之處, 深自引咎, 感激陳情, 誠懇可嘉。 朕素不以語言文字罪人, 而該國王如此遇事知儆, 益見其恭順。 自將足以永受恩眷, 深爲該國慶幸也。’ 提督等, 見此以爲: ‘此實皇上心裏之語’云云。 奏文回咨, 先爲謄書上送, 以備乙覽。 方物自瀋陽, 到缷館所, 而二十三日表文, 始爲批下。 謝恩及陳表方物, 俱爲移準於來年正貢。 待禮部知委, 本月初四日, 照數交庫。 皇帝以皇太后喪期未畢, 今夏則不往熱河, 連在圓明園, 去月二十四日入闕, 二十七日親行夏至大祀於方澤壇, 自禮部題奏, 只令朝鮮正副使, 率首譯接駕。 同日曉頭, 臣等詣方澤內門外, 跪迎路左, 則皇帝祭罷黜來, 至臣等祗迎處, 問侍臣曰: ‘彼爲朝鮮使臣乎?’ 侍臣來問於禮部侍郞之祗迎者, 還以跪對, 則皇帝於步轎中, 轉身見之, 行至十餘步, 猶諦視, 顔色和悅, 若有所語, 而轎行甚疾, 已出門外, 直還圓明園。 臣等入柵以後, 大風無日不吹, 旱乾自春孔酷, 各府、州、縣, 連爲祈雨, 而五月望, 皇帝親禱天壇, 間雖雷雨, 而不過浥塵而止。 瀋陽陵行, 則定以七月二十日起程, 故得見其印出路程記, 排日計站, 則八月十四五日, 先詣興京 永陵, 十九日二十日間, 當到瀋陽, 詣福陵昭陵, 而興京之距瀋陽, 爲二百餘里, 在於瀋陽東北云。"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26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