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 등을 태실에 제부(躋祔)하고 공신을 배향한 교서
태실(太室)에서 체제(禘祭)169) 하였는데, 영종 대왕(英宗大王)과 정성 왕후(貞聖王后)를 13실(室)에다, 진종 대왕(眞宗大王)과 효순 왕후(孝純王后)를 14실에다 제부(躋祔)하였다. 하루 전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여(轝)를 타고 명정문(明政門) 밖의 악차(幄次)로 나아갔다. 통례(通禮)가 효명전(孝明殿) 신좌(神座) 앞으로 나아가 여(轝)를 타도록 계청(啓請)하니 부묘 대축(祔廟大祝)이 신주(神主)를 받들어 신여(神轝)에다 안치(安置)하고, 통례(通禮)가 또 휘령전(徽寧殿) 호외(戶外)로 나아가 여(輿)를 타도록 계청하니 부묘 내시(祔廟內侍)가 신주를 받들어다가 신여에 안치하고는 책보(冊寶)와 교명(敎命)은 앞에다 놓았다. 신여가 나가자 임금이 자리에 나아가 지영(祗迎)하였고, 이어 여(輿)를 타고 뒤따랐다. 통례(通禮)가 신여에 나아가 여(轝)에서 내려 연(輦)을 타도록 계청하니,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신주를 받들어 연(輦)에다 안치하였다. 임금이 여(輿)에서 내려 연(輦)을 타고 뒤따르니,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반열(班列) 차례대로 뒤따랐다.
당초에 배향(配享)할 공신(功臣)들의 위판(位版)을 홍화문(弘化門) 밖 거리의 동쪽에 머물러 놓았다가 대왕(大王)의 신련(神輦)이 나갈 적에 위판(位版)도 또한 뒤따랐다. 드디어 태묘(太廟)로 나아가 묘문(廟門) 밖에 이르자, 통례(通禮)가 신련(神輦)으로 나아가 연에서 내려 연(輦)을 타도록 계청하니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신주를 받들어다 여(輦)에다 안치하였다. 임금이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타고 뒤따르다가 악차(幄次)에 당하여는 여(輿)에서 내려 신여의 왼쪽으로 나아갔다. 통례(通禮)가 신여에 나아가 여(轝)에서 내려 악차로 들이어 가도록 계청하니,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신주를 받들고 악차로 옮기어 안치하고, 교명(敎命)과 책보(冊寶)는 또한 악차 안에다 펴 놓았다. 조금 있다가 진종 대왕과 효순 왕후의 신련이 연복전(延福殿)에서 묘문(廟門) 밖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려 여(轝)에 오르매, 임금이 자리로 나아가 지영하였다. 악차에 이르자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신주를 받들어 악차로 옮기어 안치하기를 모두 처음의 의식(儀式)대로 하고, 종친과 문무 백관들이 묘(廟) 동쪽 문 밖으로 나아가 자기 차례로 서 있었다. 임금이 면복 차림으로 판위(版位)에 나아가 사배(四拜)하고 드디어 묘(廟) 안으로 들어가 봉심(奉審)하며 제기(祭器)를 살펴보고는 이어 영녕전(永寧殿)으로 나아가 또한 앞에서와 같이 하였고, 악차로 돌아와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로 갈아입고 신문(神門) 밖으로 나아가 희생(犧牲)을 살펴보고 악차로 돌아왔다. 약방(藥房)의 3제조(提調)와 여러 승지(承旨)들이 재전(齋殿)에서 미리 재계하기를 주청(奏請)하니, 하교하기를,
"이는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찍이 하시던 일인데, 소자(小子) 내가 감히 그대로 준수하여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고, 중각(中刻)에 다시 면복 차림으로 어악(御幄)을 봉심(奉審)하였다.
이날 여러 향관(享官)들이 먼저 들어와 자리로 나아갔고, 임금이 면복을 갖추고 들어와 판위(版位)로 나아가니, 통례(通禮)가 신악(神幄)으로 나아가 자리에서 내려와 여(轝)를 타고 부알(祔謁)하기를 계청하니,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영종 대왕과 정성 왕후의 신주를 받들고 나와 신여에다 안치(安置)하고, 집례(執禮)가 앞에서 인도하여 정문(正門)으로 해서 들어가 부알위(祔謁位)에 이르러 궤(櫃)를 열어 욕석(褥席)에다 안치하고 나자, 통례가 욕위(褥位)의 서쪽으로 나아가 북쪽으로 향하여 꿇어앉아, ‘길신(吉辰)인 오늘 영종 대왕과 정성 왕후께서 부알하시게 됨을 아룁니다.’ 하고, 이어 동쪽으로 향하여 여(轝)를 타고 부향(祔享)하기를 계청하니,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신주를 받들어 신여에다 안치하고, 신여가 이미 올라가게 되자 대축과 내시가 인도하여 신실(新室)에 이르러서는, 내시는 왕후의 신주를 받들어다 자리에 안치하고 대축은 대왕의 신주를 받들어다 자리에 안치하며, 묘사(廟司)는 그 소속(所屬)들을 거느리고 각기 고명(誥命)과 책보(冊寶)를 받들어다 탁자에다 들여놓고서 차례대로 반열을 나누고는 선개(扇盖)를 예식대로 하였으며, 조금 있다 또 진종 대왕과 효순 왕후의 신주를 받들어다 부알(祔謁)하고 입묘(入廟)하기를 위의 의식대로 하고, 드디어 묘내(廟內)로 올라가 봉심(奉審)하고 나서 내려와 자리로 되돌아갔다.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의 위판(位版)을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묘정(廟庭)에 추배(追配)하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최규서(崔奎瑞)와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조문명(趙文命)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위판을 영종 대왕의 묘정에 배향(配享)하고 나서 독교관(讀敎官)이 교서(敎書)를 읽었다. 그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은(殷)나라 칠묘(七廟)의 봄직한 것은 처음으로 부조(不祧)하는 예법을 말한 것이고, 순(舜)임금의 오신(五臣)은 그중에도 훌륭하였기에 이에 종사(從祀)하는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로(霜露)를 밟을 적마다 여애(餘哀)가 바야흐로 깊어지기만 하고 풍운(風雲)을 대할 적마다 추원(追遠)하는 생각이 더욱 결집(結集)하게 된다.
지난 옛날 영릉(寧陵)170) 께서 어극(御極)하셨을 적에 상(商)나라 부암(傅巖)171) 에서 현자(賢者)를 구하려는 것처럼 생각이 부지런하셨었다. 이때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있다가 걸연(傑然)한 왕좌(王佐)의 재질로 세상에 나와 성대(聖代)의 서조(瑞兆)가 되었다. 절벽(絶壁)처럼 서 있는 기상은 대개 추성(鄒聖)172) 이후의 제일인이고, 바다처럼 넓은 흉회(胸懷)는 고정 부자(考亭夫子)173) 의 성법(成法)을 그대로 따랐었다. 천지에서 떠받치는 의리는 1부(部)의 인경(麟經)174) 에서 나온 것이고, 군신(君臣) 사이의 시원하게 만남은 천재(千載)에 어수(魚水)175) 의 관계이었다. 소장(消長)은 도(道)가 있으므로 하늘이 장차 사문(斯文)을 없애지 않게 되었고 현회(顯晦)는 때에 관계되므로 공론(公論)은 백세(百世)를 기다릴 것이 없었다.
다만 생각하건대, 문묘(文廟)의 양무(兩廡)에 철식(腏食)176) 하게 된 이후에 아직도 무후(武侯)177) 처럼 일체로 제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난번에 송(宋)나라 제생(諸生)들처럼 상소하여 호소하는 말이 진실로 나의 마음을 감동시켰었고 마침 주(周)나라 태실(太室)처럼 부례(祔禮)의 때를 당하게 되었으니 마치 이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같이 되었다. 이에 제9실(室)의 배식(配食)하는 반열에 자리를 바로하여 먼 백대(百代)까지라도 훌륭한 계합(契合)을 표양(表揚)한다. 생각하건대, 우리 선조(先朝)의 50년 동안의 신화(神化)는 진실로 그 당시에 마음을 같이하는 한두 신하에게 힘입은 것이었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은 안위(安危)할 때에도 기댈 수 있는 인재로서 죽으나 사나 변하지 않는 지조가 있었다. 집에 전해 오는 소절(素節)은 태산(泰山)이나 홍모(鴻毛)와 같이 여기는 데에서 대의(大義)를 밝혔고, 나라를 위한 순충(純忠)은 단심(丹心)으로 백발(白髮)이 될 때까지의 일이 신장(宸章)178) 에서 환하였다. 신축년179) 의 큰 계책을 극력 협찬하고 정유년180) 의 고규(故規)를 차자(箚子)로 진달했었으며, 십행(十行)의 자지(慈旨)를 친히 받고선 순국(殉國)할 뜻을 결정하였고 삼종(三宗)181) 의 정맥(正脈)을 혼자서 보호하였으니, 종사(宗社)를 보위(保衛)하는 공이 컸었다. 강개(慷慨)하게 임명(臨命)한 시(詩)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인인(仁人)이나 지사(志士)가 아니고, 조용하게 의리를 성취한 공렬(功烈)은 장차 신하로서 두 마음을 가진 자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한(漢)나라상산 사호(商山四皓)182) 가 저황(儲皇)을 조호(調護)한 것에서 어찌 섬기는 데에 미급(未及)한 것을 논하겠으며, 송(宋)나라 한기(韓琦)183) 가 영묘(英廟)를 익대(翊戴)한 것은 진실로 돕는 자리에서 더 앞일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첨의(僉議)가 이미 같게 된 것이고 또한 가까운 사례로 의거할 만한 것이다. 영의정 최규서(崔奎瑞)는 풍의(風儀)는 마치 난곡(鸞鵠)이 우뚝 치솟는 것 같고, 식려(識慮)는 시귀(蓍龜)처럼 영감스러웠다. 야도(野渡)184) 에서 고주(孤舟)의 역할은 구 추밀(寇樞密)185) 의 오랜 명망보다도 높았고 급류(急流)에서 용퇴(勇退)한 것은 전 참정(錢參政)186) 의 높은 풍도보다도 뛰어났다. 무신년187) 에 극적(劇賊)들이 흉계(凶計)를 도모할 때를 당해서는 당시에 이 원로(元老)의 고급(告急)한 것을 힘입어, 3도(道)의 기세를 연합한 군사를 부수게 되었으니, 누가 공(公)과 공로를 다투겠는가? 한 가닥 왕업을 부지하게 한 포양(褒揚)을 생각하면 천감(天鑑)에도 소명함이 있다. 각건(角巾)188) 을 쓰고 집으로 돌아와 비록 기린각(麒麟閣)189) 에 화상 그릴 훈공(勳功)을 사양했지만, 문미(門湄)에 보묵(寶墨)을 걸었으니 족히 운대(雲臺)190) 보다 높은 공렬(功烈)을 증험하겠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은 규장(珪障)·금옥(金玉)과 같은 자품(資稟)으로 주석(柱石)·동량(棟樑)과 같은 인재이었다. 육경여(陸敬輿)191) 처럼 백독(百牘)의 경륜(經綸)으로 국가의 흥망(興亡)을 염려했고 조 승상(趙丞相)192) 과 같이 한 몸의 거취(去就)가 현사(賢邪)의 시비(是非)와 관계가 있었다. 전후로 고심(苦心)한 것은 오직 임금께 대한 모함을 밝히는 한 가지 절의였고, 평생 동안 손을 쓴 일은 오직 충신(忠臣)과 역신(逆臣)을 가리는 큰 관건(關鍵)에 있었다. 왕실(王室)의 폐부(肺腑)로서 공사(公私)의 휴척(休戚)을 함께 하였고, 낭묘(廊廟)에서나 강호(江湖)에서 진퇴(進退)의 우락(憂樂)이 차이가 없었다.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은 임금을 잘 보필하는 재질이고 산함(酸醎)을 조정(調停)하는 솜씨이었다. 나라를 활발하게 하는 소지(素志)로 범 문정(范文正)193) 처럼 양의(良醫)가 되기를 원하였고, 당시를 바로 잡으려는 지성(至誠)으로 여급공(呂汲公)194) 처럼 유독 사당(私黨)이 없었다. 언제나 생각에 피차(彼此)의 붕비(朋比)하는 화는 필연코 장차 하늘을 뒤덮으며 요원(燎原)의 불길 같으리라 여기고, 이래서 상하(上下)로 조정하는 논은 자못 영관(纓冠)하거나 피발(被髮)하고라도 하려고 했었다.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어 치우치게 융숭한 임금의 은덕을 입었고, 문장(文章)과 사공(事功)은 없어지지 않고 대중이 전송(傳誦)하게 되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그 마음이 겸손하고 신중하며 청렴하고 소박하였고, 재질(才質)이 통련(通練)하고 총명하였다. 조신이 단정하고 자상하여 진지(進止)가 한 자 한 치의 실수도 없고, 우모(訏謨)가 밀물(密勿)하면서도 미미한 의복과 신발에까지 정신을 썼다. 처음에 희령(熙寧)195) 과 원풍(元豊)196) 때처럼 당적(黨籍)에 관련되어서는 사류(士類)들이 경중(輕重)을 막론하고 믿게 되었고, 나중에는 원우(元祐)197) 때처럼 완인(完人)이 되매 명주(明主)께서 복심(腹心)처럼 의탁했었다. 수십 년을 정승으로 있으며 조야(朝野)에 신망이 높았고, 대개 사업은 한두 가지로 셀 수 없는데 민생들에게 혜택이 펼치었다. 이번에 제부(躋祔)하는 성대(盛大)한 의식(儀式) 때에 당하여 모두를 승배(升配)하는 이전(彛典)에 합당하다. 은후(殷后) 때 일덕(一德)의 보좌(輔佐)를 생각하면 ‘두터우니 잊지 않는다.[篤不忘]’고 하였고, 주(周)나라의 원사(元祀)의 글을 고찰해 보아도 마땅히 따라 배향하여야겠다. 이에 온 나라의 공론에 따라 이유(二卣)로 명인(明禋)에서 유식(侑食)하게 한다. 목묘(穆廟)198) 에 문순(文純)199) 을 추배(追配)하니 듣고 보는 이가 모두 용동(聳動)되고, 이어서 인조[長陵]께 군언(群彦)을 배향하니 명석(名碩)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아!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을 호위(護衛)하여 이미 좌우에 있게 하니 영세(永世)토록 뒷사람을 계도하여 많은 복과 상서를 내리게 하라."
하였다. 【지제교(知製敎) 남학문(南鶴聞)이 지어 올렸다.】
효종 대왕 묘정(廟庭)에 신(臣) 증(贈) 영의정(領議政) 송시열을 배향한 교서(敎書)에,
"왕은 말하노라. 성무(聖廡)에 선정(先正)을 승제(陞躋)하였음은 사문(斯文)을 존대하기 위한 것이고, 세실(世室)에 종신(宗臣)을 추배(追配)하였음은 훌륭한 공렬(功烈)을 포양(褒揚)하기 위한 것이다. 이어 1백 년이나 없었던 예전(禮典)을 닦아, 온 나라 대중의 심정(心情)에 답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왕정(王政)은 유현(儒賢)을 높이는 일보다 더 먼저 할 것이 없고, 사전(祀典)은 척배(陟配)에 있어서 더욱 신중해야 한다. 만약 목묘(穆廟)에도 가리어 종유(從侑)하는 것을 극진히 하였다면 효종[孝陵]께도 또한 추향(追享)하는 의식을 거행하여야 한다. 단지 나아가 간발(簡拔)하여 묘정(廟庭)에 있게만 한 것이 아니라 도학(道學)을 중히 여겨서인데, 진실로 종사(從祀) 일을 모두 질서대로 한 것을 생각하니 방국(邦國)에 광채가 있게 되었다. 하물며 천재(千載)에도 없는 제우(際遇)이었는데 어찌 일체(一體)로 같이하는 전례(典禮)를 늦추겠는가?
오직 경(卿)은 천하(天下)의 대로(大老)이고 해동(海東)의 진유(眞儒)이었다. 일찍부터 현사(賢師)에게 종류(從遊)하여 연원(淵源)이 깊고 문로(門路)가 올바랐고, 크게 성학(聖學)을 천명(闡明)하여 천리(踐履)가 독실하고 법도가 엄격하였다. 땅이 만물을 지고 있고 바다처럼 넓은 도량으로 학문의 규모는 주자(朱子)와 궤범(軌範)을 같이 했고, 산악(山岳)이 높이 솟아 있는 듯한 기상(氣像)은 맹씨(孟氏) 이후에 제일인(第一人)이었다. 군현(羣賢)의 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우뚝하게 사도(斯道)의 극치에 나아갔고, 육합(六合)200) 에 더욱 지강(至剛)한 것은 걸연(傑然)히 호기(豪氣)가 세상을 덮었다. 사풍(士風)이 격려(激勵)되고 사도(師道)가 존엄(尊嚴)해져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자애(慈愛)를 남기게 되었고, 방례(邦禮)가 바로잡아지고 피사(詖辭)201) 가 사라지면서 옛적의 것에 질정해 보아도 의아스러울 데가 없게 되었다. 무릇 어찌 한 시대만의 괴형(魁衡)이었겠느냐? 또한 진실로 만대(萬代)의 표준이 되었었다.
출처(出處)는 이윤(伊尹)202) ·여상(呂尙)203) 과 더불어 서로 백중(伯仲)이었고 사업은 천지에 높아 일월(日月)처럼 빛났다. 이에 유문(儒門)의 세상에 드문 자품으로 영고(寧考)의 크게 일을 하시려는 뜻을 잘 협찬(協贊)하면서, 감반(甘盤)204) 처럼 빈사(賓師)의 자리에 처한 것은 용잠(龍潛) 때부터였고 제갈양(諸葛亮)처럼 토복(討復)하는 공력을 담당하여 어수(魚水)와 같이 계합(契合)했었다. 천지가 번복(飜覆)된 뒤를 당하여는 일부(一部) 《춘추(春秋)》의 의리를 강구(講究)하였고, 일모 도원(日暮道遠)의 한탄을 느끼면서도 지업(志業)은 10년 동안 와신 상담(臥薪嘗膽)205) 하는 것으로 도왔다. 모열(謨烈)을 대양(對揚)하여 중국(中國)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쳤고,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여 인심(人心)을 바로잡고 천리(天理)를 밝히었다. 은의(恩義)로 말하면 군부(君父)와 신자(臣子)의 사이이고, 계합(契合)으로 말하면 복심(腹心)·고굉(股肱)과 같은 관계이었다. 내린 초구(貂裘) 1습(襲)은 앞날에 풍상(風霜)을 함께 하기 위한 것이고, 이폐(螭陛)206) 에서의 독대(獨對)는 그 힘써 부지런히 한 모유(謨猷)였다. 성지(聖志)에 찬동하여 더욱 수화(水火)의 위태로운 속에서도 격려하였고, 예략(睿略)을 받들어 우주(宇宙)의 깊은 수치를 씻기를 기약했었다.
아! 대업(大業)을 절반도 이루지 못해서 그만 하늘이 무너지는 애통에 감싸이게 되었다. 임금의 승하를 만류할 길이 없어[龍髯莫攀] 상천(上天)하는 선어(仙馭)가 이미 멀어져버렸고, 춘추의 의리를 혼자 품고서 한밤중에 혈루(血淚)가 〈한없이 옷깃을〉 적시었다. 백수(白首)에도 처음에 먹은 마음 황명(皇明)의 일월(日月)을 그대로 이고 있고, 창오(蒼梧)207) 저문 날에 영릉(寧陵)의 송백(松栢)에서 부질없이 슬프기만 했었다. 황천(皇天)이 〈훌륭한 분을〉 남겨 두지 아니하여 용호(龍虎)의 인물이 사라지고 세상 일이 극도로 변하자 호치(狐鴟)의 무리가 방자하게 기세를 떨친다. 만고의 정기(正氣)는 없어지지 않아 그래도 난적(亂賊)들이 두려워할 줄 알게 되고, 백세(百世)토록 일정한 공론이 기다리고 있어 참으로 우리의 사도(斯道)가 보존하게 되었다. 문묘(文廟)의 통서(統緖)를 서로 전승(傳承)해 감은 오직 이 큰 도덕을 빛내는 일인데, 조가(朝家)에서 비록 이증(貤贈)하는 일을 했지만 융성(隆盛)했던 계우(契遇)를 현양(顯揚)하는 일은 있지 않았었다.
돌아보건대 선조(先朝)에 욕의(縟儀)를 미처 거행하지 못하고 오늘날에 이르도록 예전(禮典)을 차리지 못했으니, 어찌 온 나라 공공(公共)의 의논이 답답하게 펴지지 못함만 있겠는가? 또한 성조(聖祖)의 오소(於昭)하신 영령(英靈)이 애닯게 여기며 기다리고 있겠다. 이에 내가 유서(遺書)를 읽어보며 일찍이 광감(曠感)을 안게 되고 위열(偉烈)을 생각하며 오직 먼 계획을 품게 된 바이다. 당초에 황묘(皇廟)의 어필(御筆) 현액(懸額)을 내렸음은 강한(江漢) 조종(朝宗)의 의리를 기록하게 된 것이고, 보찰(寶札)의 단발(短跋)을 새로 지었음은 대개 아름다운 풍운(風雲)의 제회(際會)를 사모한 것이다. 오직 이번의 추승(追陞)하는 의식(儀式)은 곧 계지(繼志)하고 술사(述事)하는 일로서, 곧 존봉(尊奉)하는 도리를 강구하는 것인데 어찌 형식에 구애할 것 있겠는가? 만일에 있지 않던 규정(規定)이라 한다면 의기(義起)해도 되는 것이다.
이에 경(卿)을 효종 대왕(孝宗大王)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거니와, 유명(幽明)은 간격이 없는 법이기에 동심(同心) 동덕(同德)의 신하에게 의지하게 될 것이고, 위서(位序)대로 이어받아 문정(文正)·문경(文敬)의 반열이 엄정(嚴正)해지게 되었다. 기(夔)와 설(契)이 방훈(放勳)208) 과 중화(重華)209) 의 대업을 협찬(協贊)한 것처럼 공로는 짝할 수 없고,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니 마땅히 의거할 수 있는 예법(禮法)이다. 표장(表章)도 이미 손색이 없게 되고 숭봉(崇奉)도 거의 할 말이 있게 되었으니, 성덕(盛德)이 아니라면 누가 이에 참여하겠는가? 자못 하늘의 뜻도 오늘을 기다린 듯하다. 아! 사방에서 보고 듣는 것의 미치는 것을 생각하면 공경하는 마음이 흥기(興起)되지 않는 이가 없고 과덕(寡德)하고 암매(暗昧)한 나의 존모(尊慕)하는 성의를 돌아보면 이로 좇아 펼 수 있게 되었다. 천지의 정의(正義)는 실추되지 않는 법이기에 태평한 국운(國運)이 만회되기를 기다리겠고, 광악(光岳)의 정령(精英)은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이기에 국명(國命)이 영구해지도록 음즐(陰騭) 【하늘이 은연중에 백성을 안정시킴.】 해 주기 바라겠으니, 우리 선왕(先王)의 척강(陟降)을 계적(啓迪)하고 우리 자손과 여민(黎民)을 보호할찌어다."
하였다. 【지제교(知製敎) 김희(金憙)가 지어 올렸다.】
영종 대왕 묘정에 신 영의정 김창집을 배향한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3년이 되면 제부(躋祔)함은 《예경(禮經)》에서 소목(昭穆)의 의식을 밝힌 바이요 백세(百世)토록 공(功)을 높임은 성왕(聖王)들이 포숭(褒崇)의 전례(典禮)를 소중히 여긴 바이다. 돌아보건대 영묘(英廟)를 보좌하던 양필(良弼) 중에 누가 비궁(閟必)210) 의 배유(配侑)의 좋은 법을 받아야 하겠는가? 오직 경(卿)은 문정(文正)과 문충(文忠)의 아들이고 손자로서, 순충(純忠)의 큰 절의(節義)는 늠름(凛凛)하게도 앞서의 영신(寧人)이 가전(家傳)해 온 것이고, 백발(白髮)에도 단심(丹心)을 지켰음은 선신후(先神后)의 신장(宸奬)에 환하였다. 특수한 제우(際遇)로 낭묘(廊廟)에 있어서는 임금의 길을 보필하였고, 정론(正論)을 붙잡고 피사(詖邪)를 물리침은 사류(士類)들의 영수(領袖)였다. 종국(宗國)의 안위(安危)와 완급(緩急)에 관한 모든 일은 분발(奮發)하여 담당하고, 자신 하나의 화복과 사생(死生)에 있어서는 계교(計較)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었다.
아! 신축년211) 의 대책(大策)은 누가 감히 갑론(甲論) 을박(乙駁)할 수 있는 것이었느냐? 의릉(懿陵)212) 께서 위예(違豫)하실 때에 당하여 국가의 사세가 위기 일발(危機一髮)이게 되자, 《주역[羲經]》 명리(明离)의 괘상(卦象)을 강론하여 대의(大義)를 삼광(三光)처럼 밝혔다. 십행(十行)의 자지(慈旨)를 친히 받들었음은 실로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부익한 것이였고, 일봉(一封)의 연차(聯剳)를 계속해서 올리면서 정유년213) 의 고규(故規)를 준수(遵守)하였다. 종사(宗社)가 이를 힘입어 안정되매 대하(大厦)를 한 목재(木材)에 지탱하게 되었고, 비창(匕鬯)214) 의 주(主)를 두어 보록(寶籙)을 천추(千秋)에 전해 가게 하였다. 어찌 화심(禍心)을 품은 무리들이 이에 국본(國本)을 요동(搖動)하려는 흉계(凶計)를 낼 줄 알았겠는가? 한기(韓琦)215) 와 범중엄(范仲淹)216) 처럼 탁락(卓犖)하게 수립(樹立)하고 있자 억지로 모함을 가하게 되었었고, 요(堯)와 순(舜)처럼 주고받는 것이 광명정대(光明正大)하자 공공연히 방자하게 방해하는 짓을 하게 되었었다. 북문(北門)으로 잠입(潛入)하는 짓을 하였음은 아! 저 흉당(凶黨)들이 장차 어찌 하려는 것이었겠는가? 남쪽 변방에 멀리 머물러 두었던 것은 대개 그들이 생각에 죽여버리고야 말려고 했던 것이다. 아무 사실이 없이 다그친 것은 진실로 비참하게도 장현(戕賢)하려고 계획했던 것인데, 창천(蒼天)이 조림(照臨)하여 순국(殉國)하려는 뜻을 더욱 굳어지게 하였다. 마침내 선왕(先王)을 위하여 한번 죽으므로서 이심(貳心)을 가지는 인신(人臣)을 부끄러워지게 하였다. 임명(臨命)하는 시(詩)에 슬픔이 간절한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눈물 흘렸고 조용하게 취의(取義)했던 행적(行蹟)은 신도(臣道)의 이정표(里程表)가 되는 바이다.
천리(天理)는 본시 되돌아 오기 좋아하는 것인지라 마침내 숙원(宿冤)을 말끔히 씻어버리게 되었다. 신감(宸鑑)이 내려다 보고서 교일(皎日)을 돌리어 복분(覆盆)의 밑을 비추어 주게 되고, 숨은 억울을 통쾌하게 신설(伸雪)하여 단서(丹書)217) 에서 세척(洗滌)되고 화곤(華袞)의 〈은택을〉 받게 되었었다. 해와 달이 빛나듯 한 경사를 열었으니 원공(元功)이 그 누구이었겠는가? 음(陰)이 쇠퇴(衰退)하고 양(陽)이 장성(長成)하는 때를 당하여는 국시(國是)가 곧 정해지게 되었었다. 혹시라도 극력 보우(保佑)하는 종신(宗臣)이 없었다면 어떻게 〈순제(舜帝)가〉 문조(文祖)218) 에게 영원하기를 비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이루었겠는가? 4백 년의 기업(基業)이 영장(靈長)하게 되었음도 진실로 경천(擎天)하는 솜씨를 힘입어서이고, 50년 동안의 잘 다스린 교화(敎化)가 높다랗고 거창하였음도 욕일(浴日)219) 의 공로가 아닐 수 없었다. 만일에 이극(貳極)220) 을 익부(翼扶)한 충성을 논한다면 계합(契合)이 소융(昭融)했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어찌 꼭 일당(一堂)에서 어수(魚水)의 사이처럼 즐거워하는 것만을 기다리겠는가? 바야흐로 명량(明良)이 서로 만난 것이었음을 칭송(稱誦)하고 있는 것이다.
담담(澹澹)해진 이 시기에 즈음하여 더욱 단단(斷斷)하던 그의 정성을 사모하게 되었다. 승부(陞祔)하는 욕례(縟禮)의 날이 어느새 박두하니 여애(餘哀)가 많기만 하고 유좌(侑坐)하는 옛법을 마땅히 따르니 그의 남긴 공렬(功烈)이 높기만하다. 강사(江祠)에다 사상(四相)의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였으니 그 누가 동덕(同德)한 순신(純臣)이 아니겠으며 묘정(廟庭)에는 군신 일체(君臣一體)의 예의를 소중히 하니 수공(首功)의 원보(元輔)를 귀중히 여기는 바이다. 오직 나의 뜻이 먼저 정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첨원(僉員)의 의논도 물어서 같이 한 것이다. 그 반열이 이와 같으니 우리 국조(國朝)의 가까운 사례도 의거할 수 있는 것이고, 오로지 아름답게만 할 수 없으니 송(宋)나라의 그전 사례를 징빙(徵憑)할 수 있다. 남들이 혹은 ‘저군(儲君)을 보호한 공로가 그 당시 일에 미쳐서 다름이 있다.’고 했었으나, 나는 그가 종사(宗社)를 보존한 공적이 진실로 선조(先朝)에 종사(從祀)하는 것에 합당한 줄로 안다.
돌아보건대, 이 묘신(眇身)이 당했던 때에도 또한 이미 가진 간난(艱難)과 위험을 모두 겪었고 개탄스럽게도 민이(民彛)가 장차 어두어질 때에는 진실로 대부분 경(卿)의 충정(忠貞)에 있어 광감(曠感)하였다. 그래서 이장(彛章)을 따르고 또 숭례(崇禮)를 펴서, 이에 경을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한다. 아! 익보(翼輔)하는 훌륭한 절의(節義)는 유명(幽明)에 차이가 없을 줄로 알고 친애(親愛)하며 앙대(仰戴)하던 초심(初心)은 한없이 척강(陟降)할 적마다 호위(扈衛)해 드리기를 바란다. 변두(籩豆)의 향례(享禮)를 곧 갖추어 나의 단충(丹衷)을 표하며, 반석(盤石)과 태산(泰山)처럼 기업(基業)이 영구히 편안하도록 현우(玄祐)해 주기를 기다린다."
하였다. 【지제교 김희(金憙)가 지어 올렸다.】
영의정 최규서를 〈배향한〉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태실(太室)에서 승부(陞祔)하는 예(禮)를 거행하니 겨우 3년의 상제(喪制)를 마치게 되었고 서사(西戺)에 유향(侑享)하는 반열을 따라 이에 일덕(一德)의 현자(賢者)를 가리게 되었으니 진실로 대중의 심정에 따라서 또한 특전을 차리게 된 것이다. 오직 경(卿)은 난새[鸞]가 멈추어 서고 고니[鵠]가 우뚝 솟는 듯하고 윤택한 옥(玉)과 순수한 금(金)의 인품으로, 풍범(風範)이 단중(端重)하여 본래부터 낭묘(廊廟) 안에 있어야 할 기국(器局)이고 기우(氣宇)가 명랑하여 자못 연화(煙火) 가운데 사람이 아니었다. 식려(識慮)는 시초(蓍草)와 신귀(神龜)의 영감(靈鑑)이요 그 문장(文章)은 관면(冠冕)·패옥(珮玉)한 사람의 법도였다.
일찍이 명릉(明陵)의 융성(隆盛)한 때를 만나 뛰어나게 소대(昭代)의 명신(名臣)이 되었으며, 청요(淸要)한 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뜻은 분화(粉華) 밖에 있었고 옳음과 그름을 반드시 결단하면서도 자신은 당사(黨私)의 와중(渦中)을 멀리했었다. 남쪽의 백성들이 초가 삼간(草家三間)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음은 조열도(趙閱道)221) 의 간소(簡素)한 행정(行政)과 같고, 북쪽의 오랑캐들이 한마디의 잘못을 사과(謝過)하게 되었었으니 어찌 부정공(富鄭公)222) 이 헌납(獻納)한 간쟁(諫爭)만 못하겠는가? 바야흐로 은권(恩眷)이 융숭(隆崇)하여서는 조석(朝夕)으로 상가지우(商家之雨)가 되어졌고, 약령(弱齡)이 넘기 전에 13차례나 구양공(歐陽公)223) 처럼 소장(疎章)을 올렸었다. 드디어는 급류(急流)에서 물러나 멀리 가버리는 심정(心情)에서 더욱 고산(高山)을 우러러보는 중망(重望)을 지니게 되었었다. 임학(林壑)으로 돌아간들 어찌 대궐을 사모하는 정성을 망각하겠는가? 창상(滄桑)을 격어 왔기에 마침내 보신(保身)하는 지혜를 증험하게 된 것이었다.
신축년224) 에 협복(叶卜)한 날에 당하여는 오히려 필마(匹馬)로 낙양(洛陽)에 들어오기를 지체했었지마는, 선조(先朝)에서 세속을 독려하여 다스릴 적에 이르러서는 특히 일사 부정(一絲扶鼎)의 표장을 내리게 되었었다. 그 명량(明良)이 서로 만나게 되는 성사(盛事)에 미쳐서는 양암(諒闇)225) 에서 처음으로 입근(入覲)하는 것이 더욱 두드러져서, 얼굴을 알기 바랐었는지라 은례(恩禮)가 상격(常格)보다 뛰어나게 되었고, 손을 잡고서 눈물 지으니 상하(上下)의 지성(至誠)이 집중되었다. 20여 년 만에 다시 수문(脩門)에 들어왔을 적에는 원로(元老)가 백발(白髮)에도 단심(丹心)이 변함이 없는 것이 반가웠고, 탑전(榻前)의 자리에서 앙면(仰勉)했던 하나의 중(重)자는 여타 사람들의 천언 만어(千言萬語)가 번거로운 것임을 깨닫게 했었다. 비록 서로 정지(情志)가 통하여 되도록 치사(致仕)하고 쉬려는 간청을 따라 주었었지만, 풍기(風期)226) 가 밀물(密勿)했었기에 두텁게 의비(倚毗)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야외(野外)에서 거룻배를 멋대로 뛰웠으니 이미 가기로 한 뜻을 비록 막을 수 없었지만, 교악(喬嶽)처럼 진수(鎭守)한들 또한 어찌 잠운(潛運)하는 공력이 없었겠는가?
무신년227) 봄의 잠복된 반란 때에는 기미를 먼저 알고 질년(耋年)의 늙은이로 풀 속을 발섭(跋涉)하여 고급(告急)했었다. 군흉(羣凶)들이 삼도(三道)가 연합한 기세이었으니 호흡(呼吸) 사이에 박두한 위태를 차마 말할 수 있었겠는가마는, 하루에 5사(舍)228) 의 길을 달려 왔었으니 충분(忠憤)이 격발(激發)했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오직 일찌감치 음모(陰謀)을 부서뜨리어서 역적들의 간담(肝膽)이 절로 싸늘해졌을 뿐 아니라, 또한 재빨리 천토(天討)를 거행하였음은 그의 큰 계획을 힘입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구름이 흩어져버리고 번개가 없어지듯이 한 첩보(捷報)가 바로 고슴도치 털이 일어서듯 벌 떼가 모이듯 할 때에 있었는데도, 극력 원훈(元勳)을 사양하여 청렴한 지조가 더욱 현저해지게 되었다. 친제(親製)하여 내린 사자(四字)는 어필(御筆)이 유신(維新)하기만 하여, 과연 전대(前代)에 자릉(子陵)229) 을 포양(褒揚)한 것과 같은 것이고, 마침내 후세의 높은 운대(雲臺)의 공렬(功烈)과 부합되는 것이었다. 정방(貞坊)의 보각(寶閣)은 운한(雲漢)의 특이한 광채처럼 찬란하고, 심도(沁都)의 고범(孤帆)에는 각건(角巾)차림의 행색(行色)이 표연(飄然)했었다. 부운(浮雲)처럼 서권(舒卷)을 마음대로 하다가 대성(大星)의 정망(精芒)이 갑자기 떨어져버리듯 하였는데, 90의 질년(耋年)에 귀진(歸眞)하여 과연 신선(神仙)과 멀지 않게 되고, 십행(十行)의 선뢰(宣誄)는 덕업(德業)을 더없이 징험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아! 노성한 원로의 유풍(遺風)이 아득하기만 한데, 나 소자(小子)가 이 거창한 기업(基業)을 맡게 되어 답답하기만 하다. 유광(流光)이 쉽사리 가버려 거려(居廬)의 상기(喪期)가 이미 끝나고 중월(中月)이 어느새 다가와 태묘(太廟)에 합체(合禘)하는 의례(儀禮)를 장차 거행하게 되었다. 오직 이 신종(愼終)하고 추원(追遠)하는 일에는 유종(侑從)이 더없이 중요한 것인데, 혹시라도 사직(社稷)을 부지(扶持)하고 시대를 바로잡아 간 현자(賢者)가 아니고선 어찌 묘간(妙簡)을 받게 되겠는가? 이에 온 나라의 공론을 물어보건대 이에 삼조(三朝)의 독인(篤人)에게 돌아갔었다. 이리하여 경(卿)을 영종 대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아! 풍운(風雲)을 상상(想像)하노라니 감개(感慨)가 더해지게 되고, 약사(禴祀)를 살펴 보아 잘못이 없게 하겠노라. 권우(眷遇)할 그 당시에 소치(召致)한 뜻이 언제나 근면하셨었으니, 봉위(奉衛)하게 된 오늘날에 어찌 유명(幽明)이 다르게 될 리가 있겠는가? 바라건대 군신 일체(君臣一體)의 명인(明禋)을 흠향하며 영원히 만년토록 명우(冥佑)를 내릴지어다."
하였다. 【지제교 정지검(鄭志儉)이 지어 올렸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을 〈배향한〉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양암(諒闇)에서 3년 상제(喪制)를 마치니 이에 승부(陞祔)하는 욕의(縟儀)를 거행하게 되었고, 일덕(一德)의 명성이 있는 신신(藎臣)을 찾아내어 배식(配食)하는 이전(彛典)을 거행하는 것이다. 예법(禮法)에 있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기에 종향(從享)의 발열에 참여케 했다. 오직 경(卿)은 미옥(美玉)·정금(精金) 같은 자품과 대하(大厦)의 동량(棟樑) 같은 재국(材局)을 지녔었다. 대대로 충효(忠孝)를 전승(傳承)해 오기에 부형(父兄)의 유풍(遺風)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몸에 안위(安危)를 패복(佩服)하여 일찍부터 공보(公輔)의 중망(重望)을 짊어졌었다.
국가의 흥망(興亡)에 관한 조짐에 있어서 권권(眷眷)하였고 민심의 향배(向背)에 관한 기미에 있어서 근근(勤勤)했었다. 울연(蔚然)히 사림(士林)들의 추앙하는 바가 되었었으니 어찌 가부지친(葭莩之親)230) 으로만 대했겠느냐? 더러는 곤직(袞職)에 잘못이 있게 될까 두려워하며 진실로 요(堯)·순(舜)의 도리가 아닌 것은 진달(陳達)하지 않았었다. 그 용지(容止)와 성기(聲氣)의 사이를 살펴 보면 참으로 화락(和樂)한 군자(君子)이었고, 헌가(獻可)하고 체부(替否)하게 될 적에 당하여는 진실로 의연(毅然)한 대장부이었다.
군얼(群孼)들이 흉계를 부리는 때를 당해서도 구사(九死)하기로 맹세하고 후회하지 아니하여, 영요(嶺徼)에서 갖가지 풍상(風霜)을 겪었으니 참소하는 사람들의 서로 무함한 것을 차마 말할 수 있었겠으며, 자발(髭髮)이 부강(涪江)에서 보다도 더 나았었으니 정력(定力)이 더욱 확고(確固)했음을 증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옥(寶玉)이 불이 지나간 뒤에도 온전하였으니 더욱 비궁(匪躬)231) 의 정성을 다한 것이고, 금구(金甌)232) 로 개현(改絃)233) 하던 처음에 매복(枚卜)하였으니 진실로 가액(加額)하고 바라는 마음에 맞게 되었다. 장차 《춘추(春秋)》의 대법(大法)을 신장(伸張)해 가고 홀로 천지의 떳떳한 대경(大經)을 붙잡아 세우게 되었었다.
입조(立朝)한 40년 동안의 사업이 오직 정군덕(正君德)·명교화(明敎化)의 6자(字)이였었고, 연석(筵席)에 나와서 수백 마디를 진달한 주차(奏箚)는 오로지 변성무(辨聖誣)와 엄징토(嚴懲討)에 관한 한 단서에 있었다. 같은 조정에 충신(忠臣)과 역신(逆臣)이 섞이어 진출(進出)했을 적에는 목욕 재계하고서 토죄(討罪)하기 청하였고, 훈유(薰蕕)234) 는 한 그릇에 담길 수 없는 법이기에 거취(去就)를 걸고서 항쟁했었다. 평생 동안 당언(讜言)하기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아! 귀역(鬼蜮)들의 화살이 그치게 될 때가 없었고, 간골(奸骨)들이 문득 죽기도 전에 싸늘해지게 되니 비록 석독(螫毒)을 가지고도 또한 나에겐 어찌 할 수 없게 되었었다.
무신년235) 에 역란(逆亂)이 일어난 때에 당해서야 비로소 일에 앞선 명감(明鑑)을 탄복하게 되었고, 계축년236) 에 휴퇴를 고한 뒤에 대궐을 향하여 사모하는 정성이 풀리지 아니하여, 한평생의 지조가 시종(始終) 변함 없었고 단충(丹衷)이 평탄할 때나 험악할 때에도 다름 없었다. 어느 해엔가 귀감(龜鑑)을 놓치는 한탄이 생기어 고굉(股肱)으로서의 전포(展布)를 마치지 못하게 되고, 지금도 가목(稼木)의 재해를 통탄스럽게 여겨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사업(事業)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용호(龍虎)의 인물이 가버리자 오래도록 진항(秦巷)에서 절구질을 파하게 되었고,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지게 되자 그만 정호(鼎湖)237) 에서 궁검(弓劒)을 안게 되었었다. 장차 태묘(太廟)에 승부(陞祔)하는 의례(儀禮)를 거행하려고 곧 길신(吉辰)을 가리었다.
유좌(侑座)할 현자(賢者)를 논하건대 그 누가 원로(元老)에 참여하게 되겠는가? 하물며 선조(先朝)에서 일찍이 좌우(左右)에 두려고 했었으니, 돌아보건대 신도(神道)에도 유명(幽明)의 차이가 없을 것으로 여긴다. 이에 경(卿)을 영종 대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아! 국가의 전례(典禮)를 그대로 준행(遵行)하고 보니 경(卿)의 공렬(功烈)이 더욱 현저해졌다. 생전(生前)에도 이미 풍운(風雲)처럼 제회(際會)하여 소융(昭融)했었으니 신후(身後)에도 향화(香火)를 올리어 포숭(褒崇)하는 것이 합당하다. 군신(君臣)이 똑같이 일체(一體)가 되었으니 길이길이 의관지유(衣冠之遊)에 같이 모시고, 천추(千秋)토록 분필(芬苾)을 흠향하며 거듭거듭 임우(霖雨)의 보좌(輔佐)가 될지어다. 더욱 바라거니와 영령(英靈)은 소격(昭格)하여 한없이 종방(宗邦)에 명휴(冥休)를 내리라."
하였다. 【지제교 심유진(沈有鎭)이 지어 올렸다.】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을 〈배향한〉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길일(吉日)에 승부(陞祔)하는 예의(禮儀)를 거행하여 막 상제(祥制)가 끝나게 되고, 청조(淸朝)에 배식(配食)하는 특전(特典)을 차리어 원신(元臣)을 종향(從享)하였다. 아! 명량(明良)이 그 당시에 서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기에 오늘날 제례(祭禮)에 있어서도 함께 참여케 한 것이다. 오직 경(卿)은 산하(山河)의 간기(間氣)이고 동량(棟梁)인 위재(偉材)이었다. 문장(文章)은 정금(精金)·미옥(美玉)과 같아 젊은 나이에 연계방(蓮桂榜)에 장원하였고, 풍의(風儀)는 서린(瑞麟)·상봉(祥鳳)과 같아 청명(淸名)이 오죽비(梧竹扉)에 울리었다. 위포(韋布) 때부터 1백 년이 되도록 국가를 병들게 하는 근원을 근심하여 범문정(范文正)처럼 의수(醫手)가 되기 원하였고, 경악(經幄)에 있으면서는 붕당(朋黨)을 타파하는 만언(萬言)의 상소를 올리며 여대방(呂大防)처럼 유독 편당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뭇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속에 특립(特立)하고 있다가 드디어 두 차례나 외방(外方)으로 내침을 받았었다.
성조(聖朝)에 오극(五極)의 다스림을 세우는 때를 당하여는 종신(宗臣)도 일덕(一德)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임을 가상하게 여기시고서, 일찍이 ‘붕당이 되어 사사로이 경알(傾軋)하는 짓을 함은 반드시 국가에 화를 끼치게 되고야 말 일이다.’고 하시고, 이에 언론(言論)이 화평(和平)한 사람임을 들어 한결같이 시사(時事)를 더 맡기며 효과를 내도록 하시었었다. 사원(詞垣)을 맡아보고 오병(五兵)을 거느리니 그 근본은 윤길보(尹吉甫)처럼 문신(文臣)이자 무신(武臣)이었고, 전관(銓官)을 거치어 삼사(三事)로 승진(陞進)하였으니 그 제우(際遇)는 제갈 공명(諸葛孔明)처럼 어수(魚水)와 같은 관계가 되었다.
왕실(王室)의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서 폐부(肺腑)처럼 의탁하는 소임을 겸했었고, 무신년238) 의 효경(梟獍)의 발란을 감정(戡定)하여 산려 하대(山礪河帶)의 맹세를 더하게 되었었다. 매양 평소에 청렴과 검소를 지켜 온 마음으로 권요(權要)를 겸손하게 사피(辭避)하는 뜻을 깊이 간직하고서, 간절하고 진지한 장독(章牘)으로 여러 차례 훈척(勳戚)의 혐의를 인피(引避)했었고 계합(契合)을 소융(昭融)하여 드디어 안위(安危)에 관한 책임을 지고는, 산함 감신(酸醎甘辛)의 사람들이 귀일(歸一)하도록 조제(調劑)하느라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을 다하였고 동서 남북(東西南北) 어디에도 편파(偏頗)하는 것이 없어 대공 지정(大公至正)했었다. 한치규(韓稚圭)처럼 정홀(整笏)하고 서서 국가의 사세가 반석(盤石)과 태산(泰山)같이 안정되게 만들고, 사마광(司馬光)처럼 형평(衡平)을 유지하여 조정에 삭당(朔黨)이니 촉당(蜀黨)이니의 싸움이 가라앉게 했었다. 비록 풍파(風波)가 서로 부딪치어도 지주(砥柱)의 표석(標石)을 흔들게 하지 못하고, 비록 수화(水火)처럼 현수(懸殊)한 사이도 도야(陶冶)해 가는 그의 솜씨를 피하지 못하게 되었었다. 이러므로 출장 입상(出將入相)하는 수삼(數三) 년 동안에 탕평(蕩平)을 거의 8, 9분(分)이나 성취하게 되어, 자못 온 세상이 투실(鬪室)의 무기를 멈추고 또한 군공(羣工)들이 추거(推車)하는 길에 나서게 되었었다.
아! 50년 동안의 질륭(郅隆)한 교화(敎化)도 영원히 건중(建中)하는 성모(聖謨)를 남기게 되고 그 한두 신하들이 동인 협공(同寅協恭)하는 공력이 있게 된 것도 또한 창시(創始)하기 주창(主唱)하는 의논에 의한 것이었다. 오직 세운(世運)이 바야흐로 일변(一變)하게 되어 한탄스럽게도 경(卿)의 뜻이 중도(中道)에서 마치지 못하게 되어, 유장(遺章)에 위안(威顔)을 뵐 수 없게 되었음을 한탄하였음은 진실로 근외(謹畏)하는 본성(本性)에서 연유한 일이었고, 중신(中宸)에서 계방(季方)을 대할 적마다 눈물을 흘리셨음은 존몰(存沒)의 길이 달라진 사정임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과인(寡人)의 몸이 큰 기업(基業)을 지승(祗承)함에 당하여는 양필(良弼)의 유풍(遺風)을 아득히 생각하게 되었었다. 익실(翼室)의 세월이 여러 차례 바뀌게 될 적마다 어떻게 상로(霜露)의 비정(悲情)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기미(箕尾)의 정령(精靈)이 멀어져버렸지만 임우(霖雨)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기만 하다.
이번에 태실(太室)에 승부(陞祔)하는 성례(盛禮)를 거행하게 되었기에 마땅히 유좌(侑座)를 정하는 이장(彛章)이 있어야 하거니와, 진실로 고굉(股肱)같은 합덕(合德)한 신하가 아니고선 어찌 분필(芬苾)을 함께 흠향하는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의 보좌(補佐)들을 차례로 세어 보건대 신린(臣隣)들이 없은 것은 아니나, 선조(先朝) 조봉(遭逢)이 가장 성대하였기는 경(卿)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경을 영종 대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아! 훈업(勳業)이 더욱 빛날 수록 전례(典禮)도 잘못됨이 없어야 했다. 증상(烝嘗) 때마다 변두(籩豆)를 들고 모시어 군신 일체(君臣一體)가 되고, 전각(殿桷)에 척강(陟降)할 적마다 시립(侍立)하여 풍운(風雲)처럼 재회(再會)할찌어다. 바라건대 정상(精爽)이 의귀(依歸)하면서 평소처럼 완연(宛然)하게 종위(從衛)하고, 영구히 춘추(春秋)의 향화(香火) 때마다 유좌(侑座)하여 우리 자손과 여민(黎民)을 보우(保佑)할찌어다."
하였다. 【지제교 임시철(林蓍喆)이 지어 올렸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를 〈배향한〉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제사에는 배유(陪侑)하는 예절이 중요한 것이기에 옛적의 전장(典章)대로 거행하고, 풍운(風雲)처럼 제회(際會)하셨던 시절을 감모(感慕)하여 그 중에 양보(良輔)를 가리어 올리었다. 현자(賢者)는 임금이 아니면 배식(陪食)하지 않는 법이고, 한 가문(家門)은 나라와 기쁨을 같이하게 되었다. 오직 경(卿)은 우리 왕국(王國)의 신신(藎臣)이고 상문(相門)의 현명한 자손이다. 정강성(鄭康成)239) 과 같이 오로지 학문만 한 젊은 나이에 경학(經學)을 호위(護衛)하느라 항쟁하는 말을 하였고, 범충선(范忠宣)240) 처럼 가문(家門)의 명성을 계승해 가면서 국가를 빛내는 문예(文藝)를 독차지하였음은 여사(餘事)이었다. 심사(心事)는 고인(古人)들에게 물어보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어 율신(律身)을 청렴 소박하며 근신 겸공하게 하였고, 재식(才識)은 당세(當世)를 구제해 가기에 여유가 있어서 치용(致用)함에 총명(聰明)하고 연달(練達)하였다. 아랫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미 높은 여망(輿望)을 지니었고, 삼조(三朝)를 섬기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신축년241) 과 임인년242) 의 여러 사람들과 당적(黨籍)을 연결하고서 양옥(良玉)이 불타게 될 것을 겁내었고 동남(東南) 일대에서 적봉(賊鋒)을 막아내면서는 퇴파(頹波) 속에 지주(砥柱)가 되었었다. 비록 시운(時運)은 여러 차례 파평(陂平)으로 변하였으나 성의(聖意)의 권주(眷注)243) 가 더욱 근면하게 되었었다. 웅번(雄藩)244) 과 탁지(度支)245) 에 두루 시용(試用)되면서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에 있어서 그의 능통한 재주를 폈고, 천관(天官)246) 과 사마(司馬)247) 에 번갈아 있으면서는 인물(人物)을 전형(銓衡)하는 데는 정직한 도리를 고수(固守)하였으며, 질종(秩宗)248) 을 맡아서는 오래전부터 배워 온 것을 저버리지 않았고, 관각(館閣)에 등용되어서는 손양(遜讓)하는 뜻이 오직 확고(確固)했었다. 반근 착절(盤根錯節)249) 속에 있어서도 뛰어난 공적을 나타내니 성심(聖心) 이 특별히 간택하게 되었고, 임금을 보좌하거나 은택을 펴게 하는 데에 큰 직책을 맡았었기에 여망이 일치하게 되었었다.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기미에 밝게 살피어 사충(四忠)의 억울함을 신설(伸雪)하는 데에 의리를 앞세웠고, 산함(酸醎)을 조제(調劑)하는 즈음에 어근버근하다 보니 백변(百變)의 간난(艱難)을 겪으며 자신은 늙어버렸었다. 광필(匡弼)은 한결같이 충성(衷誠)에서 나온 것이기에 성주(聖主)께서 그의 숨김이 없는 것을 칭찬하셨고, 모유(謨猷)는 반드시 경학(經學)에 근본한 것이기에 동조(同朝)에서 상고할 수 있음을 힘입게 되었다. 융성하게 원우(元祐)250) 때의 완인(完人)처럼 되어 옛적의 영광전(靈光殿)251) 처럼 우뚝하게 되었었다. 연석(筵席)에서는 자교(慈敎)를 송전(誦傳)하게 되어 연촉(蓮燭)252) 의 특수한 영광(榮光)과 흡사하게 되고 비단에 초상을 그리고 찬(贊)을 쓰도록 명했었으니 어찌 운대(雲臺)의 성사(盛事)만 못하겠는가? 한두 신하들이 정충(貞忠)을 같이한 처지에서 권비(眷毗)를 받은 것이 그를 앞질러 나올 사람이 없었고, 50년 동안의 질륭(郅隆)한 다스림 때에 거의 절반이나 균축(勻軸)253) 을 맡아 보았었다. 사사(謝事)를 윤허(允許) 받기를 청할 나이가 되어서는 물러나기를 구하는 소심(素心)을 이루게 되었고, 사후(死後)에 은졸(隱卒)254) 의 음신(音信)이 이르렀는데 상사(喪事)에 임하는 구례(舊例)를 하문(下問)하시게 되었었다. 그가 한 사업을 고찰해 보면 간책(簡策)에 분명하게 실려 있고, 그와의 제우(際遇)를 말한다면 처음에서 끝까지 변함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번에 황조(皇祖)에 승부(陞祔)하는 때를 당하였기에 따라서 서사(西戺)에 배유(配侑)하는 전례(典禮)를 닦아야 했다. 은서(殷書)를 고찰해 보건대, 종향(從享)을 함은 숭보(崇報)하는 길이 이에 의존(依存)하게 되어서이었고, 또한 이에 주관(周官)에도 공이 있는 자에게 대증(大烝)255) 을 지낸다고 말하였음은 이런 전례를 중히 여겨서인 것이다. 신어(神御)를 받들고 묘정(廟庭)에 들어갔을 적에 마치 하늘에 계시는 영령(英靈)을 소명하게 뵙는 것 같고 동덕(同德)의 사람을 가리어 묘정에 배향(配享)하는 일은 적격자를 신중하게 가리는 도리를 다해야 했다. 따라서 대중의 공론이 모두 이 석보(碩輔)를 추대했었으니 마땅히 오늘날에 그의 종공(宗功)에 보답하는 것이므로, 이에 경(卿)을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게 되었다. 아! 약사(禴祀)256) 를 이성(利成)하고 나니 붙들 수 없는 사극(駟隙)257) 속에 애통이 간절하기만 하고, 배위(陪衛)하는 예식을 거행하고 나니 어렴풋이 어수(魚水)가 거듭 화합하게 되는 듯하다. 계합(契合)은 유명(幽明)의 차이가 없을 것이어서 부앙(俯仰)하노라니 감창(感愴)이 더욱 깊어지기만 한다. 천추(千秋)토록 혈식(血食)이 끊어지지 않으니 명신(明神)이 흠격(歆格)하게 되길 바라며, 다 같이 군신 일체(君臣一體)가 되어 음즐(陰騭)하게 되기 바라노라."하였다. 【지제교 김희(金憙)가 지어 올렸다.】
의식(儀式)대로 행사(行事)하였는데, 그 축문(祝文)에 이르기를,
"거룩하신 우리 성조(聖祖)께서는 탕평책(蕩平策)에 뛰어나셨습니다. 대덕(大德)은 꼭 장수(長壽)하는 법이라 팔질(八袟)을 향유(享有)하셨습니다. 공렬(功烈)은 오직 소저(昭著)하였고 은덕(恩德)은 곧 널리 펼치었습니다. 전조(前祖)에 광영(光榮)이 더해지고 후손에게 은택(恩澤)이 펼치게 하여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우셨는데, 〈하늘이〉 무정하게도 강할(降割)하여 아득히 먼 데서 진유(眞遊)하시게 되었습니다. 비록 대상(大祥)과 담사(禫祀)를 마치기는 했지마는 애정(哀情)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시일에 맞추어 승부(陞祔)하여 일정한 예의(禮儀)대로 따랐습니다. 아! 우리 문모(文母)께서 생존해 계시는 그날 양광(揚光)하시다가 달이 먼저 어두워지듯 선어(仙馭)하시었는데 의덕(懿德)의 짝이 었습니다. 오직 고위(考位)나 비위(妣位)께서는 어디나 계시는 듯한데, 명을 받드시며 일체(一體)가 되셨기에 똑같이 태실(太室)에 제부(禘祔)하였습니다. 우리 열조(列祖)에게 승부하고 나니, 소목(昭穆)이 차례로 정연(整然)하게 되었습니다. 변두(籩豆)가 이미 차려지고 종고(鐘鼓)도 장엄하기만 합니다. 영구히 경사(慶事)가 있게 하여 거듭 한없이 내려 주소서. 훈호 처창(焄蒿悽愴)258) 한데 남아 있는 애통이 아직도 간절하기만 합니다. 이 자리를 강감(降監)하시면서 형작(泂酌)을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예전(禮典)을 끝내고 나서 환궁(還宮)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69]체제(禘祭) : 임금이 조상에 제사하는 제사의 이름.
- [註 170]
영릉(寧陵) : 효종.- [註 171]
부암(傅巖) : 은(殷)나라의 현신(賢臣)인 부열(傅說)이 숨어 있었다는 암혈(巖穴).- [註 172]
추성(鄒聖) : 맹자.- [註 173]
고정 부자(考亭夫子) : 주자.- [註 174]
인경(麟經) : 《춘추》.- [註 175]
어수(魚水) : 물고기와 물과의 관계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친한 사이.- [註 176]
철식(腏食) : 여러 신(神)을 제향할 때 각 신을 동시에 아울러 제사지내는 것.- [註 177]
무후(武侯) : 한(漢)나라 제갈양(諸葛亮).- [註 178]
신장(宸章) : 임금이 직접 쓴 문서, 또는 편지.- [註 17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180]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註 181]
삼종(三宗) : 효종·현종·숙종.- [註 182]
상산 사호(商山四皓) : 진(秦)나라 말년 전란(戰亂)을 피하여 섬서성(陝西省) 상산(商山)에 은거한 네 사람의 백발 노인. 곧 동원공(東園公)·하황공(夏黃公)·녹리 선생(用里先生)·기리계(綺里季). 후에 모두 한(漢)나라 혜제(惠帝)의 스승이 되었음.- [註 183]
한기(韓琦) : 북송(北宋)의 명재상. 영종(英宗)을 후사로 세워 위국공(魏國公)이 되고, 다시 신종(神宗)을 세워 시중(侍中)이 되었음.- [註 184]
야도(野渡) : 시골의 나루터.- [註 185]
구 추밀(寇樞密) : 송(宋)나라 태종 때 사람 구준(寇準).- [註 186]
전 참정(錢參政) : 송나라 고종(高宗) 때 사람 전양신(錢良臣).- [註 187]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188]
각건(角巾) : 처사(處士)나 은자(隱者)가 쓰는 두건.- [註 189]
기린각(麒麟閣) :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기린을 얻고서 지은 각. 선제(宣帝) 때에 곽광(霍光) 등 공신 11인의 초상을 이 곳에 걸어 두었음. 인각(麟閣).- [註 190]
운대(雲臺) : 후한(後漢) 명제(明帝)가 전세(前世)의 공신(功臣)을 추념하여 장수 28인의 초상을 그리게 한 대(臺)의 이름. 운각(雲閣).- [註 191]
육경여(陸敬輿) : 당나라 덕종(德宗) 때 사람 육지(陸贄).- [註 192]
조 승상(趙丞相) : 송나라 고종 때 사람 조정(趙鼎).- [註 193]
범 문정(范文正) : 송나라 인종(仁宗) 때 사람 범중엄(范仲淹).- [註 194]
여급공(呂汲公) : 송나라 영종(英宗) 때 사람 여대방(呂大防).- [註 195]
희령(熙寧) : 송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註 196]
원풍(元豊) : 송나라 신종의 연호.- [註 197]
원우(元祐) : 송나라 철종(哲宗)의 연호.- [註 198]
목묘(穆廟) : 선조(宣祖)의 사당.- [註 199]
문순(文純) : 이황(李滉).- [註 200]
육합(六合) : 천지와 사방.- [註 201]
피사(詖辭) : 편벽된 말.- [註 202]
이윤(伊尹) : 은(殷)나라의 명상(名相).- [註 203]
여상(呂尙) : 주초(周初)의 명상, 태공망(太公望).- [註 204]
감반(甘盤) : 상(商)나라 고종(高宗) 때의 현신(賢臣).- [註 205]
와신 상담(臥薪嘗膽) : 섶에 누워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고자 고생을 참고 견디는 일. 춘추 시대 오왕 부차(夫差)가 월왕 구천(句踐)을 쳐서 부왕의 원수를 갚고자 매양 섶 속에 앉아서 신고(辛苦)를 하였으며 또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쳐서 회계(會稽)의 치욕을 씻고자 쓸개를 핥으며 보복을 잊지 않았다는 고사(故事).- [註 206]
이폐(螭陛) : 궁전의 섬돌.- [註 207]
창오(蒼梧) : 순(舜)임금의 능이 있는 곳. 임금의 승하를 뜻함.- [註 208]
방훈(放勳) : 요(堯)를 가리킴.- [註 209]
중화(重華) : 순(舜)을 가리킴.- [註 210]
비궁(閟必) : 종묘.- [註 211]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212]
의릉(懿陵) : 경종.- [註 213]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註 214]
비창(匕鬯) : 세자의 지위 또는 그 직책.- [註 215]
한기(韓琦)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의 현상(賢相).- [註 216]
범중엄(范仲淹) : 송나라 인종때의 현상.- [註 217]
단서(丹書) : 죄안(罪案).- [註 218]
문조(文祖) : 요(堯)의 시조(始祖).- [註 219]
욕일(浴日) : 국가에 큰 공이 있음.- [註 220]
이극(貳極) : 왕세자.- [註 221]
조열도(趙閱道) : 송나라 신종(神宗) 때 사람.- [註 222]
부정공(富鄭公) : 송나라 신종 때 사람 부필(富弼).- [註 223]
구양공(歐陽公) : 송나라의 학자 구양수(歐陽修).- [註 22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225]
양암(諒闇) : 임금의 거상(居喪).- [註 226]
풍기(風期) : 임금과 신하 사이에 뜻이 서로 통함.- [註 227]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228]
사(舍) : 1사(舍)는 30리임.- [註 229]
자릉(子陵) : 후한(後漢) 광무제 사람 엄광(嚴光).- [註 230]
가부지친(葭莩之親) : 아주 엷은 교분(交分).- [註 231]
비궁(匪躬) : 한 몸의 이해를 돌아보지 않음.- [註 232]
금구(金甌) : 금구 복명(金甌覆名)의 준말로, 새로 재상을 임명하는 일.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재상을 선정하여 그 이름을 책상 위에 써 놓고 금사발로 가려 신하에게 맞추게 한 고사에서 온 말임.- [註 233]
개현(改絃) : 거문고의 가락을 고친다는 뜻으로, 법도를 고침의 비유.- [註 234]
훈유(薰蕕) : 향기를 내는 풀과 악취를 내는 풀로, 선(善)과 악(惡)을비유함.- [註 235]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236]
계축년 : 1733 영조 9년.- [註 237]
정호(鼎湖) : 황제(黃帝)가 죽은 곳.- [註 238]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239]
정강성(鄭康成) : 이름은 현(玄). 후한(後漢)말의 대학자.- [註 240]
범충선(范忠宣) : 이름은 순인(純仁). 송나라 철종(哲宗) 때 사람.- [註 241]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242]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243]
권주(眷注) : 은총.- [註 244]
웅번(雄藩) : 강성한 번진(藩鎭).- [註 245]
탁지(度支) : 호조.- [註 246]
천관(天官) : 이조(吏曹).- [註 247]
사마(司馬) : 병조 판서.- [註 248]
질종(秩宗) : 예관(禮官).- [註 249]
반근 착절(盤根錯節) : 서린 부리와 얼크러진 마디라는 뜻으로, 복잡하여 처리하기 곤란한 일의 비유.- [註 250]
원우(元祐) : 송나라 철종(哲宗)의 연호.- [註 251]
영광전(靈光殿) : 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아들 공왕(恭王)이 건립한 궁전.- [註 252]
연촉(蓮燭) : 연꽃 모양의 촛불. 당(唐)나라 선종(宣宗) 때 영호 도(令狐綯)가 한림(翰林)으로 있었는데, 금중(禁中)에서 야대(夜對)하면서 임금이 수레와 연촉을 보내어 원(院)에서 돌아오게 한 고사.- [註 253]
균축(勻軸) : 정치를 하는 권리.- [註 254]
은졸(隱卒) : 임금이 죽은 공신에게 애도의 뜻을 나타내는 일.- [註 255]
대증(大烝) : 겨울 제사.- [註 256]
약사(禴祀) : 봄 제사.- [註 257]
사극(駟隙) : 사마(駟馬)로 벽의 틈을 지나듯이 세월이 빠름을 비유함.- [註 258]
훈호 처창(焄蒿悽愴) : 향기가 올라가 신령(神靈)의 기(氣)가 사람을 엄습함.○辛酉/禘于太室。 躋祔英宗大王、貞聖王后于十三室。 眞宗大王、孝純王后于十四室。 前一日, 上具冕服乘輿, 詣明政門外之幄次。 通禮進詣孝明殿神座前, 啓請乘轝。 祔廟大祝, 奉神主, 安於神轝。 通禮又詣徽寧殿戶外, 啓請乘轝。 祔廟內侍, 奉神主, 安於神轝, 冊寶、敎命在前。 神轝出, 上就位祗迎, 乃乘輿隨之。 通禮進詣神轝, 啓請降轝乘輦。 大祝、內侍奉神主安於輦。 上降輿, 乘輦隨之。 宗親、文武百官, 以班序從焉。 初配享功臣位版, 住弘化門外之街東。 大王神輦出, 位版亦從焉。 遂進詣太廟及廟門外。 通禮詣神輦, 啓請降輦乘轝。 大祝ㆍ內侍奉神主, 安於轝。 上降輦, 乘輿隨之。 及幄次降輿, 入就神轝之左。 通禮詣神轝, 啓請降轝入幄。 大祝、內侍, 奉神主移安于幄次, 敎命、冊寶, 亦陳于幄內。 頃之, 眞宗大王、孝純王后神輦, 自延福殿至廟門外, 降輦陞轝。 上就位祗迎及幄次。 大祝、內侍, 奉神主移安于幄次, 竝如初儀。 宗親、文武百官, 就廟東門久序位。 上以冕服, 詣版位四拜, 遂入詣廟內, 奉審省器。 仍詣永寧殿亦如之。 還幄次, 改具遠遊冠、絳紗袍, 詣神門外, 省牲還幄次。 藥房三提調、諸承旨, 請宿戒于齊殿。 敎曰: "此我先大王之所嘗行也。 予小子, 其敢不遵承。" 中刻, 更以冕服, 奉審于御幄。 是日諸享官先入就位。 上具冕服入詣版位。 通禮進詣神幄, 啓請降座、乘轝、祔謁。 大祝、內侍, 奉出英宗大王、貞聖王后神主, 安于轝。 執禮前引由正門入, 至祔謁位, 開櫃安于褥席訖。 通禮進褥位之西北向跪, 啓以今吉辰英宗大王、貞聖王后祔謁, 仍東向啓, 請乘轝祔享。 大祝、內侍奉神主安于轝。 神轝旣陞, 大祝、內侍引至新室。 內侍奉門后神主, 安于座。 大祝奉大王神主, 安于座。 廟司率其屬, 各奉誥命、冊寶, 入置于案, 以次分列, 扇蓋如禮。 旣又奉眞宗大王、孝純王后神主, 祔謁入廟如上儀。 遂陞詣廟內, 奉審訖, 降復位。 以左議政宋時烈位版, 追配於孝宗大王廟庭。 以領議政金昌集ㆍ崔奎瑞、左議政閔鎭遠ㆍ趙文命、領議政金在魯位版, 配享於英宗大王廟庭。 讀敎官讀敎書:
王若曰: "殷七廟之可以觀, 肇稱不祧之禮。 舜五臣之於斯盛, 爰與從祀之儀。 方深霜露之餘哀, 冞結風雲之遐想。 粤昔寧陵之御極, 政勤商 巖之求賢。 時則有若文正公 宋時烈, 傑然以王佐之才, 出而爲聖代之端。 壁立氣像, 蓋是鄒聖氏後一人;海涵胸懷, 悉遵考亭夫子成法。 天地撑柱之義理, 一部麟經;君臣灑落之遭逢, 千載魚水。 消長在道, 將天未喪斯文; 顯晦關時, 公論不待百世。 第玆文廟腏兩廡之後, 尙闕武侯祀一體之規。 迺者宋諸生疏籲之言, 實感予意; 適當周太室禮祔之際, 若待今辰。 肆正第九室配食之班, 庸表廣百代契合之盛。 念我先朝五十年神化, 實賴當時一二臣同心。 領議政金昌集, 以安危可仗之材, 有生死不渝之志。 傳家素節, 炳大義於泰山、鴻毛; 爲國純忠, 煥宸章於丹心白髮。 力贊辛丑大策, 箚陳丁酉故規。 十行之慈旨親承, 殉國志決; 三宗之正脈獨護, 衛社功深。 慷慨臨命之詩, 不流涕非仁人、志士。 從容就義之烈, 將以愧爲臣者貳心。 漢商皓之調護儲皇, 何論逮事之未及;宋 韓琦之翊戴英廟, 固知侑坐之莫先, 故僉議之已同, 亦近例之可據。 領議政崔奎瑞風儀, 則若鸞鵠之峙;識慮, 則如蓍龜之靈。 野渡孤舟, 蔚乎寇樞密之宿望; 急流勇退, 超然錢叅政之高風。 逮戊申劇賊之圖凶, 賴當時元老之告急, 破三道連兵之勢。 孰爭公功? 想一絲扶鼎之褒, 有昭天鑑。 角巾歸第, 縱辭盡麟閣之勳, 寶墨揭楣, 足驗高雲臺之烈。 左議政閔鎭遠, 姿是珪璋、金玉, 材則柱石、棟樑。 陸敬輿之百牘經綸, 念國家之興喪; 趙丞相之一身去就, 係賢邪之是非。 前後苦心, 只是辨君誣一節。 平生藉手, 惟在明忠、逆大關。 公私休戚之與同王室肺腑, 進退憂樂之無間廊廟、江湖。 左議政趙文命黼黻彌綸之材, 酸醎調劑之手。 活國素志, 范文正之願爲良醫;匡時至誠, 呂汲公之獨無私黨。 每謂彼此朋比之禍, 必將滔天而燎原; 所以上下調停之論, 殆欲纓冠而被髮。 出入將相, 荷聖眷則偏隆;文章事功, 在輿誦而不泯。 領議政金在魯, 其心則謙愼淸素;以才則通練聰明。 操履端詳, 進止無尺寸之失;訏謨密勿, 精神及裙屐之微。 初聯黨籍於熙ㆍ豊, 士類恃以輕重; 終作完人於元祐, 明主托以腹心。 居輔相凡數十年, 望蔚朝野; 蓋事業難一二計, 澤在生民。 玆當躋祔之盛儀, 俱合升配之彝典。 想殷后一德之佐, 曰篤不忘; 稽周家元祀之文, 宜從與享。 庸循一國之公議, 俾侑二卣之明禋。 追穆廟之配文純, 瞻聆咸聳; 繼長陵之享群彦, 名碩滋多。 於戲! 衛英靈於在天, 旣克左右; 啓人於永世, 崇降福祥。" 【知製敎南鶴聞製進。】
王若曰。 聖廡之陞躋先正, 所以尊斯文;世室之追配宗臣, 所以揚盛烈。 爰修百年之曠典, 庸答一國之輿情。 予惟王政莫先於崇賢, 祀典尤愼於陟配。 若穆廟極從侑之選, 亦孝陵揭追享之儀。 非但迪簡在廷, 以道學爲重; 實惟咸秩從祀, 于邦國有光。 矧玆曠千載之遭逢, 詎緩同一體之典禮。 惟卿, 天下大老, 海東眞儒。 早從賢師, 淵源深而門路正; 丕闡聖學, 踐履篤而繩墨嚴。 地負海涵, 規模與朱子同揆; 山高岳峙, 氣像後孟氏一人。 集大成於群賢, 卓乎造道之極; 彌至剛於六合, 傑然蓋世之豪。 士風勵而師道尊, 到于今而遺愛; 邦禮正而詖辭息, 質諸古而無疑。 夫奚但一時之魁衡? 寔亦爲萬代之標準。 出處與伊、呂而相伯仲, 事業軒天地而曜日星。 斯以儒門不世出之姿, 克贊寧考大有爲之志。 甘盤處賓師之位, 粤自龍潛; 諸葛任討復之功, 爰托魚水。 當天翻地覆之後, 講義理於一部《春秋》; 感日暮道遠之歎, 贊志業於十載薪膽。 對揚謨烈, 尊中國, 而攘外夷; 扶植綱常, 正人心而明天理。 以言乎恩義, 則君臣ㆍ父子; 以言乎契合, 則腹心、股肱。 一襲貂裘, 他日風霜之與共; 獨對螭陛, 當時密勿之謨猷。 拚聖志而益勵, 水火之危衷; 奉睿略而期雪, 宇宙之深恥。 嗟! 大業之未半, 奄天崩之纏哀。 龍髯莫攀, 上天之仙馭已邈。 麟經獨抱, 中夜之血淚長沾。 白首初心, 皇明之日月尙戴; 蒼梧暮色, 寧陵之松栢空悲。 皇天不憖遺, 龍亡虎逝。 世事極變, 嬗狐恣鴟張。 萬古之正氣不磨, 猶然亂賊之知畏; 百世之定論以俟, 儘乎吾道之所存。 文廟之統緖相承, 惟是彰道德之大; 朝家之貤贈雖擧, 無以揚契遇之隆。 顧縟儀未遑於先朝, 而曠禮, 式至于今日。 豈有擧國共公之議, 鬱而不伸? 抑亦聖祖於昭之靈, 慼焉有待。 肆予讀遺書, 而夙抱曠感; 緬偉烈, 而維懷永圖。 皇廟之御額初宣, 庸識江漢朝宗之義; 寶札之短跋新製, 蓋慕風雲際會之休。 惟玆追陞之儀, 卽是繼述之事。 爰講尊奉之道, 豈爲文拘? 若論曠絶之規, 可以義起。 玆以卿配享孝宗大王廟庭。 幽明罔間, 猗同心同德之臣; 位序是承, 嚴文正、文敬之烈。 夔、契贊勛、華之業, 功莫與儔; 周、召配文、武之庭, 禮宜可據, 旣表章之無減, 庶崇奉之有辭。 微盛德孰與斯焉? 殆天意若待今者。 於戲! 念四方瞻聆之曁, 莫不起欽; 顧寡昧尊慕之誠, 從此可展。 乾坤之正義未墜, 佇泰運之挽回; 光岳之精英尙留, 庶永命之陰隲。 迪我先王陟降, 保我子孫黎民。" 【知製敎金憙製進。】
王若曰: "三年躋祔, 《禮經》所以明昭穆之儀; 百世功宗, 聖王所以重褒崇之典。 眷焉英廟左右之良弼, 孰膺閟宮配侑之令章? 惟卿, 文正、文忠有子有孫。 純忠大節, 澟乎前寧人家傳; 白髮丹心, 煥然先神后宸奬。 際殊遇而處廊廟, 黼黻王猷; 扶正論而闢詖邪, 領袖士類。 凡係宗國之安危、緩急, 奮然擔當; 至若一身之禍福、死生, 恥爲計較。 猗歟! 辛丑大策, 誰敢甲乙其論? 當懿陵違豫之辰, 國勢危如一髮; 講《羲經》 《明离》之象, 大義炳若三光。 十行之慈旨親承, 實扶三宗血脈; 一封之聯箚繼進, 式遵丁酉故規。 宗祊賴安, 支大廈於一木; 匕鬯有主, 緜寶籙於千秋。 豈意包藏禍心之徒, 廼生搖動國本之計? 韓、范之樹立卓犖, 勒加詆誣; 堯、范之授受光明, 公肆沮戲。 北門潛入, 噫! 彼凶將欲何爲? 南芒遠投, 蓋其意欲殺乃己。 白地鍜鍊, 計實憯於戕賢; 蒼天照臨, 志彌堅於殉國。 終焉爲先王一死, 足以愧人臣貳心。 悲切臨命之詩, 國人皆涕; 從容取義之蹟, 臣道攸程。 天理本自好還。 宿冤竟得昭洗。 宸鑑俯燭, 回皎日而照覆盆; 幽枉夬伸, 滌丹書而被華袞。 啓日輝月輪之慶, 元功其誰?; 當陰消、陽長之時, 國是乃定。 倘微宗臣保佑之力, 詎致文祖祈永之休? 四百年基業靈長, 實賴擎天之手; 五十載治化巍蕩, 罔非浴日之功。 若論其翼扶貳極之忠, 不啻昭融之契合; 何必待魚水一堂之樂, 方稱明良之遭逢。 際玆澹澹之期, 益想斷斷之悃。 陞祔之縟禮奄迫, 餘哀廓然; 侑坐之舊典宜遵, 遺烈卓爾。 江祠將四相之節, 孰非同德之純臣; 廟庭重一體之儀, 所貴首功之元輔。 非惟予志之先定, 抑亦僉議之詢同。 若是其班, 我朝之近例可據; 罔俾專美, 有宋之前事足徵。 人或謂: ‘護儲之功, 有異逮事當日。’ 予則知存社之續, 亶合從祀先朝。 顧眇躬之遭時, 亦旣備經艱險; 慨民彝之將晦, 實多曠感忠貞。 爰遵彝章, 用侈崇禮, 玆以卿配享英宗大王廟庭。 於戲! 翊保偉節, 知無間於幽明; 愛戴初心, 庶長衛於陟降。 籩豆之享載備, 式表丹忠; 盤泰之基永綏, 佇待玄祐。 【知製敎金憙製進。】
領議政崔奎瑞敎書:
王若曰: "太室擧陞祔之禮, 甫訖三年之制; 四所從侑享之列, 爰揀一德之賢。 實循輿情, 用侈殊典。 惟卿, 鸞停、鵠峙, 玉潤、金精。 風範端凝, 自是廊廟上器; 氣宇明朗, 殆非烟火中人。 其識慮, 則布蓍、灼龜之靈;其文章, 則冠冕、珮玉之度。 早値明陵盛際, 蔚爲昭代名臣。 淸要遍敭, 而志在紛華之外; 是非必折, 而身遠黨私之中。 南民頌三閒之謠, 恰似趙閱道簡易之政;北虜謝一言之過, 何減富鄭公獻納之爭? 恩眷方隆, 朝夕作商家之雨; 弱齡未暮, 十三上歐陽之章。 遂以退急流之遐情, 益負仰高山之重望。 歸去林壑, 豈忘戀闕之忱; 閱來滄桑, 終驗保身之智。 當辛丑叶卜之日, 尙遲匹馬入洛之行; 逮先朝勵俗之治, 特垂一絲扶鼎之奬。 若其明良際遇之盛, 尤著諒闇入覲之初。 識面是求, 恩禮絶於常格; 執手以泣, 上下藹然至誠。 廾餘載更入修門, 嘉元老白髮丹心之無改; 一重字仰勉前席, 覺他人千言萬語之爲煩。 雖情志交孚, 勉循余致之懇; 而風期密勿, 不替倚毗之隆。 野舟自橫, 縱莫奪已行之志; 喬嶽能鎭, 亦豈無潛運之功? 治戊春莽伏之炳幾, 在耋年草跋之告急。 群凶連三道之勢, 忍言迫呼吸危; 一日踔五舍之程, 可見爲忠憤激。 不惟陰謀之早破, 賊膽自寒; 抑亦天討之亟行, 石畫是賴。 故其雲掃、電滅之捷, 卽在蝟起蜂合之時。 力亂元勳, 淸節冞著; 親製四字, 御墨維新。 果然前日同子陵之褒, 竟符後來高雲臺之烈。 貞坊寶閣, 燦乎雲漢之異光; 沁都孤帆, 飄然角巾之行色。 浮雲自任其舒卷, 大星遽墜其精芒。 九耋歸眞, 果神仙之不遠; 十三宣誄, 尤德業之可徵。 嗟! 老成邈矣遺風, 閔小子, 罹玆巨創。 流光昜邁, 滕廬之喪期已終; 中月奄臻, 周廟之合禘將擧。 惟是愼終追遠之擧, 莫重侑從; 倘非扶社救時之賢, 曷膺妙簡? 玆詢一國之公議, 爰屬三朝之篤人。 玆以卿配享英宗大王廟庭。 於戲! 想風雲而增感, 瞻禴祀而罔愆。 眷遇當時, 意常勤於召致; 奉衛今日, 理豈間於幽明? 庶享一體之明禋, 永垂萬年之冥佑。 【知製敎鄭志儉製進。】
左議政閔鎭遠敎書:
王若曰: "諒闇畢三年之制, 聿修陞祔之縟儀; 藎臣求一德之譽, 爰擧配食之彝典。 禮則然矣, 從與享之。 惟卿, 姿是美玉精金, 材則大廈隆棟。 世傳忠孝, 近襲父兄之遺風; 身佩安危, 早負公輔之重望。 眷眷於邦家興喪之兆, 勤勤於民心向背之幾。 菀爲士林所推, 豈以葭莩親相待? 或恐袞職有闕, 苟非堯、舜道不陳。 觀其容止、聲氣之間, 展也樂只君子。 及至獻可替否之際, 允矣毅然丈夫。 逮群孽之肆凶, 矢九死而靡悔。 風霜備嘗於嶺徼, 忍言讒口之交誣; 髭髮益勝於涪江, 可驗定力之冞確。 寶玉全經火之後, 益殫匪躬之誠; 金甌卜改絃之初, 允叶加額之望。 將伸《春秋》之大法, 獨扶天地之常經。 立朝四十年事業, 只以正君德、明敎化六字; 登筵屢百言奏箚, 專在辨聖誣、嚴懲討一端。 忠逆雜進於同朝, 沐浴而請; 薰蕕難容於一器, 去就以爭。 讜言不負其平生, 嗟! 蜮弩無時可已; 奸(骨)〔猾〕 遽寒於未死, 雖螫毒亦奈我何? 當戊申起逆亂之辰, 始服先事之鑑; 至癸丑告余退之後, 靡懈戀闕之忱。 素操不渝於始終, 丹衷罔間於夷險。 何年起亡鑑之嘆, 展布未終於股肱; 至今痛稼木之災, 事業不朽於耳目。 龍亡虎逝, 久矣秦巷之罷舂;地坼天崩, 遽爾鼎湖之抱劍。 將行躋廟之禮, 載涓吉辰。 若論侑座之賢, 孰與元老? 況先朝嘗欲置於左右, 顧神道想無間於幽明。 玆以卿配享英宗大王廟庭。 於戲! 國典式遵, 卿烈愈著。 風雲際會, 旣昭融於生前; 香火薦禋, 合褒崇於身後。 同君臣於一體, 長侍竝冠之遊; 享芬苾於千秋, 重作霖雨之佐。 尙冀英靈之昭格, 永垂宗邦之冥休" 【知製敎沈有鎭製進。】
左議政趙文命敎書:
王若曰: "吉日擧陞祔之儀, 甫訖祥制; 淸朝重配食之典, 庸躋元臣。 猗! 明良相遇於當時, 故祭禮與同於今日。 惟卿, 山河間氣, 棟梁偉材。 文章, 如美玉、精金, 早歲魁蓮桂之榜; 風儀, 若瑞麟、祥鳳, 淸名動梧竹之扉。 自韋布而憂百年病國之源, 范文正願爲醫手; 在經幄而進萬言破朋之疏, 呂大防獨無黨心。 特立衆咻之中, 遂被再黜于外。 逮夫聖朝建五極之治, 嘉乃宗臣同一德之休。 嘗謂: ‘朋鹿傾軋之私, 必禍國家而後已。’ 乃以言議和平之故, 一埤時事而責成。 主詞垣而將五兵, 其本則文武吉甫; 由銓地而進三事, 其遇則魚水孔明。 作王室柱石之臣, 兼之以肺腑之托; 戡戊申梟獍之亂, 加之以帶礪之盟。 每以平昔廉約之心, 深懷權要巽避之意。 章牘懇摰, 屢引勳戚之嫌; 契合昭融, 遂佩安危之責。 酸醎甘辛之同歸調劑, 苦心血誠; 東西南北之無所偏陂, 大公至正。 韓稚圭之整笏, 國勢奠盤泰之安; 司馬公之持衡, 朝著靖朔蜀之鬨。 雖風波相搏, 而不能撓砥柱之標;雖水火懸殊, 而不能逃陶甄之手。 是以出入將相數三歲, 幾乎成就蕩平八九分。 殆一世止鬪室之戈, 亦群工趨推車之路。 猗歟! 五十年郅隆之化, 永貽建中之謨; 若其一二臣寅協之功, 亦賴倡始之論。 惟世運方回於一變, 嗟卿志未卒於半途, 遺章恨威顔之莫瞻, 亶由謹畏本性。 中宸對季方而每涕, 可見存沒殊私。 迨寡躬祗承丕基, 而遺風緬懷良弼。 翼室之歲月屢改, 那堪霜露之悲? 箕尾之精靈云遐, 益切霖雨之想。 玆當躋室之盛禮, 宜有侑座之彝章。 苟非股肱合德之臣, 曷膺芬苾同享之典? 輔佐歷數於昔日, 非乏臣隣; 遭逢最盛於先朝, 無出卿右。 玆以卿配享英宗大王廟庭。 於戲! 勳業愈煥, 典禮罔愆。 陪烝嘗於豆籩, 君臣一體; 侍陟降於殿桷, 風雲再逢。 精爽庶有依歸, 從衛宛如平素。 永侑春秋香火, 以保子孫黎民。 【知製敎林蓍喆製進】
領議政金在魯敎書:
王若曰。 芬苾重陪侑之禮, 庸修舊章; 風雲感際會之期, 聿陟良輔。 賢非后不食, 家與國同休。 唯卿, 王國藎臣, 相門賢子。 鄭康成專門之學, 早歲抗衛經之言; 范忠宣承家之譽, 餘事擅華國之藝。 心事質古人無愧, 律已以淸素謹謙。 才識, 濟當世有餘; 致用, 則聰明練達。 在下位, 而已負巍望。 事三朝, 而匪懈一心。 聯黨籍於辛、壬諸人, 劫火良玉; 捍賊鋒於東南一帶, 砥柱頹波。 雖時運屢變陂平, 而聖意冞勤眷注。 雄藩、度支之歷試, 展通才於錢穀、甲兵; 天官、司馬之迭居, 秉直道於銓衡人物。 典秩宗則宿昔之學不負。 登館閣則遜讓之志惟堅。 著茂績於錯節盤根, 上心簡在; 膺丕責於舟楫霖雨, 輿望翕然。 斤斤乎陰陽消長之幾, 義先雪四忠之枉; 戞戞乎酸醎調劑之際, 身老歷百變之艱。 匡拂一出於衷誠, 聖主稱其無隱; 謨猷必本於經術, 同朝賴以有稽。 蔚爲元祐完人, 巋然靈光古殿。 慈敎誦傳於筵席, 恰似蓮燭之殊榮; 像贊命題於畫綃, 奚讓雲臺之盛事? 一二臣共貞之地, 荷眷毗無出其前; 五十載郅隆之治, 秉勻軸殆居厥半。 年至謝事之請許, 遂求退素心; 身後隱卒之音至, 問臨喪舊例。 考其事業, 則昭載簡策。 言其際遇, 則弗替始終。 玆當皇祖躋祔之辰, 載修西所配侑之典。 若稽殷書之從與享, 崇報斯存; 亦越周官之詔大烝, 典禮攸重。 奉神御而入廟, 如覩昭于天之靈; 簡同德而配庭, 要盡愼其人之道。 肆衆論咸推碩輔, 而今日宜酬宗功。 玆以卿配享英宗大王廟庭。 於戲! 禴祀利成, 慟切駟隙之難及; 陪衛禮擧, 怳若魚水之重歡。 契合罔間於幽明, 感愴冞深於俯仰。 千秋血食之不絶, 冀格明神; 一體君臣之與同, 庶贊陰隲。" 【知製敎金憙製進。】
行事如儀。 祝文曰:
皇矣我祖, 巍乎蕩蕩。 大德必壽, 八秩以享。 功惟昭著, 恩則普被。 光前裕後, 高天厚地, 不弔降割, 眞遊夐邈。 祥禫雖闋, 情則難抑。 陞祔以時, 遵禮之常。 繄我文母, 在昔揚光。 月馭先晦, 懿德之配。 維考維妣, 洋洋如在。 承命從體, 同躋太室。 祔我烈祖, 昭穆秩秩。 籩豆旣陳, 鍾鼓斯皇。 其永有慶, 申鍚無疆。 焄蒿悽愴, 餘哀猶切。 降監在玆, 庶歆泂酌。
禮畢, 還宮。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