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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5권, 정조 2년 3월 15일 을해 5번째기사 1778년 청 건륭(乾隆) 43년

사은 겸 진주 정사 채제공 등이 사폐하는 주문을 올리다

사은 겸진주 정사 채제공(蔡濟恭)·부사 정일상(鄭一祥), 서장관(書狀官) 심염조(沈念祖)를 소견하였다. 사폐(辭陛)하였는데, 그 주문(奏文)에 이르기를,

"삼가 위로는 황제(皇帝)의 은덕에 감사하고 아래로는 과오를 호소하는 일에 관하여 진주(陳奏)합니다. 본년(本年) 3월 20일에 진하 배신(進賀陪臣) 하은군(河恩君) 이광(李垙) 등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오게 되어 예부(禮部)의 해당 절목을 승준(承准)하건대, ‘건륭(乾隆)120) 42년121) 12월 29일에 조선국(朝鮮國)의 내자(來咨) 및 주접(奏摺) 1건을 접준(接准)하여 본부(本部)를 경유하여 대신 공진(恭進)하였다가 성지(聖旨)를 받들건대, 「조선 국왕(朝鮮國王)이 아뢴 것을 보았다. 해국(該國)에 불행한 일이 있었는데 해국의 왕이 판리(辦理)하기를 더없이 윤협(允協)하게 했었으니, 짐(朕)이 마음에 아름답게 여기며 위로된다. 주접(奏摺) 내용에 조사(措辭)가 해부(該部)의 체식(體式)에 맞지 않게 된 곳에 있어서는 국왕에게 이자(移咨)하여 알게 하라. 그 주청(奏請)한 바, 내지(內地)의 변경(邊境)에 있어서 해국의 왕을 위하여 여당(餘黨)들을 힐문해서 잡아 달라고 한 한 절목은 이미 성경 장군(盛京將軍)과 산동 순무(山東巡撫)에게 유시하여 착실하게 힘써 타판(妥辦)하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흠차(欽此)하여 본부(本部)에서 자세히 원주(原奏) 내용을 보건대, 저군(儲君) 또는 국왕 사위(國王嗣位) 등의 어구(語句)에 있어서는 식례(式例)에 합당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개 이런 어구는 해본국(該本國)에 있어서 자칭(自稱)을 하는 것은 본래부터 금하지 않는 것이지만, 위에 고하는 말에다 서술(敍述)함은 체제에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또 해국(該國)이 이에 앞서서 주청한 세손(世孫)을 세우는 것과 국왕이 작위를 잇는 것은 모두가 천조(天朝)에 명(命)을 청하여 칙지(勅旨)를 그대로 받들어 준행(遵行)한 것에 관계되었으니, 저군이니 사위니 하는 어구는 결단코 주독(奏牘)에 열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황제(大皇帝)께서 해국(該國)은 본래부터 공순(恭順)하다고 일컬어 온 것에 따라, 조사(措辭)가 합당치 않게 된 것을 그 외방(外邦)이 중조(中朝)의 체식(體式)을 알지 못함에서 연유한 것으로 하여 또한 아직은 깊이 추구(推究)하시지 않고, 특별히 본부(本部)에 유시하기를 해국왕에게 이자(移咨)하여 사위한 뒤에는 일체의 표문(表文)이나 주문(奏文)의 사의(辭意)에 있어서 되도록 마음먹고 점검(點檢)하여 다시는 어그러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조선 국왕에게 이자(移咨)하게 된 것이니, 이대로 받들어 시행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한 등인(等因)이었습니다.

신이 흠차(欽此)하여 흠준(欽遵)하면서 가만히 살펴보건대, 소방(小邦)이 대대로 번봉(藩封)을 지켜 오는데 전후에 내린 황제의 은덕이 골수(骨髓)에 젖게 되었고 감해 주고 늦추어 주고 하는 은전(恩典)도 매양 특별히 돌보아 주는 데에서 나왔으며, 공유(控籲)하는 진주(陳奏)에서 문득 굽어 부응(副應)하심을 입어 은택이 신의 몸에까지 미쳤는데, 봉작(封爵)을 도습(叨襲)하게 된 것도 오직 황지(皇旨)에서 나온 것이고, 고인(誥印)이 휘황(煒煌)하게 된 것도 오직 황지에서 나온 것이며, 사뢰(賜賚)가 문득 풍성하게 된 것도 오직 황지에서 나온 것이어서, 차례로 전대(前代)에 조우(遭遇)가 성대했던 것을 가려 보더라도 같은 것이 있지 않았습니다. 신이 비록 미욱하여 도수(叨守)한 지 오래지는 않았습니다마는, 그러나 공북(拱北)하는 정성은 병이(秉彛)의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고 향상(享上)하는 체례(體例)는 가정(家庭)의 교훈에서 체득한 것입니다. 무릇 주어(奏御)하는 및 문자(文字)에 있어서는 따로 하나의 관사(官司)를 설치하여 신료(臣僚)들을 가리어 맡겨 놓고, 매양 사행(使行) 때에 당하면 기일에 앞서 찬술(撰述)하도록 하였다가 배신(陪臣)들이 일제히 모여서 8, 9차례씩 사준(査準)하도록 하였으며, 분향(焚香)하고서 배표(排表)하고 교외(郊外)까지 나가서 사신(使臣)을 전송하곤 하여, 치경(致敬)하고 진례(盡禮)하기를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은, 한결같이 성법(成法)을 감히 황폐하게 떨어뜨릴 수 없어서입니다. 어찌 감히 글을 보내는 즈음에 조금이라도 미진하게 함이 있어 스스로 그 위월(違越)하는 죄를 받기를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오직 우리 소방(小邦)은 양지(壤地)가 궁벽하고 외지며 견문(見聞)이 좁습니다. 견문이 좁으면 비례(非禮)인 것을 예로 여기게 되고 궁벽하고 외지면 불경(不敬)을 공경으로 여기게 되는 법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대조(大朝)에서 천지처럼 부재(覆載)해 주면서 선악(善惡)을 다같이 길러 주고, 산수(山藪)처럼 포용하여 하유(瑕瑜)를 다같이 갈무리 주지 않는다면, 이 소방(小邦)이 자연히 허물과 벌에 이르게 되어 반드시 행복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이 소방의 역적들을 기형(譏詗)하여 잡는 일이 비록 옛 규례에 의거하였으나 감히 주청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말이 지루하고 번독(煩瀆)스러워서 잗닫 데 관계되기에 바야흐로 참외(僭猥)하고 유람(踰濫)한 짓이었음을 들어 진실로 두렵기만 했었는데, 바로 황상(皇上)께서 특별히 명칙(明勅)을 내리어 성경(盛京)과 산동(山東) 등의 곳에 포유(布諭)하여 몰래 빠져 나온 자를 사힐(査詰)하고 숨었다 들어온 자를 반핵(盤覈)해 잡아내심을 힘입어, 황상의 위엄이 한번 전파되자 변경의 관문이 엄숙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이 척지(尺紙)의 조명(詔命)으로 이 소방을 덮어 주고 가리워 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북쪽을 바라보며 아홉 번이나 머리를 조아려도 이미 그 맺힌 감격의 사사 심정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올린 바 주문(奏文)에 있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구(字句)의 인습된 잘못을 스스로 체제(體制)의 격식에 어그러지는 것에 돌렸으니, 비록 어떠한 견책(譴責)을 받게 되더라도 감히 피할 수 없게 된 것인데, 지금 우리 황상께서 원방(遠方)을 회유하는 덕으로 만물을 덮어 주는 인(仁)을 펼치시어, 오직 죄를 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바로 해부(該部)에 명하여, 비유하여 알도록 하고 회유(誨諭)하여 앞으로를 경계하게 하셨으니, 옛적부터 번방(藩邦)으로서 천조(天朝)의 이처럼 특이한 은전를 입게 된 일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명이 내리던 날에 소방의 신민(臣民)들이 머리를 맞대고 두 손 모아 축하하며 더욱 황상의 은사(恩賜)가 상례의 격식에 월등함을 우러르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포황(包荒)122) 하시는 큰 도량이 더욱 넓어질수록 황송하고 부끄러워지는 사사 심정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왜냐하면 소방으로 하여금 만일에 중외(中外)의 의식(儀式)을 널리 고찰하게 되었고 문자(文字)의 체단(體段)을 환히 알게 되었다면 어찌 그런 일이 있게 되었겠습니까? 오직 위항(委巷)의 경기(擎跽)123) 인지라 밝은 조정의 진퇴(進退)하는 절차에 어그러지게 되고, 궁곡(窮谷)의 언사(言辭)인지라 공문(公門)의 달순(達順)하는 도리를 잃게 됨으로 인연하여, 마침내 스스로 격식에 어그러지는 처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신이 이에 은덕을 음미하고 의리를 두렵게 여기면서 한가로이 편안히 있을 수 없기에, 삼가 감히 배신(陪臣)을 다시 차정(差定)하고 날짜를 잡아 행장(行裝)을 꾸려 길을 떠나보내어, 성곤(誠悃)을 털어놓고 숭고(崇高)함을 번독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천조(天朝)의 간곡(懇曲)하게 감싸 주시는 은총을 송축하고 한편으로는 소방의 잘못하고 망령된 짓을 한 죄를 추회(追悔)하고 있습니다. 신이 머리를 들고 운천(雲天)을 바라보며 긍황(兢惶)하고 송률(悚慄)한 마음이 지극해짐을 견딜 수 없습니다. 위로는 황은(皇恩)에 감사하고 아래로는 잘못을 호소해야 하는 사리로 인연하여, 삼가 이렇게 갖추어 주문(奏聞)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6면
  • 【분류】
    외교-야(野)

  • [註 120]
    건륭(乾隆) : 청(淸)나라 고종(高宗)의 연호.
  • [註 121]
    42년 : 1777 정조 원년.
  • [註 122]
    포황(包荒) : 거칠고 더러운 것을 싼다는 뜻으로, 남을 포옹함을 뜻함.
  • [註 123]
    경기(擎跽) : 국궁부수(鞠躬俯首)하는 신하의 예.

○召見謝恩兼陳奏正使蔡濟恭、副使鄭一祥、書狀官沈念祖。 辭(陞)〔陛〕 也。 奏文曰:

謹奏。 爲仰謝皇恩, 俯訟辜愆事。 本年三月二十日, 進賀陪臣河恩君 李垙等, 回自京師, 承准禮部節該。 ‘乾隆四十二年十二月二十九日, 准朝鮮國來咨竝奏摺一件, 經本部代爲恭進, 奉聖旨覽王奏。 「該國, 有不幸之事, 而該國王所辦, 極爲允協, 朕心嘉慰。 至摺內措辭, 有不合該部式之處, 咨王如之。 其所請, 內地邊境, 爲該國王詰緝, 餘黨一節。 已諭盛京將軍山東巡撫, 實力妥辦矣。」 欽此本部細看原奏內, 有儲君及國王嗣位等語, 未爲合式。 蓋此等語, 在該本國, 自稱原屬不禁, 而敍以上告, 則乖體制。 且該國前此請立世孫及國王嗣爵, 皆係請命天朝, 遵奉勑旨而行。 可見儲君及嗣位之語, 斷不宜列於奏牘。 大皇帝因該國素稱恭順, 其措辭不合, 自由外邦, 未識中朝體式, 亦姑不深究。 特諭本部, 咨知該國王, 嗣後一切表奏、辭意, 務留心檢點, 毋再違舛。 爲此合咨朝鮮國王, 遵奉施行可也。’ 等因。 臣欽此, 欽遵竊照。 小邦, 世守藩封, 前後皇恩, 淪浹肌髓, 蠲弛之典, 每出特眷, 控籲之奏, 輒蒙曲副, 施及臣身。 叨襲封爵, 唯皇旨。 誥印煒煌, 唯皇旨。 賜賚便蕃, 亦唯皇旨。 歷選前代遭逢之盛, 未有若斯者也。 臣雖顓蒙, 叨守未久。 然其拱北之誠, 根于秉彝之天。 享上之體, 得之家庭之訓。 凡諸奏御文字, 別設一司, 簡畀仍僚。 每當使行, 前期撰次, 齊會陪臣, 八九査準。 焚香而拜表, 出郊而送使。 其所以致敬盡禮, 靡不用極者, 一惟成法, 罔敢荒墜。 則豈敢於遣辭之際, 有一毫之未盡, 甘自取其違越之罪也哉? 唯是小邦, 壤地僻陋。 見聞諛寡, 諛寡則以非禮爲禮;僻陋則以非敬爲敬。 倘微我大朝如天地之覆燾, 而善惡竝育;如山藪之包涵, 而瑕瑜俱藏, 則小邦之自底郵罰, 必無幸矣。 顧玆小邦逆孽之詗緝, 雖據古例, 敢有所請。 然語則支蔓, 事涉瀆屑, 方以替猥踰濫, 是恐是懼。 乃蒙皇上特降明勑, 布諭於盛京 山東等處, 使之査詰其潛逸, 盤獲其竄入。 皇威一播, 邊關震肅。 唯此尺紙詔命, 其爲小邦之帡幪, 果如何哉? 北望九頓, 已不勝其感結之私。 而至其所上奏文, 不覺字句之襲謬, 自歸體制之違式, 雖被譴何所不敢辭。 今我皇上, 以柔遠之德, 推庇物之仁, 不唯不加之罪。 乃命該部, 譬解誨諭, 以警來後。 從古藩邦得此異數於天朝者, 未知有幾。 命下之日, 小邦臣民, 聚首攅祝, 益仰皇賜之逈越常格也。 雖然, 包荒之大度愈恢, 惶愧之私心冞切。 何者? 使小邦若能博考中外之儀式, 通曉文字之體叚, 則豈有是哉? 祗緣委巷之擎跽, 乖明廷進退之節, 窮谷之言辭失公門, 達順之理, 終自陷於違式之科。 臣於是含恩畏義, 不遑寧處。 謹敢復差陪臣, 刻日裝發, 被露誠悃, 冒瀆崇高。 一以頌天朝曲庇之寵;一以追小邦謬妄之罪焉。 臣翹首雲天, 無任兢惶悚慄之至。 緣係仰謝皇恩, 俯訟辜愆事理。 爲此謹具奏聞。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6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