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임을 친국하여 특별히 석방하다
홍낙임(洪樂任)을 친국(親鞫)하여 특별히 석방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여러 차례를 아뢰어 홍낙임을 국문(鞫問)하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오래도록 따르지 않다가, 이날에 하교하기를,
"유신(儒臣)의 상소 내용에 ‘대계(臺啓) 가운데에 죄가 가벼운 자와 의아스러운 자는 소석(疏釋)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는 바로 나의 뜻과 맞는 것이었다. 만일 의아스러운 자를 논한다면 곧 홍낙임이 첫째일 것이니, 비록 역적들의 공초(供招)에 여러 차례 나왔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한 번도 그에게 물어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위(眞僞)를 알겠느냐? 이러기에 전후의 모든 역적들을 이미 모두 친히 국문했던 것이고, 또 결안(結案)을 받은 다음에 법을 시행했던 것은 곧 한 사람이라도 원통함을 안게 되거나 한 사람이라도 왕법(王法)에서 빠지게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만일에 분별해 내려고 한다면 어찌 소소하게 차마 못하는 마음에 구애할 것이 있겠느냐? 이미 자궁(慈宮)께도 품했으니, 홍낙임을 왕부(王府)로 하여금 즉시 잡아오도록 하라."
하였는데, 잡아온 다음에 금오(金吾)에서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이번의 이 거조(擧措)는 비록 부득이하여 하게 된 것이지마는, 이 시점에 혜경궁(惠慶宮)께서 마땅히 어떻게 생각하시겠느냐? 암매(暗昧)한 속의 일을 한 번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데도 마음에 차마 못하는 바가 있어서 지금까지 실현하지 못했었다.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만일에 친히 국문하지 않는다면 진위를 분변할 수 없게 되고 진위를 가려내지 못한다면 언제나 사람과 귀신의 관두(關頭)에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이런 뜻으로 자궁께 고하자 자궁께서도 또한 그렇게 여기셨으니, 오늘의 거조는 진실로 이런 때문이다."
하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등이 말하기를,
"이런 하교를 받들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감격스러운 눈물이 저절로 떨어지게 됩니다. 죄인에 있어서는 한 번 국문하지 않을 수 없음이 진실로 성상께서 분부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봉조하(奉朝賀)도 또한 도성(都城)으로 들어와 대명(待命)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매,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이 말하기를,
"도사(都事)의 말을 듣건대, 봉조하도 또한 그의 아들을 따라 달려오는데 미처 도성에 들어오지는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홍낙임은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제적(諸賊)과는 처지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천리(天理)를 따져 보고 인정(人情)을 참조해 보더라도 결단코 그럴 리가 없다."
하매,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그의 처지로 보더라도 이런 이치는 없을 듯싶습니다. 오늘 친히 국문해 보시면 그 진위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홍낙임을 잡아들이게 되자, 임금이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이 무슨 일인가? 참혹하여 차마 보지 못하겠다. 문사랑(問事郞)은 내려가서 먼저 이런 뜻을 말해 주라."
하니, 문사랑 심풍지(沈豊之)가 돌아와 아뢰기를,
"죄인이 하는 말이 ‘불초(不肖)하고 무상(無狀)한 이 몸이 만 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매, 이에 홍낙임에게 묻기를,
"너는 왕실(王室)의 구친(舅親)으로 가문이 대대로 받은 은덕이 또한 이미 망극(罔極)하게 되었는데, 무슨 억하 심정(抑何心情)으로 패악(悖惡)한 숙부(叔父)와 부동(符同)하고 요악(妖惡)한 심상운(沈翔雲)을 부추기는 짓을 하다가 국정(鞫庭)의 공초(供招)에까지 오르게 되었느냐? 이는 그 죄가 여러 다른 사람에게 비해 더욱 만 번 죽어도 합당하다. 항차 홍상길(洪相吉)의 무리는 더없이 음흉하고 극도로 악독한 흉계를 꾸미어, 비수(匕首)를 끼고 임금을 침범하여 추대(推戴)를 모의하기까지 했었는데, 너의 성명이 또 이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돌아보건대, 그 죄가 마땅히 어떻겠느냐? 국가에서 그 즉시 국문해야 함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면서도 오히려 이토록 은인(隱忍)해 온 것은 또한 뜻이 있어서이었으니, 은휘(隱諱)하지 말고 사실대로 정직하게 말하라."
하고, 문목(問目)을 독유(讀諭)하기를 끝내자, 하교하기를,
"오늘은 곧 그가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느냐의 관두(關頭)이니, 정신을 수습하여 상세하게 공술을 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홍낙임이 공술하기를,
"신의 일루(一縷)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이처럼 하문하시니 성은(聖恩)이 망극한데, 신이 감히 다 털어 고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부자(父子)는 죽음을 구제하기에도 부족하여 조정의 모든 일은 당초부터 감히 여문(與聞)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신은 사람됨이 성기고 졸렬하여 평소에 친지(親知)가 없었으니, 역적 심상운이 어찌 서로 알게 되었겠습니까? 진실로 신의 두 형이 정후겸과 미움이 쌓이어 장차 원수처럼 틈이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신이 부득이하여 정후겸을 만나러 갔었는데, 역적 심상운이 그 자리에 있으므로 함께 접화(接話)하게 되었었습니다. 이로부터 역적 심상운이 자주 찾아오게 되었고, 신도 또한 역적 심상운이 정후겸과 친근한 것 때문에 좋게 대우해 왔었습니다. 을미년097) 과거에 탁명(坼名)한 뒤에 역적 심상운이 갑자기 와서 신을 보았는데, 그 자리에 마침 손님이 있자, 역적 심상운이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입맛만 다시다가 마침내는 일어났고 창문 밖에서 소매 속의 간지(簡紙) 한 장을 꺼내어 신을 불러 보이었는데, 온 장에 그득한 말의 뜻이 모두 쓸데없는 소리인 사정(私情)에 편당하는 말이었기에 신이 책망하기를, ‘자네의 처지에서 감히 남을 논박하는 짓을 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역적 심상운이 신을 노려보다가 갔었습니다. 서유녕(徐有寧)의 상소가 나오게 되면서는 심상운이 다시는 남을 논박할 생각을 하지 않다가, 그 뒤에 심상운이 흉악한 상소를 투정(投呈)하고 나서는 드디어 바로 여덟 가지의 조목(條目)을 신에게 써서 보내 왔었는데, 그 여덟 가지 조목에는 각각 한두 글자나 혹은 서너 글자씩을 썼고, 따로 한 장의 종이에다 ‘물용외척(勿用外戚)’에 대한 말을 갖추 썼는데, 말이 신의 가문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상실(詳悉)하게 한 듯하여 신이 진실로 마음에 이미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그 뒤에 완전한 본고(本稿)를 구득해 보니 비록 신처럼 무식한 사람으로도 또한 흉참(凶慘)한 상소임을 알겠기에, 윤양후(尹養厚)에게 서찰(書札)을 써서 역적 심상운의 요악(妖惡)하고 흉참함을 말하여 그에게 잡아다가 국문(鞫問)할 것을 소청(疏請)하라고 권했었는데, 이 일은 윤양후의 형 윤상후(尹象厚)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신이 심상운의 서찰을 뒷날에 증거로 삼는 자료를 삼으려고 주머니 속에 깊이 간직하고서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종이가 모두 〈닳아서〉 털이 생겨나 있습니다. 만일에 하람(下覽)해 주신다면 한번 보고도 결판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매, 국문하기를,
"네가 윤상후와 대질(對質)한다면 굴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니, 공술하기를,
"대질한다면 굴하지 않을 것을 기필합니다. 하늘의 해가 위에서 비추고 있는데 어찌 감히 조금이라고 기망(期罔)하는 짓을 하겠습니까? 홍상길에 있어서는 신이 당초부터 면목(面目)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홍계능(洪啓能)의 집에도 또한 일찍이 오가지 않았었는데, 그 무리들의 흉악한 음모에 어떻게 참여하여 간섭하게 되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의 숙부가 복법(伏法)한 뒤부터 흉도(凶徒)들이 신의 가문을 폐족(廢族)으로 여기고서 문득 흉참(凶慘)한 일을 신의 집에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의 부자가 만일에 조금이라도 국가에 불충(不忠)한 짓이 있었다면, 만 번 죽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억하 심정으로 홍상길의 흉참한 모의에 참석하겠습니까? 또 신의 숙부가 이미 왕법(王法)을 촉범(觸犯)하게 되었기에, 비록 신 부자가 다만 밤중에도 비탄(悲歎)할 뿐이기는 했습니다마는, 어찌 감히 신의 숙부 일 때문에 국가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문득 신이 두 가지의 큰 죄가 있습니다. 하나는 심상운과 서로 친하게 된 일이고, 하나는 신이 불행하게도 폐족이 되어 역적 홍상길의 공초에 오르게 된 일인데, 이는 모두 신의 죄입니다. 만일에 신 부자가 금수(禽獸)가 아니라면, 이에 우리 전하(殿下)를 믿지 않고서 그만 도리어 홍상길·민홍섭(閔弘燮)의 무리와 함께 흉참한 음모에 참여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신에게 천지이시고 신에게 부모이십니다. 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전하의 은덕인데, 지금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기망하고 은휘(隱諱)하겠습니까?"
하였다. 공술이 끝나자, 임금이 김상철(金尙喆)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공술한 말이 마디마디 조리가 있다. 윗 조관은 살아 있는 윤상후로 증거를 대고 아랫 조관도 또한 모두 근거가 있어서 단정코 딴 뜻이 없는 것이니, 이제 다시 국문할 것이 없다."
하니, 김상철이 말하기를,
"공술한 말이 모두 조리가 있고, 또 살아 있는 윤상후를 원인(援引)한 것도 역시 증좌(證左)를 삼기에 족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삼사(三司)와 여러 신하들을 탑전(榻前)으로 다가오도록 명하여 눈물을 흘리며 하교하기를,
"내가 고로 여생(孤露餘生)으로 의지하는 바가 오직 자궁(慈宮)이신데, 지난해 가을 이후부터는 자궁께서 음식을 전부 물리치고 눈물로 날을 보내시면서, 항시 봉조하(奉朝賀)의 생전에 면결(面訣)하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애통하게 여기셨다. 매양 이런 분부를 받들게 될 적마다 나의 마음이 마땅히 어떠했겠는가? 대관(臺官)의 계사(啓辭)가 나온 지 이미 해를 넘기게 되었는데, 국법(國法)을 중히 여겨야 하는 도리에 있어 정지하도록 명할 수도 없고 또한 그런 꼴을 보고 싶지도 않아 지금까지 윤허를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부득이하여 이번의 거조(擧措)가 있은 것인데, 공술하는 말이 이미 모두 명백한 것이어서 따로 다시 물어야 할 단서가 없었으므로 이제는 장차 특별히 석방하여야 하겠다. 이 뒤로부터는 자궁께서도 다시 봉조하를 볼 날이 있게 되었고 나도 또한 자궁을 뵐 낯이 있게 되었으니, 오늘의 처분은 진실로 천리(天理)가 인정(人情)에 맞게 되고, 제방(隄防)하는 데 있어서도 더욱 굳건해서 손상되는 바가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매, 김상철(金尙喆) 등이 말하기를,
"그의 공술이 이미 너무도 명백하고 성상의 하교가 또 이처럼 간절하고도 측은하시니,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누가 감읍(感泣)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집법자(執法者)들이 청한 바는 곧 잡아다가 국문하자는 것이었는데, 왕법(王法)으로 논하더라도 또한 그 사람을 암매(暗昧)한 처지와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느냐의 관두(關頭)에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갖가지로 생각해 보았던 것인데, 딴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게 할 수 없었거늘, 하물며 봉조하(奉朝賀)의 아들이고 자궁(慈宮)의 지친(至親)에 있어서이겠느냐? 내가 등극(登極)한 이후에 불행히도 간난(艱難)한 때를 만나 흉참한 역적들이 무리로 나오게 되었었다. 이목(耳目)으로 친히 보거나 듣게 된 것이 아닌 것은 제번하고 모두 국청(鞫廳)을 차리고서 이리저리 힐문(詰問)하여 반드시 실정을 알아낸 다음에야 법을 썼던 것은 진실로 망령되이 죽이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여 그렇게 했던 것이다. 홍인한(洪麟漢)의 죄는 종사(宗社)에 관계가 있는 것이어서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처음에는 가볍게 가까운 지방에 귀양 보냈었다가, 윤태연(尹泰淵)의 상소를 올라오고 이상로(李商輅)의 글이 나옴에 당하여는 부득이하여 섬에다 위리 안치(圍籬安置)했었고 사사(賜死)하게 되었었다. 그의 죄를 용서하려는 것이 아니라, 곧 인명(人命)을 중히 여겨서이고 진장(眞贓)을 기다린 것이었다. 오늘 홍낙임을 친히 국문한 것도 어찌 그만둘 수 있는 것이겠느냐?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등전(謄傳)하는 고지(故紙)가 또한 이미 해를 넘기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차마 못하였고, 중간에도 측은하여 상심하다가 오늘날에야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크게 깨닫게 되었다.
아! 홍낙임의 일은 비록 여러 차례 역적들의 공초에 나오기는 했지마는, 그 근본을 추구(推究)해 보건대, 있는 듯하기도 하고 없는 듯하기도 하며 옳은 듯하기도 하고 그른 듯하기도 했었다. 만일에 한 차례 친히 국문해 보지 않는다면 비록 죄를 범한 바가 있더라도 어떻게 법대로 하게 되고, 만일에 이 일이 없었다면 또한 어찌 원통하고 번민하지 않겠느냐? 내가 정성(定省)하는 틈에 이런 뜻으로 자궁께 진품(陳稟)했었더니, 자궁께서 하시는 분부에도 또한 그렇게 여기시었다. 발포(發捕)하게 된 소이(所以)도 진실로 이래서이었다. 이제 공술하는 말을 들어보건대, 첫째는 심상운의 상소에 참여하여 관섭된 일이었는데, 마디마디 조리가 있는 것으로서 생존(生存)해 있는 윤상후를 증좌(證左)로 삼기까지 하였고, 둘째는 추대(推戴)를 공모(共謀)했다는 일이었는데, 단정코 딴 뜻이 없었던 것이고 원인(援引)한 것도 또한 모두 근리(近理)한 것으로서, 한갓 그 말만 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정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의 처지가 홍인한·정후겸과는 아주 다른 것이겠는가? 천리(天理)과 인심(人心)에서 찾아보더라도 진실로 그럴 리가 없는 것이었다. 비록 의사(疑似)한 흔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마음을 추구(推究)해 보아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는 것이겠는가? 아! 내가 고로 여생으로 오늘날까지 살아 있게 해 주신 것은 곧 자궁(慈宮)이시었다. 자궁께서 지난해 가을 이후로는 음식을 전연 물리치고 항시 눈물만 흘리시므로, 한 번이라도 우러러 뵐 적마다 심장과 간이 타는 것 같았다. 아! 자궁께서 이러하시게 된 소이는 곧 봉조하의 얼굴을 보지 못하여 그러시는 것이었고, 한갓 보지 못해서만이 아니라 장차 그의 생전에 면결(面訣)하지 못하게 될까 해서였다. 대저 천하(天下)에 옳지 않은 부모가 없는 법이니, 자궁께서 마음이 이러하신데 내가 비록 평소처럼 기거(起居)하며 억지로 언소(言笑)를 짓는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마음에 편안하셨겠는가? 밤중이면 매양 스스로 이르기를, 자궁께서 지탱하여 보존하게 되심은 또한 오직 내가 있어서인데, 내가 능히 한 가지 일이나 반 가지 일로도 자궁의 뜻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한갓 자궁의 마음만 상하시게 했으니, 참으로 이른바 ‘임금된 것이 즐거울 것 없다.’는 말은 바로 이를 이른 것이었다. 단단(斷斷)한 이 마음을 옥루(屋漏)나 알 바이지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인들 또한 어찌 다 알겠는가? 당초에 나의 뜻이 홍낙임을 한 번 친히 국문하여 흑백(黑白)을 판단하고 싶었지마는, 주저하게 된 소이는 또한 이때에 당하여 자궁의 마음이 더욱 생각을 하시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는 틈을 타 조용히 도달(導達)했더니, 자궁께서 울며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우리 아버지와 형제 동기간이 있기는 하나, 어찌 주상(主上)으로 하여금 이런 부득이한 거조(擧措)를 있게 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이런 거조가 아니면 또한 우리 아버지의 하늘에 사무치고 땅처럼 끝없는 원통함을 변명할 길이 없으니, 부디 바로 홍낙임을 한 번 국문하여 과연 죄가 있다면 비록 주륙(誅戮)한다 하더라도 내가 회한(悔恨)이 없겠고, 만일에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늙은 아버지를 뵐 날이 있게 될 것이며, 국가의 법기(法紀)에 있어서 조금도 손상될 것이 없겠고, 조정의 제방(隄防)에 있어서도 그다지 관련될 것이 없다.’고 하시었다. 소자(小子)가 눈물을 흘리며 분부를 받들고 이렇게 친히 국문하는 거조가 있은 것인데, 홍낙임이 과연 죄명(罪名)을 벗어버리게 되었으니, 단지 그의 깊은 억울함만 신설(伸雪)하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장차 자궁(慈宮)을 배알할 면목이 있게 되었으니, 홍낙임을 특별히 방송하겠다. 아! 나의 당초에 뜻은 어찌 홍낙임이 아무 일 없을 것을 생각했겠느냐마는 이제는 다행히 백방(白放)하게 되었으니, 이는 또한 자궁께서 슬퍼하시고 괴로워하신 마음으로 감동시켜 그렇게 된 것이다. 대저 이 일은 이미 역적 홍인한을 처분한 것과도 관계가 없는 것이고, 또한 홍계능(洪啓能)의 모의(謀議)에도 간섭되지 않은 것이니, 봉조하가 장차 자궁께 뵈는 날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봉조하가 이미 들어왔느냐?"
하매, 홍국영(洪國榮)이 주대(奏對)하기를,
"바야흐로 대궐 아래서 대명(待命)하고 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史官)을 보내 봉조하에게 유시하여 혜경궁(惠慶宮)에 입대(入對)하게 하라."
하였는데, 사관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봉조하가 말하기를, ‘신의 자식이 특별히 석방되었음은 진실로 하늘 같은 성상의 은덕에서 나온 것이기에 한없이 황송하고 감격스러워 주달(奏達)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신의 처지가 다시 수문(脩門)에 들어갈 가망이 만무하게 되어, 사관이 와서 소명(召命)을 전하는데도 추진(趨進)할 수 없으므로, 더욱 송구하고 위축되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사관이 무릇 세 차례나 오갔는데도 홍봉한(洪鳳漢)이 마침내 들어오지 않으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만일에 경(卿)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내가 장차 친림(親臨)하여 함께 들어오겠다. 이것이 어찌 신하인 경의 분수에 편안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하매, 그제야 홍봉한이 입시(入侍)했는데, 임금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경의 가문의 불행은 다시 말한들 무엇 하겠는가? 오늘 경을 보니, 나의 감회(感懷)를 억제할 수 없노라."
하니, 홍봉한도 또한 눈물을 흘리며 칭사(稱謝)하였다. 임금이 홍국영에게 명하여 장전(帳殿)에서 전교(傳敎)를 낭독하여 시위(侍衛)한 사람들도 모두 듣도록 하였다. 임금이 김상철(金尙喆) 등에게 이르기를,
"상신의 차자(箚子)에 즉시 비답을 내리는 것이 마땅했으나, 며칠 전에 경들이 《속명의록(續明義錄)》을 올린 차자에 아직까지 비답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이번 일로 상량(商量)하는 바가 있어서이었다. 대저 봉조하가 끝내 한 번도 자궁(慈宮)께 입대하지 못한 것은 이것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고, 만일에 이처럼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또한 제방(堤防)이 점점 해이(解弛)해질 염려가 없지 않을 일이었다. 이제는 역적 홍인한을 토죄(討罪)한 의리와는 판연(判然)하게 두 가닥이 되어, 의리가 더욱 밝아지고 제방이 더욱 엄격해지게 되었다."
하매,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분부하신 말씀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오늘날 하신 처분을 마땅히 《속명의록》의 끝 대문에 기재해 놓은 다음에야 온 세상이 효연(曉然)하게 알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또 탁지(度支)에 명하여 서울에다 홍봉한의 집을 사주도록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11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변란-정변(政變) / 왕실-비빈(妃嬪)
- [註 097]을미년 : 1775 영조 51년.
○壬子/親鞫洪樂任, 特釋之。 兩司屢啓請鞫樂任, 而上久不從。 是日敎曰: "儒臣疏中, 有臺啓中, 輕者、疑者疏釋之論, 此政合予意也。 若論其疑者, 卽洪樂任首也。 雖曰, 屢出於賊招, 而尙不一問於渠, 則何以知眞贗與否? 是以, 前後諸逆, 旣皆親問。 又捧結案後用法者, 卽不欲使一人抱幽枉, 一人漏王章也。 若欲分別, 何拘小不忍也? 旣稟慈宮, 洪樂任, 令王府, 卽爲拿來。" 拿來後, 金吾以聞。 上御肅章門, 謂大臣曰: "今者此擧, 雖出於不得已, 而是時惠慶宮當作何抱? 事之䵝昧者, 不可不一問, 而心有所不忍, 至今未果。 從容思之, 若不親問, 則眞贗莫卞。 眞贗莫卞, 則常在人鬼關頭矣。 予以此意, 告于慈宮。 則慈宮亦以爲然。 今日之擧, 良以此也。" 領議政金尙喆等曰: "承此下敎 不覺感淚之自零也。 罪人之不可不一問, 誠如聖敎矣。" 上曰: "奉朝賀, 亦入城胥命乎否也?" 都承旨洪國榮曰: "聞都事之言, 奉朝賀亦隨其子, 而馳來, 未及入城云矣。" 上顧大臣曰: "樂任則與麟、謙諸賊, 地處大有異焉。 求之天理, 參以人情, 決無是理也。" 尙喆等曰: "以渠地處, 恐無是理, 今日親問, 可決其眞贗也。" 及樂任拿入, 上揮涕曰: "此何事也? 慘不忍見矣。 問郞下去, 先言此意也。" 問郞沈豐之還奏曰: "罪人自言: ‘不肖無狀, 萬死無惜’ 云矣。" 乃問樂任曰: "汝以王室舅親, 家世受恩, 亦已罔極。 則抑何心術, 符同悖叔, 嗾出妖雲, 至發於鞫庭之招乎? 是其罪比諸他人, 尤合萬死。 況且相吉輩, 窮凶極惡之凶謀, 至於挾匕犯上, 謀議推戴。 而汝之姓名, 又出此招, 顧其罪當如何也? 國家非不知劃卽鞫問, 而尙此隱忍者, 意亦有在也。 其勿隱諱, 從實直告。" 讀諭問目訖。 敎曰: "今日, 卽渠人鬼關頭。 使之收拾精神, 詳細納供也。" 樂任供曰: "臣於一縷未絶之前, 有此下問, 聖恩罔極, 臣敢不罄竭以告乎? 臣之父子, 救死不贍, 朝廷凡事, 初不敢與聞。 況臣爲人踈拙, 素無親知, 則雲賊何以相知乎? 誠以臣之兩兄, 積忤厚謙, 將成讎隙。 故臣不得已往訪厚謙, 則雲賊在其座, 與之接話。 自是雲賊數相來訪, 臣亦以雲賊之親昵厚謙, 故善待之矣。 乙未科坼名後, 雲賊忽來見臣而坐。 適有客, 雲賊始有囁嚅狀, 終起立牕外, 出袖中一簡, 招臣示之。 滿紙辭意, 皆是鑿空黨私之說。 臣責之曰: ‘以子地處, 敢論人乎?’ 雲賊耽視臣而去。 及徐有寧之疏出, 而翔雲不復爲論人之計, 其後, 翔雲投呈凶疏, 遂卽書送八條於臣, 而八條各書一二字、或三四字。 別以一紙, 備書勿用外戚之說, 似以語屬臣家, 而詳悉也。 臣固已疑怪於心矣。 其後, 得見全本。 則雖以臣之無識, 亦知其爲凶慘之疏, 作書養厚, 言雲賊之妖惡凶慘, 勸其疏請拿鞫。 此事養厚之兄象厚, 亦知之矣。 臣以翔雲書, 欲爲他日證據之資, 深藏囊中, 以至于今, 紙皆生毛。 若蒙下覽, 則可以一見決矣。" 問汝與象厚對質, 則能不屈乎? 供曰: "對質則必不屈矣。 天日在上, 豈敢一毫欺罔乎? 至若相吉, 臣初不識其面目, 啓能之家, 亦未嘗往來。 則渠輩凶謀, 有何參涉之理乎? 自臣叔伏法之後, 凶徒輩以臣家爲廢族, 而輒以凶慘之事, 拖引臣家。 然臣之父子, 若有一毫不忠於國家, 則萬死無惜矣。 以何心腸, 參涉相吉之凶謀乎? 且臣叔旣犯王章, 雖臣父子, 但中夜悲歎而已。 豈敢以臣叔之故, 萠怨國之心乎? 抑臣有二大罪焉。 一則與翔雲相親也。 一則臣不幸爲廢族, 出於逆吉之招也。 此皆臣之罪矣。 臣之父子, 若非禽獸, 則不悖我殿下, 而顧反與相吉、弘燮輩, 同參凶謀乎? 殿下, 天地於臣, 父母於臣。 臣至今生存, 皆殿下恩, 則今豈敢一毫欺隱乎?" 供畢, 上顧尙喆曰: "所供, 節節有條理矣。 上款, 以生存之象厚爲證。 下款, 亦皆有據, 斷無他意, 今不必更問也。" 尙喆曰: "所供俱有條理, 且其援引生存之象厚者, 亦足爲證左矣。" 上命三司、諸臣進前, 涕泣下敎曰: "予以孤露餘生, 所依唯慈宮, 而自去秋以後, 慈宮飮啖全却, 涕淚度日, 常以不得面訣奉朝賀之生前, 爲至痛。 每承此敎, 予心當如何? 臺啓發已經年, 其在重國法之道, 不可命停。 亦不欲見其景像, 至今靳允矣。 今日不得已有此擧指, 而所供旣皆明白, 別無更問之端, 故今將特放。 自此以後, 慈宮復有見奉朝賀之日, 予亦有拜慈宮之顔。 今日處分, 允合於天理人情, 於隄防, 可謂益固, 而無所損矣。" 尙喆等曰: "渠供旣甚明白, 聖敎又如是懇惻。 則在廷諸臣, 孰不感泣乎?" 敎曰: "今者, 執法之所請, 卽拿鞫而論以王章, 亦不可使人在於䵝昧之科、人鬼之關。 故百爾思之, 則他人猶不可若此, 況奉朝賀之子, 慈宮之至親乎? 予於登極以後, 不幸而遭時艱難, 凶逆輩出。 除非耳目所親見聞者, 則皆設鞫盤問。 必也得情, 而後用法者, 誠以不妄殺爲念而然也。 麟漢罪關宗社, 固難容貸, 而始猶薄竄於近地, 及至淵疏上, 而輅書出, 則不得已圍之島, 而賜之死。 非恕渠罪也, 乃重人命也, 待眞贓也。 今日, 樂任之親問, 焉可已也? 謄傳拿鞫之故紙, 亦已經年, 而始焉不忍, 中焉惻傷, 今乃大覺其不然者。 嗚呼! 樂任事, 雖屢出於賊招。 究其本也, 似有似無似是似非。 若下一次親問, 則雖有所犯, 何以伸法。 若無是事, 亦豈不冤悶乎! 予於定省之暇, 以此意, 陳稟于慈宮。 則慈敎亦以爲然。 所以登捕者, 良以此也。 今聞所供, 一則雲疏參涉事, 而節節有條理, 至以生存之象厚爲證左。 二則推戴同謀事, 而斷斷無他意。 所引亦皆近似, 非徒其言有理, 其情可知。 況其地處, 與麟漢、厚謙絶異者乎? 求之天理、人心, 實無是理, 雖有疑似之跡, 原其心可也。 況初無是事乎? 噫! 予以孤露餘生, 尙今爲命, 卽慈宮也。 慈宮, 自去秋以後, 食飮全却, 涕淚常流, 每一仰瞻, 心肝如焚。 嗚呼! 慈宮所以如此者, 卽以不見奉朝賀之面而然也。 非徒不見, 將不得面訣於其生前也。 夫天下無不是底父母。 則慈宮之心如此, 予雖如常起居, 强作言笑, 亦豈安於心乎? 中夜, 每自謂曰: ‘慈宮之所以支保者, 亦惟予在也。 予不能以一事、半事, 悅慈宮之意, 而徒傷慈宮之心。 眞所謂「無樂爲君。」正爲此也。’ 斷斷此心, 屋漏所知, 而在廷諸臣, 亦豈盡知乎? 當初, 予意一欲親問樂任, 以判黑白。 所以趑趄者, 亦以當此時也, 慈宮之心, 尤難爲懷故也。 日昨乘間, 從容導達, 則慈宮泣請予曰: ‘吾有吾父且兄弟同氣也。 豈欲使主上, 有此不得已之擧? 而非此擧, 亦無以卞吾父徹天極地之冤。 須卽一問樂任, 果有罪, 雖誅戮, 吾無悔恨也。 若無實事, 則余可有見老父之日。 在國家法紀, 少無損焉。 在朝廷隄防, 不甚關焉。’ 小子泣涕承敎, 有此親問之擧。 樂任果脫空矣, 非但伸其幽枉, 予將有拜慈宮之顔。 洪樂任特爲放送。 嗚呼! 予之初意, 豈料樂任之無事? 今幸白放, 是亦慈宮悲苦之心所感而然也。 大抵此事旣不關係於麟賊處分, 又不干涉於啓能謀議。 則奉朝賀將有見慈宮之日矣。" 上曰: "奉朝賀已入來乎?" 洪國榮對曰: "方胥命於闕下云矣。" 上曰: "遣史官, 諭奉朝賀入對於惠慶宮。" 史官還奏曰: "奉朝賀以爲: ‘臣子之特蒙放釋, 實出聖上如天之恩。 惶感之極, 不知所達, 而第臣地處, 萬無復入脩門之望。 史官來宣召命, 而不得趨進, 尤切悚蹙之忱。’" 史官凡三往返, 而鳳漢終不入來。 上敎曰: "卿若不入, 則予將親臨同入, 此豈卿臣分之所安乎?" 於是, 鳳漢入侍。 上握手, 流涕曰: "卿家不幸, 夫復何言。 而今日見卿, 予懷難抑也。" 鳳漢亦涕泣, 稱謝。 上命國榮, 讀傳敎於帳殿, 使侍衛皆聽。 上謂尙喆等曰: "相箚宜卽賜批。 而日前卿等進《續明義錄》箚, 尙不賜批者, 以此事有所商量故也。 大抵奉朝賀之終不得一番入對於慈宮, 是行不得之事。 而若不如是處分, 亦不無隄防漸解之慮。 今則與討麟賊之義理, 判爲兩叚, 而義理益明, 隄防益嚴矣。" 尙喆等曰: "聖敎誠然, 而今日處分, 當載《續明義錄》之末, 然後可使一世曉然也。" 上曰: "可。" 又命度支, 購給洪鳳漢京第。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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