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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5권, 정조 2년 2월 9일 경자 2번째기사 1778년 청 건륭(乾隆) 43년

부교리 남학문이 여러 가지 시폐에 대해 상소하다

부교리 남학문(南鶴聞)이 상소하여 정치달(鄭致達)의 아내 〈화완 옹주(和緩翁主)김귀주(金龜柱)·홍낙임(洪樂任)의 죄악을 토죄(討罪)하고, 이찬(李禶)의 아내를 특별히 석방토록 한 명을 정지하라고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금의 너그러운 인자(仁慈)와 위엄스러운 형벌은 마치 봄의 생기(生氣)와 가을의 숙살(肅殺) 같아서 죄가 있는 자는 처단하고 죄가 없는 자는 용서해 주어, 한 번은 느슨하게 하기도 하고 한 번은 긴장되게 하기도 하여 진실로 중화(中和)에 맞게 하며, 더러는 용서하기도 하고 더러는 죽이기도 하여 구차하게 되는 바가 없게 한 다음에야 민정(民情)이 기뻐하여 감복하게 되고 세도(世道)가 차분하게 안정되는 법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원악 대대(元惡大懟)들이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어 지류(支流)와 여예(餘裔)들이 진실로 무리가 번성하고 있는데, 대각(臺閣)에서 등전(謄傳)하는 계사(啓辭)는 자못 권축(卷軸)을 이루고 연석(筵席)에서 논주(論奏)할 적에는 시작했다 하면 시각만 허비하게 되어 해가 지나가도록 쟁집(爭執)하는데도 끝나게 될 기약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전하께서 잘 살피어 신중하게 하시려는 지극한 뜻으로 아직은 그대로 함용(含容)하며 졸급하게 결단하지 않으시려는 것입니다마는, 국가의 체면을 손상하게 되는 수가 이미 많았고 대중의 심정에 의혹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시급히 대신들과 형옥(刑獄)을 맡은 신하들로 하여금 다시 참핵(參覈)을 가하도록 하여 죄가 무거운 자와 큰 자는 마땅히 바로 주륙(誅戮)하고, 만일 가벼운 자와 의아스러운 자가 있으면 또한 참작해서 소방(疏放)해 주어, 반측자(反測者)들로 하여금 스스로 안정되도록 해야 할 것인데, 어찌 반드시 날마다 고지(故紙)에다 전등하느라 한갓 세월만 허송함을 일삼게 할 것입니까?

을미년075) 5월 과방(科榜)의 12인들이 감히 역적 신회(申晦)와 암암리에 서로 결탁하여 성상께 많은 곤뇌(困惱)를 받게 했었으니, 그들의 정상(情狀)을 논한다면 만 번 주륙한다 하더라도 가볍게 될 것인데, 불행히도 주시(主試)했던 사람이 앞질러 물고(物故)해 버렸기에 구문(究問)할 길이 없게 되고, 오직 저 12인만이 인귀(人鬼)의 관문(關門)에서 산 것도 아니고 없어진 것도 아니게 오래도록 있을 뿐입니다. 대단(臺端)에서 국문(鞫問)할 것을 청한 것이 법에 있어서는 당연하겠으나, 이미 대증(對證)하여 핵실(覈實)할 길이 없어져 버렸으니, 차라리 놓아 두고 논하지 아니하여 성세(聖世)에 하나의 버린 물건이 되게 하면 될 것인데, 돌아보건대, 무엇하러 한결같이 서로 버티기만 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 언로(言路)가 막히어 있음은 실로 오늘날의 큰 근심거리입니다. 제순(帝舜)은 대성(大聖)이었는데도 오히려 우불(吁咈)076) 의 미덕(美德)이 있었고, 당나라 태종(太宗)은 중등 임금이었지만 직언(直言)을 용납하는 아량을 넓히었었습니다. 돌아보건대, 당면한 지금 위로 군덕(君德)에서부터 아래로 시정(時政)에 이르기까지 그 과연 공박(攻駁)해야 할 한 가지 실수도 없고 말을 해야 할 한 가지 일도 없게 되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어찌 이처럼 요요(廖廖)하고 적적(寂寂)하게 한 사람도 자리에 나가서 일을 논하는 자가 없습니까? 혹자는 ‘새로운 교화(敎化)가 청명(淸明)해지고 곤직(袞職)에도 잘못된 것이 없어 진실로 지적하여 의의(擬議)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마는, 이는 곧 좋게만 받드는 말이고 진실로 임금을 친애(親愛)하는 충성은 아닌 것입니다. 비록 요사이의 일로만 말하더라도, 곤전(坤殿)의 탄일(誕日)에 정후(庭候)할 때나 복제(服制)를 만났음을 봉위(奉慰)할 때에 전하께서 문득 까닭도 없는 일을 가지고 준엄하게 후사(喉司)를 질책하셨는데, 전교를 한번 내리자 뜰에 그득한 사람들이 놀라며 당황하게 되었었습니다. 중재(重宰)가 패소(牌召)를 어기었음이 어찌 딴 뜻이 있은 것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급작스레 치대(置對)하도록 명하셨고 기주(記注)가 서사(書寫)를 대신하게 한 짓은 비록 더러 만홀(慢忽)한 짓을 한 것이기는 하지마는 뜰에 세워 놓도록 명하기까지 하셨으니, 이 두어 가지 일은 모두 과중한 거조입니다. 대개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천자(天資)가 탁월하시나 더러는 지나치게 높으려고 하는 병통이 없지 않으시고, 성학(聖學)이 관투(貫透)하시나 간간이 지나치게 살피려고 하는 실수가 많으시니, 구구(區區)한 신의 정성이 전하를 요(堯)·순(舜) 같으시게 하지 못함으로써 부끄럽게 여깁니다. 비록 한두 가지의 하치않은 과오라 하더라도 만일에 성상의 덕에 누가 된다면, 어찌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이제부터는 무릇 호령(號令)을 내릴 적이나 시행해 갈 적에 반드시 신중하게 생각하고 자세하게 헤아려서 일이 지나간 다음에 후회가 생기지 않도록 하소서.

바야흐로 지금 부고(府庫)가 고갈되어 재용(財用)이 모자라 한 해의 경비(經費)도 오히려 펴 갈 수 없음이 걱정인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의 다급한 경비는 어디서 마련해 갈 것입니까? 전하께서 매양 일찍이 위에서 진념(軫念)하시고 조정 신하들은 또한 아래에서 많이 강구(講究)를 하고 있지만, 재물을 생산(生産)하여 폐해를 구원해 갈 방도에 있어서는 역시 장책(長策)이 없으니, 어찌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한다[節用愛民]’고 했으니, 성인(聖人)이 이 네 글자로써 재물을 생산하는 큰 방도를 삼은 것은 그 말이 간단하지만 그 의의는 큰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영건(營建)하고 선수(繕修)하느라 공역(工役)이 거창한데, 이는 모두 전하께서 부득이하여 하는 일이고 유관(游觀)하여 연락(宴樂)할 장소를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다마는, 담을 쌓고 다지는 소리[登馮之響]가 매월 그치지 않고 토목(土木)의 공사를 해마다 일으키므로, 부역(赴役)하는 백성들이 본업(本業)을 버리게 되고, 공억(供億)하는 비용을 자못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 허다한 영작(營作) 중에 또한 어찌 다급하지 않고 명색 없는 구축(構築)이 없겠습니까? 신의 생각에, 무릇 여러 다급하지 않은 공사는 일체로 혁파하여, 한편으로는 재물을 중히 여기는 방도에 진념(軫念)하셔야 하고 한편으로는 검소를 숭상하는 덕을 빛내어야 옳다고 여깁니다.

아! 인재(人才)가 일어나지 않음이 요사이보다 심할 수가 없으므로, 전하께서 깊이 우려하여 세수(歲首)에 윤음(綸音)을 내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신은 매양 옛사람이 ‘인재는 다른 시대에서 빌려 올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한 어구(語句)를 외우며 그윽이 스스로 생각에, 하늘이 인재를 내림에 이미 고금(古今)의 차이가 없는 것이라면, 어찌 유독 오늘날의 세상에 있어서만 막히고 나오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대개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인데도 임용(任用)하기를 그의 재질(材質)대로 다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찌 채찍을 잡고 한탄하기를, ‘천하(天下)에 좋은 말이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 국가에서는 오로지 과목(科目)만으로 선비를 뽑게 되기 때문에 예전부터 명경(名卿)과 석보(碩輔)들이 모두 다 백전(白戰)077) 하는 속을 거치어 진출(進出)하였고, 초야(草野)에서 경학(經學)을 깊이 연구하는 선비와 신기(新奇)한 포부가 있는 암혈지사(巖穴之士)들도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지 못하면 또한 백수(白首)가 되도록 명색(名色)이 없으며 초목(草木)과 함께 썩어버림을 달갑게 여겨야 할 뿐이었습니다. 취사(取士)하는 길이 이처럼 넓지 못한 데다가, 근년(近年) 이래로는 과거의 갖가지 폐단이 생겨나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날마다 그르게 되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이 한심(寒心)하게 여겨 온 지가 진실로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대명(大明)이 중천(中天)에 떠오르듯 하여 온갖 제도(制度)가 유신(維新)해지므로, 과장(科場)의 주위가 엄숙해져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끊어버리게 되고, 출척(黜陟)이 공정(公正)해져 장시(掌試)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가다듬어 분명하게 감별(鑑別)하고 있으니, 마땅히 준수한 인재가 조정에 그득하게 되고 길사(吉士)들이 조정에 등장(登場)하게 되어야 할 것인데, 귀를 기울이고 두어 해를 들어보아도 아직까지 들리는 말이 없습니다. 신(臣)이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허다한 과액(科額) 속에 일찍이 하나도 취할 만한 인재가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임용(任用)하기를 그 사람의 재질(材質)대로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재가 있음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조가(朝家)에서 사람 등용하는 방법을 혹은 지체에 따라 하기도 하고 혹은 문벌(門閥)에 따라 하기도 하여, 진실로 말할 만한 지체와 문벌이 없는 사람에 있어서는 비록 재덕(才德)을 겸비(兼備)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청현(淸顯)의 관질(官秩)을 경솔하게 제수(除授)하지 않는데, 외방(外方)의 관직에 있어서는 당초부터 문벌을 논할 것이 없고 오직 자격과 경력만 상당하면 되는 것을 또 어찌 아끼고 제수하지 않는 것입니까? 옛적에 황조(皇朝)에서는 과거를 보여 선비를 뽑으면 대부분 외방에 보임(補任)하도록 하여, 목민(牧民)에 관한 재질을 시험해 본 다음에야 승진(陞進)하여 임용했었습니다. 이는 곧 재질을 헤아려 보고서 직임(職任)을 제수하는 아름다운 규정(規程)인 것인데, 우리 국조(國朝)의 관방(官方)은 내직(內職)을 중시하고 외직(外職)은 경시하게 되어 있어, 삼사(三司)에 몸이 담겨 있던 사람은 외직에 보임(補任)되는 것을 수치로 여기게 되고, 용관(冗官)과 산직(散職)은 자주자주 주목(州牧)을 맡게 되기 때문에 ‘아침때는 전적(典籍)이고 저녁때는 현감(縣監)이다.’라는 속언(俗言)이 지금도 오히려 전해 오게 된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음관(蔭官)의 길은 점점 넓어지고 문관(文官)의 자리는 매우 좁아져, 청현(淸顯)과 근밀(近密)의 반열(班列)에 있는 신하들도 모두 외직(外職)으로 나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되고, 먼 시골의 세력이 없는 사람들은 더러 종신(終身)토록 얻지 못하게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미 청현의 관질(官秩)을 제수하지도 않고 또한 자목(字牧)의 소임을 주지도 않으니, 돌아보건대, 저 글공부를 하며 역학(力學)하여 백 번이나 싸워서 한번 성공하게 된 자들이 장차 무엇을 하려고 그처럼 애써 부저런히 하겠으며, 전하께서 과장(科場)을 엄숙하게 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아 기필코 인재를 구득하려는 성상의 생각이 또한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당면한 지금 삼관(三館)의 참상(參上)과 참하(參下)가 무려 1백을 헤아리게 되는데, 추위에 떨고 굶주리며 조석(朝夕)을 보전하지 못하는 자들이 대개 10명에 8, 9명이나 됩니다. 엄체(淹滯)되어 있는 사람을 소통(疏通)시키고 진작시키는 것이 바로 당면한 오늘날에 우선 해야 할 일인데, 변통해 갈 방도가 단지 제도(諸道)의 주현(州縣)에만 있으니, 변지(邊地)를 방어(防禦)하는 소임 이외에 여타의 무관(武官)과 음관(蔭官)의 자리도 일체 모두 문관(文官)과 융통해서 제수(除授)하고 보임(補任)하여, 한편으로 재질을 시험해 보는 방법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엄체된 것을 소통시키는 방도로 생각한다면, 어찌 두 가지가 다 마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혹자의 말은, ‘만일에 지금 음관의 자리를 제출(除出)하여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참호(參互)해서 비의(備擬)하도록 한다면, 여러 해동안 부지런히 사진(仕進)한 사람들이 반드시 엄체되어 답답하다는 한탄이 많아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저 정신을 대단히 피로하게 하여 여러 가지 재예(才藝)를 부지런히 성취해 놓고 과장(科場)에서 늙다시피 하며 피곤하게 얻은 뒤에, 불우(不遇)하여 맥이 빠져 재능을 한번도 전개(展開)해 보지 못하고 지기(志氣)를 한번도 신장(伸長)해 보지 못하게 된다면, 원통하고 억울한 심기(心氣)가 족히 하늘의 화기(和氣)를 간범(干犯)하게 될 것이니, 어찌 음관이 여러 해가 쌓이도록 사진한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일에 민생(民生)을 다스리는 재질로 논한다 하더라도 어찌 꼭 음관이 모두 문신(文臣)보다 낫기만 하고 문신은 또한 어찌 모두 음관보다 못하기만 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 신의 이런 의논을 가지고 낭묘(廊廟)에 하문(下問)해 보시고서 과단스럽게 시행하여, 인재를 구득하려고 하시는 성상의 마음이 실현되게 하소서.

아! 조정은 온 나라 사방의 표준이 되는 곳이니, 위에서 교화(敎化)를 이루어 가면 아래에서는 풍속이 도타워지게 되는 법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위에서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우하면 민생들이 흥기(興起)하여 효도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는 어찌 성왕(聖王)들이 몸소 선도(先導)해 간 의리가 아니겠습니까? 전번에 교리 신(臣) 박재원(朴在源)이 그의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심정을 진달(陳達)하여 그 고을의 수령이 되기를 바랐었는데, 전형(銓衡)을 맡은 신하가 의거할 만한 전례(前例)가 없음을 들어 그의 소청을 막아버리고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아! 저 박재원의 아우가 이미 기읍(畿邑)에서 살며 편양(便養)하고 박재원이 또 외방(外方)에 제직(除職)되기를 구하였음은 비록 의의가 없는 것인 듯하나 인자(人子)의 도리로서는 어버이를 섬기며 각기 자신의 심정을 다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유신(儒臣)의 걸군(乞郡)은 또한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니, 그전의 준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돌아보건대, 무엇하러 그사이에 교계(較計)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작은 일이기는 하나 실로 교화(敎化)를 이루고 풍속을 도타워지게 하는 도리에 있어 결함이 되는 것이기에, 신이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의 어리석은 충심(衷心)이 격동되기에 자신의 분수를 헤아려보지 못하고 망령되이 우자 일득(愚者一得)의 소견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굽어보시고 양찰(諒察)하시어 만일 채택(採擇)할 만한 것이 있어서 하치않은 사람인 것 때문에 말한 것을 버리지 않게 된다면, 국가의 일에 있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당직(讜直)한 말을 듣고 싶은데도 말을 해 오는 사람이 없으므로 나에게 이이(訑訑)078) 하는 기색이 있어선가 싶어 부끄러웠는데, 그대의 소장(疏章)에 이처럼 숨김없이 말을 했으니 진실로 아름답게 여긴다. 대관(臺官)의 계사(啓辭)를 아직도 윤허하여 따르지 않고 있음은 어찌 저들에게 사사로운 뜻이 있어서이겠는가? 그 이외의 전계(傳啓) 가운데 ‘죄가 가벼운 사람은 참작하여 소석(疏釋)해야 한다.’고 운운한 것은 참으로 의견이 있는 것이니, 그대로 시행하겠다. 을미년의 과방(科榜) 일을 지금까지도 윤허를 아끼고 있음은 나의 생각에는 또한 핵실(覈實)해 낼 수 있는 길이 없어서이니, 그 계사의 정지를 대각(臺閣)에서는 재택(裁擇)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달한 곤궐(袞闕)에 있어서는 내가 성찰(省察)하고 검속(檢束)해야 할 바로서 두렵게 여겨지는 것이니, 마땅히 생각하여 더 힘써 가겠다. 몇 해 전부터의 자경전(慈慶殿)봉모전(奉謨殿)의 영건(營建)은 모두 소중한 바가 있는 것이니 비록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진실로 옳은 말을 한 것인데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관(文官)의 엄체를 소통시키는 일은 묘당(廟堂)에 내리어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끝에 진달한 박재원의 일은 외면(外面)으로 비록 그렇기는 하나 해조(該曹)에 내리어 복주(覆奏)하도록 한 것이니, 그 전례에 의거하여 가부를 결정하였음은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재정-국용(國用)

  • [註 075]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 [註 076]
    우불(吁咈) : 불찬성을 나타내는 말.
  • [註 077]
    백전(白戰) : 글재주를 겨루는 싸움.
  • [註 078]
    이이(訑訑) : 자만(自滿)한 모양.

○副校理南鶴聞上疏, 討妻、金龜柱洪樂任之罪, 請寢妻特放之命。 又曰:

人主之寬仁、威罰, 如春生、秋殺。 有罪者斷之, 無罪者原之。 一弛一張, 允合中和。 或宥或殺, 無所苟且。 然後民情悅服, 世道靖安。 方今元惡大憝, 尙容假息, 而支流餘裔, 寔繁其徒。 臺閣謄傳之啓, 殆成卷軸。 筵席論奏之際, 勳費晷刻, 閱歲爭持, 究竟無期。 此誠我殿下審愼之至意, 姑且含容, 不欲遽斷。 而國體之虧損已多, 群情之疑惑轉甚。 臣謂: 亟令大臣及刑獄之臣, 更加參覈, 罪之重者、大者, 則宜卽誅戮。 若有輕者、疑者, 則亦所參酌疏釋, 使反側者自安。 何必日傳故紙, 徒事玩愒爲哉? 至於乙未五月榜十二人, 敢與賊, 暗相紏結, 使聖上, 多貽困惱。 論厥情狀, 萬戮猶輕。 不幸主試者, 徑先物故, 究問無路。 則惟彼十二人, 長在人鬼之關, 不生不減而已。 臺端請鞫, 在法當然, 而對證覈實, 旣無其階, 則無寧置而不論, 使作聖世之一棄物, 顧何足斷斷相持也? 嗚呼! 言路之閟塞, 實爲今日之大患。 帝舜, 大聖也, 尙有吁咈之美。 唐宗, 中主也, 能恢容直之量。 顧今上自君德, 下及時政, 其果無一失之可攻, 一事之可言而然歟? 是何寥寥寂寂, 無一人出位論事者乎? 或以謂: ‘新化淸明, 袞職無闕, 固不容指的擬議。’ 此乃將美之言, 實非愛君之忠也。 雖以近日事言之, 坤殿誕日庭候及遭制奉慰時, 殿下輒以無情之事, 嚴責喉司, 傳敎一下, 滿庭駭惑。 重宰違牌, 豈有他意? 而遽令置對, 記注倩寫, 雖或慢忽, 而至命立庭。 此數者, 俱是過中之擧也。 蓋我殿下, 天姿卓越, 或不無過高之病;聖學貫透, 而間多有太察之失。 區區愚悃, 以殿下不如爲恥。 雖一二微細之過, 若爲聖德之累, 則豈不可惜乎? 繼自今, 凡於發號施令之際, 必須愼思、詳度, 無致事過而悔生焉。 方今府庫虛竭, 財用耗縮, 一歲之經費, 尙患不敷, 則水旱緩急之費, 從何責辦乎? 殿下每嘗軫念于上, 廷臣亦多講究于下, 而生財捄弊之道, 亦無長策, 豈不可憂乎? 傳曰: ‘節用而愛民’ 聖人以此四字, 爲生財之大道者, 其言約, 而其義大矣。 近年以來, 營建繕修, 工設浩繁, 皆是殿下不獲已之擧, 非爲游觀宴樂之所。 而登馮之響, 連月不止。 土木之功, 逐歲斯興。 赴役之民, 棄其本業。 供億之費, 殆難勝計。 許多營作之中, 亦豈無不急之搆、無名之築乎? 臣謂凡諸不急之役, 一切革罷。 一以軫重財之方, 一以光崇儉之德可也。 嗚呼! 人才之不興, 莫甚於近日。 殿下深以爲憂, 至發於歲首綸音。 臣每誦古人才不借於異代之語, 竊自謂: ‘天之生才, 旣無古今之異, 則豈獨於今世, 閼而不出乎?’ 蓋有之矣, 而用之未盡其才, 則此何異於執策而歎曰: ‘天下無良馬也?’ 惟我國家, 專以科目選士, 故自昔名卿、碩輔, 皆從白戰中進身, 而草野窮經之士、巖穴抱奇之人, 不能決科出世, 則亦白首無名, 甘與草木同腐而已。 取士之路, 若是不廣, 而比年以來, 科弊百出, 士趨日非, 識者寒心, 固已久矣。 何幸大明中天, 百度惟新, 場圍肅嚴, 而赴擧者絶僥倖之望, 黜陟公正, 而掌試者勵鑑別之明, 宜其才雋滿朝, 吉髦登廷, 而仄聽數歲, 尙無聞焉。 臣不知, 許多榜額, 曾無一才可取而然乎? 是必用之不盡其才。 故才無可以得聞也。 朝家用人之法, 或以地勢、或以門閥, 苟無地勢、門閥之可稱者, 則雖才德兼有者, 淸官顯秩, 不得輕授, 而至若外官, 初無門閥之可論, 惟資歷之相當, 則又何爲靳, 而不授乎? 在昔皇朝設科取士, 多令出補, 以試其牧民之才, 然後陞而用之。 此是量才授任之美規。 而我朝官方, 則重內而輕外, 跡廁三司者, 以外補爲恥, 冗官、散職屢典州牧, 故朝典籍、暮縣監之諺, 至今尙傳矣。 近年以來, 蔭路漸廣, 文窠太窄, 淸班邇列之臣, 皆以出外爲榮。 遐鄕無勢之類, 或多終身不得者。 旣不授淸顯之官, 又不畀芻牧之任, 則顧彼績文而力學, 百戰一捷者, 其將爲何, 而勤苦如此? 殿下嚴科場、正士風, 必得其才之聖念, 亦安在哉? 目今, 三館參上與參下, 無慮以百數。 而寒餓、凍餒, 不保朝夕者, 蓋十居八九矣。 疏滯振淹, 正爲方今先務。 而通變之道, 只在乎諸道州縣, 防禦邊地外, 其餘武蔭之窠, 一倂與文官, 通融除補, 一爲試才之方, 一軫疏滯之道, 則豈不兩宜乎? 或以爲: ‘今若除出蔭窠, 使文臣, 參互備擬, 則積年勤仕之人, 必多滯鬱之歎。’ 此則有不然者。 夫勞精弊神, 勤成百藝, 老於場圍, 困以得之之後, 坎軻沈頓, 才不得一展, 志不得一伸。 則其冤鬱之氣, 足干天和, 豈可與蔭官積仕者比也? 若論治民之才, 則蔭官豈必盡賢於文臣, 文臣亦豈盡讓於蔭官乎? 惟願殿下, 以臣此議, 下詢廊廟, 斷以行之, 以實求才之聖心焉。 嗚呼! 朝廷, 爲四方之標準, 敎化成於上, 風俗敦於下。 傳曰: ‘上老老而民興孝。’ 斯豈非聖王躬導之義歟? 廼者校理臣朴在源爲養其親, 陳情乞郡, 而秉銓之臣, 以無前例之可據, 格其請而不施。 噫! 彼在源之弟, 旣在幾邑, 得以便養, 則在源之又求外除。 雖似無義, 而人子事親, 各欲自盡其情。 儒臣乞郡, 亦是聖朝美事。 則事例有無, 顧何較計於其間也? 此雖細事, 實有歉於成敎化, 而敦風俗之道, 臣竊惜之。 臣愚衷所激, 不自量分, 妄效一得之見。 伏乞聖明, 俯垂諒察, 若有可採者, 不以人廢言, 則國事幸甚。

批曰: "思聞讜言, 言者不來, 愧予有訑訑之色, 爾章若是無隱, 良庸嘉之。 臺啓之尙未允從者, 豈有私意於彼也? 其他傳啓中, ‘罪輕者參酌疏釋云云。’ 儘有意見, 依施。 乙未榜事, 尙今靳允, 予意亦以覈實之無路也。 厥啓之停, 在臺閣非可以裁擇者矣。 所陳袞闕, 予所省檢, 而瞿然者, 當思加勉。 年來慈慶奉謨之營建, 皆有所重。 雖出於不獲已, 言固是矣, 曷不體念? 文官疏滯事, 下廟堂稟處。 尾陳朴在源事, 外面雖然, 下該曹, 使之覆奏, 則其所據例可否, 似無不可矣。"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재정-국용(國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