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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5권, 정조 2년 2월 3일 갑오 1번째기사 1778년 청 건륭(乾隆) 43년

대신들을 접견할 때와 차대 때의 복식을 고례에 따르게 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종수(金鍾秀)를 소견(召見)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차자(箚子)에 진달했던 말은 큰 사업(事業)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고도 큰 것이어서, 학문이 도저(到底)하여 분명하게 의리를 안 사람이 아니고선 감히 의논이 다다를 수 없는 곳이다. 경의 차자를 보건대, 의리에 어그러지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순문(詢問)한 일이 있기까지 하였으나 이의(異議)하는 논의가 없었던 것 같았다. 대저 수의(收議)를 함은 널리 대중의 의논을 채택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의 소견은 각기 스스로 같지 않은 것이기에, 왈가 왈부(曰可曰否)하며 각기 소견을 진달하면, 위에 있는 사람이 의당 재량해서 선택하여 결단하게 되는 것인데, 요사이에는 미봉(彌縫)하는 짓을 하는 풍습이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대관(大官)은 먼저 위의 뜻을 탐지(探知)하는 데 주력하고 소관(小官)은 대관의 의견을 준칙(準則)으로 삼는 짓을 하여, 비록 생각하고 있는 소견이 있다 하더라도 당초부터 감히 일언 반구(一言半句)도 이의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되니, 진실로 세도(世道)를 위하여 개연(慨然)스러운 일이다."

하매, 김종수가 말하기를,

"진실로 성상께서 분부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비록 진선 진미(盡善盡美)의 일이라 하더라도 만일에 널리 순문하시는 일이 있다면 이의하는 논의를 하더라도 방해롭지 않은 것인데, 요사이에는 뇌동(雷同)하여 호응해 버리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상(大祥) 뒤의 복색(服色)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는 고찰할 만한 사례가 없었고, 자내일기(自內日記)를 보건대 차대(次對) 때에 흑립(黑笠)을 쓰는 사례가 있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을 진접(晉接)할 때에는 마땅히 백립(白笠)을 쓰겠으나, 차대(次對) 때에는 마땅히 고례(古例)대로 흑립(黑笠)을 쓰고 싶다."

하매, 김종수가 말하기를,

"고례대로 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월이 빨리 흘러 남은 날이 얼마 없으니, 예절을 되도록 후하게 해야겠다. 차대 이외에는 이미 백립을 썼으니, 참포(黲袍)와 흑대(黑帶)에 있어서도 비록 전례(前例)가 있기는 하지마는, 차라리 후하게 해야 하는 의의에 따라 포(袍)는 백포(白布)로 하고 대(帶)도 백사(白絲)로 하며 망건(網巾)에 있어서는 대상(大祥) 뒤에 마땅히 금옥(金玉)을 붙여야 하기 때문에 마땅히 소식(素飾)을 쓰지 않겠다. 이는 비록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기는 하나, 또한 고례를 따르는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衣生活) / 사법-탄핵(彈劾)

    ○甲午/召見吏曹判書金鍾秀。 上曰: "卿箚所陳, 可謂大事業矣。 此事至重且大, 非學問到底明見義理者, 不敢議到處也。 及見卿箚, 不悖於義理, 故至有詢問之擧, 似無岐異之論。 大抵收議者, 所以博採衆議也。 人見各自不同, 曰可曰否, 各陳所見, 則在上者, 固當裁擇決之。 而近來彌縫之習, 作一痼弊。 大官以先探上意爲主, 小官以大官之意, 作爲準則。 雖有臆見, 初不敢爲一言半辭之携貳者, 誠爲世道慨然矣。" 鍾秀曰: "誠如聖敎。 雖盡善盡美之事, 若有博詢之擧, 則不害有異同之論。 而近來不無雷同和應之弊也。" 上曰: "祥後服色, 《政院日記》, 無可考之例。 而見《自內日記》, 則有次對黑笠之例。 故諸臣晉接時, 則當着白笠, 而次對, 則當遵古例, 欲着黑笠矣。" 鍾秀曰: "遵古爲宜。" 上曰: "日月如駛, 餘日無多, 禮當從厚。 次對外, 旣着白笠。 則黲袍、黑帶, 雖有前例, 寧以從厚之義, 袍用白布, 帶用白絲, 而至於網巾, 祥後當着金玉, 故當不用素飾。 此雖逕廷, 亦遵古例也。"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衣生活)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