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의 합당 여부를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다
경모궁(景慕宮)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탄신(誕辰)이기 때문이다. 환궁(還宮)하고 나서 대신·구경(九卿)과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월이 빨리 가 선대왕(先大王)을 부묘(祔廟)하는 예를 거행할 날이 머지 않아서 장차 동조(東朝)께 책보(冊寶)를 올리게 되니, 자신도 모르게 흔감(欣感)이 엇갈려 모이게 되는데, 유독 자궁(慈宮)께는 일자(一字)도 올리지 않는다면 정(情)과 예(禮)에 있어서 모두가 결연(缺然)해지게 되겠다. 욕전(縟典)을 거행하고 미호(美號)를 올리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느냐? 경(卿)들은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등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신들이 먼저 주청(奏請)해야 할 것인데, 성교(聖敎)가 이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미호(美號)를 올리는 한 가지 예절은 곧 떳떳한 전례(典禮)이고, 순강(順康)050) ·소녕(昭寧)051) 에게도 또한 가까운 사례가 있으니, 예(禮)에 있어서나 정(情)에 있어서나 진실로 합당한 일입니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사위(嗣位)하고 나서는 동조께 존호(尊號)를 올리고, 부묘하기를 기다렸다 책보를 올림은 예법인 것이다. 생각하건대, 부덕(不德)하고 우매한 내가 대위(大位)를 이어받았기에, 자전(慈殿)을 왕대비(王大妃)로 받들어야 하니, 유사(有司)들은 옛적의 예법대로 존호를 의정(議定)해야 한다. 세월이 빨리 흘러가 선대왕을 부묘하는 일을 머지 않아 거행하게 되었으니, 장차 동조께 책보를 올릴 것이다. 예는 현호(顯號)하는 데 융숭해지고 정은 보본(報本)하는 데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옛적부터 제왕(帝王)들이 존친(尊親)을 한 좋은 법이기에 부덕하고 우매한 나에 있어서도 또한 흔감(欣感)이 엇갈려 모이게 되었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유독 자궁(慈宮)께는 몇 글자의 존칭(尊稱)을 올리지 못하게 된다면, 정에 있어서나 예에 있어서 불안하고 더디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 내가 굳게 지키고 있는 대의(大義)를 또한 혹은 신료(臣僚)들이 이미 영회(領會)하고 있는 바일 것이기에, 내가 다시 말을 하지 않겠다. 대저 나의 생각에는 예법에 있어 혹은 이존(貳尊)에 가깝게 되고 사세에 있어 혹은 압존(壓尊)에 걸리게 되어도 예의를 거스리고 사정대로만 하여 억지로 숭봉(崇奉)하려고 하면 이른바 그런 숭봉은 내가 말하는 숭봉은 아니게 된다고 여긴다. 부당하게 숭봉하는 예절로는 숭봉하지 않으려는 것이 곧 내가 말하는 숭봉이다. 아! 《궁원의(宮園儀)》를 눈물을 머금으며 찬차(撰次)했던 것도 진실로 이런 까닭에서이었다. 이 일에 있어서는 이미 이존(貳尊)의 혐의도 없는 것이고 또한 양명(揚名)하는 의리에도 맞게 되는 것이니, 욕전을 거행하고 미호를 올려야 하는 일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느냐? 또 전대의 역사에서 찾아보면 후비(后妃)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떳떳한 법이 되어 있는 것이고, 비록 황자(皇子)와 공주(公主)에게도 모두 석호(錫號)하는 규례가 있었다. 본조(本朝)의 일을 고찰해 보더라도 동조께 존호를 올리는 일은 오히려 보통 일로 되어 있고, 비록 순강·소녕에게도 또한 존호를 가하는 전례(典禮)가 있었다. 하물며 선조(先朝)에는 진묘(眞廟)에게 존호 내리는 일을 미처 추숭(追崇)하기도 전에 했었다. 이는 내가 마음속에 의기(義起)하게 될 것이고, 또한 강구(講究)하여 거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있다. 자전(慈殿)께 존호를 올릴 때에 자궁(慈宮)께도 또한 존호를 올리는 것이 합당한지 여부를 대신들에게 물어 보고 따라서 구경과 삼사에게도 미치자, 첨의(僉議)가 다 같았으니, 또한 의리에 어그러지지 않는 것임을 보게 될 수 있는 일이다. 의조(儀曹)로 하여금 자세히 알아서 거행하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壬午/行酌獻禮于景慕宮, 以誕辰也。 及還宮, 召見大臣、九卿、三司長官。 上曰: "日月迅駛, 先大王祔禮不遠, 將進冊寶於東朝, 不覺欣感之交集, 而獨於慈宮, 無一字之上, 則情禮俱缺。 擧縟典ㆍ進義號, 烏可已乎? 卿等其各進所見。" 領議政金尙喆等曰: "此固臣等先爲之請者, 而聖敎及此。 進號一節, 卽是彝典。 順康、昭寧亦有近例。 於禮、於情, 實爲允合矣。" 乃敎曰: "嗣位而上號於東朝, 俟祔廟進冊寶, 禮也。 惟予寡昧, 纉承大位, 奉慈殿, 爲王大妃, 有司議尊號, 如古禮。 居諸迅駛, 先大王祔禮在不遠, 行將進冊寶于東朝矣。 禮隆顯號, 情著報本, 此從古帝王尊親之令典, 在予寡昧, 亦可謂欣感交集也。 然獨於慈宮, 不得上一字之稱, 則以情、以禮, 得無不安而虛徐者乎? 嗚呼! 予之秉執之大義, 抑或臣僚之所已領會, 予不更誥。 大抵予意以謂禮或近於貳尊, 事或涉於壓尊, 而拂義任私, 强欲崇奉, 則所謂崇奉, 非吾所謂崇奉也。 不以不當崇奉之禮, 崇奉者, 乃吾所謂崇奉也。 嗚呼! 《宮園儀》之泣血撰次, 良以是也。 至於玆事, 旣無貳尊之嫌。 又叶揚名之義, 則其所擧縟典, 而進美號, 烏可緩哉? 且求之前史, 則后妃之進號, 尙屬彝典, 而雖以皇子、公主, 俱有錫號之規。 稽諸本朝, 則東朝之上號, 猶屬常事。 而雖於順康ㆍ昭寧, 亦有加號之禮。 況在先朝, 賜號於眞廟, 未及追崇之前。 此予所以義起於中, 而又以爲不可不講而行之者也。 慈殿上號時, 慈宮亦爲進號當否, 詢之大臣, 爰及九卿、三司, 僉議偕同, 亦可見不悖於義理也。 可令儀曹知悉擧行。"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