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남재흥이 폐사군(廢四郡) 지역 중 후주에 고을을 설시할 것을 상소하다
무산(茂山)의 유학(幼學) 남재흥(南再興)이 상소하기를,
"그윽이 생각하건대, 후주(厚州)와 무창(茂昌)·여연(閭延)·우예(虞芮)·자성(慈城) 등 폐사군(廢四郡)의 지역은 동쪽으로 삼수(三水)와의 거리가 70여 리이고 서쪽으로 강계(江界)와의 거리가 1백여 리이며, 남쪽으로 함흥(咸興)까지는 5백여 리에 지나지 아니하여 지방이 거의 7, 8백 리나 되는데, 교야(郊野)가 광활하고 토지가 비옥(肥沃)하여 몹시 춥고 척박한 삼수나 갑산(甲山)과는 크게 다릅니다. 지세(地勢)가 평평하고 따뜻하여 서리가 가장 늦게 내리기 때문에 오곡(五穀)이 잘 익지 않는 수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낙토(樂土)로서 살 만한 땅인데, 고려 말엽부터 우리 국조(國朝)의 초기(初期)까지 사군(四郡)의 건너편이 여진(女眞)의 야인(野人)들이 점거(占據)하는 바가 되었던 까닭에 사군이 버려져 있고 개척되지 않았음은 진실로 이런 때문이었습니다. 청(淸)나라가 웅장(雄長)해진 뒤부터는 후주의 건너편과 연강(沿江)에 잡다하게 살던 호인(胡人)들이 모두 몰려 가버리게 되어, 지금까지 1백 4,50년 동안에 압록강 북쪽 1천여 리의 땅이 아득하게 비어 있고 호인들이 살고 있는 흔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강 이남은 곧 우리 나라의 방내(方內)인 기름진 땅인데, 공연(公然)히 버려져 있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지난 경자년041) 에 고 판서(判書) 신 조계원(趙啓遠)이 본도(本道)를 안찰(按察)할 때에 형편을 간심(看審)한 다음 후주(厚州)와 사군의 고을을 다시 두는 일로써 상소를 진달하여 극력 주청(奏請)했었는데도 조정의 의논이 일치하지 아니하여 설시(設施)하지 못했었습니다. 계축년042) 에 고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본도를 안찰할 때에는 육진(六鎭) 및 폐사군에 순찰(巡察) 나가 방곡(方谷)의 요해지(要害地)가 될 수 있는 곳을 심찰(審察)해 보고, 무산(茂山) 및 후주와 사군 등 고을을 설치하는 일과 길주(吉州)·갑산(甲山) 사이에 길을 내는 것 등 3건(件)의 일로써 상소하여 이해(利害)를 진달하였으며, 또 금성방략(金城方略)을 조목조목 올리고 겸하여 성경지도(盛京地圖)를 올리니,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께서 과연 채납(採納)하여 시설(施設)하도록 윤허하시어, 갑인년043) 봄에 북쪽으로는 무산(茂山)·풍산(豊山)·양영(梁永) 등 세 진보(鎭堡)를 설치하고 서쪽으로는 후주(厚州)를 설치하여, 점차로 연강(沿江)을 개척해 갈 계획을 했었습니다. 그뒤 계해년044) 에는 또 자성(慈城) 등의 지역에 변장(邊將)을 두자고 청했었는데, 새로 변장을 두는 일은 조정의 의논이 같지 않은 것 때문에 막 설치했다가 바로 혁파하게 되었고, 또 을축년045) 에는 묘당(廟堂)의 의논이 가닥이 많음으로 인하여 무산과 후주까지 아울러 혁파하려고 하자, 남구만이 혁파해서는 안됨을 극력 말하여 무산은 다행히도 그대로 두게 되어 오늘날에 만호(萬戶)의 웅대(雄大)한 고을이 이루어졌습니다마는, 후주는 마침내 혁파를 면하지 못했었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대개 압록강(鴨綠江)·두만강(豆滿江) 두 강의 근원은 다같이 백두산에서 나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흐르다가 바다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는 곧 우리 나라의 경계(境界)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강가의 고을들은 산이 많고 들은 적으며 땅이 좁고 사람은 많아서 근년(近年) 이래로 민간들이 끊임없이 소란하게 후주(厚州)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만(萬)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지금에 바로 설시(設施)하게 된다면 만가(萬家)의 큰 고을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어서 외롭게 떨어져 있는 삼수와 갑산이 성세(聲勢)를 서로 의존하게 되고, 폐치(廢置)한 사군(四郡)도 또한 장차 점차로 개척해 가게 되어 양쪽 변방이 견고하기가 금성 탕지(金城湯池)와 다름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삼가 생각하건대, 후주(厚州) 땅은 곧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용잠(龍潛) 때에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가 되어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만 5천을 거느리고 함흥(咸興) 땅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사군과 강계(江界) 등지로 해서 압록강을 건너 동령부(東嶺府) 올랄성(兀喇城)에 들어가서 공격하여 야인(野人)들을 몰아내고 땅을 개척하는 공을 거두신 곳입니다. 이로 보건대, 태조 대왕께서 즐풍 목우(櫛風沐雨)046) 하며 발섭(跋涉)하여 공을 세우신 땅이기에 오늘날 마땅히 지켜 가야 하고 버릴 수 없는 곳입니다. 이에 감히 부월(斧鉞)의 벌을 피하지 않고 외람하게 광망(狂妄)한 말씀을 진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 상신(相臣)의 상소도 올리고 아울러 성경지도도 올리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 묘당(廟堂)에 물어보시고 바로 지금 설시하도록 윤허해 주소서."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3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역사-고사(故事)
- [註 041]경자년 : 1660 현종 원년.
- [註 042]
계축년 : 1673 현종 14년.- [註 043]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註 044]
계해년 : 1683 숙종 9년.- [註 045]
을축년 : 1685 숙종 11년.- [註 046]
즐풍 목우(櫛風沐雨) : 바람으로 빗질하고 비로 낯을 씻는다는 뜻으로, 긴 세월을 객지에서 풍우(風雨)에 시달리며 천신 만고(千辛萬苦)를 겪음을 이름.○甲戌/茂山幼學南再興上疏曰:
竊惟厚州、茂昌、閭延、虞芮、慈城等廢四郡之地, 東距三水七十餘里, 西距江界一百餘里, 南至咸興, 不過五百餘里, 而地方殆近七八百里。 郊野之廣闊, 土地之肥沃, 大異於三、甲之苦寒ㆍ瘠薄。 地勢平隩, 霜降最晩, 故五穀無不成熟, 此誠樂土可居之地。 而自麗季至于國初, 四郡越邊爲女眞、野人之所據, 故四郡之廢棄不闢者, 良以是也。 自淸國雄長之後, 厚州越邊及沿江雜處之胡, 悉被驅去。 于今一百四五十年之間, 鴨綠江北千餘里之地, 漠然空虛, 絶無胡人居生之跡。 江之以南, 卽我國方內膏腴之地, 而公然廢棄, 誠爲可惜。 粤在庚子, 故判書臣趙啓遠按本道時, 看審形便後, 以復設厚州、四郡等邑事, 陳疏力請, 朝議不一, 未克設施。 癸丑故相臣南九萬按道時, 巡到六鎭及廢四郡, 審察方谷要害之處, 以茂山及厚州四郡設邑事曁吉州、甲山間開路等三件事, 疏陳其利害。 且條上《金城方略》, 兼獻《盛京地圖》。 惟我顯宗大王果爲採納, 許其施設。 甲寅春, 北置茂山、豐山、梁永等三鎭堡, 西置厚州, 以爲漸次開柘沿江之計。 厥後癸亥, 又請設置邊將於慈城等地, 而新置邊將, 則以朝議不咸, 纔設旋罷。 又因乙丑廟論之多端, 欲竝罷茂山與厚州, 則九萬力言其不當罷, 茂山則幸而仍存, 今作萬戶之雄邑。 厚州則終不免撤置, 可勝惜哉! 蓋鴨綠、豆滿二江之源, 竝出於白頭山, 東西分流, 而入于海, 此乃我國之界限也, 第惟江邊之邑, 山多野少, 地狹人衆, 挽近以來, 民間繹騷。 願入於厚州者, 可以萬數。 趁今設施, 則萬家之鉅邑, 一朝可成。 三ㆍ甲之孤絶, 聲勢相依, 四郡之廢, 亦將漸就開拓, 兩邊之堅固, 無異於金城湯池矣。 且伏況厚州之地, 卽我太祖大王龍潛, 以東北面元帥。 率步騎一萬五千, 踰咸興地黃草嶺, 自四郡、江界等, 渡鴨綠江, 往擊東嶺府 兀喇城, 驅逐野人, 闢地收功。 以此觀之, 則太祖大王櫛風沐雨, 跋涉建功之地, 今宜可守, 而不可棄也。 玆敢不避斧鉞之誅, 猥陳狂妄之言。 仍上故相之疏, 竝獻盛京之圖。 伏願聖明, 詢問廟堂, 趁卽許設焉。
命廟堂稟處。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3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역사-고사(故事)
- [註 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