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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4권, 정조 1년 12월 3일 을미 1번째기사 1777년 청 건륭(乾隆) 42년

서명선·홍국영·정민시 등을 소견하고 치하하다

우의정 서명선(徐命善)·도승지 홍국영(洪國榮)·부제학 정민시(鄭民始)·좌부승지 이진형(李鎭衡)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 경들을 소견하고 나니 비통한 감회가 갑절이나 생긴다. 을미년399) 이날 우상(右相)이 사생을 돌보지 않고서 상소를 올리어 대궐 문에서 외쳤었으니 그때의 위태하고 어려웠던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거니와, 만일에 선대왕(先大王)의 지극하신 총명과 지극하신 인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역적들의 음모(陰謀)를 저지하고 저위(儲位)를 보존하게 되었겠는가? 내가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위로는 선왕(先王)의 은덕과 아래로는 제공(諸公)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오늘 불렀음은 곧 거(莒)에 있었던400) 뜻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매, 서 명선이 말하기를,

"신들이 오늘 특별히 사대(賜對)하시는 명을 받들고 보니 더욱 감격되어 눈물이 나옴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날 국가의 안전과 위급이 호흡(呼吸)사이에 박두해 있었으니, 신자(臣子)된 사람으로서 누군들 생명을 내던지고 국가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신의 항쟁했던 상소는 신의 분수에 당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만일에 지신사(知申事)의 능히 외로운 충성에 의한 지성스럽게 보호해 가는 공로가 없었다면, 어떻게 위기(危機)를 전환하게 되고 어떻게 대계(大計)를 성취하게 되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4백 년의 종사(宗社)가 두 사람의 손에 의해 다시 안정되어졌으니, 유독 나만의 다행이 아니라 진실로 국가의 복인 것이다. 애통(哀痛)하고 황급(遑急)한 때를 만났기에 소작(小酌)을 차리지 못했다마는, 마땅히 내년 이후부터는 해마다 간략하게라도 주찬(洒饌)을 차리어 함께 선왕(先王)의 하늘같은 은혜를 송덕하고 겸하여 제공(諸公)이 나를 보위(保衛)해 준 공로도 서술(敍述)해 가기를 해마다 상례로 하겠다."

하고, 이어 어제(御製)한 동덕회서(同德會序)로 자리에 나온 여러 신하들에게 각자 글을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705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註 399]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 [註 400]
    있었던 : 춘추 시대(春秋時代) 제 환공(齊桓公)이 그의 형인 양공(襄公)이 정령(政令)이 고르지 못하고 음란하매 화를 당할까 염려하여 거(莒) 땅으로 달아나 온갖 고생을 하다가 양공이 죽은 뒤에 돌아와 임금이 되었는데, 제 환공이 관중(管仲)에게 묻기를,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까?" 하니, 관중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公)께서 거(莒)에 있었던 일을 잊지 마소서." 하였음.

○乙未/召見右議政徐命善、都承旨洪國榮、副提學鄭民始、左副承旨李鎭衡。 上曰: "今日召見卿等, 一倍愴感。 乙未此日右相不顧死生, 尺疏叫閽, 其時危難之狀, 不可勝言, 而如非先大王至明至仁, 何以沮逆謀而保儲位乎? 予之得有今日, 上而先王之恩, 下而諸公之力。 今日之召, 卽無忘在之意也。" 命善曰: "臣等獲逢今日特命賜對, 益不勝感涕, 而當日國家安危, 迫在呼吸, 則爲臣子者, 孰無捐生報國之心乎? 臣之抗疏, 不過臣分之當然, 而若無知申克仗孤忠, 至誠保護之功, 危機何以轉斡, 大計何以贊成乎?" 上曰: "卿言是矣。 四百年宗社, 再安二人之手, 非獨予之幸, 實國家之福也。 時値哀遑, 不得設小酌, 當自明年以後, 每年略備酒饌, 共誦先王如天之恩, 兼敍諸公衛予之功, 歲以爲常矣。" 仍御製同德會序, 命登筵諸臣, 各爲文以進。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705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