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 유생 윤일 등이 고 문정공 이재의 사우를 세워 신주를 안치할 것 청하다
팔도(八道) 유생(儒生) 윤일(尹鎰) 등이 상소하기를,
"고 문정공(文正公) 신(臣) 이재(李縡)는 일찍부터 헌면(軒冕)351) 을 사절하고 산림(山林)에서 덕을 닦았기에 학문이 순독(醇篤)하고 문장(文章)이 환연(煥然)하였고, 출처(出處)와 언론이 올바르고 논저(論著)하고 산술(刪述)한 공이 온 세상에 흘러 퍼지어 사람들의 이목에 주입(注入)되었습니다. 하물며 성심(誠心)에서 나온 충애(忠愛)와 실행(實行)에 나타난 효우(孝友)에 있어서는, 거의 이른바 ‘신명(神明)과 통하고 금석(金石)을 꿰뚫었다.’는 것이었으니, 우러러 생각하건대 명성(明聖)하신 전하께서 어찌 굽어 통촉(洞燭)하시지 못할 죄가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대리 청정(代理聽政)하실 첫머리에 태상시(太常寺)의 장청(狀請)을 기다릴 것도 없이 특별히 절혜(節惠)352) 의 은전(恩典)을 내리시게 된 것입니다. 신들이 이에 있어서 머리를 맞대고 서로 경축(慶祝)하며 성상의 은덕을 흠앙(欽仰)했었습니다마는, 반면 전하께서 이재의 완전하게 구비한 도덕과 정밀하고도 깊은 조예(造詣)에 있어서는 혹시 다 통촉하시지 못한 바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대개 그가 한 학문은, 청명(淸明)하고도 정수(精粹)한 자질에다가 진실하게 각고(刻苦)하는 공력을 가한 것이었고, 그의 도(道)로 말하면 외면(外面)으로는 그다지 긍지(矜持)하지 않는 듯하지만 동정(動靜)과 운위(云爲)하는 사이에 법도에 틀리는 것이 없었고, 내면(內面)에는 진실로 경계(境界)를 두지 않았지만 음과 양으로 착하고 사특한 즈음에 반드시 한계와 구분을 엄격히 하였습니다. 만년(晩年)이 되면서는 충양(充養)해 온 것이 이미 오래이고 천리(踐履)가 이미 순수(純粹)해져, 청고(淸高)하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온화하면서도 흘러버리지 않았으며, 언론은 개절(剴切)하고도 통투(通透)하고 흉금(胷襟)은 광명(光明)하고도 쇄락(灑落)353) 했었습니다. 이렇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재는 사문(斯文)에 공이 있고 세상의 풍교(風敎)에 도움이 있게 한 것 또한 컸습니다. 대개 이재가 마침 세상의 수준(水準)이 저하(低下)되고 선배(先輩)들이 돌아가버린 즈음을 당했었기에 개연(慨然)히 사문을 흥기(興起)시키고 사풍(士風)을 진작(振作)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었습니다. 하물며 신축년354) 과 임인년355) 이후부터는 사대부(士大夫)들의 자기 편리만 도모하는 사람들이 유속(流俗)에 동화(同化)되고 탐오(貪汚)와 합작(合作)하여 괴이한 의논이 멋대로 생겨나게 하여 드디어 의리가 모두 없어지고 윤강(倫綱)이 장차 무너지게 되자, 그제는 굳게 동강(東岡)356) 을 지키며 개석(介石)357) 처럼 변하지 않고 홀로 정론(正論)을 지수(持守)하며 확고하게 흔들리지 아니하여, 당세(當世)의 신하 된 사람과 아들 된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역적을 주토(誅討)하여 복수(復讎)해야 하는 일은 숭상해야 되고 의리를 잊고 이욕(利欲)만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됨을 알게 했었으니,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 잡으며 윤강(倫綱)을 세우고 세도(世道)를 붙잡아 가는 것에 있어 또한 어찌 도움이 적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이 용인(龍仁)의 한천(寒泉)은 곧 이재가 고반(考槃)358) 하던 고향이고 구묘(邱墓)가 있는 데입니다. 그가 남긴 티끌과 전파한 향기는 풀과 나무에 아직도 향기롭고, 유풍(遺風)을 듣게 되고 덕업(德業)을 보고나면 여대(輿儓)359) 들도 모두 추앙(推仰)하게 됩니다.
신들이 반드시 이 땅에다 사우(祠宇)를 세워 신주(神主)를 안치(安置)하려고 함은 그가 생존했을 때에 학문을 강구(講究)하던 곳을 위해서는 도산(陶山)·석담(石潭)·돈암(遯巖)의 전례가 있었고, 그가 몰세(沒世)한 뒤에 의관(衣冠)을 간직한 곳을 위해서는 심곡(深谷)·파산(坡山)·자운(紫雲)의 전규(前規)가 있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열성조(列聖朝)에서 어진 이를 존숭하고 도덕을 추장(推奬)해 온 일이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맨 처음으로 글을 숭상하는 정치에서 무릇 전열(前烈)들을 뒤쫓아 이어 가는 일과 선현(先賢)들을 높이어 숭상하는 일을 모두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신(臣)들의 소청을 윤허해 주시어 근본을 도타이 하고 교화(敎化)를 일으켜 가는데 하나의 큰 도움이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문정공의 도학(道學)은 나도 또한 일찍이 잘 알고 있는 바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70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인물(人物)
- [註 351]헌면(軒冕) : 관직(官職).
- [註 352]
절혜(節惠) : 시호(諡號)를 내려 주는 일.- [註 353]
쇄락(灑落) : 인품이 깨끗하고 속기(俗氣)가 없음.- [註 35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355]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356]
동강(東岡) : 《후한서(後漢書)》 주섭전(周燮傳)에, "선대(先代) 이후로 공훈(功勳)과 은총(恩寵)이 서로 계승되었는데, 그대는 홀로 왜 동쪽 산등성이의 언덕을 지키려고만 하는가?"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여, 선비의 은거(隱居)를 뜻함.- [註 357]
○己未/八道儒生尹鎰等上疏曰:
故文正公臣李縡, 早謝軒冕, 養德山林, 問學之醇篤, 文章之煥偉, 出處言議之正, 論著刪述之功, 流布一世, 塗人耳目, 而況如忠愛之發於誠心, 孝友之見於實行, 殆所謂: "通神明而貫金石矣。" 仰惟殿上之明聖, 豈有不俯燭之理哉? 是以代聽之初, 不待太常之狀, 特下節惠之典。 臣等於此, 聚首相慶, 欽仰聖德, 而抑恐殿下於縡道德之全備, 造詣之精深, 或有所未盡燭者。 蓋其爲學也, 以淸明精粹之質, 加眞實刻苦之功, 若其爲道, 則外若不甚矜持, 而動靜云爲之間, 繩尺不差, 內實不設畦畛, 而陰陽淑慝之際, 界分必嚴。 乃其晩年, 充養旣久, 踐履旣純, 淸而不激, 和而不流, 言議則剴切而通透, 胸懷則光明而灑落。 雖然縡之所以有功於斯文, 而裨益於世敎者亦大矣。 蓋縡適當世級衰下, 先輩凋零之際, 慨然以興斯文振士風爲己任。 況自辛壬以後, 士大夫之自占便宜者, 同流合汚, 橫生異議, 遂至義理都喪, 倫綱將頹, 乃牢守東崗, 介石不渝, 獨持正論, 確乎不撓, 使夫當世之爲人臣爲人子者, 猶知討賊復讎之爲可尙, 忘義循利之爲可恥, 則其於明天理正人心, 植倫綱扶世道者, 亦豈曰小補之哉? 惟此龍仁之寒泉, 卽縡考槃之鄕, 而邱墓之攸寄也。 遺塵播芬, 草樹猶馨, 聞風覿德, 輿儓咸仰。 臣等之必欲卽此地建祠妥靈者, 爲其生時講學之所, 則有陶山、石潭、遯巖之舊例; 爲其沒後衣冠之藏, 則有深谷、坡山、紫雲之前規。 此實列聖朝崇賢奬德之擧也。 顧今一初右文之治, 凡可以追紹前烈, 尊尙先賢者, 靡不畢擧。 特許臣等之請, 以爲敦本興化之一大助焉。
批曰: "文正之道學, 予亦曾所稔知矣。"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70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인물(人物)
- [註 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