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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4권, 정조 1년 8월 11일 갑진 1번째기사 1777년 청 건륭(乾隆) 42년

이찬을 추대하여 반정을 꾀하려던 일당을 복주시키다

제적(諸賊)들이 복주(伏誅)되었다. 지난달에 존현각(尊賢閣)에서 적변이 생긴 이후에 여러 차례 신칙하여 기찰(譏察)하도록 했었으나 오래도록 잡아내지 못했다. 이날 밤에 경추문 수포군(守鋪軍) 김춘득(金春得)·김세징(金世徵) 등이 서로 어울리어 몸을 포개고 누웠는데, 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2, 3차례 수포군을 부르자 김세징이 응하려고 했다. 김춘득은 이때에 나이가 17세 였는데, 시급히 제지하기를,

"부르는 음성이 이상스러우니 아직은 응하지 말고 다만 동정(動靜)을 살펴보자."

하였다. 조금 있다가 어느 사람이 곧장 경추문(景秋門) 북쪽 담장을 향해 가며 장차 몰래 넘어 가려고 하므로, 김춘득 등이 이웃의 수포군 김춘삼(金春三)·이복재(李福才) 두 사람을 툭툭 차서 일으키어 함께 추격하여 잡았는데, 병조를 경유하여 포도청(捕盜廳)으로 보냈고, 포도청에서 그 정절(情節)을 힐문해 보니 원동(院洞) 임장(任掌)인 전유기(田有起)로 이름을 흥문(興文)이라고 고쳐버린 자이었다. 대개 전흥문강용휘(姜龍輝)와 함께 존현각(尊賢閣) 중류(中霤) 위에 몰래 들어가 칭란(稱亂)하려고 도모하다가 실현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또 재차 거사(擧事)하려다가 마침내 수포군(守鋪軍)에게 잡히게 된 것이다. 포도청에서 계문(啓聞)하자 처음에는 정국(庭鞫)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 김춘득(金春得) 등을 차등 있게 상을 주고나서, 전흥문을 친국(親鞫)하자 전흥문이 공초(供招)하기를,

"홍술해(洪述海)의 아들 홍상범(洪相範)이 몰래 사사(死士)를 양성하여 반역(反逆)하려고 도모해 오는데, 호위 군관(扈衛軍官) 강용휘(姜龍輝)가 나는 듯이 효용(驍勇)하기도 하고 홍상범과 가까운 이웃이기도 하므로 깊이 서로 결탁(結托)하여, 좋은 벼슬자리로 꾀며 그가 하려고 하던 일을 해 가도록 시켰습니다. 그런데 신(臣)은 여력(膂力)이 있으면서도 빈궁(貧窮)하여 스스로 꾸려 가지 못했기 때문에 강용휘가 신에게 돈 1천 5백 문(文)을 주고 여노(女奴)를 아내로 허급해 주며 함께 일을 같이 해 가기를 요구했기 때문에 신이 과연 승낙을 했었고, 언제나 강용휘와 함께 홍상범(洪相範)이 살고 있는 홍대섭(洪大燮)의 집에 가면 홍 동지(洪同知)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홍상범과 9촌(寸) 친족이 되는 사람으로서 비밀로 모의(謀議)하는 것을 참여하여 들었고, 또한 김흥복(金興福)이란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이 이틀을 머무르면서 비밀로 모의한 것을 들어 보았는데, 홍상범강용휘에게 묻기를, ‘자네와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하자, 강용휘가 말하기를, ‘20인은 구득할 수 있다.’고 하니, 홍상범이 즉시 그들의 성명을 죽 써서 상자 속에 간수하며, 기일(期日)을 지정(指定)하여 잠입(潛入)하기로 하되, 강용휘는 철편(鐵鞭)을 지니고 신(臣)은 예리한 칼을 지니고서 대궐로 들어가다가 사람을 만나면 곧장 죽여버리고, 홍상범은 20인을 거느리고 그 뒤를 밟아 가며 변동(變動)을 살펴 보아 대응해 가기로 언약하며, 약속을 이미 정했었습니다. 7월 28일에 대궐 밖의 개 잡는 집에 가서 강용휘와 신이 개장국을 사 먹고 나서 함께 대궐 안으로 들어갔는데, 강계창(姜繼昌)이라는 별감(別監)과 강월혜(姜月惠)라는 나인(內人)을 불러 한참을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날이 또한 저물어서는 약방(藥房) 맞은편의 문안소(問安所)에서 강용휘는 어깨로 신(臣)을 올려 주고 신은 또한 손으로 강용휘를 끌어 올렸는데, 강용휘가 옷자락을 걷어 맨 데에서 모래를 움켜 주고서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다 존현각(尊賢閣)의 중류(中霤)에 이르러서는 기왓장을 제치다 모래를 부리다 하여 도깨비짓을 하며 사람들의 시청(視聽)을 현혹시켜 장차 부도(不道)한 짓을 이루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궐 안에서 물 끓듯 하는 소리가 들리고 수색이 매우 다급해졌기 때문에, 신이 강용휘와 처마 밑으로 뛰어내려와 신은 보루각(報漏閣) 뒤의 풀 속에 엎드려 있다가 날이 새서야 흥원문(興元門)으로 해서 도망쳐 나오고, 강용휘금천교(禁川橋)로 향하여 수문통(水門桶)을 제쳐버리고 빠져 나왔습니다. 그 이튿날 개 잡는 집에서 서로 모이었는데, 보니 그의 한쪽 발은 물에 넘어져 아직도 젖어 있었고, 홍상범과 성이 김가(金哥)인 사람이 또한 수문통에서 뒤를 밟아 가다가 사세의 기미가 이미 틀려버린 것을 보고서 곧바로 빠져 나왔었습니다. 강용휘가 다시 신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홍상범의 집에서 재차 모여야 할 것이니 삼가 새어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했었고, 대가(大駕)가 환어(還御)하셨음을 듣고 나서는 재차 거사하려고 도모하다가 마침내 수포군(守鋪軍)에게 잡히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액례(掖隷) 강계창(姜繼昌)과 궁인(宮人) 강월혜(姜月惠)를 국문하였다. 강월혜강용휘(姜龍輝)의 딸이고 강계창은 그의 조카이다. 강계창이 공초하기를,

"7월 28일에 신이 차비문(差備門)에서 직숙(直宿)할 때에 바야흐로 황혼(黃昏)이 되었는데, 전흥문(田興文)이 전립(戰笠)을 쓰고 칼을 끼고서 신(臣)의 방에 와서 신을 불러 하는 말이, ‘오늘 대내(大內)에서 자고 싶은데 아주 가까이 할 만한 데가 있느냐?’고 하였고, 이어 대전(大殿)의 차비문이 어디 있는지를 묻기에, 신이 말하기를, ‘알아서 무엇 하려느냐?’고 하자, 전흥문이 말하기를, ‘큰 일인데 어찌 경솔하게 누설할 수 있겠느냐? 뒤에 마땅히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했었습니다. 신이 ‘무엇하러 칼을 끼고 있느냐?’고 묻자, 전흥문이 말하기를, ‘존현각(尊賢閣) 위에 올라가야 되겠는데, 와서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찌르려는 것이다.’ 하고, 다시 대전의 차비문을 굳이 묻기에, 신이 책망하기를, ‘망령된 말은 하지 말라. 장차 나에게까지 관련이 되어 처형되겠다.’고 하니, 전흥문이 말하기를, ‘염려하지 말라. 너에게 있어서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에 이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자네와 함께 하겠다.’ 하고서, 드디어 현모문(顯謨門) 안쪽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여기가 대전의 차비문이다.’ 하니, 전흥문광달문(廣達門) 곁을 두루 돌면서 쳐다보다 내려다보다 바라보다 했습니다. 얼마 안되어 강용휘가 허리 뒤에 철편(鐵鞭)을 끼고서 비슬거리며 왔고, 신(臣)을 시켜 그의 딸 강월혜(姜月惠)를 불러다가 그와 서로 주고받는 말이 모두가 흉패(凶悖)하고 부도(不道)한 말이었고, 또 말하기를, ‘만일에 다급한 일이 있게 되면 네가 나를 숨겨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때에 전흥문은 가설(加設)한 차비문 곁에 서 있었고, 조라치(照羅赤)로 성이 황가(黃哥)인 자도 또한 곁에서 보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이 두 사람이 각기 흩어져 갔었고, 이날 밤에 과연 존현각(尊賢閣) 위의 변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전흥문(田興文)이 한 일은 누가 시켜서 한 것이고, 강월혜(姜月惠)는 또한 안에서 협모(協謀)했었느냐?"

하니, 강계창이 또 공초하기를,

"전흥문이 스스로 말하기를, ‘원동(院洞)에 사는 성이 홍가(洪哥)인 사람이 그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했고, 강월혜(姜月惠)가 협모(協謀)한 짓은 오직 고 상궁(高尙宮)이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였고, 강월혜가 공초하기를,

"고 상궁은 곧 방주(房主)이기 때문에 과연 강용휘(姜龍輝)가 한 말을 전했더니, 고 상궁이 만류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의 양녀(養女) 복문 상궁(福文尙宮)과 함께 방안에서 이 일을 비밀로 말하며 속으로 성공하기 바랐었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고수애(高秀愛)복빙(福氷)을 국문하였다. 수애는 곧 고 상궁이고 복빙은 곧 복문 상궁인데, 다같이 자복하지 않았다. 고수애(高秀愛)에게 묻기를,

"별감 고정환(高晶煥)이 대궐 안팎에서 폐단을 일으켜 죄가 진실로 용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곤장(棍杖)으로 다스려 징계하고 격려하도록 명했던 것인데, 네가 감히 원망하는 말을 했었고, 너의 온 족속이 모두 김귀주(金龜柱)의 집과 친밀하여 그 김귀주를 처분(處分)했을 때에 네가 또한 감히 원망하는 말을 했었다. 여타의 죄악에 있어서는 비록 색언(索言)하고 싶지 아니하여 오히려 지금까지 포용(包容)하고 있는 것이다마는, 이는 곧 더없이 큰 관대한 은전(恩典)인데 어찌 감히 옛날에도 없던 흉악한 말에 있어서 마치 심상하게 듣고 또 따라서 기뻐하는 기색을 띠게 될 수 있겠느냐?"

하니, 고수애가 공초하기를,

"죄지은 줄 알겠습니다. 죄지은 줄 알겠습니다."

하였다. 이어 강용휘(姜龍輝)를 국문하니, 강용휘가 공초하기를,

"홍지해(洪趾海)의 조카 홍상범(洪相範)이 신(臣)에게 종용(慫慂)하기를, ‘자네가 궁색하고도 곤란한 처지인데, 내 말을 들어준다면 마땅히 좋은 벼슬을 띠게 될 것이다.’ 하였기에, 신이 발신(拔身)하기에 급하였습니다. 7월 28일에 신은 철편(鐵鞭)을 끼고 전흥문(田興文)은 칼을 끼고서 몸을 숨기어 대궐에 들어가, 강계창(姜繼昌)강월혜(姜月惠)를 만나 차비문(差備門) 길을 가리키도록 하여 존현각(尊賢閣) 위에 올라가 기미를 보아 반역하려고 하다가, 대궐 안이 물 끓듯 하게 되었기에 각자 도망쳐 돌아갔습니다."

하였다. 그 이튿날에는 홍상범을 국문할 차례이었다. 홍상범홍술해(洪述海)의 아들인데, 전주(全州)에서 종적을 숨기며 상경(上京)하여 더러는 홍대섭(洪大燮)의 집에서 자다 더러는 홍신덕(洪信德)의 집에서 자면서 홍필해(洪弼海)강용휘·전흥문과 함께 새벽이나 밤이면 서로 모이어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해 왔었는데, 전흥문의 일이 발각되면서는 제적(諸賊)들에게 말이 연결되었고 금오(金吾)의 체포(逮捕)가 다급해지므로, 홍상범홍필해가 모두 풍문에 〈놀라〉 도망하여 숨어버렸었다. 드디어 홍신덕(洪信德)홍대섭(洪大燮)을 국문했는데, 홍대섭이 자복하지 않다가 또 말하기를,

"홍상범전라도(全羅道)에 간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하고, 홍신덕은 공초하기를,

"올해 6월 무렵에 홍상범이 그의 집에다 제적(諸賊)들을 모았을 적에, 최세복(崔世福)박해근(朴海根)이란 자가 있었는데 모두 홍술해의 적소(謫所)에서 와서 함께 비밀로 모의(謀議)하는 것에 참여했는데, 그 모의는 자객(刺客)을 모집하여 먼저 도승지(都承旨)를 해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고, 최세복박해근을 국문하니, 최세복이 공초하기를,

"홍술해의 적소(謫所)에 오가며 그의 심복(心腹)이 되었고, 박해근이 일찍이 승정원(承政院) 사령(使令)이 되었을 적에 전 사약(司鑰) 김수대(金壽大)와 서로 친숙했었는데, 김수대의 생질녀 김금희(金今喜)가 바야흐로 나인(內人)이 되었기에, 반연(攀緣)266) 을 대고 주선하여 신(臣)을 배설방(排設房) 고직(庫直)으로 차출(差出)하기를 도모하려고 했습니다. 칼을 품고서 몰래 틈을 엿보다가 기회를 타 반역하기로 하였음은 과연 홍신덕이 한 말과 같습니다."

하고, 박해근이 공초하기를,

"단지 반연을 대고서 차출되기를 도모하는 것을 알고서 함께 힘을 쓰기만 했고, 반역 모의에 있어서는 진실로 참여하여 듣지 못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6월에 홍상범을 보러 갔더니, 홍상범이 도성(都城) 안에 잠입(潛入)했다는 말을 누설하지 말라고 간절하게 부탁했기 때문에 신(臣)이 과연 승낙했었고, 여타에는 한 말이 없습니다."

하고, 이어 함구(緘口)하고 자복하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광진(廣津)에서 홍상범을 잡아왔으므로, 묻기를,

"강용휘(姜龍輝)전흥문(田興文)을 아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므로, 강용휘·전흥문과 대질(對質)하도록 명하자, 홍상범이 겁을 내며 말하기를,

"몽두(蒙頭)를 벗기지 말고, 먼저 두 사람에게 신(臣)의 면모(面貌)를 물어보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몽두를 벗기고 강용휘와 대질하게 되자, 홍상범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 있다가 비로소 강용휘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를 아느냐?"

하자, 강용휘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너를 알지 못하겠느냐? 너는 곧 홍 판서(洪判書)의 조카이다."

하였다. 또 전흥문과 대질했는데, 전흥문이 말하기를,

"네가 홍술해(洪述海)의 아들이 아니냐? 그끄저께 네가 강용휘와 함께 원동(院洞) 홍대섭(洪大燮)의 집에 모이어 수박을 사다 먹을 적에 곁에 너와 성이 같은 사람이 함께 있었는데, 네가 감히 바른 대로 고하지 않는 것이냐?"

하니, 홍상범이 말하기를,

"내가 석 달 동안이나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었으니, 네가 본 사람은 필시 나의 서제(庶弟)일 것이다."

하자, 전흥문이 말하기를,

"나는 너의 서제는 알지 못하고 단지 너만 알고 있다."

하였다. 홍대섭을 국문하니, 홍대섭이 처음에는 자복하지 않다가, 전흥문과 대질하자 홍대섭의 말이 굴하였다. 이 때 홍상범이 하나하나 자복하는 말이 전흥문강용휘가 공초한 말과 같았다. 그 이튿날은 김수대(金壽大)를 친국(親鞫)하였다. 김수대는 곧 최세복(崔世福)의 공초 내용에서 말한 전 사약(司鑰)으로서, 최세복을 위하여 배설방(排設房) 고직(庫直)으로 차출하기를 도모한 사람인데 또 하나의 이름은 최흥복(崔興福)이다. 김수대가 공초하기를,

"신이 무녀(巫女) 점방(占房)의 지아비 김흥조(金興祚)와 의사촌(義四寸)으로 결의하여 자주 서로 오가며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으레 함께 의논합니다. 올해 2월에 신이 집을 사기 위하여 김흥조의 집에 갔다가, 점방이 종기(腫氣)로 앓고 누웠기에 신이 그의 병을 진찰하고 나서, 신의 어린 자식에 대한 길흉(吉凶)을 물었더니, 점방의 말이 ‘내가 바야흐로 긴요하고도 시급한 일이 있으니 마땅히 다음에 점을 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신이 ‘무슨 일이냐?’고 하자, 점방의 말이, ‘홍술해(洪述海)의 집에서 그가 풀려나 돌아오게 되겠는지 나더러 점을 쳐 주기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점쳐 보니 점괘가 자못 길(吉)했었다. 만일에 누가 중간에서 주선을 해 준다면 마땅히 묘한 수가 있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무슨 묘한 수냐?’고 하자, 점방이 말하기를, ‘홍술해가 먼저 돈 40냥(兩)을 보내어 액속(掖屬)들과 서로 결탁하도록 도모하였고, 일이 이루어진다면 마땅히 4백 냥의 은자(銀子)로 후하게 보답하겠다고 했으니, 당신이 액속들과의 길을 도모해 갈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는 이욕(利欲)을 노리는 마음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어 이로부터는 더욱 자주 오가며 사이가 없이 친밀했는데, 그제는 점방이 돈 40냥을 신에게 주기에 신이 김흥조(金興祚)와 절반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점방이 하는 말이, ‘궁금(宮禁)에서 일을 주선해 가는 방도는 반드시 복심(腹心)인 사람으로 대궐 안의 긴요한 임무에 오래 있게 된 다음에야 일을 해내게 될 수 있다. 최세복(崔世福)홍술해의 종으로, 홍술해의 적소(謫所)에 오가면서 항상 제 상전(上典)을 위하여 한번 죽으려는 마음을 먹고 있고, 그의 아내가 또한 바야흐로 우리 집에 드나들고 있는데, 만일에 최세복을 배설방(排設房) 고직(庫直)으로 삼는다면 기회를 타 계획을 이루게 될 것이니, 당신이 도모해 보라.’고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우리 사촌(四寸) 김복상(金福尙)이 바야흐로 별감(別監)이 되었고 그의 종매(從妹)가 또한 궁녀(宮女)이니 이들과 함께 하기는 쉽다.’고 했습니다. 그 뒤에 김복상(金福尙)을 보고 차출(差出)을 도모하는 일을 은밀하게 언급했더니, 김복상이 대답하기를, ‘만일에 의열궁(義烈宮)의 차지(次知)나 중관(中官)에게 청탁한다면 얻게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해 5월에 점방(占房)이 병으로 죽었을 적에 홍술해의 아내가 그 종을 보내어 돈 10냥(兩)을 부의했고, 그 뒤부터는 김흥조(金興祚)가 그의 아내를 대신하여 홍술해의 집에 오가며 치밀하게 하는 일을 참여하여 들었고, 신(臣)도 또한 올해 7월에 수박[西瓜]과 망건(網巾) 등속을 판매(販賣)하는 일로 광진(廣津)까지 갔다가 홍술해의 집에 찾아가 홍술해의 아내에게 안부를 묻고, 홍술해의 종에게 맥반(麥飯)을 사 먹었습니다. 그 뒤에 또 재동(齋洞) 노상(路上)에서 홍술해의 종을 만나게 되었기에, 신(臣)이 또한 ‘어찌해야 너의 지아비가 배설방(排設房) 고직(庫直)이 되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대개 배설방의 고지기는 차비문(差備門)과 지극히 가까운 데까지 드나들게 되는 것인데, 최세복(崔世福)은 효용(驍勇)하고 검술(劒術)이 있었으니, 최세복을 배설방에 있게 하려 한 것은 장차 도승지(都承旨)를 모해(謀害)하고서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미처 가려고 한 것입니다. 점방(占房)이 생존했을 때에 홍술해의 아내가 매양 언문(諺文) 서찰(書札)을 자주 점방에게 보내오면 점방이 보고나선 곧장 불살라버렸고, 신(臣)도 일찍이 그 언문 서찰 내용의 말을 대강 들어보았는데 대부분 저주(詛呪)하는 일인 것이었습니다. 점방이 항시 종이로 만든 인형(人形)에다 부적(符籍)과 주문(呪文)을 곁들여 널리 여러 곳에 묻었고, 또한 오방 신장(五方神將)을 그리어 집 벽에 붙이고, 경(經)을 읽으며 비손했었고, 점방이 병이 심해졌을 때에 당하여 신에게 하는 말이, ‘내가 병이 낫게만 되면 그제는 마땅히 이러한 계획을 성공시켜 홍술해(洪述海)의 원수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신이 진실로 난만(爛漫)하게 실정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김수대(金壽大)김복상(金福尙)을 대질(對質)했는데, 김복상김수대에게 말하기를,

"네가 과연 차출(差出)을 도모하는 일을 나에게 말하기는 했다. 그러나 의열궁(義烈宮) 차지나 중관이 마침 능소(陵所)에 가 있기 때문에 언급(言及)하지 못했었다. 여타의 흉악한 모의(謀議)에 있어서는 당초부터 듣지 못했다."

하고, 김수대김복상에게 말하기를,

"흉악한 모의는 누구에게나 전할 수 없는 것이기에 과연 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였다. 김흥조(金興祚)를 국문했다. 김흥조가 공초하기를,

"신은 본래 교동(喬桐) 사람입니다. 점방(占房)이라는 무녀(巫女)에게 장가들어 서울로 이사하여 살면서, 홍술해의 집과 친밀(親密)하여 노복(奴僕)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홍술해가 귀양가고 난 뒤인 올해 2월에 김수대(金壽大)가 신의 집에 와서 신에게 하는 말이, ‘홍술해가 석방될 길이 있다.’고 했는데 신이 홍술해의 집과 친밀한 사이라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기뻐서, 홍가(洪哥)의 집 종으로 최세복(崔世福)의 아내가 된 사람을 불러 함께 만나 보았더니, 김수대가 말하기를, ‘나의 누이가 나인(內人)이 되어 있으므로 마땅히 잘 주선(周旋)을 하여 반드시 너의 상전(上典)이 풀리어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에 재물이 있다면 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 했습니다. 홍가의 종이 돌아가서는 즉시 돈 40냥(兩)을 보내며 그 성사(成事)를 부탁했기에, 김수대가 30냥을 가지고 신은 10냥을 가졌으며 저주(詛呪)하는 일에 있어서는 전연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감정(甘丁)을 국문했다. 감정홍술해의 종인데, 공초하기를,

"홍술해가 귀양갈 적에 부적(符籍)과 저주(詛呪)할 물건을 퇴침(退枕) 속에 감추어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 뒤에 신이 홍술해 아내의 지휘(指揮)를 받고서 돈 55냥을 가지고 정이(貞伊)와 함께 김흥조(金興祚)의 집에 갔었는데, 그의 아내 무녀(巫女)인 점방(占房)이 함께 수유점(水踰店)으로 나가 저주하고 비손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김흥조가 항시 하는 말이, ‘만일에 재물을 많이 구득한다면 너의 상전이 풀리어 돌아오게 할 수 있다.’고 했었기에, 신이 반갑게 그의 말을 듣고서는 홍술해의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홍술해의 아내가 그제는 돈 40냥 및 면주(綿紬) 1필과 관복(冠服) 1벌을 신에게 주기에 신이 점방(占房)의 집에 가지고 갔더니, 점방이 오방(五方)의 우물물과 홍술해의 집 우물물을 길러 오고 또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의 집 우물물을 길어다가 하나의 그릇에 합치어 섞어서 홍술해의 집 우물에다 쏟았습니다. 또 주사(朱砂)로 화상(畵像) 둘을 그리어 하나는 홍국영으로 지칭하고, 하나는 모성 양반(某姓兩班)으로 했는데, 곧 감히 말을 할 수 없는 자리이었습니다. 화살을 두 화상에다 얽어 매고, 이어 초교(草轎)를 타고 홍술해의 집으로 가서 홍술해의 아내에게 보이니, 홍술해의 아내가 보고 나서는 도로 점방에게 주며 묻을 만한 자리에 묻도록 했었습니다. 점방이 또 활과 화살을 만들어 공중을 향해 쏘면서 ‘이는 곧 꼭 죽을 사람에게 대한 방법이다.’고 하였고, 또 부적과 주문을 써서, 그의 지아비를 시켜 홍국영의 문 앞 길에 묻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그 사람들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김흥조가 다시 신에게 하는 말이, ‘궁녀(宮女)의 유부(乳父)인 사람이 있는데 나와 친밀하니 만일에 은(銀)을 많이 구득하여 뇌물을 한다면, 나인(內人)들은 재물을 탐하기 때문에 반드시 묘한 수가 있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그의 말을 곧이 듣고서 또한 홍술해의 아내에게 전했습니다. 무릇 언제나 수작(酬酢)하는 말을 할 적에 국가(國家)를 언급하며 으레 모성 양반(某姓兩班)이라고 칭했습니다."

하였다. 감정(甘丁)김흥조를 대질(對質)하게 하였다. 감정김흥조에게 말하기를,

"네가 어찌 ‘궁녀(宮女)의 유부(乳父)인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의 길을 통해 뇌물을 한다면 귀양간 사람을 돌아오게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묻기를, ‘그 유부란 사람이 누구냐?’고 하자, 네가 어찌 ‘성명이 김수대(金壽大)인데 또한 궁녀(宮女)인 생질을 두어 세력이 매우 크다.’고 하지 않았었느냐? 내가 너의 말을 달갑게 듣고 나서 ‘마땅히 너의 상전(上典)에게 고하겠다.’고 하자, 네가 또 말하기를, ‘일이 누설되기 쉬우니 오갈 적에는 반드시 개두(盖頭)를 하여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한결같이 너의 말대로 하여 너의 상전에게 가서 고하고, 정이(貞伊)와 함께 돈과 면주(綿紬) 및 관복(冠服)을 가지고 다시 너의 집에 가서, 비손할 적에 너의 아내 점방(占房)이 오방(五方)의 물을 길어다가 방법을 하고, 주사(朱砂)로 형상을 그리고서 그 위에다 화살을 얽어 매고, 또한 부적(符籍)과 주문(呪文)을 써서 너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묻게 하지 않았느냐? 무릇 이렇게 한 곡절을 네가 감히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자, 김흥조감정에게 말하기를,

"너의 집 일을 네가 모두 사실대로 털어놓았으니, 내가 비록 엄폐하고 은휘(隱諱)하려고 한들 되겠느냐?"

하고, 드디어 김흥조가 공초하기를,

"홍술해의 아내가 과연 감정을 시켜 신(臣)의 아내를 만나러 왔었는데, 그의 지아비가 귀양간 것을 들어 기필코 도승지(都承旨)에게 앙갚음하려고 했기에, 부적을 써서 그가 드나드는 길에 묻었고, 또한 주사로 화상 둘을 그리어 그 위에다 화살을 얽어 맺는데, 하나는 도승지를 뜻하고 하나는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를 뜻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궁인(宮人) 중에 김수대(金壽大)의 절족(切族)인 사람을 인하여 뇌물을 주고 흉계(凶計)를 부리려고 했었습니다. 무릇 이와 같은 짓을 하였음은 한결같이 감정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하였다. 정이(貞伊)를 국문하였다. 정이홍술해(洪述海)의 종의 아내이다. 공초하기를,

"신이 일찍이 무녀(巫女) 점방(占房)과 서로 친숙한 사이인데 홍술해의 아내가 감정(甘丁)을 시켜 점방에게 가서 보고 저주(詛呪)하는 일을 하려고 하면서 신으로 하여금 그 집을 가르쳐 주게 했었기에, 신이 드디어 감정과 함께 그 집에 갔었고 비손하게 되었는데, 대개 홍술해가 석방되어 돌아오게 하는 술책을 부리고 또한 홍 승지(洪承旨)를 해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또 주사(朱砂)로 화상 둘을 그리어 하나는 도승지(都承旨)라 지칭하고 하나는 모성 양반(某姓兩班)이라 지칭했었는데 곧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이었습니다. 쑥대 화살을 화상 위에 얽어 매고 공중을 향해 쏘았다가 이어 동쪽과 서쪽에 나누어 묻었는데, 이는 오로지 홍술해를 위하여 원수 갚는 짓을 한 것이었습니다. 점방(占房)이 친숙하게 지내는 별감(別監)의 말이 ‘많은 은화(銀貨)를 들여 그의 족속으로 나인(內人)이 된 자와 서로 내통(內通)한다면 성사(成事)할 수 있다.’고 하였고, 이어 신의 지아비 최세복(崔世福)을 배설방(排設房) 군사(軍士)로 세우기 권유하여, 기회를 타 변을 일으키어 반역을 도모하려고 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대사헌 정창순(鄭昌順) 등이 아뢰기를,

"홍술해의 아내가 요망한 무당과 결탁하여 자객(刺客)을 사 모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를 그림으로 그려 석천(射天)267) 하는 흉악한 짓을 저지르기까지 하였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저주(詛呪)하는 짓을 하여 무고(巫蠱)의 변(變)을 자행(恣行)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한 말은 지극히 흉참(凶慘)한 것이고 그가 부린 꾀는 지극히 악독한 것이어서 이는 진실로 만고(萬古)에도 없었던 대역(大逆)입니다. 어찌 부녀자(婦女子)인 것 때문에 구애(拘礙)하여 즉각 국문(鞫問)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시 잡아다가 준엄하게 국문하여 정법(正法)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이튿날 효임(孝任)을 친국(親鞫)하였다. 효임이 공초하기를,

"신이 지난해 이후부터 불만을 품고 국가를 원망하며 신의 자식 홍상범(洪相範)과 함께 갖가지 방도로 틈을 엿보아 기필코 국가에 앙갚음하고 싶었습니다. 올해 7월에 김흥복(金興福)이라는 사람이 반감(飯監)이라고 자칭(自稱)하며 광진(廣津)으로 신의 자식을 만나러 왔었는데 신의 자식은 마침 용인(龍仁) 땅에 갔었습니다. 김흥복이 스스로 하는 말이, ‘나는 곧 지난날에 문하(門下)에 드나들던 사람이다.’고 하였고, 이어 신의 집 종을 불러 신에게 안부를 물었고, 또한 신의 집 종에게 하는 말이, ‘만일에 은자(銀子) 4백 냥을 구득한다면 귀양 길이 자연히 풀리어 돌아오게 될 길이 있다.’고 하기에, 신이 ‘은자가 없다.’고 답변했었습니다. 그 뒤에, 신의 집 종의 아내인 이름이 정이(貞伊)라는 사람이 평소에 김흥복과 서로 친숙한 사이이었는데, 정이가 항시 하는 말이 ‘이름이 점방(占房)이라는 무녀(巫女)가 있는데 매우 영이(靈異)하므로, 만일에 저주(詛呪)하는 일을 한다면 주인(主人)이 마땅히 돌아오게 될 것이다.’고 했기에, 신이 드디어 돈 55냥을 주면서 정이감정(甘丁) 등으로 하여금 함께 점방의 집에 가서 비손하도록 했었습니다. 정이가 돌아와서 그 상황을 말하기를, ‘제상(祭床) 하나를 차려서 밥과 떡, 과일과 나물을 갖추어 놓고는 점방이 사방으로 향하여 절하고 춤추는 방법을 하였고, 방법을 하는 사람은 점방과 그의 지아비 김흥조(金興祚)이었는데 혹은 종이로 인형(人形)을 만들고, 혹은 우물물을 길어 오고, 혹은 물형(物形)을 그려서 부적(符籍)을 붙이고 주문(呪文) 읽는 일을 하였으며, 따로 화상 둘을 주사(朱砂)로 그리어 쑥대 화살을 얽어 매고서 하나는 모성 양반(某姓兩班)으로 지칭하고 하나는 도승지(都承旨)로 지칭하여 길 곁에 묻기도 하고 집 뒤에 묻기도 했다.’고 했으니, 저주(詛呪)하였음은 사실입니다. 또 종의 지아비 박해근(朴海根)이 바야흐로 승정원 가사령(承政院假使令)이고 김흥복(金興福)이 바야흐로 반감(飯監)으로 있었기에, 궁인(宮人)들에게 연줄을 대고 환시(宦侍)들과 결탁하여, 최세복(崔世福)을 배설방(排設房) 고직(庫直)으로 차출(差出)되기를 도모하여, 오래 금중(禁中)에 있으며 기회를 타 흉계를 부리게 하려는 계획을 했었습니다. 신의 자식 홍상범(洪相範)전흥문(田興文)·강용휘(姜龍輝) 무리를 모집(募集)하여 이검(利劒)과 철편(鐵鞭)을 지니고서 저문 때를 타 대궐에 들어가 존현각(尊賢閣) 용마루에 올라가 기회를 엿보아 범상(犯上)하는 짓을 하되, 나인(內人)으로 있는 강용휘의 딸과는 내응(內應)하도록 약속하고, 불러 모은 강용휘와 친숙한 무뢰배(無賴輩) 50명은 뒤를 밟아 가며 관망(觀望)하도록 했었고, 계획대로 이루게 되지 못하여서는 또한 전흥문을 사주(使嗾)하여 몰래 궁궐 담장을 넘어가 망측(罔測)한 일을 하도록 도모했었으니, 반역을 도모하였음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개련(介連)을 국문하였다. 개련홍술해의 첩이다. 공초하기를,

"신이 홍술해의 집에 있을 때에 취오(炊鏊)하며 비손을 하는 상황을 보았고, 또 홍술해의 아내가 감정(甘丁)정이(貞伊)의 무리를 보내며 돈을 가지고 무녀(巫女)의 집에 가서 저주(詛呪)하게 하는 일도 보았습니다. 신도 역시 일찍이 국가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서 효임(孝任)과 함께 협력하여 치밀하게 하였으니, 안으로는 자객(刺客)에 관한 일과 밖으로는 저주하는 일들을 함에 모두 함께 공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홍필해(洪弼海)를 국문하였다. 홍필해는 곧 전흥문(田興文)의 공초(供招) 내용에 홍동지(洪同知)라는 사람이고, 홍상범의 공초 내용에는 홍상간(洪相簡)을 교사(敎唆)하여 반역하게 했다는 사람이다. 역모 옥사(獄事)가 일어난 뒤에 도망하여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았었는데, 이에 이르러 천경군(踐更軍)들이 청파(靑坡)에서 홍필해를 잡아다 바쳤었다. 홍필해가 공초하기를,

"신이 무과(武科) 출신(出身)으로 홍상간의 집에서 먹고 지내면서, 홍상간이 복법(伏法)된 뒤에 홍상범(洪相範)홍상길(洪相吉)의 무리가 항시 국가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으며 언제나 하는 말이, ‘기필코 원수를 갚고 싶다.’고 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홍상범의 종 감정(甘丁)·정이(貞伊)홍상길의 종 종례(宗禮)가 매양 홍상길의 지시를 받고서 액속(掖屬)들과 서로 내통하였고, 또 이기동(李奇同)이라는 사람이 예문관(藝文館)의 청직(廳直)으로서 홍상간(洪相簡)의 겸종(傔從)이 되었는데 그의 친속(親屬)에 궁인(宮人)이 많았으므로, 홍상범홍상길의 무리가 매양 밤이면 세 비녀(婢女)들을 이기동에게 보내어 연줄을 찾아 결탁하기를 도모했는데, 그 한없이 흉악한 음모(陰謀)는 이기동으로 하여금 궁인(宮人)을 끼고서 밤을 타 침실(寢室)에 들어가 극악을 부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듣고서는 또한 일찍이 화를 내어 책망했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무부(武夫)이어서 지식이 있지 않기에 감히 상변(上變)하지 못했습니다. 홍상길이 일찍이 고양(高陽) 땅에 가서 그의 외삼촌숙모(外三寸叔母)를 만나고 왔는데, 그 외삼촌숙모는 곧 이상로(李商輅)의 아내입니다. 신이 홍상길에게서 수작(酬酢)한 말을 들어 보건대, ‘그의 숙모 말이, 「네가 서로 내통하고 있는 곳에 나도 또한 비복(婢僕)들을 보내어 서로 내통해야 하겠거니와 감정(甘丁)도 또한 조정철(趙貞喆)의 집에 오간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그 이튿날 김수대(金壽大)를 친국하였다. 김수대는 곧 김흥복(金興福)인데, 김흥조(金興祚)의 반역 음모를 난만(爛漫)하게 실정을 알고 있은 것으로 승복(承服)하였다. 또 그 이튿날 홍상길(洪相吉)을 친국하였다. 홍상길은 곧 홍염해(洪念海)의 아들이고 홍상범(洪相範)의 사촌이다. 홍필해(洪弼海)의 공초에 따라 체포하게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잡아다가 국문했다. 홍필해와 대질(對質)하게 하였는데, 홍필해홍상길에게 말하기를,

"7월 24일에 네가 ‘홍상범의 집에서 종례(宗禮)의 집으로 가 유숙(留宿)하겠다.’고 했기에 내가 너를 보러 갔었는데, 네가 말하기를, ‘집 안에 서적(書籍)들을 수습해야 하겠고 또한 해야 될 일이 있다.’고 했었고, 이어 서찰(書札)을 만들어 종례로 하여금 전달하게 했는데 그중에 하나는 이기동(李奇同)의 집의 것으로서, 그 음모는 곧 궁금(宮禁)과 서로 내통하여 곧장 침내(寢內)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네가 홍상간(洪相簡)이 죽은 뒤부터는 낮이나 밤이나 국가를 원망했었으니, 어찌 그런 흉악한 음모를 하게 되지 않았겠느냐? 또 네가 일찍이 너의 외삼촌숙모(外三寸叔母)인 이상로(李商輅)의 아내에게 가서 보고는, 그와 수작(酬酢)한 말을 나에게 전해 주는 것이 더없이 흉악한 정절(情節)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네가 어찌 감히 발명(發明)할 수 있겠느냐?"

하니, 홍상길의 말이 꿀려서 공초하기를,

"흉도(凶徒)들과 결탁하여 침내(寢內)에서 변을 일으키어 반역을 도모하려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국문하기를,

"너와 결탁한 사람이 누구냐?"

하니, 공초하기를,

"이기동(李奇同)의 족친(族親)으로 나인(內人)이 된 사람입니다."

하고, 국문하기를,

"유독 나인만이 아니고 또한 반드시 중관(中官)도 결탁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른대로 고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계동(桂洞) 신(臣)의 집 건너편에 사는 안국래(安國來)입니다."

하고, 국문하기를,

"그 궁인(宮人)은 누구이냐?"

하니, 공초하기를,

"이기동의 사촌(四寸)으로 수진동(壽進洞)에 사는 사람입니다."

하고, 국문하기를,

"네가 안국래의 집으로 갔었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안국래의 집으로 갔었으나 안국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국문하기를,

"어느 때에 안국래의 집에 갔었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연전(年前)에 두어 차례 오갔었고, 올해 7월 24일 저녁에 또 안국래의 집에 가서, 신이 말하기를, ‘죽은 사람은 그만이거니와 살아 있는 사람은 어느 때에나 돌아오게 될 것인지?’ 하고서, 이어 안국래로 하여금 다른 중관(中官)을 모아서 힘을 합쳐 도모하도록 하니, 안국래가 말하기를,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다.’고 했었습니다. 무릇 성궁(聖躬)의 모해(謀害)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신이 모두 참여하여 간섭한 것인데, 강용휘(姜龍輝)·전흥문(田興文)·박해근(朴海根)은 비록 홍상범이 결탁한 사람이지만, 최세복(崔世福)에 있어서는 과연 신이 기회를 보아 변을 일으키게 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국문하기를,

"네가 성궁(聖躬)을 모해하고서 그 뒷일을 장차 어떻게 하려 한 것이냐?"

하니, 공초하기를,

"종친(宗親) 중에 현명한 분을 가리기로 했습니다."

하고, 국문하기를,

"그가 누구이냐?"

하니, 공초하기를,

"삼왕손(三王孫)268) 께서 어질다는 명망이 있으므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하고, 국문하기를,

"추대하려는 모의(謀議)는 누구와 함께 했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홍계능(洪啓能)이 맨 먼저 이런 모의를 했습니다. 3,4월 무렵에 홍계능이 그의 아들 홍신해(洪信海) 및 그의 조카 홍이해(洪履海)와 함께 신에게 말하기를, ‘금상(今上)은 국정(國政)을 잘못한 것이 많다. 추대(推戴)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인조(仁祖) 반정(反正) 때의 일과 같이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고, 국문하기를,

"함께 참여한 사람은 누구이냐?"

하니, 공초하기를,

"민홍섭(閔弘燮)이택수(李澤遂)가 그 모의에 대한 것을 압니다."

하고, 추대 절차를 물으니, 공초하기를,

"태갑(太甲)269) 의 고사(故事)처럼 하되, 민홍섭홍낙임(洪樂任) 같은 사람은 장임(將任)으로 하고, 이택수 같은 사람은 번임(藩任)으로 하고, 무변(武弁)에 구병훈(具秉勳)의 아들 구익원(具翼遠)은 곤임(閫任)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있게 되면 차차로 성사(成事)하게 될 수 있을 것이고, 홍낙임(洪樂任)은 곧 척신(戚臣)이므로 비록 지금은 쓰이지 않고 있더라도 오래 있으면 마땅히 자연 병권(兵權)을 잡게 될 것이고, 또한 습조(習操) 때에 거사(擧事)하기가 편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홍계능이 말하기를, ‘반정(反正)하는 모의는 10년쯤 경영(經營)해야 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흉악한 모의를 서로 의논할 때에 이택수민홍섭신촌(新村) 홍계능의 집에 모이어 의논했습니다."

하였다. 그 이튿날 이택수(李澤遂)를 국문하였다. 이택수가 공초하기를,

"신이 홍계능(洪啓能)월과(月課)270) 를 언약(言約)하여 달마다 반드시 가서 만나거나 달마다 반드시 서문(書問)하기를 거의 비는 달이 없게 하다가, 지난해 11월에 사람들의 논박(論駁)을 받아 삭출(削黜)되면서는, 이로부터 한걸음도 문밖의 땅에 나가지 않았고, 올해에는 진실로 일찍이 가서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홍계능의 종 만복(晩福)과 대질(對質)하게 하였다. 만복이 말하기를,

"올해 나뭇잎이 필 무렵에 네가 어찌 황가(黃哥)인 종에게 말을 이끌게 하여 우리 상전(上典)을 만나러 왔지 않았느냐? 양식을 싸들고 와서 밥을 지어 먹었고, 우리 상전은 방 아랫목에 앉았고, 너는 방 한쪽에 앉았던 것을 내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하였다. 또 그의 아우 이회수(李會遂)가 고한 말에 ‘올 봄 무렵에 이택수가 두 차례나 홍계능을 만났다.’고 한 공술을 이택수에게 보이자, 이택수가 공초하기를,

"지정 불고(知情不告)하기를 원합니다. 지만(遲晩)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국문하기를,

"흉악한 모의(謀議)를 어디에서 들었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올 봄에 홍계능의 집에 갔을 때에 홍계능이 말하기를, ‘금상(今上)이 국정을 잘못한 것이 많으니 거의(擧義)하여 추대(推戴)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고, 국문하기를,

"함께 참여한 사람이 누구이었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민홍섭(閔弘燮)·홍상길(洪相吉)·홍상격(洪相格)이었고, 홍계능의 아들과 조카도 또한 함께 있었습니다."

하고, 국문하기를,

"너희들이 계해년271) 에 반정(反正)하듯이 하려고 한 것인데, 계해년의 반정 때에는 광해군(光海君)이 실덕(失德)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은 이에 홍인한(洪麟漢)이 복법(伏法)된 것으로 인하여 이런 짓을 하게 된 것이 아니냐?"

하니, 공초하기를,

"단지 거의(擧義)한 다음에 삼왕손(三王孫)을 추대하려는 것만 말했고, 반정(反正)하는 일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6일 뒤에 홍술해(洪述海)를 친국(親鞫)하고, 다음 달에 홍지해(洪趾海)를 추국(推鞫)했는데, 홍술해는 귀양갈 때에 부적(符籍)과 주문(呪文)을 간직한 일을, 홍상범(洪相範)은 변을 일으키려고 자객(刺客)을 모집한 일을, 효임(孝任)은 요망한 무녀(巫女)와 흉악한 것을 만들어 묻은 일을, 홍계능은 추대(推戴)하려고 흉악한 모의를 한 일을 귀양간 뒤에도 오가며 지휘(指揮)하였음을 승복(承服)하였고, 홍지해(洪趾海)의 공초도 또한 같았다. 그 이튿날 또 홍찬해(洪纘海)홍계능을 국문하였다. 홍찬해가 공초하기를,

"지난해 8월에 흑산도(黑山島)에 있을 때 신의 비부(婢夫) 복룡(卜龍)이 의복과 서찰(書札)을 가지고 왔었는데, 그 중에 홍상길(洪相吉)의 서찰은 세 가지 길로 반역을 일으키는 음모(陰謀)를 자세히 알렸기에, 신이 과연 하나하나 답을 했었으니 신이 마땅히 결안(結案)되어야 합니다마는, 그러나 결안은 매우 중요한 것이니 신이 마땅히 첫머리에서 끝까지 구절(句節)마다 입으로 부르겠습니다."

하였다. 홍계능을 국문하기를,

"네가 헛 명성(名聲)에 가탁(假托)하여 몸이 근교(近郊)에 있으면서 흉악한 무리들의 와주(窩主)가 되어, 대소사(大小事)의 의논을 주장하고 지휘하지 않는 것이 없고, 심지어는 전주(銓注)하여 용사(用捨)할 즈음에도 또한 참견하고 간섭하여 종용(慫慂)하는 짓을 하지 않은 것이 없다. 민항렬(閔恒烈)홍상간(洪相簡) 등의 대북(大北)에 관한 말과 추숭(追崇)에 관한 논의는 온 세상을 의구(疑懼)하여 공동(恐動)하게 하여, 앞날의 국동(國洞)의 세상에는 정승(政丞)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 있게 되기까지 하였고, 국가(國家)가 동위(銅闈)에 있을 때부터 선자(扇子) 하나 생선 한 마리의 반사(頒賜)라도 혹시 미진(未盡)하게 되기만 하면,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등 제적(諸賊)들이 너의 비중(比重)을 의지하여 공갈하고 협박하기를 하지 않는 바가 없이 하였다. 이제는 의리(義理)가 크게 정해져 적당(賊黨)들을 제거하여 다스리는 때가 되었는데도 너와 같은 적당들의 괴수(魁首)인 자가 아직도 왕법(王法)을 면하고 있음은 이미 실형(失刑)을 하고 있는 일인데, 이에 감히 홍상길(洪相吉)·홍상격(洪相格)·민홍섭(閔弘燮)·이택수(李澤遂) 등 여러 적과 밀실(密室)에서 치밀하게 결속(結束)하여 흉계(凶計)를 더욱 다급하게 하되, 태갑 동궁(太甲桐宮)의 말과 계해년 반정의 일을 가지고 후천(詬天)하고 매일(罵日)하는 짓을 하지 않는 바가 없게 하였고, 이에 삼왕손(三王孫)을 추대(推戴)하고 장임(將任)·번임(藩任)·곤수(閫帥)를 배치하는 일들을 말하기까지 했다. 효임(孝任)이 요망한 무녀(巫女)와 결탁하여 흉악한 것을 만들어 묻고 석천(射天)하는 짓을 하게 된 것도 또한 너희가 역적 이찬(李禶)을 추대하는 데서 연유하게 된 것이고, 홍상범·홍상길 등이 몰래 자객(刺客)을 끌어들여 칼을 품고 대궐에 들어가게 된 것도 또한 너희들이 역적 이찬(李禶)을 추대하는 데서 연유하게 된 것이다. 여러 역적들의 천만 가지 죄악이 오로지 추대하기로 하는 음모(陰謀)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 앞날을 위한 일을 삼은 것이다. 어서 빨리 지만(遲晩)하게 되었다고 하라."

하니, 홍계능이 공초하기를,

"문목(問目)이 전연 근사(近似)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국문하기를,

"전교(傳敎)하신 문목인데 네가 감히 근사하지 않다는 말로 갑자기 방자하게 답변하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홍상길(洪相吉)이 지난해에 시골로 내려갈 적에 과연 와서 보았습니다. 비록 남보다 더 반역 음모를 했다 하더라도 그 적지 않은 사람들에 있어 어떻게 지만(遲晩)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국문하기를,

"네가 감히 끝내 갑자기 방자하게 구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어찌하여 빨리 내다가 베이지 않습니까?"

하므로, 국문하기를,

"방금 이 한마디 말은 곧 부도(不道)한 말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태갑 동궁(太甲桐宮)이란 말은 과연 상서(尙書)의 글 뜻에 따라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홍계능이 결안(結案)을 하지도 못하였는데 병의 상태가 위급해지므로,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결안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정법(正法)하도록 청하니, 하교하기를,

"극적(劇賊)을 정형하게 되지 못한다마는, 금석(金石)의 국법(國法)을 저앙(低仰)하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경중(輕重)의 구별이 있게 된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이날 또 윤태연(尹泰淵)을 친국(親鞫)하였다. 윤태연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의 복심(腹心)으로서 반역을 한 단락이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이에 이르러 가극(加棘)해 놓은 속에서 잡아 왔다. 윤태연이 공초하기를,

"정후겸과 서로 친했기에 만 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 없습니다마는, 홍봉한(洪鳳漢)에게서 종용(慫慂) 받은 것이었습니다. 홍상범홍상길의 반역 음모에는 처음부터 참견하여 알지 않았습니다."

하고, 형장을 견디며 자복하지 않았다. 당초에 추대(推戴)하기로 했다는 말이 홍상길의 공초(供招)에 나왔을 적에 대신(大臣)·삼사(三司)·승지(承旨)·장신(將臣) 및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소굴(巢窟)이 이제 이미 부수어졌고 근본이 또한 이미 드러났습니다. 홍상범(洪相範)이 칭병(稱兵)하려한 것이나, 전흥문(田興文)이 비수(匕首)를 끼었던 것이나, 효임(孝任)이 저주(詛呪)하는 짓을 한 것은 홍계능(洪啓能)이 반정(反正)을 꾀하는 소굴이 되지 않은 것이 없고, 근본이 된 것은 하나의 이찬(李禶) 뿐인데, 이찬(李禶)이란 이름이 이미 홍상길(洪相吉)의 공초(供招)에 나왔고 보면, 이는 단지 전하(殿下)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곧 종사(宗社)의 죄인입니다. 단지 종사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천하 만세의 죄인입니다. 무릇 오늘날 전하의 조정에 북면(北面)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차마 이 역적과 한 하늘 아래 함께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역당(逆黨)들을 모두 구핵(究覈)해 내지도 못했는데, 이찬(李禶)이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으로서 이름이 추대(推戴) 받는 속에 들었으니, 국가의 사세가 위태하여 의구(疑懼)스럽고 사세의 기틀이 급박하여 더욱 잠시 한 시각도 늦추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시급히 왕부(王府)에 명하여 바로 시급히 잡아 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만류하다가 되지 않자 드디어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갔다가 장차 대내(大內)로 돌아가매, 대신 이하가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드디어 배달(排闥)하고 곧장 악차(幄次) 앞으로 들어가 일제히 소리 내어 말하기를,

"오늘날의 국가 사세는 급급(岌岌)하여 위태하게 되었다 할 수 있는데, 전하께서는 그 일신(一身)의 사정 때문에 종사(宗社)의 막중함을 생각하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름이 추대(推戴)한 속에 들어 있고도 머리를 보존하게 되는 수는, 고금(古今)에 찾아보아도 결단코 이런 이치가 없습니다. 진실로 이 역적을 한 시각이라도 숨을 쉬며 살아 있게 한다면 이는 한 시각이라도 나라가 나라 꼴이 될 수 없게 되고, 하루를 살아 있게 한다면 이는 하루라도 나라가 나라 꼴이 될 수 없게 되는 일이니,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전하께서 비록 한결같이 위곡(委曲)하게 용서하려고 하신들 될 일이겠습니까? 신들은 죽음이 있을 뿐이니, 소청대로 되지 않으면 감히 물러 갈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경(卿)들이 어찌 차마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가?"

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서로 말하여 극력 쟁집(爭執)하고, 또 말하기를,

"신들이 화의 기틀이 호흡(呼吸) 사이에 박두했음을 똑똑히 보았기에 의리에 있어 감히 수수(袖手)하고 태연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장병(將兵)한 신하가 이미 모두 들어왔으니 마땅히 먼저 군문(軍門)에서 군졸들을 보내어 역적들의 집을 파수(把守)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급하게 제지하였다. 여러 장신(將臣)들이 한편으로는 아뢰고 한편으로는 거행하려고 하니, 임금이 여러 차례 대신 이하에게 물러가도록 명하고, 이어 내시(內侍)에게 휘장을 내리도록 명하였으나 또한 되지 않았고, 아침부터 포시(晡時)까지 상하(上下)가 서로 버티게 되었다. 대신들이 또 말하기를,

"사세가 이미 다급해졌고 화가 이미 박두해졌으며, 삼강(三綱)272) 이 장차 실추되었고 구법(九法)273) 이 장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르러 비록 전하께서 위곡(委曲)하게 용서하려고 하시지만 어찌할 수 없게 되고, 비록 신들도 성상의 뜻을 앙체(仰體)하려고 해도 또한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차라리 천자(擅恣)한 죄로 복주(伏誅)될지언정 차마 이 역적과는 한 시각도 함께 살 수 없습니다."

하고, 바야흐로 승지(承旨)를 시켜 탑교(榻敎)274) 를 써 내어 거행하도록 하였고, 여러 승지들이 또 말하기를,

"대신들도 이미 아뢰었거니와 신들도 역시 한 시각도 참고 있을 수 없기에 감히 이렇게 탑교를 써 냅니다."

하고, 이어 잡아 가두도록 하는 탑교를 쓰니, 임금이 다급하게 찢어버리도록 명하매,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신자(臣子)인 사람이 누가 감히 이 종이를 찢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금오(金吾) 당상(堂上)이 다만 즉시 시급하게 거행해야 할 뿐이라고 여기고서, 이에 이찬(李禶)을 잡아다가 의금부에 가두었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등이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아뢰기를,

"죄인 이찬은 결단코 한 시각도 천지 사이에 살아 있을 수 없는 상항은 이미 작금(昨今)의 계주(啓奏)에 다 말씀드렸습니다. 전하께서 전대의 역사와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두루 보셨을 적에 어찌 일찍이 가까운 종친(宗親)인 몸으로서 이름이 추대(推戴) 받은 속에 들었는데도 법대로 처치하지 않는 수가 있었습니까? 하물며 지금 난역(亂逆)들이 잇따라 생겨나는데도 그 소굴(巢窟)을 부수어 버리지 못하여 국가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하며 인심이 평온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양상의 화의 기틀이 어디에 엎드려 있다가 어느날에 발동하게 될지 알 수 없었는데, 그 위급한 기틀이 진실로 호흡(呼吸) 사이에 박두했습니다. 오히려 그 화근(禍根)을 남겨 두어 흉악한 역적들의 기화(奇貨)를 만들어 주고서, 가만히 앉아서 난을 선동(煽動)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땅 위에 하루를 살아 있게 되면 국가(國家)의 하루의 근심거리가 있게 되고, 이 땅 위에 이틀을 살아 있게 되면 국가의 이틀의 근심거리가 있게 되기에, 온 나라가 경황이 없어 호소하는 소리를 늦출 겨를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감히 서로를 이끌고 다같이 아뢰게 된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 조용하게 깊이 생각해 보시고서, 죄인 이찬을 정법(正法)하기를 계청(啓請)한 것을 시급히 윤허하여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소망에 부응(副應)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는 무슨 말인가? 경(卿)들은 시급히 소청을 정지하여 나의 마음이 안정되게 하라."

하였다. 정청(庭請)으로 다섯 차례나 아뢰고, 삼사(三司)에서 세 차례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봉조하(奉朝賀) 김치인(金致仁)이 차자를 올려 난역(亂逆)의 근본을 끊어버리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차자로 청한 것을 내가 차마 들을 수 없다. 내가 일찍이 《사기(史記)》를 읽다가 관숙(管叔)채숙(蔡叔)의 일275) 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책을 덮어 놓고 한없이 한숨을 쉬면서 주공(周公)이 어려운 때를 만났음을 감상(感傷)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어찌 내 몸이 친히 당하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 조라(蔦蘿)276) 의 통탄(痛歎)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주공은 성인인지라 비록 변란에 처해서도 능숙하게 권도(權道)를 행하였지만, 지금 나는 부덕하고 학문이 성인에 이르지 못했다. 성인의 덕이 없으면서 성인의 권도를 행하였다는 것은 또한 들어 보지 못한 바이다. 이는 내가 낮이면 천정만 쳐다 보다가 밤이면 벽에 둘러 싸이어 버리는 바이기에 차라리 아무 말이 없고 싶은 일이니, 경(卿)은 나 소자(小子)의 뜻을 깊이 유념하여 다시는 번거롭게 주청(奏請)하지 말아서 나의 심회(心懷)를 위로하라."

하였다. 김치인(金致仁)이 또 차자를 올려 경도(經道)와 권도에 대한 말을 아뢰니, 비답하기를,

"어제의 비답에, 성인이 아니라 권도를 행할 수 없는 것이란 뜻으로 경에게 대략 일렀다. 또 올라온 경의 차자에 경(經)과 권(權) 두 글자를 효연(曉然)하게 비유하되, 심지어는 권을 하여 도(道)에 맞게 하는 것이 곧 경인 것이라고까지 했으니, 경이 나의 미집(迷執)을 깨우쳐 준 뜻을 내가 진실로 고맙게 여긴다. 또 생각하건대, 다스리는 일이란 도와 법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나 오직 도만으로는 시행해 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인들이 부득이하여 법을 세워 치도(治道)를 보좌(輔佐)해 가는 방편으로 삼게 된 것이다. 이러므로 도에는 경(經)과 권(權)이 있게 되고 법에는 정(情)과 적(跡)의 구분이 있는 것인데, 경과 권의 의의에 있어서는 경(卿)이 비록 모두를 진달(陳達)했지만, 정과 적의 구분에 있어서도 또한 깊이 헤아려 보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 있는 법이다. 비록 심상한 옥사(獄事)를 결단해 갈 적에도 정(情)에 근본하여 법을 굽히는 수가 있기도 하고 또 적(跡)을 가지고서 마음을 주책(誅責)하는 수가 있는 것이니, 오늘날 신서(臣庶)들이 정청(庭請)하고 있는 일이 법에 있어서 찾아볼 적에 정(情)에 속하는 것이겠는가? 적(跡)에 속하는 것이겠는가? 모두들 주공(周公)관숙(管叔)채숙(蔡叔)을 베인 일로써 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관숙·채숙과 같은 적(跡)만 있고 관숙·채숙과 같은 정(情)은 없는데, 관숙·채숙에 대한 법으로 결단함은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는 것이라고 여기다. 단지 내가 사사 은정(恩情)에 차마 못하여 그러함이 아니니, 경은 그렇게 이해하고 다시는 나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왕법(王法)에 걸리게 되면 비록 왕부(王府)에 두게 되기는 하지마는, 어린 아이가 어찌 알게 되겠는가? 어려운 고초의 상황을 상상하노라면 눈자위에 눈물이 넘치게 되어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소식을 물을 길이 없어 안부(安否)를 들을 수도 없다. 옥문(獄門)을 맡은 신하로 하여금 모든 범절들에 있어 따로 더 마음을 쓰게 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온종일 정청(庭請)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은, 내가 경들의 아뢴 말을 윤허하지 않는 것을, 상례처럼 비답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인가? 내가 어찌 참으면 그만둘 수 있는 일을 가지고서 오히려 이제까지 그만두지 아니하면서, 백료(百僚)와 삼사(三司)로 하여금 온종일 분주하게 하기를 마치 서로 버티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겠는가?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서로 마음을 알아줌이 귀중한 것이다. 만일에 경들이 나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어찌 이처럼 심하게 번거롭고 시끄럽게 할 수 있겠는가? 며칠 전에 경(經)과 권(權)의 의의와 정(情)과 적(跡)의 구분을 가지고 대신에게 비답한 바가 있었기에, 내 생각에는 보고 듣는 바에서는 거의 감동하고 깨닫게 되었을 것으로 여기었다. 그런데 정계(庭啓)한 것을 보건대 증인(證引)한 것이 곧 열조(列朝)에 이미 행해진 일이었는데, 이는 또한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오직 그 안평(安平)·금성(錦城)인성(仁城)은 양조(兩朝)에 있어 혹은 동기간이고 혹은 가까운 종친(宗親)이었다가 필경에는 모두 경전(磬甸)277) 하게 된 것인데, 경들이 반드시 이들을 들어 나에게 들려 주려고 한 것은 혹시 그들의 비중(比重)을 빙자하려고 한 것 아니겠는가? 내가 또 경들에게 신복(申復)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 세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 천주(天誅)를 간범(干犯)하여 대벽(大辟)을 받게 된 것이지, 어찌 양조(兩朝)의 인자하신 은덕이 조금이라도 극진하지 못한 데가 있어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진실로 종사(宗社)를 중요시하고 사은(私恩)은 도리어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오늘날 경들의 정청(庭請)에 있어서 만일에 세 사람의 일과 근사(近似)한 점이 있다면, 또한 마땅히 위로 그전의 법을 계술(繼述)해 가고 되도록 뭇 신하의 마음에 부응(副應)하느라, 눈물을 흘리면서 따라 주어도 될 것이고 목이 메이면서도 윤허해 주어도 또한 될것이다마는, 이처럼 굳게 거절하기를 그만두지 않음은 내가 또한 어찌 까닭이 없는 것이겠는가? 아! 나의 심정과 사세를 말하려고 하면 목소리가 이미 메어버리고 글로 쓰려고 하면 눈물이 먼저 흥건해진다. 고로 여생(孤露餘生)이 어찌 나와 같은 사람이 있겠느냐. 척령 재원(鶺鴒在原)278) 의 감회(感懷)와 형수(荊樹)279) 에의 의존(依存)이 오직 서제(庶弟) 세 사람이 있을 뿐인데, 이진(李禛)풍찬 노숙(風餐露宿)280) 으로 병이 되어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이인(李䄄)은 나이는 조금 장성했으나 항시 질병에 묶여 있고, 오직 이찬(李禶)이 다행히도 탈이 없기에 매양 스스로 생각하기를, 거의 성립(成立)하여 종영(宗英)281) 이 번연(繁衍)하게 되어, 선부(先父)의 자손(子孫)들이 우리 조정에 서서 거의 구로(劬勞)의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게 되었으면 하고 바랐었던 것인데, 흉악한 역적들이 화를 만드는 통에 이찬의 이름이 추대(推戴)한 데에서 나오게 되었다. 두루 보건대, 옛적부터 종친(宗親)이 이런 누명(累名)을 쓰고서도 그의 몸을 보존하게 되는 수는 거의 없었다. 아! 기환(綺紈)282) 속에서 생장했기에 어두워 아는 것이 없는데, 그가 어찌 추대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를 알겠는가? 나의 심정과 사세는 옛적의 사첩(史牒)에서 찾아 보더라도 비등한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양조(兩朝)의 사례를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법을 단절(斷絶)해 놓고 은정(恩情)을 펴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마는, 마침내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으니 그 또한 슬픈 일이다. 여기까지 언급(言及)하고 나니, 꺾는 듯한 비통과 측은한 상심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다시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경들은 이해하고서 나로 하여금 다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정청(庭請)을 듣게 하지 말라. 이것이 경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홍술해(洪述海)를 정법(正法)하고 나서, 국문(鞫問)에 참여했던 여러 신하들이 탑전(榻前)에 나아가 아뢰기를,

"홍술해를 정법했으니 대중의 분개가 조금 풀리게 되기는 했습니다마는, 홍술해는 지엽(枝葉)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근본인 역적 이찬(李禶)은 아직도 땅 위에 남아 있습니다. 가령 다시 홍상범(洪相範)이나 홍계능(洪啓能)과 같은 사람이 추대(推戴)하는 음모를 하려고 하게 된다면 전하께서 장차 어떻게 처리해 가시렵니까? 세종[英廟]인조[仁廟] 때에 이미 시행했던 사례를 신들이 이미 앙주(仰奏)했었거니와, 무신년283)이탄(李坦)을해년(乙亥年)284)이학(李壆)을 선대왕(先大王)께서 모두 왕법(王法)대로 단죄(斷罪)했었습니다. 하물며 역적 이찬(李禶)의 처지 같은 것이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성헌(成憲)대로 잘 준수하여 시급히 윤허하시는 분부를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왕법은 지극히 엄격한 것임을 내가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열조(列朝)에 이미 시행한 사례도 역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심정과 사세와, 내가 만나고 있는 바는 절대로 열조 때와 같지 않다. 나의 말이 이에 이르렀으니, 경들이 어찌 내 마음을 양찰(諒察)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누누(縷縷)히 극력 주청(奏請)하니, 임금이 승여(乘輿)로 문득 환내(還內)하게 되었다. 여러 신하들이 승여를 따라 들어가며 음성(音聲)을 같이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이미 준청(準請)으로 한정했기에 죽는다 하더라도 감히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들은 그만두라."

하고, 승여(乘輿)가 합문(閤門)에 이르르니 대사헌 조준(趙㻐)이 말하기를,

"옛적의 어진 임금은 거연(車輦)을 멈추고서 하는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대신들이 승여를 붙들고서 일을 아뢰는데, 전하께서는 승여로 돌아오셨으니 이는 무슨 거조(擧措)이십니까? 신이 개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도헌(都憲)의 말은 사체(事體)에 맞게 되었다. 경들이 잠시 물러나 있으며 내가 환입(還入)하기를 기다렸다가 청대(請對)한다면 내가 어찌 인견(引見)하지 않겠는가?"

하매, 제신들이 잠깐 물러났다. 임금이 희인문(熙仁門)으로 들어가 희정당(熙政堂) 뜰 가운데에서 승여(乘輿)에서 내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시 극력 주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들이 이처럼 쟁집(爭執)함은 반드시 나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나의 소망은 오직 은정(恩情)을 온전히 하여 내놓아 두어서 일루(一縷)의 생명을 보호하기에 있을 뿐이다. 이는 어찌 공법(公法)과 사은(私恩)이 두 가지가 다 펴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매,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분부를 하게 되시는 것입니까? 비록 신들이 이날로 베임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결단코 감히 그대로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놓아 두는 법도 곧 이미 죽은 곳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의 일루(一縷)같은 생명이 그래도 다행히 보존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만일에 그가 살게 된다면 필연코 마땅히 몸가짐을 근신(謹愼)하여 후환(後患)이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난 바는 천고(千古)에 없던 변례(變例)인데도 경들 중에 한 사람도 나의 절박(切迫)한 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하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방도는 오직 ‘단의 할은(斷義割恩)’하는 네 글자대로 할 뿐입니다. 신들은 여타의 것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성의가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했다고 여기며 금오(金吾)에서 서명(胥命)하니,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비답(批答)하였다. 금오 당상(堂上)이 청대(請對)하니 희정당(熙政堂)에서 불러 보았다. 판의금부사 정홍순(鄭弘淳)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매양 역적 이찬(李禶)을, 관숙(管叔)·채숙(蔡叔)과 같은 적(跡)만 있고 관숙·채숙과 같은 정(情)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즉시 의금부 리(義禁府吏)가 하는 말을 들어보건대, ‘역적 이찬을 잡아다 가둔 뒤에 한갓 죽을 뜻이 없을 뿐 아니라 음식은 반드시 배불리 먹기를 구하고 의복도 반드시 따습게 입기를 구하면서 으르렁거리고 공갈(恐喝)하기를 하지 않는 바가 없이 하였고, 심지어는 그가 반드시 살아서 나와 다시 하늘의 해를 보게 된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한 대문은 이미 신자(臣子)의 분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왕실의 지친(至親)으로 이름이 추대(推戴) 받은 속에 들어 있었고, 삼목(三木)285) 을 채우고 낭두(囊頭)를 한 채 남간(南間)에 가두었으니, 진실로 일분(一分)이라도 신자(臣子)의 마음이 있다면 마땅히 당장에 죽어 없어지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이에 도리어 태연(泰然)하고 안연(晏然)하여 기필코 살기를 도모하려고 했으니, 그의 심장(心膓)을 추구(推究)해 본다면 장차 어찌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단지 그의 흔적이 관숙·채숙보다 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실정도 관숙·채숙보다 비참함이 또한 현저합니다. 이렇게 되었는데도 전하께서 이미 관숙채숙에게 시행했던 율(律)대로 시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의 사람됨이 본시 경박하여 망발(妄發)하는 말이 많았다. 따습게 입고 배불리 먹기를 구하는 것은 죽게 된 속에서 살기를 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어찌 정적(情迹)을 논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니, 정홍순(鄭弘淳) 등이 극력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7일부터 대신·삼사(三司)·종친(宗親)·문음무(文蔭武)와 백관(百官)이 날마다 서로 상소와 계사(啓辭)를 올리며 복합(伏閤)하였고, 날을 지새면서 정청(庭請)하였는데, 무릇 44번이나 하고 삼사에서는 무릇 62번이나 아뢰고, 관학 유생(館學儒生)·파산(罷散)인 전함(前啣)·군교(軍校)·의관(醫官)과 역관(譯官)·각 관사(官司)의 이서(吏胥)와 오부(五部)의 방민(坊民)에 이르기까지 서로 소장(疏章)을 올리어 극력 청하여도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대신이 경재(卿宰)·금오 당상·삼사(三司)를 거느리고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부득이하여 희정당(熙政堂)에서 소견(召見)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서로 말을 하여 은정(恩情)을 끊고 의리로 결단하기를 청하며 아침부터 포시(晡時)까지 하며 물러갈 뜻이 없으므로, 임금이 또 부득이하여 대신과 의금부 당상으로 하여금 왕부(王府)에 나아가 타이르고 오도록 했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금부에 이르러 이찬(李禶)을 뜰에다 꿇리어 놓고 말하기를,

"네가 역적들에게 추대(推戴) 받은 바가 되었으니 만에 하나라도 살게 될 리가 없고, 비록 임금께서 차마 너를 죽는 곳에 두지 못하시지만, 네가 만약 신절(臣節)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하루라도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이찬이 거부하고 따르지 않으매, 대신들이 다시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바로 이것이 이미 신절(臣節)이 없는 짓입니다. 청컨대, 사사(賜死)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그래도 어렵게 여기고 있으므로, 대신이 승지로 하여금 자진(自盡)하게 하는 일로, 탑전(榻前)에서 정탈(定奪)을 써 내도록 청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였고 이어 이찬에게 죽음을 내렸다. 효임(孝任)감정(甘丁)에 있어서는 한없이 흉악하고 극도로 악독하여 만 번 뼈를 발라도 오히려 가볍게 됨을 들어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정법(正法)하고, 홍지해(洪趾海)·홍술해(洪述海)·홍찬해(洪纘海)·전흥문(田興文)·강용휘(姜龍輝)·홍상범(洪相範)·홍상길(洪相吉)·홍상격(洪相格)·김흥조(金興祚)·최세복(崔世福)은 대역 부도로 정법하고, 정이(貞伊)는 모역(謀逆)에 동참(同參)한 것으로 정법하였다. 이택수(李澤遂)에 있어서는 당초에 모역에 동참한 것으로 결안(結案)했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네 어미는 곧 자궁(慈宮)의 지친(至親)이다. 내가 차마 모역에 연좌(連坐)된 것으로 논하지 못하겠다."

하므로, 지정 불고(知情不告)로 정법하고, 김흥복(金興福)·홍신덕(洪信德)은 지정 불고로 정법하고, 박해근(朴海根)·강계창(姜繼昌)·홍계능(洪啓能)·안국래(安國來)는 승복(承服)하고서 앞질러 죽었고, 홍이해(洪履海)·홍신해(洪信海)도 또한 앞질러 죽었고, 홍필해(洪弼海)는 지정 불고로 결안(結案)하여, 뒤에 제주목(濟州牧)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였다. 조성(趙峸)이찬(李禶)의 처부(妻父)이고 이수채(李受采)이찬의 스승인데 앞질러 죽었다. 이극관(李克觀)·이극태(李克泰)·이극기(李克己)효임(孝任)의 지친(至親)으로 국문(鞫問)을 받았는데, 이극관이극태는 절도(絶島)에 노(奴)로 삼고, 이극기는 섬에 귀양 보냈다. 조정철(趙貞喆)·남흥로(南興老)·홍대섭(洪大燮)·이기동(李奇同)은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고, 조원철(趙元喆)·임종주(任宗周)·구익원(具翼遠)영단(永丹)의 변방 먼 데에 정배(定配)하고, 이회수(李會遂)는 사형을 감하여 섬에 귀양보냈다. 이윤성(李潤成)·조우(趙嵎)의 처족(妻族)인데 절도에 정배(定配)하고, 이관원(李觀源)홍계능(洪啓能)의 여서(女婿)이고 홍탁연(洪卓然)·홍병헌(洪秉憲)홍지해(洪趾海)의 근족(近族)인데 먼 지방에 정배하였다. 김금희(金今喜)고수애(高秀愛)는 역모(逆謀)에 나아간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고, 복빙(福氷)은 역대 조종의 궁인(宮人)이기 때문에 변방 먼 데에 정배하고, 신광집(申光緝)강용휘(姜龍輝)의 공초에 따라 잡아온 것인데 본 고을로 추방하고, 조제태(趙濟泰)·이언형(李彦衡)은 국문만 하여 특별히 놓아주고, 관련된 여러 죄수들은 모두 참작하여 처결하였다. 이해의 반역 변란은 사적(史籍)에도 없는 것이었는데, 임금이 혹시라도 옥사(獄事)의 정상이 외람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오직 가볍게 해야 한다는 법에 따랐고, 9월 11일에 이르러서야 국청(鞫廳)의 일을 비로소 거두었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85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궁관(宮官)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註 266]
    반연(攀緣) : 세력이 있는 사람을 의뢰함.
  • [註 267]
    석천(射天) : 옛날 은(殷)나라 무을(武乙)이 무도(無道)하여 인형(人形)을 만들어 천신(天神)이라고 하면서 그와 장기[博]를 두되 사람을 시켜 대행(代行)하게 하고는 천신이 이기지 못할 경우 곧 욕을 보이겠다 하면서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우러러 보고 쏘아 맞히면서 하늘을 맞혔다고 한 고사(故事).
  • [註 268]
    삼왕손(三王孫) :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인 이진(李禛)·이인(李䄄)·이찬(李禶)을 가리킴.
  • [註 269]
    태갑(太甲) : 은(殷)나라 제2대의 임금. 처음 즉위하여 방탕하니, 이윤(伊尹)이 동궁(桐宮)으로 추방시켰다가 3년 뒤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였으므로 다시 맞아들였는데, 그 후 선정(善政)을 베풀었음.
  • [註 270]
    월과(月課) : 다달이 보이는 시험.
  • [註 271]
    계해년 : 1623 인조 원년.
  • [註 272]
    삼강(三綱) : 유교(儒敎)의 도덕(道德)에 있어서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綱領)으로, 임금은 신하의 강령이 되고 아비는 아들의 강령이 되고 남편은 아내의 강령이 되는 것을 일컫는 말.
  • [註 273]
    구법(九法) : 《서경(書經)》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로서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물음에 대답한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大法). 곧 오행(五行)·오사(五事)·팔정(八政)·오기(五紀)·황극(皇極)·삼덕(三德)·계의(稽疑)·서징(庶徵)·오복(五福).
  • [註 274]
    탑교(榻敎) : 임금이 의정(議政)을 불러 친히 전하는 왕명.
  • [註 275]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일 : 관숙과 채숙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우. 무왕이 죽고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하였는데, 이 두 사람이 여러 아우들과 유언(流言)을 퍼뜨리기를, "주공은 장차 성 왕에게 이롭지 못한 짓을 할 것이다."라고 하였음. 그리고는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과 함께 모반하였는데, 주공이 성왕의 명을 받들어 관숙과 무경을 죽이고, 채숙을 내쫓았음.
  • [註 276]
    조라(蔦蘿) : 겨우살이 덩굴과 댕댕이 덩굴.
  • [註 277]
    경전(磬甸) : 공족(公族)이 사죄(死罪)가 있으면 교야(郊野)를 맡은 관원에게 목을 매어 죽이도록 한 고사(故事). 경우전인(磬于甸人).
  • [註 278]
    척령 재원(鶺鴒在原) : 형제가 다급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의 비유.
  • [註 279]
    형수(荊樹) : 한(漢)나라 때 전진(田眞) 삼형제가 분재(分財)를 할 때에 집 앞에 자형수(紫荊樹) 한 그루를 함께 나누어 가지기로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말라 죽게 되었다. 전진이 탄식하기를, "나무 한 그루를 나누려 함으로 말라 죽게 되었는데, 더구나 사람이 형제간에 우애해야 하는데 떠나서야 되겠는가?" 하고 서로 감동하여 다시 합치니, 자형수가 또한 곧 무성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임.
  • [註 280]
    풍찬 노숙(風餐露宿) : 한데서 바람과 이슬을 피하지 아니하고 먹고 잠.
  • [註 281]
    종영(宗英) : 동족 가운데에서 우수한 자.
  • [註 282]
    기환(綺紈) : 부귀한 집을 뜻함.
  • [註 283]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284]
    을해년(乙亥年) : 1755 영조 31년.
  • [註 285]
    삼목(三木) : 죄인의 목과 손·발에 씌우는 형구(刑具).

○甲辰/諸賊伏誅。 自前月尊賢閣賊變之後, 屢飭譏詗, 久未斯得。 是夜景秋門守舖軍金春得金世徵等, 相與枕藉而臥, 有人低聲呼舖軍者再三, 世徵欲應。 春得時年十七, 亟止之曰: "呼聲可異, 姑勿應, 第觀動靜。" 有頃有人直向景秋門之北垣, 將欲潛越, 春得等蹴起隣舖軍金春三李福才二人, 相與追捕, 由兵曹送之捕廳, 捕廳詰其情節, 則院洞任掌田有起改名興文者也。 蓋興文姜龍輝潛入尊賢閣霤上, 謀欲稱亂而未果, 今又再擧, 竟爲舖軍所捕也。 捕廳以聞, 初命庭鞫。 是日御肅章門, 賞金春得等有差, 親鞫興文, 興文供曰: "述海之子相範, 陰養死士, 謀欲爲逆, 扈衛軍官姜龍輝曉勇如飛, 相範與之隔隣, 深相結納, 啗之以好爵, 使爲其所欲爲。 而以臣有膂力, 貧窮不自資, 龍輝與臣千五百文之錢, 許以女奴妻之, 要與同事, 故臣果諾之, 常與龍輝相範所居洪大燮之家, 則有洪同知者, 與相範爲九寸親, 參聞密謀, 亦有金興福者在焉。 臣留宿二日, 聽其密謀, 則相範龍輝曰: ‘與汝同心者幾人?’ 龍輝曰: ‘可得二十人。’ 相範卽列其姓名, 藏之笥中, 指期潛入, 約龍輝手鐵鞭, 臣手利劍, 入闕逢人輒殺, 相範率二十人躡其後, 觀變應接, 要束已定。 七月二十八日, 至闕外屠狗家, 龍輝與臣, 買吃狗醬, 同入闕中, 招繼昌之爲別監者, 月惠之爲內人者, 附耳語良久。 日且暮, 由藥房相對之問安所, 龍輝以肩升臣, 臣又以手扱引龍輝, 則龍輝掬沙襭裾, 同登屋上, 至于尊賢閣中霤, 撤瓦抛沙, 作魍魎狀, 以眩人視聽, 將售不道。 忽聞闕中鼎沸, 搜索甚急, 故臣與龍輝跳下屋簷, 臣伏漏局後之草莽中, 天明由興元門走, 龍輝禁川橋, 決水門桶逸去。 翌日相會於屠狗家, 見其一足, 跌水尙濕, 相範姓人亦自水門桶躡後, 見事機已誤, 旋卽逸歸。 龍輝復語臣曰: ‘復當再會相範家, 愼勿沮。’ 及聞大駕還御, 謀欲再擧, 竟爲舖軍所捕也。" 鞫掖隷姜繼昌、宮人月惠月惠, 龍輝之女, 繼昌其姪也。 繼昌供曰: "七月二十八日, 臣直宿差備時, 方黃昏, 興文戴戰笠挾劍, 至臣之房, 呼臣語曰: ‘今日欲宿大內, 密邇之地, 有可爲者也? 仍問: ‘大殿差備何在?’ 臣曰: ‘知之何爲?’ 興文曰: ‘大事也, 豈可輕泄? 後當自知’。 臣問: ‘何以挾劍’? 興文曰: ‘登尊賢閣上, 有來逼者刺之。’ 復固問大殿差備, 臣責曰: ‘毋妄言。 將株連於我’。 興文曰: ‘勿慮也。 在汝則無關也。’ 臣曰: ‘事已至此, 當與汝同之也。’ 遂指顯謨門之內曰: ‘此大殿差備也」’, 興文周回廣達門傍, 俯仰眺望。 亡何龍輝揷鐵鞭於腰後, 邐迤而來, 令臣招其女月惠, 與之相語, 皆凶悖不道之說, 且曰: ‘如有急, 汝其匿我。’ 時興文立于加設差備之側, 照羅赤姓者亦在傍見之, 有頃二人者各自散去, 是夜果有尊賢閣上之變。" 問曰: "興文之事, 孰使之爲也? 月惠亦協謀於內乎?" 繼昌又供曰: "興文自言: ‘院洞洪姓人, 使渠作此, 而月惠之謀, 惟高尙宮知之。’ 云矣。" 月惠供曰: "高尙宮乃房主, 故果以龍輝所言傳之, 則不挽止, 且與其養女福文尙宮, 密語此事於房內, 陰幸其成也。" 遂鞫秀愛福氷秀愛高尙宮, 福氷福文尙宮也, 幷不服。 問秀愛曰: "別監高晶煥, 作弊闕內外, 罪實難貰, 故命棍治懲勵, 則汝敢出怨言, 汝之一族, 皆親密金龜柱家, 龜柱處分時, 汝又敢出怨言。 其他罪惡, 雖不欲索言, 而尙今包容, 乃是莫大之寬典, 何敢於亘古所無之凶言, 聞若尋常, 又從而有喜色乎?" 秀愛供曰: "知罪知罪。" 仍鞫龍輝, 龍輝供曰: "洪趾海相範, 慫慂臣曰: ‘汝窮且困, 聽吾言, 當縻好爵也。’ 臣急於拔身。 七月二十八日, 臣挾鐵鞭, 興文挾劍, 潛身入闕, 見繼昌月惠, 使指差備路, 而登尊賢閣上, 欲相機爲逆, 因闕中鼎沸, 各自逃歸也。" 翼日鞫洪相範相範, 述海之子也, 自全州藏跡上京, 或宿洪大燮之家, 或宿洪信德之家, 與洪弼海龍輝興文, 晨夜聚會, 潛謀不軌, 及興文事覺, 詞連諸賊, 金吾捕之急, 相範弼海皆望風逃匿。 遂鞫信德大燮, 大燮不服, 且曰: "相範全羅道已久。" 信德供曰: "今年六月間, 相範會諸賊於其家, 有崔世福朴海根者, 皆述海之婢夫也, 自述海謫所至, 與共密謀, 而其謀則欲募刺客, 先害都承旨也。" 鞫世福海根世福供曰: "往來述海謫所, 爲其心腹, 以海根曾爲政院使令, 與前司鑰金壽大相熟, 而壽大之甥女今喜, 方爲內人, 欲攀援周旋, 以臣圖差排設房庫直。 懷刃潛伺, 乘機爲逆, 果如信德言。" 海根供曰: "但知攀援圖差之謀, 與同出力, 而逆謀實不與聞。" 且曰: "六月往見相範, 則相範懇托勿洩潛入城中之說, 故臣果諾之, 餘無所言也。" 仍緘口不服。 亡何金吾郞, 捕相範廣津而至, 問曰: "知姜龍輝田興文乎?" 供曰: "不知也。" 命與龍輝興文對質, 相範怯曰: "願勿去蒙頭, 先問臣面貌於兩人。" 及去蒙頭, 與龍輝對質, 則相範以手掩面, 良久始謂龍輝曰: "汝知我乎?" 龍輝曰: "吾豈不知汝乎? 汝是洪判書之姪也。" 又與興文對質, 興文曰: "汝非洪述海之子乎? 三昨汝與姜龍輝, 同會于院洞洪大燮家, 買吃西瓜也, 傍有與汝同姓者共之, 汝敢不直告乎?" 相範曰: "吾三朔不入京, 汝所見者, 必是吾之庶弟也。" 興文曰: "吾不知汝之庶弟, 只知汝也。" 問洪大燮, 大爕初不服, 與興文面質, 大燮語屈, 於是相範一一承款, 如興文龍輝之供。 翼日親鞫金壽大壽大世福招中前司鑰, 而爲世福圖差排設房庫直者也, 一名興福壽大供曰: "臣與巫女占房之夫金興祚, 結爲義四寸, 數相往來, 事大小輒與之議。 今年二月, 臣爲買宅, 往興祚家, 則占房病腫而臥, 臣爲診其病, 且問臣之幼子吉凶, 占房曰: ‘吾方有事緊且急, 後當爲之占也。’ 臣曰: ‘何事也?’ 占房曰: ‘洪述海家, 要我占其放還, 故占之, 其占頗吉。 若有人從中周旋, 則當有妙理也。’ 臣曰: ‘何妙理也?’ 占房曰: ‘洪述海先送錢四十兩, 圖所以交結掖屬, 事成則當以四百兩銀子厚報之云, 君有掖屬蹊徑可能圖之否?’ 臣聞此言, 利欲之心, 不能不挑動, 自此往來, 益數親密無間, 於是占房以四十兩與臣, 臣及興祚分取其半。 占房乃曰: ‘周旋宮禁之道, 必以腹心人, 長處于闕內緊任, 然後事可濟矣。 崔世福述海之僕, 往來述海謫所, 常有爲其主一死之心, 其妻亦方出入吾家, 若以世福爲排設房庫直, 則可以乘機售計, 君其圖之。’ 臣曰: ‘吾四寸金福尙方爲別監, 其從妹又宮女也, 此易與耳。’ 其後見福尙, 密及圖差事, 則福尙答云, ‘若囑義烈宮次知中官, 則可得也。’ 是年五月占房病死, 述海妻送其婢, 賻以十兩錢, 自是之後, 興祚代其妻, 往來述海家, 與聞綢繆事, 而臣亦於今七月, 因販賣西瓜網巾等屬, 行至廣津, 歷造述海家, 問安否於述海妻, 買喫麥飯於述海婢。 其後又逢述海婢於齋洞路上, 臣又言: ‘安得使汝夫爲排設房庫直也?’ 蓋排設房庫直, 出入差備至近之地, 而世福驍勇有劍術, 以世福處排設者, 將欲謀害都承旨, 而以及於不敢言之地也。 占房生時, 述海妻每以諺札, 頻扺占房, 則占房見輒火之, 臣嘗略聞其諺札中語, 多是詛呪事也。 占房常以紙造爲人形幷符呪, 廣埋諸處, 又畫五方神, 貼之屋壁, 誦經以禱祝之, 及占房病甚, 語臣曰: ‘吾病若愈, 會當成此計, 以報述海之讎。’ 云。 臣實爛漫知情也。 壽大福尙對質, 福尙壽大曰: "汝果以圖差事, 言于吾。 然義烈宮次知中官, 適往陵所, 故未之言。 及其他凶謀, 初未之聞矣。" 壽大福尙曰: "凶謀非可傳於人人者, 故果不言于汝也。" 鞫金興祚, 興祚供曰: "臣本喬桐人。 娶巫女號占房者, 徙居京中, 親密述海家, 無異奴僕。 及述海竄謫後, 今年二月, 金壽大至臣家, 語臣曰: ‘洪述海有蒙放之道也。’ 臣以親密述海家, 故聞其言喜之, 招洪婢之爲崔世福妻者, 與之相見, 壽大謂曰: ‘吾妹有內人, 當爲之周旋, 必使汝上典, 宥還也。 若有財則事可成矣。’ 婢歸, 卽送四十兩錢, 托其成事, 故壽大取三十兩, 臣取十兩, 至於詛呪事, 臣全未之知也。" 鞫甘丁甘丁, 述海之婢也, 供曰: "洪述海赴謫時, 以符呪之物, 藏于退枕而去。 其後臣受述海妻指揮, 携錢五十五兩, 偕貞伊往于金興祚家, 其妻巫女占房, 同出水踰店, 作詛呪祈禱之事。 興祚常言: ‘若得財多, 則可使汝上典放還也。’ 臣樂聞其言, 言于洪述海妻, 述海妻乃以四十兩錢及綿紬一疋, 冠服一具與臣, 臣持往占房家, 占房汲五方之井水, 及述海家之井水, 又汲都承旨洪國榮家井水, 合成一器, 和注述海家之井。 且以朱砂畫二像, 一稱洪國榮, 一稱某姓兩班, 卽不敢言之地。 以矢編結二像, 仍乘草轎, 至述海家, 以示述海妻, 述海妻見而還授占房, 使埋當埋之地。 占房又作弧矢, 向空射之曰: ‘此是必死人之法也。’ 又寫符呪, 使其夫往埋洪國榮門前路曰, ‘其人必死矣。’ 興祚復語臣曰: ‘有宮女乳父者, 吾與之親密, 若多得銀行賂, 則內人貪財, 必有妙理。’ 云。 故臣信聽其言, 亦傳于述海妻。 而凡於恒言酬酢之際, 語及國家, 輒稱某姓兩班。’ 云矣。" 甘丁興祚對質。 甘丁興祚曰: "汝豈不云‘有宮女乳父者, 因此徑行賂, 則謫行可返也’乎? 吾問乳父誰也?’ 汝豈不云‘姓名金壽大, 而又以宮女爲甥, 其勢甚大也’乎? 吾甘聽汝言, 以爲‘當告汝上典’云爾, 則汝又曰: ‘事易泄, 必蓋頭往來, 勿令人見之。’ 吾一如汝言, 歸告汝上典, 與貞伊持錢紬冠服, 又往汝家禱祀, 則汝妻占房, 汲五方水作法, 以朱圖像, 編矢其上, 又書符呪, 令汝往埋。 凡此委折, 汝其敢曰不知乎?" 興祚甘丁曰: "汝家事, 汝盡吐實, 吾雖欲掩諱, 得乎?" 興祚遂供曰: "述海妻果使甘丁來見臣妻, 以其夫被謫, 必欲甘心於都承旨, 寫符埋其出入之路, 又以朱砂畫二像, 編矢其上, 一指都承旨, 一指不敢言之地。 且欲因宮人中壽大切族, 行貨逞凶。 凡若此類, 一如甘丁言也。" 鞫貞伊貞伊, 述海奴妻。 供曰: "臣曾與巫女占房相親熟, 述海妻欲使甘丁, 往見占房, 爲詛呪事, 使臣指示其家, 故臣遂同甘丁往其家禱祀, 蓋爲述海放還計, 且欲害洪承旨也。 又以朱砂畫二像, 一稱都承旨, 一稱某姓兩班, 卽不敢言之地也。 用蓬矢編結其畫, 向空而射之, 仍分埋東西, 是專爲述海報讎也。 占房所親別監以爲: ‘多費銀貨, 交通渠之族屬爲內人者, 則可以成事。’ 仍勸臣夫世福, 立排設房軍士, 欲乘機作變, 謀逆是實。" 大司憲鄭昌順等啓言: "述海妻締結妖巫, 購募刺客, 圖畫不敢言之地, 至試射天之凶, 詛呪不忍聞之說, 恣行巫蠱之變。 其言之至凶慘, 其計之至凶毒, 誠是亘萬古所無之大逆。 豈可以婦女爲拘, 而不卽鞫問乎? 請卽刻發捕, 嚴鞫正法。" 從之。 翼日親鞫孝任孝任供曰: "臣自昨年以後, 怏怏怨國, 與臣子相範百計伺隙, 必欲甘心於國家。 今年七月, 有金興福者, 自稱飯監, 來訪臣子於廣津, 而臣子適往龍仁地。 興福自言: ‘我是昔日出入門下者。’ 仍招臣家奴, 問安否於臣, 且謂家奴曰: ‘若得銀子四百兩, 則謫行自有放還之道。 。’ 臣答以無銀。 其後臣之奴妻貞伊爲名者, 素與興福相親, 貞伊常言有‘巫號占房者, 甚靈異, 若爲詛呪之事, 則主人當還歸。’ 也。 臣遂與錢五十五兩, 使貞伊甘丁等, 偕往占房家禱祀。 貞伊歸言其狀, 以爲: ‘設一祭床, 飯餠果菜具焉, 占房向四方拜舞作法, 作法者, 占房與其夫興祚, 或作紙人, 或汲井水, 或畫物形, 以行其符呪之事, 而別以朱砂圖二像, 編結蓬矢, 一稱姓兩班, 一稱都承旨, 或埋道傍, 或埋家後。’ 詛呪是實。 且以婢夫海根, 方爲政院假使令, 興福方爲飯監, 故欲夤緣宮人, 締結宦侍, 圖差世福於排設房庫直, 以爲長處禁中, 乘機逞凶之計。 臣子相範, 募得興文龍輝輩, 持利劍鐵鞭, 乘暮入闕, 登尊賢閣屋脊, 覘機犯上, 約龍輝女之爲內人者, 使之內應, 嘯聚龍輝所親無賴五十丁, 躡後觀望, 及其計不得售, 則又嗾興文, 潛越宮墻, 圖爲罔測之事, 謀逆是實。" 鞫介連介連, 述海之妾。 供曰: "臣在述海家時, 見炊鏊祈禱之狀, 又見述海妻, 遺甘丁貞伊輩, 持錢往巫家爲詛呪事。 臣亦嘗懷怨國之心, 與孝任協力綢繆, 內而刺客, 外而詛呪等事, 皆與同謀是實。" 鞫弼海弼海興文招中同知者, 以相範招中, 敎相簡爲逆者也。 逆獄起後, 亡匿不見, 至是踐更軍, 捕弼海靑坡以納。 弼海供曰: "臣以武科出身, 豢養於相簡家, 見相簡伏法後, 相範相吉輩, 常懷怨國之心, 恒言以爲: ‘必欲報讎。’ 相範有婢甘丁貞伊, 相吉有婢宗禮, 每聽相吉指使, 交通掖屬, 又有李奇同者, 以藝文館廳直, 爲相簡傔從, 其親屬多宮人, 輩, 每夜送三婢于奇同, 以圖攀援結納, 其窮凶之謀, 欲使奇同挾宮人乘夜入寢室而極矣。 臣聞此語, 亦嘗嗔責。 然臣武夫未有知識, 不敢上變。 相吉嘗往高陽地, 見其外三寸叔母而來, 其外三寸叔母, 卽商輅妻也。 臣聞其酬酢相吉曰: ‘叔母以爲: 「汝所交通處, 吾亦當送婢僕交通, 甘丁亦往來於趙貞喆家矣。」’" 翼日親鞫金壽大壽大興福, 以興祚逆謀, 爛漫知情承款。 又翼日親鞫洪相吉相吉念海之子, 而相範之四寸也。 因弼海供發捕, 至是拿鞫。 與弼海對質, 弼海相吉曰: "七月二十四日, 汝自相範家, 至宗禮家留宿云, 故吾往見汝, 汝曰: ‘爲收拾家中書籍, 且有可爲之事也。’ 仍作書使宗禮傳之, 其一奇同家也, 其謀交通宮禁, 直入寢內也。 汝自相簡死後, 日夜怨國, 豈不爲是凶謀乎? 且汝嘗往見汝外三寸叔商輅妻, 以其酬酢, 傳于吾者, 無非窮凶情節, 汝何敢發明乎?" 相吉語屈, 供曰: "締結凶徒, 作變寢內, 謀逆是實。" 問曰: "汝所締結者誰也?" 供曰: "奇同族親之爲內人者也。" 問曰: "不獨內人, 亦必有中官締結者, 其直告。" 供曰: "桂洞臣家越邊居安國來也。" 問曰: "宮人爲誰?" 供曰: "奇同之四寸, 居壽進洞者也。" 問曰: "汝往國來家乎? 國來往汝家乎?" 供曰: "臣往國來家, 而國來則否也。" 問曰: "何時往國來家乎?" 供曰: "年前數次往來, 今七月二十四日夕, 又往國來家, 臣曰: ‘死者已矣, 生者何時可還?’ 仍使國來募得他中官, 幷力圖之, 國來曰: ‘更議未晩矣。’ 與凡謀害聖躬之事, 臣皆參涉, 如龍輝興文海根相範之所結納, 而至於世福, 則臣果使相機作變也。" 問曰: "汝謀害聖躬, 向後事將欲何爲?" 供曰: "擇宗親中賢者也。" 問曰: "誰也。" 供曰: "三王孫有令望, 欲推戴矣。" 問曰: "推戴之謀, 誰與共之?" 供曰: "洪啓能首爲此謀。 三四月間, 啓能與其子信海及姪履海, 謂臣曰: ‘今上多失政。 不可無推戴之擧, 若仁廟反正事也。’" 問曰: "同參者誰也?" 供曰: "閔弘燮李澤遂知其謀也。" 問推戴節次, 供曰: "若太甲故事, 而如閔弘燮洪樂任者, 可爲將任, 如李澤遂者可爲藩任, 武弁如具秉勳之子翼遠可爲閫任。 此等人若位高, 可以次成事, 樂任則乃戚臣, 今雖不用, 久當自執兵權, 亦有習操時擧事之便也。 且啓能以爲: ‘反正之謀, 可以經營十年云矣。’ 凶謀相議時, 李澤遂閔弘燮, 會于新村啓能之舍而謀之矣。" 翼日鞫李澤遂澤遂供曰: "臣與啓能約月課, 月必往見, 月必書問, 殆無虛月, 而昨年十一月, 遭人言削黜, 自是不出門外一步地, 今年實未嘗往見也。" 使啓能晩福對質, 則晩福曰: "今年葉發時, 汝豈不使姓奴, 牽馬而來見吾上典乎? 裹糧而來, 炊飯而食, 吾上典坐於房奧, 汝坐於房邊, 吾至今記有也。" 又以其弟會遂所告 ‘今春間澤遂, 再見啓能’ 之供, 示澤遂, 則澤遂供曰: "願以知情不告遲晩。" 問曰: "凶謀聞於何處?" 供曰: "今春往啓能家, 則啓能曰: ‘今上多失政, 擧義推戴, 不可不爲也。’" 問曰: "同參者誰?" 供曰: "弘燮相吉相格也, 啓能之子與姪, 亦同之矣。" 問曰: "汝欲爲癸亥反正事, 而癸亥反正, 以光海多失德故也。 汝輩則乃因麟漢伏法, 而爲此事乎?" 供曰: "只曰擧義後欲推戴三王孫, 而不言反正事矣。"

越六日親鞫洪述海, 翼月推鞫洪趾海, 述海以赴謫時藏符呪事, 及相範募刺客作變, 孝任與妖巫埋凶, 啓能推戴之凶謀, 在謫後往復指揮承款, 趾海供亦同。 翼日又鞫洪纉海洪啓能纉海供曰: "昨年八月在黑山島時, 臣之婢夫卜龍持衣服書札而來, 其中有相吉者, 詳報三塗作逆之謀, 臣果一一往復, 臣當結案, 然結案甚重, 臣當從頭至尾, 逐句口呼也。" 問啓能曰: "汝假托虛名, 身居近郊, 作爲凶徒窩主, 大小言議, 無不主張指揮, 而甚至於銓注用舍之際, 亦無不參涉慫慂。 輩大北之說, 追崇之論, 疑動一世, 至有他日國洞之世入相之言, 而國家自在銅闈之時, 一扇一魚之頒, 如或未盡, 則諸賊藉重汝, 恐嚇脅迫, 無所不至。 及今義理大定, 賊黨鋤治之時, 如汝之爲賊黨巨魁者, 尙逭王章, 已是失刑, 則乃敢與相吉相格閔弘燮李澤遂等諸賊, 綢繆密室, 爲計益急, 至以太甲桐宮之說, 癸亥反正之擧, 詬天罵日, 無所不至, 乃有推戴三王孫, 及將任藩間排布等言。 則孝任之締結妖巫, 埋凶射天者, 亦由汝之推戴逆也; 輩之潛引刺客, 懷刃入闕者, 亦由汝之推戴逆也。 諸賊之千罪萬惡, 專由推戴之密謀, 而爲其向後事也。 斯速遲晩。" 啓能供曰: "問目全不近似矣。" 問曰: "傳敎問目, 汝敢以不近似之說, 勃慢爲對乎?" 供曰: "相吉昨年下鄕時, 果來見矣。 雖使優爲逆謀, 不少之人, 豈可遲晩乎?" 問曰: "汝敢終始勃慢乎?" 供曰: "何不速出斬之乎?" 問曰: "卽此一語, 乃是不道之言也。" 供曰: "太甲桐宮之說, 果因《尙書》文義言之也。" 啓能未結案而病狀危急, 三司諸臣, 請不待結案正法, 敎曰: "劇賊之不得正刑, 比之低仰金石之典, 猶有輕重之別。" 不從。 是日又親鞫尹泰淵泰淵腹心, 逆節彰著, 至是拿來於棘中。 泰淵供曰: "與厚謙相親, 萬死無惜, 而爲洪鳳漢所慫慂也。 逆謀, 則初不與知。" 忍杖不服。 初推戴之說, 出於相吉之招, 大臣三司承旨將臣及侍衛諸臣, 一齊進前曰: "窩窟今已破矣, 根柢亦已露矣。 相範之稱兵, 興文之挾匕, 孝任之咀呪, 莫不窩窟於啓能反正之謀, 而根柢則一是已, 之名旣出於相吉之招, 則是不但爲殿下之罪人, 卽宗社之罪人。 不但爲宗社之罪人, 亦天下萬世之罪人也。 凡今日北面於殿下之廷者, 尙忍與此賊, 共戴一天乎? 況今逆黨未盡究覈, 而以王室至親, 名入推戴, 則國勢之危疑, 事機之急迫, 尤不容晷刻暫緩。 伏願亟命王府, 卽速逮捕焉。" 上止之不能得, 遂起入小次, 將還內, 大臣以下, 伏閤外求對, 不許。 遂排闥直入幄前, 齊聲言曰: "今日國勢, 可謂岌岌乎殆哉, 殿下其可以一己之私, 而不念宗社之重耶? 名入推戴而得保首領者, 求之古今, 斷無是理。 苟使此賊, 一刻假息, 則是一刻國不得爲國, 一日假息; 則是一日國不得爲國。 到此地頭, 殿下雖欲一向曲貸, 其可得乎? 臣等有死而已, 不得請則不敢退矣。" 上涕泣曰: "卿等何忍慼予懷?" 大臣諸臣, 交口力爭, 且曰: "臣等目見禍機之迫在呼吸, 義不敢袖手恬然。 將兵之臣, 旣皆入來, 當自軍門, 先送軍卒, 把住逆家矣。" 上急止之。 諸將臣且奏且擧行, 上屢命大臣以下退去, 仍命內侍下帷, 亦不得, 自朝至晡, 上下相持。 大臣又言: "事已急矣, 禍已迫矣, 三綱將墜, 九法將淪。 到今殿下, 雖欲曲貸, 無奈何矣; 臣等雖欲仰體, 亦無奈何矣。 臣等寧伏擅恣之誅, 不忍與此賊, 晷刻共生。" 方令承旨, 書出榻敎擧行, 諸承旨又言: "大臣旣奏, 臣等亦不能晷刻忍耐, 敢此書出榻敎矣。" 仍書拿囚榻敎, 上急命扯去, 三司諸臣言曰: "爲今日臣子者, 孰敢扯去此紙乎?" 金吾堂上, 只可卽速擧行而已, 乃逮囚于義禁府。 領議政金尙喆等率百官庭請啓曰: "罪人之決不可一刻容息於覆載之狀, 已悉於昨今啓奏, 而殿下歷觀前代史牒, 國朝故事, 曷嘗有身爲近宗, 名入推戴, 而不置之法者乎? 況今亂逆層生, 窩窟未破, 國勢孤危, 人心波蕩。 不知何樣禍機, 伏於何處, 發於何日, 而其危急之機, 實迫呼吸。 尙可以留此禍根, 以作凶逆輩奇貨, 坐待其煽亂乎? 一日生在地上, 有一日國家之憂, 二日生在地上, 有二日國家之憂, 擧國遑遑, 未暇緩聲。 玆敢相率齊籲, 伏乞聖明, 淵然深思, 亟允罪人正法之請, 以副宗社神人之望焉。" 批曰: "此何言也? 卿等亟停所請, 以安予心。" 庭請五啓, 三司三啓, 竝不從。 奉朝賀金致仁上箚, 請絶亂本, 批曰: "箚請予不忍聞矣。 予嘗讀史, 至事, 未嘗不掩卷長吁, 傷周公遭時之鞎, 豈意予身親當之哉? 噫嘻! 蔦蘿之痛, 曷有其窮? 周公聖人也, 雖能處變行權, 而玆予否德, 學未臻聖人。 無聖人之德, 而行聖人之權, 亦莫之聞也。 此予所以晝而仰屋, 夜則繞壁, 寧欲無吪者也。 卿其體予小子之意, 勿復煩請, 以慰予懷。" 致仁又上箚進經權之說。 批曰: "昨批以非聖人, 不可行權之意, 略諭于卿矣。 卿箚又到曉譬經權二字, 至曰權而合道, 是乃經也, 卿之牖予迷執之意, 予固感焉, 而且念爲治不出於道與法, 而惟道不得獨行, 故聖人不得已立法, 以爲輔治道之具焉。 是以道有經權, 法分情跡, 經權之義, 卿雖畢陳, 而至於情跡之分, 亦有不可不深量者焉。 雖尋常斷獄之際, 有原情而屈法者, 又有執跡而誅心者, 今日臣庶所請之事, 求之於法, 則屬情乎? 屬跡乎? 咸曰可以行周公之事, 予則以爲有之跡, 無之情, 而斷以之法, 實有所不忍矣。 非但予不忍於私恩而然也, 卿其諒之, 勿復煩予。" 敎曰: "王法所拘, 雖置王府, 而癡孩何知? 想像艱楚之狀, 有淚盈眶, 無以爲懷, 問訊路絶, 安否莫聞。 令主獄之臣, 凡諸等節, 另加着意。" 諸臣鎭日庭請, 批曰: "卿等以予不允卿等之啓, 爲例答乎? 予豈忍以可已之事, 尙今不已, 使百僚三司, 鎭日奔走, 有若相持者然哉? 君臣之間, 貴相知心。 卿等若知予心, 何煩聒之至於此甚? 日前以經權之義, 情跡之分, 有所爲批於大臣者, 自以爲瞻聆所及, 庶幾感悟。 及見庭啓, 其所證引, 卽列朝已行之事, 而此亦有不然者。 惟彼安平錦城仁城, 在兩朝或爲同氣, 或爲近宗, 而畢竟竝歸磬甸, 則卿等必欲以此, 聞于予者, 無或藉以爲重之意乎? 予又有申復於卿者。 彼三人者, 俱是自干天誅, 致于大辟, 豈兩朝之慈恩, 有所一毫未盡而然歟? 實以宗社爲重, 私恩反輕故也。 予於今日, 卿等之請, 若有近似於三人之事, 則亦當仰述舊典, 勉副群心, 流涕而從之可也, 哽咽而許之亦可也, 若是其牢拒不已者, 予亦豈無以哉? 噫! 予之情事, 欲諭則聲已咽矣, 欲書則淚先滋矣。 孤露餘生, 豈有如予者? 鴒原之懷, 荊樹之依, 惟有庶弟三人, 而風露所祟, 不幸早死, 年紀差長, 疾病常纏, 惟幸而無恙, 每自以爲庶幾成立, 宗英繁衍, 使先父之子孫, 立我朝廷, 庶爲報劬勞之萬一, 而凶逆作孽, 名出於推戴矣。 歷觀從古宗親之負此名而全其身者幾希矣。 嗚呼! 生長綺紈, 蒙無知識, 渠豈知推戴之爲何事也? 予之情事, 求之古牒, 未有倫比。 故非不知兩朝之例, 亦非不知斷法伸恩, 而終有所不忍者, 其亦慼矣。 言之及此, 摧痛惻傷, 猶屬歇後。 更復何諭? 卿等其諒之, 無使予更聞不忍聞之請。 是所望於卿等也。" 及述海正法, 參鞫諸臣, 進前奏曰: "述海正法, 少洩輿憤, 而述海不過枝葉, 根柢之逆尙在地上, 假使復有如者, 欲爲推戴之謀, 則殿下將何以處之? 英廟仁廟已行之例, 臣等已仰奏, 而戊申之, 乙亥之, 先大王皆斷以王法。 況如逆地處乎? 惟願克遵成憲, 速降兪音。" 上曰: "王法之至嚴, 予非不知; 列朝已行之例, 亦非不知也。 予之情事, 予之所遭, 萬萬不侔於列朝之時。 予言至此, 卿等豈不諒予心乎?" 諸臣縷縷力請, 上乘輿將還內。 諸臣隨輿而入, 齊聲奏曰: "臣等旣以準請爲限, 死不敢退矣。" 上曰: "卿等其止之。" 乘輿至閤門, 大司憲趙㻐曰: "古之賢君, 止輦受言。 今大臣攀輿奏事, 而殿下乘輿還入, 此何等擧措也? 臣不勝慨然。" 上曰: "都憲得體矣。 卿等暫退, 待予還入而求對, 則予豈不引見乎?" 諸臣暫退。 上入熙仁門降輿熙政堂庭中, 命諸臣入侍。 諸臣又力請, 上曰: "卿等之如是爭執, 必以予言爲不足信, 良可愧也。 予之所望, 惟在全恩, 出置保其一縷而已。 此豈非公法私恩之兩伸耶?" 諸臣曰: " 殿下何爲出此敎也? 臣等雖卽日被誅, 決不敢奉承矣。" 上曰: "出置之典, 便同已死, 而渠之一縷, 猶幸得全, 渠若得生, 則必當持身謹愼, 保無後患。 予之所遭, 千古所無之變例也, 卿等中無一人知予切迫之情者, 豈不慨然乎?" 諸臣曰: "今日之道, 惟有斷義割恩四字而已。 臣等不知其他。" 上終不聽。 諸大臣以誠未格天, 胥命金吾, 批以勿待命。 金吾堂上求對, 召見于熙政堂。 判義禁鄭弘淳等奏曰: " 殿下每以賊, 謂有之跡, 而無之情。 卽聞府吏所言: ‘賊逮囚之後, 非徒無死意, 食必求飽, 衣必求煖, 咆哮恐喝, 無所不至, 至曰渠必生出, 復見天日。’ 云, 卽此一節, 已無臣分。 渠以王室至親, 名入推戴, 三木囊頭, 囚之南間, 則苟有一分臣子之心, 固宜卽地減死之不暇, 而乃反恬然晏然, 必欲圖生者, 究厥心腸, 將欲何爲? 不但其跡之浮於, 其情之僭於亦遠矣。 到此殿下其可不以已施之律施之乎?" 上曰: "渠本爲人輕淺, 言多妄發。 求衣求食, 不過死中求生而已。 此豈有情迹之可論耶?" 弘淳等力請, 不從。 自十七日大臣三司宗親文蔭武百官, 逐日迭上疏啓伏閤, 達曙庭請, 凡四十四啓, 三司凡六十二啓, 館學儒生、罷散前銜、軍校、醫、譯、各司吏胥, 以至五部坊民, 交章力請, 竝不從。 至是大臣率卿宰、金吾堂上、三司求對, 上不得已召見于熙政堂, 諸臣交口請割恩斷義, 自朝至晡, 無意退去, 上又不得已使大臣禁堂, 進詣王府, 曉諭而來。 諸臣至金吾, 跪于庭曰: "汝爲逆徒所推戴, 萬無一生, 而上雖不忍置汝于死, 汝若有臣節, 寧可一日活也?" 拒不從, 大臣復求對言: "卽此已無臣節矣。 請賜死。" 上猶難之, 大臣請令承旨, 以使之自盡事, 榻前定奪書出, 上涕泣而頷之, 乃賜死。 孝任甘丁, 以窮凶極惡, 萬剮猶輕, 大逆不道正法, 趾海述海纉海興文龍輝相範相吉相格興祚世福以大逆不道正法, 貞伊以謀逆同參正法。 澤遂初以謀逆同參結案, 上曰: "汝母卽慈宮至親。 予不忍以謀逆連坐論。" 乃以知情不告正法, 興福信德以知情不告正法, 海根繼昌啓能國來承款徑斃, 履海信海亦徑斃, 弼海以知情不告結案後, 濟州牧圍籬安置。 趙峸, 之妻父, 李受采, 之師徑斃。 李克觀克泰克己孝任至親就鞫, 克觀克泰絶 島爲奴, 克己島配。 趙貞喆南興老大燮奇同減死絶島安置, 趙元喆任宗周具翼遠 永丹邊遠定配, 李會遂減死島配。 李潤成趙嵎, 妻族絶島定配。 李觀源, 啓能女壻, 洪卓然洪秉憲, 趾海近族, 遠地定配。 今喜秀愛以有異造謀, 減死定配, 福氷以累朝宮人, 邊遠定配。 申光緝龍輝招逮捕, 放逐本鄕。 趙濟泰李彦衡就鞫特放。 干連諸囚, 竝酌決。 是歲逆變, 載籍所無, 而上或恐獄情之濫, 一從惟輕之典, 至九月十一日, 鞫事始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85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궁관(宮官)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