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5월 10일 갑술 3번째기사 1777년 청 건륭(乾隆) 42년

시신을 파내어 검진하는 방법을 신명하다

시신(屍身)을 파내어 검진(檢診)하는 법을 신명(申明)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의정 정존겸(鄭存謙)이 아뢰기를,

"살옥(殺獄)에 대한 법은 지극히 중한 것이니, 이미 묻었다는 것으로 검진하지 아니하여 사람을 죽인 자가 요행히 죄를 면하는 일이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선조(先朝)의 한때 하교를 인하여 근래에는 파내어 검진하지 않고 있으니, 끝내는 뒤 폐단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일체 《무원록(無冤錄)》을 따라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연석(筵席)에 나온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순문(詢問)하니, 모두 대신(大臣)의 말과 같았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양조(兩朝)의 수교(受敎)를 열람하고서 하교하기를,

"옛날 우리 숙조(肅祖)의 하교에는 ‘살옥(殺獄)에서 가장 긴중한 것은 검복(檢覆)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근래 외방의 수령들이 임의로 증감(增減)시켜 옥사(獄事)를 미루어 오기 때문에 수십년 동안 판결이 나지 않아서 옥중에서 병들어 죽는 사람이 있기에 이르렀다. 이 뒤로는 해관(該官)이 반드시 직접 스스로 파내어 검진하는 것을 한결같이 《무원록》을 따라서 하면 혹시라도 밝히기 어렵거나 미진한 걱정이 없을 것이다.’ 했으며, 또한 나의 영고(寧考)의 하교에는 ‘검험(檢驗)은 부실하더라도 사증(詞證)이 이미 갖추어진 경우에 추검(追檢)하는 것은 부당한 것인데 더구나 이미 매장한 것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뼈를 묻어주게 했었는데 지금은 백골(白骨)을 검험하기에 이르렀으니, 나는 이를 당한 사람은 다시 살해당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여기는데, 잔인하기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이 뒤로는 사람을 죽여 몰래 매장한 경우 전례에 의하여 검험한 뒤에 관(官)에서 매장하도록 하고 기타 이미 매장된 것은 검험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위대한 성인(聖人)의 말씀이시다.

백성의 목숨을 중히 여기고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하는 뜻이 사교(辭敎) 밖으로 애련히 흘러 넘친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은 사람에게 차마 포악하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사람에게 차마 혹독하게 하지 않는 정치를 행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를 세 번 읽는 것을 1백 번이나 거듭했는데 경건한 마음으로 읽노라면 격앙(激昻)되어 옴을 견딜 수 없었다.

지난번 빈대(賓對)할 때에 상신(相臣)이 주달하기를 ‘선조(先朝)에서 파내어 검진하는 데 대한 금령(禁令)이 있음므로부터 경외(京外)에서 감히 파내어 검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험(按驗)에 있어 죽은 이가 억울해 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했는데, 내가 그때 단지 숙조(肅祖)의 하교만 알았고 영고(寧考)의 하교는 상세히 몰랐었다. 그런데 수교를 가져다 보니 영고의 성의(聖意)도 또한 숙조의 성의와 같은 것이어서 파내는 것을 금하는 하교가 아니었다. 근래 경외(京外)에서 파내어 검진하지 않는 것은 단지 장언관(掌讞官)이 수교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한데서 온 소치인 것이다.

대저 《무원록》의 파내어 검진하는 법은 사사로이 화해하고 숨기고서 매장하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인데 선조(先朝)의 수교 가운데에 사람을 살해하고서 숨기고 매장한 경우에는 전례에 의하여 검험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숙조의 수교에 한결같이 《무원록》을 따르라고 한 하교와 같은 뜻이 아니겠는가? 지금 의논하는 사람들이 혹 하구(下句) 가운데 기타 이미 매장한 경우에는 검험하지 말라는 하교를 조금(朝禁)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이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 이는 곧 백골(白骨)을 검험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지금은 별로 영갑(令甲)을 신정(申定)할 일이 없으니, 한결같이 양조(兩朝)의 수교에 의하여 준행하기만 하면 된다.

오래 된 것을 파내고 백골을 검험하는 데 이르러서는 이번에 신명(申明)하는 때를 빙자하여 다투어 일어나 쟁송(爭訟)하여 분경(紛競)하는 단서가 야기되게 되면 이는 매우 선왕(先王)이 옥사(獄事)에 신중을 기했던 본의가 아닌 것이다. 오늘 이전에 이미 매장한 경우는 곧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소속된 것이니, 절대로 경솔히 거론하지 말게 하라. 이 뒤로 또 혹 햇수가 오래 된 것을 파내어 검험해야 할 경우에는 또한 경솔히 스스로 파내어 검험하지 말고 반드시 계문(啓聞)한 뒤에 거행하도록 항식(恒式)으로 정하여 시행하고 이런 내용을 경외에 알리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68면
  • 【분류】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의약-의학(醫學)

○申明掘檢之法。 先是右議政鄭存謙啓言: "殺獄之法至重, 不可以已瘞而不檢, 使殺人者倖免, 而因先朝一時下敎, 近則不得開檢, 終恐有後弊。 請一從《無冤錄》。" 上歷詢登筵諸臣, 皆如大臣言。 至是上覽兩朝受敎, 敎曰: "昔我肅祖之敎, 有曰: ‘殺獄之最緊最重者, 莫如檢覆, 間有外方守令, 任意增減, 獄事遷就, 至有數十年不決而瘦死獄中者。 自今以往, 該官必親自開檢, 一從《無冤錄》, 毋或有難明未盡之患。’ 亦惟我寧考之敎, 有曰: ‘檢驗雖不實, 詞證旣備, 則不當追檢, 況已埋者乎? 周文其猶掩骼, 今則至於白骨檢驗, 予則曰當之者, 無異再被殺, 殘忍莫甚。 此後殺人之匿埋者, 依例檢驗後, 自官埋置, 其他已瘞者勿檢。’ 大哉! 聖人之言也。 重民命恤刑獄之義, 藹然於辭敎之外。 傳曰: ‘先王斯有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斯其非歟? 予於是三復百回, 不任莊誦激昻也。 向於賓對, 相臣之奏以爲: ‘自有先朝掘檢之禁令, 京外不敢開檢, 按驗不無幽鬱之慮。’ 予於其時, 只知肅祖之敎, 未詳寧考之敎。 取見受敎, 則寧考之聖意, 亦只是肅祖之聖意, 而非爲禁掘之敎也。 近來京外之不得掘檢者, 特以掌讞之官, 不能詳悉, 領略於受敎之致。 大抵《無冤錄》掘檢之法, 欲防私和匿埋之弊, 則先朝受敎中殺人而匿埋, 依例檢驗之敎, 豈非肅祖受敎中一從《無冤錄》之敎也歟? 今有議者, 或以下句中, 其他已瘞者, 勿檢之敎爲朝禁, 而此則有大不然者, 此卽指白骨檢驗之謂也。 今則別無申定令甲之事, 一依兩朝受敎, 遵而行之。 至於久遠之掘, 白骨之檢, 藉此申明之日, 爭起互訟, 若有紛競之端, 甚非先王欽恤之本意也。 今日以前已埋者, 便屬令前, 切勿輕易擧論。 此後又或有年數已久, 可以掘驗者, 亦勿輕自開檢, 必也啓聞後擧行, 定式施行, 知委京外。"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68면
  • 【분류】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의약-의학(醫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