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록》이 완성되다
《명의록(明義錄)》이 완성되었다. 총재 대신(摠裁大臣) 봉조하(奉朝賀) 김치인(金致仁) 등이 차자(箚子)를 갖추어 진달하였는데, 차자에 이르기를,
"서리가 내리면 끝내 얼음이 어는 것과 같이 그 조짐을 일찍 분별하지 못한 데서 시작되는 것이니, 득실(得失)에 대한 환난이 끝내는 극도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게 됩니다. 성인(聖人)은 이치를 살피는 것이 매우 익숙하고 일을 걱정하는 것이 항상 먼 앞날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에 말을 한 것이 매우 은미하고도 통절하며 미덥고도 징험할 수 있으니, 귀감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우리 전하께서는 예성(睿聖)의 자질을 타고 나시었고 정체(正體)의 자리에 있으면서 춘궁(春宮)에서 덕을 배양하여온 지 20년이나 되었으나, 종사(宗社)의 촉탁(屬托)이 본디 정하여졌고 신민(臣民)의 애대(愛戴)가 두루 간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영종 성조(英宗聖祖)께서는 80의 노령(老齡)으로서 만기(萬幾)의 소중함을 진념(軫念)하여 고사(故事)를 본받아 대리 청정(代理聽政)할 것을 선유(宣諭)하셨습니다. 요(堯)임금이 노령이 되어 지치자 순(舜)임금이 섭정(攝政)한 것은 진실로 천인(天人)이 모두 흡족하게 여긴 것이니 시기로 보아도 옳았고 명분도 정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일종의 요망한 흉도(凶徒)들이 귀역(鬼蜮)이 되고 체동(螮蝀)073) 이 되며 효경(梟獍)이 되어 성후(聖候)를 숨길 수 있다고 여기고 대책(大策)을 저지시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깊이 교결한 세력이 이미 공고하다는 것을 믿고 국병(國柄)을 오래도록 훔칠 것을 엿보아 안팎에서 선동한 자취와 시종 서로 호응한 정상(情狀)이 첫 번째는 연주(筵奏)에서 탄로가 났고 두 번째는 장독(章牘)에서 드러났으며, 마침내는 밀실(密室)에서 주고받은 말과 사찰(私札)을 왕복한 데에서 난만하게 되어 슬그머니 신축년074) ·임인년075) 의 여러 역적들과 동일한 심정이었으니, 당시의 국사는 생각만해도 가슴이 서늘합니다. 만일 지극히 자애롭고 지극히 현명하신 성조(聖祖)076) 와 성대한 덕과 위대한 도량을 지니신 우리 전하가 아니었다면 나라에 어찌 오늘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내하(內下)하신 일기(日記) 가운데 을미년077) 2월 초5일부터 병신년078) 2월 28일까지의 기사(記事)를 읽고나서 듣지 못했던 것을 더욱 듣게 되었고 알지 못했던 것을 더욱 알게 되었는데 말마다 뼛골이 송연하고 단락마다 가슴이 떨렸습니다. 아! 우리 전하께서 어렵고 위태로운 일을 겪으신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었는데도 이에 신 등은 까마득히 모르고서 태연히 날짜만 보낸 채 한번도 목욕(沐浴)하고 토죄(討罪)하기를 청하는 의리를 행하여 일찍이 화란(禍亂)의 근원을 막은 적이 없었으니, 신 등의 어리석고 완만함에 대한 죄는 만번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일개 궁료(宮僚)가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하여 역적들의 권세가 치성하여 위엄이 시퍼럴 즈음 외로운 충심(忠心)에 의지하여 국세가 위급하던 때에 성궁(聖躬)을 도왔으니, 가까이에서 개도(開導)한 정성과 강개한 마음으로 부호(扶護)한 공은 참으로 하나의 나무로 큰 집을 지탱하였고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신(重臣)이 올린 한 소장은 또 위기를 반전(反轉)시키고 대계(大計)를 도와 이룩함으로써 역적들이 흉모를 부리지 못하게 하여 국운(國運)을 태평한 데로 되돌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전후 흉도들이 기필코 한두 신하를 속시원히 없앨 마음을 품어 제거 살해할 계획을 날로 심각하고 급박하게 하다가 끝내는 스스로 극악한 대역(大逆)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대저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한 자는 역적이 되는 것이고 사직을 부호한 자는 충신이 되는 것이며 책임지고 성궁(聖躬)을 보호한 자가 공신이 되기 때문에 보호하는 것을 방해한 자는 역신이 되는 것입니다. 청정(聽政)하기 전부터 곧바로 등극(登極)한 뒤에 이르기까지 온갖 단서들이 잇따라 발생하여 정절(情節)이 모두 드러났는데 흔단(釁端)이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밀어 내는 데에서 일어나 악(惡)이 군부(君父)를 원수처럼 여기기에 이르렀으며 죄는 궁금(宮禁)과 교통하는 데서 시작되어 화(禍)가 국가를 전복케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의 간사함이 이미 최절(摧折)되었으니 위를 보위(保衛)한 공이 더욱 커졌으며 민항렬(閔恒烈)·홍상간(洪相簡)이 실정을 이미 자백하였으니 기밀(機密)을 미리 알아챈 충성이 더욱 드러났는데, 이는 참으로 충역(忠逆)의 일대 안건(案件)인 것이고 의리(義理)의 일대 관건(關鍵)인 것입니다. 이제 다행히 천도(天道)가 환히 밝아져 나라 사람들이 일제히 토죄(討罪)하였고 부월(鈇鉞)을 가하여 단서(丹書)079) 에 기재하였으니, 이목(耳目)이 있고 심장(心腸)이 갖추어진 사람이면 그 누군들 이 무리가 난역(亂逆)이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와굴(窩窟)이 깊고도 어두우며 기모(機謀)가 은밀하기 그지없어 죄악을 빚어낸 근원과 계획을 배포(排布)한 맥락은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상세히 살펴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더구나 소원(疏遠)한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번의 역적들은 전부 척연 귀근(戚聯貴近)과 세족 거실(世族巨室)에서 나왔고 이들에게 빌붙어 주장한 자들도 청요직(淸要職)을 출입한 자들이 많아서 상하의 언의(言議)하는 무리들이 점차로 물들어 간 것이 이미 넓어졌으니, 여기에 광혹(誑惑)된 자들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지금 광명한 의리를 발휘(發揮)하여 흉칙하고 간사한 정상을 갈파하여 하늘에 걸린 해와 달처럼 밝게 하고 천둥과 벼락이 치는 것처럼 엄하게 하지 않으면 참으로 시일의 점점 오래될수록 보고 듣는 것이 혹 와전(訛傳)되어 징토하는 의리가 점점 흐려짐에 따라 번복(飜覆)시키려는 계교가 다시 싹트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이번에 이를 찬집(纂輯)하라고 명한 것은 군강(君綱)을 확립시키고 인심(人心)을 바루며 순역(順逆)을 밝히고 공죄(功罪)를 분별하여 명분(名分)을 엄히 하고 제방(隄防)을 존엄하게 하여 신자(臣子)들로 하여금 천상(天常)은 무시할 수 없고 왕법(王法)은 간범할 수 없는 것을 환히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악이 한도에 차게 되면 아무리 강해도 반드시 화(禍)를 받게 되고 충심을 품은 사람은 아무리 위태로워도 복(福)이 있으며 토죄하는 데 완만하게 하는 사람은 저절로 역적을 비호하는 데로 돌아가고, 성심으로 공신을 두둔하는 사람은 이에 국가를 위하는 것이 되니, 이미 지난 날의 원수를 통분하게 여기고, 앞으로는 징계되고 두려워하며 감화(感化)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가을에는 죽이고 봄에는 살리는 이치를 아울러 한꺼번에 시행한 것이니 극진한 의리이고 지극한 인자함인 것입니다.
신 등은 명을 받고 삼가 두려워하여 주야로 편찬하면서 먼저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를 권수(卷首)에 드러내어 그 체단(體段)을 높였고 다음에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의하여 일·월(日月)을 차서(次序)하였으며 사실을 뽑고 문자(文字)를 조절하여 시종(始終)을 다 실었으며 금오(金吾)의 문안(文案)을 참고하여 국정(鞫情)을 다 실었고 간간이 조정의 계사(啓辭)와 소장(疏章)을 실어 국론(國論)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단락(段落)마다 번번이 논단(論斷)을 붙여 옛날 사신(史臣)의 주폄(誅貶)한 뜻을 모방하였습니다. 편집(編輯)한 규모는 한결같이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의거하였고 범례(凡例)와 대의(大義)는 모두 예재(睿裁)의 품지(稟旨)를 거쳤습니다. 국(局)을 설치한 지 4개월 만에 비로소 끝마쳤는데 책이 모두 3편(編)입니다. 신 등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봉진(封進)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 과인(寡人)이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선대왕(先大王)의 천지 같은 은혜를 받은 덕이다. ‘이름은 비록 조손(祖孫)이지마는 실은 부자(父子)와 같다.’는 하교는 매양 생각할 적마다 눈물이 얼굴을 적신다. 우리 선왕(先王)의 자애로운 정은 경 등이 다같이 알고 있는 것인데, 우리 선왕께서는 신성(神聖)한 자질을 타고 나시어 80의 노령(老齡)을 누리셨다. 그런데 저 일종의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감히 천청(天聽)을 흐리고자 하여 처음에는 환득 환실(患得患失)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결국은 동궁(東宮)을 원수처럼 여기기에 이르렀으므로 저위(儲位)를 핍박하여 위태롭게 하였다.
그런데도 과인이 선왕께 우러러 아뢰지 않았던 것은 정섭(靜攝)하는 데 방해가 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었던 것이며 선왕께서 미쳐 간인(奸人)들의 정상을 통촉하지 못했던 것은 그 역시 항상 정섭 중에 있으셨기 때문인 것이었고, 흉도(凶徒)들이 안팎에서 서로 선동시킬 수 있었던 것도 정섭 중에 계신 틈을 이용한 것이다. 하찮은 나 과인이 앉아서 그들의 시달림을 받은 정상은 이미 내하(內下)한 일기(日記)에 상세히 다 말하였으니 다시 차마 붓에다 먹을 묻힐 것이 없다.
궁성(宮省)의 일은 비밀스러운 것이고 척완(戚畹)의 권세는 커서 대신(大臣)도 알 수가 없고 공경(公卿)도 알 수가 없으며 사서인(士庶人)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 그때에는 당연하였다. 그러나 신하인 홍국영(洪國榮)이 들어와서는 눈물을 삼켰고 나가서는 피를 토하면서 이 역적들과 함께 살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나의 몸을 보호하여 간맹(奸萌)을 꺾었다. 신(臣) 정민시(鄭民始)는 노심 초사하면서 정성을 다 바쳐 달리하지 않을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하였으며 신하인 서명선(徐命善)은 한 장의 상소로 임금께 호소하여 위태로움을 돌려 편안한 데로 돌려놓았는데 이는 모두 백세(百世)의 강상(綱常)을 심고 천하의 의리를 밝힌 것이니 성인(聖人)을 기다려 결정해 보아도 의혹될 것이 없다. 경 등이 난역(亂逆)의 근원을 밝힐 것을 생각하여 책을 만들어 군부를 높이고 난적을 토죄하는 도리를 밝힐 것을 청하였으니, 완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 큰 옥사(獄事)를 막 다스리고 나서도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고 거실(巨室)이 형륙(刑戮)을 당하여 국세(國勢)가 아득한 실정이니, 거(莒)에 있을 때를 잊지 말라는 의리080) 와 그물의 한쪽 면을 풀어주게 한 인자함081) 을 둘 다 행하여 어긋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경 등도 거괴(巨魁)가 이미 주멸(誅滅)되었다는 것으로 마음을 해이하게 지니고 이 책이 완성되었다고 우려를 소홀히 하지 말라. 아! 우로(雨露)를 내리기도 하고 상설(霜雪)를 내리기도 하는 것은 진실로 임금의 조화(造化)인 것이요 제방(隄防)을 만들기도 하고 의리(義理)를 밝히기도 하는 것은 실로 신자의 떳떳한 분의인 것이니, 그대들은 마음을 더욱 공고히 하여 우리 국가를 영원히 이어가게 하기를 깊이 경 등에게 바란다."
하고, 이어서 책을 올린 여러 신하들과 총재 대신 봉조하 김치인(金致仁)을 소견하였다. 김치인 등이 말하기를,
"책자(冊子)가 이미 완성되어 의리가 크게 밝아졌으니, 이제부터는 중외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천상(天常)은 무시할 수 없고 왕법(王法)은 간범할 수 없다는 것을 환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종사(宗社)의 끝없는 아름다움입니다."
하고, 홍국영(洪國榮)은 말하기를,
"신이 평일에 품고 있던 마음을 감히 하나의 소장으로 진달하여 본심을 밝히고 싶습니다."
하니, 그 소장을 읽도록 명하였는데, 소장에 이르기를,
"아! 지난번의 일에 대해서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화(禍)가 궁성(宮省)에서 선동되었고 변(變)이 척완(戚畹)에서 일어나 4백 년 동안 이어온 종사(宗社)가 장차 탈가(稅駕)082) 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생각하면 뼛골이 송연하고 간담이 떨립니다. 그때를 당하여 전하의 위태로움은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아! 우리 영종 대왕(英宗大王)께서는 자애로운 정리를 지녔고 거기에다 일월(日月)처럼 밝은 지감(智鑑)이 있었기 때문에 간적(奸賊)들이 계교를 부릴 수 없어 흉도들이 저절로 패몰되었으니, 아!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운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 왕대비 전하(王大妃殿下)께서는 임사(任姒)083) 같은 덕을 지니고 종국(宗國)의 소중함을 진념(軫念)하시어 우리 전하를 보호하여 주시고 우리 전하를 어루만져 사랑해 주었으며 집경전(集慶殿)에서 탕선(湯膳)할 적에는 혹 반걸음도 잠시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영선당(永善堂)에서 근거없는 화가 빚어질 때에는 반드시 그의 사기(辭氣)를 먼저 살펴 화의 싹을 미리 꺾어버림으로써 크게 대책(大策)을 도왔으니, 이는 대신(大臣)과 공경(公卿)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고 조정(朝廷)과 팔방(八方)이 듣지 못한 바입니다. 오직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신에게 하교(下敎)하였고 오직 소신(小臣)만이 슬픔을 억제하면서 전하의 하교를 받들어 들었습니다. 세월이 오래 되기는 하였습니다만, 황연(惶然)히 어제 일인 것만 같습니다. 자애로움으로 감싸준 은혜와 더없이 큰 덕은 영종 대왕과 함께 만세(萬世)에 그 아름다움을 짝할 수 있고 천하에 할 말이 있습니다.
방금 여러 역적들이 형륙(刑戮)을 받아 의리가 크게 밝아졌고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교대로 책으로 엮어 후세에 전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 책은 곧 바뀔 수 없는 금석(金石) 같은 글입니다. 어찌 부질없이 이룩된 것이겠습니까? 신이 주야로 분주하여 찬집(纂輯)하는 역사(役事)에 참여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책이 완성된 뒤에 가져다 보았고 차본(箚本)이 내려 온 것을 삼가 엎드려 읽어보니 변변찮은 천신(賤臣)의 이름이 그 가운데 태반을 차지하고 있어 우뚝하게 보호해 드린 주인(主人)이 되어 있었으니, 아!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전하께서 외롭고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진실로 천성(天性)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군들 이를 갈고 피를 토하지 않았겠으며 역적과 더불어 함께 살려 했겠습니까? 단지 신은 좋은 기회를 만났고 자취가 요속(僚屬)에 참여되었던 탓으로 남이 모르는 것을 안 것이 있고 남이 못 들은 것을 들은 것이 있을 뿐입니다. 어찌 척촌(尺寸)만큼인들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에 보익(補益)한 공이 있겠습니까?
아침저녁으로 마음을 태우면서 죽음으로 임금을 호위한 것은 신이 정민시(鄭民始)만 못하고 손수 강상(綱常)을 수립하여 단지 국가가 있다는 것만 안 것은 신이 서명선(徐命善)만 못합니다. 이는 모두 성명(聖明)께서 굽어 통촉하신 것이고 천신(賤臣)이 우러러 아뢰었던 것이었습니다. 아! 공이 없는데도 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위에서 상정(賞政)을 잘못하는 것이고 공이 없는데도 스스로 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래에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천지의 신명(神明)이 위에 임어하여 있고 곁에서 질정하고 있는데 신이 어떻게 감히 전하의 앞에서 말을 꾸며 의례적인 사양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국역(局役)이 이미 끝나 간포(刊布)가 곧 있게 되었으니, 신이 품고 있는 것을 진달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아! 왕대비전(王大妃殿)의 성덕(聖德)이 저처럼 성대한데도 미처 천양(闡揚)할 방도를 겨를하지 못했던 것은 전하를 기다린 바가 있어서인데 이제 이 책이 편성되었고 차전(箚箋)을 아룀에 있어 아랫사람으로서 어찌 한마디 유양(揄揚)하는 말을 하여 우리 성모(聖母)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소본(疏本)을 가지고 찬집한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편수(篇首)에 그런 사실을 발휘(發揮)하여 성효(聖孝)를 빛내게 할 방도를 생각하시고 이어 신의 이름이 분수에 너무 지나친 것은 산삭(刪削)시킴으로써 서법(書法)을 엄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동조(東朝)께서 보우(保佑)하여 주신 덕에 대해 내가 어찌 이를 표양(表揚)할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겸양(謙讓)하시는 성의(盛意)를 우러러 본받아 아직 한번도 조정에서 하유(下諭)하지 못했었는데, 경이 아름다움을 돌리는 정성과 유양(揄揚)하려는 성의가 이처럼 간절하고도 지극하니 더욱 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마땅히 찬집한 신하들로 하여금 경이 진달한 것처럼 삼가 편수(篇首)에 쓰게 하겠다. 상소 가운데 사양한 데 이르러서는 이것이 어찌 경이 남에게 사양할 수 있는 것이겠으며 내가 경에게 사사롭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아! 경이 아니었다면 어찌 나에게 오늘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본편(本編)을 살펴보건대 경의 공을 포장(褒奬)하고 경의 충성을 찬미한 것은 본래 일세(一世)의 공의(公議)인 것인데 경이 어떻게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간인(刊人)을 끝내고 나서 총재관(摠裁官) 김상철(金尙喆) 등이 전문(箋文)을 갖추어 올렸는데, 전문에 이르기를,
"난적을 토죄하고 악역을 징계하는 것이 부월(鈇鉞)이 천주(天誅)를 행하게 된 이유이고, 사실을 뽑아 내어 글을 엮는 간책(簡冊)은 국시(國是)로서 정하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난적이 이로부터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고, 윤이(倫彛)가 이를 힘입어 더욱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에 흉역(凶逆)이 싹트는 것은 성신(聖神)이 왕위를 주고받을 즈음에 많이 있었던 바입니다. 김안로(金安老)는 보호한다는 논의를 가탁하여 국가를 망칠 계책을 빚어 내었으며,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는 핍박하는 모략을 멋대로 부려 하늘에 사무치는 큰 앙화(殃禍)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처음에는 틈을 노려 손을 써서 자신들의 사심(私心)을 채우려 했었고, 끝에 가서는 기강을 간범하여 상도(常道)를 혼란시킴으로써 스스로 위를 간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지난 재작년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이는 진실로 선대왕(先大王)께서 정사에 지치신 노령(老齡)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원량(元良)이 있음을 경하하여 자곤(紫袞)의 고사(故事)를 논하였고, 서무(庶務)가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매양 억지로 단의(丹扆)084) 에 임어하게 되는 것을 탄식하였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환후(患候)가 더욱 극심하여졌는데, 이는 50년 동안 정사에 근로한 데 연유된 것입니다. 열성(列聖)의 구장(舊章)을 계술(繼述)하였으니 이에 대조(大朝)·소조(小朝)가 노고를 나눌 것을 명하였으니, 아! 훌륭한 문왕(文王)의 뒤를 무왕(武王)이 이어받아 애대(愛戴)한 그 유래가 오래였으며, 요(堯)임금이 노령에 이르렀는데 순(舜)임금이 섭정(攝政)하는 것은 사세를 돌아보건대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춘저(春儲)의 덕이 조숙하여 영명(英明)함이 드러나니, 저 흉도(凶徒)들이 두려워 꺼리는 마음을 누적시켜 왔습니다. 그리하여 의리로 그들의 두뇌(頭腦)를 환히 꿰뚫었으므로 사설(邪說)이 절로 용납될 데가 없게 되었으며, 귀역(鬼蜮)이 그 간폐(肝肺)를 다 드러내자 예감(睿鑑)이 태양처럼 환히 비추었습니다.
조정을 탁란(濁亂)시킨 죄인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궁성(宮省)에서 교결한 자취에 대해서는 위에서 홀로 알고 계셨지만 대성(大聖)께서 널리 함축하는 큰 도량으로 기미(幾微)를 나타내지 않았는데, 소인(小人)이 틈을 엿보는 간사한 마음에 저절로 의구심(疑懼心)이 생기게 되었고 때문에 왕실의 외척인 자들이, 감히 저궁(儲宮)을 원수처럼 여기는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한(漢)나라 때 양기(梁冀)는 임금의 현명함을 매우 꺼려 드디어 발호(跋扈)하는 뜻이 자라났고, 송(宋)나라 미원(彌遠)은 스스로 자기의 죄를 알고 도리어 불궤(不軌)를 저지를 모의를 품어 와언(訛言)을 창도하여 중외(中外)의 보고 듣는 이들을 현혹시키면서 하지 않는 짓이 없었고, 사인(私人)을 배포(排布)하여 금중(禁中)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으니, 장차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런 때문에 성명(成命)을 내린 때를 당하여, 더욱 대책(大策)을 극력 저지할 것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역적 홍인한(洪麟漢)은 임금과 매우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 형의 남은 위세(威勢)를 힘입었으며, 역적 정후겸(鄭厚謙)은 하늘이 낸 간요(奸妖)로서 자기 어미를 끼고 함께 악역을 저질렀습니다. 화심(禍心)을 품고 저알(沮遏)할 계책을 부리려 하면서 ‘반드시 알지 않아도 될 것이 셋이다.’라고까지 하였으며, 은밀한 길을 빙자하여 〈성명(成命)을〉 번복시킬 계모를 주장하였으니 용서할 수 없는 죄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기세(氣勢)를 몰아 심복(心腹)과 수족(手足)으로 부렸고, 언의(言議)를 통하여 심부름하는 앞잡이로 삼았습니다. 슬그머니 요사스러운 심상운(沈翔雲)이 탈바꿈을 하여 나왔고, 계속해서 윤약연(尹若淵)이 틈을 타서 소장을 올렸습니다. 온실(溫室)이라는 은밀한 말을 만들어 궁단(宮端)의 지위에서 제거시키려 하였으며, 영관(瀛館)085) 에서 부추기는 힘에 넘어가 드디어 감히 국변(國邊)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민항렬(閔恒烈)·홍상간(洪相簡)의 흉칙함에 이르러서는, 이미 대북(大北)의 기사년086) 논설이 드러났습니다. 월점(越點)을 의심하여 공공연히 원망했으니 누적된 조짐은 그 유래가 있었고, 《송사(宋史)》를 논하여 은밀히 협박을 도모했으니, 사사로이 헌의(獻議)한 것은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하는 것입니다. 일망 타진하여 장살(戕殺)하려는 계책을 세운 것은 홍지해(洪趾海)·홍찬해(洪纘海)가 난형 난제(難兄難弟)이고, 기관(機關)을 설치한 음참(陰慘)한 서한(書翰)을 왕복한 이상로(李商輅)·이선해(李善海)는 모두 인아(姻婭) 사이였습니다. 혹 서한을 낭대(囊袋)에 넣어 보내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부류들을 모집하였으니 동쪽 서쪽에서 몰려와서 마구 날뛰었는데, 혹 병권(兵權)을 장악하고서 속마음을 나눌 교분(交分)을 가탁(假托)하였으니 무슨 일로 어두운 밤에 출몰(出沒)하였겠습니까? 비록 얼굴을 바꾸었으나, 모두 심장(心腸)은 연결되었습니다. 놀라운 사기(事機)가 춘저(春儲)에 계실 때 교대로 나왔으니, 아! 너무도 위태로웠으며, 그들의 음모가 등극(登極)한 뒤에 더욱 드러났으니, 생각하면 가슴이 섬뜩합니다.
다행히 여러 역적들이 모두 죄를 승복하여 처벌되었는데, 오늘이 있게 한 것이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영선당(永善堂)에서 근거없는 화(禍)가 빚어 질 즈음에 저궁(儲宮)을 도운 것은 애련한 장락(長樂)087) 의 지극한 사랑이었으며, 군흉(群凶)들이 저알(沮遏)하는 가운데에서 건단(乾斷)을 내린 것은 위대한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굉도(宏度)였습니다. 이때 또한 한두 명의 정량(貞亮)한 신하가 있어, 길이 우리 4백 년의 종팽(宗祊)을 도왔습니다.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친 것은 좌우의 궁료(宮僚)가 협보(夾輔)한 것이요, 한 장의 소장을 올려 궐문(闕門)에 부르짖은 것은 비분 강개한 사직(司直)의 외로운 충성이었습니다. 국가를 태산(泰山)과 반석(磐石)처럼 평안하게 한 공은 실로 상하가 조호(調護)한 것에 연유한 것이며, 기미에 따라 응변(應變)하는 방도는 모두가 성명(聖明)께서 두루 지시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번 징토(懲討)를 행함에 이르러서는, 더욱 천명(闡明)하는 거조를 서둘렀습니다. 천위(天威)를 오용(五用)088) 으로 엄숙하게 한 것은 금오(金吾)의 국안(鞫案)에서 증험할 수 있고, 천추 만세에 인기(人紀)를 세운 것은 석실(石室)의 사첩(史牒)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몽매한 사람을 개유(開牖)하는 요점은, 한 통의 책만한 것이 없습니다. 척리(戚里)의 기세가 치성하여 아직도 남은 두려움이 많고, 궁위(宮闈)의 일은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다 알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이 건의(建議)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어 국(局)을 개설(開設)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내장(內藏)되었던 일기(日記)를 게재(揭載)한 것은 비유하건대 《춘추(春秋)》의 경문(經文)과 같은 것이며, 간간이 연석(筵席)에서의 이야기와 조정의 소장(疏章)을 붙여 넣은 것은 《소감(昭鑑)》의 범례(凡例)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들의 와두(窩竇)와 혜경(蹊逕)을 깨뜨려 이미 발본 색원(拔本塞源)하였고, 협박에 의해 빌붙어 따랐던 무리들은 간락(刊落)함으로써 용인(容忍)하는 도량을 보였습니다. 천성(天性)을 타고난 생령(生靈)의 부류는 모두 안개를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보게 되었고, 저 위세를 두려워하고 은혜를 생각하던 무리들은 오히려 또한 덮였던 것을 벗고 가려졌던 것을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긋나지 않고, 금석(金石)과 같아서 변치 않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을 지니시고, 지극히 어려운 시기에 처하였습니다. 예지(睿智)가 뛰어나셨으니 진실로 마음을 채찍질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증익시킨 공부에 도움받은 것이며,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복이 두터우니 이에 유구히 이어갈 서업(緖業)을 광대(光大)하게 열었습니다. 이에 앞선 일에 징계되어 뒷일을 조심하는 뜻에서 깊이 이치를 밝히고 의리를 바루는 방도에 대해 진념(軫念)하셨습니다. 대서(大書)로 특서(特書)하는 필법(筆法)에 붙이니 도깨비처럼 날뛰던 무리들이 그 정상을 도망할 수 없게 되었으며, 왕도(王道)를 준행하여 세도(世道)를 바루었으니, 상설(霜雪)과 우로(雨露)의 은혜와 위엄이 함께 시행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 등은 모두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질로서, 외람되이 편집(編輯)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섭행(攝行)을 명한 유지(遺旨)가 눈물겨우니 아! 잊을 길이 없으며, 피를 토하는 여정(輿情)이 격앙(激昻)하였으니, 삼가 기록하였습니다. 편찬하는 노고가 대강 이루어졌으나 감히 상세하다고야 말하겠습니까? 순역(順逆)의 구분이 크게 밝혀졌으니 누군들 명의(名義)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인심이 오랫 동안 함닉(陷溺)되어 있었으니 당시의 사나운 기세를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륜(天倫)이 인멸(湮滅)되려 할 때 이를 밝혔으니, 백세(百世)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이에 어전(御前)에 진헌합니다만, 한갓 송구스러움만 간절할 뿐입니다. 찬집한 《명의록》 3편(篇)을 삼가 전문(箋文)과 함께 아룁니다."
하였는데, 규장각(奎章閣)과 다섯 곳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저장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5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 출판-서책(書冊)
- [註 073]체동(螮蝀) : 《시경(詩經)》 용풍(鄘風)의 편명(篇名)으로서 무지개를 가리키는데, 무지개의 출현은 음양(陰陽)의 비정상적인 기운이 교감(交感)되어 생긴다고 하였으며, 음분(淫奔)한 풍조를 풍자한 내용임.
- [註 07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075]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076]
성조(聖祖) : 영조(英祖).- [註 077]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註 078]
병신년 : 1776 영조 52년.- [註 079]
단서(丹書) : 죄적(罪籍).- [註 080]
거(莒)에 있을 때를 잊지 말라는 의리 : 제환공(齊桓公)이 공자(公子)로 있을 때 형인 양공(襄公)이 무도한 정치를 하자 거(莒)로 달아나 많은 고초를 겪은 뒤 나중에 다시 돌아와 임금이 되었는데, 환공이 관중(管仲)에게 "앞으로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겠는가?" 하니, 관중이 "거(莒)에서 고생하던 때를 잊지 않으면 됩니다." 한 고사(故事)에서 온 말.- [註 081]
그물의 한쪽 면을 풀어주게 한 인자함 : 탕왕(湯王)이 들에서 어떤 사람이 사방을 막은 그물을 쳐놓고 "모두 이 그물 속으로 들어오라."고 비는 것을 보고, 그 그물의 3면을 터놓은 채 "왼쪽으로 갈 것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갈 것은 오른쪽으로, 그렇지 않을 것만이 그물 속으로 들어오라."고 빈 데서 나온 고사(故事).- [註 082]
탈가(稅駕) : 장래의 사태가 어떻게 될는지 모른다는 뜻. 진(秦)나라 때 이사(李斯)가 재상(宰相)이 되어 부귀가 극도에 이르자 "내가 탈가할 곳을 모르겠다." 한 데서 온 말로, 수레를 풀고 편히 휴식하고 싶다고 하는 뜻과 아울러 지금은 부귀하지만 향후의 길흉(吉凶)은 어떨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쓰임.- [註 083]
임사(任姒) : 태임(太任)과 태사(太姒)를 말함. 태인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이며 왕계(王季)의 아내이고, 태사는 문왕의 아내이며 무왕(武王)의 어머니로, 모두 훌륭한 부덕(婦德)을 지녔다고 함.- [註 084]
단의(丹扆) : 임금의 위에 치는 붉은 머릿 병풍.- [註 085]
영관(瀛館) : 홍문관(弘文館).- [註 086]
○《明義錄》成。 摠裁大臣奉朝賀金致仁等, 具箚子以進, 箚曰:
霜氷之漸, 始於辨之不早, 得失之患, 終於無所不至。 聖人之閱理甚熟, 慮事常遠, 故其爲言深微痛切, 信而有徵, 可不鑑乎? 嗚呼! 惟我殿下躬睿聖之姿, 居正體之地, 毓德春宮垂二十年, 宗社之屬托素定, 臣民之愛戴普切。 肆惟我英宗聖祖, 以大耋之齡, 軫萬幾之重, 監于故事, 詔以代聽。 堯倦舜攝, 允協天人, 以時則可, 以名則正。 而惟彼一種妖凶, 爲鬼爲蜮, 爲螮蝀爲梟獍, 謂聖候可諱, 謂大策可沮。 恃奧援之旣固, 覬國柄之久竊, 表裏煽動之跡, 首尾和應之情, 一綻於筵奏, 再闖於章牘, 卒爛漫於密室酬酢, 私札往復, 而居然與辛壬諸逆同一腸肚, 當時國事, 思之懍然。 倘微我聖祖之至慈至明, 我殿下之盛德偉度, 則國安得有今日乎? 臣等伏讀內下日記, 自乙未二月初五日至丙申二月二十八日, 益聞其所不聞, 益知其所不知, 言言骨驚, 段段心寒。 嗚呼! 我殿下閱歷艱危, 至於此極, 而乃臣等漠然不知, 恬然度日, 曾不能一效沐浴之義, 早杜禍亂之源, 臣等之愚迷稽緩, 萬死而有餘罪矣。 所賴一介宮僚, 乃心王室, 仗孤忠於賊焰鴟張之際, 翊聖躬於國勢岌嶪之日, 密勿開道之誠, 慷慨扶護之功, 眞可謂支廈之一木, 擎天之隻手, 而重臣一疏, 又有以轉斡危機, 贊成大計, 使賊謀莫售, 邦運回泰。 此前後凶徒所以必欲甘心於一二臣, 而剪除戕殺之計, 日深日急, 終自陷於劇逆大憝, 而莫之逭者也。 夫危社稷者爲逆, 故扶社稷者爲忠, 任保護者爲功, 故害保護者爲賊。 蓋自聽政以前, 直至御極之後, 端緖層生, 情節畢露, 釁起於擠軋異己, 而惡至於讎視君父, 罪始於交通宮禁, 而禍幾於顚覆邦家。 厚、麟之奸旣折, 則衛上之功益大; 恒、簡之款旣輸, 則先事之忠益著。 此誠忠逆之一大案, 而義理之一大關也。 今幸天道孔昭, 國人齊討, 加以鈇鉞, 載之丹靑, 有耳目而具心腸者, 孰不知此輩之爲亂爲逆? 而惟其窩窟深暗, 機謀陰秘, 醞釀之源委, 排布之脈絡, 雖在廷諸臣, 亦容有未能細悉而明知, 而況踈遠之人乎? 且今番諸賊, 專出於戚聯貴近, 世族巨室, 附麗而主張者, 亦多是出入淸要, 上下言議之徒, 漸染旣廣, 誑惑必多。 今若不發揮光明之義理, 劈破凶邪之情狀, 使如日月之懸, 雷霆之震, 則誠恐時日寢遠, 聞見或訛, 懲討之義漸晦, 而翻覆之計復萌也。 今此纂輯之命, 蓋所以立君綱、正人心、明逆順、敍功罪, 嚴其名分, 峻其隄防, 使爲臣子者曉然知天常之不可侮, 王法之不可干。 稔惡者雖强必禍, 懷忠者雖危必福, 緩聲於討罪者, 自歸護逆, 誠心於推功者, 乃爲向國, 咸有以痛憤讎嫉於旣往, 懲懼感化於方來。 秋殺春生, 一擧幷行, 義之盡仁之至也。 臣等受命祗懼, 夙夜編摩, 先以《尊賢閣日記》表諸卷首, 以尊其體段, 次以《政院日記》序其月日, 摭其事實, 節其文字, 以該其始終, 參之金吾文案, 以悉鞫情, 間以朝廷疏啓, 以見國論。 每段之下, 輒附論斷, 以倣古史氏誅貶之義。 編輯規模一依《闡義昭鑑》, 而凡例大義, 悉稟睿裁。 設局四朔, 始告訖, 書凡三編。 臣等謹拜手稽首封進焉。
批曰: "嗚呼! 寡人之有今日, 荷先大王天地之恩也。 ‘名雖祖孫, 實則父子’之敎, 每一思惟, 有淚被面。 我先王止慈之情, 卿等之所共知也, 而我先王以聖神之姿, 享倦勤之齡。 彼一種不逞之徒, 敢欲滓穢於太淸, 始以患得失之心, 終至讎視貳君, 危逼儲位。 寡人不能仰奏先王者, 以恐妨於靜攝也; 先王之未及俯燭奸情者, 以常在於靜攝也, 凶徒之交煽於內外者, 亦以乘間於靜攝也。 眇予寡人坐受其困之狀, 已詳於內下日記, 更不忍泚筆, 而宮省事秘, 戚畹勢大, 大臣不得知, 公卿不得知, 士庶人亦不得知。 當其時也, 惟一介臣洪國榮入而飮泣, 出而沫血, 誓不與此賊共生, 保護予躬, 逆折奸萌。 惟臣鄭民始焦心竭誠, 矢死靡他; 惟臣徐命善尺疏叫閽, 轉危爲安。 此皆樹百世之綱常, 明天下之義理, 可以俟聖人而不惑也。 卿等思欲明亂逆之源, 請以書闡之, 尊君父討亂賊之道, 可謂備矣。 嗚呼! 大獄纔鋤, 人心靡定, 巨室就戮, 國勢罔涯, 在莒之義, 解網之仁, 宜乎兩行而不悖。 卿等亦毋以巨魁之已誅而弛心, 斯編之已成而忽慮。 噫! 雨露霜雪, 固是人君之造化; 隄防義理, 實爲臣子之常分。 益堅乃心, 永我邦家, 深有望於卿等。" 仍召見進書諸臣摠裁大臣奉朝賀金致仁。 致仁等曰: "冊子已成, 義理大明, 自今以後, 中外臣民, 莫不曉然知天常之不可侮, 王法之不可干。 實宗社無彊之休矣。" 國榮曰: "臣有平日所蘊, 敢陳一疏, 欲明本心矣。" 命讀其疏, 疏曰: "嗚呼! 向來之事, 尙忍言哉? 禍煽於宮省, 變起於戚畹, 四百年宗社, 其將稅駕無所, 思之骨靑, 念之膽掉。 方其時也, 殿下之危, 可謂岌乎殆哉。 嗚呼! 我英宗大王以止慈之情, 重以日月之明, 奸賊莫售, 凶徒自敗, 於乎不忘天高地厚, 亦惟我王大妃殿下, 以姙姒之德, 念宗國之重, 保護我殿下, 撫愛我殿下, 集慶湯膳之際, 未或跬步而暫離, 永善醞釀之時, 必於辭氣而先察, 逆折禍萌, 丕贊大策, 此則大臣公卿之所不知, 朝廷八方之所不聞也。 惟殿下涕淚而下敎於臣, 惟小臣掩抑而承聆於殿下者也。 日月雖久, 怳然如昨。 慈覆之恩, 莫大之德, 可與英宗大王匹美於萬世, 有辭於天下。 方今諸逆就戮, 義理大明, 大臣諸臣, 迭請編書, 以垂來後, 是書也卽不刊金石之文也。 豈徒然哉? 臣奔走夙夜, 未預纂輯之役, 編成之後, 取而見之, 箚本之下, 伏而讀之, 無狀賤臣姓名, 居半於其中, 巍然爲保護之主人, 噫嘻! 此何事也? 當殿下孤危之日, 苟有秉彝之心, 孰不沫血切齒, 不與賊共生? 而特以臣夤緣倖會, 跡參僚屬, 有人所不知而知之者, 有人所不聞而聞之者而已, 何有尺寸之功, 補益於宗社之危乎? 其早夜焦心, 拚死衛君, 臣不如鄭民始也; 手樹綱常, 只知國家, 臣不如徐命善也。 此皆聖明之所俯燭, 賤臣之所仰奏者也。 嗚呼! 無功而曰以有功, 上失其政, 無功而自以有功, 下誣其身。 天地神明, 臨之在上質之在傍, 臣豈敢开辭例讓於 殿下之前哉? 局役已訖, 刊布在卽, 臣之蘊抱者, 不陳於今日, 而更何待乎? 嗚呼! 王大妃殿聖德如彼其盛, 未遑闡揚之道者, 蓋殿下有所待矣, 而是書之編, 箚箋之間, 在下者安可不一語揄揚, 以答我聖母之恩乎? 伏願殿下, 將臣疏本, 下詢於纂輯諸臣, 思所以發揮於篇首, 以光聖孝, 仍刪臣名之太過分數者, 以嚴書法焉。" 批曰: "東朝保佑之德, 予豈無表揚之心, 而仰體撝謙之盛意, 未及一諭於朝廷矣。 卿之歸美之忱, 揄揚之誠, 若是懇至, 益感予衷。 當令纂輯之臣, 如卿所陳, 謹書於編首。 至若疏中辭巽, 是豈卿之可以讓於人者, 而予之可以私於卿者? 噫! 非卿曷予有今日? 且觀本編, 則褒卿之功, 美卿之忠者, 自是一世之公議, 卿何庸辭焉?" 印訖, 摠裁官金尙喆等具箋以進, 箋曰:
討亂懲惡, 鈇鉞所以行天誅, 摭實纂言, 簡冊所以定國是。 亂賊從玆知懼, 倫彝賴以益明。 自昔國家凶逆之萌, 多在聖神授受之際。 安老托保護之論, 釀成凶國之圖, 耉、輝肆危逼之謀, 馴致滔天之禍。 始也投間抵隙, 欲濟己私, 終焉干紀亂常, 自底上犯。 粤若再昨年代聽之命, 寔在先大王倦勤之齡。 慶一人之元良, 至論紫袞之故事, 妨庶務於靜攝, 每歎丹扆之强臨。 閱歲之愆度彌留, 蓋緣五十載勤政。 列聖之舊章是述, 爰命大小朝分勞, 猗文顯之武承而愛戴, 厥惟久矣。 若堯老而舜攝, 顧事勢容可已乎。 惟儲德夙著英明, 伊凶徒積有畏憚。 義理洞見其頭腦, 邪說無地自容, 鬼蜮畢露其肺肝, 睿鑑如日斯照。 凡朝著濁亂之罪人, 孰不知? 若宮省糾結之蹤, 上所獨悉, 雖大聖含弘之度, 不見幾微, 以小人伺側之奸, 自生疑懼, 所以戚聯王室之輩, 敢懷讎視儲宮之心。 漢 梁冀之深忌主明, 遂長跋扈之志, 宋 彌遠之自知己罪, 轉蓄不軌之謀, 倡訛言而惑中外之聽聞, 靡所不至, 布私人而察禁奧之動靜, 將欲何爲? 故當成命之誕宣, 益圖大策之力遏。 逆麟則地處肝腑, 席乃兄之餘威, 賊厚則天生奸妖, 挾其母而同惡。 藏禍心而逞沮格之計, 至曰: "不必知者三。" 憑幽逕而主翻覆之謀, 蓋其罔赦罪非一。 氣勢之所驅使心腹爪牙, 言議之所關通, 鷹犬嚆矢。 居然雲妖之幻出, 繼以淵疏之闖呈。 做溫室隱暎之言, 欲爲除宮端之地, 感瀛館吹噓之力, 遂敢謂國邊之人。 至若恒烈、相簡之凶, 已著大北己巳之說。 疑越點而公肆怨懟, 積漸蓋有由來, 論《宋史》而潛售脅持, 私獻猶屬餘事。 網打戕殺之計, 趾、纉難爲弟兄, 機關陰慘之書, 輅、善俱是姻婭。 或囊疏而募頤指之類, 自來東西跳踉, 或掌兵而托肝膽之交, 底事昏夜出沒? 雖其改頭而換面, 悉是連肚而共腸。 駭機迭出於在儲之時, 噫其殆矣, 陰謀益彰於御極之後, 思之懍然。 幸諸賊咸服其辜, 有今日伊誰之力? 翊震儲於永善醞釀之際, 藹長樂之至慈, 廓乾斷於群凶沮遏之中, 偉大行之宏度。 時亦有一二臣貞亮, 永綏我四百年宗祊。 隻手擎天, 左右宮僚之夾輔, 一疏叫閣, 慷慨司直之孤忠, 而泰磐奠安之功, 實由上下之調護, 抑隨機處變之道, 莫非聖明之彌綸。 迨玆懲討之行, 尤急闡明之擧。 肅天威於五用, 金吾之鞫案可徵, 樹人紀於千秋, 石室之史牒斯在。 然惟牖群蒙之要, 莫如裒一通之書。 戚里勢張, 尙多餘讋, 宮闈事秘, 有難盡知。 斯廷臣之建言, 奉聖旨而開局。 首揭內藏日記, 譬則《春秋》經文, 間附筵話廷章, 取諸《昭鑑》凡例。 劈破其窩竇蹊逕, 旣援本而塞源, 刊落乎附麗脅從, 且含垢而藏藪。 凡厥含生秉彝之類, 擧幸披霧而覩天, 雖彼怵勢懷恩之徒, 尙亦發蒙而去蔽。 建天地而不悖, 貫金石而靡渝。 恭惟主上殿下, 以上聖姿, 處至艱會。 睿智超詣, 寔資動忍增益之工, 天休篤棐, 誕啓光大悠久之業。 乃以懲前毖後之意, 深軫明理正義之圖。 寓筆法於大書特書, 魑魅魍魎之莫逃情狀, 囿世道於會極歸極, 霜雪雨露之幷施恩威。 伏念臣等俱以庸愚, 濫叨編輯。 命攝之遺旨惻怛, 於乎不忘沫血之輿情激昻書之惟謹。 編摩之勞粗效, 敢曰爲此頗詳? 逆順之分大明, 孰不顧名思義? 嗟人心之久溺, 忍言當日之鴟張? 炳天彝於將湮, 庶作百世之龜鑑。 玆當獻御, 徒切兢惶。 所纂《明義錄》三篇, 謹隨箋以聞。
命分藏于章閣及五處史庫。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5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 출판-서책(書冊)
- [註 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