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3권, 정조 1년 3월 10일 병자 1번째기사
1777년 청 건륭(乾隆) 42년
칙사를 전송하다
모화관(慕華館)의 막차(幕次)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고 나서 칙사(勅使)를 전송한 뒤 창덕궁(昌德宮)으로 환가(還駕)하였다. 금년에는 칙사의 사행이 부음(訃音)을 전하기 위하여 왔기 때문에 나례(儺禮)068) 를 설행하지 않았고 포진(鋪陳)과 금욕(禽褥)도 모두 흰색을 썼다. 연로(沿路)에는 화색(華色)을 썼고 다례 때에는 소선(素膳)을 썼으며 아침저녁 식사 때에는 육선(肉膳)을 썼고, 각종 연향(宴響)은 아울러 감하였다. 관반(館伴)은 이휘지(李徽之)이고, 연칙 도감 제조(延勅都監提調)는 홍낙순(洪樂純)이었으며, 원접사(遠接使)는 홍낙성(洪樂性)이고, 반송사(伴送使)는 이휘지(李徽之)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55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외교-야(野)
- [註 068]나례(儺禮) : 원래 중국의 주(周)나라 때부터 유래된 풍습으로,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대궐 안에서나 민가에서 마귀와 잡신(雜神)을 쫓아낸다는 뜻으로 베풀던 의식. 《고려사》에 의하면, 정종(靖種) 6년(1040)에 악귀를 쫓는 외에 차차 칙사(勅使)의 영접, 임금의 거둥, 감사(監司)의 영접 등에 광대의 노래나 춤을 곁들여 오락으로 전용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