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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3월 27일 무술 3번째기사 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정이환이 상소하여 홍봉한의 죄상을 조목조목 논하자 비답을 내리다

동부승지 정이환(鄭履煥)이 상소하여 홍봉한(洪鳳漢)의 죄상을 논하였는데, 상소에 이르기를,

"지난번 헌장(憲長)051) 이 차자를 올려 정후겸의 죄상을 극력 논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바로 지금 그만둘 수 없는 정론(正論)입니다마는, 죄가 이 보다도 크고 악이 이보다도 극도하여 전하께서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이면서 온 나라가 반드시 주토(誅討)해야 할 역적이 있습니다. 오직 홍봉한(洪鳳漢)은 천만 가지 죄악을 다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크고 가장 극악한 것을 말한다면 곧 임오년052) 에 범한 죄인데, 전 참판 김귀주(金龜柱)의 상소에서 말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 임오년에 선대왕께서 내리신 처분은 곧 성인께서 변(變)에 처하여 권도(權道)에 통달된 것이니,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는 오직 마땅히 애통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공손하게 임금이 하시는 대로 따라야 할 뿐이었습니다. 이른바 ‘일물(一物)’053) 에 이르러서는 이는 곧 이전의 사첩에서도 들어 보지 못하던 것인데, 홍봉한이 창졸간에 멋대로 올렸었습니다. 그러하지 않았다면 선대왕께서 어떻게 그 ‘일물’이 어느 곳에 있었던 것인지를 아셨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한가로이 홀로 계실 적에 생각이 이에 미치신다면 필연코 망극한 애통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게 되실 것입니다. 이는 충신과 의사(義士)들이 팔을 걷어붙히며 이를 갈게 되는 일입니다. 병술년054) 의 인삼의 일도 홍봉한이 제거(提擧)를 조절하고 의관들을 위협하고 공갈하여, 나삼(羅蔘)만 순전히 쓰지 못하도록 한 것인데, 그의 마음 속을 따져 본다면 길 가는 사람들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광좌(李光佐)가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지 아니한 것도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역절이 되었는데, 하물며 약 드시는 것을 방해하였던 것이 얼마나 극악한 죄이겠습니까?

대저 그 ‘여시 여시(如是如是)’의 한 대목은 바로 무장(無將)055) 하고 부도한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저이(儲貳)의 자리에 계시며 인효(仁孝)하다는 소문이 현저했었는데, 저 홍봉한이 가까운 친척으로서 지척(咫尺)의 면전에서 방자하게 흉악한 말을 발하였습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지키시는 바는 의리의 올바른 것이었고, 홍봉한이 말하는 바는 괴귀(怪鬼)한 것이었는데, 그가 감히 자신의 계책이 쓰이지 못함을 분하게 여기며 원망하여 그런 더없이 패악한 난언(亂言)을 했었으니, 이는 그가 평소에 무군(無君)의 마음을 가슴 속에 두고 있다가 외부에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홍인한(洪麟漢)이 대저 청정을 방해하였던 것도 또한 형제간이 함께 죄악을 저질러 간 것인데, 지금 그대로 버젓이 도성(都城)에 살고 있으면서 사당(死黨)을 배치해 놓았으므로, 백성들의 마음이 의구하게 되고 세도(世道)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깊은 구중 궁궐에 계시는 전하께서 어떻게 이처럼 경황없는 실상을 모두 통촉하실 수 있겠습니까?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하나의 평범한 임금이었습니다만, 박소(薄昭)의 죄가 흉악한 반역에 이르지는 않았는데도 오히려 능히 은혜를 끊고서 의리로 결단을 했었습니다.056) 홍봉한은 곧 임오년의 역적이고 전하의 역적입니다. 어찌 척속(戚屬)의 정의(情誼)에 얽매어 삼척(三尺)의 형률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시급히 홍봉한의 죄를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위 대목의 일은 어찌 오늘날에 임금과 신하 상하가 차마 제기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신묘년057) 2월 초7일에 선대왕께서 우시며 나에게 말하기를, ‘앞날에 조정의 신하 가운데 〈일물(一物)이라는〉 두 글자를 들어 너에게 진달하는 사람은 단지 나에게만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또한 너의 순정(純正)한 신하도 아닐 것이다. 내가 한유(韓鍮)심의지(沈儀之)를 조처하게 된 것도 곧 두 글자의 일 때문이었고 홍봉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주방(廚房)의 물건이 홍봉한을 대명(待命)하지 말도록 하기 전에 먼저 이르게 되어, 바깥의 알지 못하는 자들이 홍봉한이 나를 도운 것으로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라고 하셨고, 손을 잡으시며 간곡하게 말씀을 하여 나에게 알고 있도록 명하셨기에, 내가 그때 눈물을 흘렸으며 책 속에 지금까지 간직해 두고 있다. 지금 네가 한 그런 말은 이미 사실을 상세히 알지 못한 것이기에,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분개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는 있다마는, 더없이 중요한 관계가 있는 일이기에 곡진(曲盡)하게 기휘(忌諱)해야 하는 말인데, 네가 어찌하여 충분하게 상량(商量)해 보지 않고서 발설하여, 나로 하여금 이러한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차마 말하게 하는 것이냐? 어제 너의 소장(疏章)을 보고 밤이 다 가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며 그 전의 비애와 새로운 애통이 그대로 마음속에 간절해졌었다. 마땅히 죄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마는, 네가 소원(疏遠)한 처지의 몸으로 단지 길가에 전파되는 말에 의한 것이기에 내가 깊이 책망하지 않는 것이다.

인삼의 일에 있어서는 바야흐로 지금 ‘여시 여시(如是如是)’란 말을 사실(査實)하도록 했다. 내가 춘궁(春宮)058) 에 있을 때에 봉조하(奉朝賀)를 사사로이 만나보았었는데, 봉조하가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 앞날에 혹시라도 수은묘(垂恩墓)를 추숭하지 않는다면, 무신년059) 의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대(推戴)하는 일을 하게 되는 수가 있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의당 이렇게 될 듯한데 이렇게 될 때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그 뒤에 내가 대비전에 입시했을 적에 말이 추숭하는 의리에 미치게 되어 과연 그런 말을 들어 앙달했었다. 대저 그의 마음을 따져 본다면 비록 후환을 염려하여 하게 된 것이지마는, 그 말을 논해 보면 진실로 망발이 되는 것이니, 들은 사람은 마땅히 죄를 성토해야 하고, 말을 한 사람은 또한 마땅히 자신이 해명해야 하기는 한다.

아! 내가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람으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바는 곧 자전(慈殿)과 곧 자궁(慈宮) 때문이다. 비록 봉조하의 죄가 용서할 수 없는 것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봉조하는 곧 자궁의 어버이이고 나는 곧 자궁의 아들이다. 이러한데도 용이하게 법대로 단죄해버린다면, 이 이외의 팔의(八議)060) 의 친속에 있어서 어찌 다시 논할 것이 있겠느냐? 인용한 바 박소에 있어서는 김귀주(金龜柱)의 처지에다 비교한다면 가하겠지만 봉조하의 처지에다 비교하는 것은 불가하다. 너는 잘 생각해 보라."

하고, 이어 정이환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비답의 나머지 뜻을 들어 깨우쳤으나, 정이환은 누누이 쟁집하다가 물러갔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6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재정-전매(專賣) / 농업-권농(勸農) / 의약-약학(藥學)

  • [註 051]
    헌장(憲長) : 사헌부 대사헌.
  • [註 052]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 [註 053]
    ‘일물(一物)’ : 영조 38년(1762) 사도 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었을 때의 그 뒤주를 말하는데, 홍봉한이 이를 영조에게 바쳤다고 함.
  • [註 054]
    병술년 : 1766 영조 42년.
  • [註 055]
    무장(無將) :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서는, 임금에 대해 신하가 장차 난(亂)을 일으켜 시역(弑逆)하겠다는 불충한 마음조차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임. 《춘추》공양전(公羊傳) 장공(莊公) 32년조에 이르기를, "군친(君親)에게는 장(將)이 없어야 하고, 장이 있으면 반드시 벤다.[君親無將 將而必誅]"라고 하였음.
  • [註 056]
    능히 은혜를 끊고서 의리로 결단을 했었습니다. : 박소(薄昭)는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외삼촌으로, 너무 빙자하게 굴다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자결하게 하였으나 자결하지 않으므로, 문제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가서 조문하며 통곡하자 할 수 없이 자결하였음.
  • [註 057]
    신묘년 : 1771 영조 47년.
  • [註 058]
    춘궁(春宮) : 동궁.
  • [註 059]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060]
    팔의(八議) : 죄를 감면받을 대상이 되는 여덟 부류의 사람들. 곧 의친(議親:임금의 동성인 8·9촌이내, 임금의 할머니·어머니의 시마(緦麻)이내, 왕비의 소공(小功)이내, 세자빈의 대공(大功)이내의 친족)·의고(議故:왕실과 예전부터 친분이 두터워 여러 해 동안 특별히 은덕을 받아온 사람)·의공(議功:나라에 큰 공이 있어 훈적(勳籍)에 오른 사람)·의현(議賢:큰 덕행이 있어 그 언행이 일국의 모범이 되는 사람)·의능(議能:큰 재능이 있어 군려(軍旅)·정사를 잘 닦아서 임금을 보좌하고 인륜의 규범이 되는 사람)·의근(議勤:관리로서 부지런히 봉공(奉公)하고 사신으로서 어려움을 겪어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의귀(議貴:관작이 1품이거나 직사(職事)가 3품 이상이거나 산관(散官) 2품 이상인 사람)·의빈(議賓:전조(前朝)의 자손으로서 선조의 제사를 받들므로 국빈(國賓)으로 예우받는 사람).

○同副承旨鄭履煥上疏論洪鳳漢之罪, 疏曰:

昨者憲長之箚, 極論厚謙之罪, 此誠目下不可已之正論, 而有罪大於此, 惡極於此, 殿下所必報之讎, 一國所必誅之逆。 惟彼鳳漢千罪萬惡, 無不俱備。 言其最大最極者, 卽壬午所犯, 前參判金龜柱疏中事是耳。 嗚呼! 壬午先大王處分, 卽聖人處變而達權者, 則爲臣子者, 惟當哀痛血泣, 恭聽上之所爲而已。 至於所謂一物, 是前史之所未聞, 而鳳漢於倉卒之際, 肆然獻之。 不然則先大王何以知一物之在於何處乎? 我殿下燕閒獨處, 念及於此, 罔極之痛, 必不能自已。 此忠臣義士之扼腕而切齒者也。 丙戌人蔘事, 鳳漢之操切提擧, 威喝醫官, 使不得純用羅蔘者, 究厥心腸, 路人所知。 光佐之不設議藥廳, 猶爲難赦之逆節, 況沮戲御藥, 何等極罪? 若夫如是如是一段, 直是無將不道。 我殿下位居儲貳, 仁孝著聞, 彼鳳漢以肺腑之親, 咫尺面前, 肆發匈言。 況殿下所守者, 義理之正也, 鳳漢所言者怪鬼之說也, 渠敢忿懟於其計之不售, 出此絶悖之亂言, 此其平日無君之心, 存諸中而發於外也。 麟漢之沮戲代聽, 亦兄弟之共濟其惡也, 今乃偃處城闉, 布列死黨, 衆心危懼, 世道潰裂。 殿下深居九重, 何以盡燭此遑遑之狀乎? 一中主耳, 薄昭之罪, 不至匈逆, 而猶能割恩斷義。 鳳漢乃壬午之逆, 先大王之逆, 殿下之逆, 則豈可拘於戚屬之誼, 而不施三尺之律乎? 乞命有司, 亟正鳳漢之罪。

批曰: "上款事, 此豈今日君臣上下所可忍提者? 辛卯二月初七日, 先大王泣謂予曰: ‘他日廷臣, 以此二字陳于汝, 非但不忠於予, 亦非汝之純臣也。 予所以處韓鍮沈儀之者, 卽二字事也, 非爲洪鳳漢也。 廚房之物, 先到於鳳漢勿待命之前, 而外聞不知者, 以爲鳳漢贊予, 事實則不然。’ 握手諄諄, 命予識之, 予時涕泣, 書間藏在至今。 今爾此言, 旣未詳事實, 則謂之忠憤可也, 事係莫重, 語涉曲諱, 則爾何不十分商量而發, 使予忍說此不忍說之言耶? 昨見爾章, 終夜不寐, 舊哀新慟, 交切于中。 言旣不審, 罪當難逭, 爾以踈逖之蹤, 只憑道路之傳, 予不深責焉。 人蔘事, 方令査實如是如是之說。 予在春宮時, 私覿奉朝賀, 奉朝賀曰: ‘邸下他日, 若不追崇垂恩墓, 則安知無戊申之徒, 藉此而有推戴之擧? 似當如是矣, 如是之時何以處之。’ 云。 伊後予侍大妃殿, 語及追崇義理, 果以此言仰達矣。 大抵原其心, 雖出於慮患, 論其言實歸於妄發, 聞之者聲罪宜也, 言之者自明亦宜也。 嗚呼! 予以孤露餘生, 所以爲命者, 卽慈殿慈宮。 縱使奉朝賀罪關罔赦, 奉朝賀卽慈宮之親也, 予卽慈宮之子也。 此而容易斷法, 則其餘八議之親, 更何論哉? 所引薄昭比於金龜柱地處則可也, 比於奉朝賀地處則未可也。 爾其思之。" 仍命履煥入侍, 諭批旨餘意, 履煥縷縷爭執而退。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6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재정-전매(專賣) / 농업-권농(勸農) / 의약-약학(藥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