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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3월 10일 신사 1번째기사 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경희궁의 숭정문에서 즉위하다

영종 대왕 52년(1776) 【청나라 건륭 41년이다.】 3월 병자일(丙子日)에 영종이 훙(薨)하고, 6일 만인 신사일(辛巳日)에 왕이 경희궁(慶熙宮)숭정문(崇政門)에 즉위하였다. 왕은 영종 28년(1752) 【임신년이다.】 9월 기묘일(己卯日) 【22일 축시(丑時)이다.】 창경궁(昌慶宮)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하였다. 처음 장헌 세자가 신룡(神龍)이 구슬을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꿈을 깬 다음에 손수 꿈속에서 본 대로 그림을 그리어 궁중벽에 걸어 놓았었다. 탄생하면서 영특한 음성이 큰 종이 울리듯 하므로 궁중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데, 영종이 친림하여 보고서 매우 기뻐하며 혜빈(惠嬪)에게 하교하기를, ‘이 애는 너무도 나를 닮았다. 이런 애를 얻었으니 종사가 근심이 없게 되지 않겠느냐?’ 하고, 그날로 원손(元孫)으로 호를 정하였다. 30년(1754) 【갑술년이다.】 가을에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했고 35년(1759) 【기묘년이다.】 2월 계해일(癸亥日)에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립(冊立)되었다가 윤6월 경자일(庚子日)에 명정전(明政殿)에서 책(冊)을 받게 되었고, 37년(1761) 【신사년이다.】 3월 기유일(己酉日)에 입학하였고 8일 만인 정사일(丁巳日)에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하고 38년(1762) 【임오년이다.】 2월 병인일(丙寅日)에 어의궁(於義宮) 【효종(孝宗)의 잠저(潛邸)인 곳이다.】 에서 가례(嘉禮)를 거행하니, 빈(嬪)은 김씨(金氏)이다. 【본적은 청풍(淸風)이고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다.】 윤5월에 장헌 세자가 훙하였고, 7월에 명(明)나라의 고사에 의하여 세손궁(世孫宮)을 동궁(東宮)으로 칭하며 다시 춘방(春坊)001)계방(桂坊)002) 을 설치했고, 40년(1764) 【갑신년이다.】 2월 임인일(壬寅日)에 왕을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종통(宗統)을 이어받도록 하고, 51년(1775) 【을미년이다.】 12월 경술일(庚戌日)에 서정(庶政)을 대청(代聽)하며 경현당(景賢堂)에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이에 이르러 영종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왕이 정도에 지나치게 슬퍼하며 물이나 미음도 들지 않았고, 상사(喪事) 이외의 일은 명계(命戒)하는 바가 없었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왕위를 이어받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울며 허락하지 않았고, 여러 날을 정청(庭請)하는 동안 계사(啓辭)가 올라오면 그만 울기만 하다가, 성복(成服)하는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억지로 따르며 하교하기를, ‘뭇 신하들의 심정에 몰리어 장차 왕위에 서기는 하겠지만, 면복(冕服)차림으로 예식을 거행하기는 내 마음 속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 예(禮)는 《서경(書經)》강왕지고(康王之誥)에 보이는데, 소식(蘇軾)의 주설(註說)에 ‘상복(喪服) 차림 그대로 관례(冠禮)를 거행해야 한다.’라고 한 대문을 인용하여 예법이 아닌 일이라고 비난해 놓은 것을 채침(蔡沈)《서집전(書集傳)》에 수록해 놓았었다. 양암(亮闇)에 관한 법을 비록 거행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복(衰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옛적의 예법과 국조(國朝)의 법제를 들어 극력 청하자,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오시(午時)에 대신들이 어보(御寶) 받기를 청하니 왕이 굳이 사양하다가 되지 않자, 면복(冕服)을 갖추고 부축을 받으며 빈전(殯殿)의 문밖 욕위(褥位)로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거행하였고,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은 유교(遺敎)를 받들고 좌의정 신회(申晦)는 대보(大寶)를 받들어 올리니, 왕이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받고서 다시 사배례를 거행하였고, 자정문(資政門)으로 나와 승여(乘輿)를 타고 숭정문(崇政門)에 이르러 승여에서 내리었다. 종친(宗親)들과 문무 백관이 동서로 나뉘어 차례대로 서서 의식대로 시위하니, 왕이 울먹이며 차마 어좌(御座)에 오르지 못하였다. 대신 이하가 또한 극력 청하자 왕이 울부짖기를, ‘이 어좌는 곧 선왕께서 앉으시던 어좌이다. 어찌 오늘 내가 이 어좌를 마주 대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였다. 대신들이 해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들어 누누이 우러러 청하자, 왕이 드디어 어좌에 올랐는데 백관들이 예를 행하니, 면복을 벗고 도로 상복을 입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6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註 001]
    춘방(春坊) : 세자 시강원.
  • [註 002]
    계방(桂坊) : 세자 익위사.

○辛巳/丙子, 英宗薨, 越六日辛巳, 王卽位于慶熙宮崇政門。 王以英宗二十八年 【壬申。】 秋九月己卯 【二十二日丑時。】 誕降于昌慶宮景春殿。 初莊獻世子夢神龍抱珠入寢室, 旣覺手畫夢中所覩, 揭之宮壁。 及誕降, 英音發如洪鐘, 宮中皆驚, 英宗臨見喜甚, 敎惠嬪曰: "是酷類予。 得此兒, 宗社其無憂乎?" 卽日定號爲元孫。 三十年 【甲戌。】 設輔養廳, 三十五年 【己卯。】 春二月癸亥, 冊王世孫, 夏閏六月庚子, 受冊于明政殿, 三十七年 【辛巳。】 春三月己酉入學, 越八日丁巳冠于景賢堂, 三十八年 【壬午。】 春二月丙寅行嘉禮于於義宮, 【孝廟潛邸】金氏 【籍淸風 淸原府院君 時默女。】 夏閏五月, 莊獻世子薨, 秋七月, 依皇明故事, 世孫宮稱東宮, 復設春桂坊, 四十年 【甲申。】 春二月壬寅, 命以王爲孝章世子嗣承宗統, 五十一年 【乙未。】 冬十二月庚戌, 代聽庶政, 受朝賀于景賢堂。 至是英宗禮陟, 王哀毁踰度, 不進水漿, 喪事外無命戒。 大臣諸臣請嗣位, 王哭不許, 庭請屢日, 啓至則輒哭, 及成服日始勉從, 敎曰: "迫於群情忍將踐位, 而冕服行禮, 於予心益覺怵然。 此禮見於《康王之誥》, 蘇軾註說引‘因喪而冠’之文, 譏其非禮, 蔡氏載之集傳。 亮闇之制, 雖不得行, 釋衰從吉其可乎?" 諸臣以古禮與國制力請, 王乃許之。 午時, 大臣等請受寶, 王固辭不獲, 具冕服扶詣殯殿門外褥位, 行四拜禮, 領議政金尙喆奉遺敎, 左議政申晦奉大寶以進, 王涕泣强受, 復行四拜禮, 出資政門乘輿, 詣崇政門降輿。 宗親文武百官, 分東西序立, 侍衛如儀, 王嗚咽不忍陞座。 大臣以下又力請, 王號哭曰: "此座卽先王所御之座也。 豈意今日予當此座乎?" 大臣以日已晩, 縷縷仰請, 王遂陞御座, 百官行禮, 釋冕反喪服。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6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