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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27권, 영조 52년 2월 4일 병오 2번째기사 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왕세손이 청정의 명을 거두어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왕세손이 수은묘(垂恩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재실(齋室)에 나가 여러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하고 하령하기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경들을 소견하였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목메어 스스로 견디지 못하다가 하령하기를,

"그때의 처분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랴마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많이 실려 있어서 세상에 전파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데, 이제 내가 구차하게 살아서 지금에 이른 것도 이미 사람의 도리로 견딜 것이 아니거니와, 완고하게 아는 것이 없는 체한 것은 다만 대조(大朝)께서 위에 계시고 또 그때의 처분에는 감히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 그지없는 아픔을 생각하면 어찌 일찍이 먹고 숨쉬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늦추어진 적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또 대조의 명을 받아 외람되게 송사(訟事)를 듣고 판단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모년(某年)의 일기(日記)를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을 버려두고 태연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의 도리이겠는가? 지금의 의리로는 모년의 일에 대하여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다시는 눈을 더럽히고 이[齒]에 걸지 말아야 옳을 것이다. 사초(史草)로 말하면 명산(名山)에 감추어 만세(萬世)에 전하는 것이므로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마는, 일기는 이것과 달라서 그것이 있든 없든 관계되는 것이 없다. 이제 이것을 내가 청정(聽政)한 뒤에도 둔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백료(百僚)를 대하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으나 억제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다."

하고는 눈물이 비오듯하니, 좌우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세손이 환궁(還宮)한 뒤에 흑포립(黑布笠)·백포(白袍)·흑대(黑帶) 차림으로 존현각(尊賢閣) 앞뜰에서 한데에 앉아 대신들을 소견하여 소매 안에서 소초(疏草)를 내어 도승지(都承旨)를 시켜 읽게 하고, 하령하기를,

"일이 성취되고 안 되는 것은 오직 대조의 지극히 인자한 은혜를 믿을 뿐이거니와, 내 도리로서는 또한 힘써 성의를 쌓아 천심(天心)에 사무치기를 바라야 할 따름이니,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계교(計較)하겠는가?"

하였다. 곧 일산(日傘)을 치우게 하고 뜰 가운데에 몸을 드러내고 엎드려 궁관(宮官)을 시켜 소(疏)를 도승지에게 주고 이어서 중관(中官)을 청해서 주게 하였다. 상소에 이르기를,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에게 곧 하늘이십니다. 정수리에서 발끝에 이르는 모발까지 모두가 내려 주신 것이고 덮어 길러 키우신 것도 모두 은덕이며, 신이 25년 동안 산 것도 다 전하께서 관용하신 가운데에서 얻은 것입니다. 신은 큰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받들어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기고서 오직 문침(問寢)하고 시선(視膳)047) 하는 것으로 구구히 보답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우리 전하께서 신이 불초하여 능히 부담할 수 없는 줄 모르고 하루에 만기(萬機)를 살펴야 하는 번다한 것을 모두 맡기셨습니다. 그 일은 지극히 엄하고 지극히 중하며 그 책임은 지극히 어렵고 지극히 큽니다. 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면 어찌 조금이라도 무릅써 감당할 희망이 있겠습니까? 피눈물을 흘리며 사양하기를 두번 세번 하여도 윤허받지 못하고는 분의(分義)에 몰려 애써 따른 지 이제 두어 달이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삼가고 두려워하여 마치 나무 위에 머물러 있는 듯하였는데, 근일 성상께서 종통(宗統)이 중대하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길이 근본이 되는 계책을 세우시어 드디어 상책(上冊)한 끝에 특별히 사호(賜號)하는 예(禮)를 거행하였으니, 신은 영화롭고 감격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죽도록 힘쓴들 어찌 그 만분의 일이라도 우러러 갚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에게는 아 주 박절한 사정(私情)이 있습니다. 이제 일의 기회가 생김에 따라 불안한 마음이 더욱 격렬하여 스스로 누르지 못하니, 말하려 하여도 소리가 먼저 삼켜지고 글을 쓰려 하여도 눈물이 먼저 쏟아집니다. 아! 이것은 전하께서 차마 듣지 못하실 일이고 소자가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마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애(仁愛)하고 복육(覆育)하시는 천은(天恩)을 스스로 거절하는 것이고 신의 사정은 영구히 드러낼 날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크게 소리내어 외치고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마음을 아뢰니, 전하께서는 가엾이 여겨 굽어살피시기 바랍니다.

아! 임오년048) 의 처분은 우리 성상께서 종사(宗社)를 위하여 마지못하신 일입니다. 대성(大聖)의 마음으로 달권(達權)의 도리를 행하셨으니, 온 동토(東土)의 신민이 누구인들 감히 그 사이에서 이의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죽을 뻔한 목숨을 보전하여 오늘에 이를 수 있는 것은 모두 전하의 큰 은혜입니다. 높은 하늘과 두터운 땅과 큰 산과 깊은 바다도 이 감격을 견줄 만하지 못하니, 신이 보답하고 힘을 다하는 도리로서는 오직 사시(四時)처럼 미덥고 금석(金石)처럼 굳게 지켜서 만세에 이르러도 폐단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괴귀(怪鬼) 같은 방자한 무리가 감히 바라는 마음을 일으켜 방자히 추숭(追崇)하려는 논의를 내더라도 신이 그 부추김을 받아 함부로 의리를 바꾸려 한다면 이는 참으로 전하의 죄인이 되는 것이고, 전하의 죄인이 될 뿐더러 종사(宗社)의 죄인이 되고 만고(萬古)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하늘의 상제(上帝)가 위에서 굽어보고 종묘(宗廟)의 신령(神靈)이 옆에서 질증(質證)하는데, 신이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후원일기(喉院日記)049) 로 말하면 그때의 사실이 죄다 실려 있으므로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못 본 사람이 없으며 본 자는 전하고 들은 자는 의논하여 세상에 퍼지고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니, 신의 사심(私心)이 애통하여 거의 곤궁한 사람이 돌아갈 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신이 어리석더라도 이 한 가지 없어지지 않는 마음이 있는데, 지금은 이극(貳極)050) 에 높이 있어 엄연히 백료(百僚)를 대하니, 어찌 마음에 아픈 것이 없겠으며 어찌 이마에 땀이 나지 않겠습니까? 신이 애통하게 여기는 것이 전하의 처분에 대하여 방해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전하의 처분은 처분이고 애통한 것은 애통한 것이기 때문이니, 참으로 이른바 병행하여도 어그러지지 않고 양존(兩存)하여도 손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일기가 없으면 처분에 대하여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국조(國朝)의 전고(典故)는 모두 간첩(簡牒)에 실려 있는데, 금궤(金匱)·석실(石室)에 넣어 명산(名山)에 감추어서 천추 만대(千秋萬代)가 지나도 옮길 수 없으니, 또한 일기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아! 일기를 그대로 두고 안 두는 것은 전하께서 어떻게 처분하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마는, 신이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저위(儲位)를 손피(遜避)하고 종신토록 숨어 살며 다만 하루에 세 번 삼가 문안드리는 직분을 닦는 일뿐입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저절로 창자가 꺾이고 마음이 터지며 하늘에 호소하여도 방법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슬피 여기고 가엾이 여기며 헤아리고 살피시어 빨리 신에게 청정(聽政)하라 하신 명을 거두고 이어서 신의 저이(儲貳)의 지위를 제거하여 끝내 인자하게 덮어 길러 주시는 은혜를 온전하도록 하소서. 이것이 못내 큰 소원이며 못 견디게 바라고 간절히 비는 것입니다. 삼가 상소하여 아룁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다 일렀는데 다시 무엇을 이르겠는가? 이 상소는 아까 하교한 것과 함께 사고(史庫)에 간직해 두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28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의생활(衣生活) / 역사-편사(編史)

  • [註 047]
    시선(視膳) : 왕세자(王世子)가 아침 저녁으로 임금이 드실 수라상을 몸소 돌보던 일.
  • [註 048]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 [註 049]
    후원일기(喉院日記)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註 050]
    이극(貳極) : 왕세자.

○王世孫詣垂恩廟, 展拜後, 御齋室, 召見諸大臣。 令曰: "余有欲諭而召見卿等矣。" 仍涕淚汍瀾, 嗚咽不自勝而令曰: "其時處分, 余何敢言? 而《政院日記》多載不忍聞不忍見之語, 傳播一世, 塗人耳目, 今余苟活至今者, 已非人理之所堪, 而頑若無知者, 特以大朝在上, 且伊時處分, 有不敢議到而然也。 顧余罔極之痛, 何嘗食息間少弛? 而今又承大朝之命, 猥當聽斷之任, 某年日記, 豈忍見之乎? 若置此而怡然視之, 此豈人子之道乎? 方今義理, 至於某年事, 君臣上下, 勿復塗於眼目掛於齒牙可也。 至若史草, 則藏之名山, 傳之萬世, 體段重大, 非所可論, 而日記與此異焉, 其有無無所關係矣。 今若存此, 余於聽政之後, 將何顔對百僚乎? 余欲諭者多, 而掩抑不忍言矣。" 因泣下如雨, 左右諸臣無不感激流涕。 王世孫還宮後, 以黑布笠白袍黑帶, 露坐尊賢閣前庭, 召見諸大臣, 於袖中出疏草, 令都承旨讀之, 令曰: "事之成否, 惟恃大朝止慈之恩, 余之道理, 亦當務積誠意, 冀格天心而已, 何敢計較於其間乎?" 仍令去日傘, 露伏庭中, 令宮官授疏於都承旨, 仍請中官授。 上疏曰:

伏以殿下之於臣, 卽一天也。 頂踵毛髮, 莫非賜也, 覆育生成, 莫非德也, 臣之生年二十五歲, 得於造化涵宥之中者也。 臣感戴鴻私, 銘心鏤骨, 惟以問寢視膳, 爲區區報答之計矣, 不料我殿下, 不知臣不肖不克負荷, 乃以一日萬幾之繁, 擧以畀之。 其事則至嚴至重, 其責則至艱至大。 顧臣愚魯豈有一分冒當之望。 而瀝血控辭, 至再至三而不能得, 則分義所迫, 黽勉承膺, 已數月于玆矣。 夙夜祗懼, 如集于木, 廼者聖上深軫宗統之重, 永爲根本之圖, 遂於上冊之餘, 特擧賜號之禮, 臣且榮且感, 罔知攸措。 雖隕結糜粉, 何足以仰酬其萬一哉? 抑臣有私情之萬萬痛迫者。 今因事會之發, 而危衷益激, 不能自抑, 欲言而聲先呑, 欲書而涕先注。 嗚呼! 此殿下之所不忍聞, 小子之所不忍言, 而遂終泯默, 則是自阻於仁覆之天, 而臣之情事, 永無可暴之日也。 玆敢大聲疾呼, 泣血陳懇, 惟殿下哀憐而垂察焉。 噫! 壬午處分, 卽我聖上爲宗社不獲已之擧也。 以大聖之心, 行達權之道, 環東土大小臣民, 孰敢有異議於其間? 況臣之保全殘喘, 得至今日者, 罔非殿下之洪恩。 高天厚地, 泰山深海, 未足以喩此感激, 則在臣報效之道, 惟當信之如四時, 守之如金石, 至於傳萬世而無弊也。 假使怪鬼不逞之徒, 敢生希覬之心, 肆發追崇之論, 而臣乃爲其慫慂, 妄欲移易義理, 則是實爲殿下之罪人, 非特爲殿下之罪人, 亦將爲宗主之罪人, 萬古之罪人。 皇天上帝臨之在上, 宗廟神靈質之在傍, 臣焉敢誣也, 臣焉敢誣也? 至於喉院日記, 盡載其時事實, 無人不知, 無人不見, 見者傳之, 聞者議之, 流布一世, 塗人耳目。 臣之私心哀痛, 殆若窮人之無所歸。 臣雖愚頑, 亦有此一段不泯之心, 而今乃高臨貳極, 儼對百僚, 豈不有痛于心, 豈不有泚乎顙乎? 若以爲臣哀痛, 或有礙於殿下之處分云爾, 則此有不然者。 蓋殿下之處分自處分, 哀痛自哀痛, 眞所謂幷行而不悖, 兩存而無傷者也。 若又以爲無日記, 則無以徵信處分云爾, 則此亦有不然者。 夫國朝典故, 俱在簡牒, 金匱石室, 藏之名山, 千秋萬代, 移動不得, 又安用日記爲也? 嗚呼! 日記之存不存, 在殿下處分之如何, 而臣之所以自處者, 惟有遜避儲位, 沒身屛處, 只以一日三時恭修起居之職而已。 言至於此, 不覺腸摧而心裂, 籲天而無從也。 伏乞殿下悲之矜之, 諒之察之, 亟收臣聽政之命, 仍去臣儲貳之位, 以全終始慈覆之恩。 不勝大願, 臣無任顒望祈懇之至。 謹拜疏以聞。

答曰: "悉諭更何諭? 此陳章, 與俄敎同藏史庫。"


  •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28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의생활(衣生活)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