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대신들을 불러 보아, 하교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임금이 여러 대신(大臣)들을 불러 보았다. 김상복(金相福)이 나와 엎드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오늘 내리신 하교는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이 어찌 신자가 되어 감히 들을 수 있는 일입니까? 신 등은 전하를 우러러 보기를 마치 연소(年少)하신 군상(君上)같이 여겼습니다. 놀라고 당황함을 견디지 못하여 들어 왔습니다."
하고,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신은 삼가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삼가 듣고 놀라 당황함을 견디지 못하여 서로 이끌고 구대(求對)하고자 합니다. 용인(用人)이나 용병(用兵) 등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 나라의 대사(大事)이므로 비록 대리(代理)할 때일지라도 이 몇 가지 일은 자연 성상께서 친히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이미 대리 청정하는 등의 일과는 다르고 궐내(闕內)에서 수고로움을 대신한 것은 전례(前例)가 이미 많았는데, 경 등은 어찌 이와 같이 너무도 지나치게 생각하는가? 이는 바로 3백 년 내려온 고례(古例)이고 나도 또한 일찍이 하였던 일이다."
하였다.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아침에 하교가 나온 뒤 밖에서 듣고 놀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신 등이 서로 이끌고 입시하였는데, 지금 전례에 대한 하교를 받듦에 〈내용이〉 그렇다면, 비록 밖에서 들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고는 하나 어찌 감히 갑자기 받들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양택(金陽澤)과 이사관(李思觀)이 뒤따라 나와서 엎드려 아뢰기를,
"신 등은 삼가 오늘의 하교를 듣고 창황(倉黃)한 마음으로 들어왔습니다."
하고, 한익모(韓翼謨)가 뒤따라 나와 엎드려 아뢰기를,
"신은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도 역시 마음이 들떠서 왔는가?"
하니, 한익모가 말하기를,
"이 하교를 듣고 진실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신도 또한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순감군(巡監軍)을 동궁이 점하(點下)하는 것은 곧 3백 년 된 고사(故事)이다. 옛날 내가 눈병이 났을 때 숭릉(崇陵)237) 의 고사를 따라 중관(中官)이 부표(付標)를 하였는데, 지금 이 전례를 사용하는 것은 대리 청정과 아주 가깝지 않다. 아무리 임석(臨席)한 앞에서 부표하더라도 하교를 잘못 들으면, 수망(首望)이라고 한 것을 부망(副望)에 잘못 부표하게 된다. 이것은 오히려 이와 같더라도, 중관(中官)이 혹시라도 자기 마음대로 용사(用事)한다면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조용히 생각하여 보고 옛날의 규례로 돌아가 이와 같이 하교한 것이다. 옛날 황형(皇兄)238) 께서 하교하신 그 당시에 이르기를, ‘세제(世弟)가 좋겠는가? 측근의 신하가 좋겠는가?’ 하였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목이 메인다. 고례(故例)가 분명하여 조금 전에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를 〈세손으로 하여금〉 달하(達下)하게 한 것이다. 만일 이것이 청정(聽政)이라면 다투는 것도 가하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하교하려고 함에 이것은 이것과는 아주 다른 것인데, 그것을 어찌 크게 떠벌리고 있는가? 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동요되어 기운이 10층(層)은 떨어졌다. 부자(附子)를 더 들이라는 명도 이 때문이다. 긴요하지 않은 공사를 달하하라는 하교를 특별히 정지하고 이 하교를 전례(前例)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할아비와 손자가 손수 점하(點下)하는 것이 옳겠는가? 엄수(嚴竪)239) 의 손으로 부표하는 것이 옳겠는가? 이는 하늘과 땅, 흑(黑)과 백(白)의 차이이다. 이 어찌 그다지도 급히 서두르는가? 영상(領相)이 명을 들었으면 승선(承宣)이 입시할 때에 따라 들어오는 것이 마땅한데, 그를 불렀으나 간 곳을 알 수 없었으니 이것이 과연 보상(輔相)의 도리인가? 이는 아주 뜻밖의 일이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를 서용(敍用)하지 않는 벌을 빨리 시행하도록 하라.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만일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마땅히 구저(舊邸)에 나가서 심신(心神)을 조금 쉬어야 하겠다. 전후(前後) 상협련군(廂挾輦軍)240) 은 이전 하교에 의하여 거행(擧行)하되, 하교를 기다려 대령하였다가 다만 정시(正時)가 되거든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정망(政望)을 서둘러 들이게 하고 해방(該房) 승지 이득신(李得臣)은 그 정망을 읽어 아뢰라."
하고, 임금이 부표(付標)하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궐내(闕內)에서 수고를 대신하는 것은 고례(古例)에 분명히 있다. 경 등이 어찌 이와 같이 크게 떠벌리는가?"
하였다.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신 등은 전연 몰랐습니다. 지금 하교를 받고 또 분명히 전례가 있음을 삼가 들었으니, 신 등이 어찌 감히 다시 진달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우매(愚昧)하여 전례가 있는지 없는지를 몰랐습니다."
하고,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지금에야 전례가 이와 같은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하고,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고례가 이와 같은 것을 신 등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지금 하교를 받으니 다시는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다만 순감군(巡監軍)을 낙점(落點)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릇 공사(公事)의 수응(酬應)과 정망의 하점(下點)도 모두 궐내(闕內)에서 대신하게 하려고 한다."
하니, 홍인한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와 같고 이미 궐내에서 하도록 하교하셨으니, 이는 신 등이 알만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거둥하겠다고 하교한 뒤에 군병이 반드시 대령하고 있을 터이니, 삼가 하념(下念)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조금전에 서둘던 일을 지금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타협하였으니, 거둥을 그만두게 한다."
하였다. 홍인한이 말하기를,
"거둥을 그만두게 한다는 허락을 받고 신 등은 기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천세를 부르고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당시에 청대(請對)하고 입시한 여러 대신(大臣)들이 상세하게 정지하기를 힘껏 청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다만 순감군을 낙점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릇 모든 공사의 수응과 정망(政望)의 낙점도 마땅히 수고를 대신하게 하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은 다만 순감군만 궐내에서 점하(點下)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홍인한은 언찰(諺札)로 인하여 임금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왕세손이 홍인한에게 이르기를,
"대리 청정은 오히려 전례가 있었지만 궐내에서 수고를 대신하는데 있어서는 상소에 대한 비답을 얻는 것이 문서의 판하(判下)241) 를 받는 것까지도 모두 세손에게 대신 행하도록 하셨고, 또 대보(大寶)와 계자(啓字)242) 도 다 동궁에 보관하여 두라는 명으로 하교하셨습니다. 윤자(允字)를 써서 내리는 것과 계자(啓字)를 찍어 내려 주는 것은 곧 대섭(代攝)하는 것이므로 명을 받들기가 어렵습니다. 모름지기 좋은 말로써 앙주(仰奏)하여 주시오."
하였으나, 모르는 체하면서 이에 말하기를,
"궐내에서 한 일을 신 등이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대답하며, 서로 이끌고 물러갔다. 이것으로 보아 홍인한의 마음은 길가는 사람도 알 수가 있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지난달 7일 대궐로 돌아오신 뒤의 하교는 외정(外廷)에서 알지 못할 바인데, 홍인한이 그것을 알았다. 이날에 이르러 대계(大計)가 이미 결정되고 임금의 뜻이 더욱 간절했으며, 홍인한 역시 이미 연석(筵席)의 하교에 앞서 들었지만, 오히려 다시 전처럼 말이 많았으며, 오직 자신의 좌차(坐次)가 혹시나 다른 여러 상신(相臣)들의 뒤로 밀려날까 염려하여 다투어 아뢰는 일에 반드시 앞장섰다. 〈왕명의〉 출납(出納)은 승선(承宣)의 직무인데, 〈그들을〉 마음대로 지휘하여 〈조정에〉 들어가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고 미봉하였으며 밖에 나와서는 비밀스럽게 숨기고 덮어버렸다. 심지어 기무(機務)를 궐내에서 대신 수고하는 것은 곧 대리 섭정(代理攝政)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전교를 내리지 않아 국인(國人)이 알지 못하였다. 우리 왕세손께서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한 것은 국사의 민망스러움을 생각지 않아서가 아니었고, 〈성상〉의 지극한 뜻을 우러러 받들 생각이 없어서도 아니었으며, 참으로 대사(大事)를 주고받음이 밝고 분명하게 하지 않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홍인한이 이에 ‘신 등이 알 바가 아닙니다.’라고 아뢴 것은 말 자체도 이미 불경스러운 것이지마는 그 의도도 역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그의 흉악한 마음과 간사한 꾀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 가릴 수가 없었다. 이 당시 화완주(和緩主)243) 의 후자(後子)인 정후겸(鄭厚謙)이 마음이 바르지 않고 평소 행동이 못된데다 옹주를 믿고는 방자함이 심하였으니, 홍인한과 같이 서로 결탁하여 임금이 정섭(靜攝)하는 기회를 틈타 위복(威福)을 훔쳐서 무롱(舞弄)하였다. 청정(聽政)에 대한 의논이 일어나게 되자 홍인한 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온갖 방법으로 저지시켰으며, 더욱 급하게 안으로는 이목(耳目)을 포치(布置)하고 밖으로는 당여(黨與)를 끌어들여서, 혹은 말을 지어내어 협박하기도 하고 혹은 허튼말로 탐지하며 시험하기도 하였다. 또 궁관(宮官)이 임금을 호위하는 것을 참소로 헐뜯으며 자기에게 빌붙지 않는 자는 반드시 자기들과 가까운 자와 배치 장소를 바꾸려고 하였으니, 주야로 경영하는 정적(情跡)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왕실(王室)의 척련(戚聯)으로 부귀가 또한 이미 극도에 달하였으나, 스스로 아주 흉악한 죄에 빠져들기를 달갑게 여기는 것이 어찌 일조 일석의 일 때문이겠는가? 오직 우리 왕세손께서 재덕(才德)이 특출하고 영명하며 성을 내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으니, 두 역적이 평소에 이를 꺼리는 바였다. 〈왕세손은〉 고금의 치란(治亂)을 환하게 알고 척리(戚里)들의 정치에 대한 간섭을 깊이 미워하는 것이 두 역적에게는 마음속으로 우려하는 바였다. 우려와 꺼림이 서로 원인이 되어 자신이 나라와 원수가 되었다가 마침내는 성상의 환후(患候)까지 숨겨서 나라의 큰 계획을 저지하는데 이르게 되고 저지하는 것도 모자라서 협박하는 데 이르게 되고, 협박하는 것도 그치지 아니하여서 거의 동요(動搖)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무엄(無嚴)한 버릇과 불령(不逞)한 마음이 날마다 더욱 더해가서 끝이 없게 되었다. 팔역(八域)에서 추대하려는 마음이 바야흐로 간절한 데도 감히 놀라서 당혹할 만한 소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 극도에 달했다. 두 역적이 역적이 된 원인을 따져보면 그 까닭은 오래 되었다. 이는 유독 사사(士師)244) 가 된 자라야만 주벌(誅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어 내었는데, 혹은 동궁이 미행(微行)한다고도 하고, 혹은 동궁이 술마시기를 좋아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김중득(金重得)과 하익룡(河翼龍) 같은 무리는 홍인한의 흉계를 몰래 받아 가지고 진서(眞書)와 언문(諺文)으로 된 익명(匿名)의 글을 존현각(尊賢閣)에 투서하였는데, 그 내용이 흉패(凶悖)하였다. 포도청(捕盜廳)에서 그들을 잡아내니, 홍인한이 동궁을 위협하여 그들을 끝까지 신문하지 못하게 하고, 마침내 강도(强盜)로 조율(照律)하여 종을 만들게 하였다. 홍인한은 정후겸과 함께 내간(內間)에서 창도하여 말하기를, ‘동궁이 외롭고 위태하니 만일 외가(外家)를 후대(厚待)하지 않으면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하였으며 윤양후(尹養厚)와 윤태연(尹泰淵)의 무리가 또 따라서 꾀고 권하여 불령(不逞)한 무리들에게 소개하니 세력을 이루고 위엄을 세움에 뿌리와 기반이 튼튼하게 체결되었다. 그리하여 동궁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여기었으나 동궁은 그들의 정상을 굽어 살피고서 소행을 매우 미워하고 몹시 괴로워하였으므로 간혹 말이나 얼굴빛 사이에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이 무리들이 흉측한 계획을 축적해 온 지가 오래 되었으나 뉘우칠 줄을 몰랐다. 5월 정시(庭試)가 끝난 뒤에 정후겸과 홍인한의 무리들이 동궁을 공갈(恐喝)시켜 곧 과옥(科獄)245) 을 일으키려고 다만 그렇게 긴요하지도 않은 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방자스럽게 위협하고 버티었던 것이니, 이 무리들의 눈에는 동궁을 무시하였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동궁이 혹 편안히 쉴 때가 있으면 정후겸의 어미 〈화완 옹주는〉 반드시 사람을 시켜 정탐(偵探)하게 하여 좌우에서 엿보았는데, 동궁이 혹 궁료(宮僚)들을 불러 만나보는가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대개 이것은 정후겸이 꾀어서 한 것으로 자기들의 정적(情跡)을 말할까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정후겸은 늘 사사로이 동궁을 뵐 때 앞으로 나오면서 몸을 굽히지도 않았고, 출입(出入)할 때에는 탁탁하며 신을 끄는 소리를 내어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조금도 없었다. 임금이 화완 옹주에게 이르기를, ‘신을 끄는 소리가 어찌 그리 방자스러우냐?’ 하였는데 이 뒤로 정후겸은 늘 동궁을 대하여 말하기를, ‘옛날에는 신을 끄는 소리까지도 임금을 섬기는 예절이었는데, 성상께서 예절을 굽어 살피지 않으심이 한스럽습니다.’ 하였다. 이 무리들이 동궁에게만 무엄하였던 것이 아니라, 성상에게도 불경(不敬)하였음이 또한 이와 같았다. 정후겸은 적신(賊臣) 홍상간(洪相簡)과 더불어 일찍이 사미원(史彌遠)이 미인(美人)을 바친246) 설(說)과 제왕(濟王)이 경애주(瓊崖州)로 귀양보낼 계획을 한 논(論)을 지어 역사를 초록(抄錄)한 논(論)에 나타냈고, 당(唐)나라 순종(順宗)이 〈환관(宦官)을〉 허물없이 가까이 하던 일과 왕비(王伾), 왕숙문(王叔文)은 잘 호도(糊塗)하였다는 칭찬247) 이 흉도(凶徒)의 입에서 나와 문자로 나타났고 그것이 길거리에 공공연히 떠돌아서 궁중안에 소문이 요란스럽게 퍼졌다. 이와 같이 그 흉악한 의도와 반역의 심보를 오랫동안 품고서 〈동궁을〉 위핍(危逼)하고 동요(動搖)하는 것이라면 못 할 일이 없이 다 하였으니 이루 다 통탄할 수 있겠는가? 10월 이후로는 임금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 담이 끓어오르고 헛소리를 하여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홍인한의 무리들은 스스로 이 기회를 틈타 그들의 흉악한 계획을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하고는 또 정후겸의 어미에게 빌붙으니 두 역적은 곧 기각(掎角)248) 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동궁이 늘 임금의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을 초조히 생각하고 염려하면, 홍인한과 정후겸의 무리는 문득 ‘저하(邸下)께서는 임금의 건강 문제에 대해 말을 주고받는 것만을 소일(消日)할 일로 여기십니까? 진실로 저하의 의도가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뜻이 대개 성상의 병세를 숨기는 데 있는 것으로 이광좌(李光佐)가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은 것과 동일한 죄악이었다. 어느날 밤에 존현각(尊賢閣)의 포장(布帳) 밖에서 어떤 사람이 귀를 대고 장내(帳內)의 동정을 엿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 궁중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자객(刺客)이 궁중에 들어왔는데 철갑(鐵甲)을 입고 장검(長劍)을 짚었다’고 하여 며칠 동안 어수선하고 떠들석하였는데 흉도(凶徒)들이 말을 퍼뜨리기를, ‘장지항(張志恒)이 만금(萬金)을 주고 자객을 사서 들여 보내냈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흉도들이 몰래 계획을 꾸며서 사람들을 속여서 얼을 빼며 동요(動搖)시킬려고 한 것이다. 홍인한과 홍지해(洪趾海) 등 여러 역적들이 위급(危急)한 형세를 만들어 말을 퍼뜨리기를 ‘홍지해는 살아서는 대관(大官)이 될 만하고 죽으면 서원(書院)을 만들 만하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주벽(主壁)에는 김상익(金相翊)이고 배향(配享)에는 홍지해(洪趾海)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국동(國洞)의 세상이 되면 홍계능(洪啓能)은 정승이 될 것이며 김상익(金相翊)은 학남(鶴南)이 될 것이며, 홍상간(洪相簡)은 문형(文衡)이 될 만하다.’라고 요란히 떠벌려서 그 소문이 궁금(宮禁) 안에까지 흘러 들어가게 하였으니, 그들의 계획이 또한 흉악하고 참혹스러웠다. 정후겸의 어미가 일찍이 동궁에게 이르기를, ‘말루하(抹樓下)249) 께서 만일 우리집과 외가(外家)가 아니라면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언의(言議)를 취사(取捨)할 때에는 반드시 양가(兩家)를 위주로 한 연후에야 무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아이 〈정후겸은〉 저하(邸下)에게는 믿음을 받기도 하고 의심을 받기도 하여 우리 아이가 늘 통절히 말하고 싶었으나 잠시 또 참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 뒤에 역적 정후겸은 동궁에게 이르기를, ‘윤양후처럼 성심껏 보호하려는 무리도 역시 의심 받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말이나 됩니까? 대조(大朝)의 총명하심이 만일 되살아 나시면 반드시 큰 일이 있을 것이니, 저하께서도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들이 동궁을 위협하는 말이 늘 이와 같았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이 있는 곳을 길가는 사람들도 다 알 수가 있었다. 정후겸이 동궁에게 이르기를, ‘동궁의 덕(德)은 전하의 잠자리를 문안하고 수라를 드시는 일을 보살피는데 있습니다. 옛날 임금의 예(例)를 따라 보면 감국(監國)·무군(撫軍)250) 이 비록 부득이한 일이지만, 대체(大體)로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늘에 해가 둘이 있으면 안되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혐의가 결국 있게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에 청정(聽政)하는 의논이 있었으므로 흉악한 역적이 이를 싫어하여 방해하고 공갈하는 것이 온갖 방법을 다 썼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청정하는 일을 내간(內間)에서 하교하였는데, 정후겸의 어미가 처음에는 이 청정하는 일을 늦출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며칠 되지 않아 혹은 병을 핑계삼고 혹은 모른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번 물어도 한결같이 모른 체 사양하고 끝내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정후겸이 그렇게 종용한 것이다. 정후겸은 널리 심복들을 배치하여 동궁의 일거 일동을 탐문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문서의 왕래까지라도 정후겸의 어미가 틈만 있으면 찾아내어 정후겸에게 전하여 주어 근거없는 말로 공갈할 자료를 삼게 하였으니, 그 당시 동궁의 위태로움을 상상으로도 알 만하였다. 그러니 충성과 분개를 가진 선비가 어찌 이 무리를 갈기갈기 베어 죽이고 싶지 않았겠는가? 동궁이 청정을 한 뒤에 정후겸의 어미는 동궁이 청정하는 일에 의도가 있다고 여겨 다시 동궁에게 진소(陳疎)하여 고사(固辭)하라고 권유하였다. 정후겸이 또 말하기를 ‘한번의 소(疏)로써 승명(承命)하는 것은 너무 앞질러 받는다는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동궁을 면대하여 모욕함이 이와 같이 무엄하였다. 이로 인하여 공갈하고 업신여기려는 계획을 하였으니, 아! 흉악하도다.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한 뒤에 정후겸이 떠들며 말하기를, ‘임금의 병환이 점점 나아질 희망이 있는데 군신(群臣)들을 시험하여 보려고 이 하교를 내렸다. 마땅히 운운(云云) 【이 두 자는 차마 쓸 수 없는 말이다.】 해야 한다.’고 하니, 역적 홍인한은 그제야 말하기를, ‘정 대감[鄭台]251) 은 내간(內間)의 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이 말은 매우 옳다.’ 하고는 그들 사이에서 서로 공공연히 전파하니 만고에 어찌 이런 흉악한 말이 있단 말인가? 흉악한 무리들이 요망한 심상운(沈翔雲)을 사주(使嗾)하여 나오게 하였는데, 따뜻한 봄이 되어서는 임금의 건강이 좋아질 것이니 심상운의 글로 ‘온실의 나무[溫室樹]252) ’라는 석 자를 아뢰면, 자연히 임금은 의심을 가져서 건명문(建明門)에 전좌(殿座)하고 먼저 궁관(宮官)을 심문하게 될 것이며, 궁관을 일망 타진하게 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서명선(徐命善)의 상소가 또한 승부를 다투게 되었으니, 그 계획은 음험하고 또한 참혹한 것이었다. 이 때를 당하여 흉역(凶逆)들이 안팎에 웅거하여 서로 결탁하고 뭉쳐서 동궁을 위핍(危逼)하고 국본(國本)을 뒤흔드는 일에 안하는 짓이 없었으니 국가의 형세가 위기 일발과 같은 것이었다. 아!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는 예(禮)는 당우(唐虞) 같은 훌륭한 시대에 시작되어 역대(歷代)로 그것을 따랐으니 이미 전고(典故)를 이루었다. 옛날 효종 대왕(孝宗大王) 때에는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옛날 태자(太子)가 참결(參決)하였던 말을 인용하여 고하였다. 이 당시 효묘(孝廟)의 춘추(春秋)는 한창 왕성한 때였는데도 선정신의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더구나 임금이 대질(大耋)253) 의 나이인데야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또 더구나 병환이 깊이 든 뒤에 있는 것이겠는가? 우리 저하(邸下)는 적손(嫡孫)의 중하신 몸과 저이(儲貳)254) 의 높은 지위로 모든 정사를 대리 청정하는 것은 마치 요제(堯帝)가 늙자 순제(舜帝)가 섭정하는 것과 같아서 곧 천지에 세워 보아도 어긋나지 않으며, 백세(百歲)를 기다려 보아도 의혹되지 않는 것이다. 지위가 대신에 있는 자는 마땅히 고사(故事)를 참고하여 임금에게 청하는 것이 옳을 터인데, 지금은 이와 반대로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니, 필경에는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지 않고 스스로 신충(宸忠)을 결단하였다. 여기에 대성(大聖)255) 께서 종사(宗社)를 염려함이 깊고 원대함을 우러러 보게 되는 까닭이 있다. 우리 저하(邸下)께서는 신성(神聖)하고 영명(英明)하시어 오랜 동안 여러 역적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였고, 의리의 큰 곳을 환하게 바라보는 데 있어서 척리(戚里)들의 용사(用事)를 매우 미워하였다. 더욱이 숙특(淑慝)256) 과 역순(逆順)을 구분하는 데 엄격하여서 스스로 여러 역적들로부터 그 마음을 엿보게 함을 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역적들이 형체를 숨긴 채 궁중 안으로부터 농간을 부린 허다한 죄악은 하늘을 속일 수 있고 온 세상을 속일 수는 있었더라도 털끝만큼도 속일 수 없었던 것은 오직 저궁(儲宮)257) 뿐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저들이 저궁에 대하여 처음에는 그들의 일을 방해한다고 미워하다가 중간에는 그들의 간사함을 엿본다고 두려워하였다. 이렇게 대립하는 형세가 이루어지자 모위(謀危)하는 흔적이 점점 생겨나고 자기들을 보전하려는 계획이 더욱 깊어지자, 위를 핍박하려는 꾀가 점점 급해져서 마침내는 죽음을 걸고 저궁과 원수가 된 것이니, 이는 진실로 일의 정세가 꼭 그렇게 되게끔 된 것이었다. 다만 우리 영종 대왕(英宗大王)은 지극히 밝고 지극히 자애스러우시어 간흉들의 정적(情迹)을 통찰하시었으며, 비록 정섭(靜攝)하던 중에도 담증(痰症)이 조금만 그치면 말씀과 하교가 엄정하고 분명하여 흉도로 하여금 감히 음흉한 계책을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고, 마침내는 대책(大策)을 정하여 대리(代理)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어 억만년 무강(無彊)한 터전을 열어 주셨으니, 아! 참으로 훌륭하셨다.
-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0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역(軍役) / 변란-정변(政變) / 신분-양반(兩班) / 신분-중인(中人)
- [註 237]숭릉(崇陵) : 현종(顯宗).
- [註 238]
황형(皇兄) : 경종.- [註 239]
엄수(嚴竪) : 중관.- [註 240]
상협련군(廂挾輦軍) : 상군(廂軍)과 협련(挾輦)의 준말. 상군은 임금의 거둥때 호위하는 군사이며, 협련은 훈련 도감에 딸린 군대로 임금의 연(輦)을 호위하는 군사임.- [註 241]
판하(判下) : 상주(上奏)한 형사 사건에 대한 임금의 재가. 판부(判付).- [註 242]
계자(啓字) : ‘계(啓)’ 자를 새긴 나무 인(印). 임금의 재가를 얻은 문서에 찍는 것.- [註 243]
화완주(和緩主) : 영조의 서녀(庶女)인 화완 옹주.- [註 244]
사사(士師) : 법관.- [註 245]
과옥(科獄) : 과거 때 부정으로 일어나는 옥사.- [註 246]
사미원(史彌遠)이 미인(美人)을 바친 : 남송(南宋) 영종(寧宗) 때 권신(權臣) 사미원(史彌遠)이 황자(皇子) 조횡(趙鐄)의 환심을 사려고 미인(美人)을 바쳤는데, 조횡은 평소 사미원을 미워해 경애(瓊崖)란 곳을 지도(地圖)에서 가리키며 자기가 제위(帝位)에 오르면 사미원을 그 곳에 귀양보내겠다고 하였다. 사미원이 이 말을 미인에게 전해 듣고 결국 조횡을 황자의 자리에서 폐립(廢立)시켰고, 제왕(濟王)에 봉했다가 살해하였음.- [註 247]
왕비(王伾), 왕숙문(王叔文)은 잘 호도(糊塗)하였다는 칭찬 : 당(唐)나라 순종(順宗)이 무능하며 환관 이충언(李忠言) 등을 가까이 하여 국사(國事)를 그르친 일과 당시 권신(權臣)이었던 왕비(王伾)·왕숙문(王叔文)이 이충언 등과 결탁하여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며 재물을 모으고 국권을 농락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호도(糊塗)하였던 일을 들어 말한 것임. 결국 이들은 태자(太子)가 감국(監國)하게 되면서부터 제거되고 말았음.- [註 248]
기각(掎角) : 양쪽에서 협격(挾擊)함을 이름.- [註 249]
말루하(抹樓下) : 마님.- [註 250]
감국(監國)·무군(撫軍) : 《좌전(左傳)》 민공(閔公) 조에 의하면, "태자[冢子]는 임금이 싸움터에 가면 조정에 남아서 지키고, 조정을 지킬 사람이 있으면 임금을 따라 나간다. 따라 나가는 것을 무군(撫軍)이라 하고, 남아서 지키는 일을 감국(監國)이라 하는데, 이것은 옛 제도이다. [冢子 君行則守 有守則從 從曰撫軍 守曰監國 古之制也]"라고 하였음.- [註 251]
정 대감[鄭台] : 정후겸.- [註 252]
온실의 나무[溫室樹] :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박사(博士)였던 공광(孔光)은 어떤 사람이 온실전(溫室殿)과 성중(省中:궁중)에 심어진 것이 모두 무슨 나무냐고 물었으나 공광은 침묵을 지키고 답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조정의 일을 함부로 남에게 누설하지 않는다는 말.- [註 253]
대질(大耋) : 80세.- [註 254]
저이(儲貳) : 세손.- [註 255]
○上召見諸大臣。 金相福進伏曰: "殿下今日之敎, 此何爲耶? 是豈臣子之所敢聞之事耶? 臣等之仰殿下, 如年少君上矣。 不勝驚遑入來矣。" 金尙喆曰: "臣伏聞非常之敎, 不勝驚遑, 欲相率求對矣。 至於用人用兵等, 尤是國之大事, 故雖代理之時, 此數件事, 自上親爲之矣。" 上曰: "此旣異於代理聽政等事, 自內替勞, 前例旣多, 卿等何若是太過耶? 此乃三百年古例, 予亦曾爲之也。" 洪麟漢曰: "朝者下敎出後, 自外聞之, 不勝驚遑, 臣等相率入侍, 而今奉前例之敎, 然則雖與在外承聞時有異, 何敢遽然奉承乎?" 金陽澤、李思觀追後進伏曰: "臣等伏聞今日下敎, 蒼黃入來。" 韓翼謩追後進伏曰: "臣方入來矣。" 上曰: "卿亦浮動而來乎?" 翼謩曰: "聞此下敎, 誠不知所措。 臣亦安得無動乎?" 上命書傳敎曰: "巡監軍東宮點下, 卽三百年故事。 而昔年眼候時, 依崇陵故事, 中官付標, 今用此例, 與代理聽政大不相近。 雖席前付標, 下敎聽瑩, 故曰首望, 而誤以付標副望。 此猶若此, 中官或以渠意用事, 則關係興替, 故靜以思之, 復舊規而下敎若此。 昔年皇兄所敎, 其時曰, 世弟可乎? 左右可乎? 尙今嗚咽。 故例斑斑, 則俄者不緊公事, 令達下。 若此聽政, 其爭可也。 故予欲下敎, 此大異於此, 則其何張大乎? 聞此心動, 氣下十層。 附子加入之命, 亦此也。 特寢不緊公事達下之敎, 此敎依例擧行。 以祖孫手點下可乎? 以閹竪手付標可乎? 此霄壤黑白也。 一何劻勷乎? 領相聞命, 承宣入侍時, 其宜隨入, 而召之而莫知去處, 此果輔相之道乎? 此萬萬料表。 領議政韓翼謩亟施不敍之典。 時、原任若不覺悟, 則予當詣舊邸, 少息心神。 前後廂挾輦軍, 依前下敎擧行, 待下敎待令, 只入正時。" 上曰: "政望催促入之, 該房承旨李得臣讀奏政望。" 上命付標。 上曰: "自內替勞之事, 古例斑斑。 卿等何若是張大乎?" 相福曰: "臣等全然不知。 今奉下敎, 且伏聞明有前例, 臣等何敢更有所達乎?" 麟漢曰: "臣本愚昧, 不知前例之有無矣。" 陽澤曰: "今始知前例之如此矣。" 尙喆曰: "古例之如此, 臣等何以知之? 今奉下敎, 更無所達。" 上曰: "非但巡監軍落點, 凡公事酬應政望下點, 皆欲自內替爲矣。" 麟漢曰: "聖敎如此, 旣以自內爲之爲敎, 則此非臣等所可知也。 俄者動駕下敎之後, 軍兵必當待令, 伏望下念焉。" 上命書傳敎曰: "俄者劻勷, 於今時、原任妥帖, 動駕置之。" 麟漢曰: " 動駕旣蒙置之, 臣等不勝歡忭矣。" 仍山呼, 諸臣以次退出。 時請對入侍諸大臣, 縷縷力請還寢, 上曰: "然則非但巡監軍落點, 凡諸公事酬應及政望落點, 當替勞云。" 諸大臣則只知以巡監軍自內點下, 而麟漢因諺札, 知聖意。 故王世孫謂麟漢曰: "代聽猶有前例, 而至於自內替勞, 則章奏之批答, 文書之判下, 皆命世孫替行, 至又以大寶與啓字, 皆命置諸東宮爲敎。 允字之書下, 啓字之踏下, 便是代攝, 難於奉承。 須善辭仰奏爲言。" 而佯若不知, 乃以自內之事, 臣等何以知之爲對。 相率退去。 於是麟漢之心, 路人可知也。 臣謹按, 前月七日還內後下敎, 外廷之所未知, 而麟漢則知之。 及至是日, 大計之已決, 聖意之益切, 麟漢亦旣承聞於筵敎之先, 而猶復一例周遮, 惟恐或成坐次居諸相之後, 而爭覆必先。 出納乃承宣之職, 而指揮惟意, 入則漫漶彌縫, 出則秘諱掩覆。 至於機務之自內替勞, 便同代攝, 而傳敎未下, 國人不知。 我王世孫之辭不敢當者, 非不念國事之可悶, 非不思至意之仰體, 誠以授受大事, 不可以不光明故也。 麟漢之乃以非臣等所知爲奏者, 語旣不敬, 意亦叵測。 至此而凶情慝謀益彰著, 不可掩矣。 是時和緩主所後子鄭厚謙, 傾邪無行, 倚主橫甚, 麟漢深相附結, 乘上靜攝, 竊弄威福。 及聽政議起, 麟漢等大懼, 百端沮格, 益急內布耳目, 外引黨與, 或造言脅持, 或遊辭探試。 又讒毁宮官之衛上, 而不附己者, 必欲更置所親暱, 晝夜經營, 情跡叵測。 戚聯王室, 富貴已極, 而甘自陷於極惡大憝者, 豈一朝一夕之故哉? 惟我王世孫, 天挺英明, 不怒而威, 兩賊之所素憚也。 洞覽古今之治亂, 深惡戚里之干政, 兩賊之所竊憂也。 憂與憚相因, 身與國爲敵, 竟至於掩諱聖候, 沮戲大策, 沮戲不足, 至於迫脅, 迫脅不已, 幾於動搖。 無嚴之習, 不逞之心, 日甚一日, 無有紀極。 八域之愛戴方切, 而敢做驚惑聽聞之說而極矣。 兩賊之所以爲賊, 厥惟久矣。 不獨爲士師者, 可以誅之矣。 時凶逆之徒, 倡爲浮言, 或曰東宮微行, 或言東宮好飮。 金重得、河翼龍輩, 密受麟漢之凶計, 投眞諺匿名書於尊賢閣, 其辭語凶悖。 捕廳捉得, 麟漢威脅東宮, 使不得窮治, 竟以强盜照律爲奴。 麟漢與厚謙倡言於內間, 東宮孤危, 若不厚待外家, 則豈不危乎? 養厚ㆍ泰淵輩, 又從而慫慂, 紹介於不逞之徒, 勢成威立, 根盤締固。 以東宮謂在掌握中, 而東宮俯燭其情狀, 所以深惡而切痛者, 或發於言語顔色之間。 故此輩之蓄凶圖久, 而不知悔也。 五月庭試後, 厚謙、麟漢輩恐喝東宮, 乃以欲起科獄, 多不緊酬酢等說, 肆然脅持, 此輩眼無東宮於此可見。 東宮或値燕居之時, 則厚謙母必使人偵探, 左右傍侗, 或恐東宮之招接宮僚。 蓋厚謙之所慫慂, 而恐說渠輩之情跡故也。 厚謙每當私覿之時, 進不鞠躬, 出入也曳靴之聲橐橐, 全無敬畏之意。 上謂和緩曰: "履聲何其太慢耶?" 此後厚謙每對東宮曰: "古則曳履之聲, 事君之禮。 恨聖上不得俯察於禮節也。" 此輩不但無嚴於東宮, 其不敬於聖上亦如此。 厚謙與賊臣相簡, 嘗作彌遠進美人之說, 濟王圖瓊崖之論, 著於抄史之論, 順宗狎昵之事, 伾、文善糊之稱, 出於凶徒之口, 形諸文字, 公傳道說, 宮中喧傳。 其凶圖逆腸之久懷危逼動搖者, 無所不爲, 可勝痛哉? 十月以後, 上候日漸添加, 痰候之升, 譫語之發, 最是罔措, 麟漢輩自以爲乘此機會, 乃濟渠輩之凶臆, 又附麗厚謙之母, 兩賊便作掎角之勢。 東宮每以上候之添劇焦迫憂悶, 則麟、厚輩, 輒以爲: "邸下以上候事酬酢, 爲消日之事乎? 實不知睿意之何以然也。" 其意蓋在於掩諱聖候, 與光佐之不設侍藥廳, 同一罪惡。 一日夜尊賢閣布帳外, 有一人屬耳竊聽帳內。 其翌日宮中人或言: "刺客入宮中, 被鐵甲仗長劍。" 紛擾數日, 凶徒宣言曰: "張志恒以萬金募得刺客入送。" 蓋凶徒暗中設計, 欲爲誑惑搖動之也。 麟漢與趾海等諸賊, 作爲緩急之勢, 宣言曰: "趾海生可爲大官, 死可爲書院。" 又曰: "主壁相翊, 配享趾海。" 又曰: "國洞之世, 啓能爲相, 相翊爲鶴南, 相簡爲文衡。" 諠播夸張, 使之流入宮禁, 其爲計亦凶憯矣。 厚謙母嘗謂東宮曰: "抹樓下若非吾家, 與外家豈在此位?" 言議取捨之際, 必以兩家爲主, 然後可無事也。 近日吾兒, 於邸下將信將疑, 吾兒每欲痛言, 而姑且忍之。 其後厚賊謂東宮曰: "至若尹養厚斷斷保護之徒, 亦不免受疑云, 此豈成說?" 大朝聰明若蘇, 則必當有大事, 邸下亦豈不難乎? 此輩威脅東宮之言每如此。 其心所在, 路人皆知。 厚謙謂東宮曰: "東宮之德, 在於問寢視膳。 以從古人君觀之, 監軍撫國, 雖是不得已之事, 大體則不成說也。 天無二日, 民無二王之嫌, 終是有之。" 蓋時有聽政之議, 而凶賊惡之, 沮戲恐喝, 無所不至也。 上以聽政下敎於內間, 而厚謙母初以爲, 此事不可遲緩矣。 曾未數日, 或稱病, 或稱以不知, 上屢問之, 一辭漫漶, 終不出一言, 蓋厚謙之所慫慂也。 厚謙廣布腹心, 凡東宮之動靜語默, 無不探聽, 雖文字之間, 厚謙母俟間搜見, 傳之厚謙, 以爲浮言恐喝之資, 伊時東宮之危懍, 想像見之。 忠憤之士, 寧不欲寸斬此輩也。 東宮聽政後, 厚謙母以爲, 東宮有意於聽政之事, 又勸東宮陳疏固辭。 厚謙又言曰: "一疏承命, 不無徑受之嫌。" 其面侮東宮, 若是無嚴。 因此爲恐喝淩逼之計, 吁亦凶矣。 徐命善疏後, 厚謙揚言曰: "上候漸有差勝之望, 欲探試群臣而有此敎, 而當云云。" 【此二字卽不忍書之言。】 麟賊乃曰: "鄭台於內間事, 無不明知, 此言甚是。" 亙相公傳, 萬古豈有如許凶言乎? 凶徒之嗾出妖雲也, 以爲春和後, 上候差勝, 則以雲書仰奏溫室樹三字, 必當自上起疑, 建明門殿座, 先問宮官, 宮官可以一網打盡, 而徐命善之疏, 亦可以角勝, 其計陰且慘矣。 當此之時, 凶逆盤據內外, 綢繆締結, 危逼東宮, 搖動國本, 靡所不至, 國勢之岌嶪, 澟乎若一髮矣。 噫! 代聽之禮, 起自唐、虞盛際, 歷代因之, 巳成典故。 昔在孝宗大王時, 先正臣宋時烈引古太子參決之語以告之。 是時孝廟春秋鼎盛, 而先正之言尙如此, 況於大耋之年乎? 又況於疾患沈痼之後乎? 我邸下以冢適之重, 儲貳之尊, 代聽庶政, 如堯老而舜攝, 直是建天地而不悖, 俟百世而不惑者也。 位在大臣者, 雖按故事, 而上請可也, 而今則反是, 一向牢拒, 則畢竟不謀於衆, 而斷自宸衷。 此有以仰見大聖爲宗社之慮者, 至深且遠矣。 蓋我邸下神聖英明, 久有以畏讋諸逆之心, 至若洞見義理之大處, 深惡戚里之用事。 而尤嚴於淑慝逆順之分者, 自不免爲諸逆所窺測。 重以諸逆藏頭匿影, 從中作奸之許多罪惡, 謂天可欺, 謂一世可欺, 而所不可毫髮欺者, 惟儲宮是已。 是故彼其於儲宮也, 始而猜以妨其事也, 中而懼以覷其奸也。 角立之形旣成, 則謀危之迹漸生, 自全之謀益深, 則上逼之計寢急, 終焉抵死與儲宮爲敵者, 此固事勢之所必至也。 惟我英宗大王, 至明至慈, 洞察奸凶之情迹, 雖於靜攝之中, 痰候少霽之時, 辭敎嚴正磊落, 使凶徒不敢售其陰計, 遂定大策, 終降代理之命, 以啓億萬年無疆之基, 猗歟盛哉!
-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0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역(軍役) / 변란-정변(政變) / 신분-양반(兩班) / 신분-중인(中人)
- [註 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