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121권, 영조 49년 11월 12일 정묘 1번째기사
1773년 청 건륭(乾隆) 38년
《대학》을 주강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서암송’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고 이어서 《대학(大學)》을 주강하였다. 임금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서암(瑞巖)에 가서 살펴보게 하고, 이어 ‘서암송(瑞巖頌)’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고, 임금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서암(瑞巖)은 덕유당(德游堂) 서북(西北)에 있었는데 이 궁궐(宮闕)은 바로 장릉(章陵)324) 의 구저(舊邸)였다. 광해(光海)가 ‘왕암(王巖)’이라는 말을 듣고 여기에 궁(宮)을 세웠는데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였고, 계사년325) 이후로는 이 궁에 임어(臨御)하였다. 숙종 무자년326) 에 이르러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어필(御筆)로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사방석(四方石)327) 에 새기고, 오른쪽 곁에는 새기기를, ‘속칭이 왕암인데, 바로 상서로움을 징험한다. [俗稱王巖正徵休祥]’라고 하였는데, 역시 어필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80책 121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6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