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조 참판 김귀주가 홍봉한의 일로 상소를 올리다
공조 참판 김귀주(金龜柱)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뜻밖에도 지난번 신의 재종제(再從弟) 수찬 신 김관주가 향리에서 올라와 일을 말한 차본(箚本)을 보내어 보이므로 신이 깜짝 놀라서 한번 두루 읽어 보았더니, 그 말의 득실은 논하지 않더라도 한 편(篇)에서 지적한 요점이 선신(先臣)의 뜻과 일을 제기하여 말을 한 것이 많았는데, 이는 신이 일찍이 몰래 마음속으로 통분해 하고 있었으나 감히 발설하지 못한 바였습니다. 아! 사람의 아들로서 시의(時義)를 돌아다 보면서 한결같이 꾹 참아 선인(先人)의 나라를 위하던 정성을 어두운 가운데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하게 하였으니, 이는 비단 전하에게 불충(不忠)할 뿐만 아니라 또 거듭 아버지에게도 불효한 것입니다. 불충·불효함을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지난 병술년155) 봄에 성체(聖體)가 불편하시어 정월 초부터 비로소 담결(痰結)의 징후가 있었고 2월 그믐에 이르러서 또 혼현(昏眩)의 증세가 더해 수라를 전폐하고 탕제(湯劑)의 효험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원기가 날로 줄어 점차 사그러들게 되셨는데, 이때를 당해서 구호하는 방도가 오로지 삼제(蔘劑)가 좋은가의 여부에 달려 있게 되었으니, 이는 의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반드시 그러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일에 신하로서 군부(君父)에게 마음을 다 쓴 자라면 이것을 버려두고 다시 무슨 일을 하였겠습니까? 그때에 선신(先臣)이 한 달 넘도록 직숙(直宿)하면서 조석으로 애를 태우며 친히 약원에 나아가 어약(御藥)에 쓰는 삼을 보니, 모두가 수염과 꼬리를 붙인 저질품을 모양을 꾸며서 편(片)을 만든 것으로 한번 칼로 자르면 문득 회(灰)처럼 날라가 버렸습니다. 비록 여항의 비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조금 살림이 넉넉한 자라면 반드시 기꺼이 입에 넣으려 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것이 조금의 진기(眞氣)도 없어서 어약에 쓸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신이 놀라운 마음으로 의관(醫官) 무리들에게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근래에 경공(京貢)의 삼이 으레 모두 이와 같아 이때의 탕제는 모두 이를 사용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듣건대 연전에 정승 홍봉한(洪鳳漢)이 아뢰어 외방의 삼을 제외시키고 경공으로 바꾸어 바치게 하였는데, 공인(貢人) 무리들이 실처럼 가는 미삼(尾蔘)을 거두어 모아 이겨서 풀로 붙여 삼이라고 이름해 내국(內局)에 바치고 있었습니다. 내국에서 혹 퇴짜를 놓으려고 하면 홍봉한이 큰 소리로 꾸짖기를, ‘이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위로는 제거(提擧)에서부터 아래로 의관에 이르기까지 마음속으로는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입으로 감히 말을 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선신이 도제거(都提擧) 신(臣) 김치인에게 말하기를, ‘성상께서 평일에 오랫동안 삼제를 복용하시었는데, 이처럼 환후가 위독할 때를 당하여서는 진실로 특별히 좋은 품질의 것을 가리지 않고 단지 이처럼 풀로 붙인 것을 올려 쓴다면 원기가 결코 부접(扶接)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순전한 나삼(羅蔘)을 사용하지 않고서 빠른 효험을 보려고 하는가?’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내 뜻 역시 그러합니다. 다만 영의정이 즐겨 하지 않아서 방금 이처럼 고민하고 있는데, 대감의 말이 중하니, 모름지기 그에게 힘껏 말하여 기어코 올려 쓰게 해야 옳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신이 드디어 김치인에게 한 말을 홍봉한에게 고하자, 홍봉한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응답하기를, ‘이는 잇대기가 어려운 방도여서 쓸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신이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인가? 대감의 처자에게 만일 병이 있어 마땅히 삼제를 써야 하게 된다면 잇대기가 어렵다는 것으로써 구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집과 땅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잇대어 쓰겠는가? 더군다나 온 나라에서 임금을 봉양하는데, 미리 잇대어 쓰기가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쓰지 않겠다는 것인가? 지금 성후(聖候)가 위독하여 나삼이 아니면 힘을 쓸 수가 없는데, 한편으로 약원에 있는 것을 가져다 쓰고 한편으로 각도에 복정(卜定)하는 것이 문득 왜 불가하며 또 무엇이 지난(持難)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대감은 척리로서 어찌 약원의 일에 간섭을 하는가?’라고 하므로, 선신이 탄식하면서 답하기를, ‘나로 하여금 조정 일에 관여하게 하면 참으로 죄가 되겠지만 지금 성후가 이와 같은데 약원의 탕제에 참여해서 안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후부터 날마다 다투어 몇 순(旬)에 이르도록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계책을 낼 수가 없어 혹 제거에게 조용히 권유하기도 하고, 혹은 의관으로 하여금 합사(合辭)하여 돕게 하도록 했으나, 홍봉한은 끝내 마음을 돌려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을 즈음에 성후가 점차 위독해지고 원기가 날로 떨어져 중외가 황급해 어쩔 줄을 모르게 되어 선신이 연석(筵席)에서 물러나와 차비문(差備門) 밖에 앉아서 신을 재촉해 들어와 보게 하고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나삼을 쓰지 못해 성후가 이러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화복(禍福)을 따지지 않고 죽을 각오로 다투겠다.’ 하였습니다. 인하여 홍봉한이 직소(直所)를 찾아오자 정색(正色)하고 말하기를, ‘성후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나삼을 쓰지 않으니, 지금 이후부터는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대로 하라.’ 하였는데, 사기(辭氣)가 모두 엄격하고 눈물이 주루루 흘렀습니다. 그가 이에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대감의 말 역시 옳다.’ 하고는, 드디어 힘써 쓰기를 허락하였습니다. 선신이 또 사사로이 동삼(童蔘) 한 뿌리를 구하여 내국(內局)에 바쳐 달여 올렸는데, 바로 3월 19일 저녁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원기가 하룻밤 사이에 돌아와 이튿날 아침에 병이 나았다는 경사를 알리었고 담증(痰症)과 현기증(眩氣症)도 시원하게 사라졌습니다. 이날에 부자(父子)가 서로 마주하여 춤을 출 듯이 기뻐하였으며, 선신이 또 개연히 신에게 말하기를 ‘이는 본디 양양(洋洋)하신 열조(烈祖)께서 묵묵히 종사를 돌보아 성궁(聖躬)을 보호한 것이고 또 황황(皇皇)한 상제(上帝)께서 그의 흉악한 마음을 밝히시어 몰래 조화를 부려 마음을 돌리게 한 것이다. 조만간에 그의 죄악이 저절로 연감(淵鑑) 아래에서 도피하지 못할 것이니, 그러면 명분이 바르게 되고 분함을 씻게 될 것이다. 천도(天道)는 크게 밝아서 속일 수가 없음을 너는 알아두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어제의 일처럼 귀에 역력합니다. 그날 저녁에 홍봉한이 여러 재상과 함께 입시하여 손으로 어맥(御脈)을 만져 보고 변동이 없음을 알고서는 즉석에서 일어나 나갔는데, 조금도 우려하는 기색이 없고 아주 뽐내는 뜻이 있었습니다. 이는 입시한 주서(注書)도 목격하였던 바로서, 이밖에도 ‘이런 일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을 차마 못하겠는가?’라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으나, 일이 전해 들은 말에 관계되어 신은 찾아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아! 전하께서 홍봉한을 저버린 것이 무엇이기에 홍봉한의 역심[無將]과 무엄함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습니까?
성후가 위독한 가운데 다리 기운이 편치 못해 걸음걸이가 매우 어려워 방달(房闥)156) 사이에도 걸음을 떼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선신이 ‘노인이 큰 병을 앓고 난 후여서 원기가 회복되지 못해 아래 부분이 허약한 것이니 주기(酒氣)를 빌지 않으면 아래로 펴지게 할 수 없다.’고 여겼으나, 그때에 금령(禁令)이 아직도 엄하여 성상의 뜻이 혹 허락하지 않을 듯하기 때문에 드디어 홍봉한에게 말하여 드시도록 권하게 하였는데, 끝내 기꺼이 할 뜻이 없었습니다. 문득 전 참의 신 홍성(洪晟)의 노부가 오랫동안 다리 병으로 고생하다가 송다로 효험을 보았다고 하기에 드디어 맞이하여 물어 본 다음 아뢰었더니, 전하께서 홍성의 입시를 명하여 상세히 물으셨으나 마침내는 결정이 없었습니다. 홍봉한이 그때 연석에 들어왔다가 한마디도 들기를 권하지 않고 물러가 합문 밖에 앉아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오히려 격노하심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 걱정되어 신하들이 두려워하면서 날짜를 보내고 있는데, 이제 송다를 올리면 우리들은 장차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하여, 듣는 자들이 모두 실색하였습니다. 그 후에 선신이 홍봉한과 함께 들어가 문후를 마치고는 선신이 일부러 손으로 그의 겨드랑이를 잡아당기며 말하기를, ‘그 말을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를 하였으나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하자, 선신이 마침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왜 송다에 대한 일을 아뢰지 않는가?’ 하니, 그가 이에 부득이하여 예사로운 말로 드시기를 권하였는데, 전하께서 즉시 허락하셨습니다. 이때부터 다리 기운이 조금 좋아져 열흘 사이에 걸음이 거의 정상에 이르렀으니, 그때의 광경은 전하께서도 역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오직 이 두 가지 일이 바로 홍봉한이 범한 죄 가운데 가장 큰 것인데, 나삼의 일은 전하께서 막연하게 듣지 못하셨으며 송다의 일은 전하께서 비록 그 대략은 통촉하고 계시지만 자세한 것은 아시지 못하고 계실 것입니다. 선신이 살아 있을 때에 일찍이 이런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오직 사사로운 자리에서만 자제에게 말해 주면서 가슴을 어루만지고 눈물을 흘리며 억제하려 하였으나 스스로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그후에 홍봉한이 그의 계모상(繼母喪)을 당하여 선신이 가서 조문하였었는데, 이에 홍봉한이 나와 그의 엄지손가락을 꺼내 보이면서 그가 썼다는 삼을 자랑하며 ‘이러한 크기의 것을 몇 근이나 썼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신이 돌아와서 탄식하기를, ‘그의 계모는 어떤 노파이기에 능히 천승(千乘)의 임금이 복용하지 못한 것을 복용하였고 그의 집안 세력이 얼마나 부자이기에 국력으로도 잇대지 못하던 것을 잇대었단 말인가? 천하 만고에 어찌 이러한 세계(世界)가 있겠는가? 나는 정신이 이미 쇠약하여 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하는데, 아! 우리 4백 년의 종사가 반드시 이 사람의 손에서 망하겠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이 몇 조항은 바로 선신의 뜻과 일이 있는 바인데, 신의 못남으로 인하여 사라져서 알려지지 않았으니, 마음이 항상 아팠습니다. 이제 마침 일이 나옴으로 인하여 전하 앞에서 한번 진달하였으니, 지금 이후에는 비록 땅에 엎어져 죽더라도 거의 유감이 없겠습니다. 아! 선인의 뜻이 이미 밝혀지고 사의(私義)를 조금이나마 폈으니 마땅히 언급할 남은 말이 없어야 하나, 이른바 국본(國本)을 요동한다는 설은 종사의 존망과 저군(儲君)의 안위에 관계되는데, 신이 어찌 한마디 하여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임오년157) 의 일은 바로 성상께서 종사를 위해서 하신 대처분(大處分)으로,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시어 해와 별처럼 빛나니, 신하로 있는 자 그 누가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홍봉한이 봉승(奉承)한 것은 어찌 일찍이 옛날 대신이 난(難)에 임하여 빼앗기지 않은 절조와 같겠습니까? 곧장 사생(死生)을 두려워하여 때를 틈타 미봉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후에 세월이 조금 흐르자 흉계가 겹겹이 생겨서 화심(禍心)을 간직하고 반복(反覆)·전도(顚倒)하였습니다. 비로소 이에 추숭(追崇)하여 종묘에 들이자는 의논을 창출(唱出)해 드러내 놓고 공갈하여 세상에 풍파를 일으키니, 인심은 놀라 미혹되고 중외는 크게 부담을 느끼고 있어 식자들이 근심하고 탄식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오직 우리 춘궁 저하(春宮邸下)는 자질이 영특하고 학식이 명철하시니, 삼가 생각하건대 이에서 그 처신할 바를 아실 것인데, 홍봉한이 감히 소인의 마음으로 망령되이 이성(貳聖)의 마음을 헤아려 스스로 ‘나의 말은 행할 수 있으며 내 뜻은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몇 해 전에는 사사로이 동궁을 만나보고 이에 후일 번안(飜案)할 논의를 발설하여 감히 면전에서 협박할 모의를 이루려 했었는데, 춘궁 저하께서 깊이 그 간사함을 살피시고 성색(聲色)을 바꾸지 않으시며 침묵으로 말씀을 하지 않아 엄히 배척하는 뜻을 드러내어 보이시자, 홍봉한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부도(不道)의 말을 하기를, ‘저하께서 만약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마땅히 이러이러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국본(國本)을 흔들려는 말입니다. 그가 비록 차마 이 말을 했으나 신이 어찌 감히 필설로 옮기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이 한마디 말은 궁중(宮中)의 말이니 마땅히 비밀에 붙여 전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척리의 집에서 나와 진신 사이에 전파되어 듣는 자들이 혀를 빼물고 서로 돌아보면서 안색이 변했습니다. 신 역시 초방(椒房)158) 의 가까운 친속으로 귀가 있어 듣고는 마음과 뼈가 떨리는 것을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전하를 위하여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대개 방애되는 바가 있음을 연유해서입니다만, 만약 그 죄를 논한다면 신 역시 스스로 속(贖)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 전하는 종사의 주인이며 춘궁은 이저(貳儲)의 임금입니다. 전후의 사륜(絲綸)159) 에 매양 ‘한 모퉁이 청구(靑丘)160) 에 할아비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를 의지하고 있다.’라는 전교가 있으니,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그 누군들 감읍(感泣)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 홍봉한이란 자는 전하의 원보(元輔)로 있고 춘궁의 외척인데도 무슨 마음으로 우리 전하를 원수로 여기어 삼다(蔘茶)의 진용(進用)을 막았으며 우리 춘궁을 협박하여 종국(宗國)의 근본을 뒤흔들고 있습니까? 신하 된 자에게 이런 범죄가 있으면 마땅히 하루라도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쉴 수가 없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머리가 붙어 있어 탈없이 궁성 안에 엎드려 있음은 천도가 망망한 것으로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가 10년 동안 국정을 잡으면서 세력을 이루고 위엄을 세워 늦추거나 참혹하게 조종하는 것이 오직 그의 손에 달려 있고 생사 여탈(生死與奪)도 한결같이 그의 뜻에 맡기어졌습니다. 한때의 경사 대부들이 바람에 쏠리고 그림자를 좇듯이 노안 비슬(奴顔婢膝)161) 을 하여 조금 자신을 좋게 보이려는 자는 또 모두 발을 포개고 다리를 떨면서 죄를 입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러한 기상(氣象)은 대개 일조 일석에 이루어진 까닭이 아닙니다. 지금의 회사 세계(灰死世界)에 어찌 조금의 양기(陽氣)가 있겠습니까만, 동일한 것은 인심이요 사라지지 않는 것은 공의(公議)여서 비록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라 하더라도 오히려 방천(防川)해야 될 걱정이 있으면, 잠깐 사이에 또 동궁을 보호해야 한다는 설을 만들어 내어 인심을 현혹시키고 공의(公議)를 협박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동궁의 외조(外祖)이니, 참으로 나를 해치는 마음을 두는 자는 이는 동궁을 불리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동궁 저하께서는 종사의 주창(主鬯)162) 인 지위에 처하여 억조 창생(億兆蒼生)이 목을 빼고 바라보는 바여서 무릇 인륜이 있는 자는 모두 사랑하여 받들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것이 어찌 홍봉한 한 사람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진실로 홍봉한의 말과 같다면, 이는 왕망(王莽)을 죽이는 자는 성애(成哀)163) 에게 불충(不忠)한 것이요, 양기(梁冀)를 죽이는 자는 충질(冲質)164) 에게 불리하다는 것이니, 이런 말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고 말하는 사람의 입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 말이 불순(不順)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서도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이미 부도한 말을 감히 이연(离筵)165) 에서 말해 옥내의 말이 전파되어 거리의 의논이 들끓어 이 일이 한번 나오면 대벽(大辟)을 도피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침내 만번을 말하여도 이치에 가깝지 않은 말을 하여 먼저 남을 제압할 계책을 드러냈습니다. 만약 그 일을 아는 자로 하여금 듣게 한다면, 비단 그의 폐간(肺肝)을 볼 뿐만 아니라 그 간특한 태도도 드러나기에 족할 것이니, 참으로 한번 웃기에도 부족합니다. 근일 이래로 성상께서 깊이 세도(世道)의 근심에 마음을 두어 통렬히 편당(偏黨)의 습성을 경계하시어 처분하는 즈음에 조금 호오(好惡)의 뜻을 보이시자, 그가 이에 춤을 출 듯 기뻐 날뛰면서 말하기를, ‘이 기회를 틈타면 일망 타진(一網打盡)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용렬하고 녹록(碌碌)하여 마음에 줏대가 없는 자들이 그의 지휘에 따르고 턱으로 지시하는 말을 들어서 홍봉한이 평소 일찍이 좋아하지 않은 자들을 당인(黨人)이라고 지목해 허구의 말을 지어내고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 위로는 천청(天聽)을 현란시키고 아래로는 세상을 놀라게 하며 동서(東西)에서 닫았다 열었다 하고 좌우에서 섬롱(閃弄)하기를 귀신이나 물여우처럼 하여 그 단예(端倪)166) 를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전하의 교목 세신(喬木世臣)과 고가 명족(故家名族)은 장차 한 사람도 요행히 면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전하께서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위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신의 집안은 본디 홍봉한의 집과 은원(恩怨)이 없고 그 처지를 논하면 대략 서로 같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잘못한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느 해 이전부터 그가 한 소행과 그 말미암은 바를 보면 오로지 공(公)을 등지고 사(私)를 따라서 오직 권세를 탐하고 좋아하기를 일삼았습니다. 선신(先臣)이 마음속으로 비록 불평하였지만, 겉으로는 기미(羇縻)함을 보였었으며, 병술년167) 이후에는 또 일찍이 몹시 싫어하고 대단히 미워하지 않고서 오직 한결같이 용서하여 기미(機微)를 나타내지 않는 것이 어찌 홍봉한 한 사람을 위해서였겠습니까? 참으로 일의 기미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혐극(嫌隙)이 먼저 생긴다면, 비단 신의 집이 그자리에서 멸망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궁(聖躬)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10년 동안 전석(前席)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면서도 말하지 못하였고 한갓 경경(耿耿)한 한을 머금은 채 죽었으니, 신의 은통(隱通)이 실로 이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분노를 참고 억울함을 품은 채 기다려 왔었는데, 작년 가을에 처분을 갑자기 내리시어 사륜(絲綸)이 엄정하여 특별히 서인(庶人)으로 만드는 율을 시행하였습니다. 갑자기 하루는 홍봉한의 동생 홍용한(洪龍漢)이 신을 보러 왔었는데, 말이 당일의 처분에 이르자, 이에 감히 성교(聖敎)를 변란하고 사실을 전도시켜 은연중 성궁을 헤아리기 어려운 암매한 지역으로 돌리며, 그의 형은 광명(光明)하고 순수한 곳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깜짝 놀랐고 마침내는 분노해서 그때의 전교를 외며 한 자 한 자씩 분석하고 구절 구절을 분명하게 밝혔으나, 홍용한이 끝내 그렇게 여기지 않으므로, 신이 엄한 말로 크게 책망하여 물리쳤었는데, 그 후에 들으니, 홍용한의 이 말이 세상에 전파되어 나날이 새로워지고 다달이 왕성해졌습니다. 또 듣건대 홍봉한이 스스로 그때에 행한 바를 망연하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는데, 아! 이는 왕언(王言)을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 내어 그 자신을 속인 것입니다. 신이 처음에 그 말을 듣고서 깊이 믿지 않았는데, 며칠 후에 홍준한(洪駿漢)이 또 와서 말하기를, ‘우리 형에게 비록 이런 일이 없었으나 성교에서 이미 있었다고 하셨으니, 역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에 있는 바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고 전해 들은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이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홍용한이 다시 찾아왔기에 이치를 들어서 책망하기를, ‘그대 집안의 행한 바가 이미 이와 같아서 우리들은 구차하게 영합할 수가 없으니 휴척(休戚)의 의리를 더는 보장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의(義)를 들어서 절교를 고하였습니다.
아! 저 홍봉한은 의리를 만환(漫漶)168) 하고 성궁(聖躬)을 무함(誣陷) 날조함이 이처럼 극에 이르렀는데, 신이 만약 우물쭈물 명확하지 못하게 되돌아보며 그의 권세를 두려워해서 한갓 평일의 척가(戚家) 사이의 의리만 보존한다면, 이는 위로 전하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선신(先臣)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황천(皇天)·신명(神明)이 위에서 질정(質正)하고 계시는데, 신이 어찌 차마 이렇게 하겠습니까? 이후부터 그의 원망하는 유감이 날로 더욱 심해져 봉적(鋒鏑)의 독맹(毒猛)이 마디마디 겹쳐 가중되므로 전해오는 말이 해괴하고 패악함을 이기지 못해서 듣는 자들이 모두 신을 위태롭다고 여기니, 신은 문을 닫고 자취를 거두어 영원히 세상에 대한 생각을 끊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종사(宗社)가 날로 위망(危亡)해지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막막하게 깨닫지 못하고 흉적은 더욱 방자하게 날뛰는데도 조정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감히 말을 하지 않으니, 분개하고 통분함을 삭이지 못하고 이에 감히 대강을 들어 죽음을 무릅쓰고 말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9책 119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27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재정-전매(專賣) / 재정-공물(貢物) / 상업-시장(市場)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식생활(食生活) / 의약-약학(藥學)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註 155]병술년 : 1766 영조 42년.
- [註 156]
방달(房闥) : 방의 문지방.- [註 157]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註 158]
초방(椒房) : 왕비(王妃).- [註 159]
사륜(絲綸) : 조칙의 글.- [註 160]
청구(靑丘) : 우리 나라.- [註 161]
노안 비슬(奴顔婢膝) : 노예처럼 비굴하게 아첨함.- [註 162]
주창(主鬯) : 세자를 뜻함.- [註 163]
성애(成哀) : 왕망(王莽)이 천권(擅權)하던 시대의 임금인 한 성제(漢成帝)와 한 애제(漢哀帝).- [註 164]
충질(冲質) : 후한 때 권신인 양기(梁冀)에게 해를 당한 충제(冲帝)와 질제(質帝).- [註 165]
이연(离筵) : 서연(書筵).- [註 166]
○工曹參判金龜柱上疏, 略曰:
不料昨者, 臣之再從弟修撰臣觀柱, 自鄕上來, 送示言事箚本, 臣蹶然驚起, 一遍披讀, 則無論其言之得失, 一篇指要, 多提先臣志事以爲說, 而乃臣之所嘗隱痛於心而未敢發者也。 噫! 爲人子而顧瞻時義, 一味含忍, 使其先人爲國之誠, 闇昧不章於世, 而乃使他人先之, 是則不但不忠於殿下, 又重以不孝於其親。 不忠不孝, 何以爲人? 向在丙戌之春, 聖體違豫, 自正月之初, 始有痰結之候, 至二月之晦, 又添昏眩之症, 水剌全却, 湯劑無效。 以故元氣日減, 漸至澌綴, 當此之時, 救護之方, 專責蔘劑之好否, 此不待醫者之言, 而可知其必然也。 當日臣子之所以盡心於君父者, 捨此而更何爲哉? 伊時先臣, 經月直宿, 晨夕煼痒, 親詣藥院, 見御藥所用之蔘, 則類皆糊鬚附尾, 打扮成片, 一經刀剉, 輒如灰飛。 雖閭巷卑賤, 稍有家貲者, 必不肯入口, 則其無一分眞氣, 而不堪爲御藥之用, 可知也。 先臣心甚駭然之, 問于醫官輩, 則皆以爲, 近來京供之蔘, 例皆如此, 常時湯劑, 皆以此用之。 蓋聞年前, 洪相鳳漢奏除外方之蔘, 換作京貢, 貢人背鳩聚尾蔘之如絲者, 捏合塗附, 名之曰蔘, 而以進於內局。 內局或欲點退, 則鳳漢大聲詬喝曰: "是殺我也, 是故上自提擧, 下至醫官, 心知其非, 而口不敢言也。" 於是先臣言于都提擧臣金致仁曰: "聖上平日久服蔘劑, 當此患候彌篤之時, 苟不另擇好品, 而只以此糊附者進用, 則元氣決無扶接, 何不純用羅蔘, 以收速效耶?" 致仁曰吾意正亦如此。 但首揆不肯, 方此渴悶, 大監言重, 須力言于彼, 期於進用可也。" 先臣遂以其告致仁者, 告于鳳漢, 鳳漢沈吟良久, 漫應曰: "此難繼之道, 不可用也。 先臣曰, 是何言也? 大監若有妻子之病, 當用蔘劑, 則其可以難繼而不救乎? 抑將賣家賣土, 而必期於繼用乎? 況以一國之大, 奉一人之尊, 而顧乃預憂其難繼而不之用耶? 今聖候沈篤, 非羅蔘無以爲力, 一邊取用院儲, 一邊卜定各道, 抑何不可, 亦何持難之有哉?" 鳳漢勃然作色曰: "大監以戚里, 胡乃干預藥院事耶? 先臣噓唏而答曰, 使我干預朝廷, 則誠罪也, 目今聖候若此, 藥院湯劑, 顧不可以與論耶? 自此以後, 逐日爭持, 殆至數旬, 而不相入。 於是計無所出, 或於提擧從容勸諭, 或令醫官合辭贊成, 而鳳漢終不回聽。 如是之際, 聖候漸劇, 元氣日下, 中外遑遑, 罔知攸措, 先臣嘗自筵退, 坐於差備門外, 促臣入見, 執手嗚咽曰, 羅蔘不得用, 而聖候若此, 爲之奈何? 吾將不計禍福, 以死爭之也。 仍鳳漢之來訪直所, 正色言曰, 聖候至於此境, 而羅蔘終不見用, 過此以往, 大監不得辭其責矣。 任意爲之可也, 辭氣俱厲, 涕淚交逬。 彼乃俛首良久曰, 大監之言, 亦然矣。 遂黽勉許用。 而先臣又私求童蔘一根, 納于內局, 煎而進之, 卽三月十九日之夕也。 何幸元陽克回於一夜, 乃瘳告慶於翌朝, 痰眩諸候, 豁然盡祛。 是日父子相對, 舞蹈歡欣, 先臣又慨然謂臣曰, 是固洋洋烈祖, 默佑宗社, 保隲聖躬, 而抑亦皇皇上帝, 降燭凶肚, 潛回造化耳。 早晩彼之罪惡, 自莫逃於淵鑑之下, 則於是名可正矣, 憤可泄矣。 天道孔昭, 有不可誣, 汝其識之, 其言在耳, 歷歷如昨日事矣。 其日夕, 鳳漢與諸相入侍, 手按御脈, 知無變動, 卽地起出, 少無憂慮之色, 顯有自得之意。 此乃入侍注書之所目繫, 而此外是可忍, 孰不忍之事, 非止一二, 國言藉藉, 至今未已, 而事係傳聞, 臣不欲索言。 嗚呼! 殿下何負於鳳漢, 而鳳漢之無將無嚴, 一至此哉? 聖候沈綿之中, 脚氣不調, 運用甚艱, 房闥之間, 不能運步。 先臣以老人大病之餘, 元氣未復, 下部痺弱, 非借酒氣藥力, 無以下敷, 而其時禁令尙嚴, 聖意或者靳許, 故遂言于鳳漢, 使之勸進, 而終無肯意。 旋聞前參議臣洪晟之老父, 久苦脚患, 以松茶見效, 遂邀而問之, 仍爲陳白, 殿下命晟入侍, 詳細下詢, 而終未有發落。 鳳漢時入筵中, 無一言勸進, 退坐閤外, 勵聲大言曰, 主上不飮酒, 尙患激惱頻作, 臣隣澟澟度日, 今進松茶, 吾輩將何以支堪乎? 聞者莫不失色。 其後先臣, 與鳳漢同入問候訖, 先臣故以手扯其掖曰, 可奏其言。 如是者屢, 漫若不聞, 先臣遂大聲曰, 胡不奏松茶事乎? 彼乃不得已漫辭勸進, 則殿下卽許之。 自是脚氣頓勝, 旬日間步屧, 幾至如常, 其時光景, 殿下亦或記有之矣。 惟此二事, 乃鳳漢負犯之最大者, 而羅蔘事, 則殿下漠然不聞, 松茶事則殿下雖略燭其槪, 而猶未得其詳耳。 先臣在世時, 未嘗以此事發諸口, 惟於燕私之際, 對子弟言, 輒撫膺流涕, 掩抑不自勝。 其後鳳漢, 遭其繼母喪, 先臣往唁之, 鳳漢乃出眎其拇指, 誇其所用之蔘, 如許其大者, 凡幾許斤。 先臣歸而歎曰, 渠之繼母, 是何物老嫗, 而乃能服千乘之君所不能服, 而渠之家力, 是何等巨富, 而乃能繼國力之所不能繼耶? 天下萬古, 寧有如許世界耶? 吾則精神已瘁, 無復久斯世也, 噫! 我四百年宗社, 必覆於此人之手。 蓋此數款, 乃先臣志事之所在, 而緣臣不肖, 泯沒無聞, 心常痛焉。 今因事會之發, 得以一陳於殿下之前, 自今以後, 雖卽地滅死, 庶無餘憾矣。 噫! 先志旣明, 私義粗伸, 則宜無餘言, 可以及他, 而若其所謂搖動國本之說, 是係宗社之存亡, 儲君之安危, 則臣又安得不一言以明之哉? 嗚呼! 壬午之事, 卽聖上爲宗社大處分, 而斷自宸衷, 赫如日星, 凡在臣隣, 孰不欽仰? 而若鳳漢之所以奉承者, 何嘗如古大臣臨難不奪之節哉? 直不過怵畏死生, 乘時彌縫耳。 其後時月稍久, 凶計層生, 包藏禍心, 反覆顚倒。 始乃唱出追崇入廟之議, 顯言恐喝, 波動一世, 人心驚惑, 中外荷擔, 識者之癙憂竊歎, 蓋已久矣。 惟我春宮邸下, 姿質英特, 學識明透, 伏想於此, 有以知其所處, 而鳳漢敢以小人之腹, 妄度貳聖之心, 自謂吾言可行, 吾志可成。 年前私覿東宮也, 乃發日後翻案之論, 敢售面前脅持之謀, 春宮邸下, 深察其奸, 不動聲色, 沈默不言, 顯示嚴斥之意, 鳳漢不勝恚憤, 遂出不道之說曰, 邸下若不聽吾言, 則當如是如是者, 卽搖動國本之說也。 渠雖忍能言之, 臣何敢騰諸筆舌也? 顧此一言, 係是宮中語, 宜若秘諱不傳, 而出自戚里之家, 播諸搢紳之間, 聞者吐舌, 相顧色沮。 臣亦椒房近屬, 有耳得聞, 心顫骨靑, 不能自已。 至今不爲殿下一言者, 蓋緣有所掣礙, 而若論其罪, 臣亦無以自贖也。 嗚呼! 殿下者, 宗社之主也, 春宮者, 貳儲之君也。 前後絲綸, 每有一隅靑丘, 祖依孫孫依祖之敎, 苟有人心, 孰不感泣? 而彼鳳漢者, 在殿下爲元輔也, 春宮爲外戚也, 抑獨何心, 仇讎我殿下, 抑遏蔘茶之進用, 危逼我春宮, 動搖宗國之根本乎? 爲人臣者, 有此負犯, 則宜不得一日容息於覆載之間, 而至今戴頭無恙, 偃伏城闉者, 天道茫茫, 臣莫之究也。 惟其十年秉軸, 勢成威立, 操縱舒慘, 惟在其手, 與奪生死, 一任其意。 一時之卿士大夫, 風靡影從, 奴顔婢膝, 稍欲自好者, 又皆重足憟股, 惟恐獲罪, 似此氣象, 蓋非一朝一夕之故也。 顧今灰死世界, 豈有一分陽氣, 而但所同者人心, 不泯者公議, 雖以薰天之勢, 猶有防川之憂, 則俄頃之間, 又造爲保護東宮之說, 以眩惑人心, 以脅制公議。 其言曰, 我東宮之外祖也, 苟有害我之心者, 是不利於東宮也。 噫! 是何言也? 東宮邸下, 處宗社主鬯之位, 係億兆延頸之望, 凡有秉彝, 莫不愛戴, 則是豈一鳳漢之所得以私之哉? 苟如鳳漢之言, 則是誅王莾者, 不忠於成、哀, 而討梁冀者, 不利於沖、質也, 以是爲言, 其可以服衆人之心, 而鉗一辭之口乎? 夫必知其言不順事不成, 而猶爲之者, 是無他耳, 渠旣以不道之說, 敢發於离筵, 屋話播傳, 巷議沸騰, 惟恐此事一發, 大辟難逭, 故遂出萬不近理之言, 以爲先發制人之計。 若使知其事者聞之, 則不啻如見其肺肝, 而適露其奰慝之態, 誠不滿一哂也。 近日以來, 聖上深軫世道之憂, 痛戒偏黨之習, 處分之際, 略示好惡, 則渠乃鰍舞雀躍曰, 乘此機會, 可以網打矣。 彼庸庸碌碌中無所主者, 隨其指揮, 聽其頤使, 鳳漢之所嘗不悅者, 目之爲黨人, 架虛鑿空, 指無爲有, 上以眩亂天聽, 下以嚇動一世, 東西闔捭, 左右閃弄, 如鬼如蜮, 莫測端倪。 似此不已, 則殿下之喬木世臣故家名族, 將無一人倖免者, 未知殿下誰與爲國? 嗚呼! 臣家與鳳漢, 本無恩怨, 而論其地處, 則略相同也, 夫豈有一毫相失之意哉? 第自某年以前, 視其所以, 觀其所由, 則專是背公循私, 惟事貪權樂勢。 先臣內雖不平, 外示羈縻, 及至丙戌以後, 又未嘗疾首痛惡, 而惟一向假借, 不露(幾)〔機〕 微者, 豈獨爲一鳳漢哉? 誠以事機未著, 嫌隙先生, 則非但臣家立就湛滅, 抑恐聖躬未保安危, 故十年前席, 欲吐未吐, 徒抱耿耿, 齎恨而沒, 臣之隱痛, 實在於此。 然猶忍憤含冤, 以有待焉, 昨年之秋, 處分遽下, 絲綸嚴正, 特施庶人之律。 忽一日鳳漢之弟龍漢, 來見臣, 語及當日處分, 乃敢變亂聖敎, 顚倒事實, 隱然歸聖躬於䵝昧罔測之域, 處其兄於光明純粹之地。 臣始則愕然, 終以憤惋, 誦傳其時傳敎, 字字分析, 句句明辨, 龍漢終不以爲然, 臣嚴辭切責而退之, 其後聞龍漢此說, 播行於世, 日新月盛。 而又聞鳳漢自言其時所爲, 茫然未記, 噫! 是以王言爲做出虛無, 以誣其身也。 臣初聞其說, 未之深信, 居數日駿漢又來言曰: "我兄雖無是事, 而聖敎旣謂之有, 則亦復奈何?" 然則其意所在, 的然可知, 而傳聞之說, 果不虛矣。 臣不勝痛惋, 於是因龍漢之再訪, 據理責之曰, 君家所爲旣如此, 則吾輩不可苟合, 而休戚之誼, 不得復保, 遂引義告絶。 噫! 彼鳳漢漫漶義理, 誣捏聖躬, 至於此極, 而臣若依違顧瞻, 畏其權勢, 徒保平日戚家之誼, 則是上負殿下, 下負先臣也。 皇天神明, 質之在上, 臣豈忍爲此哉? 自是厥後, 彼之怨憾, 日以益深, 毒鋒猛鏑, 節節層加, 傳來之言, 不勝駭悖, 聞者莫不爲臣危之, 臣杜門斂跡, 永絶世念。 而獨想夫宗社日就危亡, 而殿下漠未省悟, 凶賊益肆猖狂, 而朝臣無一敢言, 慨憤痛迫, 銷鑠不得, 玆敢略擧梗槪, 昧死言之。
- 【태백산사고본】 79책 119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27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재정-전매(專賣) / 재정-공물(貢物) / 상업-시장(市場)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식생활(食生活) / 의약-약학(藥學)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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