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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118권, 영조 48년 4월 10일 을해 1번째기사 1772년 청 건륭(乾隆) 37년

북한산성의 행궁에 나가 시단봉에 오르다

임금이 북한산성(北漢山城)행궁(行宮)에 나아가 시단봉(柴丹峰)에 올랐다가, 날이 저물어 환궁(還宮)하였다. 북한산성은 도성의 북쪽에 있는데, 산이 높고 험준하고 가파라서 성궁(城宮)을 쌓아 진양(晉陽)102) 의 불우(不虞)에 대비하게 하였었다. 옛날 임진년103) 4월에 우리 숙묘(肅廟)께서 어가(御駕)를 타고 임어하여 친히 살펴보신 적이 있었는데, 이날 동가(動駕)한 것은 추모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해(南海)·거제(巨濟)·웅천(熊川)에 사는 백성들이 해물과 생선을 채취하여 먹고 혹 중독되어 죽기에 이른 것을 도신이 장문(狀聞)하니, 어주(御廚)에 지공(支供)하지 말고, 백성들이 채취해서 먹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9책 118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1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법-법제(法制) / 보건(保健) / 수산업-어업(漁業)

  • [註 102]
    진양(晉陽) : 국가가 위급할 때 대피할 수 있는 보장지(保障地)를 가리킴. 전국 시대 초기에 조간자(趙簡子)가 일찍이 윤탁(尹鐸)을 진양에 부임시켜 관대한 정치로 민심을 무마시켜 놓았는데, 뒤에 조간자의 아들 양자(襄子)가 지백(智伯)에게 쫓기게 되자 진양으로 들어가 회복의 터전을 삼고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었음.
  • [註 103]
    임진년 : 1712 숙종 38년.

○乙亥/上詣北漢行宮, 登臨柴丹峰, 日暮還宮。 北漢在都城北, 山高險巇, 築城宮以備晋陽之虞。 在昔壬辰四月, 我肅廟駕臨親審, 是日動駕, 蓋出於追慕也。 南海巨濟熊川居民, 採食海鮮, 或中毒至死, 道臣狀聞, 勿供御廚, 禁民採食。


  • 【태백산사고본】 79책 118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1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법-법제(法制) / 보건(保健) / 수산업-어업(漁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