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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118권, 영조 48년 1월 7일 계묘 2번째기사 1772년 청 건륭(乾隆) 37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대신의 기풍에 관한 일 등을 하교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의 흥체(興替)는 이목지신(耳目之臣)015) 에 관계되니, 먼저 고사(古事)로 유시하고 다음에 오늘날의 폐단으로 유시하는 것이 옳겠는가? 한 중관(中官)이 택수재(澤水齋)의 역사(役事)를 보살필 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고 한 상한(常漢)이 혼취(婚娶) 때에 비단 휘장[羅帷]을 만들었으므로, 장령 정동후(鄭東後)가 탄핵(彈劾)하였다. 나의 배리(陪吏)는 털모자로 인하여 한 대신(臺臣)이 과치(科治)016) 하였으며, 한 도위(都尉)는 순라 패장(巡邏牌將)을 추치(推治)하였는데 대신(臺臣)이 탄핵하였었다. 그리고 풍원(豊原)017) 은 대간이 되었을 때 늙은 중관이 남여(藍輿)를 타고 꽃을 구경하였다고 탄핵하였으니, 옛날 대신(臺臣)들은 기풍이 이와 같았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진실로 경박하고 조경(躁競)하는 자가 아니면, 비록 보고서도 눈을 감고 비록 듣고서도 귀를 가리며 거의 경칙(警飭)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그 임금이 이목지신에게 내려 행하는 일이 있어도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나라가 망하지 않고 어찌 되겠는가?"

하였는데, 대사헌 엄숙(嚴璹)이 아뢰기를,

"정조(正朝)에 향을 지영(祗迎)하였을 때 성상께서는 나아가 판위(板位)에 임하셨는데도 헌관(獻官)이 오히려 정돈하여 기다리지 않았으니, 일의 미안(未安)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해조(該曹)에서 잘 거행하지 못한 소치이니, 작년 이후 차제(差除)한 전관(銓官)은 일체 아울러 파직(罷職)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호조 참의 이정중(李廷重)은 인망(人望)과 지망(地望)이 선직(選職)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은 일세(一世)의 공의(公議)입니다. 일찍이 장통(掌通)018) 되었을 때에도 개정(改正)했었지만, 은대(銀臺)019) ·지부(地部)020) 는 진실로 그의 직임(職任)이 아니며, 물정(物情)도 알맞게 여기지 않으니,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심관(沈鑧)이 아뢰기를,

"군향(軍餉)을 저축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엄중한데, 서로(西路)에 이르러서는 다른 도에 견주어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일전에 관서(關西)의 수신(帥臣)이 전 병사(兵使)가 발매(發賣)하여 입본(立本)한 일을 비국에 논보(論報)한 바가 있습니다. 전 수신이 범금(犯禁)한 것이 과연 이와 같다면, 즉시 장문(狀聞)하지 않고 단지 품보(稟報)만 한 것은 구간(苟簡)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본 사건은 끝내 감추어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병사 구현겸(具顯謙)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전 병사 이은춘(李殷春)은 잡아다 추문하여 무겁게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 수신(帥臣)의 일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공사(供辭)를 가지고 등대하여 아뢰게 하고, 시임 수신은 추고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으니, 특별히 서용(敍用)하지 않는 전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밀양 부사(密陽府使) 황인겸(黃仁謙)은 정사에 어지러운 일이 많아도 전혀 일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전후의 전최(殿最)021) 에서 두 차례나 중등에 들었으니, 다스리지 못하는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감찰(監察)은 곧 옛날의 어사(御史)로서 직임이 가볍지 않은 것인데, 근래에 전조(銓曹)에서 신중하게 가리지 않는 일이 많아 무과(武窠) 가운데 부망(副望)과 말망(末望)에 비천한 무리를 천거해서 간혹 외람되게 섞이는 경우가 많아 동료 관원들이 동등한 반열에 드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정사에서 새로 차출된 사람으로 서경(署經)022) 의 기일을 넘겨 태거(汰去)된 자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관방(官方)의 뒤섞여 어지러운 것을 어떻게 한심(寒心)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특별히 전조에 신칙하셔서 이제부터는 각별히 가려 뽑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겠다. 전관은 엄중히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9책 118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06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병참(兵站)

  • [註 015]
    이목지신(耳目之臣) : 대간(臺諫).
  • [註 016]
    과치(科治) : 법률에 비추어 죄를 다스림.
  • [註 017]
    풍원(豊原) : 조현명(趙顯命)의 봉호.
  • [註 018]
    장통(掌通) :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뽑을 때 후보자 세 사람 가운데 들어 추천되는 일.
  • [註 019]
    은대(銀臺) : 승정원.
  • [註 020]
    지부(地部) : 호조.
  • [註 021]
    전최(殿最) : 조선조 때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상·하로 평정하던 법. 상(上)이면 최(最), 하(下)이면 전(殿)이라 한 데에서 나온 말로, 경관(京官)은 각 관사의 당상관·제조 가, 외관(外官)은 관찰사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등제(等第)를 매겨 계문(啓聞)하였음. 사헌부·사간원·세자 시강원은 등제가 없었음.
  • [註 022]
    서경(署經) : 서경은 고신 서경(告身署經)과 의첩 서경(依牒署經)으로 크게 나뉘는데, 의첩 서경은 정부의 의안이나 법의 개정에 대해 대간(臺諫)이 서명하여 동의를 표하는 것이고, 고신 서경은 관리를 임명하라는 명이 내리면 전조(銓曹)에서 당사자의 성명, 내외 사조(內外四祖), 처사조(妻四祖)를 기록하여 대간에게 가부(可否)의 의견을 요구하고, 대간은 하자의 유무를 조사하여 하자가 없을 경우 서명하여 동의를 표하는 것임. 50일 이내에 서명하지 않으면 취소됨.

○上御集慶堂, 藥房入診。 引見大臣備堂, 上曰: "國之興替, 係於耳目, 先諭古事, 次諭今弊可乎? 有一中官澤水齋看役時, 令人吹笛, 有一常漢於婚娶, 爲羅帷, 故掌令鄭東後彈劾之。 予之陪吏, 因毛帽而一臺臣科治, 一都尉推治巡邏牌將, 而臺臣彈劾。 豐原爲臺時, 以老中官乘藍輿賞花彈劾, 在昔臺風如此。 近來苟非浮囂躁競者, 則雖見而合眼, 雖聞而掩耳, 略無驚飭。 故其君有下行耳目之事, 若此不已, 國不亡而何?" 大司憲嚴璹啓曰: "正朝香祗迎時, 自上出臨板位, 而獻官猶不及整待, 事之未安, 莫此爲甚。 此實該曹不善擧行之致, 昨年後差除銓官, 一竝罷職。" 又啓: "戶曹參議李廷重, 人地之不合選職, 卽一世公議。 曾爲掌通, 亦被改正, 銀臺地部, 實非其任, 物情未允, 不可仍置。" 上幷從之。 大司諫沈鑧啓曰: "軍餉儲置, 事體甚嚴, 而至於西路, 比他道尤重。 日前關西帥臣, 以前兵使發賣立本事, 有論報備局。 前帥犯禁果如是, 則不卽狀聞, 只爲稟報, 未免苟簡。 本事終不可掩置, 請兵使具顯謙從重推考, 前兵使李殷春拿問重勘。" 上曰: "前帥臣事, 令該府持供登對以奏, 時帥臣不可推考而止, 特施不敍之典。" 又啓: "密陽府使黃仁謙, 政多憒憒, 全不事事, 前後殿最, 兩次居中, 則其不治可知, 請罷職。" 上從之。 又啓: "監察卽古之御史, 爲任不輕, 近來銓曹, 多不愼擇, 武窠中副末薦卑微之類, 間多猥廁, 僚員羞與等列。 今政新差之人, 至有越署見汰者, 官方之淆雜, 寧不寒心? 請另飭銓曹, 自今各別擇差。" 上曰: "依啓, 銓官重推。"


  • 【태백산사고본】 79책 118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06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병참(兵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