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손이 여러 날 음식을 폐하자 11일에 경현당에서 진연을 행하게 하다
빈청에서 또 아뢰어 진연을 청하였다. 왕세손이 또 상소하기를,
"신이 연달아 글을 올려 누누이 간청하여 천청(天聽)을 돌이키시기를 바랐으나, 비답을 받음에 이르러 윤허를 내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빈청에서 아뢴 데 대한 비답을 엎드려 보건대 사연(辭緣)이 지성스럽고 간절하시니, 신은 진실로 당황스럽고 두려워 애가 탔으며, 곧이어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성상의 추모하는 효사(孝思)를 신이 어찌 우러러 본받지 않겠습니까마는, 그윽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계해년267) 에도 또한 이 예를 행하였는데, 그때에 전하의 굳은 마음으로서 뭇 신하의 청을 애써 따르신 것은 곧 옛날의 뜻을 이어받으신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지금에는 성상의 춘추가 이미 높으시어 이 예를 응당 행하는 것은 더욱이 그때에 비할 바가 아니니, 그러한즉 전하께서 소손의 간절함을 힘써 좇으심이 또한 옛날의 뜻을 우러러 본받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추모함을 가지고 하교하시지만, 신은 생각건대 추모의 도리는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절박한 정리에 견디지 못하여 감히 다시금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정리를 어여삐 여기시고 신의 청을 허락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손수 써서 비답하기를,
"네 할아비의 마음은 오늘 한 갑절 더하다. 마땅히 시좌(侍坐)할 때에 유시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시좌토록 하고, 빈청 2품 이상을 모두 경현당에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세손이 여러 날 음식을 폐하고 있음을 근심하여 비로소 술잔 받기를 허락하고, 11일에 경현당에서 진연(進宴)을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무릇 모든 의식과 절차는 검소하고 절약하는 데 힘쓰도록 하였다. 대개 경현당은 곧 기해년268) 에 잔치를 내린 구당(舊堂)이었다. 임금이 태강(太康)269) 을 경계하는 악장(樂章) 4구(句)를 지어 악공에게 익히도록 명하였다. 유밀과와 단술[醴酒]을 베풀지 말고 꿀물로 대신하며, 어찬(御饌)은 열 그릇을 넘지 않게 하고, 여러 신하의 경우는 다섯 그릇을 넘지 않게 하며, 구작(九爵)의 예는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세손·대신·국구·의빈, 종친부·충훈부의 유사 당상, 9경(卿)이 각기 일작(一爵)씩 올리고, 참석한 여러 신하에게는 각기 일배(一盃)씩 내리되, 입참(入參)할 사람은 대신·국구·의빈, 기로사의 여러 신하, 종신(宗臣) 문무 1품 이상, 육조·경조의 장관, 비변사 당상, 충훈부 유사 당상, 여섯 승지, 여러 한림, 시임 옥당, 양사와 시위, 세손 배위관·계방 관원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논하지 말게 하였으며, 시위는 운보검(雲寶劍)에 도총부(都摠府)와 병조(兵曹)의 당상 낭청 각 2원(員)씩 하도록 하였다. 진작(進爵)은 은잔(銀盞)을 쓰고 사배(賜盃)는 사잔(砂盞)을 쓰되 주원(廚院)270) 에서 취하여 쓰며, 선전관(宣傳官)과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 각 5인을 입참케 하니, 무릇 잔치에 참여한 자가 1백 19인이고, 어제와 어필을 받은 자가 67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잔치가 아니니, 내외연(內外宴)의 명칭을 가히 논할 바가 아니며, 또한 구작의 예도 없거늘, 지난번 기묘년271) 효소전(孝昭殿)에 아뢰어 가례(嘉禮)를 행할 때에 어찌 오늘이 있을 줄 알았겠는가? 하물며 가례의 해를 헤아리니 곧 7년째이고, 나 또한 7순인데, 세손의 정리로써 어찌 단지 나에게만 술잔을 올리겠는가? 반드시 궐내에서 찬구(饌具)를 간략하게 베풀어야 한다. 만약 내외연을 행하면 마땅히 양일(兩日)을 분배해야 하는데, 이는 하루 안에 겸행하면 형식(形式)은 줄이고 예(禮)는 갖춰지게 되니,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것은 마땅히 궐내에서 할 일인데,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억울하게 여기는 자가 있을 것이므로 이같이 하교하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 잠화(簪花)를 제거하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에게 하교하기를,
"네 할아비는 잠화를 꽂지 않았는데 너만 유독 잠화를 꽂았으니, 네 마음에 편안한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소손을 위하여 성상께서도 잠화를 꽂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잠화를 꽂고 싶어서 도리어 할아비에게 잠화를 꽂도록 청하니, 이는 곧 옛날 노래자(老萊子)가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뜻272) 이라, 정성과 효성이 이와 같으니, 내가 마땅히 힘써 허락하겠다."
하고, 이어서 잠화 꽂기를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1책 10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207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정론-정론(政論) / 예술-음악(音樂)
- [註 267]계해년 : 1743 영조 19년.
- [註 268]
기해년 : 1719 숙종 45년.- [註 269]
태강(太康) : 너무 즐기는 것.- [註 270]
주원(廚院) : 사옹원의 별칭.- [註 271]
기묘년 : 1759 영조 35년.- [註 272]
노래자(老萊子)가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뜻 : 노래자는 초(楚)나라의 현인(賢人)이며, 중국의 24효자 가운데 한 사람임. 나이 70세에 어린애의 옷을 입고 어린애 같은 장난을 하여서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는 고사.○丙午/賓廳又啓, 請進宴。 王世孫又上疏曰: "臣連章屢懇, 冀回天聽, 及奉批旨, 不賜允許。 且伏見賓啓之批, 辭旨諄懇, 臣誠惶悶焦迫, 繼以感涕也。 惟我聖上追慕之孝思, 臣豈不仰體? 而竊伏念癸亥年, 亦行此禮, 其時以殿下之固心, 勉從群下之請者, 乃所以奉承昔年之志也。 況今聖壽彌高, 此禮之當行, 尤非其時之比, 則殿下勉循小孫之懇者, 亦所以仰體昔年也。 殿下以追慕爲敎, 而臣則以爲追慕之道, 實在於此也。 衷情所迫, 敢復冒陳, 伏乞聖上, 憫臣之情, 許臣之請, 千萬幸甚。" 上手書答曰: "爾祖之心, 今日一倍。 當諭於侍坐時矣。" 上命王世孫侍坐, 賓廳二品以上, 幷命入侍于景賢堂。 上以世孫屢日廢食, 憂念之, 始許受爵, 命以十一日, 行于景賢堂, 凡諸儀節, 務從節省。 蓋景賢, 卽己亥鍚宴之舊堂也。 上親製戒太康樂章四句, 命樂工習之。 命勿設油蜜果醴酒, 代以蜜水, 御饌毋過十器, 諸臣毋過五器, 九爵之禮, 非可論。 世孫大臣國舅儀賓宗親勳府有司堂上九卿, 各進一爵, 進參諸臣則各賜一盃, 而入參人則大臣國舅儀賓耆社諸臣宗臣文武一品以上, 六曹京兆長官, 籌司堂上, 勳府有司堂上, 六承旨諸翰林, 時任玉堂兩司侍衛, 世孫陪衛官桂坊官員, 餘皆勿論, 侍衛則雲寶劎摠府騎曹堂郞各二員。 進爵用銀盞, 賜盃用砂盞, 而取用廚院, 宣傳官武兼各五員入參, 凡參宴者一百十九人, 受御製御筆者六十七人。 上曰: "此非宴也, 內外宴之名, 非所可論, 亦無九爵之禮, 而頃者己卯年, 奏孝昭殿, 行嘉禮時, 豈知有今日? 況計嘉禮之年, 卽七年也, 予亦七旬也, 以世孫之情, 豈只奉爵於予? 必也自內略設饌具。 若行內外宴, 當分排兩日, 此則二日之內當兼行, 省文禮備, 不亦美乎? 此當自內爲之者, 而諸臣必有抑鬱, 如是下敎焉。" 上始命除簪花, 敎世孫曰: "汝祖不簪花, 而汝獨簪花, 於汝心安乎?" 世孫對曰: "然則爲小孫, 聖上亦不可不簪花也。" 上笑曰: "渠欲簪花, 反請其祖之簪花, 此乃古老萊斑衣之意也。 誠孝如此, 予當勉許之。" 仍命許簪花。
- 【태백산사고본】 71책 10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207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정론-정론(政論) / 예술-음악(音樂)
- [註 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