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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 8월 2일 신사 4번째기사 1764년 청 건륭(乾隆) 29년

제사 비용을 줄이는 것에 대한 김응순과 조엄의 상소

좌승지 김응순(金應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월대(月臺)의 강하는 자리에 참여하여 직접 도움되는 말을 구하는 하교를 받들었는데, 정녕 말씀이 간곡하여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격동되어 감히 우(虞)나라와 하(夏)나라의 뭇 신하들이 서로 권면하는 말로 전하께 한번 외어 드렸습니다. 그러고 물러나 신료들을 따라가 정원의 의계(議啓)에 참여하였습니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제수(祭需)를 줄여 정한 것은 옛날의 관례가 아니라고 여겨 예를 인용하여 말씀드리려고 한 자가 있었으나, 그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그 논의가 정지되고 말았는데, 신의 미혹(迷惑)한 견해에 크게 잘못되었다는 점을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우연히 고 참판 신(臣) 한성우(韓聖佑)묘도 문자(墓道文字)219) 를 보았는데, 선왕조에서 제수를 줄여 정하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한성우가 의논을 드리면서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지금 큰 계획을 세우지 못해 위아래에 쓸데없이 드는 경비를 모두 감하거나 혁파함에 있어 먼저 제수를 감한다는 것은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반도 채 살피지 못하고 무연(憮然)히 두렵고 황연(怳然)히 깨달아 자기 스스로 속으로 말하기를, ‘고인이 임금을 섬길 때에 일마다 주자의 글을 인용하여 예를 잃지 않기를 기필하였다. 그런데 신과 같은 불초한 자는 견식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여 그 말할 기회를 잃었으니, 만약 오늘날 이것을 보지 못하였다면 정론(定論)을 뒤흔드는 사람이 될 뻔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의 마음을 저버린 것이니, 어찌 묵묵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 국가를 부유하게 하는 길은 절약해서 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감해야 할 것을 감하지 않는다든지 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감하는 것은 모두가 절약하는 요령이 아닌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감해야 될 위아래의 쓸데없는 경비를 어찌 태상시에서 감하는 데에 그치고 말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 정한 제수는 매우 적당하게 정해졌으므로 다시 논의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대체로 일국의 부유함으로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려고 한다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그 당시 여러 신하들이 예전(禮典)을 참고하여 정식(定式)으로 만든 것입니다. 지금 절약한다는 뜻에서 갑자기 다식(茶食)과 다과(茶果)의 수량을 줄이고 또 진말(眞末)220) 을 몇 말 줄이고 유청(油淸)을 몇 되 줄인다 하더라도, 줄이는 양은 몇 말 몇 되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1년의 공가(貢價)로 계산해 보더라도 2천 석에 불과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당한 천승의 나라로서 어찌 2천 석을 줄이기 위해 대뜸 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각 관아에서 드는 쓸데없는 경비로 말하더라도, 기성(騎省)221) 위소(衛所)의 군가(軍價)가 얼마나 되는지 살피지 못했고, 군문(軍門)의 군색(軍色)을 대여해 준 것을 금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탁지의 잡물색(雜物色)과 선혜청의 원잉미(原剩米)들이 모두 남용되고 있으며, 이외에도 미려(尾閭)의 누설이 되는 것들이 몇 천만이 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로 미루어 계산하여 궁중과 부중에서 꼭 써야 될 것들만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모조리 감하거나 혁파하여야 됩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오히려 여전히 지탱해 나가지 못할 경우에는 백관의 녹봉을 감해도 되며 지방 관원의 녹봉을 감해도 됩니다. 이렇게 하고도 또 유지해 나갈 수 없을 경우에는 이모저모로 깊이 생각해 보면 별도의 방도가 없지 않을 것인데 이렇게 매우 구차스러운 일을 한단 말입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고전(故典)대로 회복하게 하소서."

하였다. 한성 좌윤 조엄(趙曮)이 또 상소하여 이 문제에 대해 잇따라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수를 고쳐 바로잡는 것은 진실로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애당초 위아래의 의논이 비록 고르지 않은 것을 고르게 하고 규정 외의 낭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나왔으나, 필경에 고쳐 바로잡는 것이 감하기만 하였지 더해진 것은 없고 풍성하게 하려 했으나 풍성해진 점을 볼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이정(雅正)할 즈음에 털끝만큼이라도 구례에 위배된다면 사전(祀典)을 중히 하는 도리에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제수 가운데 척기(尺器)가 같지 않다는 이유로 감하고 변두(籩豆)가 남는다는 이유로 감했다고 하는데, 이는 정말 미안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능침(陵寢)의 기신제(忌辰祭) 때에 다식(茶食) 다섯 그릇을 전부 감하였으니, 오례(五禮)의 도식(圖式)으로 볼 때에 어찌 크게 위배되지 않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국가의 경비를 곳에 따라 삭감할 수 있다 하더라도 미려(尾閭)의 누설과 남상(濫觴)222) 의 폐단을 일일이 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왕 다 막을 수 없다면 이는 주자가 ‘먼저 제수를 감함은 미안하다.’고 말한 것이며, 《예기(禮記)》에 ‘제사의 비용은 1년의 경비 중 10분의 1을 쓴다.’고 한 것이고 또 ‘제사는 풍년이라고 하여 사치하게 지내지 않으며 흉년이라고 하여 검소하게 지내지 않는다.’고 한 것인데, 옛날 성왕(聖王)의 사전(祀典)은 대체로 후한 쪽을 따랐으며 바꿀 수 없는 규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성에서 우러난 전하의 큰 효성과 신명을 감동케 할 수 있는 지성으로 어찌 사전이나 의절에 혹시라도 위배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전례를 널리 상고하여 지당(至當)한 데 돌아가도록 힘쓰게 하소서."

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이 또 차자를 올려 변론하였다. 임금이 김응순의 상소한 의논이 공물인(貢物人) 무리들이 근거없는 말을 하게 동요시켰다는 이유로 그의 직책을 체차하고, 아울러 태상시 및 전생서 공물인들을 먼 곳에 귀양보냈다. 얼마 안되어 이들을 방면하고 이어서 태상시의 제수와 다식 다과를 옛날과 같이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아! 근본에 보답하고 선조를 추모하는 성상의 정성에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 제수를 줄이는 것을 임금의 과실로 삼을 수 없다. 그런데 일을 맡은 신하들이 절약하는데 급급하여 경중을 참작하지 않은 채 갑자기 제수를 줄이는 것을 의논하였으니, 어찌 김응순·조엄과 같은 사람의 말이 없겠는가? 그리하여 심지어는 죄없는 공물인으로 하여금 귀양가는 형률을 받게 함으로써 결국 지나치게 처분을 내리게끔 하였다. 그러나 필경에 제수를 옛날처럼 회복한 것은 그들의 말로 말미암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 【태백산사고본】 70책 104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75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재정-국용(國用)

  • [註 219]
    묘도 문자(墓道文字) : 묘갈(墓碣)·묘비(墓碑)·묘지(墓誌)및 묘표(墓表) 등에 새겨 넣은 글자.
  • [註 220]
    진말(眞末) : 찹쌀가루.
  • [註 221]
    기성(騎省) : 병조.
  • [註 222]
    남상(濫觴) : 사물 발생의 첫 출발. 기원(起原). 양자강(楊子江)같은 큰 강도 그 근원은 술잔을 넘을 한한 세류(細流)에서 시작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사치(奢侈)가 점점 커져가는 것을 말함.

○左承旨金應淳上疏, 略曰:

"臣於月臺, 叨陪法講, 親承求助之下敎, 丁寧懇惻, 自不覺寸忱之倍激, 乃敢以 群臣交勉之語, 爲殿下一誦之, 退而隨僚臣後, 參院議之啓, 以太常之減定享需, 謂非古例, 有欲援禮以陳者, 而其間自有參差之見, 議遂寢焉, 臣之迷見, 不知其爲大失矣。 偶於日昨, 伏見故參判臣韓聖佑墓道文字, 則先王朝有減定享需之議, 而聖佑獻議, 引朱子之說曰, ‘今不能大計, 上下冗費, 悉行減罷, 而先減享需, 豈不未安,’ 臣看未半, 憮然而懼, 怳然而悟, 私竊自語於心曰, ‘古人事君, 尙能動引朱書, 期不失禮, 如臣無似, 乃反識未及此, 失其可言, 若使此日, 不得見此, 則幾乎爲沮撓定論之人也,’ 臣旣知其誤了, 而終又不能一言, 則是負臣心也, 豈可泯默而已乎? 噫! 裕國之道, 莫先於節用, 而當減而不減, 不當減而減, 俱未得爲省約之要, 則顧今上下冗費之可減者, 豈但止於太常之所減? 而伏況我朝享需所定, 至爲的當, 無容更議, 蓋以一國之富, 欲致隆於享祀之典, 則夫豈有限節乎? 此當日諸臣之所以參攷禮典, 著爲定式也。 今以節省之意, 遽減茶食茶果之數, 眞末而減幾斗, 油淸而減幾升, 所減不出於數斗數升, 而計除其一年貢價, 亦不過二千石云, 則夫以堂堂千乘之國, 豈可爲二千石而遽減其不當減也? 雖以各司冗費言之, 騎省之衛所軍價, 不能察也, 軍門之軍色貸下, 不能禁也, 度支之雜物色, 惠廳之原剩米, 率皆歸於濫用, 而此外尾閭之洩, 可合査減者, 不知其爲幾千萬, 推是而計, 至於宮中府中, 只存其不得已者, 餘悉減罷, 此猶不可支過, 則百官之祿俸可減也, 各邑之廩料可減也, 如是而又患難繼, 則長慮却顧, 豈無別般道理, 而乃爲十分苟簡之擧乎? 願殿下, 更命廟堂稟議, 以復故典焉。" 漢城左尹趙曮, 又上疏繼論之, 其疏略曰:

"享需之校正, 固知聖意之攸在, 而當初上下之論, 雖出於欲齊其參差不齊而已, 欲節其格外濫費而已, 畢竟校正者, 只有減而無所加, 欲其豐而未見豐。 苟於釐正之際, 一毫有違於舊例, 則於重祀典之道, 何如也? 伏聞享需中, 以尺器之不同而減之, 籩豆登之有餘而減之, 固已未安, 況陵寢忌辰祭時, 茶食五器則竝全減之, 其視五禮圖式, 豈不大違也? 顧今國家經用, 果能隨處減削, 尾閭之洩, 濫觴之弊, 一一盡防乎? 旣未能盡防, 則此朱夫子所謂‘先減享需, 爲未安’者也, 《禮記》曰, ‘祭用數之仂’, 又曰, ‘祭豐年不侈, 凶年不儉’, 終古聖王之祀典, 蓋有從厚之義, 不易之規, 以殿下出天之大孝, 格神之至誠, 豈或有違於祀典儀文之間乎? 乞命禮官, 博攷典禮, 務歸至當焉。" 領議政洪鳳漢又陳箚辨之, 上以應淳疏論, 動於貢人輩浮言, 遞其職, 竝竄太常及典牲署貢物人等于遠地, 尋卽放之, 仍命復太常享需茶食果。 噫! 聖上報本追遠之誠, 無所間然, 則非敢以省減享需, 爲君上之過也。 任事之臣, 急於節省, 不量輕重, 遽議省減, 安得無金應淳 趙曮之言? 而至使無罪之貢人, 反被刑配之律, 終不免處分之過當。 然畢竟享需之復舊, 則未必不由於其言也。


  • 【태백산사고본】 70책 104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75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재정-국용(國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