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 진전에 아뢴 글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지알(祗謁)하였는데, 왕세손이 그대로 따랐다. 행례를 마치고 재전(齋殿)에 돌아와 시임·원임 대신과 2품 이상, 삼사(三司) 관원을 불러 모두 전정(殿庭)에 모이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종국(宗國)을 위하여 처분할 일이 있어 이미 진전(眞殿)에 아뢰었다."
하고, 이어 아뢴 글을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다. 거기에 이르기를,
"소신(小臣)이 주야로 품고 있는 자그마한 정성은 바로 추모하는 마음입니다. 근래에는 더욱 간절하던 차 천만 뜻밖에 또 금년을 맞게 되니, 멀리 서쪽 구름을 바라보고 단지 용어(龍馭)047) 를 따르고 싶은 생각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신색(神色)과 용모가 그래도 이만한 것은 재작년 중하(仲夏) 이후로 종국을 위하여 심중에 죄이던 것이 조금은 풀렸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 속에 울결(鬱結)한 바가 있는 것은, 세상 일은 헤아리기 어렵고 관계된 바도 지극히 중한데 이렇게 어물어물하고 세월만 보내다가는 뒤늦게 후회한들 어떻게 미치겠습니까? 또 꿈속에서 받자온 하교를 회상하고 종국의 중함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수레를 재촉하여 이곳에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신은 감히 하나하나 조진(條陳)하겠습니다.
아! 내일은 바로 소신이 정성 왕후(貞聖王后)를 친영(親迎)한 날입니다. 승환(承歡)하던 때의 일을 추억하며 당초에는 먼저 휘령전(徽寧殿)을 전알(展謁)하고 전작(奠酌)하려 하였으나 뜻밖에 건원릉(健元陵)에 일이 있어 삼군(三軍)을 생각하고 특별히 중지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아뢰려고 한 것은 중대한 바가 있으니만큼 어떻게 삼군을 고념(顧念)하겠습니까? 문밖에 와서야 감히 아뢸 바를 기록하였습니다. 동궁(東宮)을 데리고 찾아뵙는 것은 충자(沖子)048) 가 삼년상(三年喪) 이내이기 때문에 평일에는 결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이름을 바루고 주창(主鬯)049) 이 소중하니, 어떻게 데리고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은 재작년에 동궁으로 하여금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뒤를 삼으려고 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청컨대 아뢰겠습니다.
지금 동궁의 명칭은 바로 명나라의 건문(建文)의 고사(故事)050) 를 따른 것이었으나, 그 후에 생각하니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가 승통(承統)한 뒤로는 소목(昭穆)이 정정(正正)하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이후로 대대로 서로 승계하였습니다. 신은 지금 두 세자를 두었는데 효장이 아무리 형이라 하더라도 사도(思悼)가 무고하였더라면 효장은 순회 세자(順懷世子)051) 와 소현 세자(昭顯世子)052) 가 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세가 이러하니 충자(沖子)로 하여금 효장을 이어 장통(長統)을 순승(順承)하게 하는 것이 의리에 당연합니다. 사도는 위호(位號)를 회복하고 묘우(廟宇)를 설치한다면 가위 곡진(曲盡)하다 할 것이니, 그 어찌 감히 딴 의논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무슨 난편할 사단이 있겠습니까? 또 이 일은 지금 근본을 바루지 않았다가 이 뒤에 다시 사사(邪辭)·괴설(怪說)로 우리 방국(邦國)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을 때에는 세신(世臣)이 된 도리에선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일은 비록 송(宋)나라 범진(范鎭)의 충성053) 으로도 말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아! 신축년054) 의 건저(建儲)와 대리(代理)는 이미 국조(國朝)의 고사가 있었는데도 신절(臣節)이 없는 죄과로 몰았는데, 더구나 이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으로 사도의 장일(葬日)에 신이 특별히 몸소 그 신주(神主)를 써서 뒤에 오는 신하들로 하여금 감히 용의(容議)치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역시 세상 일을 알기가 어려워 그러한 것이오나 이러한 몇 가지 일은 역시 절목상(節目上)의 일에 불과합니다. 신이 재작년 이후 주야로 마음속에 뻗치는 것이 있어 오늘날 벌떡 일어나서 이곳에 와 전알하게 된 것입니다. 대소 신민들은 반드시 이르기를, ‘이는 정성 왕후가 생각나서 온 것이라’고 할 터인데, 신이 비록 불효 불충하오나 어떻게 정성 왕후를 앞에 하고 종국을 뒤로 하겠습니까? 마음속에 뻗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후일에 제 11실(室)의 위패(位牌)에는 손(孫)이라 일컬을 자가 없을 것이고, 소자에게는 자(子)라고 칭하는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 3백 년 종국이 신의 몸에 이르러 그 계통을 중절(中絶)하게 된단 말입니까? 신이 지금 하지 않는다면 후일에는 더욱 말할 나위가 없고 장래에 필시 해괴한 일이 있을 터이니, 그렇게 된다면 열성(列聖)의 마음에는 어떠하겠으며, 소자 또한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 뵙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매 신은 먼저 죽고 싶을 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막중한 태실(太室)이 소자에 이르러 중절하게 되었습니다.
아! 척강(陟降)하시는 영령께서 그 후곤(後昆)이 있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더구나 보략(譜略)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기왕 있는 바에야 세계(世系)의 한 줄[行]이 지금 비어 있는데도 그것을 바루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웃 나라에서 듣도록 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그 근본이 바르지 못하면 일마다 구애(拘碍)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후일에 묻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두 세자가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맏이를 따라 계승하였다고 한다면 내세울 만한 말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 일을 하지 않았다가 만일 생각지 못한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종국에는 어떠하며 소자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아! 소신의 심기(心氣)로 지금에 아뢰지 않는다면 나라 일이 어찌 되겠습니까? 또 꿈속에서 받자온 하교를 또 앞으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불효인 것이니, 이에 소자가 벌떡 일어나 달려와서 아뢴 것입니다. 이는 신하에게 순문(詢問)할 것도 아니고 고례(古例)를 널리 상고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동궁과 함께 행례하고 특별히 대신과 2품 이상과 삼사를 진전(眞殿)의 문 밖에 불러 이 뜻을 선유하고 충자 산(祘)으로서 효장의 뒤를 삼은 것입니다. 먼저 보략에다가 효장과 충자에게 연달아 ‘사(嗣)’자를 쓰면 이 뒤로는 아마 중절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지금 동궁을 데리고 휘령전(徽寧殿)에 가서 이 뜻을 알리고 또 함께 육상궁(毓祥宮)에 가서 행례하며 다음에는 효장궁에 가서 충자로 하여금 그 묘우에 절하게 하고 자식의 도리를 닦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신이 친히 글을 지어 대신을 보내서 종묘와 사직에 고유(告由)하겠습니다. 이 이후로는 종통(宗統)이 중절하는 한탄이 없을 것이고, 해동(海東)에는 반석과 같은 튼튼함이 있을 것입니다. 또 충자로 하여금 사도의 묘우에 소생(所生)의 도리를 다하게 한다면 충자에게도 아마 유감이 없을 것이며, 후폐를 막고 세신(世臣)을 안보하는 데에도 양득(兩得)이 될 것입니다. 주사(奏辭)가 여기에 미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보기를 마치자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와 영부사(領府事) 신만(申晩) 등이 일제히 아뢰기를,
"이는 나라의 중대한 일인데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셨으니, 아래에 있는 자가 어찌 감히 용의(容議)할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어 세손에게 이르기를,
"일후에 여러 신하들이 혹 이 일로 말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그른 일이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군자이냐, 소인이냐?"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소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우사 충자의 오늘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종사의 복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신간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소중한데 오늘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선정(先正)의 정론이 있는데, ‘조손간에 곧바로 계통하여도 예의(禮意)에 가합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도 본래 선정의 의논을 주장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의 의논은 나도 알고 있으나 국가의 일이란 반드시 이처럼 원만하고 온전하여야만 광명 정대하여 후폐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이 늘 전일의 일에 대하여 어찌 비통한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일후에 혹 신 등에게 지적하여 물으신다면 신 등이 장차 어떻게 대답하면 되겠습니까? 주상께서 한번 명백하게 하교하신 연후에라야 할 말이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이 이미 알고 있거늘, 어찌 다시 말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동궁께서 일후에 혹시 물으신다면 전하께서 하교하시지 않으신 일을 신 등이 어찌 감히 말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의 조모와 저의 어미가 있는데 어찌 모를 것인가?"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의 이 말은 일신의 화복을 위함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일에 영상에게 서운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오늘의 말은 가히 참다운 충신의 말이라 하겠다."
하고, 이어 고유하였던 어제문(御製文)을 사각(史閣)에 보관하라고 명한 다음 반교(頒敎)를 사신(詞臣)에게 명하지 않고 어제문으로 중외에 반시(頒示)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0책 10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58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왕실-궁관(宮官) / 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
- [註 047]용어(龍馭) : 임금의 승하.
- [註 048]
충자(沖子) : 왕세손.- [註 049]
주창(主鬯) : 울창주(鬱鬯酒)를 맡았다는 뜻으로, 울창주는 종묘(宗廟)에 제사지낼 때 태자(太子)가 올리게 되어 있음. 곧 태자를 의미하거나 임금의 후사(後嗣)를 이었음을 뜻함.- [註 050]
건문(建文)의 고사(故事) : 건문은 명나라 태조(太祖)의 장자인 의문 태자(懿文太子)의 아들 혜제(惠帝)의 연호(年號). 태조 다음에 혜제가 손자로서 장통(長統)을 이었는데, 숙부인 연왕(燕王) 체(棣:성조 영락제(成祖永樂帝))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승려(僧侶)가 되어 방랑하였음.- [註 051]
순회 세자(順懷世子) : 명종의 장자.- [註 052]
소현 세자(昭顯世子) : 인조의 장자.- [註 053]
범진(范鎭)의 충성 : 범진은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지간원(知諫院)으로, 인종의 후사(後嗣)가 없음을 걱정하여 속히 건저(建儲)할 것을 청하였는데 면진(面陳)이 하도 간곡하여 눈물이 흘러내리자, 인종이 "경의 충성심은 알고 있으니 기다리도록 하라."는 말만 있을 뿐이므로, 전후 열 아홉 차례나 장소(章疏)을 올리고 1백여 일을 기다렸는데 수염과 머리털이 다 희어졌고, 마침내 복왕(濮王)의 아들 서(曙)를 데려다 황자(皇子)를 삼으니 뒤의 영종(英宗)임.- [註 05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壬寅/上詣昌德宮, 祗謁璿源殿, 王世孫隨之。 行禮訖, 上還御齋殿, 召時原任大臣二品以上三司, 悉至于庭。 上曰: "予爲宗國有處分, 已奏眞殿矣。" 因以所奏之文, 示諸臣。 若曰:
"小臣夙宵微忱, 卽追慕之心也。 近來冞切之中, 萬萬夢想之外, 且當今年, 遙望西雲, 只有慾隨龍馭之意。 而神貎猶若此者, 再昨仲夏以後, 爲宗國煎于中者小弛故也。 然猶有鬱結于心者, 世事難測, 關係至重, 若是泄泄, 悔將何及? 且憶夢中承敎者, 顧宗國之重, 不覺蹶然而起, 促駕來詣。 臣敢一一條陳。 噫! 明日卽小臣親迎貞聖之日也。 追憶承歡時事, 初欲先展謁奠酌徽寧, 料表有事健元陵, 爲三軍特令停止。 今日欲奏, 所重在焉, 何敢顧三軍哉? 來詣門外, 敢記所奏。 率東宮拜見沖子, 以其三年之內, 故常日則闕禮矣。 今日正其名重主鬯, 何不率來? 再昨年, 臣意使東宮, 爲孝章後, 而未遂其志矣。 臣請陳之 今者東宮之名, 雖遵皇明 建文故事, 伊後思之, 成祖文皇帝承統之後, 昭穆正正, 自高皇帝後, 世世相承。 臣今有二世子, 孝章雖爲兄, 思悼若無故, 則孝章不過爲順懷ㆍ昭顯。 今則事勢如此, 使沖子嗣孝章, 順承長統, 義理當然。 思悼則復號置廟, 可謂曲盡, 其何敢他議, 亦豈有難便之端哉? 且玆事, 今不端本, 此後更有邪辭怪說, 亂我邦國者, 於爲世臣之道何哉? 玆事雖宋 范鎭之忠, 其言誠難。 噫! 辛丑建儲代理, 己有國朝故事, 而亦驅於無臣節之科, 況此事乎? 若此故於思悼葬日, 臣特自書其主, 使後之臣, 莫敢容議。 此亦世事難知者然, 卽此數事, 亦不過節目間事。 臣之自再昨年後, 夙宵亘中, 今日蹶然而起, 來詣展謁者。 大小臣民, 想必曰, ‘是感貞聖來’, 臣雖不孝不忠, 豈敢先貞聖而後宗國乎? 亘于中者有二焉。 一則於他日, 將無稱孫於第十一室之位, 於小子亦無稱子之位。 嗚呼! 三百年宗國, 至臣身而中絶其統乎? 臣今不爲, 他日尤無可言者, 將來必有怪駭之事, 若此於列聖之心何, 而小子亦將何顔歸拜乎? 思之及此, 臣欲先溘然者也。 一則莫重太室, 至小子而中絶。 嗚呼! 陟降其曰有後昆乎? 況譜略無則巳, 旣有之後, 世系一行, 今闕而未修正, 亦豈可使聞於隣國? 此正其本未正, 隨事掣肘者也, 雖於他日, 有所請者, 若曰有二世子而皆早世, 故隨長以繼云爾, 則其可有辭。 今不爲此, 若有意外之事, 於宗國何, 於小子何? 嗚呼! 以小臣之心氣, 及今不奏, 國事何國事何? 且思夢中承敎, 又將泯默, 此亦不孝, 此小子蹶然而起, 來詣以奏者也。 此非詢問於下者, 亦非博古例者, 故與東宮行禮, 特召大臣二品以上三司於眞殿門外, 宣諭此意, 以沖子祘爲孝章之嗣。 先就譜略, 以孝章與沖子, 連書嗣字, 此後其可無中絶之事矣。 臣今仍率東宮, 詣徽寧諭此意, 且率往行禮於毓祥宮, 次詣孝章宮, 令沖子拜其廟修子道。 而小臣將親製其文, 遣大臣告于廟社。 自此以後, 宗統無中絶之歎, 海東有磐石之固。 亦使沖子, 於思悼廟盡所生之道, 則於沖子, 庶可無憾, 而杜後弊保世臣, 其亦兩得。 奏及於此, 涕沾于衫矣。" 諸臣奉覽訖, 奉朝賀兪拓基、領府事申晩等齊聲曰: "此國之重事, 斷自宸衷, 在下者何敢容議乎?" 上仍謂世孫曰: "日後諸臣, 或有以此爲言者, 則是乎非乎?" 世孫對曰: "非矣。" 上曰: "然則君子乎小人乎?" 世孫對曰: "小人矣。" 上顧史官曰: "爾等詳記之可也。" 鳳漢曰: "天若祚宋, 而沖子今日之心不變, 則宗社之幸也。" 上曰: "君臣之間, 貴相知心, 而今日聞此, 可以知心矣。" 鳳漢曰: "先正有定論, 以爲祖孫直爲繼統, 可合禮意。 臣之愚見, 本主先正之論矣。" 上曰: "先正之論, 予亦知之, 而國家事, 必也如此圓全, 然後光明正大, 可無後弊矣。" 鳳漢曰: "臣每於前日事, 豈無悲痛之心? 而日後若或指問於臣等, 則臣等將何以對之乎? 自上一番明白下敎, 然後可以有辭矣。" 上曰: "東宮旣已知之, 何必更言乎?" 鳳漢曰: "東宮日後若或問之, 殿下不爲下敎之事, 臣等豈敢言之乎?" 上曰: "渠之祖母與渠母在, 豈不知之乎?" 鳳漢曰: "臣之此言, 非爲一身禍福也。" 上曰: "予於平日, 不無有憾於領相, 今日之言, 可謂眞忠臣矣。" 仍命以所告御製文, 藏之史閣, 頒敎不命詞臣, 命以御製文, 頒示于中外。
- 【태백산사고본】 70책 10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58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왕실-궁관(宮官) / 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
- [註 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