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명·이석재 등에게 《사기》의 무제 본기를 읽게 하다
임금이 유신(儒臣) 홍낙명(洪樂命)·이석재(李碩載) 등에게 명하여 《사기(史記)》의 무제 본기(武帝本紀)를 읽게 하였다. 임금이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일편(一篇)에 단지 봉선(封禪)에 대한 일만 기록하였구나."
하니, 이석재는 인품이 좀 오활한 편이고 또 무제기(武帝紀)를 저소손(褚少孫)이 보찬(補撰)했다는 것을 모르고서 경솔하게 대답하기를,
"이는 사마 천(史馬遷)이 사감(私憾)을 품고 무제를 비난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그런가?"
하니, 홍낙명이 말하기를,
"옛 사람도 또한 사기(史記)를 비방한 역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승지 김화진(金華鎭)이 말하기를,
"인신(人臣)으로서 군주에게 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이렇게 비방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무제는 선정(善政)을 많이 베풀었다. 윤대(輪對)의 조서(詔書)253) 와 현량과(賢良科)에 관한 것은 모두 빼고 기재하지 않았으니, 인신으로서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는가? 옛날의 역사도 오히려 이러한데 더구나 지금의 역사는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하고, 한원(翰苑)을 칙유(飭諭)하는 글을 지어서 내리고 이를 사관(史館)에다 걸어두게 하였다.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사신(史臣)이 비록 사의(私意)를 품고 사서(史書)를 짓더라도 백세(百世)의 공안(公眼)은 조마경(照魔鏡)과 같은 것이니 어떻게 도피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한림 조준(趙㻐)이 나아가 말하기를,
"왕(王)의 말씀은 박절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조마(照魔)라는 두 글자를 인유(引喩)한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고 또 사신(史臣)을 대우하는 도리도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한림이 말한 적은 직분에 의거하여 아뢴다는 의의인 것이니, 내가 그대를 위하여 고치겠다."
하고, 이어서 조마(照魔)라는 한 구어(句語)를 깎아 없애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반고(班固)가 찬술한 무제기(武帝紀)를 가져다 읽으라고 명하고 나서 사신(史臣)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사마천(司馬遷)과는 같지 않구나. 사마천이 기록한 것은 하나의 광패(狂悖)스런 전기(傳記)이다. 그대는 사필(史筆)을 잡고 있으니, 사관이 된 사람은 의당 이와 같이 해야 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5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
- [註 253]윤대(輪對)의 조서(詔書) : 윤대는 서역(西域)의 소국(小國)의 이름.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이곳을 점령하여, 흉노(匈奴)를 제압하고자 했는데, 말년에 와서 포기하였다. 곧 정화(征和) 4년(B.C 89)에 상홍양(桑弘羊)이 이곳을 개발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군사를 보내 지킬 것을 건의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무제는 왕년의 정벌(征伐)정책이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었음을 뉘우치고, 백성을 휴식시키고 농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조서(詔書)를 내렸음.
○乙巳/上命儒臣洪樂命ㆍ李碩載等, 讀《史記》武帝本紀。 上怪之曰: "一篇只記封禪事矣。" 碩載爲人踈坦, 又不知武帝紀之爲褚少孫所補, 率爾對曰: "此馬遷挾私憾而譏武帝也。" 上大驚曰: "然乎?" 樂命曰: "古人亦以爲謗史也。" 承旨金華鎭曰: "人臣雖獲罪於其君, 豈敢誹謗如此乎?" 上怒曰: "武帝多善政。 如輪對之詔, 賢良之策, 皆闕而不書, 人臣乃敢爾耶? 古史猶如此, 況今之史乎?" 仍製下翰苑飭諭文, 命揭于史館。 其文略曰: "史臣雖挾私意而作史, 百世公眼, 若照魔鏡, 焉可逃也?" 翰林趙㻐進曰: "王言不宜迫切。 照魔二字。 引喩恐不襯, 非待史臣之道也。" 上默然良久曰: "翰林所言執藝之義, 吾爲汝改之。" 仍刪照魔一句語。 頃之取班固所撰武帝紀, 命讀之, 顧謂
【史臣曰: "與馬遷不同矣。 馬遷所紀, 一狂悖傳也。 汝秉史筆, 爲史官者, 當如是也。"】
-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5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