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13일 을해 2번째기사 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이미 훙(薨)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07) ·무인년108)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한번 나경언(羅景彦)이 고변(告變)한 후부터 임금이 폐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유언 비어가 안에서부터 일어나서 임금의 마음이 놀랐다. 이에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하고, 이어서 동궁의 대명(待命)을 풀어주고 동행하여 휘령전(徽寧殿)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으나 세자가 병을 일컬으면서 가지 않으니, 임금이 도승지 조영진(趙榮進)을 특파(特罷)하고 다시 세자에게 행례(行禮)하기를 재촉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휘령전(徽寧殿)으로 향하여 세자궁(世子宮)을 지나면서 차비관(差備官)을 시켜 자세히 살폈으나 보이는 바가 없었다. 세자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四拜禮)를 마치자, 임금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 왕후(貞聖王后)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하고, 이어서 협련군(挾輦軍)에게 명하여 전문(殿門)을 4, 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摠管) 등으로 하여금 배열하여 시위(侍衛)하게 하면서 궁의 담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궁성문을 막고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으니, 비록 경재(卿宰)라도 한 사람도 들어온 자가 없었는데, 영의정 신만(申晩)만 홀로 들어왔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扣頭]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신만과 좌의정 홍봉한, 판부사 정휘량(鄭翬良), 도승지 이이장(李彛章), 승지 한광조(韓光肇) 등이 들어왔으나 미처 진언(陳言)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 대신 및 한 광조 네 사람의 파직을 명하니, 모두 물러갔다. 세손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金聖應) 부자(父子)에게 수위(守衛)하여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이때 신만·홍봉한·정휘량이 다시 들어왔으나 감히 간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 역시 감히 간쟁하지 못했다. 임금이 시위하는 군병을 시켜 춘방의 여러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는데 한림(翰林) 임덕제(林德躋)만이 굳게 엎드려서 떠나지 않으니, 임금이 엄교하기를,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史官)이 있겠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붙들어 내보내게 하니, 세자가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이에 전문(殿門)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사서(司書) 임성(任晠)이 말하기를,

"일이 마땅히 다시 전정(殿庭)으로 들어가 처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 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暎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世孫)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8책 99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01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上幸昌德宮, 廢世子爲庶人, 自內嚴囚。 初孝章世子旣薨, 上久無嗣育, 及世子誕生, 天資卓越, 上甚愛之。 十餘歲以後, 漸怠於學問, 自代理之後, 疾發喪性。 初不大段, 故臣民冀其克瘳矣。 自丁丑戊寅以後, 病症益甚, 當其疾作之時, 殺宮婢宦侍, 殺後輒追悔。 上每嚴敎切責, 世子疑懼添疾。 上御慶熙宮, 兩宮之間, 轉成疑阻, 且與閹寺妓女, 遊嬉無度, 專廢三朝之禮, 上意不合, 而旣無他嗣, 上每爲宗國之憂矣。 一自景彦告變之後, 上決意欲廢, 而未忍發矣, 忽有飛語, 從中而起, 上意驚動。 乃幸昌德宮展拜于璿源殿, 仍解東宮胥命, 使之同行禮于徽寧殿, 世子稱疾不行, 上特罷都承旨趙榮進, 更促世子行禮。 上仍向徽寧殿, 過世子宮, 差備審察, 無所見。 世子祗迎于集英門外, 仍爲隨駕, 詣徽寧殿。 上行禮畢, 世子行四拜禮于庭中畢, 上忽叩掌下敎曰: "諸臣亦聞神語乎? 貞聖王后丁寧謂予曰, ‘變在呼吸之間。’ 乃命挾輦軍, 牢塞殿門四五匝, 又令摠管等排侍, 向宮墻露刃。 攔宮城門, 吹角會軍護衛, 禁人出入, 雖卿宰無一人入來者, 獨領議政申晩入來。 上命世子伏地脫冠, 徒跣扣頭, 仍下不忍聞之敎, 促其自裁, 世子扣額血出。 申晩、左議政洪鳳漢、判府事鄭翬良、都承旨李彛章、承旨韓光肇等入來, 未及陳言。 上命罷三大臣及韓光肇, 四人皆出。 世孫入來, 脫冠袍伏于世子後, 上抱送于侍講院, 命金聖應父子, 守衛毋得復入。 上持劎連下不敢聞之敎, 促東宮自決, 世子欲自經, 爲春坊諸臣所解。 上仍下廢爲庶人之命。 時申晩洪鳳漢鄭翬良復入, 不敢諫, 諸臣亦不敢爭。 上使侍衛軍兵, 驅出春坊諸臣, 獨翰林林德躋牢伏而不去, 上嚴敎曰: "廢世子, 豈有史官?" 使人扶掖以出, 世子扶德躋衣, 哭而隨出曰: "爾亦出去, 余將疇依?" 乃出殿門, 問于春坊諸僚, 事將奈何? 司書任晟曰: "事當復入殿庭, 以待處分。" 世子哭而復入, 伏地哀乞, 請改過爲善。 上敎愈嚴, 微陳暎嬪之所告, 暎嬪卽世子誕生母李氏, 而有所密告於上者也。 都承旨李彛章曰: "殿下以深宮一女子之言, 動搖國本乎?" 上震怒, 命亟正邦刑, 旋寢其命。 遂命世子幽囚, 世孫倉皇入來。 上命嬪宮世孫及諸王孫, 送于左議政洪鳳漢第, 時夜已過半矣。 上乃下傳敎, 頒示中外, 傳敎史官諱而不敢書。


  • 【태백산사고본】 68책 99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01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